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펴소설: 토네이도의 비밀

2012.12.09 13:10

연규호 조회 수:426 추천:46

2-단편소설: 회오리바람(突風,Tornado)의 비밀(秘密) 1. 연 5일째, 오늘 밤에도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강한 비바람이 불어올 뿐만 아니라 토네이도가 올지 모르니 지하실로 대피하라고 백인 아파트 매니저가 얼굴을 찌푸리며 강력하게 전달하고 갔다. 비바람은 마치 미치광이가 피 묻은 식칼을 손에 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나를 향해 찌를 듯이 숨어 있는 방문을 박차고 쳐들어오고 있는 듯했다. 평소에는 꿈쩍도 안 할 듯이 육중한 이 아파트 건물도 음산하고 강한 비바람에 견디지 못하고 흔들흔들 움직였으며 창 밖에서는 크고 작은 나무들이 땅바닥으로 꽝꽝 쓰러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는 것으로 보아 오늘 밤에는 어제보다 더 큰 재난이 일어날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든다. 이중으로 된 유리창에 간헐적으로 부딪치는 커다란 빗방울들이 당장에라도 두꺼운 유리를 산산조각을 내고 강한 바람이 아파트로 확 밀려들어 와 모든 것을 날려 보낼 것 같은 무서운 생각에 내 간이 콩알만 해지다 못해 이젠 온몸이 부르르 떨리고 있다. 내가 사는 아파트 이 층 창문 앞에 서 있는 큰 활엽수 나무들이 바람에 휘청거릴 때마다 길게 옆으로 자란 가지 하나가 기분 나쁘게도 내 아파트 유리창에 부딪히는 소리가 아주 둔탁했으며 위협적이다. 위-잉 위-잉.........꽈당, 쾅쾅. 우르르. 그리고 번쩍이는 강한 번갯불 빛이 내 눈 속 뒤편으로 헤집고 들어와 예리한 송곳으로 망막 세포들을 후벼 파내는 듯한 아픔을 주고 있다. 붉은 벽돌로 지은 이 층짜리 아파트가 돌풍(토네이도)에 견디지 못하고 삽시간에 무너지거나 날아간다면 나는 시멘트벽에 깔려 죽든지 나무 가지에 목이 끼어 끽소리도 못하고 땅에 고꾸라져 죽을 것이 빤하니 입이 바짝바짝 마르며 소변이 찔끔찔끔 나오고 있는 것 같았다. * 미시시피 강이 뱀처럼 구불구불 흘러가는 끝도 없이 광활한 중부 대평원에는 5- 6월이 되면 연례행사처럼 발생하는 강한 비바람이 며칠째 불고 있었다. 게다가 언제 어디에 토네이도(돌풍)가 불어 닥칠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에 수많은 사람이 벌벌 떨고 있었다. - 어젯밤에는 그래도 비가 덜 오는 듯하여 모처럼 다리를 쭉 뻗고 잠을 잘 수 있을 거라고 기대를 했는데, 밤늦게 예상치도 못한 비바람이 더 강하게 불기 시작했었다. 텔레비존과 라디오에서 천둥 번개 그리고 토네이도가 올 것이니 대피하라고 강력하게 권하였다. 친척과 친구가 없이 외톨로 사는 나는 이 아파트 지하실에 있는 대피소로 내려가야 했는데 설마하는 마음으로 아파트 거실에서 뜬눈으로 지새웠다. 정전으로 인해 텔레비존 방송도 중단 되고 보니 캄캄한 밤에 트랜지스터라디오에 의해 밖 앗 세상을 알 수가 있었으나 그나마도 새벽 2시가 넘었을 때 바람 소리가 더 커지면서 라디오도 찍찍거리는 잡음소리를 내다가 방송마저 중단되고 말았다. 준비해 둔 양초도 다 떨어지고 보니 암흑이라는 것 자체가 내 마음을 위축시켜 갑자기 더 무서워지고 있었다. '아파트가 붕괴한다면 나는 죽는 거다'라는 불안한 마음으로 지내느니보다 차라리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으나 칠흑 같은 밤이기에 더더욱 용기가 나질 않았다. 이러다가 미쳐서 죽을 거라고 생각을 하니 급기야는 살려달라고 누구에겐가 매달리고 싶었다. 그 순간 당연히 성공회 신부님이었던 나의 할아버지의 가르침이 생각났다. "어려움을 당하면 하나님께 기도하라!"라는 말씀이었다. 순간 우직근하는 소리가 난 것으로 보아 아파트 정원에 서 있던 큰 나무가 쓰러진 듯했다. 밖에 세워둔 내가 가진 유일한 큰 재산인 고물차가 쓰러진 나무에 깔려 망가진다면 나는 어디에고 갈 수가 없을지 모르니 창문으로 가 밖을 내다보았으나 캄캄하여 확인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밤새 불던 비바람이 아침 5시가 되면서 현저하게 약화 됐으며 비바람 저편 동쪽에서 먼동이 트는지 밖이 제법 밝아지기 시작했다. 중단됐던 라다오도 마침내 제소리를 내기 시작했으며 문득 들려오는 새벽 뉴스가 내 귀에 들렸다. "지난밤 대형 돌풍(토네이도)이 조플린(Zoplin Mo) 서쪽지역을 강타하여 30여 채의 집이 날아갔으며 수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라고 영어 방송은 급하게 전하고 있었다. 돌풍바람(토네이도)으로 인해 어제 새벽녘에 이곳에서 불과 2마일 서쪽 방향에 있는 아파트 군과 집들 그리고 상점들이 바람에 날려갔으며 자그마치 300여명의 사상자가 생겼다는 조금 더 자세한 뉴스를 듣고 나는 대경실색을 하였다. 혼비백산하여 아파트 밖으로 나오니 이미 주민이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리고 있었는데 그들도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으며 친척들이나 친구들의 안부를 묻고 있었다. 천만 다행인 것은 이 와중에 나의 고물 자동차는 바람에 날려가지 않고 밤새 아파트 주차장에서 아무런 피해 없이 버티고 있었다. 아파트 입구에 서있던 100년 이상이 된다는 고목나무가 강풍에 견디지 못하고 두 동강이가 난 채 쓸어져 있었으며 세워둔 자동차 두 대가 그 나무 아래에 양철처럼 굽으러진 채로 깔려 있었다. 자세히 그 고목나무를 살펴보니 내 허리둘레의 5배는 족히 되는 밑동이가 온통 텅 비어 있었으니 쉽게 쓰러질 만도 했다. 속이 빈 인간들은 그 허풍을 드러내다가 속빈 고목나무처럼 힘없이 작은 바람에도 여지없이 무너지기는 마찬가지라고 생각을 하였다. 토네이도가 다른 도시를 할퀴고 간 뉴스와 사진을 자주 보아 그 참상을 잘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오늘 아침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불과 2마일 서쪽에 있는 다른 아파트와 상점들이 송두리째 사라진 것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바라보면서 '만일에 토네이도가 동쪽으로 2마일만 더 움직였다면 나도 죽었으리라.'라는 현실적인 두려움을 여지없이 느끼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나는 아침 식사도 하지 않고, 직장(職場)이 궁금하여 고물 자동차를 몰고 가고 있었다. 