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소록도]

2007.11.09 09:18

연규호 조회 수:910 추천:106

mundung-sorok
단편소설: 소록도(少鹿島) 길(道)
            The Road to Sorok Island
저자: 연규호,  Kyuho Yun,M.D.
     a member of PEN USA & Korea. 문인협회 회원.

                           1.
전라남도 고흥 반도 끝에 있는 ‘눈망울이 큰, 작은 사슴처럼 생긴 섬’ 소록도-
“아! 문둥병(나병, 천형병, 한센씨 병) 환자들이 사는 곳?”
“그렇습니다. 인간 세계에서 버림받고 외롭고 슬프게 외딴 섬에 갇혀  한을 품고 평생을 그곳에서 살다가 죽어 그곳에 묻힌다는 섬, 소록도. 그리고 그리로 가는 길...나는 지난 10년동안, 정확하게 말하면 1996년 4월 15일 이후, 피 눈물을 흘리며 42회나 소록도를 찾아 갓었습니다. 이른 아침에 경기도 안성을 떠나 충청남도 천안에서 호남선 기차를 타고 전라남도 광주에 도착하여 다시 버스를 타고 순천에 도착합니다. 잠시 쉬었다가 완행 버스를 타고 고흥군 녹동 항구로 가, 작은 여객선을 타고 소록도에 도착하는 이 먼 길이 바로 소록도로 가는 길입니다.”
소록도로 가는 길은 멀고 외로웠기에 길가에 뿌린 나의 눈물만도 태평양을 가득히 채울 것만 같았다.
문둥병 시인, 한하운의 애절한 시, ‘전라도 길’을 오십 번쯤 외우다 보면 나는 어느새 멀리 전라남도 고흥반도의 끝에 있는 녹동 항구에 도착하곤 하였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숨막히는 더위 뿐이더라.//낯선 친구 만나면/우리들 문둥이 끼리 반갑다.//천안 삼거리를 지나도/수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룸거리며/가는 길...//신을 벗으면/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
소록도!
-내가 안성군청 축산계의 말단 직원으로 근무 할 때, 억지로 소록도로 출장을 간 일이 있었는데 솔직히 떨리는 마음이었다.
손과 발이 뭉클어지고 눈이 감긴 문둥병 환자들이 생각 났을 뿐 아니라, “문둥병 환자들은 사람을 죽여 간을 빼어 먹는다고 하더라!”라는 말이 더 더욱 두려웠었다.
14시간이나 걸려 도착한 소록도는 나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아름다운 섬과 바다”였기에 나는 “아니? 소록도는 지상의 낙원이구나!”라고 감탄을 하였었다.
녹동 항구에서 불과 600미터 떨어진 이 섬에는 향나무, 황금 편백, 노송, 삼나무, 히말리야시다,동백, 팔손이 나무, 치자 나무,피라칸타, 금목 나무등 백여종이 넘는 관상수가 빽빽이 들어 서 있었으며 말고 깨끗한 청정 해역에는 도미, 도다리, 농어, 새우, 문어, 피조개등이 대량으로 서식하며 남쪽 해안에는 150여 미터의 해수욕장이 있어 나는 순간적으로 그 흉측한 문둥병을 잊고 있었다.
섬 입구에 서있는 순라탑(殉癩塔, 6.25 전쟁중에 죽은 문둥병 환자들을 기념하여 세운 탑.),애환의 추모비(해방의 소용돌이 중에 죽은 문둥병 환자들을 추모함)그리고 소록도 개원 40주년 기념비를 보면서 “아-내가 정말로 말로만 듣던 그 소록도에 와 있구나!”라고 번뜩 놀라고 말았었다.
국립 소록도 병원 뒷 편에 조성된 중앙공원으로 오르면서 백의 천사가 창으로 나병균을 무찌르는 모습을 한 구라탑(救癩塔)을 보았던 기억이 새로웠다.
