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에서 온 편지.

2007.11.09 09:40

연규호 조회 수:880 추천:107

The Kentucky Bridge over Ohio River.-a letter from Africa


장편소설:

     아프리카에서 온 편지.
         'A letter from Africa'
     저자: 연규호,( 延圭昊, Kyuho P Yun, M.D.FACP)
          a member of PEN USA & Korea
          문인 협회 회원, 한국, 미주.
          한국 소설가 회원
          E Mail: kyuhoyun@yahoo.com, 714 636 0133(T)
         WebSite: www.yunkyuho.com (연규호의 문학서재)
                  www.mijumunhak.com/yunkyuho(미주문학 연규호 서재)




저자의 말:
아프리카, 말라위(Malawi)에서 의료 선교를 하다가 순직한 친구, 이봉영(李奉榮) 외과 전문의사를 추모하며 이 소설, “아프리카에서 온 사랑의 편지”를 씁니다.
                                *
2002년, 나는 장편 소설, “오하이오 강의 저녁 노을”을 출판하였는데 오하이오는 내 마음속에 간직된 또 하나의 고향입니다.
1977년부터 1979년, 오하이오 남부에 있는 인구 75만의 도시 데이톤에 살 때, 나는 가끔 신시내티(250만)를 경유하여 오하이오 강 건너편에 있는 소도시 코빙톤(35만)에 가곤 하였습니다. 그 때마다 나는 도도하게 흐르는 혼탁한 오하이오 강 위에 걸려 있는 켄터키 다리, 관망대에서 구불구불 뱀처럼 서쪽으로 흘러가는 오하이오 강을 바라다보며 고향(한국)생각을 하였습니다.
“해는 저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 밝은 달만 쳐다보니 외롭기 한이 없다.”를 노래 하다보니,
오하이오 강 바닥에 비취이는 둥그런 달이 마치 고국에 계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느껴졌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어서 전문의가 되어 고국에 돌아가겠습니다.”
그러나 고국에 돌아가기는커녕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마저 돌아 가셨으며 나도 어느새 60이 훌쩍 넘은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돌아오지 않는 강, 오하이오 강 위에 걸린 켄터키 다리에서 나는 소천한 나의 친구 이봉영군을 추모하고 싶기에 이 소설을 씁니다.      
(주: 오하이오 강을 사이에 두고 신시내티와 코빙톤이란 도시가 마주 보고 있는데 이 두 도시를 연결해 주는 다리를 켄터키 다리라고도 부른다. 이 다리는 서스펜숀식의 다리로 켄터키 주 지사였던 스펜서의 이름을 따 스펜서 다리라고도 부른다.)
                                        *
도리켜 보면, 1963년 봄, 내 여동생의 친구가 있었는데 “금자”라는 이름을 가진 미군(백인)과 한국 여성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의 소녀였습니다. 아홉 살 밖에 안되는 코 흘리개 소녀는 미국으로 입양되어 간다고 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혼혈아(混血兒), 튀기, 아이노코라는 이름으로 동네 사람들에 의해 그녀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서럽게 살았던 소녀였습니다.
“튀기, 양갈보의 딸”이라고 사람들은 불렀으며 심지어는 돌을 던지기도 하였습니다. 결코 따슷한 이웃으로 대해 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 소녀는 우리 집에 와서 비빔밥, 수제비를 얻어먹으면서 내 동생의 친구가 되어 우리와 한식구가 되었기에 활짝 웃으며 조잘거렸습니다. 분명히 그녀는 우리와는 조금은 달랐습니다. 눈은 파란 색이었으며 머리칼은 검은 색과 금발이 섞여 있었으며 코는 다소 우뚝 솟아 있었기에 누가 보아도 그녀는 한국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분명코 한국사람의 정서를 갖고 있었습니다.
아홉 살, 코흘리개 금자는 어느날, 울면서 고향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갔습니다.  
“어디로 갔을까? 무엇을 하고 있을까? 천국과 같다고 하는 미국에 가는데 금자는 왜 울었을까? 남들은 미국에 못 가서 야단이었는데....”
세월이 흐르고 보니 그 소녀의 얼굴은 완전히 희미해 져 지금 만난다면 알아 볼 수가 없으리라...
                                        *
1973년 나는 미국 뉴욕으로 전문의사가 되려고 왔습니다. 그리고 4년 후 오하이오 데이톤에 있는 큰 병원에서 내과 수업을 받았습니다.
왜 그럴까? 나는 뉴욕보다 오하이오가 더 정다웠으며 포근하였습니다.
그것은, 뜻밖에도 데이톤에서 금자처럼 생긴 한국 여성들을 많이 만날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데이톤에 있는 라이츠 공군 기지 주위에 살고 있는 한국에서 온 “국제 결혼 여성들과 그들의 자식들인 혼혈아들”을 한국사람 교회에서 일요일마다 만나볼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천국 같다고 부러워하던 미국에 온 금자처럼 생긴 혼혈 여성들은 인종 차별을 받으며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 온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바라다보았기에 나는 장편 소설, “오하이오 강의 저녁 노을”을 완성하여 2002년 출판을 하여 큰 호응을 받았습니다.
“소설, ”오하이오 강의 저녁 노을“을 쓰면서 나는 혼혈과 인종문제를 많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
내가 데이톤에 살고 있을 때 나는 직업야구 팀 “신시내티 레즈(Cincinnatti Reds)”의 강타자 조지 포스터(George Foster)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는 비록 흑인이었지만 1975년과 1976년 월드 시리즈 우승팀의 4번 타자였으며 1977년 그는 직업야구 최우수(MVP) 선수가 되었기에 데이톤에 사는 사람들은 그를 정말로 좋아하였으며 자랑스러워하였습니다.
                                    *
라스베가스에 산다고 하는 또 다른 한국에서 온 혼혈의 여성은 피 눈물 나는 노력을 하여 소아과 의사가 되었으며 한국에 있는 어머니를 찾는다고 하는 뉴스가 실렸습니다.
                                    *
10 년 전, 타임즈에서 읽었던 어느 혼혈의 글이 또 다시 생각납니다.
-백인 병사와 한국 여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의 소녀는 강제로 미국으로 입양되었는데 10년만에 고국의 어머니를 만나려고 찾아 왔으나 어머니는 이 혼혈의 소녀를 만나 주지 않았습니다. 이 소녀는 울면서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면서 이렇게 맹세를 하였다고 합니다.
“죽어도 다시는 한국에 돌아가지 않을 거다! 나의 어머니? 없다! 이 세상에는 없는거다. 한국? 나의 조국이 아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내 버린 딸을 만나 보는 것이 너무나 죄스러워 호텔 벽에 숨어서 딸을 바라다보기만 하였다고 한다. “버린 자식을 차마 다시 볼 수가 없어서....”
그런데, 그 소녀는 그래도 어머니를 잊을 수가 없어 또 다시 찾아 왔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만나지는 못하고 되 돌아 가고 말았지만...-
                                          *
마침내 나는 내 마음의 고향, 데이톤에서 보았던 국제 결혼 여성들과 오하이오강위에 걸려 있는 켄터키 다리를 생각하며 “오하이오 강의 켄터키 다리”를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켄터키 다리 위에서 나의 친구 이봉영 군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결국 제목을 “아프리카에서 온 편지”로 바꾸어 다시 썼습니다.
좋은 글이 되기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합니다.
                                                       저자. 연규호  6월 2일 2006년.