가는 길이 여기저기에서 끊기거나 통제 되어 있었다. 토네이도가 휩쓸고 지나간 서쪽 편에는 경찰들이 불을 번쩍이며 교통통제를 하고 있었으며 앰뷸런스와 소방차들이 사이렌을 울리면서 구호 작업을 하고 있었다. 지난 3년간, 출 퇴근 길에 지나다니며 보아왔던 눈에 익은 아파트와 슈퍼마켙 건물들이 흔적도 없이 쓰러지거나 날라 간 자리는 완전히 폐허가 되어 마치 유령이라도 나올 것 만 같았다. 통제된 길을 돌고 돌아 가까스로 나의 직장 건물 입구로 들어오니 건물의 일부가 부서지거나 날라 갔으며 건물 주변의 나무들이 여기저기에서 힘없이 쓸어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공장 입구에서 몇몇 간부들이 간신히 찾아온 직원들을 일일이 돌려보내고 있었다. 언제 다시 공장의 문을 열지는 아직 모르지만 공장이 폐쇄 되어 직장을 잃지는 않을 거라고 긍정적인 말을 해 주었기에 안심이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마음의 여유를 갖고 둘러 본 서쪽 지역은 끔찍해 보였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토네이도의 영향권 내에 들어간다면 어느 누구도 힘 한번 못쓰고 죽어야 하니 자연의 위력 앞에 인간의 힘이 얼마나 초란한지를 새삼 느끼면서 내가 사는 아파트로 돌아 왔다. 어떻게 하든지 토네이도가 자주 오는 여기 이 미국중부의 도시를 떠나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려고 생각을 해 보았으나 지진, 홍수, 눈사태 해일 등 미국의 어느 지방이라고 안전한 곳은 없는 듯 했기에 이렇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은 토네이도나 지진도 아닌 "사람"이었다. '나를 아는 사람이 전혀 없는 곳에서 숨어 살고 싶어' 택한 곳이 여기 조프린이었으며 나는 결국 은둔 녀(隱遁女-숨어 사는 여자)가 됐다. ‘숨어 사는 여자, 은둔 녀----다시 말하면 나는 세상을 등진 여자’였다. 오후가 되면서 잠시 주춤했던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하더니 천둥과 번개도 다시 우당탕, 우당탕 소리치고 있었다.- '토네이도가 다시 온다면 죽는다.' 라는 죽음에 관한 공포 때문에 가슴이 짓눌리면서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점심과 저녁을 먹었는지조차 기억에도 없이 지낸 셈이었다. 저녁이 되자 전기불이 들어 왔다 나갔다 하는 것으로 보아 오늘 밤에도 정전으로 인해 캄캄한 지옥이 될 것이 뻔했다. 아파트 지하실로 내려와 여러 사람과 같이 밤을 지내는 것이 안전하고 덜 무섭다고 백인 아파트 매니저가 일일이 다니면서 알려 주었으나 나는 나의 아파트 거실에 앉아 어제 밤처럼 언제 어떻게 닥쳐올지도 모르는 토네이도를 기다리고 있었다. 피부색갈이 다른 미국 사람들 틈에 불편하게 섞여 있느니 보다 차라리 나 혼자 내 아파트거실에 있다가 죽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백인들 틈새에 끼어 있다가 유일한 동양 사람이기에 혹시라도 누가 나를 알아보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밖이 캄캄해지는 것과 비례하여 비바람이 더 세차게 불기 시작했다. "위잉, 위잉." 비바람이 강해지자 예상대로 정전이 되면서 티비 방송은 꺼져버렸고, 라디오의 수신마저 나빠지고 보니 밖 앗 세상과는 완전히 단절되었다. 전기 불 대신 켜놓은 촛불을 바라다보면서 언제 덮칠지도 모르는 토네이도(돌풍)를 기다리는 겁먹은 사슴처럼 몸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죽을 지도 모른다. 죽을 지도.' 나는 한기(寒氣)와 공포를 온 몸에 느끼고 있었다. 문득, 성공회 신부님이셨던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가르쳐 주신 말씀이 생각났다. "채리(菜梨)야! 무서울 때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거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는 나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분이이시다." 죽음 앞에 선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일 뿐이니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매달리면 기적 같은 응답을 해 주실 것이라고 배웠기에 나는 마침내 무릎을 꿇고 간절한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온 맘을 다해 기도를 드려도 비바람 소리는 반대로 더 강해지기만 하니 오히려 무서움을 더 느끼고 있었다. 하나님도 무심하지, 하나님도 성난 자연의 이변을 통제하지 못한다고 생각을 하니 기운이 빠지고 말았다. '차라리 죽더라도 이불 속에 누어 죽자.' 나는 이불을 푹 쓰고 잠을 청해 보았으나 비바람 소리에 잠을 들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초자연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으며 무기력한 채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내가 가여워 졌다. 아무도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버려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다. '버려진 사람, 숨어 사는 사람, 전채리(全菜梨).......' 순간 나는 머리가 핑 돈다고 생각하며 혼몽한 속에 정신을 잃고 쓸어졌다. 아침이 되어 가까스레 눈을 떠 보니 정신을 잃고 마룻바닥 카페트에 아무렇게나 나뒹굴어져 잠을 잤음을 알게 되었다. 일어나려고 하니 머리가 핑 돌면서 휘청했다. 그리고 손이 떨리고 있었다. 배가 몹시 고팠다. 어제 먹은 음식이라고는 물 한 잔과 토스터 한 조각이 고작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비록 비바람이 짓궂게 몰아쳐도 그 뒤편에서 빛을 뿜어내고 있는 태양으로 말미암아 아침이라고 하는 밝음이 다시 돌아 왔기에 캄캄한 암흑이라는 공포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가 있으니 한 없이 고마웠다. '하나님이 주신 태양?' 