그당시 국립 소록도 병원에는 약 6천여명의 환자들과 2백여명의 어린 아이들이 희망도 없이 세상을 원망하며 살고 있었으며 이 작은 섬 속에는 말도 못할 사연들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었다. 비록 아름다운 섬이라고는 하나 나는 어서 속히 이곳을 빠져 나오고 싶었기에 부여된 일이 끝나자 마자 뒤도 안 돌아 보고 “날 살려라!” 소리를 치며 소록도를 떠났던 기억이 있었으며 그 후 소록도를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그렇던 이 소록도를 나는 지난 10년 동안 피 눈물을 흘리며 찾아 가야 하는 운명의 사나이가 되었으며 한하운 보다도 더 많은 눈물을 흘리는 문둥병 환자의 그 길이었다.
                             2.
“나의 이름은 강석호라고 하며 금년(2006년)에 61세가 되었군요.
잠시 지난 10년의 소록도 방문과 그 사연을 소개하렵니다.“
안성에서 태어나 안성 농고를 졸업한 후 안성군청 축산계원이었던 아버지가 1950년 6.25 전쟁중에 인민군에 의해 총살을 당하고 보니 나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고학을 하여 안성 농고를 졸업하였으며 월남 전쟁에 참전하였다. 제대 후 아버지의 대를 이어 역시 안성 군청 축산계에 취직을 하였다. 어머니에게 효도 하려고 23세가 되면서 안성 시골 처녀와 결혼을 하여 가장이 되었다.
안성에서 효자라고 소문이 났으며 훌륭한 아들 셋을 두었기에 남들은 나를 부러워 하였다.
큰 아들은 서울 공대에 그리고 둘째 아들은 서울 상대에 입학하였음은 물론 졸업후 각각 큰 회사에 취직을 하였다. 게다가 큰 아들은 사장의 딸과 결혼을 하여 미국 뉴욕으로, 작은 아들도 역시 로스앤젤스의 지사로 파견 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셋째 아들은  태어난지 일년 만에 어머니(나의 아내)를 잃고 나의 어머니(아이의 할머니)가 길러 주었기에 나는 막내 아들을 측은하게 여기며 더 사랑하였다.
둘째 아들이 미국으로 파견 되어 간지 일개월 후 나의 어머니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고 보니 안성 집에는 나와 셋째 아들만 덜렁 남게 되었으며 막내 아들은 고등학교 이학년이었다.
“아버지? 두 형님이 모두 성공하여 미국으로 가셨으니 제가 아버지를 모시고 농사를 짖겠습니다.”
“막내야! 너도 형들처럼 대학에 가서 공부를 하거라. 의사 공부를 하거라...”
“아닙니다. 아버지처럼 농사꾼이 되렵니다. 우리 가문의 전통이 농업니까요.”
“아버지처럼?”
                       *
사실이 그러했다. 나의 아내, 그리고 어머니 마저 세상을 떠났으며 두 아들마저 미국으로 가버리고 나니 셋째 아들은 내게 아주 중요한 존재였다. 밥도 하고 빨래도 하며 농사 일도 같이 하였기 때문이었다.
어느듯 고등하교 이학년이 되었기에 밤낮 없이 대학 입시 공부를 하여야 했다.
가을이 되었다.
웬일일까? 아들의 손등과 눈 가장자리의 피부가 물러지며 움퍽 파지고 있었다. 그뿐인가  눈썹도 빠지고 있었다.
보다 못해 동네 의원에 가서 진찰을 받으니 그냥 피부병이라고 하며 연고를 주어 발랐지만  좋아지기는 커녕 피부는 점점 더 흐믈흐믈 해지며 감각이 무뎌 지고 있었다. 안성 보건소 의사가 유심히 보더니 서울로 가서 큰 병원에서 정밀 진단을 받아 보라고 하였다.
“혹시, 한센씨 병이라고 아시나요? 나병이라고도 하지요.”
“예, 한센씨 병? 아니 문둥병?”
