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풍란의 비밀

2012.12.09 13:07

연규호 조회 수:250 추천:44

단편 소설집, 15편 모음집 파도(波濤)에 묻힌 비밀(秘密) 저자: 소설가, 연규호 (延圭昊) 작가의 말: "나는 환자로부터 얻은 비밀을 누설하지 않을 것을 선서합니다." 1969년 2월 21일, 오전 10시. 의과대학 졸업식 날, 교정에는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날 나는 분명히 교수님 그리고 부모님들 앞에서 오른손을 높이 들고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의 선서를 우렁차게 외쳤습니다. “나는 환자로부터 얻은 비밀을 누설하지 않을 것을 선서합니다.”라고. 그런데 나는 환자로부터 얻은 비밀을 누설하고 있습니다. 허구 속의 진실(소설)을 만든다는 명목으로... 그래도 되나요? 어쩔 수 없죠. 의사 44년, 오늘은 창밖에 비가 내리는군요. 비를 좋아하며 함박눈도 좋아 한 사람들의 슬픈 얘기들이 파도에 묻혀 있습니다. 그 비밀들을 단편소설 속에 담아 봅니다. 11-1 2012 소설가(小說家): 연규호(延圭昊, Kyuho Yun, MD) 목록: 1-단편소설: 풍란(風蘭)의 비밀(秘密) 2-단편소설: 회오리바람(突風,Tornado)의 비밀(秘密) 3-단편소설: 유전인자(遺傳因子)의 비밀(秘密) 4-단편소설: 바닷물에 묻혀 5-단편소설:돌계단의 비밀 6-단편소설: 망상(妄想) 환자(患者)의 비밀(秘密) 7-단편소설: 샤이엔강의 사랑 8-단편소설: 소록도로 가는 길 9-단편소설: 마야의 별들 10-단편소설:빙산의 구각 11-단편소설:아내의 파란 눈동자에 비친 내 얼굴 12-단편소설:사자사냥 13-단편소설:내가 만든 감옥 14-단편소설:어느 미주 교포의 3일 15-단편소설: 집시의 별(The Star of GYPSY) ******************************************************************* 1-단편소설: 풍란(風蘭)의 비밀(秘密) 2010년 10월 9일, 오전 10시, 서울시장이 시청광장 시상대에서 내 손에 사회봉사 상(社會 奉仕賞), 트로피를 직접 건네주었을 때, 나는 번쩍거리는 은빛 트로피를 수많은 사람들에게 높이 들어 올려 보여주었다. 순간 나를 향한 박수소리와 사진기자들의 셔터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었는데, 아직도 내 귓속, 고막 뒤에 있는 달팽이관에서 왕왕왕--, 울리고 있는 듯하다. 뿐만 아니라, 선(善)한 사마리아사람(Good Samaritan)이라고 대서특필해준 신문 방송과 티비(TV)를 통해 비춰준 뉴스가 아직도 생생하게 눈앞에서 아른거리고 있는, 2010년 10월 9일 오후 6시. 내가 번쩍이는 은빛 트로피를 두 손에 받쳐 들고 홀로 서 있는 이곳은, 특별한 목적도 없이 사람들이 바쁘게 오고 가는 영등포역이 가깝고, 경적을 요란하게 울리며 달리는 자동차들로 빼곡한 경인로(京仁路)가 지척에 있는 곳. 하급 경찰관들이 신경질을 부리며 24시간, 연중무휴로 근무하는 영등포 경찰서 파출소가 코앞에 있는 '영등포 쪽방 촌'의 한 외진 골목길이다. 오후 한 시가 되면서부터 구름이 몰려오더니 궂은비가 하염없이 내리고 있으며 어둠이 점점 다가오자 여기저기에서 화려한 네온사인들이 불을 붙이기 시작한다. 낮잠을 자다가 깬 젊은 윤락녀들이 기지개를 켜며 먹이를 기다리는 여우처럼 좁고 냄새나는 골목길에서 호들갑을 떨고 있는가 하면 검은 옷에 검은 안경을 쓴 험상궂게 뵈는 기둥서방 녀석들이 가끔 눈에 띄는 것으로 보아 바쁘고 요란한 쪽방 촌의 저녁 영업시간이 가까워진 듯하다. '하염없이 내리는 가랑비'를 맞으며 바라다본 쪽방 촌의 좁고 외진 골목길, 어제까지도 켜졌던 가로등이 오늘따라 들어오지 않아 주위가 캄캄해 보였으나 반쯤 빠끔히 열린 판잣집 문틈으로 나이 든 아주머니와 젊은 색시가 고구마를 먹고 있는 모습이 희미한 전깃불에 비쳐 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내게 들려오는 작고 가는 그리고 울면서 호소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분명히 가냘픈 어느 여인이 흐느껴 부르는 유행가의 애틋한 가사를 들으며 나는 내 마음을 가눌 수가 없다. -궂은 비 하염없이 쏟아지는 영등포의 밤, 내 가슴에 안겨오는 사랑의 불길, 고요한 적막 속에 빛나던 그대 눈동자.....- 그 찰라 나는 내 콧속으로 스며드는 천리향, 풍란(風蘭)의 향긋한 냄새를 맡는 듯했는데 마치 코카인 주사를 맞고 환청(幻聽)과 환각(幻覺) 속에서 허상(虛像)을 바라보며 두 손을 뻗쳐 허우적거리는 약물 중독자처럼 내 몸과 마음을 도저히 가눌 수가 없다. * 여기 영등포 쪽방 촌은 물론 온 서울사람들은 나, 김가형(金加亨) 목사를 불러 가련하고 힘없는 쪽방 촌의 윤락녀(淪落女), 독거노인, 불량배 그리고 장애자들을 몸과 마음으로 돕는 진정한 이웃이요 친구라고 불러 주었다. 그러기에 오늘 나는 그 선행이 높이 인정돼 서울시장이 직접 수여한 '사회봉사 상'을 받았다. '김가형 목사는 천사요.'라고 사람들은 나를 칭찬해 주었는데, 남들 눈에는 천사처럼 보이겠지만 오늘까지 오기에 나는 너무나 힘들고 지친 인생을 살아온 불행했던 과거가 있다. 가로등이 꺼진 '저기 저 판잣집'은 내게 있어 평생 잊지 못할 나의 보금자리였다. 오늘 저녁 나는 저 판잣집으로 달려가 많은 남정네들에게 시달리고 또 시달려 삐쩍 마르고 얼굴에 핏기가 전혀 없는 조순영(趙順永)이라는 여인을 품에 안고 비록 더럽고 냄새나는 이불이지만 머리까지 푹 덮고 하루 저녁 깊이깊이 모든 것을 잊고 잠들고 싶은 마음이다. '목사님? 윤락녀도 구원을 받을 수 있나요?'라고 울면서 질문을 했던 그녀에게 오늘 저녁에는 사회봉사 상을 받아 대한민국이 다 알아주는 훌륭한 목사의 신분으로 확실한 대답을 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그렇소, 윤락녀(淪落女)도 구원(救援)을 받습니다."라고. 2. 정확하게 소개하면 영등포역 서편 그리고 경인로에서 영등포 파출소가 바라다 보이는 미로(迷路)처럼 좁고 꾸부러진 골목으로 들어서면 휘황찬란한 경인 로 주변과는 180도 달라진 빈곤과 타락이 수세미처럼 얽힌 또 다른 세상으로 들어오게 된다. 