나는 신부(할아버지)님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2. '피부 색깔이 노란 내가 왜, 백인들만이 99% 사는 이곳, 조프린(Zoplin)에 와서 살고 있는가? 한국 사람들이 많이 사는 뉴욕이나 로스앤젤레스가 아닌 여기 미주리에서?' 라고 만나는 사람들이 의아하게 물을 때마다 "사계절이 있는 여기, 중부지방이 좋아서요"라고 얼버무렸지만 사실은 쓰라린 과거로 말미암아 엄습해 오는 외로움을 극복 할 수가 없어 한국 사람이 전혀 없는 여기 조프린(Zoplin)으로 무작정 이사를 왔다. '사랑을 받고 싶으며,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이 세상에 없다보니 차라리 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사는 백인들 사회에 숨어 들어와 사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어느 듯 만 3년이 되었다. 사람을 피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피해 조용히 숨어 살고 싶었다. 특별히 지난 50년의 내 인생 사리에 나를 지극히 사랑했던 세 명의 사내들(第一, 第二 그리고 第三의 男子)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 5년 전, 제 삼(第 三)의 사내라고 불리는 백인 남편, 밥. 맥나이트(Bob MacKnight)가 어이없게도 췌장암으로 죽자 말도 안통하고 관습도 다른 백인 남편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 것은 좋은 일이었으나, 반대로 끔찍하게 나를 사랑해 준 그를 저 세상으로 보낸 외로움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더 살고 싶지도 않았었다. 남편, 밥(Bob)이 남겨준 유산이 꽤 많이 있다 보니 외로운 나를 위로한답시고 제 속이나 채우려고 달려든 얌체 같은 한국사람 사내들로 인해 생긴 좋지 않은 소문이 나를 괴롭혔었다. 생각 끝에 명예를 회복하려고 마음을 독하게 먹고 목숨을 끊으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용기가 없었다. 결국 조용히 집에서 죽은 듯이 숨어 살다보니 아까운 2년이 훌쩍 지나갔었다. 답답한 마음에 남이 알아보지 못하는 미주리 주. 조프린이란 작은 도시에 숨어 들어와 혼자 살아 온 것이 어느덧 3년, 합하여 5년간을 숨어서 산 셈이었다. -3년 전, 외동 딸(박경희)에게만 칼리포니아를 떠나 미주리의 조프린으로 혼자 가서 살겠다고 말하고 보따리를 싸들고 오클라호마(Oklahoma), 튤사(Tulsa)로 가는 비행기를 탄 것이 궂은비가 내리고 안개가 낀 2008년 1월 12일이었다.- 세상을 등지고 홀로 살려고 떠나는 나의 마음은 마치 패잔병이 된 기분이었으며 차라리 지나가는 차에 뛰어들어 죽고 싶은 마음이었다. * 그런데 왜 하필이면 미주리 주 조프린이란 작은 도시로 이사를 왔는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을 운명이요 아니면 팔자라고 불러야 할지, 내 인생은 실타래처럼 꼬이고 꼬인 불행한 인생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과 처녀 시절을 충청북도 청주(淸州)에서 보냈다. 청주 중앙 공원에 있는 허름한 점쟁이 집에서 능글스럽게 생긴 늙은 할아버지가 내 사주팔자를 봐주면서 한 말이 그대로 내 팔자가 된 셈이었다. "처녀는 팔자가 드세네. 허허. 세 놈을 거쳐 갈 팔자여. 세 놈을." "예? 할아버지? 세 놈을?" "그래, 네년은 드센 팔자를 가졌어. 세 번 시집을 간단 말여. 첫 번째 녀석은 그냥 널 좋아 하다가 잠시 살게 될 거고, 두 번째 사내는 너를 편하게 해 줄 거여. 그런데 세 번째 사내는 너를 진정으로 사랑할 테니 그놈을 꼭 잡아라. 알겠니?" "예?" 세 번째 사내라니? 그리고 진정 사랑해 준다니. 나는 관상쟁이 할아버지의 말을 피식 웃으면서 무시했지만 50살이 된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그 관상쟁이 할아버지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고 적중한 듯했다. 돌이켜 보면 세 남자가 나를 거쳐 갔으나 막상 내용을 보면 나는 아직도 사랑에 굶주린 불쌍한 여인이었다. 성공회(聖公會)신부님이 열을 올리면서 강론하던 대목이 나를 일 깨워 주고 있었다. "사람은 사랑할 대상이지, 믿을 대상은 아니다. 믿을 대상은 오로지 예수님일 뿐." 그렇다. 나를 거쳐 간 세 명의 사나이란 사랑의 대상이었을 뿐 믿을 존재는 아니었다. 아니 믿는다고 해도 그것은 그 사내가 살아 숨 쉬고 따스한 체온이 있을 때일 뿐 죽어 찬 몸이 되면 그것은 지나간 추억이 될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 세 명의 사내라니? 한명도 아니고, 세 명의 사내라니! 내게는 나를 죽도록 좋아해준 사내(오빠)가 셋이 있었다. 첫 번째 사내(第一男)란 지금은 나에게서 잊혀진 김종일(金鍾一) 오빠였다. -그는 나에게 첫 사랑의 경험을 준 사내였는데 점쟁이 말대로 그냥 좋아서 만났을 뿐, 나와 결혼을 하기에는 가정 형편이 초라해 헤어진 오빠였다.- 두 번째 사내(第二男)란 나를 아껴주고 사랑했으며 집안도 부유하여 최고의 신랑으로 나와 결혼했던 첫 남편 되는 박형진(朴亨眞)이란 오빠를 말한다. - 그는 육사(陸軍 士官學校)를 졸업한 후 직업 군인으로 승승장구하였는데 88 올림픽이 한창 진행되던 어느 날 갑작스러운 군대 안전사고로 전사했다. 역시 점쟁이 말대로 그는 나를 편하게 해준 사내 남편이었으나 어쩌자고 일찍 죽고 말았다. 세 번째(第三男)사내란, 제 이남(第二男) 박형진이 죽은 지 6년 후 미국으로 이민와 다시 결혼한 두 번째 남편인 밥 맥.나이트(Bob MacKnight)라는 오빠를 말한다. - 점쟁이 말대로 그는 나를 진정으로 사랑해 주었으며 경제적으로도 넉넉하게 도닥거려 주었다. 두 번째 남편이지만 나에게는 세 번째 사나이가 되는 셈이다. 그토록 나를 사랑해 주었던 밥(Bob)은 5년 전에 췌장암으로 죽었는데 나는 그를 따라갈 마음으로 자살해 죽으려고 했는데 정작 목숨을 끊지 못하고 이렇게 구차하게 살고 있다.- '내 인생에 더 이상의 사랑은 없다. 세 번째의 사랑, 밥. 맥나이트(Bob. MacKnight)가 마지막이다.'라고 생각하며. 3. 50년 전--, 나는 청주에서 성공회 신부님의 손녀로, 고등학교 수학 선생의 딸로 태어났는데 날 때부터 운명 속에 쌓인 존재였다. -청주시(淸州市) 수동(壽洞), 언덕에 '청주 성공회(淸州 聖公會)'란 이름난 교회가 있다. 