“그렇습니다. 나병. 틀림없습니다. 보건국에 신고를 하여야 합니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나병이라니? 결코 아니라고 부인을 하였으며 그 의사를 원망하였다.
‘아니? 문둥병? 문둥병? 그렇다면 언젠가 소록도에서 보았던 그 문둥병 환자들?“
나는 아니라고 고개를 흔들며 부인을 하였다. 꿈 속에서 나는 사람을 잡아 간을 빼 내어 우직우직 씹어 먹고 있는 문둥병 환자를 바라 보았는데, 뜻밖에도 나의 아들, 홍조였다.
‘홍조야! 아냐! 아냐! 어쩌다, 네가 문둥병에 걸렸단 말이냐? 어째서?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무엇을..왜? 우리에게 형벌을 준단 말이냐!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나의 아들에게 문둥병을 준단 말인가!” 나는 소리쳤다.
의사들은 “문둥병은 단지 박테리아에 의한 전염병 입니다.”라고 설명을 하여 주었으나 나는 “하늘이 내려준 벌이요, 전생에 지은 죄의 대가라고” 생각을 하였다.
학교에서도 수군거리며 가까이 오지를 않았으며 담임 선생이 정식으로 찾아와 더 이상 학교에 보내지 말라고 통보를 하였다. 안성 보건소에 정식으로 등록을 하였더니 기회를 봐서 소록도나 여수에 있는 나병 요양소로 보내겠다고 하였다.
미국에 있는 두 아들에게서 편지가 왔다.
“아버지, 나병은 집에 두면 안됩니다. 어짜피 소록도나 여수로 보내세요. 생활비는 꼬박 꼬박 보내 드릴테니 일은 하지 마세요.”
“보내라고? 집에서 쉬라니? 내 나이, 고작 51세인데....”
                              *
안성 땅에도 봄이 찾아오니 개나리도 피고 뒷산에 철쭉 꽃이 피었다.
“4월 15일 까지 아들을 소록도로 보내시오. 국가에서 먹여주고 치료해 줍니다. 아시겠죠?”
보건소 직원의 강압적인 말에 나는 셋째 아들을 낳고 얼마 되지 않아 죽은 아내와 근자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생각났다.
“셋째야! 나는 그곳에 못 보낸다. 차라리 내가 가마! 가도 가도 끝도 없는 황톳길을 내가 가마!”
“아버지! 제가 가렵니다. 아버지의 죄도 아닙니다. 단지 전염병일 뿐...제가 가렵니다.”
1996년 4월 15일....
-큰 가방 두 개를 들은 아들과 나는 안성에서 버스를 타고 천안으로 가 그곳에서 호남선 열차를 타고 광주로 갔다. 차창으로 보이는 논과 밭, 그리고 건물들이 나의 눈을 두드리고 있었다. 눈물이 흘러 뿌엿게 보이는 것이 마치 지옥으로 가는 듯 하였다.
모자를 눌러 쓴 아들을 기차에 탄 사람들은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다 보곤 하였다. 아들은 뜻밖에도 조용히 앉아 책을 일고 있었다.
‘이런 판국에 책을 본들 눈에 들어 올까?’ 나는 셋째 아들이 너무나도 대견스러워 보였다.    녹동 항구에는 꽤나 많은 여관들과 생선 횟집이 여기 저기에 있었다. 하루라도 아들과 더 같이 있고 싶어 나는 일단 여관으로 찾아 갔다.
“소록도 국립 병원에 입원하러 오셨군요?” 여관집 아주머니의 눈 가장자리에 눈망울이 흐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인정이 많아 보였다.
한국 최남단의 작은 여관방에서 나는 아들을 끌어안고 잠을 청하였으나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울퉁 불퉁 돋아난 아들의 피부에서 나는 따슷한 체온을 느끼고 있었다.
“아- 아들아! 비록 네가 문둥병 환자라고는 하나 너는 나의 아들이다! 전생에 지은 죄를 사죄하마. 네가 내대신 천벌을 받고 있구나. 내가 받아야 하는데.....” 나는 아들의 얼굴을 쓰다듬어 보았다.
