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나를 인정해 주다니......

2007.11.12 08:59

연규호 조회 수:828 추천:96

그게,  나의 친구, 동창들이라니......감격, 감격 뿐입니다.

“의과대학 동창회장이 2007년 1월 27일, 부족한 나에게 공로패를 주시다.”
                   *
너무나도 뜻밖의 상패를 받으면서 나는 감격에 겨워 울고 말았다.
나는 지금 까지 살아 온 63년 인생이 “과연 정말 잘하고 있었는가?”라는 스스로의 질문을
나 스스로에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평가를 해 주어야 하였기 때문이었다.
“연규호? 너의 인생은 성공이었어....아냐, 실패였어...”
엇갈리는 대답을 듣고 있었다.
마음 아픈 것은 나의 주위에 있는 친지들로부터 “그래, 너의 인생은 성공적이었어..”라는 대답보다 “연규호, 나의 인생은 그저 그랬어...”라는 대답을 듣는 듯 하였다.
도리켜 보니 그런 대답을 받을 만도 하였다.  
- 왜냐하면, 내과 의사로서 살아 온 지난 38년, 나의 주류 환자는 한국에서 이민 온 한국 사람, 멕시코를 비롯한 히스페닉, 월남 피난민들 그리고 가난하고 갈곳 없는 백인, 흑인들이었다.
의료 선교라고는 하나 역시 과테말라 산중에 사는 가난하고 헐벗은 마야, 인디안들이 나의 선교의 대상이었다.
50이 넘어서 시작한 나의 문학은 비록 열정을 가지고 글을 썻다고는 하나 좋은 작품도 없었다. 영어로 그리고 스페인어로 번역을 하였지만 어느 누구 하나 칭찬해 주는 사람은 없었기에 나는 좌절과 절망에 빠진 적도 있었다.
그래도, 과테말라에 세워진 무료 진료소와 과테말라 도서관에 비치된 나의 소설, 마야의 꿈을 읽었다고 하는 독자가 몇 명 있었기에 나는 그래도 한 가닥의 기쁨을 가지고 나의 소설 쓰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이것이 나의 현실이었다.-
                               *  
10월 7일부터 15일까지 나는 하와이에서 의과 대학 동창 모임을 갖게 되었다.
하와이 섬들을 순항하는 크루즈에서 나는 나의 동기동창들과 선후배, 약 400명을 만나게 되었다.
반가웠으며 보고 싶은 얼굴들이기에 나는 마치 어린 시절로 되 돌아 간 듯 하였다.
환자를 보는 것보다 더 좋았으며 아열대의 야자나무 그리고 이국적인 하와이의 섬들, 카우이, 마우이, 몰로카이, 오하우 그리고 하와이 섬을 돌면서 나는 어린아이가 되었다.
망망한 바다를 바라다 보며 나는 멀리 내 고향의 언덕을 바라다 본다고 착각도 하였으며 사진을 찍으면서 고향 친구를 만나다고 생각을 하였다. 모두다 늙어 있었다. 할아버지가 되었으며 할머니도 되어 있었다.  
뜻밖의 사건이 나에게 생기었다.
-10월 13일, 하와이 힐로에서 동창회가 열렸다.
400여 동창 식구들이 교가도 부르고 모교의 현황을 영상을 통해 바라다 보았으며 훌륭한 교수님을 기리는 공로패가 주어 졌으며, 전년도 동창 회장에게도 큰 공로상이 주어졌다.
그 때, 나에게 뜻박의 사건이 발생하였다.  
“연규호 동문! 앞으로 나오세요!”
나는 뜻밖의 호출을 받고 의아하여 단으로 올라갔다.
가슴이 떨리며 조마조마 하였다. 나쁜 일은 아닌 것 같았는데 과연 무슨 일로? 나를 단위로 불렀을까?
“왜? 아마 동창회를 위해 모자와 샤쓰를 도네이손 하였기에 작은 상을 주려나 보다라고 추측을 하였는데 뜻밖의 내용이었다.
(“공로상. 연규호 동창(1969)
   귀 동창께서는 한국문인협회 및 미주 한국 문인협회 회원으로서 환자진료와 의료 선교등으로 바쁜 일정에서도 여러 소설을 집필하시고 영어와 스페인어로 번역하여 널리 읽히게 함으로서 모교의 위상을 높이셨습니다. 매우 드믄 의사문인으로 동창들의 모범이 되시고 모교와 동창회 발전에 기여 하신바 크므로, 전 동창의 마음을 담아 이 패를 드립니다. 2007년 1월 27일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총동창회 회장 이승호.”)
“아_” 나는 순간 눈앞에 감격의 눈물이 흐르는 듯 하였다.  
환자진료와 의료선교의 바쁜 일정에서 소설을 집필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였기에 모교의 위상을 높였으며 남의 모범이 되었다는 글의 내용이 어쩌면 이토록 나를 100% 표현하여 인정하였단 말인가?
의사로서 위대한 진료를 하였다는 것도 아니며, 좋은 연구 논문을 써서 의학에 지대한 발전을 하였다는 내용도 아니었다.
보잘 것 없는 환자들을 돌보며 가끔 과테말라에 가서 도와 준 것일 뿐...그리고 소설같지도 않은 작품을 써 온 것 뿐이었는데...
이런 것을 인정해 주다니....눈물이 콕 솟았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나는 모교를 위해 한 일이 하나도 없었다. 하루 하루 먹고 살기 위해 나를 위해 뛰어 다닌 것 뿐...
