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유자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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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가을에 생각나는 한 친구 / 수필

2021.07.01 10:58

민유자 조회 수:10

가을에 생각나는 한 친구

 

담 밖에 줄지어 선 돌배나무들이 아직은 기 있고 푸르다. 그럼에도 요 며칠 밤 기온이 꽤 선선하더니 담장 안에 낙엽이 몇 잎 떨어져 있고 그중 하나가 제법 붉게 단풍이 들었다. “어머나! 벌 써!” 낙엽을 집어들고, 곱고 해맑은 얼굴에 구수한 호남 사투리가 인정스럽던 한 친구를 떠올렸다.

 

 그녀는 나보다 10년은 다. 남편의 직장 연수를 위해 엘에이에 6개월 체류하는 동안 이곳에 연고가 없는 관계로 아주 쓸쓸하게 지냈노라 했다. 동부에 있을 때는 한국 사람들이 많지 않아도 좋은 관계를 맺고 재미있게 지냈는데 이곳은 오히려 사람 사귀기가 더 어렵더라는 얘기였다. 교회에서 그 얘기를 듣고 참 미안했다. 모임을 끝내고 나오면서 부군과 함께 식사에 초대했더니 그녀도 반갑게 응했다.

 

 엘에이의 유서 깊은 양식당에서 서로에 관한 많은 얘기를 주고 받았다. 서로의 가족 관계, 골동품을 수집하고 트 하는 취미, 그녀가 종양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기막힌 얘기, 그래서 일밖에 모르던 그녀의 남편이 가족의 소중함을 뒤늦게 깨달은 사연, 사선을 넘나들며 투병하던 절대 고독의 체험을 살려 호스피스를 시작했고, 거기서 은 또 다른 체험들.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를 다 하지 못한 채 우리는 진작 서로 교분을 나누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그녀가 동부로 떠나고 얼마 안 되어 작은 소포와 편지가 날아 왔다. 떠나기 전 식사에 초대해줘서 감사하고, 무엇보다도 아무도 사귀지 못하고 허탈한 마음으로 떠나게 되었는데 아름답게 마무리를 해주어서 좋았다는 내용이다. 내가 작은 보석함을 선물했던 답례로 손수 만든 모시 조각보를 한 점 보내왔다. 그녀가 한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우리는 서로 가끔씩 소식을 주고받으며 간단한 선물도 오갔는데 그럴 때마다 그녀의 사연과 선물은 절절히 나를 감동시키곤 했다.

 

 뉴저지에 살고 있는 그녀의 딸네 집 패티오에는 그녀가 미국에 올 때마다 하나씩 가져온 크고 작은 항아리들이 제법 장독대 모양을 이루게 되었다며 사진으로 찍어서 카드를 만들어 보내왔다. 뚜껑 덮인 소담한 항아리들이 정겹다. 지금은 장을 담글 일은 없지만 항아리 속에 미역이나 건어물 또는 당면 같은 것을 넣어두고 쓰니 좋더라 했다.

 

 그런가 하면 그녀의 시어머님께서 쓰시던 뚜가리라며 내가 자 때 봤던 모래가 드문드문 박힌 독상받이 작은 배기와 아서 둥근 부분이 없어진 수저 하나를 보내왔다. 자기는 손님들을 초대하고 큰 식탁에 음식을 차릴 때 양념장이나 소스를 담아 놋수저와 함께 놓는다고 했다. 그녀는 시어머님이 쓰시던 살림살이를 거의 버리지 않았고 일부러 수집하지는 않아도 기회가 닿는대로 옛것들을 모아둔다고 한다.

 

 한 번은 그녀가 시골에 사는 친척집엘 갔다가 그 동네 어떤 집에 한 가마니들이 떡시루를 보았다. 그 주인이 이제는 쓸 데가 없을 뿐 아니라 거추장스러운 것을 둘 곳도 없다며 깨뜨려 없애려 했다. 너무 아까운 생각에 만류했지만 주위에 아무도 그것을 보존하려 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짐삯을 수월찮이 주고 서울 자기 집으로 옮겨왔다. 깨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테를 굵은 철사로 잘 동여서 응접실에 두었는데 마른 꽃을 담고 유리를 얹어 테이블로 쓰니 누구나 다 부러워하는 귀물스러운 골동품이 되었다 한다.

 

 그녀가 미국 동부에 아들을 보러 왔노라고 카드를 한 장 보내 왔다. 거기서 단풍이 유명하다는 곳에 다녀왔다며 그곳에서 주운 여러 종류의 고운 단풍잎들을 골고루 카드에 넣어서 보내왔다. 빨강, 노랑, 자주, 주홍, 초록의 크고 작은 갖가지 모양의 잎들이 곱다. 단풍이 멀리서 바라보기에는 고와도 막상 집어 들고 보면 온전한 것이 드물다. 그런데 이것들은 놀랍게도 하나같이 흠도 없이 온전하다. 아마도 시간과 정성을 꽤 들여서 수집했으리라.

 

 그 즈음, 나는 노환으로 몇 년째 침상에만 계시는 시어머님을 수발하느라 김에 바람 기억이 가물가물한 상황이었다. 난 아기 돌보듯 노인을 보살피기는 그 자체가 힘들기도 하나 아기를 기르는 것과 달리 정신적인 어려움이 더 있다. 생기를 잃는 피곤함이다.

 

 정작 나를 진하게 감동시킨 것은 낙엽의 예쁜 색과 모양도 놀 라웠지만 그보다는 카드를 열자 풍겨 나오는 안에 갇혀 있던 실 제의 그 향기다. 봉투를 열고 카드를 펼치자 내 코에 스미는 싸아한 마른 낙엽의 풋풋한 내음! 그 생생한 산의 향기라니! 코를 대고 깊은 숨을 배꼽까지 들이마시자 금세 난 가을 산 앞에 서있고 내 눈앞에는 불타는 화려한 단풍이, 정기가 가득 서린 가을산 의 풍경이 펼쳐졌다. 산바람이 나를 휘감아 돌고 내 가슴속의 탁한 찌꺼기들이 모두 날아가버렸다.

 

 며칠을 킁거리며 낙엽 새를 가슴 깊이 들이마시고 색색의 꽃단풍과 아름다운 가을 산의 정경을 떠올리곤 했다. 시간이 지나자 처음에 카드를 열 때처럼 싱싱한 낙엽 냄새가 실제로 나지는 않았지만 나는 이 고운 낙엽들을 잘 배열하여 자에 넣어서 식탁 옆에 걸어두고 늘 바라보았다.

 

 이번 가을엔 작심하고 쓸쓸한 바람 타지 말아야지! 여행도 계 획하고 할 일들도 짜놓고 읽을 책도 정해서 바쁘고 알차게 살아 봐야지! 그런데 먹었던 마음은 어디 가고 낙엽 한 장 주워들고 벌써 철렁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웬일인가? 우선 한동안 잊고 지낸 그리운 친구, 따뜻하고 품격 있는 그녀에게 편지부터 쓰며 마음을 달래야겠다.

https://youtu.be/XyZFZ-s9F-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