                      3
아침에 눈을 떠 보니 아들은 곁에 없었다. 깜짝 놀라 밖으로 나가 보니 아들은 불과 60미터 밖에 아련히 보이는 ‘슬픈 눈망울을 가진 작은 사슴섬 소록도’를 바라다 보고 있었다. 작은 파도들이 녹동 항구를 향해 밀려 들어 오고 있었다. 10분도 안 되는 항해 길이건만 한번 그곳에 들어가면 평생을 보내다가 그곳에 묻혀야 하는 길이었다.
“아-이곳에 들어가면 아들과는 영영 이별이구나.” 나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울고 말았는데 아들은 나의 손을 잡고 오히려 위로하고 있었다.
“아버지! 울지 마세요. 한 10년이면 저도 완치되어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 때까지 아버지, 기다려 주십시오.”
“뭐라고? 10년이면 완치 된다고?” 나는 믿기지 않았지만 아들의 말을 믿고 싶었다.
이것 저것 쓰고 묻고 왔다갔다 하다보니 아들은 정식으로 국립 소록도 병원 환자가 되었다.
병원 직원은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하면서 아들이 살 병원 숙소를 안내하여 주었는데 놀랍게도 현대식으로 지은 건물에 수세식 변소와 샤워 시설도 있으며 환자들 식당은 아주 깨끗하였다.
“걱정 마십시오. 우리는 이제 한 식구입니다. 걱정 마시고 가십시오. 아버님...“ 같은 방에 기거한다고 하는 문둥병 청년이 말하였다.
“면회는 한 달에 한번만 허락됩니다. 그리고 규정상 환자를 면회 할 때는 1.5미터 밖에서 서로 얘기를 나누어야 합니다. 열심히 치료하면 음성 나환자가 되어 사회에 나갈 수가 있습니다. 아버님!” 청년은 연이어 말하였다.
“아버지! 이젠 더 이상 찾아오지 마세요. 혹시 외로우시면 찾아 오세요.”
마침내 아들은 눈물을 흘리며 나의 손을 잡았다.
“차라리, 내 간을 먹고 문둥병에서 회복되거라.” 나는 소록도 바닷가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으나 바다 소리에 묻혀 멀리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고흥, 순천, 광주, 천안을 거쳐 안성으로 돌아 왔다. 이것이 첫 소록도 방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눈물을 흘리며 안성-천안-광주-순천- 녹동을 거쳐 소록도로 가는 방문을 계속하였다.
두 번, 세 번, 네 번..그리고 그리고....
그러나 소록도를 찾아 갈 때마다 나는 더 더욱 울고 울었다. 나의 아들의 얼굴과 손가락 그리고 발가락은 점점 더 악화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4.
그래도 좋은 소식이 내게 있었다. 뉴욕으로 간 큰 아들은 승진을 하였으며 롱 아이랜드에 큰 저택을 구입하였다고 하였다. 그뿐인가 로스앤젤스로 간 둘째 아들도 현지 부 지사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스페인계통의 벡인 여성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편지속에 큰 아들과 마친가지로 이만 달라를 보내 주었다. 그리고, 한결같이 “아버지를 미국으로 초청합니다. 오셔서 같이 사십시오!” 라는 미국 초청장까지 곁들여 있었다.
소식을 들은 동네 사람들은 나를 부러워 하였다. “아! 강석호씨, 아들들을 잘 두어 돈도 받고 이젠 미국으로 가서 살게 되었다니... 부럽군요.”
생각해 보니 그동안 안성-천안-광주- 순천- 녹동-소록도를 찾아 가는 나의 방문길이 7년이 나 되었다.
안성과 소록도에 봄이 오면 진달래가 피고 철쭉 꽃이 피었으며 가을이 되면 단풍이 들었다. 그리고 겨울이 되면 동백꽃이 어김없이 피었다. 붉은 동백, 흰 동백....