모교를 위해 변변히 헌금을 한 것도 없으며 좋은 논문으로 학교를 빛낸것도 없을 뿐 만 아니라 명색이 내과 전문의사라고는 하나 남들 3년에 마치는 것을 뉴욕 오하이오로 다니며 5년, 그리고 남들은 단 한번에 합격하는 전문의사 시험도 여러차례 응시하여 겨우 함격을 하였으니 후배들 앞에 당당히 서서 가르쳐 줄 학문적인 실력도 없었다.
“그래도 내가 학교의 위상을 높였다고? 아니올시다.”  
사실이 그러했다. 나의 일상 생활은 나를 위한 바쁨의 연속이었을 뿐이었다.
                          *
누군가가 나를 인정해 줄 때 나는 기쁘기 마련인데 그 누군가가 바로 나의 친구들, 의과대학 동창들,,,,그들이었다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울고야 말았다.
“나의 친구들이 나를 인정해 주다니.......나를...
오늘 받은 이 상은 내게 있어서는 가장 자랑스럽다 못해 이젠 이 세상에서 더 받을 상은 없다고 생각한다.
바라기는 더 열심히 겸손하게 주어진 일을 계속하여 내가 죽는 날, 하나님이 “착한고 성실한 종, 1969년 졸업생, 연규호” 라고 인정해주는 상을 받는 것만이 남앗을 뿐이다.
                       *
결국, 나는 모교 동창회 장님, 아니 동문들에게 감사의 편지를 써야 했다.
“존경하옵는 동창 회장님 그리고 동문님들!
멀리 미국 남가주에서 한국 이민자들, 히스페닉 그리고 소수 민족들을 상대로 27년간 개업을 해 온 무명초와 같은 의사 연규호입니다.
무명초라고 하였습니다. “밤에 피었다가 새벽이 되면 져 버리는 꽃....”
꽃이 화사하지도 못하고 향기도 별로 없기에 남들이 보는 낮에는 피지 못하고 남들이 안보는 밤, 초저녁에 피었다가 새벽 먼동이 트면 사라져 버리는 수줍고 볼품없는 꽃, 무명초(無名草).......
회장님, 저는 무명초였습니다. 어떻게 어떤 연유로 멀리 미국에 와서 살고 있는지도 모르며 남들은 쉽게 이룬 내과 전문의사 자격도 여러차례 낙방 끝에 겨우 턱걸이로 합격하여 겨우 명색을 지켜 왔지요.
의과 대학을 졸업한 이후 의학 논문 한편 써보지도 못하고 집 값 내고 먹고 살기 위해 밤낮으로 뛰어 다니다가 50이되던 해, 훌륭한 동기 동창의 죽음을 목격하곤 “아-이게 아닌데...”라고 뒤 늦게서야 나 자신의 존재를 알게 된 후, 인도네시아와 과테말라에 찾아갔지요.
그곳에서 만난 가엾은 마야의 인디안들은 마치, 나의 어린 시절, 바로 그 모습이었습니다. 길게 늘어서서 나의 진료를 기다리는 환자들 속에서 나는 나의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을 발견한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더 이해 하고 싶어 그들의 슬픈 역사를 소설로 만들어 그들을 위해 그리고 내가 매일 만나는 나의 환자들을 위해 영어와 스페인어로 번역을 하였습니다. 그들과 더 친해 지고 싶어서....
그러다보니 어느새 62세가 넘어 63세가 되는군요.
모교를 위해 한 것이 없는데...제게 이런 상을 주시다니요. 아니 인정을 하시다니요.
회장님! 저는 지금까지 보잘 것 없는 무명초라고 생각하며 살아 왔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뜻밖의 공로상을 주시면서 “모교의 위상을 높이고, 동창들의 모범이 된다고”하셨지요.
“정말 그럴까요? 그렇다면 저는 너무나 마음이 뿌듯합니다. 낮에 당당하게 피는 꽃이 되고 싶었으니까요....”
지금까지 살아 온 것에 약간의 자신감을 갖게 되는군요.
그리고 “앞으로 더 겸손하게 살으라고 하는 채찍”으로 받아 들이고 싶군요.
회장님, 주신 상패 정말 저에게는 한 없는 격려를 받는군요.
그래도 무명초처럼, 밤에 피었다가 밤에 지는 꽃으로 살렵니다. 무명초의 인생이 제게는 더 편하고 격에 어울리기 때문이지요.
열심히 살렵니다. 이 세상을 떠나는 날, 하나님이 “착하고 성실한 종 연규호, 너와 내가 같이 안식을 하리라”라는 상을 받고 싶은 마음으로......
감사합니다. 회장님!
                연세의대 미주 총 동창회, 하와이 크루즈를 다녀 온
                1969년 졸업,  연규호가
                        남 가주, 가든그로브 한인타운에서
                                            삼가 드림니다.      
                                                    10-27일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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