      소설을 읽기 전에

                       주인공:
1.수지 포스터. 디메트리우스(Suzy Foster Demetrius), 한국 이름으로는 김          수자(金秀子)라고 함. 1952년, 한국 경기도 안성군 공도면에서 태어남
        불행하게도 이름도 모르는 미군 백인 병사와 한국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            로 어머니로부터 버려짐. 앞집에 사는 강씨 아주머니가 길러주었음.
          1961년 9살되던 해에 강제로 미국 켄터키주로 입양되어 감.
          역경 끝에 그리스 계의 이민자, 아리스테 디메트리우스와 결혼을 하였으나 남편            은 2년 후에 자살하여 죽음. 오하이오 데이톤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산부인과            전문의사가 되어, 환자 김정희씨(제니퍼 던발)를 치료하다가 그의 아들, 한스 던            발의 이모가 됨
        공도에 살던 강석호 소년을 사랑함.
2.강석호(姜錫浩), 1949년 생, 경기도 안성군 공도면에서 태어 남,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외과 전문의사가 되어 공도에 살다가 50이 넘어 아프리카 말리로 가 의료 선교를           함.      
           김수자와 어려서부터 앞:  뒷집에 살았으며 백인과의 혼혈아인 김수자를 동생처럼           보살펴 주었으며 사랑하였기에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수자를 기다려 옴.
3.아리스테 디메트리우스(Ariste Demetrius): 켄터키에서 그곳으로 입양되어 온 김          수자(수지 포스터)를 사랑하여 결혼 함. 월남 전쟁에서 돌아 온 후 우울증으로 자           살하여 죽음.
4포스터 가족(Foster Family): 켄터키 주, 코빙톤 외곽에 사는 가족으로 어린 수자를         입양하여 미국으로 데리고 옴.
5.김정희-제니퍼 던발.Jennifer Dunbar): 1952년 생. 경기도 오산에 살면서 미군 흑          인 병사를 사랑하여 결혼 함. 그녀의 아들 한스 던발(김한수)를 데리고 미국 오하이         오주 데이톤으로 이민와서 살았으나 시집식구들로부터 버림받아 혼자 살았음
6.한스 던발(Hans Dunbar): 한국 이름: 김한수(金 韓洙)
       미군 흑인 병사 마이크 던발과 김정희씨 사이에서 난 흑인 혼혈아로 미국으로 쫒          겨 가 데이톤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오하이오 주립대학을 거쳐 미국 프로 야           구, 피츠버그 파이레츠 그리고 신시내티 레즈에서 중견수로 활약하였으며 2003년도          월드 시리즈 최우수선수가 됨. 야구의 영웅으로 한국으로 초청 받아 옴.  
7.매기 던발: Maggie Dunbar:
       자마이카와 푸에르토 리코 사람의 흑인 여성으로 한스의 부인이 됨.
지명:
   1.켄터키주 코빙톤시
   2. 오하이오주 데이톤, 신시내티, 콜럼브스
   3. 오하이오 강
   4. 켄터키 다리: 로브링 다리라고도 부름. 신시내티와 코빙톤을 연결해 주는 역        사적인 다리(금문교. 브르크린 다리와 같은 공법의 다리)
     켄터키 다리 관망대: 다리 중간에 관망대가 잇어 멀리 켄터키, 신시내티 그리고         오하이오 강을 관망 할 수 있음
  5.말리(Mali): 서 아프리카에 있는 대국으로 인구, 1악 5천만 수도 바마코, 회교국가
               강석호 외과 의사가 찾아 간 나라.
    주면 국가: 세네갈, 토고 가나, 나이제리아, 니제르 등.
  6.공도: 경기도 안성군 공도면.
          인근에 있는 안성천, 그리고 평택, 서정리, 오산이 멀지 않음.
  7.말라위(Malawi):이 소설에는 안 나오지만, 저자의 친구, 이봉영군이 그곳에 가서 의           료 선교사로 봉사를 하다가  순직한 나라. 아프리카 동남부에 위치한 작은 나라임.      




장편 소설:
       “ 아프리카에서 온 편지.”
             “A letter from Africa"
        *  *   *   *  *  *

  1장: 나, 김수자(金秀子)는 어디에서 왔나?