                               *
그리고 2003년 봄이 되었다.  
41번째, 소록도 방문에서 나는 몰골이 더 흉해진 아들을 바라다 보았다. 손. 발 가락이 잘려 나감은 물론 찌글어진 얼굴에는 우울함과 인생에 대한 절망이 완연하였으며 가끔 거친 말을 내 뱃곤 하였다.
“아버지! 이젠 더 찾아 오지 마세요. 오셔도 이젠 안 만나겠습니다.”
“뭐라고? 더 이상 오지 말라고!” 나는 눈물을 흘리며 소록도를 벗어 나왔다. 녹동 앞바다에 투신이라도 하고 싶은 충동이 생겼으나 용기가 없었다.
안성 집으로 돌아오니, 큰 아들이 보낸 편지 속에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 표가 들어 있었다.
“아버지, 손자들의 재롱을 보러 오십시오. ”
“와! 드디어 미국에 가는구나. 아들을 보러. 아니 손자를 보러.” 나는 감격하여 그 날 밤을 꼬박 새우다가 새벽녘에서야 겨우 잠을 잘 수가 있었다.
다음날 아침, 해가 중천에 떠 올랐을 때 나는 눈을 떠서 일어나려고 하였는데 ‘웬일일까?’ 나는 일어 날 수가 없었으며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엉거주춤 힘을 내어 기어서 겨우 전화 통에 다다를 수가 있었다. 그리고 겨우 친구의 집으로 전화 다이알을 돌렸으며 겨우 한마디 “나 석호야!” 라고 말을 한듯하였다. 그리고 나는 방바닥에 나가 떨어져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얼마후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떠보니 나는 안성 도립병원에 입원을 하고 있었으며 내 곁에 나의 친구와 그의 아내가 나를 바라다 보고 있었다.
“석호야! 중풍을 맞았다는 구나! 겨우 목숨을 건졌어. 너희 아들들에게 알려 주마!”
그러나 미국에 있는 아들들은 물론 소록도에 있는 아들도 찾아 오기가 힘들었다.
“허! 아들들, 미국에 있어봐야, 다 헛거여. 돈 가지고 되나. 부모 효도는 안 되는 거여.” 동네 사람들은 혀를 찻으며 나를 도와 주는 사람은 없었기에 나의 마음은 공허함과 절망뿐이었다.
입원 닷새가 되는 날, 모자를 깊이 눌러 쓰고 방으로 들어 온 방문객이 있었다.
“아버지? 저요. 셋째 아들, 홍조입니다.”
“뭐라고? 홍조라고? 네가? 네가 왔구나!” 나는 잘라지고 뭉퉁해진 아들의 손을 꼭 잡았다.
-마치 망망 대해에서 표류하던 배가 먼곳에서 반짝이는 등대를 발견한듯 하였으며 찌그러진 아들의 얼굴이 환하게 보였다. 그러나 아들은 간호원에 의해 발각이 되었으며 병원 수위로부터 욕설을 들으면서 밖으로 쫒겨 나갔다.
“아니! 문둥이가 여길 어떻게 들어 왔나! 빨리 나가라! 아니면 너는 죽는다.”
“죽다니? 내 아들이 왜?”나는 소리를 쳤으며 순간 아들을 위해서라도 빨리 회복되어야 된다고 생각을 하였다. -
며칠 후 나는 절룩이면서 집으로 돌아 왔으나 나를 도와 줄 사람은 없었으며, “아들 셋이 있으면 뭘해! 차라리 공부를 못해 농사 짖는 아들이 더 난거여!”라고 조롱을 하고 있었다.
캄캄한 밤이었다. 박에서 인기척 소리가 나더니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모자를 깊이 눌러 쓴 셋째 아들이었다. 낮에는 숨어 있다가 밖이 어두어 지니 아버지를 찾아 들어 왔다고 하였다.
“아니? 네가 여길...어떻게?” 나는 아들의 손을 꼭 잡았다. 손가락 두 개와 눈섭이 송두리채 없었다.
