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유자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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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짦은 일탈의 긴 여운/여행 수필

2024.05.03 15:01

yujaster 조회 수:75

짧은 일탈의 여운 /민유자

 

  2022 12 4 (일요일) 

간간히 가랑비가 살짝 뿌린다.  엘에이 특유의 겨울 같지 않은 겨울, 초겨울로 접어드는 선선한 날씨다.

일박 이일이라고 하지만 하루도 안되는 번개 여행. 팜스프링스는 거리도 두시간이 되니 부담이 적어 선뜻 나서기에 좋았다. 주에 번씩 줌으로 얼굴을 보는 우리 셋은 아는 보다 모르는 것이 배나 많은, 그러나 평소 우호적인 호감을 갖고 서로 존중해오던 사이다.

오후 두시에 만나서 다음날 정오 경에 돌아올 예정으로 떠났다. 동지가 가까운 요즘은 해가 빨리 지니까 어둡기 오후 4시쯤 목적지에 도착할 예정이다. 허나 엘에이 교통 사정이 그렇듯이 사고가 났는지 얼마 안가서 정체 현상이 나타난다. 서행으로 가던 차가 거의 멈추는 지경이다. 

 

  지루함을 달래려 차례로 돌아가면서 동요를 부르기로 한다. 오랜만에 어려서 즐겨 부르던 동요를 떠올리고 함께 부르면서 타임 캡슐을 타고 순간이동을 한다. 어느새나이야 저리가라! 주름살은 날아가라! 머리는 아니 보인다!” 모르던 아이들로 되돌아가 즐거움과 해맑은 웃음으로 자동차가 들썩 들썩 한다. 

얼마 못가서 우리들의 재고 목록은 고갈되기 시작하여 벌점을 주며 웃는다. 일단 누군가 시작하기만 하면 따라 부를 있는 아는 노래들인데도 누군가 실마리를 잡아내기 전에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육십여년 세월의 두께에 파묻혀 쉽게 찾아내지 못한다.   

주행의 정체현상은 계속되어 우리는 목록의 범위를 넓히기로 한다. 생각나는대로 가곡, 팝송, 가요, 민요를 넘나들며 세월의 더미를 헤집고 보물찾기로 추억을 소환한다. 너무나 오랜만이라 가사가 생각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문화와 풍토, 언어가 낯설고 거친 이곳에 적응하느라 생애를 전심으로 몰두하여  앞만 보고 달려온 우리다. 망각의 너머 아득히 멀어진 기억을 서로  보완해가며 겹겹이 접혀있는 세월의 주름을 펴고 짜깁기를 하다보니 격세지감에 비감이 들기도 한다. 그러다가 빛나던 젊은 날의 많던 파란 기억을 떠올리며 달콤한 정서에 젖기도 한다.

 

  만일, 현실의 일상을 집에 놔두고 떠나온 여행이라는 일탈의 기회가 아니었다면, 음악을 폭넓게 좋아하고 마음이 맞는 친구가 아니었다면, 십년 안짝의 비슷한 연령대가 아니었다면, 같은 한국에서  이민자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죽이 맞고 박자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댄스 스텝처럼 재미와 감동과 흐뭇한 마음의 어우러짐을 맛볼 수는 없었을게다.

보통, 서로 모르는 상대에게서 나와 동질의 성향을 발견하게 되면 반가움에 기쁨이 샘솟는다. 우리는 한국의 서로 다른 고장에서 출생했고 다른 도시에서 자랐으며 미국에 와서도 각자 다른 곳에서  색다른 일을 하며 살아왔다. 그럼에도 한국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같은 시대를 살아온 만으로, 같은 노래의 기억을 공유한다는 사실 만으로 단시간에 녹아붙듯 하나가 된다. 마치 오랜 세월 배를 타고 친밀함이 농밀하게 느껴진다.

 

  어둑어둑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는 다섯시경 도착하여 짐을 푼다. 비는 개였다. 짧은 여행의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 저녁은 맛있는 곳을 찾아가기보다 호텔안에서 해결하기로 합의한다. 기대를 하지 않았더니 생각밖으로 음식 맛이 좋다. 모두 양식도 즐기는 식성이라 좋다. 

직사각형의 수영장이 하나, 크고 작은 원형의 월풀이 일곱, 크리스마스 장식을 예쁘게 해놓았다. 온천의 푸른 물이 우리의 발걸음을 재촉한다. 풍덩! 첨벙! 상현달이 반달을 넘어선 배가 부르다. 온천물에 누우니 높은 팜트리가 늘어선 울타리 안에서 밝은 달이 짓궂은 아이처럼 구름속을 들락날락 숨바꼭질 한다. 구름에 가듯이!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상대에게서 내가 당해보지 않은 경험담을 듣는 것은 값지다. 해가 지고나니 쌀쌀해졌다. 따뜻한 온천수에 몸을 담그고 허심탄회한 진솔한 이야기는 술술 풀려나오고 아름다운 밤과 함께 깊어간다. 

열탕에서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며 냉탕으로, 다시 온탕을 오가며 온천욕을 즐기다가 방으로 돌아와서 따끈한 차를 마신다.

혹시나 하여노래는 즐겁다 제목을 붙인 노래 모음집을 꺼내놓았다. 취향대로 선곡하고 복사하여 3부를 만들었다. 낮에 부르다가 가사를 잊었던 노래도 들어 있다. Amazing Grace, Nella Fantasia, You raise me up, ~~~동무생각, 향수, 가고파~~~구슬비, 나뭇잎 , 낮에 나온 반달~~~, Forster Medley~~~ 친구, 사랑이여, 만남~~~ 찔레꽃, 봄날은 간다 ~~ 장르의 경계 없이 넘나들며 목이 가라앉도록 노래를 부르고 그에 얽힌 이야기들을 나눈다.

 

  어제 저녁 늦게 고로 아침 7:30 기상. 먼저 요가를 시작한다. 사고로 척추를 크게 다쳐 죽을 고비를 넘기고  기사회생 했다는 그녀. 그때 얻은 전문지식으로 십여년을 꾸준히 정진한 결과 사고 이전보다 건강한 몸을 만들었다. 그녀를 온전히 따라 하기가 버겁고 기억할 수도 없지만 몇가지는 확실히 배우고 평소의 게으름에 일침을 맞으며 도전도 크게 받는다. 

땀나게 운동한 후에 온천욕을 한다. 시장기가 들어서 준비해간 빵과 , 군밤 등을 따끈한 차와 함께 먹고 짐을 싸고 출발.

출발지로 돌아오니 점심때다. 목을 많이 써서 그랬는가 뜨끈한 국물생각이 난다. 유명 맛집 ‘Phoholic’ 에서 점심을 맛있게 먹고 이번의 기쁨을 동력으로 다음을 기약하며 푸근하고 충만한 기분으로 헤어진다.

 

 음악의 마력일까?! 누구 앞에서는 입도 벙긋 못하는 노래 실력에다 노래방에는 번도 가본 나다. 그럼에도 깊숙히 가라앉아있던 해묵은 애창곡집을 건져올려서 먼지를 털고 거풍을 시킨 것만으로 마치 오래 더러워졌던 유리창을 말갛게 닦은 듯하다. 머리는 묻고 긁힌 상처를 치유받은 후에 새살로  맑고 시원한 바람을 쏘이는 기분이다. 그렇게 많이 웃고 깨볶듯 재미 시간을 가져본 지가 언제였던가? 부담없이 떠나서 기대 이상의 짭짤한 소득을 안고 돌아온 여행이다. 짦은 일탈이었지만 즐거움의 여운은 같다.

!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