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샤이엔강의 사랑

2012.12.09 13:22

연규호 조회 수:566 추천:36

7.단편소설: 샤이엔 강(江)의 사랑(The Love of Cheyenne River) * 해외동포 문학상 당선작, 2002년 * 계간 문학과 문화 신인상 당선작 2002년 1. 내 고향은 미국 중북부. 남 다코타 주(South Dakota)에 있는 이글뷰트(Eaglebutte)라는 조그마한 도시입니다. 그 도시 서쪽 편에 있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록키산맥으로부터 독수리 깃털을 머리에 꽂은 용맹스러운 인디안 전사(戰士)들의 고함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동쪽 편에 있는 대평원에서는 말을 탄 카우보이들이 소 떼를 몰고 오는 샤이엔강의 수. 인디안 들만이 모여 사는 고장이기도 합니다. 또한 들소들과 산양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으며 하루 종일 따스한 햇볓이 비치는 평화스러운 전원도시랍니다. 고속도로 90번을 타고 오다가 63번 지방도로로 바꿔 타고 북쪽으로 두 시간을 달려오면 내가 사는 이글뷰트에 도달하는데, 도시 입구에 ‘남 다코타주 샤이엔강의 수 인디안 보호구역’이라고 쓴 안내판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 인디안 보호구역이로군! 이라고 소리치며 여러분들은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금년(2000년)에 46세가 된 수. 인디안 남성으로 ‘이글뷰트 인디안 병원’에서 약 15년간 근무해 온 외과 전문의사입니다. 비록 인디안 들은 백인들에 의해 몰락하였지만 나는 인디안으로 태어난 것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음은 우리 수.인디안 들은 대 평원에서 들소들과 더불어 살아온 평화로운 인간들이었기 때문이지요. 나의 조상들이 살아 온 샤인엔 강과 불랙힐스(Black Hills)국립공원은 미쥬리 강으로 인해 만들어진 거대한 오하에(Ohae) 호수와 끝없이 펼쳐진 대평원을 배경으로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듯 아름답습니다. 불랙힐스에 있는 크고 작은 산들은 우리 수.인디안 들이 제사를 올리던 신령한 산이었는데 어느 날 백인들이 들이닥쳐 무자비하게 우리 수.인디안 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 러쉬무어(Rushmoore)산의 큰 바위를 깍아 와싱톤, 제퍼슨, 데오도르 루즈벨트 그리고 링컨의 얼굴을 조각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디안 들의 안식처인 테피(Tepee)는 하나하나 없어지고 백인들이 지어 놓은 ‘언덕위의 작은집‘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백인들은 우리 수.인디안 들의 모든 것을 빼앗아 버렸지요. 그래서 우리는 백인들을 침입자(侵入者)라고 부르며 복수의 칼을 갈고 있지요. 복수의 칼을! 아참! 나의 이름은 ‘와이트도브’(Whitedove), 즉 ‘하얀 비들기’라고 부른답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이름이 풍기듯이 나의 가문은 평화를 사랑했기에 1900년 초에 용맹스러웠던 나의 할아버지는 불랙이글(BlackEagle 검은 독수리)이란 수.인디안의 영웅적인 이름을 버리고 화이트도브로 바꿨다고 합니다. 제임스 와이트도브, 외과 전문의사가 나의 이름입니다. 수.인디안 사회에서 불랙이글이란 가문은 너무나 잘 알려진 용맹스러운 전사를 말하며 나는 수.인디안 전체를 통 털어 하나밖에 없는 외과전문의사이기에 추장의 이름은 몰라도 내 이름은 누구에게나 다 알려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나는 엉뚱하게도 지금은 수. 인디안 들을 죽인 백인들이 모여 사는 와이오밍 주 샤이엔에서 살고 있습니다. 들소들과 사슴들이 뛰어 놀며 온 종일 햇빛이 비치는 평화로운 나의 고향에서 추방되었기 때문이지요. 뜻밖에도 내가 순수한 수. 인디안이 아닌 사실이 밝혀져 인디안 사회에서 추방되었답니다. 참으로 놀랜 것은 한국 사람의 피를 받고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전능한 와콘다 신을 부정했기에 그로부터 받은 노여움으로 인해서 말입니다. 어떻게 내 몸속에 내가 그토록 저주하고 싫어했던 한국 사람의 피가 섞여 있느냐 하는 믿기 어려운 사실이 현실로 밝혀졌을 때 나는 샤이엔으로 찾아 온 것이지요. 왜냐하면 샤이엔이 바로 내가 태어나고 숨 쉬고 자랐던 참 고향이었음을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2. 뜻밖의 사건이 생겼습니다. 백인을 대신한 ‘새로운 침략자’가 우리 인디안 보호구역에 들어왔다고 하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칼리포니아 아나하임에 사는 다섯 명의 기독교인들이 우리 인디안을 위해 자비로 컴퓨터, 봉제기술 등을 가르쳐 주겠다고 피에르에 상주하며 이곳으로 매일같이 찾아온다고 하는데, 놀라운 것은 이들은 한결같이 버클리, 스탠포드 그리고 UCLA 를 졸업한 젊은이들이며 단장은 약사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부인은 이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음식과 세탁 등 궂은 일을 하고 있다고 했죠. 문제는 이들이 하는 봉사 외에 도 틈틈이 그들이 신봉하는 기독교를 가르치고 있는데 이것은 분명히 우리 수.