“아버지! 회복 되시는 대로 미국에 있는 형님들에게 가세요. 완전히 회복이 될겝니다.”
“미국에 가서? 너를 여기 두고?” 나는 천장을 바라다 보았다.
무려 8개월만에 나는 지팡이를 집고 혼자 밖으로 나다니게 되었으며 마침내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나 혼자 밥해 먹고 빨래 하기도 힘들었기에, 아니 너무나 외로워서 견딜 수가 없어서 택한 길이었다.
미국으로 가기전 다시 한번 셋째를 보고자 소록도로 가는 버스를 탓다. 42번째 찾아 가는 소록도 길이었는데 전혀 다른 길이었다.
“이번에 가면 언제나 여길 또 오게 되나? 아마 못 올지도...영영..”
“아버지 이번에 미국에 가시면 형님들이 잘 해 주실겝니다. 그러니 영영 그곳에서 사십시오.”아들과 이별을 하고 돌아 오는 길은 마치 수만리 길 같았으며 안성집에서 나를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5.
2003년 11월 나는 대한 항공을 이용하여 로스앤젤스에 도착하였는데 둘째 아들과 사진으로만 보았던 스페인계통의 며느리도 같이 나와 나를 환영 하여 주었다.
임신을 하여 배가 부른 외국 여성, 며느리에게 신세를 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으나 며칠을 같이 보내면서 디즈니랜드, 헐리우드를 구경하면서 한 가족이라는 느낌을 같기 시작하였다.
한달 후 큰 아들이 와서 뉴욕으로 직접 데리고 갔다. 뉴욕은 또 다른 도시였으며 L재벌의 딸인 며느리는 말이 며느리였지 함부로 대하기 힘든 거인이었다.
아들의 저택, 이층에서 바라다 본 롱 아이랜드의 대서양 바다는 비단과도 같았으며 문득 소록도 앞 바다라고 착각을 하였다. 그리고 그 바다에서 셋째 아들이 손을 흔들며 나를 부르고 있는 듯 하였다.
가끔 용돈이나 주며 시아버지인 나를 쉽게 대접하려는 며느리와  영어로만 대하는 손자와의 관계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다. 혼자 있는 저녁 시간에는 한국 텔레비존이나 보면서 지내다가 언제부터인가 나는 버스를 타고 낮에 한국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에 찾아 가기 시작하였다.
“하나님? 무슨 하나님? 인자하다는 하나님이 왜 순진한 나의 아들을 문둥이로 만들었단 말이냐? 말도 안되지!” 나는 기독교와 목사들이 싫었다.
2005년 2월 나는 그래도 정들었던 뉴욕을 떠나 다시 로스앤젤스로 되 돌아 왔는데 뜻밖에도 외국 며느리가 나에게 더 편하였다. 비록 말은 안 통하였지만 외국 며느리는 마음을 활짝 열고 절룩이는 나를 아버지처럼 대해 주었다.   로스앤젤스 한인 타운에 버스를 타고 가 칮구도 사귀었으며 교회에도 다시 찾아 갔다.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 뿐이니...”라는 복음 성가를 자주 불렀다.
“그래, 잠시 머물 세상...천형병을 앓고 있는 셋째나 중풍으로 절룩거리는 나, 또 한 어서 이세상을 떠나구 싶구나.”  
사람들은 나를 보고 고향 생각을 너무 지나치게 한다고 하였으며 우울증 환자라고 불렀다.
며느리들도 질투가 있기 마련이었나보다. 아니면, 뉴욕에 사는 자존심이 강한 맛 며느리는 외국 여성인 동서의 집에서 그래도 편안하게 지내는 나를 못 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별 것 아닌 히스페닉 여자보다 못 하다는 평을 듣다니...안되지!” 맞 아들은 거의 강제적으로 나를 또다시 뉴욕으로 데리고 갔다.
아무리 집이 좋은 들 마음이 불편한 뉴욕에서의 생활은 외로움의 연속이었다.
