'사건의 문학' 성찰적 글쓰기 ... 강수영

2014.07.06 05:48

박봉진 조회 수:583 추천:20


[중앙일보(미주) 평론 당선작(5/20/14)]

'사건'의 문학, 성찰적 글쓰기 / 강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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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필, 부딪치며 쓰기

광섭의 「수필문학소고」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무심히 생활주위의 대상에, 혹은 회고와 추억에 부딪쳐 스스로 붓을 잡을 때 수필은 제작되는 것이다(인용자 강조).

필은 “붓 가는 대로” 쓰는 것이라는 구절로 유명한 이 글에서 김광섭은 수필문학은 “탁마된 세련과 각고의 노력”을 들여야 하는 것으로 단순한 기록에 머물러선 안 된다고 한다. 김광섭에 따르면 “붓 가는 대로” 쓴다는 것은 아무 생각 없이 쓰는 것이 아니라, 시나 소설, 희곡 등 다른 장르와 달리 논리적 의도나 의식적 동기를 배제한다는 뜻이다. 수필은 또 “붓 가는 대로” 쓰기 때문에 “개성적이며 심경(心境)적이고 경험적”이라고 한다. 이러한 수필은 ‘무형식의 형식’이 특징이다.

;“붓 가는 대로”, 즉 무형식의 형식으로 쓰는 수필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정답을 찾기란 어렵겠지만, 김광섭의 글은 한 가지 길을 제시해주고 있다. 앞에 인용한 대목의 강조된 부분을 보자. 김광섭은 수필이 개성적이기 위해선 무엇보다 이 “부딪침”1)이 있어야한다고 한다. 대상과 추억에 부딪치는 것이 수필의 동력이다. 수필의 화자는 객관적 대상뿐 아니라 심경, 즉 추억과 기억의 이미지에 부딪친다.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 사물과 자연의 풍경, 유년의 추억과 마음 저 밑바닥에 꽁꽁 묻어둔 상처들을 어느 날 문득 조우할 때 수필의 계기가 마련된다. 어떤 요구나 계획된 의도가 아닌, 부딪침에서 “스스로” 나온, “아무것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평정한 마음으로 마치 먼 곳의 그리운 동무에게 심정을 말하듯이”, 즉 “붓 가는 대”로 글이 시작된다.

부딪침은 하나의 ‘사건’2)이다. 사건은 역사적 시공간에서 새로운 것이 출현하는 방식이다. 사건은 모든 의미화 혹은 개념화 과정에 선행된 구체적 현상이자 ‘해프닝’이다. 우리의 삶은 이런 사건들로 시작해서 끝난다. 탄생 그 자체가 이미 사건이며, 성장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한 인생의 사건들이다. 생의 종착역, 죽음도 하나의 사건이어서 우리는 한 존재의 사라짐을 애도하는 예식을 치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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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은 기본적으로 사건을 의미화 혹은 재현하는 과정이다. 시나 소설, 희곡이 사건을 허구적으로 재구성한다면, 수필은 사건, 즉 부딪침의 해프닝에서 촉발되는 자아의 진솔한 반응을 담는다. 자아가 경험하는 온갖 부딪침을 있는 그대로 언어로 옮기는 문학이 수필이다. 그래서 김광섭은 수필은 어디에서 어느 때나 인간사회에는 반드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장르라고 한다.