인디안의 와콘다 신을 반대하는 중대한 이적행위랍니다. 이글뷰트 병원 한구석에 있는 의사 숙직실에서 밤늦게 잠을 청하고 있었는데 간호원으로부터 급히 응급실로 와 달라는 전화가 있었습니다. 급히 달려가 보니 오십이 조금 넘은 한 남자가 용맹스러운 우리 인디안 전서들에 의해 여기저기에 칼로 찔려 피투성이가 된 채 정신을 잃고 누어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인디안이 아니었습니다. 왼쪽 갈비뼈가 부러져 있었으며 더 급한 것은 비장이 파열돼 급히 수술을 받아야 할 것 같았습니다. “수. 인디안이 아닌 것 같은데, 피에르(Pierre)로 후송하시오! 인디안이 아니면 나는 치료를 할 의무가 없으니까.” 나는 퉁명스럽게 간호원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렇소. 인디안이 아니고 한국 사람이요. 봉사단원이요. 서두르시오. 환자는 죽어가고 있소.” “뭐라고? 한국인! 봉사단원? 그렇다면 평화롭게 살고 있는 우리 수. 인디안 들에게 들어 온 침입자로군! 나는 한국 사람을 싫어합니다. 아니 증오를 한다고요!” “닥터. 화이트도브! 무슨 말이요? 침입자라니? 우리를 위해 찾아 온 봉사자요! 어쨌든 시간이 없소! 서두르시오!” 간호원이 소리를 쳤습니다. “할 수 없군.” 나는 내키지 않았으나 의사이기에 한국인 봉사 단원을 수술해 회복실로 옮겼다. 비록 봉사단원이라고는 하지만 백인들이 인디안 들을 침범 살해하던 수법과 비슷하기에 내 마음 한편에서는 심히 불쾌하였습니다. 인디안 들이 백인 침입자들을 칼로 찔러 죽여도 이젠 당연한 것을 생각할 만큼 백인에 대한 원한이 크다는 말이지요. 아침이 돼 입원실에 들려보니 뜻밖에도 로버트 서(Robert Suh 徐)라고 하는 한국인 봉사단장은 수술후 경과가 좋아 의식을 되찾아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와, 끈질긴 사나이로군!” 나는 비웃듯이 말을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의사 선생님! 신의 가호가 있기를....” 로버트 서라고 하는 봉사단원이 말을 했습니다. “뭐라고? 신의 가호? 이것 봐, 내가 말하는 신은 불랙힐스의 와콘다(Wakonda)와 같은 전능한 신을 말한다고. 그러니 쓸데없는 소리 말고 경과가 좋아지는 대로 퇴원하시오. 알겠소? 그리고 부탁하기는 피에르(Pierre)와 같은 큰 도시에 가서 마약중독자나 도와주쇼!” “감사합니다. 살려주셔서. 은혜를 갚으러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오지 않아도 좋으니 그냥 가쇼!” 이것이 나와 남가주에서 우리 인디안 들을 도와주러 왔다는 한인 봉사단장, 로버트 서와의 첫 만남이었습니다.어쨌든 나는 한국 사람을 싫어한답니다. 한국 사람을..... 3. 이 사건이 생긴지 2주 후에 ‘샤이엔강의 수 인디안’ 부족회의가 이글뷰트 공회당에서 열렸습니다. 대 추장 오레겔(Oregel)과 7명의 부족장(추장)들, 이 사건에 연루된 다섯 명의 전사들 그리고 수술을 당당했던 나도 참석을 했습니다. 대 추장 오레겔은 다소 침통하나 근엄하게 말을 시작했습니다. “우리 수. 인디안 들은 이곳 샤이엔강과 대평원에서 평화롭게 살면서 불랙힐스에 있는 와콘다신을 경배하며 평화스럽게 살아왔는데 언제부터인지 백인들이 이곳에 들어와 우리 조상들을 무참하게 죽이고 와콘다 신을 대신해 기독교를 전파했다. 그런데 근자에는 백인들을 대신해 한국 사람들이 봉사를 한답시고 와콘다 신을 부정하고 기독교를 전파하다가 용맹스러운 전사들에 의해 칼로 찔린 자가 생긴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했기에 그자들에게 엄중히 경고 하고자한다. 와콘다 신을 부정하는 행위를 하면 가차 없이 처벌하여 추방시키겠노라.그리고 죽을 수도 있노라.” 대추장의 말은 인디안들에게는 절대적인 명령이요 법이었습니다. 그로부터 2 주일이 지난 어느 저녁에 나를 찾아 온 손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뜻밖에도 대 추장으로부터 엄한 경고를 받은 한국인 봉사단 단장 ‘로버트 서’ 였는대, 알고 보니 약사(藥師)였으며 부인과 같이 있었습니다. ‘아니, 이자가? 이 자를 만났다가는 오해받기 십상인데...’ 나는 당황하며 마지못해 그를 집으로 들였습니다. 서 약사와 그의 부인은 목숨을 살려줘서 내게 감사하다고 선물을 내 놓으며 한편 자기를 좀 도와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나는 힘주어 그에게 말했습니다. “ 계속하여 와콘다 신을 부정하는 행위를 하면 추방 될 거요. 그리고 죽을지도 모르오”라고. “아닙니다. 닥터! 내 얘기를 조금만 들어 주세요. 내가 왜 여기 인디안 보호구역으로 왔는지를, 왜? 꼭 여기로 왔는지를 말입니다.” 이 말을 한 후 그는 나의 대답도 듣지 않고 자기의 말을 계속했습니다. -그는 한국에서 약학대학을 졸업한 약사로 잘 살다가 1982년, 미국 아나하임으로 이민을 왔다고 했습니다. 미국 약사자격 증을 얻기 위해 세탁소를 경영하는 장인에게 아내와 자식을 맡겨 놓고 여기 남 다코타 주 부룩킹스에 있는 약학대학으로 편입하여 2년간 열심히 공부해 마침내 약사자격증을 획득해 칼리포니아로 돌아가 약사 일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그는 교회에서 파견한 의료봉사단원이 돼 멕시코와 과테말라에 사는 마야 인디안들을 2년간 열심히 섬기고 봉사를 했으나 스페인어를 제대로 하지 못했으며 아울러 인디안들의 풍습을 이해하지 못해 마야 인디안들로부터 무참하게 추방되었답니다. 이런 와중에 그에게 떠오른 것이 남다코타주에서 약사공부를 하면서 보았던 수. 인디안 들이었답니다. “수.인디안은 나와 똑같은 종족이요 동족입니다.” “뭐라고요? 