허름한 골목 주위에 허물어질 것 같은 오래된 건물에 사람 하나 겨우 들어가 누울 수 있는 쪽방 집들과 다소 큰 방이기는 하나 더럽고 냄새나는 윤락녀들의 윤락 방, 그리고 호객하는 포주들의 집, 독버섯처럼 피 빨아 먹는 기둥서방과 깡패들 틈에 장애인 그리고 독거노인들이 같이 살아가는 빈곤의 세계가 펼쳐진다. 내가 여기, 영등포 쪽방 촌에 와서 밑바닥 인생이요 독버섯 같은 버려진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 온지가 어느덧 25년, 형사생활까지 치면 30년이 훨씬 넘는 셈이다. 돌이켜 보면 나는 말이 목사(牧師)지, 불량배에게 잡혀 얻어맞기도 했으며 목에 단칼을 드려대고 죽여 버리겠다고 휘두르던 그 피 묻은 칼날에서 용케 살아났으며 조폭(組暴)이 휘두른 몽둥이에 맞은 오른쪽 어깨는 반 밖에 쓸 수가 없는 병신이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님에게 감사하며 살아왔다. '풍란 교회(風蘭敎會)'를 설립했던 1984년 여름, 내게 주어진 것은 폭행과 오물 투석 그리고 냉소와 협박이었으며 1년을 버티지 못하고 도망갈 거라는 비아냥도 있었다. 쪽방 식구들을 돕는 일은 남들이 보기에는 어려워 뵈지만, 일단 내 몸을 다 내놓고 봉사한다는 일념으로 하다 보니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 주먹으로 얼굴을 강타당하여도 며칠이면 다 회복이 되기에 또다시 나가 그들을 도와줄 수가 있었다. 없는 돈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하면 누구인가 나를 도와주었다. 그러나 한 가지 안 되는 것이 있었다. 사람의 마음을 열고 그 속으로 내가 들어가는 일은 정말 힘들었다. 아니 시간과 세월이 걸렸다. 한 불량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10년이 걸렸다. 그러나 나에게 가장 힘들었던 것은 내 사랑, 조순영을 내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는 일이었다. 내 고향 거문도(巨文島), 암벽에 붙어 있는 야생화, 풍란의 향기를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그녀가 바로 풍란의 향기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풍란교회 교인들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거지, 불량배, 윤락녀들에게 하루 세끼 음식을 공급해 주었는데, 결코 쉽지 않았다. 영양실조나 급한 병으로 쓰러진 윤락녀와 불구자들을 구급차에 싣고 병원으로 달려가 입원을 시키기도 했다. 처음에는 냉소적이었으며 나를 여기 쪽방 촌에서 쫓아내려고 했던 깡패, 포주와 술집 주인들이 마음을 바꿔 이젠 나를 도와주고는 있지만,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이 안타깝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들도 죽음과 구원의 확신을 믿을 날이 올 것이라고 기대하며 오늘도 나는 쪽방 촌을 바쁘게 뛰어다닌다. 풍란 교회는 이제 이곳 영등포 쪽방 촌에서는 꼭 필요했으며 나는 쪽방 촌의 유지가 되었으니 참으로 인생의 멋진 반전(反轉)이었다. 사람들은 쪽방 촌을 볼 때, 마치 죄악과 살인, 술에 절고 분노와 미움에 사로잡혀 세상을 원망하며 사는 죄악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로 생각하겠지만 정작 여기 쪽방 촌의 주민은 180도 달랐다. '비록 가난하고 힘은 없지만 우리는 서로 아끼며 의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대로 행복합니다. 김가형 목사가 있기에 우리는 죽어서 천당에 간답니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유가 어찌 됐던 2010년 10월 9일, 나는 서울시에서 수여한 '사회봉사 상'을 받았으며 그 은빛 나는 트로피를 들고 여기 쪽방 촌 외진 골목에서 저 판잣집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지난 30년의 외롭고 서러웠던 세월이 내 눈에서 감격의 눈물이 되어 흘러나오고 있음은 내가 정(情)이 많아서인가? 궂은비가 점점 약해지더니 이내 그치고 말았다. 술에 취한 사람, 큰 소리를 내는 사람, 길가에서 체면 불구하고 소변을 보는 사람들로 갑자기 쪽방 촌 골목이 분주해지기 시작하더니 짙은 화장을 한 윤락녀들이 취객의 손을 잡아끌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나는 가로등이 꺼진 저 좁고 외진 곳에 있는 '저 판잣집'을 바라다보며 30년 전, 오늘, 궂은비가 하염없이 내리던 '그 저녁에 일어났던 그 사건'을 추억에 떠올리기 시작했다. -문득 천리향, 풍란의 짙은 향기가 내 코를 자극하기 시작했으며 아련한 노래 소리가 내 귀에 들려오고 있었다. '가슴을 파고드는 추억어린 영등포의 밤, 영원 속에 스쳐오는 사랑의 불길, 흐르는 불길 속에 아련한 그대의 모습'.- 내 눈에는 따스한 눈물이 흐르더니 양쪽 볼로 주르르 구술처럼 흘러내렸다. 비록 사회봉사 상(社會奉仕 償)을 받은 유명한 목사라고 해도 나는 사랑에 굶주리고 찌든 가련한 한 남정(男丁)네일 뿐, 저기 보이는 '저 판잣집'에서 윤락녀, 조순영과 같이 보냈던 하룻밤의 사랑(風蘭의 香氣)이 나를 오늘 되게 해 주었음을 나는 스스럼없이 고백한다. '나를 가면을 쓴 가소로운 위선자요 나쁜 목사라고 사람들이 돌을 던진다면 피하지 않고 기꺼이 맞아 죽으리라. 그러나 그녀에게는 돌을 던지지 말라. 그녀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노라. 단지 가난했을 뿐....' 3. 30년 전, 1980년 10월 9일이 생각난다. -내 나이 30세, 영등포 경찰서에서 형사(경사)로 근무했었다. 그날도 역시 오늘처럼 가을비가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으며 저녁 무렵이 되니 캄캄해지기 시작했다. 영등포 경찰서에서 무전으로 내게 급한 명령이 떨어졌다. "김 형사! 조폭, 박근택(朴根澤)이 칼에 맞아 쓰러졌으니 붉은 가로등이 있는 '그 문제가 많은 판잣집'으로 속히 가서 살인미수 사건을 급히 수사하라!'라는 수사과장의 명령이었다. 조폭, 박근택이라면 교도소에서도 다루기 어려운 잔인하며 인정도 없는 인간 백정이라고 불리는 조직 폭력배였다. 