“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내 이름은 ‘수지 포스터 디메트리우스(Suzy Foster Demetrius)'라고 합니다. 그리고 한국 이름으로는 김수자(金秀子)’라고 하지요.
‘수자 그리고 수지’, 언뜻 듣기엔 아주 비슷한 발음이지만 완전히 다른 이름이지요. 앞으로는 ‘수지 디메트리우스, 아니, 그냥 수지’라고 불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서울에 있는 KBS TV(공영 방송)에 출연한 미국에서 온 중년의 여인(52세)은 더듬거리기는 하였으나 또박또박 한국말로 미스 코리아 출신의 TV 아나운서(MC)와 대담을 하고 있었다.
2003년, 미국 프로 야구의 영웅, 한스 던발( Hans Dunbar, 31세. 한국여인과 미국 흑인 병사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과 그의 이모, 수지 디메트리우스 여의사(한국 여성과 백인 병사와의 혼혈인)가 대한민국의 공식 초청을 받고 어제 저녁 비행기 편으로 인천 공항을 통해 서울에 왔다고 하는 신문, 방송 그리고 TV 뉴스를 통해 서울 시민들은 이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며 흥미로워 했다.  
“여러분들의 초청으로 43년만에 조국, 한국에 찾아와 따슷한 대접을 받게 되니 눈물이 나는군요.
1961년 5월, 아홉 살의 코 흘리개 소녀였던 나는 미국으로 입양이 되었지요. 말이 미국이지, 어머니와 생 이별을 하여 낫 설은 미국 땅에 강제로 쫒겨 갔습니다. 한국 사람들이라곤 보기도 힘든 켄터키주의 어느 시골이었습니다. 그 근처에 있는 켄터키 다리 관망대에서 나는 매일같이 한국을 바라다보며 울었지요.
그리고 10년 후인 1971년 5월, 19살의 처녀가 되어 그토록 보고 싶었던 어머니를 만나 보려고 한국에 다시 찾아 왔었는데, 막상 어머니를 지척에 두고 만나보지 못하였습니다. 왜냐구요? 나의 어머니가 미국에서 온 나를 만나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한번만, 한번만 얼굴이라도 보고 싶습니다.’ 나는 엉엉 울었습니다마는 어머니는 끝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져 버렸습니다. 어머니의 뒤를 향해 ‘어머니! 어머니! 한번만 나를 봐요! 나를...’ 나는 소리를 치며 호텔 로비에 주저앉아 울었습니다. 어머니는 끝내 사라져 버렸습니다. 미국으로 되돌아가면서 나는 ‘한국과 어머니는 또 한 번 나를 버렸구나! 아니 나를 또 한번 죽였어! 나는 다시는 한국을 찾지 않으리라, 그리고 어머니를 잊으리라.’라고 다짐을 하였었지요.
사실 나는 오늘까지도 왜 나의 어머니가 나를 버렸는지, 그리고 왜 만나기를 거부하였는지를 아직도  모르는 채 이곳에 또 다시 찾아 왔습니다.
‘다시는 한국을 찾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면 할수록 비록 혼혈아인 나를 팽개친 나의 조국 한국과 어머니가 더 더욱 보고 싶었습니다. 꿈 속에서도 어머니가 더 보고 싶었습니다. 그 때마다 나는 오하이오강 위에 걸려 있는 켄터키 다리의 관망대로 찾아가, 서쪽 하늘을 바라다보며 조국과 어머니를 생각하곤 하였답니다.’
이번 방문을 통해 나는 나의 어머니를 꼭 만나보고 싶습니다. 어머니! 이 방송을 들으시면 꼭 나를 찾아 주세요. 어머니! 꼭요. 만나고 싶습니다. 어머니!“
혼혈의 여인의 얼굴에는 눈물이 살프시 흐르고 있었다. 보다 못해 미스 코리아 출신의 엠시(MC) 는 애처러운 마음으로 혼혈의 여인을 살며시 허깅을 하면서 위로를 하고 있었다. TV를 시청하는 시청자들도 숙연한 마음으로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러분! 오늘 나는 나의 조카, 한스 던발 덕분에 영광스럽게 TV에 출연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잃어 버렸던 우리들의 과거를 되찾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보아서 아시겠지만 한스 던발은 미국 프로 야구의 최우수 선수 일뿐만 아니라 한국을 사랑하며 어머니를 사랑하는 효자입니다.”
                              *
수지 디메트리우스라는 이 여인은 백인과 한국 사람이 적당히 섞인 혼혈의 여인이었는데 프랑스에서 왔다고 하는 ‘이다도시’씨와 아주 비슷한 모습을 하였으며 몸매도 함초롬히 빼어난 여인이었다. 그러나 수지의 조카라는 한스 던발은 검은 색이 짙은 흑인이었으며 근육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건장한 모습이 아주 대조적이었다.   ‘백인처럼 생긴 수지와 흑인 던발... 어떻게 이모와 조카가 된담? 아니겠지....’
TV를 시청하고 있는 시청자들은 머리를 갸우뚱하였다.
아무래도 시청자들 눈에는 ‘백인처럼 생긴 혼혈과 흑인처럼 생긴 혼혈’을 구분하고 있는 듯 하였다.
                             *
“수지씨? 아주 미인이군요. 어떻습니까? 이제 조국에 와 보니 혼혈에 대한 국민들의 생각도 많이 바뀌었다고 느끼십니까?” 미모의 TV 엠시가 웃으면서 말하였다.
“감사합니다. 미인이라고 칭찬을 해 주시니...
43년, 아니 33년만에 고국에 다시 와 보니 혼혈에 대한 한국사람들의 생각도 많이 변하였군요.
내가 태어나 9살이 되던 해까지는 ‘튀기, 아이노꼬’라고 놀림을 받았으며 심지어는 돌에 맞기도 하였습니다. 그뿐인가요, 10년 후인 19살 되던해, 다시 한국을 찾아 왔을 때에도 사람들은 나를 보는 눈초리가 마치 이상한 동물을 바라다 보는 듯 하였습니다. ‘색씨? 미국사람이요? 아니 어디에서 왔수?’라고  고개를 흔들었지요. 그런데 43년 만에 와보니 아주 자연스럽게 대해 주니 이제야 평안한 나의 조국에 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답니다.“
수지라는 이 여인의 눈 가장 자리에는 눈물이 사르르 흐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곁에 앉아 있는 6피트 3인치의 키에 215 파운드나 되는 거인같은 흑인, 한스 던발씨도 눈시울을 닦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애처러워 보였다.
“미국에 강제로 입양되어 그곳에서 성장하여 당당한 의사가 되기까지 고생 많이 하셨지요, 수지씨?” 엠씨는 눈물을 흘리는 수지씨가 안쓰러운지 그녀의 어깨를 만지면서 물었다.
“의사가 되기까지, 예, 고생스러웠지요. 좌절과 실망 그리고 인종 차별, 와!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나보다 여기 곁에 읹아 있는 나의 조카 한스의 고생은 더 컸습니다. 왜냐구요? 흑인의 피가 섞여 있기에 백인의 피가 섞인 나보다 백배, 천배 더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한스는 이런 역경을 극복하고 2003년도 월드 시리즈의 최우수 선수가 되었으니까요. 한국 사람의 피를 받은 미국 최고의 야구선수가 되어 대통령을 만나기도 하였지요! 너무나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러기에 한스는 죽은 어머니의 한을 풀어 주었으며 꿈을 이루어 냈습니다.”
“어머니의 한을?.그리고 꿈을?” 엠시는 한스를 바라다보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어머니의 한을, 그리고 나, 수지의 한도 풀어 드렸습니다.” 한스가  대답을 하였다.
“수지씨의 한을?”
“예” 한스가 또다시 대답을 하고 있을 때, 마침내 수지는 참고 참았던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우시는군요? 수지씨...그러면 곁에 계신 한스 던발 선수님이 이모님을 대신하여 여러 시민들에게 인사 말씀 해주시지요. 엠시는 더듬더듬 영어로 말하였으나 한스는 다 이해를 한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감사합니다. 우리들을 따슷하게 대해준 시민 여러분! 흑인 혼혈인 나를 이렇게 사랑해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오늘 내가 미국 야구의 최우수 선수가 된 것은 지금까지 나를  도와주신 수지 이모와 죽은 어머니 때문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쫒겨 나다시피 미국으로 왔던 나의 어머니가 오늘 천국에서 활짝 웃으시리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내가 여기에 머무는 동안 나의 어머니의 친척들과 이웃을 만나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그리고 한국을 사랑합니다.”
