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빙산의 9각

2012.12.09 13:26

연규호 조회 수:583 추천:49

10..단편 소설: 빙산의 구각(氷山의 九角) 1. “서로 용서하고 받아 드려야 가정이 삽니다.” 남가주 롱비치 한인교회(Long Beach Korean Church), 담임 목사님은 나와 아내의 손을 꼭 잡아주며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부부사이에 깨어진 사랑을 다시 회복하려면 서로 반반씩 양보하고 함께 여행하다보면, 오해도 풀어져 자연스로 화해하게 된다고 목사님은 눈물을 떨어뜨리면서 충고를 해 주었다. 그리고 덧붙여, 알라스카 크루즈(Alaska Crusie)를 다녀오면 좋을 거라고 아주 친절하게 그리고 자세하게 크루즈 일정을 우리 부부에게 일러 준 것이 한 달 전이었다. *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죽을 거라고 내게 사형선고와 다름없는 진단(診斷)을 내린 주치 의사는 다름 아닌 내 친구였다. 그리고 9개월, 오해와 한숨으로 우리부부는 서로를 비난하며 지옥에서 사는 것처럼 살아왔다. 제발 앞으로 남은 3개월 만이라도 마음 편하게 살다 죽는다면 좋으련만, 지난 36년간 나와 한 솥밥을 먹으며 살아온 아내가 남편인 내게 갖고 있는 불신과 배신감을 원만하게 풀어주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죽는 것이 너무도 억울하다. 아내는 남편으로부터 배신당했다고 하는 분한 마음으로 이를 부드득 갈며 잠을 이루지 못하는 심한 우울증과 불면증으로 스스로를 학대하고 있는 것이 가엾다 못해 이젠 원망스럽다. 싫다고 우기는 아내를 어렵게 설득해 10일간의 알라스카 유람선 여행을 하고 돌아 온 것이 어제 오후였다. 말이 유람선 여행이었지 대화도 없이 안내자의 뒤꽁무니만 따라다닌 재미없는 그렇고 그런 여행이었다. 아내는 입을 꽉 다물었으니 대화도 화해도 없었기에 어떻게 보면 시간과 돈만 낭비한 꼴이었으며 오히려 아내의 마음속에 더 큰 불신과 원한(怨恨)만 증폭 시켜준 셈이었다.- * 그래도 알라스카 유람선 여행 중에 굳이 나에게 인상에 남는 것이 있다면, 북극의 여름밤은 짧다는 것과 알라스카 해안에서 목격한 거대한 빙산(氷山)에 대한 새로운 지식이다. 타이타닉 호를 침몰시켰던 빙산이란 10분의 1에 해당된 부분만 바다위로 나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며 10분의 9는 바닷물 속에 묻혀 있어 볼 수가 없다고 하니 그 크기는 상상도 하기 힘들만큼 거대하다고 침을 튀기며 설명하던 안내인의 모습이 아직도 내 눈에 선하다. 어찌 보면 부부간의 관계도 빙산을 보는 것과 같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난 36년, 나와 살을 대고 살아온 아내는 눈에 뵈는 10분의 1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살아 왔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숨겨진 나의 또 다른 10분의 9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바닷물 속에 감춰진 빙산의 10분의 9(氷山의 九角이라고 부르고 싶다.)를 검은 안경을 벗고 진솔하게 들여다본다면 좋았을 터인데, 아내는 그런 수고를 아예 하려고 하지 않고 눈에 뵈는 것만 가지고 비판하고 따지려고 하는 듯했다. “될 대로 되라지....” 나는 아내를 설득하지 못하고 오히려 포기하고 말았다. 순간 나는 지난 64년의 내 인생이 마치 다리를 다쳐 절룩이다가 대열에서 처져있는 사슴이, 달려든 사자에게 잡혀 갈기갈기 찢겨 죽어 가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바쁘고 힘든 외과 의사(外科 醫師), 밤잠도 못자고 수술을 해 사람을 살려줬으나 내게 돌아 온 것은 무엇이었던가? 