누구도 박근택의 비위를 건드리면 죽는다고 했는데 감히 그를 칼로 찌르다니... 누군지는 모르나 배짱이 두둑한 놈이라고 생각하며 순경 하나를 대동하고 달려갔다. 파출소에서 멀지 않는 곳에 있는 '그 판잣집'은 나도 잘 아는 윤락녀들의 집이었는데 어느새 소문이 났는지 쪽방 촌 사람들이 문 앞에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노량진 경찰서에서 2년간 근무하다가 영등포 경찰서로 전근 온 지도 어느덧 5년이 됐다. 쪽방 촌을 수시로 돌아다녔기에 웬만한 주민들은 나, 김가형 경장(형사)을 알고 있었다. 판잣집으로 들어가니 칼에 찔린 조폭 박근택은 피를 많이 흘렸기에 포주와 윤락녀들의 도움을 받아 인근 파출소로 업혀 갔다고 했다. -조폭 박근택과 나는 쪽방 촌에서 여러 차례 마주쳤으며 언젠가는 그로부터 심하게 얻어맞고 쓰러진 적도 있었던 악연의 사내였다. 사실 형사인 나도 그를 보면 피하고 싶은 사내였다. - 퇴락한 마루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며 재수 아주 없다고 투덜거리는 뚱뚱한 포주 아주머니는 나를 보자 또 왔느냐는 투로 시큰둥했다. 그리고 쾨쾨한 냄새가 풍기는 어둑어둑한 방에 한 윤락녀가 침대에 쓰러져 있었는데 머리는 산발이 됐으며 옷은 찢겨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하체가 들어내 보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성폭행을 당했음을 알 수 있었다. 순경은 열심히 수사에 도움이 될 물증을 수집하고 있었으며 나는 가해자가 없는 상황에서 단서를 찾아보았다. 윤락녀의 방에서 흘린 핏자국과 판잣집 입구에서 발견된 핏자국이 꽤나 많은 것으로 보아 상처가 심했다고 짐작을 했다. 내가 여기에 도착하기 얼마 전에 가해자는 이미 도주를 했는데 20대의 젊은이로 역시 조폭이라고 했다. 나는 사건의 경위를 자세히 알기위해 포주와 윤락녀를 따로 불러 수사를 했으나 이들은 아주 비협조적이었다. 다음날까지 계속된 초동수사 결과는 이러했다. -조폭 박근택(34세)은 여기 쪽방 촌에 6명의 윤락녀를 거느리는 기둥서방으로 윤락녀들이 애써 벌은 화대의 절반을 착취할 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명목으로 윤락녀들을 도망가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인간 백정(人間白丁)이었다. 5년 전 박근택은 용산에 있는 봉제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조명순(趙明順)이라는 아가씨를 유혹하여 친절하게 도와주는 척하다가 마침내 마귀의 얼굴을 들어 내놓았다. 2년 전부터 조폭은 빚을 갚는 조건으로 조명순을 여기 영등포 쪽방 촌, 윤락가로 데려와 윤락행위를 시켜 돈을 뜯고 있었다. 조명순(현재 26세) 아가씨는 10년 전에 멀리 전라도에서 부모를 잃고 남동생을 데리고 노량진에 사는 이모네 집에서 기거하였으나 이모네가 파산하자 뿔뿔이 헤어져 공장에서 일하면서 남동생과 자취를 하였다. 학구열이 강해 남동생만큼은 어떻게 하든지 학비를 마련해 학교에 보내려고 조폭에게 큰 빚을 지고 있었다.- 조폭, 박근택은 조명순을 수시로 성폭행했으며 공공연히 기둥서방 노릇을 하였다. 그뿐인가 요런 저런 명목을 부쳐 더 큰 빚을 지게 하는 아주 야비한 사나이였다. 대학교를 중퇴한 조명순의 남동생, 조천국(19세. 趙天國)은 누나가 조폭 박근택으로부터 부당하게 성폭행을 당해 왔으며 돈도 뜯기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이 4년 전이었다. 그는 조폭으로부터 어떻게 하든지 누나를 구해 보려고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강한 조폭 앞에서 그는 번번이 구타당하였다. 누나의 건강이 악화하자 조천국은 조폭에게 매달려 누나를 풀어 달라고 사정했다. 그러나 박근택은 묵살할 뿐만 아니라 조천국을 심하게 더 구타하였다. 앙심을 먹은 조천국은 잭나이프를 들고 누나의 윤락 방에서 기회를 보고 있었다. 마침, 조폭이 누나에게 강제로 성폭행 하는 장면을 직면하게 되었다. 반항하는 누나의 가슴을 주먹으로 때리자 누나는 이불 위에 벌렁 누어 떨어지고 말았다. 음흉한 조폭은 누나의 옷을 벗기고 자신도 벌거벗은 채로 기절해 누운 누나를 성폭행하고 있었다. 조천국의 마음은 칼로 째는 듯했다. 마침내 그는 잭. 나이프를 들어 조폭의 등을 향해 힘껏 찔렀다. "악!"하고 외마디를 지르며 조폭은 피를 흘리며 방바닥으로 나 뒹글어 떨어졌다. 순간적이었기에 포주도 어느 누구도 이 사건을 볼 수가 없었으며 가해자도 잭. 나이프를 떨어뜨린 채 도망가고 말았다. - 피해자와 가해자가 애매한 사건이기에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수사에 전력하였다. 칼에 맞은 조폭 박근택은 인근 충무병원으로 후송되었기에 목숨은 건졌으나 칼로 찌르고 도망간 가해자(청년)를 검거해야 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계속된 조사를 통해 가해자는 윤락녀의 남동생으로 노량진 모처에 사는 것을 알게 되었다. 머리칼이 흐트러지고 얻어맞은 윤락녀는 초동수사를 하는 중에 힘이 없어 쓰러져 말을 하지 못하니 다음날 다시 와서 수사하기로 했다. 쓰러진 윤락녀의 얼굴은 핏기가 없었으며 목소리도 내질 못하는 것으로 보아 병자(病者)라고 생각됐다. 나는 그녀를 언젠가 본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마 일 년 전, 여기 이 판잣집에서 기절을 했던 어느 윤락녀를 들쳐 없고 구급차에 실어 주었는데 바로 그녀라는 생각이 들었다.- 2일 후, 영등포 경찰서 수사과로 가해자 청년이 나를 찾아와 자수했기에 수사는 생각보다 쉽게 마무리 질 수 있었다. -대학을 중퇴한 이 청년은 제법 근육질의 몸을 가진 힘깨나 쓸 위인으로 키도 제법 컸으며 얼굴은 뜻밖에도 조폭답지 않게 고상해 보였다. 그는 예상된 진술을 하였다. 조폭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할 뿐만 아니라 구만리 같은 인생을 조폭에 묶여 윤락녀의 일을 해야 하는 누나를 구하기 위해 쓰레기 같은 박근택을 칼로 찔러 죽인들 무슨 죄가 되느냐는 반문에 나도 동감을 하였다. 