당신이 수 인디안과 같은 종족이라고요? 무슨 소릴 하는 거요?” 나는 어이 없다는 듯이 서 약사에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대답이 재미있었습니다. 그는 약학대학에 다니면서 가끔 샤인엔강과 불랙힐스에 가 보았는데 수 인디안들이 너무나도 한국사람처럼 생겼기에 도서관에 가소 인디안에 관한 문헌을 찾아보던 중, 아놀드 토인비 교수가 쓴 ‘수.인디안은 어떻게 해 넓은 태평양을 건넜을까?’라는 글을 읽게 됐다고 했습니다. -이천 이백년 전에 중국의 춘추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秦)나라의 시황(始皇)은 늙어 죽고 싶지 않아 불로초(不老草)를 구하려고 선넘, 선녀 3000명과 이들을 이끌 그의 심복 서복(徐福)장군을 동방으로 보냈다. 그들은 제주도를 거쳐 많은 섬을 두루 다녀 보았지만 진시황이 죽자 진나라로 다시 돌아가지 못하고 일부는 태평양을 건너 다코카의 샤이엔강까지 왔으며 다른 일부는 베링해를 거쳐 알라스카로 갔다. -는 내용이었다고 했습니다. 결국 이들이 바로 수. 인디안이 된 것인데 서복장군의 중국식 발음이 수(Souix)라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닥터? 나는 정말로 당신가 같은 수. 인디안의 후예입니다.” 서 약사는 내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놀라지 아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수. 인디안의 풍습중에는 태평양의 섬에서 볼 수 있는 것도 많았으며 와콘다 신이 나온다는 화창 산(Hwachang Mountain)은 깨끗하다, 맑다, 라는 뜻이며 중국어로도 화창(和暢)이라고 표기하는 것이 기억납니다. 나는 서 약사가 설명하는 동안에 중국의 진시황이 보냈다고 하던 서복(Souix)장군과 3000명의 선남선녀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들은 배를 타고 망망한 태평양을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햇빛이 내려쬐이기도 하고 폭풍우가 불기도 했겠죠. 아름다웠던 선녀(善女)들은 나이가 들어 얼굴에 주름이 생기더니 하나 둘 죽어 바다에 던져지기도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한편에서는 어린 애들이 태어나 쑥쑥 자라 어른이 됐습니다. 마침내 샤이엔 강과 대평원에 와 테피(Tepee)를 짓고 들소와 사슴을 잡아 고기를 만들며 가죽옷을 짓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봄이 되니 옥수수를 심었으며 산나물과 약초를 캐기도 했습니다. 와콘다 신에게 제사를 드린 후, 선 댄스(Sun Dance)를 추며 아름다운 여인을 뽑아 그들의 영하, 샤이엔(Sheyenne)으로 받들었습니다. 샤이엔으로!. “이것 봐, 서 약사! 당신은 정말로 수.인디안의 후예임이 틀림없소. 제주도 서귀포에서 눈이 맞아 도망갔던 한 쌍의 선남선녀의 후손이니까. 그게 언제인데. 이 천년 후에 칼리포니아로 비행기타고 이민 왔다가 여기 다코타까지 봉사를 한다고 왔으니. 하.하.하. 멍청이...” 나는 조롱하면서 웃었습니다. “그렇소. 닥터! 그 때 겁이 나서 도망갔던 그 선남선녀의 후손이 바로 나요. 그러니 제발 나를 수.인디안으로 인정해 주소. 수.인디안으로.....” “알겠소. 그러나 우리 수. 인디안들은 순수한 우리의 피를 보존하였소. 그리고 와콘다 신만이 절대적인 우리들의 신이란 말요. 그러니 쓸데없이, 봉사한다고 하면서 기독교를 전파하려고 하지 마소. 부문별한 인디안 전사들은 당신들을 무참하게 죽일 수도 있소. 보소! 백인 놈들은 우리 인디안들을 무참하게 죽였으며 모든 것을 빼앗아 갔소. 그뿐인가 그들은 우리들을 보호구역에 몰아 놓고 교육을 시키기보다 돈과 약식을 주면서 한편으로는 마약과 술을 마시게 해 인디안들을 짐승들처럼 만들고 있소. 그뿐인지 아쇼? 그들은 우리들의 아름다운 여인, 샤이엔(Sheyenne)마저도 빼앗아 샤이엔(Cheyenne)이라고 했는데 그 뜻은 아주 더러운 술꾼, 마약 중독자라는 말요.” 나는 모처럼 인디안들을 대변하는 말을 했습니다. “닥터! 그러기에 나는 목숨을 걸고 기독교의 가르침을 전하려고 이곳에 온 거요. 그 길만이 마약과 나태에서 해방되는 길이니까요.” “뭐라고? 쓸데없는 소리마소. 우리 인디안들은 와콘다 신 이외에는 다른 신은 없소. 이제 돌아가쇼!” 나는 진전으로 핏대를 올리며 소리쳤습니다. “감사합니다.” 서 약사와 그의 부인은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는 사라졌습니다. ‘어디에서 본 얼굴인데.....’ 나는 뜻밖에도 서약사의 부인의 얼굴을 어디에서 많이 보았다고 생각했으나 기억에서 나오질 않았습니다. 4. 나는 이들을 만나 얘기를 한, 사건으로 인해 다른 인디안들에게 오해를 받게 됏을 뿐만 아니라 급기야는 대 추장 오레겔로부터 그의 사무실로 오라는 명령을 받게 됐습니다. “와이트도브! 너는 우리 수 인디안이 자랑하는 정통 가문이요, 유일한 외과 의사이니라. 너의 할아버지 불랙이글과 나는 친구요, 전사였어. 너의 할아버지는 더 이상 백인들과 싸우지 말고 교육을 해 인재들을 양성해야 한다고 하며 이름도 와이트도브라고 바꿨기에 변절자(變節者), 비겁자(卑怯者)가 돼 인디안 사회에서 추방됐었느니라.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보니 너의 할아버지의 말이 옳다고 생각되느니라. 그러기에 너와 같은 의사가 배출된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조심하거라. 우리의 신은 와콘다 뿐이야. 그러기에 서 약사와 같은 침입자들을 경계하거라.” 라고 대 추장은 나를 타일렀습니다. 