그 건물은 당시로는 아주 특이한 서구식 건물이다 보니 시골 사람들에게는 인기 있는 관광 명소가 되어 젊은이들의 데이트 장소로 아주 유명했다. 무려 186개나 되는 성공회 돌계단을 내려오면 벽돌 담장을 경계로 그 밑에 교동(초등)학교가 있는데, 바로 이곳이 나와 김종일 오빠 그리고 남편 박형진의 모교가 되며 나이가 들은 지금도 향수가 서리는 곳이다. 나의 할아버지(전상은 신부)는 당시 58세로 청주 성공회 주임 신부였으며 40살 된 조지 맥 나이트(George MacKnight)는 미국에서 파견 나온 성공회 신부로 할아버지를 보좌하면서 역설적으로 할아버지를 감독 그리고 지시하는 미국인 신부였다. 그리고 나의 시아버지(첫 남편 박형진의 아버지)는 중앙 통에서 쌀장사하는 청주 부자였는데 그의 나이도 40정도 였다. 물론 나의 아버지(전명수)는 그 당시 30세였으며 고등학교 수학 교사로 재직했으며 어머니는 겨우 25살이었다. 내가 세 살 되던 해에 아버지는 뇌척수 결핵으로 사망했으며 나의 어머니가 (당시 28살) 나를 길렀다. 그러나 경제력이 없다보니 할아버지 그리고 할머니와 같이 살고 있었다. 어머니는 늘 우울했으며 자주 울었다. 그리고 때로는 나를 시집에 두고 친정(30리 북쪽에 있는 내수)에 가곤했었다. * 아버지의 사랑을 못 받은 나, 전채리(全菜梨)는 아버지 대신 같은 남성인 오빠들을 좋아했다. 내가 다섯 살이 되면서부터 나는 오빠 세 명이 나를 좋아한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첫 번째 남편이었던 쌀장사의 아들 박형진(당시 11살, 청주 교동초등학교)과 첫사랑을 주었던 김종일(金鐘一) 오빠는 같은 반에서 공부한 동갑내기 친구였으나 여러모로 대조적인 오빠들이었다. -첫 남편이 된 박형진은 체구가 우람하며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아무런 어려움 없이 초등학교와 청주고등학교를 거쳐 육군 사관학교에 진학해 당당한 장교로 승승장구하여 나와 결혼을 했으니 부러울 것 없는 승자(勝者)였다.- -반면, 김종일 오빠는 체구가 작으며 가난하여 겨우겨우 성공회로부터 도움을 받아 의과대학을 졸업한 의사로 아직 혼자 살고 있으니 패자(敗者)라고 말할 수 있다. 종일 오빠의 부모는 1.4후퇴 때 강원도 철원에서 청주로 피난을 나왔다가 할아버지(신부)의 도움으로 성공회에서 청소, 목공 그리고 잡일을 하는 수위가 됐으며, 종일의 어머니는 성공회 소속 신부님과 미국에서 온 신부(2명)님 가족을 돌보는 가정부였다. 작은 월급을 받아, 아들(종일 오빠)을 가까스레 교육했다. 물론 성공회 신부인 나의 할아버지가 여러모로 도와 줬기에 나의 할아버지를 은인으로 생각하며 살아왔다.- -나의 세 번째 사랑이 되는 사내, 밥 맥나이트는 나보다 7살 그리고 박형진과 김종일보다 1살이 더 많았는데 여름방학 때마다 미국 칼리포니아에서 청주로 와 성공회에서 일하는 아버지(George MacKnight 신부)와 같이 사택에서 살았다. 비록 2-3개월 동안 머물렀지만 우리들과 같이 성공회 캠퍼스에서 어울려 놀았는데, 우리와 피부가 다른 백인이었기에 미국 오빠라고 불렀다. 미국 오빠는 역시 나이 값을 하느라고 우리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었으며 미국에서 가지고 온 좋은 물건을 주었기 때문에 한국 사람인 우리는 그를 부러워하였다.- * 가난했던 종일 오빠는 작은 키에 피동적이었다. 신부님(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박형진의 부모들의 경계와 깔보는 눈초리에 맞서 눈치가 빨랐음은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수적인 반응이었다. 종일 오빠의 부모들도 우리들이 어울려 놀 때마다 종일을 향해 "아가씨를 잘 보살 피 거라! 미국 형님에게 잘 하거라."라는 말을 하면서 그의 상관인 성공회 신부님들을 의식하는 듯했다. "예. 아버지..."종일도 그러했다. 마치 하인 집 자식이 주인집 딸과 아들을 대하듯이 대해 주었기에 어린 내 눈에도 빈부의 차이를 느끼곤 했으며 불쌍해 보였다. '불쌍한 종일 오빠....'나는 그에게 동정심과 애정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동정심(同情心)과 사랑(愛情)을 함께 공유한 김종일 오빠였다.- 그러고 보니, 종일(鐘一),형진(亨眞) 그리고 밥(Bob), 이 세 사내들은 점쟁이가 말한대로 나를 거쳐 간 사내들이었는데 나는 종일을 첫 번째 남자(第一男), 형진을 두 번째 남자(第 二男), 밥.맥나이트를 세 번째 남자(第 三男)라고 순서를 부치고 살아 왔다. 내 나이 50이 되어, 이들 세 남자들 중에 두 번째(第二男)와 세 번째(第三男) 사내들은 죽고 첫 번째 사내(第一男)는 소식이 없다보니, 결국 나는 세 남자 모두를 잃었기에 외로웠으며, 세상에 버려진 여인이 되었다. 4. "오늘 밤에는 토네이도(돌풍)와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강한 비가 올 터이니 누구를 막론하고 지하실로 대피하시오!" 우락부락한 백인 아파트 매니저가 방문을 두드리며 강력하게 권고를 하고 있었다. '오늘 밤? 토네이도가 온다면...죽는 거구나....' 비록 돌풍으로 죽는다 해도 나는 지하실로 가고 싶지 않아 불을 끄고 거실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캄캄한 밤, 강한 바람이 불자 유리창이 덜컹덜컹 거리며 밖에서는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아! 하나님!" 나는 할아버지(신부님)가 가르쳐 준 대로 기도를 올렸다. 할아버지가 검은 제복을 입고 기도를 드리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나 강한 비바람은 그치지 않았다. 전기가 나가자 텔레비존도 동시에 끊기면서 온통 암흑이 되고 말았다. 준비된 양초도 이젠 얼마 남지 않아 어둠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어린 사슴처럼 벌벌 떨고 있었다. 토네이도가 할퀴고 지나가면 꼼짝없이 죽는다는 생각이 솟았다. 텔레비존을 통해 보았던 토네이도의 위력은 온 마을을 싹 쓸어 버렸으며 그 무너진 잔해 속에서 수많은 시체가 발굴되는 것을 보았는데 그 무서운 토네이도가 다시 여기에서 발생할 가능성이 50% 이상이었다. '토네이도? 죽음?' 나는 몸서리쳐짐을 느끼며 누구라도 좋으니 나를 도와준다면 그의 손을 잡고 싶었다. * 그 순간 문득 선명하게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듬직했던 첫 번째 남편 박형진 육군 중령이었다. 