죄와 벌의 논리라고 나에게 일장 설파하였다. - 그러나 법은 법, 비록 악법이라고 해도 지켜야 할 법을 준수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경찰이 해야 할 임무라고 일러 주었다. 4.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까?' 수사하는 도중에 나는 나의 귀와 눈을 의심하고 말았다. -내가 대학을 포기하고 경찰관이 된 가장 큰 원인은 가난하기에 우선 먹고 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나를 도와준 평생의 은인 조수환(趙秀桓) 목사님의 가족을 찾기 위해서 였다. 아니 더 좁혀서 말하면 목사님의 딸, 조순영(趙順永)을 찾기 위해서였다.- 가해자의 이름은 조천국이었으며 피해를 본 윤락녀의 이름은 조명순이었다. 조(趙)씨이기에 나는 조 목사님을 연상해 보았다. 혹시나 해서 주민등록증을 조회해 보니 엉뚱한 이름이 발견됐다. 조천국이라고 불렸던 이 청년의 주민등록증을 조회 해 보니 실제 이름이 조천영(趙天永)이었다. -"조천국이 아니고 조천영이 맞는가?" "예. 조천영입니다." 윤락녀의 이름도 그랬다. 조명순이 아니고 조순영(趙順永)이었다. -"조명순이 아니고 조순영이 맞습니까?" "예." 조순영과 조천영이란 이름은 내가 그토록 찾았던 조수환 목사님의 딸과 아들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 내 앞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 있는 두 남녀를 바라보았다. 순간 내 눈에 비치는 거문도의 풍란 교회(風蘭敎會)와 바위틈에서 꽃을 피우는 풍란(風蘭)을 바라다 보는 듯했다. "그럼? 조수환 목사님의 딸? 순영이?" "........................." 윤락녀는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조순영 씨? 조순영 씨?" 나는 순간 거문도(삼사면 거문리) 항구와 풍란 교회에서 목사님의 딸과 아들로 곱게 자랐던 오누이를 내 마음속에 떠올렸다. 지난 8년 나는 순영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가씨를 찾기위해 무진 노력을 했었다. 학교 선생, 직장여성, 아니면 교회계통에서 남들로부터 존경 받는 일을 하고 있을 거라고 예상했었다. 그런데 조폭에게 성추행을 당하는 영등포 쪽방 촌의 윤락녀로 내 앞에 앉아 있다니, 하늘이 꺼지는 듯했다. '말도 안 돼...말도 안 돼...순영아? 네가 윤락녀라니.....' 조순영과 조천영도 마찬가지였다.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김가형 오빠를 이렇게 범죄자가 되어서 초라하게 만나다니, 얼마나 오빠는 실망했을까? 아무런 변명도 못하고 눈을 감고 울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마침내 눈물을 떨 구고 말았다. 찾은 기쁨과 예상치 못한 실망이 교차한 눈물이었다. "조순영이 진정 맞소? 거문도에서 온 순영이가?"나는 다그쳐 물었다. "맞습니다. 형사님." 그녀는 마침내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했다. "순영아! 순영아!" 나는 수사를 하다 말고 순영의 손을 꼭 잡고 말았다. 옆에 앉아 있던 동료 형사가 나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는지 아주 근심하는 눈초리 같았다. "천영아? 네가 분명 천영이지?" 나는 건장한 가해자의 손을 꼭 잡았다. "맞습니다. 조천영입니다. 형사님." 지난 8년 눈이 빠지도록 그렇게도 열심히 이들을 찾았는데, 하나님도 무심하지 수사관과 범죄자로 만나다니, 그것도 살인 미수범(殺人 未遂犯)으로. * -나(김가형)는 1950년 3월, 대한민국 최남단의 섬, 거문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유년기를 가난과 불행으로 보냈다. 나의 아버지는 알코홀 중독자요 노름꾼이었으니 집안이 편안할 이유가 없었다. 아버지는 어선 선주가 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을 때 도우미 어부가 되어 도와주고 일당을 받았으며 어머니는 거문도 부두에서 잡아온 생선을 냉장고에 넣거나 상자에 넣는 막일을 하여 역시 일당을 받아왔다. 그러나 술을 마시고 도박을 하는 아버지로 인해 우리 식구들은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었다. 거문도, 고도(삼사면)에 풍란교회(風蘭敎會)라고 불리는 작은 교회가 있었는데 그 곳 교회의 목사님은 조수환이었다.- 풍란 교회 목사님은 6.25이후 잠시 불어 닥친 여순반란 사건에 관련된 좌익 공산분자들에 의해 많은 고통을 받았지만 꿋꿋하게 목사의 일을 계속했다. 목사님 집에 나는 자주 찾아 갔었는데 그 이유는 거기에 가면 우선 먹을 것이 있었으며 목사님이 나를 아주 아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집은 교회에 붙어 있는 일본식 사택이었다. 그 보금자리 집에 나보다 3살 더 많은 큰딸(조신영), 4살 어린 둘째 딸(조순영)과 10살 어린 아들(조천영)이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큰 딸은 특별히 배려해, 어려서부터 여수에 나가 중고등학교에 다녔으나 순영과 천영은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아 거문도에서 살았다. 목사님의 집과 우리 집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가정이었다. 우리 집은 술 냄새와 고함이 있는 지옥과 같은 가정이었으나 목사님 집은 항상 웃음과 격려가 있는 천국이었기에 나도 커서 이렇게 사랑이 넘치는 가정을 갖고 싶었다. 막연하지만 목사님의 딸, 특히 순영이와 같은 여자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미기를 희망했었다. 아니 순영을 마음속에 점찍어 두었었다. 내가 거문중학교에 다닐 때, 순영은 거문초등학교에 그리고 천영은 아직도 코흘리개 어린아이였었다. 내가 거문중학교를 다닐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조 목사님 덕분이었다. 