그런데, 네게는 정통 인디안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숨겨진 비밀이 있었습니다. -약 5년 전, 어느 날이었습니다. 아이다호 주에 살고 있는 나의 아버지가 나를 보자고 해 찾아 간 일이 있었습니다. 말이 아버지이지, 나는 아버지를 증오하며 잊고 살았습니다. 젊어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부상당하고 귀국한 이후부터 그는 일도 않고 술이나 마시며 살아온 인생 낙오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제임스야! 이제 나도 65세가 되어 국가에서 주는 연금을 받게 되었어. 그동안 내게 꼬박꼬박 생활비를 보내 줘서 고마웠다. 그러나 이젠 더 안 보내도 돼. 그리고 내가 나이 들어 언제 죽을 지도 모르니 여기 내가 간직하고 있던 사진들을 네가 갖고 있거라.” 이런 말을 하면서 아버지는 내게 몇 장의 오래된 사진들을 내게 주었는데, 사진 뒤편에는 내가 잘 모르는 글자(한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진들은 나의 어머니, ‘죽은 어머니’의 사진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우물주물 말을 했는데, 내 어머니는 내게 네 살 되던해에 와이오밍 주 샤이엔에서 교통사고로 죽었다느니, 어머니가 죽은 후 할아버지에 의해 강제로 인디안 여성과 결혼해 몬태나에서 숨어 살아왔다느니 도무지 내가 알아듣지 못할 말들을 했습니다. 알콜 중독자인 아버지가 무책임하게 떠드는 헛소리라고 생각하며 묵살해 버렸으며 이일로 인해 나는 아버지를 더 더욱 미워하게 됐습니다. 물론 아버지가 준 ‘죽은 나의 어머니’라는 그 사진들도 책상 설합 깊숙이 감춰 두고는 까마득하게 잊고 살아왔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문득 문득 아버지가 무책임하게 했던 그 말이 정말이면 어쩌나 하는 불안한 생각을 품고 지금까지 살아왔답니다. * 불안하고 찜찜한 마음으로 숨기고 살아온 나의 과거가 사실로 온 천하에 밝혀진 것은 뜻밖에도 내가 그토록 싫어하던 서 약사부부 때문이었습니다. 서 약사와 나는 전생에 무슨 악연(惡緣)이 있었기에 순수 인디안 외과의사로 존경을 받으며 살아온 나를 하루아침에 거지처럼 초라하게 만들다니...... -그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한동안 눈에 보이지 않던 서 약사가 나를 다시 찾아온 저녁 나는 마침내 책상 속에 깊이 숨겨뒀던 그 문제의 사진들을 꺼내 그에게 어쩌자고 보여준 것입니다. “서 약사님? 이 사진들을 한번 보아 주시고 여기 뒤편에 쓰인 글자가 무엇인지 알아봐 주시지요?” “와! 오래된 사진이군요. 색이 바랜 것을 보니... 그런데 이 사진의 여인은 누구시죠? 인디안? 아니면 한국사람?” 서 약사의 눈에도 그 여인은 한국 사람처럼 보였나봅니다. “그렇죠? 마치 미세스. 서처럼 뵈는 이 젊은 처녀 말입니다.” “닥터? 한국, 경상북도 칠곡군 전덕면 27번지, 김성숙이라고 쓰여 있군요. 김. 성. 숙.” “김성숙?” 나는 설마 했던 사진이 정말 한국여자라는 사실에 깜짝 놀랐으며 마치 세상이 뒤집힌다고 생각했습니다. 46년동안 모르고 살아왔던 그 비밀이 현실이 되다니... “닥터. 와이트도브? 이 여인? 누구시죠? 예쁘군요.” “........” “누구신가요, 닥터.와이트도브?” “나의 어머니랍니다.” 순간 나는 내 입술을 잘못 놀린 것을, 아니 말하지 말아야 할 금기를 순간적으로 말했습니다. “어머니라고요? 한국여인이?” 서 약사와 그 부인도 놀라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솔직히 나는 나의 과거를 도둑맞고 살아온 외로운 사나이랍니다. 나는 지금까지 몬태나 주에서 인디안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순수한 인디안으로 알고 살아 왔는데, 뜻밖에도 5년 전에 나의 아버지가 나의 어머니는 한국 사람인데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말 했는데 나는 반시반의(半信半疑)하며 나의 과거를 잊고 살았답니다. 아참! 내가 괜한 말을 했군요, 인디안 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나는 순수한 인디안이 아니기에 여기서 추방이 된답니다. 내 아내도 모르는 비밀인데...그러니, 서 약사!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소! 부탁이요.“ 나는 순간 나의 비밀을 믿지 못 할 한국 사람들에게 알려준 것을 후회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습니다. “알겠습니다. 닥터. 그렇다면 당신은 우리 한국 사람의 피를 받았군요. 아버지는 한국전쟁의 용사로 우리들의 은인이었군요. 걱정 마십시오. 우리가 입을 열지 않겠습니다. 그 대신 성경책을 한번 읽어 보십시오. 그 안에서 진리를 발견할거요. 당신을 자유케 하는 진리를....” 그 말을 한 후 그들은 인사를 하고 가버렸는데 나의 마음은 더더욱 심란해졌습니다. 나를 불안케 해준 그 사진을 다시 들여다보노라니 사진 속의 여인이 나에게 무슨 말을 하는 듯했습니다. “제임스! 나는 너를 낳은 어머니다. 교통사고로 일찍 죽었어.”라고. “어머니? 어머니!” 나는 난생 처음으로 사진 속의 여인에게 어머니라고 불렀습니다. 6. 서 약사와 봉사단원들은 추방 명령을 받고 활동을 단념했는지 인디안 사회에서 전혀 볼 수가 없었기에 나는 안심을 했다. 그런데 나는 뜻밖의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또 한 차례 열린 수.