필다운 수필에는 부딪침의 사건이 있어야 한다. 그 대상은 ‘타자’이다. 현대철학에서 ‘타자’는 나를 포함한 모든 대상을 의미한다. 남이라는 뜻의 ‘타인’과 달리 ‘타자’는 대상, 신과 자연 등 나 아닌 모든 것뿐 아니라, 내 안의 타자, 즉 무의식까지도 포함한 개념이다. ‘타자’개념이 성립하려면 다른 한쪽에 ‘나’라는 개념이 필요하다. 이 ‘나’는 누구인가? 기존 수필에서 화자인 ‘나’가 서정적 화자로서 정서와 사고를 독립적으로 이끄는 동일성의 자아로 이해되었다면, 이 글에서 조명하려는 ‘타자’의 반대 항으로서의 ‘나’는 ‘주체’로 구성되어간다. 어떤 실체나 고정점에 정박하지 않은, 언제나 구성되는 과정 중에 있는 주체는 내부적으로 (의식과 무의식으로) 분열되어있는 불안정한 존재이다. 하지만, 이 ‘나’는 불안정하기 때문에 오히려 뜻밖의 만남이나 사건을 통해 자신을 능동적으로 바꿀 가능성이 있다.

상이나 심경, 추억 등의 부딪침을 통해 ‘나’는 “붓 가는 대로” 글을 써나가는 과정에서 변화하게 된다. 김광섭의 「소고」를 다시 읽으면서 우리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진실을 만들어가는 불완전하지만 열린 주체로서의 성찰적 ‘나’라는 화자를 수필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이제 수필은 주체가 ‘타자’와의 조우를 통해 사물과 세상을 향한 성찰적 시각을 얻는 ‘사건’이 일어나는 문학적 ‘장소(place)’가 된다.

딪침의 ‘사건’과 성찰적 ‘나’로서의 화자 개념은 특히 재미한국수필을 새롭게 읽을 비평적 지평을 제공한다. 재미 한국수필은 대체로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상실감을 토로하거나 이민경험을 기록하는데 그치는 문학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적지 않은 작가들이 낯선 시공간에 놓인 이민주체의 부딪침과 성찰적 변화를 조명해 왔다. 이민생활의 부침을 겪는 주체에게는 이식된 땅, 타향뿐 아니라 두고 온 고향까지도 낯설어 진다. 낯선 경험은 물론 타향살이에서만 비롯되진 않는다. 삶은 본원적으로 낯설다. 탄생의 순간 터져 나오는 울음소리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생경함을 표현한다. 어떤 삶이라도 본래 낯선 것이라면, 이민주체는 그 낯선 삶을 가장 낯선 방식으로 살아간다고 볼 수 있다. 이 낯섦이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붓을 잡게” 만든다.

민주체는 늘 ‘타자’와 부딪친다. 이들의 ‘타자’는 낯선 이방(異邦)의 삶 속에서 만나는 사람, 사물, 어떤 상황일 때도 있고, 내면 자아일 때도 있다. 어떤 것이든 이방인으로서 살아갈 때 주체는 삶에 대한 본원적 소외와 이질감, 내면적 갈등과 변화의 첨예한 현장에 놓이게 된다. 이 글에서는 박봉진의 「날개」와 정옥희의「싼페드로 항구가 여는 아침」, 두 편의 수필을 꼼꼼히 읽으면서 이민주체가 낯섦과 마주하는 방식 그리고 그 낯선 부딪침을 통해 어떻게 화자가 성찰적 주체로 변해 가는지 살펴볼 것이다. 낯선 만남 앞에서 “스스로 붓을 들어” 수필을 쓸 때 시나 소설을 쓰는 것보다 더 효과적으로 ‘나’를 변화시킬 수 있다.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분석의 대상이 된 ‘나’는 자아와 세상을 성찰적 시각에서 바라볼 위치를 얻기 때문이다.

2. 박봉진의 「날개」

봉진의 「날개」는 낯선 대상과의 부딪침으로부터 저절로 흘러간다. 하지만, 그 자연스러움은 단순하지 않다. 화자는 어느 날 오후 예기치 않은 대상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선입견 탓에 연달아 일어난 착각을 반성하게 된다. 화자가 새를 날려 보내면서 자신의 착각에도 날개를 달아 날려 보내기 까지 두 가지 일화가 시청각적 이미지로 정교하게 구성되어 의미를 직조한다.

번째 일화는 외출준비로 부산한 아내의 소리로 시작된다.