등록금은 물론 교복까지도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 나는 교회에 열심히 나가 주일학교에서 예수님에 대해 배웠었다. 거문도에는 고등학교가 없으므로 역시 목사님의 도움을 받아 여수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가 있었다. 그러기에 나는 조 목사님을 나의 은인으로 알고 살아왔는데, 그는 내게 하나님을 공경하고 이웃을 도와주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라고 가르쳐 주었다. 간단히 줄여서 말하면 경천애인(敬天愛人)이라고 했다. -목사님은 내게 좋은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성경말씀을 들려주었다. 여리고로 가는 어느 사람이 깡패들로부터 습격을 당해 칼로 찔려 길가에 버려 졌는데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이 사람을 보고도 혹시 해를 당할까 보아 그냥 지나쳤으나 유태인들에게 멸시를 받으며 살아온 사마리아 남자는 상처 입은 남자를 치료해주고 그것도 모자라 여관 주인에게 돈을 따로 주고 치료를 부탁하였다. 가형아? 이 셋 중 누가 진정한 이웃이요 친구가 되는가? 라고 내게 물으면서 사회에 나가 좋은 이웃이 되라고 가르쳤다. "목사님! 좋은 사마리아 사람이 되렵니다." 나는 큰 소리로 대답을 했다.- 그에게서 받은 또 다른 가르침은 거문도 섬 암벽에서 자라는 야생 꽃, 풍란(風蘭)이었다. -풍란은 비록 암벽과 같은 바위틈에서 자라는 야생 꽃이지만 그 향기가 짙어 멀리 천리를 간다고 하여 천리향이라고 불린다고 목사님은 일러 주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모진 풍랑과 폭풍 속에서 길을 잃은 어선이 찾는 것은 등대(燈臺)라고 했다. 그러나 등대마저 없는 먼 바다에서 어부들은 천리향의 냄새를 맡으면 육지가 가까이 있음을 알고 절망에서 희망을 갖는다고 했다. "가형아! 너는 풍란과 같이 굳건하게 어디에서, 어느 환경에서라도 강하게 살아야 할 뿐 아니라, 향기를 뿜어 남을 인도하는 돕는 사람이 되거라..." "예. 풍란이 되겠습니다." 나는 큰 소리로 대답을 하며 궂게 마음속에 다짐했다. 나는 내 평생 조 목사님이 풍란이요 나의 선생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뿐만 아니라 목사님의 딸 순영과 아들 천영을 위해 나는 무엇이든지 하여 보은하리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가형아? 받은바 은혜를 보답하고 약속은 반드시 지키거라. 결코 배신하지 말지니라...". "예. 목사님 의리의 사나이가 되겠습니다. 배신 같은 것은 모르는..." "그래야지.........".- *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간다고 하는 것은 무리였다. 서울과 광주에 있는 몇 군데 미달된 대학에서 오라고 하는 입학통지를 받았지만 등록금과 생활비를 마련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아예 포기를 했다. 당시, 순영은 중학교 2학년, 애 띄고 예쁜 처녀였다. 그리고 동생 천영은 초등학교 2학년 코 흘리는 개구쟁이였기에 내게는 동생들이었다. 어차피 가야할 군대에 자진 입대를 했다. 논산 훈련소로 가기 전에 순영을 만났을 때 그녀는 "오빠..오빠.."라고 부르며 울고 있었다. “울긴, 제대 할 때까지 공부잘해!”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거문도 사나이가 육군 졸병으로 입대를 하고 배속 받은 근무처는 강원도 원통 골이었다. 내가 살았던 거문도와는 완연히 다른 깊은 산골이었다. 다른 내무반 친구들은 돈 없고 빽 없는 밑바닥 인생들이기에 강원도 산골로 배속 받았다고 불평했지만, 나는 조 목사님이 가르쳐 준 그 말씀, 풍란(風蘭)처럼 멀리 향기를 보내 어둠속에서 어디로 갈지 몰라 헤매고 있는 희망 없는 어부들에게 갈 곳을 알려주는 선생님이 되라고 가르쳐 준 그 말씀이 생각났다. 입대 6개월 만에 2주 휴가를 받아 여수를 거쳐 거문도로 돌아온 나는 술에 찌들리고 노름에 빠진 아버지가 어머니를 구타하는 장면을 보는 순간 정신이 혼동하여 눈에 뵈는 몽둥이로 아버지의 등을 힘껏 내리쳤다. "썩어 버릴 아버지!" 나는 몽둥이를 땅에 내 던지면서 엉엉 울고 말았다. 그리고 찾아간 조 목사님은 천하에 불효자라고 하며 나를 심하게 꾸중했다. 순간 나는 오히려 아버지에 대한 동정심이 더 솟구치며 목사님으로부터 더 큰 위로를 받고 있었다. "오빠!" 거문중학교를 졸업하고 여수 여자 고등학교에 입학한 순영이 나를 보자 부른 첫마디였다. "와! 순영아! 예쁘구나....예뻐." "정말? 오빠?" 거문도 휴가 중에, 내 인생에 가장 고귀하며 기억에 남는 순영과의 추억이 생각난다. -순영과 나는 거문도 서도(西島)에 있는 유림 해수욕장과 백사장에 갔었다. 서도는 동백꽃이 만발하여 마치 불타는 심장 같은 붉은 섬이었다. 문득 순영이 내게 말했다. "오빠? 저기 저 바위 절벽에 핀 풍란을 봐! 예쁘지? 나는 동백도 좋지만 풍란도 좋아해..." "그래, 저 풍란? 꺽어 줄까?" "저 절벽에 있는 것을?" "물론이지.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해주마." 나는 절벽을 향해 기어 올라갔다 다소 아슬아슬한 순간도 있었으나 나는 순영이 말한 그 풍란을 꺾어 오는데 성공했었다. "순영아? 이 향기 좋지? .너로부터 나오는 향기 같구나...." "나로부터?" "그렇다니까...천 리 밖에서도 향기를 느끼지..." "천 리 밖에서?" 순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해가 되질 않아서였다. "그래 나는 너의 향기를 어디에서든지 맡으마. 휴전선에서도 원통 골에서도, 어디에 가든지." 나는 그 꽃을 순영의 손에 쥐여 줬었다.- 휴가 중에 나는 순영의 애 띤 모습과 풍란의 향기를 내 마음속에 깊이 담고 다시 강원도 원통 골로 돌아와 멀리 휴전선에서 울려 나오는 김일성을 찬양하는 틀에 박힌 선전용 노래를 귀가 따갑도록 들어야만 했다. * 그리고 다음 해, 휴가차 거문도에 들렀을 때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내가 지난번 휴가를 다녀간 지 불과 일 개월 후, 존경하던 조 목사님 내외는 연탄불에서 나오는 일산화탄소의 중독으로 졸지에 사망했다. 