인디안 부족회의에서 어쩌자고 나는 서 약사를 두둔하는 발언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서 약사는 정말로 우리 수.인디안과 같은 동족입니다. 그리고 그가 가르치는 내용을 들어보면 많은 내용에서 수긍이 가는 군요. 와콘다 신을 부정하는 것을 빼고는 말입니다.”- 많은 인디안들은 나의 발언에 강한 불만과 반감을 표시했는데 뜻밖에도 대 추장 오레겔은 나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으니까요. 이번에는 더 뜻밖의 일이 생겼습니다. -몬태나에 사는 아버지로부터 호출 명령을 받고 나는 꼬불꼬불 산길을 운전하여 와이오밍을 거쳐 몬태나로 갔습니다. 옐로우스톤 국립공원을 지나면서 나는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사슴과 들소들을 보게 되니 참으로 평화스러워 보였습니다. 오년 만에 다시 만나는 나의 아버지는 71세가 됐으며 인디안 어머니는 74세가 돼 많이 늙어 보였습니다. “제임스야, 며칠 전에 웬 한국 사람이 나를 찾아 왔었구나. 약사라고 하던데 한국전쟁에 대해 묻기도 했고 네가 수술을 해 자기를 살려주었다고 하며 네가 생명의 은인이라고 하더라. 어떠냐? 내일 나하고 옐로우스톤 간에 가서 낚시를 하지 않으련?” “낚시를요, 아버지?” 너무나 뜻밖의 제안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나와 같이 낚시를 하자니... 다음 날 나는 아버지와 함께 샌드위치와 맥주를 같이 먹고 마시면서 하루 종일 낚시를 하였습니다. 46세가 되도록 처음으로 가져본 아버지와 아들의 오붓한 시간이었기에 아버지에 대한 지금까지의 증오심이 눈 녹듯이 녹아내리고 있었습니다. “제임스? 그런데 하루 종일 잡은 고기는 어디에 있나?” 빈 고기통을 들고 돌아온 나를 보고 어머니(인디안)가 물었습니다. “아, 어머니! 잡은 고기를 모두 강에 도로 놓아 주고 왔어요. 대신 아버지의 사랑을 가득히 담아 가지고 왔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인디안 어머니는 또 한 차례 의아한 듯이 되물었습니다. 다음날-- 다코타로 되돌아오는 길에 나는 샤이엔 강가에 차를 세우고 ‘아버지, 어머니.’라고 불러 보았습니다. 그러자 내 눈 가장자리에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수 인디안의 아들은 결코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되느니라. 손자야.- 문득 죽은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 다코타의 8월, 선 댄스 축제는 오늘의 아름다운 처녀로 뽑은 샤이엔(Sheyenne)에게 면류관을 씌어 주면서 끝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캄캄한 밤이 찾아오니 멀리 불랙힐스 산위에서 별이 총총히 빛나고 있었습니다. 멀리 아팔라치아 산맥위에 있는 쉐난도아의 별이 수.인디안의 샤이엔을 만나러 왔는지 그 별은 더 밝고 또렷했습니다. 병원 숙직실의 창문을 열고 하늘의 별을 바라다보는 나는 외로운 사나이였습니다. 뜻밖에도 외로운 나를 찾아 온 방문자가 있었습니다. 나의 아내, 실비아였습니다. -순수 인디안 처녀, 실비아와 결혼해 살아 온지가 어느덧 17년이나 됐습니다. 내가 아이오아 의과대학에 다닐 때 만난 실비아의 아버지는 독수리 깃털을 머리에 꽂은 전사 출신의 부족장(추장)이었습니다. 그가 나를 처음 대면해 T을 때, 그는 들소 뿔로 만든 술잔에 수.인디안의 술을 가득히 부어 내게 주면서 말했습니다. “이것 보게, 제임스! 훌륭했던 전사의 손자인 자네가 내 딸을 사랑한다니, 내 마음, 확 놓이는 구먼.....” 그 후 우리는 많은 인디안 들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을 했답니다.- “당신? 무엇을 그렇게 곰곰이 생각하고 계세요? 어머! 당신? 저기 먼 하늘의 별들을 바라다보는군요?” “그래, 실비아! 저기 저 멀리 불랙힐스 산 위에 있는 별을 보라고! 저 별을!” “와! 밝기도 하지. 전설에 나오는 그 별, 인디안의 딸이라고 하는 쉐난도아의 별이군요? 아팔라치아 인디안 총각들이 사랑했다고 하던 그 아름다운 별들의 딸, 인디안 추장의 외동 딸, 쉐난도아의 별....” “그래, 실비아. 가만히 보니 저 쉐난도아의 별이란 바로 당신이었소. 당신. 수 인디안 추장의 딸인 당신이었소.” “쉐난도아의 별이 나라고요? 내가 그렇게 예뻐? 쉐난도아처럼?” “그래. 쉐난도아 보다 더 예뻐.” 나는 아내의 등을 살며시 감싸주었습니다. “......” 아내는 두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행복해 보였습니다. “여보? 만일에 내가 순수한 인디안이 아니라고 해도 당신은 지금처럼 나를 사랑할 수가 있을까? 순수한 인디안이 아니면 죽어서 와콘다 신에게 불려 가지도 못하고 불랙힐스의 돌 제단에 놓여 새들과 짐승들의 밥이 돼 없어진다고 하던데...” “여보,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순수한 인디안이던 아니던 제임스? 나는 당신을 사랑하오. 비록 죽어 나무 잎새처럼 땅에 떨어져 썩어 없어진다고 해도....” 나는 너무나 감격해 아내를 꼭 안아 주었습니다. 쉐난도아의 별을.... 6. 다코타의 9월은 인디안 들에게는 바쁜 계절이었습니다. 긴 다코타의 겨울을 지내기 위해 들소들을 사냥하고 옥수수를 수확해야 했으나 이젠 그럴 필요가 없게 됐습니다. 미국 연방정부에서 도와주는 돈과 농산물 때문에 우리 인디안 들은 일도 않고 술이나 마시면 됐으니까요. 그동안 눈에 안 보이던 한국인 봉사단원들이 다시 왔다고 하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과연 서 약사가 나를 찾아 왔는데 뜻밖의 뉴스를 가지고 왔습니다. 