알량한 수입은 소리도 없이 사라지고, 남는 것은 피곤과 수면 부족이었다. 그렇다고 고생 많았다고 아내가 나를 정답게 위로 해준 적도 없었다. 자신만을 챙기며 선한 척하는 아내로 인해 나는 죽음보다 더 무서운 외로움을 느끼다 못해 이젠 분노가 증오로 변하고 있었다. ‘그래, 당신은 천사처럼 선한 사람. 나는 3개월이면 죽어 없어질 불결한 사람.’이다. * 3개월 후면 죽을 거라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나는 마음이 울적해 오늘 오후 가까스로 차를 몰고 롱비치 항구에 있는 ‘퀸 메리 레스트랑-카페(Queen Mary Restaurant-Cafe) ’로 왔다. 숨이 턱턱 막히는 집을 뛰쳐나와 어디엔가 가 숨고 싶다. 카페의 창가에 앉아 설탕과 크림을 듬뿍 넣은 커피를 마시며 출렁이는 바닷물을 물끄러미 바라다보고 있다. 롱비치 항구와 등대 주위에서 갈매기들이 꺼역꺼역 소리를 내는가 하면 지나가는 유람선에서 울려나오는 빠른 음악소리가 잠시나마 울적한 내 마음을 위로 하는 듯하다. ‘나는 죽고 있다.’라고 생각하니 지난 64년의 세월이 보잘 것 없는 한줌의 물거품(泡沫)처럼 모였다 헤어지는 듯했다. 바닷물은 정박해 있는 배 주위에서 끊임없이 흐르고 있는지 작은 파도가 일기도 했다. 문득 눈에 뵈는 것이 있다. -누가 띄어 보냈는지 하얀 종이배가 거대한 ‘퀸 메리 호’ 주변에서 방향을 잃고 표류하고 있다. 저 멀리 바다로 나가지 못하고 배 주위를 맴돌았나보다. 누가 종이로 배를 만들어 띄어 보냈을까? 아니 왜, 그랬을까? 흘러가는 물위에 종이배를 띄워 놓고, 마음이 안타까워 종종거리며 따라왔으리라. 마음속에 묻어 두지 못하고 종이배에 태워 으츠러지게 떠나보낸 사람은 아마 실연한 어느 여인의 남정네였으리라. 물먹은 종이배는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도르르 도르르 맴돌기 시작한다. 가엾게도 이 종이배는 전진도 후진도 못하고 한 자리에서 맴돌기를 거듭한다. 배에서 뛰어내려 종이배를 구출해 주고 싶다. 안타깝다. 어딘가에서 이 장면을 바라다보며 안정부절, 눈물 흘리고 있을 실연한 어느 여인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마침내 종이배는 물속으로 가라 안고 만다. 그리고 내 눈에서 사라진다. 종종 거름으로 따라오던 그 여인은 해변 가에 주저앉아 입술을 깨물며 울고 있는 듯하다. 아니, 시한부 인생으로 죽어 가는 나를 위해서- *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던 저녁 해가 마침내 마지막 노을을 만들며 롱비치 항구 서편 바다 속으로 빠져 들어가자 주위는 캄캄해진다.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카페에서 울려오던 조용한 음악은 사라지고 박자 빠르고 우렁찬 음악이 쾅쾅 울려나오는 것으로 보아 저녁 댄스파티가 시작되는 듯하다. 롱비치 등대 주위에는 휘황찬란한 네온등이 하나둘 차례대로 켜지고 있다. 나는 카페에서 밖으로 나와 야릇한 웃음으로 날 반겨줄 아내가 있는 집으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나의 죽음이 점점 가까워 오자, 아내라는 존재가 법적인 구속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실감하고 있다. -내가 죽으면 아내는 나의 전 재산을 상속함은 물론 은퇴연금도 100% 수령할 권리가 있다. 그리고 은행 저금통장에 있는 내 이름은 자연스레 없어지게 되며 아내의 전유물이 된다. 그 뿐인가, 내가 죽으면 아내는 나를 매장할는지, 아니면 화장을 해 한줌의 재로 만들어 바닷물에 흘려보낼지를 결정하는 막강한 권리도 갖고 있으니까.