그뿐인가 여수에 가 있던 순영과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들은 교회 내부에서 생긴 재정상의 문제로 집과 교회를 빼앗기고 멀리 서울, 노량진에 산다는 이모네 집으로 쫓겨 갔다는 말을 듣고 나는 엉엉 울고 말았다. 목사님의 무덤은 옛날, 영국해군이 거문도를 2년간 점령했을 때 죽었던 두 명의 수병이 잠든 고도의 공동묘지 근처에 역시 묻혀 있었다. 풍란 교회는 궂게 문이 잠겨 있었으며 누구도 목사님의 가족들의 향방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분명 기독교를 싫어했던 좌익 공산 세력의 끈질긴 협박 때문이었음을 알게 됐다. 나는 노량진을 방문했으나 거문도 촌놈인 내게는 너무나 복잡하여 찾기 어려웠다. 노량진과 조순영이란 두 단어는 내가 꼭 찾아야 할 숙제로 마음속에 품고 원통 골로 되돌아갔다. * 다시 돌아온 강원도 원통 골..... 불과 3개월 후 갑작스레 거문도에서 날라 온 전보가 있었다. 아버지가 죽었으니 급히 오라는 전보였다. 부랴부랴 거문도에 도착하니 술에 찌들고 노름에 빠졌던 아버지가 마침내 간 경화증 증세를 보이더니 어처구니 없이 농약을 먹고 자살을 했다고 어머니는 흑흑 울고 있었다. 내가 도착하니 아버지는 이미 동네 사람들에 의해 영국 수병들이 잠든 그 무덤 근처에 초라하게 묻혀 있었다. 비록 나의 아버지였으나 나를 자식답게 대해준 적도 없었다. 차라리 가족을 위해 집안에서 없어지는 편이 더 좋을 거로 생각했던 아버지의 죽음이었기에 조금도 슬퍼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홀로 살고 싶다고 했다. 며칠 후 나는 다시 원통골로 돌아와 복무를 계속하였다. 마침내 만기 제대를 한 후, 22살을 바라보는 나이로 사회에 나오게 됐다. 대학에 가려고 애를 써 보았으나 헛수고였다. 왕십리에 사는 형님의 단칸방에서 밥을 얻어먹으며 같이 사는 것도 힘들었다. 결국 나는 대학을 포기하고 먹고 살기 위해 경찰관 시험에 응시하였다. 10주에 걸친 훈련 후, 나는 말단 순경(巡警)이 되었다. 처음으로 발령받은 곳은 내가 간절히 요구한 대로 노량진 경찰서였다. 노량진으로 이주했다는 순영이를 찾아보려는 마음에서였다. 순경 생활을 착실하게 하며 노량진 일대를 한 눈 팔지 않고 샅샅이 찾아보았으나 오리무중이었다. 내 생각에는 조순영은 좋은 아버지에게서 교육을 받았기에 지금쯤 서울에 있는 어느 여고에서 착실히 공부하던지 아니면 대학에 입학했을 거라는 추측으로 노량진 일대의 여고를 자주 찾아 다니기도 했었다. 순경 생활 2년 후 나는 경장으로 진급되었다. 진급된 김에 영등포 경찰서로 전근을 자원했다. 노량진에 없는 것이 확실하니 차라리 영등포 일대의 고등학교와 주택가에서 혹시라도 찾을 수가 있을 것 같아서였다. 덩치가 크고 민첩하다는 이유로 나는 수사과에 근무하는 형사가 되었기에 영등포일대와 쪽방 촌에서 일어나는 범죄 사건에 신속하게 뛰어들었다. 무법천지라고 불리는 영등포역 근처 쪽방 촌과 윤락가에서 나는 봉변을 당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젊은 형사(경찰)이다 보니 불량배들과 포주들이 나에게 고분거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윤락가를 순찰하러 갔을 때 오히려 나에게 유혹을 걸어오는 윤락녀도 있었는데 어느 순간에는 혹시 순영이 아닌가라고 착각하여 쳐다본 적도 있었다. -왜냐하면, '순영이는 분명히 좋은 여고를 거쳐 대학에 진학하여 선생님, 예술가 아니면 사회사업가로 성장했을 것'이 틀림없기에 여기 윤락가를 생각할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 년 전이었다. 작은 골목길을 지나는 데 갑자기 '사람 살려!'라는 큰소리가 났다. 분명히 가로등이 꺼졌던 '그 골목, 그 판잣집'에서 들려오는 고함 소리였다. 급히 달려가 보니 어느 윤락녀가 정신을 잃고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포주의 말에 의하면 명순이라는 이 윤락녀는 본래 빈혈이 심해 늘 어지럽다고 자리에 눕곤 했는데, 거친 남성들에 의해 혹사당하다 보니 자주 쓰러졌다고 일러주었다. 나는 그녀를 등에 업고 골목을 나와 순찰차에 태워 병원으로 보낸 일이 있었다. 경사로 진급되면서 월급도 올라 마침내 꿈에 그리던 결혼을 했다. 내 나이 28살이었다. 아내는 경상도 여자로 두 살 어렸으며 억세고 생활력이 강한 가난했던 과거를 가진 미용사였다. 한 가지 유감스러운 것은 순영이와 결혼을 하지 못한 채 마음속에 감춰두고 그리워해야 하는 아쉬움이었다. 그리고 배신을 한 자책감이었다. 경제적인 안정과 가정적인 평화가 찾아오니 갑자기 거문도에서 홀로 사는 어머니를 모시고 싶었다. 1980년 10월, 내 나이 30세--- 조폭 박근택의 살인 미수사건을 수사하는 도중 그토록 찾았던 순영을 여기 영등포 쪽방 촌에서 이렇게 만날 줄이야........ 5. 살인 미수 사건은 마침내 법원의 판결을 통해 종지부를 찍었다. -가해자 조천영(20세)은 2년, 피해자 박근택(34세)은 비록 피해자이기는 하나 과거에 잔인한 범행을 일삼았기에 4년간의 징역을 각각 판사로부터 선고받고 교도소로 수감되었다. * 하나님도 무심하지, 내가 수사한 살인사건에 관련된 윤락녀가 내가 지난 8년간 그토록 찾고 찾았던 풍란의 주인공, 조순영임을 알고 난 후 나는 원통하여 대성통곡을 하였다. 그리고 나 자신을 추리기 어려울 만큼 큰 고민에 빠져들었다. 나의 사랑, 순영이, 밑바닥 인생이라고 남들이 손가락질하는 윤락녀였다니..... 윤락녀였다니... 순영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를 수사했던 형사가 바로 기다리고 기다리던 가형 오빠라니.... 오빠가 나의 정체를 알고 난 후, 얼마나 실망을 했을까? 윤락녀로서 만나다니, 차라리 죽고 싶었다. 아니 수치스러웠다. 수사가 일단락된 후부터, 순영은 나를 만나주지 않았으며 말도 없이 숨어 버렸다. "순영이를 만나게 해주소."나는 포주에게 오히려 사정하니 포주가 의아해했다. 순영은 병들은 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주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밤낮없이 사나이들을 불러들여 윤락행위를 강요했기에 요즘에는 눈에 띄게 병이 악화되어 윤락행위를 전혀 하지 못하고 누어만 있으니, 전혀 수입을 올려 주지 못했다고 포주는 울상을 지었다. 