매우 반가웠습니다. “닥터 와이트도브, 감사합니다. 나를 위해 인디안 회의에서 변론을 해 주셨지요. 그래서 그에 대한 보답으로 아주 놀라운 사실을 자지고 왔답니다. 들어 보시겠습니까?” 나는 그가 하는 말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더 당황한 것은 나의 아내, 실비아가 따스한 인디안 차를 가지고 들어와 자기도 같이 듣겠다고 했습니다. 정말 나로서는 난처했습니다. “그러지, 실비아!” 나는 마지못해 허락을 했으나 서 약사가 혹시라도 나의 비밀에 대한 말을 한다면 어쩌나 하고 걱정을 했답니다. 서 약사가 우리에게 들려준 아주 놀라운 사실은 뜻밖에도 나의 비밀인 출생과 성장에 대한 폭로였답니다. -서 약사는 내가 보여준 사진 속의 사연을 알아내기 위해 몬타나 주로 가서 나의 아버지를 만난 것은 물론 비싼 돈을 들여 한국의 경상북도 칠곡군 전덕면 27번지로 찾아가서 “김성숙”이란 여인과 나의 아버지인 밥 와이트도브의 슬픈 사랑의 실체를 알아 가지고 왔답니다. 자존심이 강하고 존경받던 나의 할아버지 전사, 불랙이글은 백인들과 무모한 전쟁을 하느니보다 교육과 기술 향상만이 수 인디안 들이 살아나갈 길이라고 주장하며 이름도 와이트도브로 바꿨기에 변절자라는 낙인까지 받고 추방당했답니다. 결국 그는 아이다호로 이주했으며 그의 아들 밥 와이트도브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학에 갔답니다. 밥 와이트도브(Bob Whitedove)는 아버지의 도움을 거부하고 연방정부가 주는 장학금을 받아 공부를 했는데 그 조건에 따라 재학 중에 미군에 입대해 1950년 4월 초, 한국으로 파병돼 수원 근처에서 근무를 하게 됐답니다. 때마침 어수선하던 한국에 뜻밖에도 6.25 한국전쟁(韓國戰爭)이 일어났답니다. 별것이 아니라고 얕보았던 북한 군대는 서울을 점령하고 수원을 공격했습니다. 비참하게도 미군은 패퇴하여 남쪽으로 후퇴를 하게 됐습니다. 거지같은 패잔병으로...와이트도브 일병은 낙동강을 넘어 대구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 동료들과 추풍령을 넘어 김천을 지났습니다. 왜관 다리가 빤히 보이는 전덕 고개까지 와서 미군 패잔병들은 불행하게도 인민군들에게 발각돼 수류탄과 총격을 받았습니다. 밥 일병은 굉음소리를 들으면서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낙동강이 빤히 보이는 산등성이에서.... 얼마만에 눈을 떠보니 밥 일병은 온몸에 피투성이였으며 옆을 보니 동료 백인 병사들은 죽어 있었습니다. 밤새 기어서 내려온 곳이 전덕면에 있는 어느 초가집이었습니다. 이른 아침 집앞에 쓰러져 있던 밥은 육십이 넘은 김씨 노인에게 발견됐으며 그의 가족의 정성어린 간호로 목숨을 건질 수가 있었습니다. 비록 미군 패잔병이지만 우리 한국 사람들의 은인으로 여긴 김 노인과 그의 아내, 그리고 20세 된 딸, 김성숙은 성심껏 그를 도와주었습니다. 마침 그들은 중풍으로 사랑채에 누어있는 할머니를 두고 피난을 갈 수가 없는 처지였었고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노인 할머니의 중병으로 악취가 풍기고 있었습니다. 결국 할머니가 누어있는 사랑채 위편에 빈 가마니와 나무로 위장을 해 그곳에 미군 패잔병, 밥(Bob)을 숨겨두고 몰래 밥을 날라다 부고 상처를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가 생겼습니다. 전덕면도 어느새 공산군의 세력에 놓이다보니 수시로 인민군들이 집으로 찾아와 음식을 빼앗기도 하며 젊은이와 처녀들을 잡아 강간도 했기에 김성숙도 조마 조만한 세월을 보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 날 저녁, 인민군들이 들이닥쳤습니다. 미리 눈치를 챈 김성숙은 다락으로 통하는 천장에 숨어 있었는데 다행이도 인민군들은 그녀를 발견하지 못하고 사랑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중풍으로 누워 있는 할머니로부터 풍겨 나오는 심한 악취를 이기지 못하고 밖으로 나와 저희들끼리 불평을 했습니다. “와, 냄새, 내래 더럽구먼! 똥 냄새야, 똥 냄새!” 그리고 그들은 홧김에 박에 있는 닭 두 마리를 채어가지고는 나가 버렸습니다. 불과 2주일간의 세월이었지만 미군 패잔병, 밥(Bob)과 경상도 처녀 성숙은 언제 인민군에게 잡혀 죽거나 강간을 당할지도 모르는 절박한 상황과 말도 통하지 않는 조건에서도 자연스레 사랑하는 감정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밥 일병은 스스로 걸을 수가 있게 됐습니다. 불안하게 이곳에서 죽기를 기다리느니보다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낙동강을 건너 대구로 가기로 마음을 정했으며 김 노인은 친구에게 부탁해 달이 없는 그믐을 이용해 낙동강을 건너고자 나룻배를 준비했습니다. 헤어지던 날 밤, 처녀 성숙은 인디안 총각 밥 일병에게 가족사진을 몇 장 넘겨줬으며 그들은 그것이 마지막이 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낙동강으로 가는 도중, 김 노인과 밥은 인민군을 만나게 됐습니다. “동무, 어디로 가는 거야? 그리고 저 젊은 동무는 누구야?” 라고 고함을 쳤습니다. “아, 인민군 동무, 수고하십니다. 아, 이걸 한번 잡숴 보시라구요! 아, 얘 말입니까? 내 자식인데 말 못하는 벙어리라서.......” 라고 말은 했지만 불안했습니다. 이어서 김 노인은 인민군의 손에 금반지 하나를 쥐어줬습니다. “가보라고, 날래!” 인민군은 그들을 통과 시켜 줬습니다. 밤늦게 자정이 될 때까지 그들은 갈대밭에 숨어 있다가 “휙”하는 휘파람 소리를 듣게 됐습니다. “잘 가시게. 잘 가소!” 