흑인, 한스 던발씨는 영어로 인사를 하였는데 그도 역시 감격하여 울고 있었다.
대형 TV에는 혼혈의 여성과 흑인 남성의 우는 모습이 크게 비취이고 있었으며 눈물방울이 주루루 떨어지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시청자들은 조용히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까지 여러분들은 미국 프로야구 최우수 선수상을 받은 한국계 흑인 한스 던발씨와 그의 이모가 되는 수지 포스터 디메트리우스 여의사님을 모시고 대담을 하고 있습니다. 이 두분은 역경을 이기고 미국 땅에서 성공한 한국계 혼혈인데, 한국에서 살지 못하고 미국으로 입양되었던 불행한 과거를 갖고 있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이 두 분은 모진 고통을 이기고 미국 땅에서 성공한 자랑스러운 한국사람들입니다.“
미모의 엠시, 아나운서는 뒤늦게 시청하기 시작한 시청자들을 위해 한스 던발과 수지를 다시 한번  소개하였다.
                           *
서울역 대합실, 인천 공항 그리고 서울 시청 앞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을 통해 인터뷰를 시청하고 있던 많은 사람들도 눈시울이 뜨거운지 지긋이 눈을 감고 있었다.
인천 공항 청사에 있는 대형 시계는 2004년 2월 15일 오전 10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으며 대형 TV 화면에는 “2004년 2월15일, 한스 던발의 날(The day for Mr. Hans Dunbar)”이라고 쓰여 있었다.
문득 70줄에 든 어느 노인 남자가 큰 소리로 말하는 소리가 인상적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 혼혈아들은 사람 취급을 못 받았어. ‘양갈보 자식, 껌둥이, 흰둥이, 아이노꼬, 얼치기’라고 불렀지. 그리고 지나가는 혼혈아들에게 돌을 던졌어.  그러니 학교에도 마음 놓고 못 다녔지. 불쌍했지...무슨 죄가 있어서 애들에게 돌을 던져. 에미 잘못 두어서 그랬지...
그런데, 세월이 약이로구먼, 이젠 한국에도 혼혈아가 많아졌어. 필립핀, 말레지아, 인도네시아, 그리고 방글라대쉬...와! 이젠 튀기가 전체 인구의 1%가 되었다니까...튀기 배우도 생기고, 개그맨도 있고, 그리고 튀기 운동선수도 있어.  
허! 옛날에는 흑인 혼혈아는 아예 사람도 아니었어. 짐승만도 못했지. 백인 혼혈은 그래도 대우가 좋았는데...아무래도 백인이 흑인보다 더 잘살고 강했으니까...그런데 오늘 보니, 와! 흑인이라도 성공을 하면 대우가 다른거여! 흑인도 성공을 하면 영웅이 되는거여. 일본 축구팀에도 흑인이 있더라구. 일본놈들, 한국축구를 이기려고 브라질 흑인을 일본 사람으로 귀화를 시켰지 뭐여. 그렇다니까, 한스 던발 그리고 수지 디메트리우스? 다 성공을 했으니까 저렇게 대접을 받는거지...어쨌거나 성공을 하고 봐야 돼! 성공을.... 안 그렇소?“
“그럼요! 그렇구 말구요” 사람들은 그의 말에 공감을 한다는 듯이 큰 소리로 대답을 하였다.
                                   *
한국 정부로부터 공식 초청을 받은 한스 던발의 영웅적인 사건과 한국 방문은 어떤 경로로 이루어졌는지 소개하고자 한다.
-2003년 11월 초였다.
태평양 넘어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 있는 리버프론트(River front Stadium, 지금은 Great American Ball Park)야구장에서 미국 직업야구 팀들의 마지막 결승전인 제 7차 전(World Series)이 열리고 있었다.
내쇼날 리그(National League)의 승자 신시내티 레즈와 아메리칸 리그(American League)의 승자 뉴욕 양키즈(NY Yankees)와의 불을 뿜는 혈투가 연장 11회말까지 가는 숨막히는 게임이었다.
(시리즈 전적은 3대3이며 마지막 게임인 7차전에서도 9회에 승부를 가리지 못하여 마침내 연장전으로 이어졌다. 운명의 11회 말이 되었다.
-2:3으로 한 점 지고 있던 신시내티 레즈는 아깝게도 2아웃에 1루에 주자가 하나 있었다.
한 선수만 죽으면 게임은 끝이 나며 뉴욕 양키즈가 우승을 하게 되는 아주 불리한 순간이었다.
  그 때 나온 마지막 선수가 바로 한스 던발이었다. 한스는 3볼 2스트라익까지 가는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리버프론트 스타디움은 흥분의 도가니로 변하였다. 관중들의 소리가 너무나 커서 옆 사람이 말하는 것이 들리지를 않았다. 그 때였다. 양키즈 감독이 갑자기 투수를 교체하였다. 최고 98마일로 던지는 숨겨두었던 괴물 투수를 내 보내어 한스를 스트라익 아웃 시키려고 하였다. 98마일 강 속구를 감히 칠만한 선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괴물 투수의 손을 떠난 98마일의 강 속구가 던발의 앞 가슴을 파고 드는 숙명적인 순간, 한스의 방맹이도 공을 향해 힘차게 스읭하고 있었다. 삼진 아웃이냐? 안타냐?
그 순간 볼은 포물선을 그리며 중견수 머리를 넘어 야외 관중석으로 떨어지는 투런, 홈런이 되었다. 마침내 신시내티 레즈는 믿기 어려운 역전 투 런 홈런으로 7차전을 이긴 것은 물론 월드 시리즈의 챔피온이 되었다. 그리고 한스 던발은 당연히 최우수 선수가 되었다.)
와! 와!---
새로 지은 신시내티 레즈의 야구장은 하늘을 찌르는 함성으로 뒤 덮혔다.
양키즈 선수들은 분한 듯이 고개를 떨군 채 울었으며 반대로 레즈 선수들과 관중들은 모자를 던지며 폭죽도 터트리며 환성을 지르고 있었다.
마침내 양키즈 선수들도 패배를 인정하고 레즈 선수들을 축하해 주었다.
‘2003년 월드 시리즈 우승팀, 신시내티 레즈. 2003년 최우수 선수, 한스 던발!’
전광판에는 붉은 글씨로 승리를 알리는 사인들이 나오고 있었다.
한국인 어머니와 흑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나 모욕과 멸시를 받아 왔던 혼혈 한스 던발이 일약 미국의 영웅이 되는 순간이었다.
“미국 야구의 영웅! 한스 던발!”
그러나 많은 미국 사람들을 더 감동시킨 것은 던발의 인터뷰에서 였다.
(“축하합니다. 최우수 선수, 한스 던발! 소감을 말해 주세요.” 장내 아나운서가 마이크를 한스에게 건네 주었다.
“아! 감사합니다. 그리고 기쁨니다. 이 기쁜 소식을 일찍이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돌립니다. 나의 어머니는 나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도 없는 나를 길러 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가치관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비록 교육을 받지도 못하고 미군 병사와 결혼하여 한국에서 살지도 못하고 쫒겨온 볼 품없는 여인이었지만 내게 있어서는 전부입니다. 어머니! 어머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모든 것이 어머니 때문에?  한스? 다시 한번 축하합니다.”)
장내 아나운서는 큰 소리로 다시 한번 축하를 해 주었다.
그러자 수많은 관중들은 일제히 일어나 한스 던발을 향해 기립 박수를 하여 주었다.
“한스! 한스! 한스!” 관중들은 소리를 쳤다.
마침내 한스 던발은 모자를 벗어 들고 관중들을 향해 큰 절을 하였다.
“던발- 더언바알- 더어언바아알-” 스태디움은 온통 에코로 공명하고 있었다.
                                   *
야구장의 관중들은 물론 TV를 통해 밤늦게 까지 야구 결승전을 시청하던 일억이 넘는 미국 사람들도 한스 던발의 말에 감동을 받았는지 숙연하였다.
-한국 사람의 피를 받은 흑인 혼혈, 한스 던발- 그는 마침내 3억, 미국사람들의 영웅이 되었다. 다음날 아침 전 미국뿐만 아니라 태평양 넘어 한국에서도 대문짝 만한 크기로 쓰여진 눈물겨운 기사가 신문에 실렸음은 당연하였다.
그들 기사들중에서,
뉴욕 타임즈에 실린 월드 시리즈 최우수 선수 한스 던발에 관한 기사는 이러했다.