어느새 그의 모습이 나의 눈앞에 우뚝 서 있었으며 나에게 다가와 다정하며 힘차게 말을 하고 있었다. -"채리야? 나 사관학교에 합격했어." "와! 오빠 멋있다." 내가 청주 여중에 입학하던 그해 박형진 오빠는 육군사관학교에 합격 했으며 그 후 2개월 후 육사 생도 유니폼을 입고 내 앞에 나타났을 때 나는 너무나 멋있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한 말이 바로 "와! 멋있다."라는 감탄사였었다. 그로부터 6년 후 내가 E 여자 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학과에 입학했을 때 육군 중위였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와! 예쁘다. 채리야...."라는 똑같은 감탄사였다. 그리고 4년 후 대학을 졸업한 지 불과 1달 후 나와 박형진 오빠는 청주 성공회 성당에서 온 청주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결혼식을 올렸다. 청주 부자의 아들과 성공회 신부의 손녀딸이기에 온 청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었다. 남편 박형진은 대위 진급을 한 후부터는 특수 정치적인 모임에도 자주 불려 갔으며 군부 정권이 필요로 하는 직업 정치군인으로 변했다. 그는 술 담배도 잘 했으며 성격도 호탕하며 한편 너그러웠다. 그러기에 나는 그로부터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할 수가 있었다. 결혼 생활은 생각보다 단순했으며 시아버지로부터 큰돈을 받아 살림을 하다 보니 군인월급은 용돈에 불과했었다. 결혼 한 지 10년, 하늘도 무심하지 중령으로 승진한 남편은 군대 안전사고로 세상을 떠났는데 군에서는 군 복무 수행 중에 전사했기에 육군 대령으로 추서되었다. 나의 충격은 엄청났다. 견디다 못해 그를 따라 죽기로 하고 동해안 바닷가로 찾아가 자살을 시도해 보았으나 지나가던 행인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 시집은 물론 친정에서조차 못마땅했기에 나는 집을 나와 혼자 살기도 했다. 물론 8살 된 딸은 시집에서 맡아 길렀다. 나는 남편을 정말 믿고 사랑했었다. 그만큼 그는 나를 위로해 주고 힘을 주는 남자였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토네이도가 언제 올지 몰라 공포에 질려 있는 나에게 죽은 남편의 모습이 떠오른다는 것은 당연했다. 육군 중령의 제복을 입은 남편 박형진의 모습이 우람했다. 그리고 그 입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가 나를 위로해 주고 있었다. "채리! 걱정하지 말라! 나를 생각하라. 나의 손을 꼭 잡아..." 남편은 큰 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여보! 여보!" 나는 그의 손을 꼭 잡으려고 손을 뻗쳤으나 잡히지 않았다. "아니? 내가 허깨비를 보고 있나....아냐!" 나는 남편의 손을 꼭 잡았으나 또다시 미끄러지고 말았다. 세찬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아파트가 들썩거리는 듯했다. 우지끈 우지끈하고 큰 나무가 밖에서 쓰러진다고 느껴졌다. "여보!" 나는 그의 손을 또다시 잡으려고 내 손을 길게 내밀었으나 아무런 감각이 없었으며 마침내 그의 모습도 사라지고 말았다. "여보?" 나는 진땀을 흘리며 그의 모습을 찾아보았으나 허사였다. 참으로 몇 년 만이던가. 내 나이 32살에 그와 사별했으니 어느 듯 18년 전의 그 모습이었다. 미국으로 이민을 오면서 다시는 생각도 않겠다고 다짐했던 그의 얼굴이 왜 오늘 이렇게 나타났는지... 그는 역시 나를 사랑한 남자였다. 내가 위기에 있을 때, 죽어서도 나를 구하려고 찾아와 준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보! 사랑해요." 나는 강한 비바람 소리를 더 이상 듣지 않으려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귀를 막았다. 밖에서 들려오는 비바람 소리는 작아졌지만 내 마음속에 있는 불안한 마음은 더 크게 증폭되고 있었다. 5. 잠시 눈을 붙이고 있었나 보다. 다시 눈을 뜨고 보니 비바람 소리는 여전했으며 저승사자가 여러 차례 왔다갔는지 피비린내가 나는 듯했다. "하나님!" 나는 하나님을 향해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채리? 너는 참으로 이기적인 애로구나...저 살자고 기도를 하는 거냐? 기도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했는데...'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한다고요?' 나는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기도 중에 떠오르는 모습은 5년 전에 죽은 두 번째 남편 밥. 맥나이트(第 三男)의 모습이었다. -미국 성공회 신부의 아들로 한국에 자주 와 같이 놀아주었던 백인 오빠, 밥은 때가 되어 아버지 조지 맥.나이트 신부가 한국을 떠나 미국 캘리포니아 주 옥스나드로 돌아갔을 때, 그도 역시 아버지를 따라 귀국해 버렸다. 그 후 어쩌다 그들의 소식을 성공회 신부를 통해 들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무슨 인연이 되려고 그랬는지 처음 남편이 죽고 6년 후인 내 나이 38세에 우연한 기회에 그와 연락이 되었다. 미국으로 가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며 에디슨 전기 회사의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었다. 남편 박형진과 사별하고 혼자된 나는 무엇보다도 외로웠으며 기력도 없었는데 또 다른 오빠 '밥'은 정식으로 나에게 결혼을 신청하였다. 45세의 밥은 한국에서 볼 때보다 더 세련되었으며 나를 더 사랑해 줄 것 같았다. 더욱이 죽은 남편 박형진을 진심으로 이해를 해주었기에 나도 그의 청혼을 떨리는 마음으로 받아드렸다. 마치 한 오빠에서 또 다른 오빠로 순조롭게 연결되는 듯했다. 그리고 약 1년간에 걸친 수속을 마치고 미국으로 온 나는 나이 39살에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보니 한국 사람과 미국사람의 생각은 다른 것이 너무나 많았다. 그러나 한 가지 같은 것은 사랑이었다. 사랑하는 마음은 모든 것을 이해시켜 주었으며 손짓 발짓을 해서라도 살아갈 수 있었다. 