김 노인은 밥의 손에 또 다른 금반지 하나를 쥐어 주며 그의 등을 손으로 밀었습니다. “김 노인, 고맙습니다.” 패잔병 밥은 갈대가 우거진 모래밭을 힘껏 달려가 마침내 나룻배를 타고 칠흑 같은 밤에 낙동강을 건너 대구로 갔습니다. 그 후 밥은 부산으로 가서 미국 대사관을 방위하다가 미국 본토 버지니아에서 일 년을 더 근무하고 영예롭게 제대했습니다. 아이다호 포카텔로에 있는 주립대학에 다시 복학한 밥은 김 노인과 성숙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마다 그는 그녀가 준 가족사진을 들여다보며 ‘성숙씨, 보고 싶소. 사랑하오’ 라고 말했습니다. 밥은 마침내 아버지 전사, 와이트도브에게 이 사실을 알리면서 결혼하겠다고 허락을 요청했으나 정통 인디안 가문의 전사인 아버지는 완강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들의 고마움을 평생 기억하거라. 그러나 인디안 전사의 아들은 결코 다른 종족과 결혼 할 수가 없느니라. 설령 결혼하다고 해도 전능한 신 와콘다의 노여움으로 죽으리라!” * 1952년 5월, 밥은 아버지의 반대를 뿌리치고 한국, 전덕면으로 찾아가 김 노인에게 그의 딸, 성숙과 결혼하게 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이제는 기억에서조차 희미해진 패잔병, 밥이 살아서 찾아온 것도 놀라운 일인데 성숙과 결혼하겠다고 하니 김 노인은 더욱 당황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딸, 성숙은 그와 결혼하겠다고 했습니다. “아버지, 그 사람, 참 좋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을 따라 가겠습니다.” “그래? 아이다호 주에 산다는데, 거기가 도대체 어디냐?” 김 노인은 딸에게 물었습니다. 결혼 예식은 찬 물을 떠 놓고 김 씨 부부 앞에서 맞절을 하는 것으로 끝났으며 기념으로 흑백 사진을 찍었습니다. 김 씨 부부가 마련해 준 안방에서 신방을 차리고 첫날밤을 지낸 밥은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밥은 한국에서 찍은 사진을 아버지에게 보여드리면서 결혼한 사실을 알려드렸으나 아버지는 결혼을 인정하지 않음은 물론 너는 더 이상 인디안이 아니며 아들도 아니라고 선언을 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밥은 와이오밍 주 샤이엔에 있는 산림청(山林廳)에 근무하면서 샤이엔 외곽에 작은 집을 구하여 뒤편에 밀과 옥수수를 심고 송아지도 몇 마리 사서 기르게 됐습니다. 거의 일 년 만에 한국에 있는 아내, 성숙은 영주권을 받아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 동경으로 가 그곳에서 선박 편으로 일 개월 후에 산프란시스코에 도착한 후 다시 비행기를 타고 콜로라도 덴버 공항에 나리니 꿈에도 그리던 남편, 밥 와이트도브가 마중 나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은 샤이엔 와이트도브(Sheyenne Whitedove)로 바뀌었으며 언덕위의 작은 집이 그녀의 보금자리였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신혼집 주위에는 가끔 사슴들이 나와 거닐었으며 계곡 밑으로는 한가로이 들소들이 거닐기도 했습니다. 와이오밍의 여인은 카우보이보다 더 강하다고 했는데, 경상도 여인은 와이오밍의 여인보다 더 강했기에 억척스레 영어도 배우며 소도 기르고 옥수수 밭에 거름을 주기도 했습니다. 1954년 8월에 제임스 와이트도브가 태어났습니다. 분명히 수.인디안의 후손이었으나 할아버지는 손자라고 부르지도 않았으며 수 인디안의 전통에 따라 불랙힐스에 가서 와콘다 신에게 제사를 드리지도 않았습니다. 인디안 전사, 할아버지의 노여움뿐만이 아니라 전능한 와콘다 신의 노여움이 더 두려웠다고 했습니다. “수 인디안의 피를 더럽힌 자는 죽으리라. 와콘다 신에게서 죽임을 당하리라!”라고 한 할아버지의 말이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사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보슬비가 내리는 1958년 초여름이었습니다. 와이오밍의 여인, 샤이엔 와이트도브는 샤이엔 시로 가서 지붕을 고치려고 목재를 픽엎 트럭에 싣고 언덕위의 작은집을 향해 되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순간 차 뒤편에서 마무가 떨어지는 것을 감지하고 급히 브레이크를 밟은 것이 문제가 됐습니다. 차가 균형을 잃고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지면서 가엾게도 차체에 눌려 죽고 말았습니다. 지붕을 고치면서 아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밥에게 와이오밍 교통 순찰대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밥! 당신이 아내, 샤이엔이 교통사고로 계곡에 떨어져서 죽었소!” 이 소식을 들은 밥은 울고 또 울었습니다. 세 살도 안 된 아들, 제임스를 남겨두고 죽은 아내를 생각하다보니 심한 우울증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전사, 할아버지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거의 반 강제로 아들 밥을 세 살이나 더 많은 인디안 과부와 결혼시키고는 누구에게도 한국 여자와 결혼했던 사실을 은폐하라고 명령했으며 손자의 기억이 되는 일체의 사진도 태워 버리고 인디안 어머니를 생모라고 말하게 했습니다. 