-한스 던발은 6피트 3인치의 키에 195파운드로 그렇게 크 체구는 아니나 발빠른 중견수로서 타율, 3할 2분, 타점(RBI), 149, 점수(Runs),124 그리고 52개의 홈런으로 2003년 최우수 선수 및 월드 시리즈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 그는 신시내티 레즈의 전통인 비 레즈 머신(Big Reds Machine)의 괴력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개인적으로 보면 그는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던 흑인병사와 그곳에서 만난 한국인 여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로서 버림받은 어린 시절과 혹독한 인종 차별의 소년 시절을 이곳 미국에서 보냇다고 한다. 한국 이름으로는 김한수(金韓秀)라고 불리었는데 미국으로 와서는 한스 던발(Hans Dunbar)이라고 불리었다. 인동 차별의 벽에 부딪쳐 한 때는 학교에 갈 수가 없었으며 그의 생모(生母)가 1992년 5월 중병으로 죽었을 때 그는 대학을 포기하려고 하였다고 한다. 그 때 그는 그의 어머니를 치료해 주었던 수지 디메트리우스(Suzy Demetrius) 산부인과 의사의 도움을 받아 오하이오 대학에 입학하였으며 야구를 계속 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수지 의사는 한스의 이모가 되었는데 그녀도 역시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던 이름 모를 백인 병사와 한국 여성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로서 불과 9살의 코 흘리개 소녀로 켄터키로 입양되어 온 불행한 과거를 가진, 그러나 성공한 여의사라고 한다. 그리고 한스의 꿈을 키워준 또 다른 여인이 있는데, 자마이카에서 태어난 흑인 아내, 매기(Maggie)와 딸, 제인(Jane,貞花 )이 있다고 한다. 축하합니다. 역경을 딛고 영웅이 된 한스 던발!
                                            뉴욕 타임즈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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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타임즈 뿐만 아니라 한국 사람들이 많이 사는 로스앤젤스와 뉴욕의 한인타운에도 이 소식은 급속히 전달되었다.
“한스 던발! 그는 우리와 같은 한국사람이다!” 라고 사람들은 즐거워하였으며 자랑스러워했다.      
“한스 던발! 그는 효성이 지긋하다고 하던군. 그리고 한국을 사랑한다는 구먼....”
이 소문은 삽시간에 한국으로 흘러 들어 갔다.
-단일민족이기에 인종 차별이 지나치게 심하였던 한국에도 지난 10여년 사이에 왹구 노동자가 급속하게 증가하였으며 그로인해 혼혈아도 많이 생겨 나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었다.
베트남, 몽골, 방글라데쉬, 인도네시아등에서 온 남자들과 결혼한 한국 여성, 그리고 이들 국가에서 수입해온 처녀들과 결혼한 농촌 남성들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가 매년 늘고 있었기에 이젠 한국도 단일민족이라는 개념이 깨어지면서 혼혈의 문제가 점점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었다.
그러기에 던발의 소식은 한국에서 기를 못 피고 살고 있던 혼혈에게 너무나 큰 복음이었다.
“혼혈아도 성공 할 수가 있다. 세계적인 인물이 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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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한국 정부와 사회단체는 다음해인 2004년 2월, 던발과 그의 이모인 수지 디메트리우스를 초청하여 영웅적인 대접을 하게 되었다.
한국에서의 일정은 생각보다 바뻣다. 그만큼 인기가 있었다는 말이다.
“혼혈아를 대하는 사고 방식을 바꾸자. 인종 차별을 하지 말고 그들에게도 공평하게 대하자!”
미국 직업야구 최우수 선수 한스 던발의 성공담은 한국의 혼혈사회에 큰 희망이 되었으며 등대와도 같았다.
거의 한달 동안 한국에 머물러 있던 던발과 수지는 시도 때도 없이 라디오, 신문 그리고 TV에 출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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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한국 신문의 인터뷰에 실린 수지 디메트리우스 여의사의 독백과 같은 기사는 이러했다.
-나는 어떻게 하여서 태평양 넘어 미국, 오하이오주에 있는 데이톤이라는 도시에서 살게 되었을까요? 나도 모르겠습니다. 태평양에 내다 버린 종이 한장이 흘러 흘러 미국 해안에 도달하여 우연히 어느 사람의 손에 잡혀 오하이오로 오게 되었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 같군요.
나는 1952년 경기도 안성군 공도면에서 태어났지요. 공도라면? 지금은 지도에서 그 이름이 없어졌는 지 찾기도 힘들군요. 이곳에 살던 제가 어떻게 해서 오하이오주 데이톤으로 왔을 까요? 데이톤이란 도시를 아는 한국 사람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런 것을 운명이라고 해야겠지요.
1961년 9살의 코 흘리개, 김수자는 내 버려지듯이 미국 켄터키로 입양되어 왔지요. 그리고 나의 이름은 포스터로 바뀌었으며 이름도 수자에서 수지로 바뀌었답니다.
그 후 디메트리우스를 만나 결혼을 하여 디메트리우스가 되었는데 남편은 결혼 2년만에 죽고 말았지요. 혼자된 나는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마침내 산부인과 의사가 되어 지금까지 데이톤에서 살고 있답니다.
뜻밖에도 이곳 데이톤에서 나는 한스 던발을 만나게 되었지요. 그의 생모(김정희씨)가 난소암으로 나의 치료를 받게 되면서 나는 고등학교 소년인 한스를 도와 주었으며 이모와 조카의 관계가 되었답니다.
한가지...디메트리우스란 이름말입니다. 신기하지요? 옛날 1900년경, 큰 홍수로 집을 잃었던 그리스의 가난뱅이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고 합니다. 결국 나의 남편은 그리스의 가난뱅이의 후손이었지요.
디메트리우스라는 이름중에 그래도 디메트리우수 1세라는 왕은 인도까지 정벌한 위대한 왕이었지요마는....
그리고 던발이란? 혹시?
아- 아시는군요. 던발이란 이름은 데이톤에서는 꽤나 유명한 이름이지요. 던발이란 켄터키에서 살던 흑인 노예, 던발이 링컨 대통령의 노예 해방으로 인해 자유를 얻고 오하이오주 데이톤으로 이주하였지요.  그의 후손인 폴 로렌스 던발(Paul Laurence Dunbar, 1872-1906)은 이렇게 하여 데이톤에서 태어난거지요. 그는 흑인으로서 아주 유명한 시인이 되었지요. 데이톤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시인으로.  그렇다고 한스가 그의 후손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
나는 이렇게 하여 오하이오주 데이톤에서 살게 되었답니다.
데.이.톤.(D.A.Y.T.O.N)이라는 도시에서.....
                                *
한국을 방문한 수지와 그의 조카, 한스는 서울에서 바쁜 일정을 소화한 후 그들의 고향인 오산과 공도를 방문하였다고 한다.
정작 그들을 알아보는 고향 사람들은 없었으며 그들이 기억하고 있던 시골의 집들도 없어 졌다고 한다.
-한스 던발이 그의 고향, 오산에 갔을 때, 고향사람들은 “김정희? 정희? 아! 흑인 아이를 낳고 숨어서 살던 처녀? 그리고 미국으로 쫒겨 갔었는데..그 때 그 껌둥이가 바로 야구 선수가 되었다고? 와! 그 집 식구들은 동네가 창피하다고 모두 이사를 가 버렸었는데...”라고 말하는 것이 고작이었으며 한스는
정작 친척을 하나도 만나보지는 못하였다고 한다.-
                      *
그러나, 수지의 경우는 다소 달랐다고 한다.
-수지는 그녀의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났거나, 아니면 살아 있다고 해도, 이번에도 1971년 5월 달 처럼, 딸을 만나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을 하고 한국을 찾아 왔다고 한다.  
왜냐하면, 1971년에 못 만났던 어머니가 33년 후인 2004년에 새삼스레 수지를 만나 줄 것 같지 않다고 생각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못 만나더라도 꼭 만나야 할 남자가 하나 있었다.
수지보다 세 살 더 많은 강석호(姜錫浩)라는 외과 의사였다.