이번에는 내가 부탁을 하여 다시 로스앤젤스로 되 돌아 왔다.  
이해 못 할 어느 목사님의 설교가 기억난다.
“태어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은 누구의 죄로 인함인가? 자신인가? 아니면 부모의 죄인가? ”라는 질문에 예수는 대답하기를 “그 사람이나 부모의 죄가 아니고 창조주의 하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다”라는 설교였다.
“무엇이라고요? 그렇다면 나이 16세에 문둥병에 걸려 멀리 소록도에 가서 한을 품고 살고 있는 나의 아들은 누구의 죄로 인함입니까? 나요? 아니면 내 아들의 죄요?”
나는 열을 내어 목사에게 물었는데 그 목사의 대답은 “당신도 아니고, 당신의 아들도 아닙니다. 단지 창조주가 하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입니다.”라고 대답을 하였다.
“무슨 소리요? 빌어 먹을!” 나는 퉁명스럽게 대답을 하고는 교회당을 빠져 나왔다.
                               *
나는 둘째 며느리에게 간청을 하였다. “다시 나를 한국으로 보내 달라고...”
“아니 영주권이 곧 나올 텐데요.”
“아냐! 나 막내 아들이 보고 싶구나.”
결국 2년 8개월의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나는 안성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그동안 내게 있어서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결코 미국 사람이 될 수가 없었다. 오로지 막내 아들이 보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6.
안성으로 돌아 온 날이 바로 2006년 7월 7일이었다.
-주인 없이 비어 있던 안성집은 두 팔을 벌리고 나를 나를 마중하는 듯 하였으나 여기 저기에 거미줄이 보였다. -
그리고 나는 ‘내일 아침에는 꿈에 보고 싶은 막내 아들을 찾아 소록도로 가리라고’ 결심을 한 후 잠에 빠졌는데 공교롭게도 밤 늦게부터 비가 오기 시작하더니 장마비로 변하여 무려 일주일이나 계속 되었기에 소록도로 갈 수가 없었다.
마침내 장마비가 그치고 보니 나는 43번째 소록도 길을 떠날 수가 있게 되었다. 7월 15일이었다.
아들을 본다고 하니 가슴도 설래였으며 모처럼 기분이 좋았다.
마치 소풍을 가는 기분으로 안성을 떠나 광주, 순천 그리고 녹동 항구에 도착하니 아직도 대 낮인 2시 45분이었다. 곧장 연락선을 타고 소록도로 갈 수가 있건만 나는 처음 아들과 같이 하루를 묵었던 그 여관에 가서 하룻밤을 자기로 하였다.
“오랜만에 아드님을 보러 오셨군요. 그런데 웬 지팡이를?” 여관집 아주머니는 나를 측은 하게 바라다 보며, “이제 녹동과 소록도 주민들은 화해를 하였으며 저 다리를 통해 자유롭게 걸어서 왔다 갔다 하게 됩니다.”라고 말하였다.
2년 8개월만에 나는 소록도 면회소에서 아들을 만나게 되었다.
“당신의 아들, 강홍조씨는 여기에 없습니다. 나 환자 마을로 갔습니다.” 나는 깜짝 놀라면서 마을로 갔으나 “중앙교회에 가서 목사님을 도와 주고 있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중앙교회에?” 나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중앙교회로 달려 갔다.
교회당 문 앞에서 나는 몇 명의 문둥병 환자들을 만났는데 한결같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길이 살리라. 길이 살리라. 저 생명 시냇가에 살리라.”  며칠전에 죽은 문둥병 환자의 장례식이 진행되고 있었으며 검은 옷을 입은 막내 아들은 목사님을 도와 죽은 시체 곁에 서 있었는데 얼굴이 몹시도 밝아 보였다.
“아버지! 아버지! 언제 오셨습니까? 아버지! 기뻐해 주세요. 음성 나환자가 되었습니다. 아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 음성 나환자? 그러면 나병이 치료 되었단 말이냐?”