이길 만이 정통 인디안으로 유지하는 길이었으며 강제로 몬태나로 이주 시켜 인디안들과 일체 접촉을 못하고 살도록 엄명을 내렸기에 나의 아버지는 그렇게 살았으나, 외로움을 못 이겨 술만 마시며 아무런 의욕도 없이 지금까지 폐인으로 살아 왔기에 아들 제임스가 그토록 싫어했다.- 뜻밖에도 나의 숨겨진 비밀을 내가 그토록 싫어하던 한국인, 서 약사부부로부터 알게 됐을 때 그 충격은 나뿐만이 아니라 내 곁에서 듣고 있던 나의 아내, 실비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머니, 어머니.” 나는 눈물을 흘리며 엉엉 울고 말았습니다. 내게 이토록 훌륭한 어머니가 있었으며, 무능하며 저주스러웠던 나의 아버지에게도 이토록 아름다운 사랑의 추억이 있었다고 하니 자랑스러웠습니다. 이런 아버지를 위로하기는커녕 그에게 잔인하게도 돌을 던져온 내가 부끄러웠습니다. 더더욱 나를 감격케 한 것은 나의 아내 실비아였습니다. “제임스? 그래도 당신은 순수하고 자랑스러운 수.인디안이오. 그뿐인가요, 비록 순수한 인디안이 아니기에 이곳에서 추방된다고 해도 그리고 와콘다 신에게서 버림을 받아 무참히 죽어 낙옆처럼 땅에 떨어져 썩어진다고 해도..... 제임스? 나 또한 당신과 결혼해 똑같은 운명에 처해진다고 해도 당신을 사랑하오. 당신과 더불어 죽어 낙옆처럼 땅에 떨어져 같이 썩어지렵니다. 제임스!” “시리미아, 실비아. 당신은 나의 영원한 쉐난도아요, 샤이엔이요. 사랑하오!” 나는 아내의 손을 꼭 잡고 또다시 울고 말았습니다. 7. 나의 어머니가 인디안이 아니고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이 하나둘, 사람들의 입을 거쳐 온 인디안 들에게 알려졌으며 이 사실을 발설한 한국사람, 봉사단원들에게도 비난의 소리가 있었습니다. 예상대로 나는 인디안 부족 회의에서 순수 인디안이 아니라는 이유로 나의 모든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인디안 중에 유일한 외과 의사라는 직업도 그간 쌓아 올린 명예도 와르르 다 잃고 인디안 보호구역에서도 추방되고 말았습니다. 서 약사와 봉사단원도 목숨을 잃고 싶지 않으면 속히 이곳에서 나가라는 추방명령을 받고 황급히 짐을 싸들고 피에르로해서 마침내 칼리포니아로 철수하고 말았습니다. * 삼개월 후--- 칼리포니아 아나하임에 사는 서 약사와 부인은 뜻밖의 편지를 받고 놀랍기도 했으며 반갑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와이오밍 주 샤이엔에서 온 나의 편지를 받고서였습니다. 나, 제임스 와이트도브가 보낸 편지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사랑하는 수.인디안의 후손, 한국인 서 약사님 그리고 나의 어머니의 모습을 한 사모님! 놀라지 마십시오. 저는 제임스 와이트도브입니다. 인디안 사회에서 추방되면서 너무 급하다보니 서 약사님 부부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했군요. 두 분께서는 나의 존재, 즉 한국인의 피가 50%나 섞여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 약사님! 놀라지 마십시오. 나는 지금, 와이오밍 주, 샤이엔에 와서 나의 아내와 같이 외과 진료소를 개원했으며 나의 어머니의 숨결이 잠들고 있는 샤이엔의 북쪽, 쇼쇼니 마을에 살고 있답니다. 이집은 나의 어머니가 인디안의 아름다운 여인, 샤이엔(Sheyenne) 와이트도브로 살던 언덕위의 작은 바로 그 집이랍니다. 물론 내가 거기서 태어났으니 나의 진짜 고향이지요. 43년 만에 나는 나의 어머니의 숨결을 되찾았습니다. 샤이엔 공동묘지에서 나의 어머니가 잠들고 있는 것을 찾아냈지요. 샤이엔 와이트도브, 김성숙의 묘라고 쓴 동판을 발견했는데 놀라운 것은 나의 아버지가 자주 들려 깨끗이 손질을 했던군요. 술이나 마시며 게으르다고 생각했던 나의 아버지가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나의 어머니는 결코 외롭지 않았던 거지요. 왜냐고요? 낮에는 사랑하는 남편이 찾아오고 밤에는 쉐난도아의 별과 샤이엔의 처녀가 찾아 왔으니까요. 결국 우리 수.인디안이 자랑하던 아름다운 여인, 샤이엔(Sheyenne)이란 다름 아닌 나의 어머니였습니다. 나의 어머니가.... 또 한 가지, 우리들은 와콘다 신으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우리들의 발목에 족쇄를 채우던 와콘다 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이지요. 순수한 인디안이 아니면 죽어 영원한 곳으로 가지 못하고 단지 나무 잎새처럼 땅에 떨어져 썩어진다고 했는데... 우리도 이젠 죽어 영원한 곳으로 갈 수 있다고 하는 진리를 알게 됐답니다. 마지막으로, 서 약사님! 당신은 역시 수. 인디안의 후손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그러기에 당신은 나의 현제가 되는 것이지요. 들소들이 떼를 지어 놀며 사슴들이 하루 종일 뛰어 다니는 곳, 샤이엔강이 시작돼 동쪽으로 흘러가는 곳, 백인들이 들어와 만들어 놓은 샤이엔(Cheyenne). 그렇습니다. 나의 어머니, 샤이엔(Sheyenne)의 숨결이 있는 샤이엔(Cheyenne)으로 찾아와 주세요. 꼭! 초청합니다. 샤이엔(Cheyenne), 와이오밍(Wyoming)에서 수.인디안 외과 의사, 제임스 와이트도브(James Whitedove) 올림. 소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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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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