이렇게 저렇게 잘살고 있었는데, 6년 전, 그는 이유 없이 살이 빠지기 시작했으며 등판이 아프다고 호소했다. 내과에서 정밀 검사를 한 결과 췌장암이 그의 몸에 번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밥? 당신, 췌장암을 갖고 있소." 의사가 고심 끝에 진단을 내렸을 때 그는 뜻밖에 담담하게 되물었다. "췌장암이라고? 그러면 얼마나 더 살 수 있나요?" "치료를 잘하면 6년, 아니 그 이상 더 살 수 있어요." 의사는 더듬거리며 설명을 하였다. "닥터? 됐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부르시는 대로 가겠습니다. 그냥... 대신 내가 죽은 후에 아내 채리를 잘 부탁합니다." 그는 진정 천국을 소망하는 기독교 신자였다. 그리고 3개월 후 그는 내 손을 꼭 잡고 저 세상으로 가버렸다. 그리고 어느덧 5년......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나와 결혼한 오빠들(박형진과 밥)이 이렇게 죽다니.....나에게 무슨 악령이라도 있는 건가? 나는 밥이 죽은 후 눈물로 세월을 보냈었다.- "여보? 당신이 언제 여기에?" 5년 전에 죽은 밥(Bob)의 얼굴을 선명하게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을 잡으려고 내 손을 뻗쳤으나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모습은 사랑의 추억을 남겨둔 채 나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여보! 여보!" 나는 그의 손을 잡으면 토네이도에서 구출 될 거라고 믿었으나 죽은 자의 손은 잡히지 않았다. 세찬 바람이 아파트의 창문을 드세게 때리고 흔들고 있었다. 며칠째 아파트 창문 앞에 서 있는 제법 큰 활엽수 나무의 가지가 창문을 후려치곤 했는데 더 세찬 바람이 불면 유리창을 깨버릴 수도 있어 마음에 걸렸다. "무서워..나, 죽을 것만 같애...무서워..." 나는 내 입에서 저절로 나오는 '무섭다'는 말을 내 귀로 듣고 있었다. 6. "우르릉 쾅! 우지끈!" 아파트 밖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 천둥 그리고 소리비가 내 귀를 어지럽혔다. 벽시계가 멈춰 있었으며 찬장에 올려둔 커피 잔과 접시가 땅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산산조각이 되자 나는 극도의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나를 구해 주소. 나의 손을 잡아 주소...." 나는 소리를 내어 울고 있었다. '채리야? 세 번째 사내(第三男)의 손을 잡거라.' 신부님의 목소리가 어렴픗이 내 귀에 들려왔다. '세 번째 사내(第三男)라니요? 밥(Bob)은 이미 왔다갔습니다. 신부님?, 분명히 나에게 있어 세 번째 사나이는 밥(Bob)이 확실했다. '아니다. 살아 있는 사내 말이다.' '살아 있는 사내?' 순간 나에게 떠오르는 살아 있는 사내는 종일 오빠뿐이었다. "종일 오빠?"그는 제일 남(第一男)이었는데... -생각해 보니 나는 그를 까마득하게 잊고 살았다. 아니 무시하며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었다. 청소부와 식모의 아들이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채리야! 종일이 아버지는 청소부, 어머니는 성당 식모여. 그러니 종일이하고는 놀지 마라!" 나를 아는 사람들은 한 결 같이 나에게 충고를 했었다. 그럼에도 종일 오빠는 바보처럼 나를 정말로 잘해 주었다. 물도 떠다 주고 엎어 주었던 종일 오빠와 나는 캄캄한 성당 기도실에서 포옹을 한 적이 있었다. 포근하고 안락했었다. 메뚜기를 잡으러 갔던 무심천(無心川) 근처 논두렁에 세워둔 노적가리에서 소나기를 피하다가 추워 떨고 있는 나를 꼭 안아 준 적도 있었는데 역시 따스하고 안락했었다. 그러기에 그는 나의 첫 사랑이었으며 내 인생에 첫 남자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내가 성년이 됐을 때, 물론 종일 오빠도 나와 혼사 얘기가 오고 갔지만 격이 떨어지는 성당 수위(戍衛)의 아들이기에 가차 없이 깨어지고 말았으며 오히려 그에게 깊은 마음의 상처를 더 주고 말았었다.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내과 전문의사 과정을 마치고 청주 도립병원에서 의사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는 의도적으로 늘 나와 가까운 곳에 있었으나 나는 반대로 외면했다. 내가 밥(Bob)과 결혼하여 옥스나드에 살고 있을 때 그는 도립병원 내과 과장직을 사임하고 나와 가까운 곳에 있으려고 역시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와 형편없는 병원에서 의사일을 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한 두 번 그를 만난 적이 있었으나 의도적으로 외면하며 살아왔었다. 두 번째 남편 밥(Bob)의 장례를 치르던 그날, 그는 장지로 찾아왔는데 아직도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고 있었다. 남편, 밥(Bob)이 죽은 후 너무나 외로워 나는 그와 결혼을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주춤했다. 세 번씩이나 결혼을 하다니......내가 미쳤나? 말이 되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 * 우당탕...우직끈...우르릉.....아파트 밖에서 들리는 비바람 소리와 천둥 번개는 마치 나를 삼키려고 하는 듯했으며 겁이 나 밖을 내다볼 수가 없었다. 오늘 밤에 나는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죽기 전에 살아 있는 마지막 사내인(사실은 처음 사내) 종일 오빠에게 전화라도 하고 싶은 충동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왔으며 그가 한 말이 떠올랐다. -"채리? 어느 때고 내가 필요하면 전화를 해. 곧 달려갈 테니까...." 그런데 지금 와서 그에게 무슨 낯으로 전화한담...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매달리라고 가르쳐 주었는데 오늘 밤은 달랐다. 멀리 있는 하나님이나 죽은 사람들에게 매달리기보다는 가까이에 있는 산 사람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다. 