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유자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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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소꿉놀이/ 수필

2024.05.03 16:12

yujaster 조회 수:27

소꿉놀이 / 민유자

 

  한동안 페북도 글쓰기도 뜸했다. 일상의 우선순위에서 저만치 밀려난 때문이다. 

오랜 세월을 건너온 몸은 겉보기에는 멀쩡해도 속에서 일어나는 점진적 변화는 모르는 진행되고 있었다. 생판 낯선 나그네처럼 자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으리라 여겼던 일들이 느닷없이 불쑥 코앞으로 다가섰다. 

 

  남편은 사십대 초반에 달리기를 시작하여 풀코스 마라톤을 십여차례 완주했다. 이십여년을 매일 7마일씩 뛰는 것이 그의 일상이었다. 낙천적 성격에다 , 담배나 잡기를 멀리 하니 건강만큼은 자신있게  관리하고 있다고 믿었다. 나도 씩씩한 남편의 그런 점을 고맙게 생각했다.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위생관념이 철저하다. 펜데믹 이전에도 손을 자주 세밀히 씼고 주변관리를 까탈스럽게  하여 때론 나를 성가시게 한다. 다행히 식성은 좋아서 별로 가리는 편이 아니다. 한식을 고집하지도 않고 외국 음식도 두루 두루 좋아한다.

전문인으로 인정받는 위치에 이르지도 못하고 명성을 얻거나 돈을 많이 벌어 재물이 많지는 않지만 건강만큼은 어느정도 자신있다고 굳게 믿었던 그다. 남의 아픈 사정에는 둔감한 편이라 무정한 일면도 없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육십대 중반에 선고를 받는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넙적다리 안쪽의 작은 멍울이 근육암이라 했다. 근육암은 빠르게 폐로 번지는 나쁜 암이라 한다. 미련하게 기고만장하던 우리는 놀라운 소식을 듣고도 처음에는 뜬금 없는 남의 얘기인양 얼른 수긍을 못하고 오히려 어리둥절 했다.

  

  그 일을 시작으로 건강하던 우리 부부는 주거니 받거니 병원 문턱을 넘나들기 시작했다. 평소에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생겼는지도 모를 문제가 발생한다. 근육암도 그랬지만 어느날 갑자기 망막 박리가 되었다. 그로 인해 수년에 걸쳐 여섯번의 수술을 받았다. 백내장이야 나이들면 거의 누구나 받는 수술이지만 망막 박리는 드물지 않은가? 

나는 무지외반증으로 인해 지간 신경종이 생겼다. 양쪽 발을 수술 받느라 수년을 고생하고 지금도 온전치 못한 상태여서 마음 놓고 걸어다니지 못한다. 그러는 중에 느닷없는 발작적 심한 두통에 혼비백산하며 시달리기도 하고 유방암 수술도 받았다. 

요즘엔 그도 나도 척추 협착으로 통증이 생겼다. 이를 다스리고 허리 주변의 근육을 강화하는 운동에 열심을 내고 있다. 10 초에 한국 방문을 계획했었는데 반갑지 않은 남편의 좌골신경통으로 취소할 밖에 없었다. 이리 되고 보니 이제는 내세울 일이 못되는 병력이 제법 화려하다. 활동 반경도 많이 좁아졌다.

 

  아무리 재주가 좋은 사람이라도 그냥 손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면 컴퍼스를 사용해서 그린 원과 같이 균일한 동그라미를 흠결 없이 그릴 수는 없다. 이날까지 최선을 다하여 옳다고 여기는 길로 열심을 다해 살아온 삶이다. 그러나 생애 전반에 걸쳐 날마다 그려가는 일상의 동그라미는 어딘가는 움푹 들어가기도 하고 다른 곳은 불쑥 나오기도 했을 게다. 나날의 동그라미들은 들어가고 나옴이 서로 교차하여 상쇄될 경우도 있지만 같은 자리에 반복되어 패이거나  혹이되어 자랄 수도 있었으리라.

돌이켜보니 전심으로 노력한다고 좋은 것도 아니다. 욕심도 그렇거니와 열심도 지나치면 화를 부를 있음을 뒤늦게 새삼 깨닫는다.

 

  이즈음 생애 남은 날을 가늠해본다. 백세시대라 하지만 앞서거니 뒤서거니 심심치 않게 부고가 날아들고 주위를 돌아보면 빈자리가 여기 저기 휑하다. 지금도 백세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어쨌거나, 시간은 점점 살같이 빠르게 지나가는데 우리에게 남은 날들이 더더욱 소중한 것은 필요가 없음을 절감한다.. 

옛말에 늙으면 된다는 말이 참말이다. 몸이 맘같지 않다. 일상에서조차 버거운 일이 늘어난다. 이일 저일 접다보니 의욕도 줄고 소침해진다. 마음까지 구겨져 걸핏하면 집안 공기가 난기류에 휩싸이기 쉽다.

이제는 아이처럼 단순하게 생각하고 단출하게 살아야겠다. 단지 소박하게 소꿉놀이를 하자고 마음 먹는다. 길지 않을 소꿉동무와 함께 하는 시간을 성실하게 작은 행복으로 채워가도록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이는 나와 그의 행복을 위해서는 물론이지만, 부모를 염려하는 아들과 딸에게 있는 선물로도, 손자들에게 본을 보이는 그림으로서도, 일석 삼조의 일이 된다고 믿는 나의 선택이고 결론이다. 

그를 위해 좋아하는 된장찌게 하나라도 맛나게 끓여놓으니 충일한 기분으로 자알 먹었다!”라는 소리가 나를 바보처럼 행복하게 한다. 집안의 기류가 변하고 공기의 냄새가 달다.

맑고 투명한 가을 하늘을 우러르며 지난 날을 되돌아본다. 미련하고 모자란 속에서도 오늘이 있음에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무한 감사의 마음이 뭉글뭉글 솟는다.

 

 

  요즘 소꿉동무는 심한 좌골신경통으로 상실감에 젖어있다. 신문을 집어오는 일이나 쓰레기를 버리는 일조차 그의 수족을 대신하게 되었다. 시간도 여력도 없어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페북이나 글쓰기는 저절로 뜸해진 한참 되었다. 세상을 향한 소통은 소꿉놀이를 재미있게 이어가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기도 할테니 시간을 쪼개어 다시 쪽문을 열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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