강석호라는 남자? 그는 수지의 고향 오빠였다. 어머니보다도 더 소중할 뿐만 아니라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오빠였기에 수지는 죽기 전에 그와 결혼하려고 마음을 먹은 남자였다. 강석호 오빠란 수지가 공도에 살 때 바로 앞집에 살면서 수지를 마치 친동생처럼 대해 주었던 세 살 더 많은 인정 많은 오빠였다.
“강석호 오빠? 꼭 만나야해. 꼭. 나, 오빠를 이번에 만나지 못한다면 차라리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을거야....”-
                             *
그러나 한국을 방문한지도 3주가 지났으며 TV, 라디오 그리고 신문에 그들의 이름이 수없이 오르내렸으며 그들을 찾는다고 광고를 수도 없이 하였는대도 불구하고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어머니도 그리고 강석호 오빠로부터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아-이번에도 어머니와 석호 오빠를 못 만나다니.....” 수지는 우울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을 떠나기 꼭 일주일전 어느 오후 수지는 한 통의 전화를 받고 놀랐다.
놀랍게도 그 전화는 꿈에도 그리고 그리워하던 강석호 오빠로부터 온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수지? 나, 석호 오빠야.“
   “예? 오빠라고? 석호 오빠?‘
  “그래, 나 석호 오빠야.”
  “석호 오빠? 어디에 있어?  말리(Mali)? 아니면 여기 한국에? 그런데 한국에 있다면 왜 나를 만나지를 않는거야?”
     (주: 말리(Mali)는 서 아프리카에 있는 나라이며 이곳에서 강석호 의사가 의료 선교를 하였음)
“아-수지! 그렇게 되었어. 용서해주기 바래.”
“용서라니, 오빠? 지금 말리에 있는거야? 아니면 한국에?”
“수지? 나, 지금 한국에 있어. 그렇지만 나는 수지, 너를 볼 수가 없어. 그러니 그냥 미국으로 돌아가거라.”
“그냥 가라고? 오빠! 한국에서 만나, 우리, 결혼하기로 서로 약속하지 않았어? 오빠? 나, 수지는 오늘 여기 한국에서 오빠하고 결혼을 하려고 찾아 왔어.  5년을 기다렸어..오년을....그런데 그냥 돌아가라고? 오빠 나는 결코 그냥 못 돌아가...‘
“알아. 그래도 그냥 가거라.”
“오빠? 한번만 만나면 안될까? 결혼은 안해도 좋으니, 한번만, 먼발치에서라도 좋으니..나를 만나면 안될까?.”    
“꼭 만나야 겠니, 수지야?”
“물론이지. 나, 오빠만을 생각하며 오늘날까지 살아 왔으니까...”
“나도 그랬어. 그러니까, 그냥 가거라. 오빠는 너를 볼 수가 없어.”
“볼 수 없다니?”
“수지야? 아무래도 우리는 인연이 아니었나봐. 그러니 그냥 가거라.”
“안돼! 오빠!”
“..............”
“그런데 석호 오빠? 내 어머니는 어디에 있어? 어머니는?”
“어-너의 어머니? 일년 전에 돌아 가셨어. 내가 말리에 가 있는 동안에...너를 못보고 네 이름만 부르다가 돌아 가셨어.”
“오빠? 어머니가 죽었다고?”
“그래, 너에게 알려 주지 말라고 당부하였어. 그리고 어머니의 유언대로 화장을 하여 안성천에 뿌렸어.”
“화장을 하여, 안성천에 뿌리다니? 어머니를?”
“그래, 수지야.”
역시 침묵이 흐르고 있었으며 전화 속에서는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대 오빠? 왜, 나를 피하는거야?”
“피하는 것이 아니야, TV에서 나는 너를 많이 보았으니까.. 아직도 수지, 너 예쁘구나. 나중에 보자꾸나. 잘가라! 수지야!”
“그냥 가라구, 오빠?”
“그래, 나는 너를 내 마음속에 간직한 채 살고 있어. 사랑해, 수지야! 너와 나 데이톤에서 며칠 같이 지냈었지. 그뿐인가 수지야, 너는 나를 찾아 말리로 왔었지. 그리고 너와 나 며칠을 같이 지냈어. 그것으로 나는 만족해. 그러기에 너는 나의 영원한 연인이야. 평생 간직할 연인이야. 그러니 그냥 가거라.”
“오빠, 그건 안돼!”
“그냥 가거라, 수지야! 나는 너를 사랑해. 안녕!”
그리고 전화는 뚝 끊어지고 말았다.
“아니! 오빠! 전화가...전화를 끊다니...”
끊긴 전화기를 들고 수지 디메트리우스는 엉엉 울고 있었다.
                                  *
참으로 안타까운 전화였다.
43년만에 찾아 온 조국에서 수지는 어머니의 죽음을 알게 되었으며 결혼을 하려고 하였던 석호 오빠는 수지를 만나주지 못하겠다는 전화였으니....
“어머니! 어머니!”수지는 목놓아 울었다.
-1952년 6.25 전쟁의 와중에서 미군 병사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수지...
그리고 어머니에 의해 버려졌던 혼혈의 아이....
9살이 되던 해에 그녀는 거지처럼 버려져, 미국으로 입양되어 갖지만, 그녀는 어머니를 한시도 잊어 본 적은 없었다.-
그뿐인가? 그토록 수지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 주었던 사랑하는 오빠, 강석호도 못 만나고 가다니...
“석호 오빠? 오빠. 한 번만 보면 안될까?”
(-문득 1961년 5월 어느날, 코 흘리개 혼혈 소녀 김수자와 세 살 더 많은 강석호 소년이 이별을 하던 장면이 수지의 기억에서 떠 오르고 있었다.
1961년이라면? 지금으로부터 무려 43년 전의 일이었다.
경기도 안성군 공도면에 있는 작은 초가집에 살고 있던 김수자(당시 3학년)라는 혼혈의 아이는 울고 있었다. 아버지가 살고 있다는 미국으로 입양되어 가는 날이 다가 왔기 때문이었다.
“미국으로 안 갈래! 안가! 나 여기서 살거야.” 어린 수자는 큰 소리로 울고 있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너의 아버지가 사는 미국에 가서 살아야지. 너의 아버지는 백인 장교 출신이며 켄터키에서 아주 부자란다. 아주 부자!” 짙은 화장을 한 어머니(김옥희)가 큰 소리로 말하더니, “예잇 쌍!” 소리를 내면서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 때, 집으로 달려 들어 온 소년이 바로 오빠 강석호(6학년)였다. 헐래 벌떡이는 것으로 보아 그는 학교에서 급히 달려 온 듯 하였다.
“수자야? 너, 미국에 간다며? 언제?”
“오빠, 나, 안 갈래. 안가!”
“그래, 수자야! 가지마라. 여기서 우리하고 같이 살자!”
석호 오빠란, 앞집에 사는 세 살 더 먹은 남자 아이였는데 따지고 보면 친척도 아니었다. 그저 앞집에 살며 친하다보니 오빠라고 부른 것 뿐이었다. 그러나 오빠 강석호는 수지에게 있어서는 어린 그 때부터 지금까지 마음속에 등대처럼  생각하며 살아온 남자였다. 학교에 가던 놀이터에 가던 석호 오빠는 혼혈인 김수자를 보호해 주며 이끌어 준 아버지 같은 오빠요 보호자였기에 수자의 마음 속에서는 결코 떠나지 못할 존재였다.
울고 있는 아홉살, 코 흘리개 수지를 꼭 안아 주며 달래어 주었던 아버지 같은 오빠였다.-)
                                 *
그런 석호 오빠가 43년만에 한국을 찾아 온 수지를 만나주지 않다니....
“오빠? 그냥 가라고? 그래 목소리라도 들었으니 나는 그것으로라도 만족해. 오빠를 잊지 않고 다시 찾아 올께...사랑해, 오빠!”
수지는 전화기를 전화통에 다시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녀는 한바탕 울고 말았다.
이번에도 어머니를 못 찾은 것은 물론 그토록 사랑하던 오빠 마저 볼 수가 없다니...모든 것이 우울하였기 때문이었다.  
                                    *
반면 한스 던발은 혼혈아들을 돕는 복지 기관을 방문하여 지속적으로 그들을 돕기로 약속을 하였으며 차후 부인과 아들을 동반하여 한국을 다시 방문하겠다고 약속을 하였다.
비록 어머니의 고향에 찾아가서 친척들은 만나 보지 못하였으나 대신 그는 한국에 있는 혼혈아동들을 돕는 재단을 만들기로 약속을 하였으니 큰 성과를 거둔 셈이었다.
며칠 후, 수지와 한스 던발은 극진한 대접을 받은 한국을 떠나 그들이 살고 있는 오하이오 주 데이톤으로 돌아감으로 한 달간의 고국 방문을 마무리하였다.
그들이 한국을 떠나던 날인 2004년 3월 15일자 모 일간 신문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다.
   -야구로 성공한 한스 던발은 한국에 살고 있는 수많은 혼혈아와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크나큰 희망을 던져 주고 갔으며, 어머니에 대한 그의 효도는 잊혀져 가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효심과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등대가 되었다.-