먹고 사는 데 도움이 되라고 적은 돈이지만 순영에게 보내 주었으나 그 돈을 받았는지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 호랑이 없는 굴에 여우가 판을 친다고 했듯이 인간쓰레기 조폭 박근택이 교도소로 들어가자 이번에는 포주가 아우성을 쳤기 때문이었다. 나는 생각다 못해 포주를 만나 그녀를 놓아 달라고 어름 짱을 놓자 포주는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그 년이 진 빚을 다 갚아야한다'고 했다. 꽤 많은 돈이었다. 자유 민주국가에도 빚을 지면 족쇄 찬 노예가 되어야 했다. 돈을 못 갚으면 돈을 갚을 때까지 노예가 되는 셈이었다. 나는 아내의 눈치를 피해 포주가 요구한 돈의 절반을 만들어 마침내 뚱뚱한 포주를 찾아 갔다. 처음에는 빚을 다 갚아야 한다고 우겼으나 가만히 계산을 해보니 절반만 받아도 포주로서는 손해가 되지 않는 계산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돈도 못 벌고 몸이 약해 언젠가는 여기 윤락가에서 속절없이 죽게 되면 포주가 돈을 들여 장사를 지내줘야 할 판이었다. 그런데 신분이 확실한 형사가 절반을 준다고 현금을 들고 왔으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조폭 박근택이 여기에 있다면 포주는 한 푼도 가질 수가 없었기에 포주로서는 계산이된다고 생각을 했다. "그럼, 반만 받겠소. 내일 당장 데리고 가시오. 김 형사님!" 포주는 선심을 쓰듯이 나에게 허락했다. "순영? 순영! 이제 자유의 몸이 됐어, 자유의 몸이...." 나는 순영의 손을 잡고 기뻐 흔들었다. "..........." 그러나 그녀는 아무 말도 반응도 없었다. "갈 데가 없으면 우리 집으로 가자!" 나는 아내를 잘 설득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 역시 그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 입술을 질근질근 씹으며 침묵으로 일관하던 순영은 뜻밖의 방법으로 내게 고마움을 표시하려고 했다. 그 많은 돈으로 그녀의 빚을 갚아줘 자유의 몸이 되었는데 그녀 역시 온 몸으로 그 빚을 갚고 싶다고 하며 내 손을 잡고 그녀가 몸담아 살았던 쾨쾨한 냄새가 나는 작은 방으로 나를 강제로 끌고 들어갔다. 두 사람이 몸을 밀착하고 누울 만한 침대가 있었으며 그 위에 펼쳐진 이부자리는 여기저기에 찢어진 흔적이 있었다. 침대와 연결된 작은 화장대에는 쏟아진 향수와 퇴색한 화장품 내용물이 지도를 그려 놓았다. 내 마음속에 남아 있던 그녀는 풍란의 향기였으나 오늘의 그녀는 뭇 남성들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져 썩은 냄새나는 시들어 죽어가는 풍란이었다. 돈 때문에 뭇 남성들에게 내던졌던 쓰레기 같은 육체였으나 오늘만큼은 달랐다. 엄청난 금액의 돈을 지불하고 자유의 몸이 됐으니 그녀는 당당하게 그녀를 구해준 은인에게 모든 것을 바치려고 하는 소녀의 애틋한 마음이었다. 아니 소녀 시절부터 바라고 바랐던 사랑하는 그이를 위한 첫날밤이라고 생각했다. -'행여 백조가 오는 날, 이 물가 어지러울까, 밤마다 꿈을 덮노라.'라고 스스로를 깨끗하게 지켰던, 맑은 호수처럼....- 나는 순영과 더불어 그날 밤, 냄새나는 이불을 같이 덮고 뜬눈으로 긴 밤을 지새웠다. 아니, 마치 거문도에서 즐거운 첫날밤을 새우고 있다고 생각했다. "가형 오빠, 미안해. 몸을 더럽혀서..." "아냐, 순영아! 너를 일찍 찾지 못해 미안 했어" "죽기 전에 오빠와 이런 시간을 가진 것, 잊을 수 없어....." "죽다니? 나는 기쁜데...." "가형, 오빠? 나같은 윤락녀(淪落女)도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물론이지." "어떻게?" ".진리를 알면 진리가 구원을 한다고 했어." "진리?" "그래. 진리를 믿는 자는 누구나 다 구원을 얻는 다고 했지." "믿는 자는 누구나? 윤락녀도?" 내 일생에 그녀와 같이 보낸 그날 밤, 그리고 퇴락한 그 판잣집은 나의 포근한 보금자리였다. 그리고 내 가슴속으로 스며드는 풍란의 향기로 인해 나는 마취가 된 듯 했었다. 다음날, 아침. 그녀는 마침내 자유의 몸이 돼 물건을 챙겨들고 청량리에 산다는 이모의 집으로 이사를 갔다. 나는 순영이 어디로 가든 제발 잘 살아 주기만을 바랬다. 같이 가지 못하는 내 마음이 서글펐으며 배신을 하고 있는 듯했다. 그래도 그녀의 마음이 내 마음속에 각인돼 있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 그리고 일 개월 후, 나는 청량리 성. 바오로 병원에 입원해 있는 순영을 찾아갔다. 그녀는 쇠약할 대로 병약했으며 심장뿐만 아니라 신장마저 기능이 떨어지고 보니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며칠 더 갈 수가 없을 거라고 내과 의사가 내게 귀띔을 해주었다. 나를 알아 본 순영은 내 손을 꼭 잡고 말했다. "가형 오빠! 풍란을 꺾어 줘서 고마웠어요."라고. "그래 풍란, 냄새가 아주 훌륭했었지... 길 잃은 선원들을 구해주었지. 마치 너의 아버지처럼..." "아버지?" "그래, 조수환 목사님, 나를 구해 주셨지." "아버지가?" 그녀의 목소리가 내 귀에서 맴돌았다. 그녀는 일주일 후 세상을 떠나면서 교도소에서 복역하고 있는 동생을 부탁했다. "순영아!"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따스한 손이 점점 차가워지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얼음 짱처럼 찬 손으로 변하고 말았다. 장례를 치러줄 친척도 없으며 장지도 없으니 나는 아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화장을 해 거문도로 가 조 목사 부부가 합장된 묘지에 땅을 파고 같이 묻어 주는 것으로 장례를 치렀다. 얼마 만에 가본 거문도인가? 조 목사님 부부의 묘, 아니 조순영의 묘 앞에서 나는 문득 들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여리고로 가는 사람이 불한당(不汗黨)을 만나 칼에 찔려 길가에 버려져 있었는데 이를 보고 제사장과 레위는 그냥 지나갔으나 사마리아 사람은 긍휼을 베풀었노라. 