내의 외출은 집안에 작은 소란을 피우고 나서 시작된다. 앤만큼의 세월을 살았건만, 분주하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헤어드라이어 돌아가는 소리, 병뚜껑 딸각거리는 소리, 옷장 문 여닫는 소리(...) 종종걸음으로 화장실과 부엌순례를 끝내고도, 몇 차례 현관문이 퉁탕거린 후에야 겨우 바람 분 뒷날처럼 집안이 조용해진다(16쪽).

내가 전면에 등장하거나 화자에게 응대하는 직접적 묘사가 없는데도 화자의 귀에 들려오는 소리만으로도 아내의 존재는 크다. 화자는 옷시중을 해달라거나 차 시동을 걸어달라는 아내의 부탁에 짐짓 불평하고 있지만 종종대며 집 안팎을 분주히 돌아다니는 아내를 은근한 사랑을 담아 묘사한다. 무엇보다 아내가 외출준비하면서 만들어내는 소리를 무심히 지나치지 않고 섬세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에 인용한 글 서두의 아내에 대한 묘사는 우연이 아니다. 아내는 마치 새처럼 움직인다. 새 한 마리가 집안에 들어와 “딸각거리고” “종종”, “퉁탕”거리는 것처럼 들린다. 아내에 대한 이러한 청각적 묘사는 두 번째 일화로 연결된다. 아내가 외출한 뒤 얼마 안 있어 또다시 “토닥거리는 소리”가 난다. 이 소리를 들으면서 화자는 아내가 또 칠칠맞게 뭔가를 빠트린 것으로 넘겨짚는다. 부주의한 아내가 못마땅해서 아내를 들여다보지도 않는다.

런데 그 소리는 없어지지 않는다. 급기야 화자는 참지 못하고 한마디 해주려고 집안으로 들어서는데, 그곳에 아내는 없고, 새 한 마리가 부엌창문에 붙어서 “푸닥거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거실바닥에도 한 마리가 떨어져 있었다. 화자는 두 마리의 새를 보면서 여전히 아내 탓을 한다. 정신없이 나가다 문을 열어놓았다고 넘겨짚는다. 아내는 종종 뒷문을 닫는 것을 잊곤 했다. 그때마다 벌새가 들어와서 한바탕 소란을 일으켰고, 파섬(possum)이 들어왔을 때는 아내가 혼절까지 하지 않았던가. 화자는 지난 일을 들먹이면서까지 아내를 질책한다. 하지만, 화자의 착각이었다.

는 거실의 소파를 돌아서 현관문 쪽으로 갔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영문일까? 현관문은 닫혀 있었고, 새가 들어 왔을 만한 데는 아무 데도 없었다. 나는 내 정신을 의심하며 현관문 손잡이를 잡고 흔들어보고, 손등으로 눈꺼풀을 문질러 보기도 했다(18쪽).

치 환상지대(twilight zone)로 들어간 듯하다. 눈을 비벼 볼 정도로 믿기 어려운 상황을 주체가 맞닥뜨린 것이다. 어떤 대상이 현실구조 바깥에서 들어와 글의 흐름을 바꿔버렸다. 주체가 타자와 마주치는 ‘사건’은 이 장면에서처럼 비현실적인 환상처럼 느껴지면서 현실적 시공간을 낯설게 만든다.

자는 이 환상지대를 통과하면서 성찰적 자아로 변해간다. 아내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킨 심리적 착각과 달리 여기서 화자는 물리적 ‘착각’을 경험한다. 화자의 성찰은 이 착각에서 벗어나 “어쨌든 새를 먼저 집 밖으로 내보내야 했다”는 현실적 판단에 출발한다. 거실바닥에 떨어져 있는 새를 조심스레 손에 쥐어들며 화자는 절대자와 인간의 관계를 떠올린다. 이 상황에서 ‘절대자’인 화자의 손에 잡힌 미약한 존재인 새는 화자가 안전하게 날려 줄 것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새는 마치 절대자의 의도를 헤아리지 못하는 인간과도 같다. 화자는 한때 절대자의 뜻을 모르고 방황했던 자신을 떠올린다. 새에게 압박을 주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다루면서 화자는 좋은 의도를 갖고 있더라도 타인에게 폐를 끼치게 되기도 하는 인간관계의 아이러니를 사색한다.