문득, 어느 가을날, 벼를 벤 후 쌓아 놓은 노적가리 볏짚 속에서 내 가슴을 만지면서 그가 한 말이 생각났다. "채리? 너 예쁘구나."그는 나를 꼭 포옹해 주면서 나의 머리와 가슴을 살며시 만져 주었던 그 기억은 다소 부끄러웠으나 무서움 속에서 가져본 평화요 안락함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종일 오빠를 사모하는 어린 소녀가 되었다.- 밖에서는 비바람이 더 세차게 불어대니 유리창이 후닥닥 놀란 듯이 흔들리고 있었으며 나는 머지않아 토네이도가 아파트를 덮칠 거라고 생각했다. 순간 꽈당--쨍그렁---하는 요란한 소리가 나면서 마침내 며칠 전부터 유리창에 부딪히던 활엽수 나뭇가지가 꺾이면서 내가 사는 아파트의 창문을 깨뜨려 버리니 강한 바람이 아파트로 들이쳤다. 순식간에 창문의 커튼이 떨어지는가 하면 신문지가 여기저기로 나르며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물 컵이 마룻바닥으로 떨어지면서 더 요란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바람에 쓸려 죽을지도 모른다는 강박감에 침실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이제는 종일 오빠에게 도움을 청하려는 마음으로 수첩을 뒤져 그가 건네주었던 전화번호를 가까스레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213 375 0951과 714 525 4243이라는 두 전화번호였으며 분명히 '김종일 내과(Diplomate of American Board of Internal Medicine)'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종일 오빠!"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그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213 375 0951을 손가락으로 살며시 눌러 신호를 보냈으나 바쁜 신호가 들려왔다. '다시 걸까? 말까?' 나는 주저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무시하고 살았는데 이제 와서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한다는 것이 왠지 비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냐! 오빠. 날 좀 살려줘...죽을 것 같아...' 나는 7145254243을 떨리는 손가락으로 다시 눌러 신호를 보냈다. 두 번째 전화는 신호가 가고 있었으며 잠시 후 멀리 전화기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김종일 내과입니다." 분명히 어느 남성의 목소리였다. "............." "김종일 내과입니다. 말씀하십시오." 전화 속에서 들리는 그 목소리는 분명히 내 첫 번째 사나이(第 一男), 김종일의 목소리였다. "오빠? 종일 오빠! 나, 무서워, 나 무서워 죽을 것 같아....."나는 전화기에 대고 큰 소리로 외쳤다. "누구죠? 누구?" 상대방은 의아한 듯이 물었다. "오빠, 나 죽을 것 같아. 무서워. 무서워...." "어디가 아프세요? 알아듣게 말해 보세요!" 김종일은 직업의식에서 자살하려고 하는 환자가 죽기 전에 구원을 요청한다고 판단했는지 다그쳐 물었다. 가끔 심한 우울증 환자들이 의사에게 전화를 걸어올 때, 대부분 이런 식으로 대화가 진행되었기에 내과 의사 김종일도 긴장하고 있었다. "오빠! 나야. 나......무서워..." "누구죠? 혹시, 채리? 채리?" 종일의 목소리가 흥분돼 있었다. "오빠. 나, 채리야. 채리. 나 무서워..." "채리? 어디야? 어디에 있는 거야?" "오빠! 미주리 조프린....토네이도가 오고 있어...토네이도가..." "조프린이라고? 토네이도가 할퀴고 간 그곳에, 네가? 웬일로?" 김종일은 신문과 티비를 통해 엊그제 발생한 조프린의 참상을 환히 알고 있었는데 그녀가 조프린에 있다니 깜짝 놀랐다. "나, 여기에서 숨어 살았어...오빠." 나는 숨어산다고 말하면서 마음속 깊이에서 탄식이 나오고 있었다. "채리? 하필이면 조프린이야? 나에게 알리지도 않고... 사실, 채리야! 나, 너를 찾았어. 그런데 아무도 네가 어디에 갔는지 말해 주는 사람이 없었어. 그런데 조프린에 있다니. 맙소사!." "나, 말할 수가 없었어. 그래서 혼자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 가서 살고 싶었어." 나는 남편 밥(Bob)이 죽은 후 너무나 외로워 김종일을 찾으려고 했으나 두 번 결혼한 내가 종일 오빠를 찾는다는 것이 경박해 보였다. 성공회 수위(聖公會 戍衛)의 아들이라는 것은 가난했던 과거일 뿐, 종일 오빠는 오늘날 당당한 내과 의사로 남들 앞에 부끄러움 없이 서 있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나에게는 오히려 큰 부담이 되었다. "채리? 조프린에 가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나? 내가 곧 달려가마..곧...." "안 돼! 여길 오면 안 돼. 위험한 지역이야. 그리고 나는 오빠를 볼 수 없어." "채리. 내가 곧 가마....기다려라." 그리고 전화는 끊어졌다. 일부러 끊은 것인지 아니면 심한 비바람에 의해 접속이 안 된 것인지 구분이 되질 않았다. '내가 왜 이러지? 왜? 왜 종일 오빠에게 전화를 한 거지...지금에 와서." 잠시 후 전화가 다시 울렸다. 분명히 종일 오빠가 걸은 전화라고 생각을 했지만 나는 그 전화를 받지 못했다. 아니 받을 자격이 없었다. 다시 울리는 전화. 나는 전화를 받지 못하고 울리는 전화기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오빠, 오지 마. 오지 마. 나는 숨어서 사는 여자야. 숨어서 사는 여자. 죄인처럼, 하나님도 모르는 곳에서.....' 더 강한 바람이 깨진 창문을 통해 들이닥치면서 부엌에 놓여 있던 플라스틱 접시와 컵들이 와르륵 밑으로 떨어지고 있었으나 나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깨진 창문을 막아 보려고 침실에서 담요를 들고 나와 유리창을 가리는 순간 담요가 나의 얼굴을 휘감으면서 나는 마룻바닥에 쓰러졌다. 7. -인간은 죽음 직전, 그가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대답과 신념에 따라 죽음도 다르게 마련이다. 췌장암으로 죽은 남편 밥(Bob)을 보면 그는 아주 의연했었다. 더 살겠다고 구차하게 애걸을 하지 않았다. "하나님 나라에 가서 평안하게 살터인데, 죽는 것이 뭐 그리 두려운가? 