(주: 2003년도 월드 시리즈 챔피온은 아나하임 엔젤스였으나 이 소설에서는 신시내티 레즈로 하였음을 이해하기 바람.)    

2장. 데이톤이란 도시는?

미국의 지도를 놓고 오하이오주를 찾아보면 신시내티와 콜럼브스의 사이에 데이톤이라고 하는 꽤 큰 도시가 보인다.
오하이오 남부에서 가장 큰 도시 신시내티(인구 250만)와 주 청사가 있는 콜럼브스(인구 100만) 그리고 데이톤(인구 75만)이 마침 삼형제 처럼 밀집하여 있어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리고 문학과 스포츠도 더불어 같이 하는 아주 가깝고 친밀한 도시들이다.
                         *
“데이톤(Dayton)?
  데이톤이라고 하면 잘 모르겠지만 데이톤에 있는 몇 군데 명소를 소개하면, “아! 거기?”라고 대답을 하게됩니다.
여러분은 비행기를 만든 라이츠 형제를 아실겝니다.
형, 윌버 라이츠(Wilbur Wright, 1867-1912)는 인디아나 주에서 태어났으나 네 살 아래 동생, 올빌(Orville Wright, 1871-1948)은 데이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이 둘은 이곳 데이톤에서 자전거 회사를 설립하였으며 후일 사재를 털어 ‘나르는 기계, 비행기’를 만들었습니다.  물론 비행기를 처음 띄운 곳은 노스캘로라이나의 키티 혹크이지요. 그래서 데이톤을 ‘항공기의 출생지’라고 부른답니다. 이차대전이 끝난 후 데이톤에 라이츠 기념 공원과 박물관이 건립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는 라이츠 패터슨 공군기지가 있답니다.
공군기지라구요? 그렇습니다. 라이츠 패터슨 공군기지 덕분에 데이톤에는 한국에서 온 국제 결혼 여성들이 많이 살고 있답니다. 그러기에 야구 최우수 선수가 된 한스 던발의 어머니도 이곳 데이톤으로 오게 된 거지요. 그리고, 수지 포스터라는 여인도 이곳 공군 기지에서 일하고 있던 디메트리우스를 만나 결혼하였기에 데이톤에서 살게 된거지요.
여러분!
데이톤하면, 라이츠 형제, 그리고 비행기가 만들어 진 곳으로 기억하세요.
그리고 여러분! 데이톤이 자랑하는 또 한사람이 있습니다.
-20세기초에 미국에서 유명하였던 흑인 시인, 포올 로렌스 던발(Paul Lawrence Dunbar, 1872-1906)입니다.
1860년경, 아브라함 링컨이 노예를 해방시켜 주었을 때, 흑인 노예였던 던발의 아버지는 켄터키에서 데이톤으로 이사를 왔다고 합니다. 포올 던발은 많은 시를 발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고등학교 시절(1890년), 라이츠 형제들과 친구였다고 합니다. 아깝게도 던발은 34세의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인해 사망하였답니다. 데이톤에 던발 공원이 따로 있는 것으로 보아 비록 흑인이기는 하였으나 그는 데이톤이 자랑하는 시인입니다.
그렇다면 “한스 던발은 그의 후손이냐?” 라고 묻는다면 대답을 하기가 어렵군요. 한스의 아버지는 공부도 별로 하지 않았으며 알코홀 중독자였습니다. 아마도 별로 연관이 없는 듯 하군요.
자! 데이톤이 자랑하는 또 한가지가 있답니다.
- 여러분이 식당이나 백화점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금전 계산기가 바로 데이톤에 있는 NCR회사의 제품이지요.
NCR회사는 데이톤에 있으며 이곳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무려 3만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회사에서 한스의 어머니, 김정희(金晶姬,Jennifer)씨가 낮에 여덟 시간을 일하였으며 밤에는 미국 식당에서 새벽까지 일을 하여 번 돈으로 한스를 먹여 살렸으며 학교에 보냈답니다. 1975년부터 1989년까지 14년간을 김정희씨는 이곳 NCR에서 일을 하였답니다. (주:NCR: National Cash Register Co.)
데이톤이 자랑하는 또 한 사람은 신시내티 레즈에서 중견수로 활약하였던 조지 포스터(George Foster)입니다.
  -데이톤 남쪽에 살면서 신시내티 레즈 팀에서 맹활약을 하여 1975, 그리고 1976년에 월드시리즈 챔피온이 되었으며 다음해인 1977년에는 야구 최우수 선수가 되었지요. 비록 신시내티 레즈 팀은 신시내티에 있지만 25-30%의 관중은 데이톤에 온 사람들이기에 신시내티-데이톤 레즈팀이라고도 불린답니다.
한스 던발은 조지 포스터를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한스가 2003년도 미국 프로야구의 최우수 선수가 되었을 때 공교롭게도 모든 기록이 그와 아주 비슷하였습니다.
신시내티 중견수에 6피트 3인치, 195 파운드에 타율 3할 2푼에 타점 156, 그리고 홈런이 50개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조지 포스터와 한스 던발은 아주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는 말입니다.-
                              *
또 한가지, 여러분에게 꼭 알려 주고 싶은 것은 데이톤시에는 한국에서 온 국제 결혼한 여성들과 혼혈아들이 많다는 것이지요.
-혼혈도 혼혈 나름이지 백인과의 혼혈이 흑인과의 혼혈보다는 분명히 사람 대접을 더 받는 것 같은데 이곳 데이톤시에 있는 한국인 교회에 와보면 흑.백, 혼혈 그리고 한국 사람들이 다같이 어울리기에 한국 교회는 마치 인종 전시회장 같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인과 결혼한 미국인 남편들이란 알코홀, 약물 중독으로 얼룩진 인간 쓰레기 같은 사람들도 부지기수였기에 떠들 썩 하답니다.
참으로 사람의 인연이란 묘한 것입니다. 이곳 교회에서 한스 던발의 어머니인 김정희씨와 수지 디메트리우스도 같이 예배를 본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데이톤시에 있는 한국인 교회는 한국에서 온 혼혈아들과 국제 결혼 여성들이 미국 사회와 연결되는 고리와도 같은 인간 용광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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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이 다 아시다시피 오하이오 강은 멀리 펜실바니아주 북동쪽의 알리게니 강에서 시작되어 구불구불 흘러 나려오다가 피츠버그를 지나면서부터 오하이오 강이라고 불리우는데, 웨스트 버지니아를 지나면서 오하이오강은 더 큰 강이되어 켄터키주를 거쳐 미시시피강의 본류와 합치게 된다고 합니다.
신시내티와 켄터키를 가로지르는 오하이오강에 걸려 있는 켄터키 다리를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켄터키 다리 중간에 만들어 진 관망대에서 수지 디메트리우스와 한스 던발은 멀리 서쪽 하늘을 바라다보며 쫒겨 온 조국, 버림받은 조국, 한국을 바라다보며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한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과연 한국에서 버림받아 이곳 미국으로 쫒겨 온 혼혈아들의 마음속에도 조국이 있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데이톤에 가 보면 그 대답을 쉽게 얻을 수가 있을 것 같군요.