자는 새를 동쪽으로 날려주고 나서 두 번째 새를 잡으러 들어온다. 종작없이 날라 다니는 새를 잡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화자는 허둥댄다.

실에서 이리저리 나는 통에 몇 번이나 유리창문을 들이받았고 가구 위의 작은 액자들을 넘어뜨렸다. 새의 소란도 파업 궐기같이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것일까. 작은 흔들림 후에 큰 흔들림이 뒤따르는 지진처럼 여기저기서 불쑥거렸다.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19쪽).

를 잡으러 여기저기 부딪히고 소란을 떠는 와중에 알 수 없는 연쇄반응 같은 움직임이 느껴진다. 화자는 멈춰서 상황파악을 한다. 알고 보니 파이어프레스 안에 들어있던 새들의 움직임이었다. 화자의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새가 집안에 들어와 있던 것이다. 이제 모두 여덟 마리의 새가 방안으로 날아 들어와 푸닥거리기 시작했다. 손으로 하나씩 잡기가 어려워져 뜰채로 한 마리씩 잡아 모두 같은 방향인 동쪽으로 날려 보낸다. 길 잃지 않고 서로 잘 만나서 함께 여행을 떠나라는 마음씀씀이다. 여기까지가 두 번째 일화의 끝이다.

들이 어디서 어떻게 들어왔는지 미스터리는 풀린 셈이다. 적어도 현실적 설명은 가능해졌다. 하지만, 비현실적 환상의 경험은 여전히 남아있다. 처음 새의 출현을 목격하던 순간부터 여러 마리의 새들이 방안으로 들어오는 장면까지를 화자의 심리적 상태의 객관화라고 볼 수 있다. 텅 빈 집에 남게 된 화자가 이유 없이 아내를 트집 잡았던 마음이 새들의 출현으로 출렁인다. 화자의 사유는 아내에 대한 속 좁은 착각에서 비롯되어 새들이 불러일으킨 ‘착각(혹은 환상)’을 가로지르고 나면, 수필 전체를 두고 볼 때 얼핏 사족처럼 보이는 한 대목에 이르러 환경론자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점점 투기대상이 되어 사라져가는 자연과 미국 초기의 식민 역사를 아우르면서(19-20쪽) 피와 편견으로 물든 미국 땅의 역사로 종횡무진 확대된다. 새들의 갑작스런 출현이라는 부딪침이 이끄는 대로 붓을 집어 들고 한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넘나들며 무심한 듯 글을 써감으로써 김광섭의 ‘무형식의 형식’을 획득한 것이다.

들이 떠나고 남아있는 집안은 아수라장이 되어있다.

놈들이 파이어프레이스 안의 그을음을 풀무처럼 날갯짓으로 마구 불어냈고, 또 몸에 묻혀서 사방으로 날아다녔기 때문에 거실바닥과 창문틀엔 새까맣게 그을음이 앉았고 매일 아내가 먼지를 터는 아이보리색 가죽소파 역시 온통 그을음을 뒤집어썼다(21쪽).

제 사태는 바뀌어 화자가 아내에게 잘못을 저지른 처지가 된다. 이를 화자는 모두 순전한 자신의 착각 때문이라고 한다. 아내가 느리고 잘 잊는다는 선입견과 새들이 들어온 것을 몰라 신속히 처리 못한 자신의 탓이다. 화자의 깨달음은 개발주의자나 백인정복자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도 상통한다. 모두 선입견과 편견, 상대방에 대한 ‘착각’에서 비롯된 해악이기 때문이다. 이제 화자는 이런 사색의 과정을 거쳐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이 고집스런 착각에 날개를 달아 날려 보낼 준비를 한다.