채리," 그의 말이 죽음의 공포에서 벌벌 떨고 있는 나를 오히려 위로하고 있는 듯했다. 군대 사고로 죽은 남편 박형진도 의연했었다. "나, 여기 좋은 곳에 와 있어. 당신도 내 손을 잡으시오...." 그런데 나는 왜 이다지도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가? 순간 나는 마치 내가 그물 속에 갇힌 듯 느낌이 들더니 숨을 쉬기 어려웠다. 어느 의사가 말해 준 것이 기억에 났다. "신경성 불안 공포증(Hyperventilation)이 있군요. 그런 때는 신경안정제를 복용하시고 주무시지요. 아니면 정신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죽음과 공포에서 나를 구해 줄 분은 오로지 '주 예수뿐이지요. 인간은 사랑할 존재일 뿐 믿을 존재는 아닙니다." * 어제처럼 정전이 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티비(TV) 방송이 꺼졌으며 라디오방송 역시 찍찍거리면서 잡음을 내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 뉴스에 의하면 조프린을 강타한 토네이도는 지금까지 발생했던 토네이도 중에서 가장 강력하여 피해액도 상상을 초월할 만큼 엄청나다고 했다. 무려 6일째 강한 바람과 비가 내리며 천둥 번개 그리고 토네이도까지 여기 조프린을 삼키고 보니 어서 속히 여기를 떠나든지 아니면 자살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는 다시 일어나 담요를 들고 침실로 들어와 문을 꼭 닫고 밤을 새우기로 마음을 먹었으나 깨진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침실 문까지도 덜렁덜렁 움직이고 있었기에 이 문마저 부서진다고 하면 나는 꼼짝없이 죽을 것 같았다. 다시 울리는 전화소리가 바람 소리에 묻혀 아주 희미했다. 분명히 이 시간에 전화를 걸어 올 사람은 잠시 전에 통화했던 김종일 오빠뿐이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몇 번 더 울리다가 지쳤는지 전화가 다시 더 울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단념한 듯했다.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나더니 뒤따라 번개가 번쩍이고 있었다. 그 때마다 눈을 껌뻑였으며 "죽을지도 모른다"라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순간, '우지끈'하는 소리가 나면서 침실 문이 두 동강이가 난 듯이 이가 빠진 입처럼 반 이상이나 열리고 말았다. 바람이 몰아쳐 들어오자 텔레비존과 컴퓨터가 책상에서 굴러 떨어지면서 내 머리에 부딪쳤는지 나는 정신을 잃고 땅바닥에 나 둥글어 떨어졌다. 8. 내가 눈을 떴을 때, 나는 조프린 인근에 있는 공공의료기관 침대에 누워 천정만 멍하니 바라다보고 있었으며 어렴풋이 비바람이 불던 것이 기억에서 떠올랐다. 그리고 유리창이 깨지면서 비바람이 불어 닥치자 컴퓨터가 떨어지면서 내 머리에 부딪힌 것이 마침내 생각났다. "채리? 나야, 나 보이니?" 눈앞이 뿌옇으며 모든 것이 희미했다. 정신을 차리고 자세히 보니 어느 남자의 모습이 보였으며 무엇인가를 묻고 있었다. 나는 언 듯 보이는 남자가 담당 의사라고 생각했다. "채리? 나, 오빠야. 종일 오빠."그 남자는 재차 큰 소리로 내게 말했다. "누구? 오빠?" 나는 오빠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 종일 오빠." "종일 오빠?" 나는 그가 잡아준 손을 통해 따스하고 평화스러운 마음의 평화를 느끼고 있었다. "어, 채리, 네 전화를 받고 무작정 달려왔어." -김종일은 저녁 늦게 걸려온 전화에서 '나 무서워, 무서워'라고 울고 있는 채리의 모습과 신문과 방송 등을 통해 보고 들은 '조프린의 토네이도 참사'를 생각하니 채리가 어디에 파묻혀 전화를 걸고 있다고 생각을 하였다. 시멘트에 부딪쳤든지 아니면 다리가 나무에 눌려 있어 피를 흘리며 구조를 요청하고 있는 절박한 순간이라고 생각을 하니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항공사에 알아보니 내일 아침 일찍 오클라호마 튤사(Tulsa, Oklahoma)로 가는 비행기가 있음을 알았다. 튤사에 도착하니 정오경이 되었으며 자동차를 빌려 조프린으로 가는 길을 물어 무조건 조프린에 도착하였다. 다행히 재난 구호 기관에서 확인된 명단에서 전채리가 리지오날 병원(Regional Hospital)의 중환자실에 누워 있음을 알게 되었다. "어찌 되었습니까?" 간호사에게 물으니 "정신을 잃고 아파트 바닥에 누워 있는 것을 마내저(Manager)가 연락하여 병원으로 실려 왔는데 머리를 다쳤을 뿐만 아니라 심한 공포에 사로잡혀 정신을 잃은 것 같습니다. 곧 깨어 날 것입니다. 무려 6-7일간 변변히 먹지를 않았으니 탈진도 되었고요..."라고 친절히 알려 주었다.- "다행이구나, 크게 다치지 않아서..." 종일은 누어있는 채리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녀의 볼을 보듬어 주었다. 순간 채리는 초등학교에 다닐 때 종일 오빠와 같이 메뚜기를 잡으러 청주 무심천 둑방을 헤집고 다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베 베기를 마친 후 쌓아 둔 벼, 노적가리에서 오빠가 포근하게 안아 주던 그 순간이 또다시 떠올랐다. "채리야, 너 아주 예쁘구나...." 종일이 한 말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종일 오빠...." 채리는 무슨 말을 하려고 하다가 잠시 멈추었다. "알아, 알아. 채리...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 "채리, 퇴원하는 대로 이제는 나를 따라 오너라....어디로 가든지... 너 혼자 숨어 살 수는 없어. 내가 네 곁에 있어야 해." "고마워요." 채리는 마침내 눈을 감고 깊은 단잠에 들 수가 있었다. -점쟁이가 말했던 그 세 번째 사나이(第三男, 종일)의 손을 꼭 잡고, 성공회당으로 올라가는 길고 먼 돌계단을 한 발짝 두 발짝 밟으며, 남은 인생이 행복하기를 꿈꾸고 있으리라. 무심천 둑방에서 메뚜기를, 개울에서 송사리를 잡으며 즐거워하던 옛날로 되돌아간 꿈을 꾸고 있으리라. 월간 문학 2012년 5월 호 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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