“예. 10년이면 낫는다고 하였지요. 10년...”
“아! 하나님! 나의 아들이 치료 되었다고요? 감사합니다.” 나는 하나님 소리가 내 입에서 나오고 있었다.
“예, 내게는 할 일이 남아 있답니다. 아니, 나를 통해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답니다.”
“하나님이 너를 통해 할 일이 있다구?” 나는 언젠가 로스앤젤스에서 어느 목사가 내게 한말이 생각났다.
손과 발가락이 잘려 나가고 코가 뭉글어진 나의 아들을 통해 나는 소록도란 섬은 절망과 고통만이 있는 곳이 아니고, 외로움과 절망이 녹아 없어지고 대신 위로와 사랑으로 새로워 지는 문둥병 환자들의 낙원임을 알게 되었다.
                                   7.
어머니 없이 성장한 것도 불쌍한데 생각지도 않은 문둥병 환자가 되었을 때, 나의 아들은 절망속에서 자살을 하려고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불쌍한 아버지를 위해 궂게 참고 견디었다고 하였다. 사람들과 학교 친구들의 냉대를 받으며 소록도로 들어 온 아들은 중풍으로 쓸어진 아버지를 보았을 때  인생을 포기하려고도 하였다.
은은히 들려 오는 중앙교회의 종 소리를 들으며 나의 아들은 교회를 찾아가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목사님을 통해 들은 문둥병 환자들의 얘기를 듣고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전라남도 여수, 애향원  나병 요양소에 있는 1000여명의 문둥병 환자들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님의 눈물어린 순교였다.
좌익 학생들에 의해 두 아들을 잃은 손목사는 1950년 6.25 전쟁이 나면서 그는 피신 하지 않고 나 환자들을 돌보다가 끝내 총살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벨지움 신부 다미엔의 죽음이었다.
-1873년 하와이, 몰로카이 섬으로 문둥병 환자들을 돌보기 위해 찾아간 다미엔 신부는 하루에 12명이나 죽어 가는 그 섬에서 10년간 전도를 하였으나 어느 누구 하나 신자가 되지 않았다. “당신은 문둥이가 아니니 우리 문둥이를 알 수가 없소.” 문둥이들은 그를 믿지 않았다. “주님, 저를 문둥이로 만들어 주소서.”그의 기도대로 그는 문둥이가 되었으며 단 3년만에 800명이 신자가 되었다. 다미엔이 죽은 후 몸은 벨지움으로 그러나 병자들을 어루 만져 주었던 오른쪽 손은 몰로카이 섬으로 되 돌아 왔다.-
그리고, 2005년 11월, 40년동안 소록도에서 헌신하여 온 오스트리아의 두 간호사들이 70세가 넘어 편지 한 장을 써 놓고 돌아갔다고 하였을 때, 그는 하니님께 간절히 서원을 하였다고 한다.
-“두 분이 하였던 일의 일부를 제가 하겠습니다. ”
그리고 일주일 후, 그는 소록도 병원, 전문의사를 만나게 되었을 때, 뜻밖의 대답을 들었다.
“강홍조! 당신의 몸에는 더 이상의 나병균이 존재 하지 않는다네. 음성, 나 환자가 되었어. 축하해. 축하해.” 그리고 담당 의사는 크게 허깅하였다.  
“예? 음성이라고요?” 나의 아들, 강홍조는 감격하여 울고 말았다고 한다.-
“아버지, 내가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이...”비록 손가락과 발가락은 떨어졌으나 이젠 친구들을 만날 수가 있으며 아버지와 허깅을 해도 좋은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가 문둥병 환자가 된 것도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
43번째 찾아 온 소록도의 길....이 길이 마지막이 되었다.
“그래, 아들아! 네게 주어진 너의 길을 나도 같이 가자꾸나. 여기 소록도에서...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뿐이라고 하였으나, 이젠 너의 손을 잡고 같이 걸어가는 영원한 길만 있을 뿐이다.“    
                     단편 소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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