착각이란 것은 때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가면 좀체 움직이려하지 않는 것이 탈이다. 그러나 마음먹기 따라서는 신속히 날려 보낼 수 있는 가변의 날개를 달 수 있지 않은가. 그 기미가 언뜻 보이기만 하면 나는 지체 없이 그것에 날개를 달아 줄 테다. 후회는 행위에 매여서 끈처럼 뒤따라 올 텐데 그것에 앞서면 모두가 편안할 테니 말이다(21쪽).

3.(중략)

4. ‘사건’으로서의 수필 쓰기

필의 맛은 어떠한 시간에 어떠한 문제나 어떠한 대상에 작가의 기분이 부딪쳐서 표현되는 인간미에 있다. - 김광섭, 「수필문학소고」(인용자강조)

두 수필은 재미한국수필에 기대되는 천편일률적인 소재인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나 상실감, 향수어린 추억 혹은 이민생활의 고된 노동과 박탈감 등을 다루지 않는다. 하지만, 직접 다루지 않았다고 해서 이런 내용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가령 정옥희의 마디가 굵은 손가락을 보자. 정옥희는 자신의 심산했던 이민생활에 대해 신세 한탄을 하지 않는다. 다만, 굵은 손가락 마디가 부끄러워 의사에게조차 보여주기 싫어하는 마음의 표현을 통해 그녀의 고되었던 생활을 독자가 느끼게 해준다. 마찬가지로 박봉진의 글에는 아이들이 타 도시로 떠나 부부만 남은 집이라는 공간이 있다. 새를 잡느라 분주한 한 아버지의 일거수일투족을 상상하는 독자는 어느새 그 빈 공간의 적막함을 느끼게 된다.

봉진과 정옥희의 수필집에 수록된 다른 글들에는 물론 고향의 이야기, 흔한 이민생활 이야기가 담겨있다. 수필집을 다 읽은 독자라면 두 수필가가 다루는 소재의 폭과 깊이를 이미 알고 있으리라. 하지만, 그들의 수필을 접해보지 못한 독자라도 이 두 편의 수필에서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은 것들을 행간에서 읽을 수 있다. 그런 수필이 우리의 마음에 깊게 울림을 준다. 행간을 통해 우러나오는 의미는 수필가의 필력에 달려있다. 두 수필가는 주제를 내세우는 대신 대상과의 부딪침이라는 사건을 충실하게 묘사함으로써 전달한다.

연은 달라도 각자 ‘아메리칸드림’을 이루고 미국을 제2의 고향으로 삼아 살아온 이민 1세대 박봉진과 정옥희의 글은 이미 갈등과 상처를 겪어 지나온, 세월의 풍파를 거쳐 온 사람들의 표면적으로 정적인 삶에도 여전히 부딪침은 계속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꿈을 이룬 인간의 삶에도 부딪침은 일어난다. 사건은 중단되지 않는다. 두 수필작가는 안정된 삶의 표면장막을 찢고 파이어프레스를 통해 집안으로 날아드는 새들과 평안한 교외의 아침 산책길에 의도하지 않게 목격하는 색다른 정체성들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는 섬세한 감수성과 성찰적 사유로 이민주체의 문학적 성취를 한 단계 높여주었다. 이로써 이 두 수필은 ‘사건’이 되었다.

1) ‘부딪치다’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다른 사람이나 사물에, 또는 둘 이상의 사람이나 사물이) 힘 있게 닿아지다”라는 뜻을 담고 있는 ‘부딪다’의 능동적 형태이다. ‘부딪히다’는 이와 달리 수동적 형태이다. 주어의 행위에 따라 능동인지 수동인지 구별해서 사용된다. 김광섭의 글에서 능동적 의미의 ‘부딪치다’가 사용된 것은 따라서 수필작법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2) ‘사건’의 개념은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가 발전시켰다. Alain Badiou, Being and Event (Continum: 2005).