이중 누가 불한당을 만난 사람의 친구가 되겠느냐?" 나는 문득 참 친구란 무엇인가? 어찌하면 참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경찰관이 되어 그들의 비리를 가리고 흉악범을 잡는 것도 참 친구가 될 수 있겠지만, 그들과 같이 자고 먹으며 같이 사는 것이 더 친한 친구가 될 것 같았다. 경찰관은 자신의 마음은 열지 않고 범죄자들의 마음만을 열라고 강요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아! 조 목사님이 가르쳐 준 대로 나를 버리고 그들과 같이 되는 것이다. 아니 그들의 무릎 아래서 그들을 섬기는 참 친구가 되리라. 나의 사랑, 순영이 처했던 그 밑바닥 인생으로 나 자신도 내려가 순영의 마음을 내 마음에 접목시키는 것이 참 친구가 아닌가? 거문도 암벽에 붙어서 자생하는 풍란처럼 거친 저 쪽방 촌에 들어가 그들과 같이 사는 거다. 나는 서울로 오는 기차 속에서 이런 결심을 하고보니 발목에 붙어 있던 족쇄에서 풀려나 자유로워진 마음이었다. 6. 내가 경찰관 직을 사직하고 신학교에 입학원서를 냈을 때 나의 아내와 처가 식구들의 반대가 예상대로 거세었다. '첫사랑에 미쳐 가정을 버렸다느니, 제정신이 아니라'고 몰아 붙였다. 1981년 나는 P 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공부에 전념했다. 그리고 이 년 후 나는 신학생(전도사)의 신분으로 쪽방 촌에 다시 들어와 거칠고 난폭한 불량배, 포주, 윤락녀들을 위해 내 한 몸을 바치겠다고 인사를 했다. 그러나 그들의 태도는 싸늘했다. 범죄자를 잡으러 다니던 경찰관도 싫어했는데 전도사가 되어 이 우범지대에서 그들과 같이 먹고 자며 살겠다고 하니 비웃으며 심지어는 오물을 뿌리기도 했다. 더더욱 난처했던 것은 2년 동안 옥살이를 하고 출옥한 순영의 동생, 조천영의 반발이었다. 세상에 대한 원한과 복역 중에 죽은 누나에 대한 복수심이 그에게는 너무나 큰 상처였다. 누나를 자유롭게 해주었으며 죽기까지 도와준 나에게 그는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지만 인간 백정 조폭 박근택을 향한 복수심이 상상외로 컷다. 1983년 가을, 나는 조폭, 포주, 야바위꾼, 술집주인들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3평짜리 판잣집을 구입하여 풍란 교회를 설립하였다. 찬송소리가 술상 분위기를 망친다고 야바위꾼들에게 끌려가 죽도록 얻어맞았으며 교인들의 기도가 응답되어 술집이 망하게 됐다고 술집주인들이 교회 앞에서 데모하였다. 그래도 나는 굴하지 않고 쪽방 촌을 위해 내 몸을 내놓아 헌신하였다. * 참으로 감사한 것은 원수지간인 조천영과 박근택의 만남이었다. 세상을 비관한 조천영이 어느 날 술에 취해 그의 쪽방에서 자고 있었다. 문을 열고 보니 온통 오물과 구역질이 나는 음식 찌꺼러기 속에서 자고 있었다. 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의 얼굴에서 아버지, 조 목사님을 발견하였다. 그의 방을 깨끗이 청소했으며 따스한 음식을 제공해 주었다. 며칠 후 나는 그의 손을 꼭 잡고 쪽방 촌을 위해 협력하는 형과 동생이 되었다. 젊은 조폭, 조천영의 도움은 나에게 천군만마를 얻는 듯했다. 이를 계기로 쪽방 촌을 위한 하루 세끼 급식을 하기로 결정했으며 조천영이 그 역할을 열성으로 전담했다. 다행스레, 조폭들과 윤락녀들이 감동을 받고 모두가 호응하기 시작했다. 1985년 나는 신학교를 졸업했으며, 같은 해에 조폭 박근택도 교도소에서 석방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 조폭 박근택과 조천영의 앙금을 해결하기가 힘들었지만 우리는 끝내 해결해 냈다. 누이의 인생을 망쳐 놓다 못해 죽게 한 박근택에 대한 원한과 등 뒤를 칼로 찌른 복수의 불꽃이 쪽방 촌에서 언젠가는 일어나리라고 걱정을 했었는데. 교도소에서 나온 박근택은 내가 목사가 되어 이곳 쪽방 촌을 위해 봉사하고 있는 것이 퍽 인상적이었으며 감동한 듯했다. 더욱이 그의 등을 찌른 젊은 조폭 조천영이 손수 밥을 퍼주는 모습을 보며 그는 자신의 추한 모습을 발견했다. '내가 인간인가? 동물이지.... 아-하나님 나를 용서해 주소서.'그는 진심으로 통회하였다. 그리고 그는 조천영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세상의 기적이 바로 이런 것이리라. 과거의 조폭, 조천영과 박근택은 이제 여기 쪽방 촌, 풍란 교회에서 그들이 착취하고 피를 빨아 먹었던 그 윤락녀, 포주 그리고 장애인들을 위한 좋은 친구로 변했으니.... 돌이켜 보면 나, 김가형 목사가 사회봉사상을 받게 된 것은 나만의 노력이 아니었다. 내 뒤에서 나를 도와준 전과자, 노숙자 윤락여성, 장애인들의 사랑 때문이었다. * 2010년 10월 9일 저녁, 쪽방 촌에 내리던 궂은비가 점차 걷히기 시작하니 희미한 백열 가로등이 여기저기에서 더 밝게 켜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저기 구석진 골목길, 가로등이 꺼져 유독 더 컴컴한 '저 판잣집'은 30년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나는 컴컴한 '저 판잣집'에서 윤락녀, 조순영과 한 밤을 지새웠던 30년 전의 추억을 되새겨 보았다. 분명히, 풍란의 향기가 내 코끝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게 떠오르는 '그 윤락녀'의 얼굴은 핏기가 없는 창백한 병자의 모습이었다. -“궂은 비 하염없이 쏟아지는 영등포의 밤, 내 가슴에 스며드는 사랑의 불길......“ 나는 조용히 노래를 불러 보았다. 그리고 멀리 거문도 암벽에서 풍겨오는 풍란의 향기에 취하고 말았다.- 오른 아침 서울시장으로부터 받은 사회봉사 상 트로피를 풍란의 향기가 흘러나오는 그 윤락녀의 방에 보관하기로 마음을 먹고 불 꺼진 그 판잣집을 향해 한 발작 한 발작 걷기 시작했다. 행복했던 그 윤락녀와의 하룻밤을 생각하면서, 풍란의 향기를 맡으면서. 한국 소설 2012년 3월 호, 계간 미주문협 여름 호에 등재

회원:
1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0
어제:
0
전체:
59,0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