3장. 1989년 겨울(1월)에 데이톤에서 만난 한국 사람들
    
수지 디메트리우스(이하 수지라고 부름)는 1987년 6월, 산부인과 수련 과정을 마친 후 데이톤 다운타운에 있는 굿 사마리탄 병원(Good Samaritan)인근에서 개업을 시작하였다. 다소 허름한 이층 건물의 아래층에 ‘디메트리우스 여성 크리닉(Demetrius Women Clinic)을 개설하였는데 데이톤에 사는 국제 결혼 여성들은 한결같이 이 진료실로 찾아 왔다. 왜냐 하면 수지는 그들과 같은 혼혈의 여성이기 때문에 그래도 마음속에 의지하고 믿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인의 피를 받은 혼혈 여성들과 흑인과 결혼한 한국 여인들은 수지를 그들과 같은 부류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수지는 우리들과는 달라! 그녀는 백인의 피를 받았어! 그뿐인가, 그녀의 아버지는 켄터키에 사는 부자이며 장교 출신이라고 하던데...그러기에 그녀는 의과대학을 나와 의사가 되었어...그러니 우리와는 달라.. 그러니 우리처럼 흑인의 피가 섞였거나 흑인과 같이 사는 한국 여자들의 서러움을 몰라! 절대로 몰라. 왜냐구? 그녀는 백인이나 마찬가지이니까 아무래도 우리들을 깔 보겠지. 안 그런가?”라고.
비록 생각은 그러했지만 그들은 한국 말도 하며 한국 사람을 이해하는 산부인과 의사가 절대적으로 필요 하였기에 수지의 진료실은 늘 바뻣다.
                                     *
그리고 2년 후인 1989년 정월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친절한 산부인과 의사로 소문난, 수지는 밤낮 없이 응급실로 불려 다니는 바쁜 의사였다.
잠시 수지가 산부인과 의사가 된 경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았다.
-수지가 켄터키 주 코빙톤에 있는 주립대학을 거쳐 루이빌 대학교를 졸업한 것이 1974년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졸업을 손 꼽아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아리스테 디메트리우스’라는 그리스계통의 백인 남성이었다.
아리스테는 수지보다 다섯 살이 더 많았는데 1961년, 불과 9살의 코 흘리개 수지가 한국에서 버려지다시피 켄터키주 코빙톤으로 입양되어 왔을 때부터 알게된 가족 같은 남자였다.
아리스테의 아버지는 수지가 입양되어 온 포스터씨의 가족이 경영하는 자동차 정비소와 옥수수 농장에서 노동자로 일을 하고 있었다. 미국을 잘 모르고 온 불쌍한 수지를 여러모로 도와주었기에 수지는 자연스럽게 그를 오빠라고 불렀다. 수지가 대학에 들어가던 그 해 아리스테는 대학을 졸업하고 공군에 입대하였으며 자원하여 월남전에 전기 기술장교로 참전하였다. 물론 그 때, 수지는 아리스테와 결혼을 약속하였다. 월남에 가 있는 동안 우려했던 일이 생겼다. 평소에 우울증과 조울증이 있었던 그는 월남 다낭에서 정신발작증세를 일으키고 말았다. 그 결과 그는 괌(Guam)도를 거쳐 미국으로 후송되었으며 마침내 제대를 하였다. 제대를 한 그는 데이톤에 있는 라이츠 패터슨 공군기지에서 전기기술자로 취직을 하였다. 그리고 그는 데이톤에 작은 집을 마련하였으며 졸업을 한 수지와 가까스레, 그리고 마지 못해 결혼을 하였다.
수지와의 결혼은 불행의 연속이었다. 임신을 한지 3개월 후 유산이 되었으며 그 후 아리스테는 알코홀을 마시기 시작하더니 끝내 알코홀 중독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아주 무능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심한 열등의식과 우울증으로 그는 마침내 자살을 하여 죽고 말았다.  어이없는 허망한 죽음이었다.
그런데 이 허망한 죽음에는 그런대로 이유가 있었다.
(아리스테는 그의 아내가 된 수지의 지갑에서 숨겨둔 한 소년의 사진을 보게 되었다. 그 사진은 미국으로 입양되어 오기 전에 공도에서 찍었던 석호 오빠의 사진이었다. 내성적인 아리스테는 이 사진의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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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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