3) 주체’와 ‘타자’의 이론적 개념에 대한 대략적 이해는 현대철학, 특히 정신분석이론에 따른 것이다.

4) 박봉진 수필집, 『언제나 내 마음 바다에 살아』 (2004: 선우미디어)에 수록됨. 정옥희 수필집, 『로우링힐스의 여인들』 (2000: 동화서적)에 수록됨. 이들 글에서 따온 인용문의 철자법, 표기법, 문장구조 등은 모두 원본 그대로임을 밝혀둔다.

5) 직접 인용하면, “수필은 잡다한 모든 것이 그냥 그대로 내용이 될 수 있다 하더라도 단순한 기록에 그쳐서는 우리의 흥미를 긴장시키지 못할 것이다. 거기에는 유머가 있어야 하겠고 위트가 있어야한다. 전자는 무의식적 소성(素性)에서 피는 꽃 같은 미소요, 후자는 지혜와 총명의 샘과 같다. 이 천성(天性)스런 유머와 보석 같은 위트는 수필의 본성과도 같은 것이다. 만일 이러한 속상을 갖추지 못한다면 수필은 그저 무미건조한 생활적, 심경적 기록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김광섭, 「수필문학소고」) 라고 했다. 수필작가들이 곱씹어봐야 할 대목이다.

(원문) 날개 / 박봉진

내의 외출은 집안에 작은 소란을 피우고 나서 시작된다. 엔만큼의 세월을 살았건만, 분주하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헤어드라이어 돌아가는 소리, 병뚜껑 딸각거리는 소리, 옷장 문 여닫는 소리로 이어지고. 옷 입는 것은 혼자서 하는 줄 알았더니 무슨 패션이 그런가. 옛날엔 생명이 떠난 사람에게 옷을 거꾸로 입혔다는데, 옷 단추를 뒤쪽에 달아놓고 멀쩡한 사람 옷 시중들게 하더니 자동차의 발동을 걸어 놔 달랬다. 종종걸음으로 화장실과 부엌순례를 끝내고도 몇 차례 현관문이 퉁탕거린 후에야 겨우 바람불은 뒷날처럼 집안이 조용해졌다.
럴 때 나는 뒤뜰에 나가있기를 좋아한다. 일 년 중 낮이 길어져가는 봄날 늦은 오후, 집과 울타리 옆의 큰 나무들이 땅 바닥에 그늘을 깔기 시작했고, 지붕위의 빨간 벽돌 굴뚝에는 극지의 오로라처럼 사광(斜光)의 빗금이 눈을 부시게 하고 있었다. 나는 나날이 녹색을 더해가는 자두나무와 대추나무 그리고 포도나무 시렁을 돌아서 새로 옮긴 화초며 제법 키를 키운 도마도와 오이 모종을 돌아볼 참이었다. 이것들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심어놓았다고 저절로 바라는 만큼 커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익어가는 것은 아니다. 스피링쿨러의 물은 잘 닿고 있는지 수시로 살펴줘야 하고, 제 때에 지주를 꽂아서 식물이 쓰러지지 않게 매어주며, 겉 자라는 순은 쳐주어야하는 것은 내 몫이다. 아이들이 다 떠난 후, 둘이서만 사는 집이지만 내겐 늘 돌봐야하는 식물이 있어왔다.

내가 집에서 나간 지 제법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토닥거리는 소리가 집안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필경 빠뜨린 것을 뒤 늦게 알아차리고 그것을 챙겨가려고 들린 것이리라. 그리고 또 한참이 지났는데 딸각거리는 소리는 여전했다. 이쯤 되면 차분했던 내 마음도 입에서 쉰 소리를 내게 한다. “원, 허둥대는 것은 알아줘야 돼. 어디까지 갔다 온 거유?” 나는 못마땅해 하면서 집안으로 들어섰다. 참 어이가 없었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제비만한 새 한 마리가 부엌창문의 미니 블라인더에 붙어 푸닥거리고 있었다. 거실창밑 바닥에도 기진맥진한 한 마리가 떨어져있었다.

“쯧쯧, 정신없는 사람. 현관문을 열어놓고 나간 게로군.” 전에 살았던 집에서도 뒷문을 닫지 않아 벌새가 날라 들어 소동을 피웠다. 징글맞게 생긴 팟슴 한 마리는 안방 화장실까지 들어와서 그놈과 마주쳤던 아내는 잠시 혼절을 했다. 나는 거실의 소파를 돌아 현관문 쪽으로 가봤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영문일까? 현관문은 닫혀있었다. 새가 날아들어 올만한 데는 아무데도 없었다. 내 정신을 의심하며 현관문 손잡이를 잡고 흔들어보고, 손등으로 눈까풀을 문질러보기도 했다.

쨌거나 새를 먼저 집 밖으로 내 보내야했다. 먼저 거실 바닥에 떨어져있는 놈 쪽으로 갔다. 살며시 날개를 모아 쥐고 배 쪽을 뒤집어봤다. 소아마비에 걸린 아이처럼 가녀린 두 다리가 너무 애처로웠다. 잔뜩 겁을 집어먹고 산초 씨 같은 까만 눈을 굴러댔다. 파르르 떨고 있는 새의 맥박이 내 손바닥에 고스란히 전해왔다. 야생 세계에서 잡힌 놈이 어찌 살기를 바랐으랴 만은, 그래도 이 순간의 새는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내가 절대자와 다를 바 없는 존재로 보였나 보다. 그랬기에 새는 저항을 단념하고 간절히 내게 자비를 호소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내 이십대 때 요양시절의 자화상이었다. 절대자는 사는 길로 인도해주려 했는데 그 때의 내가 그랬고, 지금 이 새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인 듯하다.

를 좀 세게 쥐면 손안에서 압사할 것 같고. 느슨하게 쥐면 빠져나가버리기 때문에 알맞은 장력으로 쥐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인간관계 경영도 어려운가 보다. 나는 새의 날개를 쓰다듬어주면서 어디 부러지거나 다친 데는 없는 가를 살핀 후, 뒤뜰로 나가 새를 동쪽 하늘로 날려 보냈다. 새는 새 물을 만난 잉어가 힘차게 물살을 가르며 헤엄치 듯 허공을 싹싹 가르며 내 시야에서 멀어져갔다.

다음 놈이 문제였다. 거실에서 이리저리 나는 통에 몇 번이나 유리 창문을 들이 받았고 가구 위의 작은 액자들을 넘어뜨렸다. 새의 소란도 파업 궐기 같이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것일까. 작은 흔들림 후에 큰 흔들림이 뒤따르는 지진처럼 여기저기서 풀쑥 거렸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상황파악을 해야 했다. 소란의 진원지는 벽난로 안이었다. 동료 새의 필사적인 저항에 자극되어 그 안에 있던 새들이 탈출을 위해 다투어 거실로 날라 나왔다. 미처 나오지 못한 놈들이 벽난로의 좁은 공간 안을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푸닥거리고 있었다.

희귀한 일이었다. 도합 여덟 마리의 새-. 그 새들은 이동 중인 철새 가족들 같았다. 우리 집의 지붕 위 굴뚝에 걸려있는 햇빛을 보고, 마치 원양선이 등댓불을 보며 내해로 들어오듯 거기를 통해 벽난로 안으로 몰려 들어온 것이리라. 맨손으로 그 새를 잡아낼 수 없었다. 나는 낚시를 다녔을 때 썼던 뜰채로 한 마리씩 안전하게 잡아낼 수 있었다. 해 저문 시간에 새들이 이산가족이 안 되도록 똑 같은 방향으로 날려 보냈다.

들이 날아간 동쪽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나는 알 수 없는 자문(自問)에 발을 옮길 수 없었다. 사람과 새는 공존관계(共存關係)일까? 공생관계(共生關係)일까? 아니면 적대관계(敵對關係)일까? 이 땅의 양심을 자처하는 환경단체 사람들은 야생조류 보호의 목청을 높이고 있다. 그런데 야생조류의 본거지인 산수가 좋은 땅은 일찍부터 사람들의 이속을 채우는 매개물이 되고 말지 않았던가. 그런 곳을 선점해서 주거지로 또는 투기의 대상으로 삼은 후, 점차 촉수를 외곽으로 뻗으며 게걸스럽게 자연 생태계를 잠식해 들어가고 있다. 높은 곳은 깎아내고 낮은 곳은 메우며 길을 내고 관을 연결하고 선을 잇고 있다.

늘 날 생태계가 파괴되는 것은 약육강식의 탓이 아니다. 먹이 사슬은 자연 생태계에서는 항상 균형을 이루는데 사람이 그것을 뒤틀어놓고 엉뚱한 말을 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사람처럼 영악하지 않는 새들은 마음 놓고 먹이를 쪼고, 둥지를 틀고, 알을 부화 할 터전을 잃고 방황하다가 우리 집에 잘못 날라든 것이 아닐까. 병들게 해놓고 약을 처방한들 그것은 악어와 악어새의 공생관계만도 못한 사람과 새의 공존관계 일지도 모르겠다.

러고 보면 1855년 지금의 워싱톤주 땅에 살았던 인디언 쓰와네족 추장 씨아틀이 당대 어느 백인 지도자들 보다 훌륭한 예지 자였던 것 같다. 그 땅을 강압적인 매매 형식으로 취합코자 했던 프랭클린 피어스 대통령에게 조건을 달아 보냈다는 그의 메시지가 내겐 큰 감동으로 남아있다. “당신은 어떻게 하늘을, 땅의 온기를 사고 팔 수 있습니까? 인디언들은 신선한 공기와 물의 거품조차 자기 소유로 여기고 있지 않습니다. 백인들의 도시 광경은 우리들의 눈을 아프게 합니다. 숲 속의 신성한 구석들이 인간들로 인해 손상이 될 때 그것은 생활의 종말이며 죽어가는 것의 시작입니다. 봄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며 벌레들의 날개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이 없고... 쏙독새의 아름다운 울음소리와 연못가 개구리들의 합창을 들을 수 없다면 인간에게 남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들이 한동안 소란을 피웠던 거실 안은 아수라장이 되어있었다. 그놈들이 벽난로 안의 그을음을 풀무처럼 날갯짓으로 마구 불어냈다. 또 몸에 무쳐서 사방으로 날라 다녔기 때문에 거실바닥과 창문틀엔 새까맣게 그을음을 앉혔다. 아내가 먼지를 털곤 했던 아이보리 색 가죽소파는 온통 그을음을 뒤집어썼다. 내 상황판단의 잘못으로 그 소란을 일찍 잠재우지 못했던 것과 아내는 굼뜨고 잊기를 잘 한다는 선입견 때문에 터무니없는 누명을 씌울 뻔 했던 것은 순전히 내 착각에서 비롯됐다.

착각이란 것은 때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가면 좀체 움직이려 하지 않는 것이 탈이다. 그러나 마음먹기 따라서는 신속히 날려 보낼 수 있는 가변의 날개를 달 수 있지 않는가. 그 기미가 얼 듯 보이기만 하면 나는 지체 없이 그것에 날개를 달아줄 테다. 후회는 행위에 매여서 끈처럼 뒤따라 올 텐데 그것에 한 발 앞서면 날려 보낸 새들처럼 모두가 편안 할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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