- 전 재산을 가져가던 화장을 해 한줌의 재를 바다에 뿌리던, 한 가지 아내에게 정중하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 -‘바닷물 속에 숨겨진 빙산의 9각(氷山의 九角)을 단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검은 안경을 벋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들여다 봐 주기 바랍니다.’라는 부탁을- 롱비치 항구에서 집으로 되돌아오는 3마일 길이 오늘따라 더 멀고 꼬불거린다고 느껴진다. 그리고 몹시 피곤하다. 집에 도착하면 나를 경멸하는 눈으로 바라볼 아내의 얼굴이 무서워진다. 2. 4년 전, 60세 생일을 맞던 날이었다. 의사가 된지 34년, 외과 전문의사가 된지도 어언 29년...... 몸과 마음이 피곤하고 지쳐있었다. 쉬고 싶었다. 아니 의사를 그만두고 싶은 심정으로 생일을 맞게 됐었다. 이른 아침, 나는 아내가 준비해준 미역국을 먹을 수가 있었음은 행운이었다. -보통 아침식사는 6시경에 병원 식당에 가서 구운 빵, 우유 그리고 커피를 먹었다. 그리고 주어진 수술을 1-2건 하고 진료실로 가 환자를 진찰하는 것이 정해진 일과였다. 오후 5시경에 입원 환자 회진을 하고 저녁 늦게 집에 들어와 잠시 눈을 부치려고 하면 영락없이 응급실에서 전화가 온다. 맹장, 담낭, 탈장, 장출혈과 같은 응급 수술을 하게 되면 새벽 2-3시가 된다. 어떤 날은 뜬 눈으로 새기도 한다. 외과 의사의 하루는 중노동의 연속이지만 그래도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인술이기에 지금까지 버티고 살아왔다.- * “생일 축하해요, 여보. 이제 60이 됐으니 돈 버는 것도 좋지만 남을 돕는 일도 하시구료!” 아내는 거룩한 말투로 60세 생일을 축하해 주었다. 고맙긴 하지만 생일을 축하하기보다 나를 비아냥한다고 느껴졌다. 누군들 남을 돕는 일을 하고 싶지 않을까? 돈을 벌어도 쓸 시간이 없어 못 쓰는 외과 의사인데... * 문득 나의 지나온 인생이 영화 필름처럼 내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강원도 원주(原州) 근교에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 신통하게도 서울에 와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원주, 촌에서 용났다.”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농부인 아버지는 묵묵히 빗을 내서라도 용케용케 학비를 마련해 주었다. 내 나이 22살 되던 해, 나는 중앙선 열차에서 묘령의 김순애라는 이름의 아가씨를 만났다. 서울로 가는 기차에 우연히 같이 합석을 했는데 인연이 됐는지 사랑하는 연인이 됐다. 원주여고를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와 돈을 벌어 대학에 가려고 출판사, 말단 사무직 일을 하여 근근히 살며 악착같이 돈을 저축하여온 또순이 아가씨였다. 일이 꼬이느라고 아버지가 척추를 다쳐 더 이상 농사 짖기가 힘들다보니, 자연 학비 대기가 벅찼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모은 돈을 과감하게 나의 학비로 쓰라고 주었다. 조건도 없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2년, 그녀는 월급을 받아 꼬박꼬박 나의 학비를 대납해 주었기에 나는 의과대학을 졸업할 수가 있었다. 누가 들어도 순애보(殉愛譜)같은 사랑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친구들의 축하 속에 결혼하였다. 졸업과 더불어 우리는 한국에서 가난하게 사느니보다 미국으로 가서 잘 살아보자 라는 미국바람으로 결국 나는 군의관(軍醫官)이 돼 원주근교 육군부대와 횡성, 원통골에서 3년을 보내고 제대를 했다. 마침내 훌훌 마음을 털고 고향을 등질 수가 있었다. 가자! 미국으로... 우리는 보따리를 싸들고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키 위해 온 곳이 뉴욕의 흑인 촌이었다. 검은 사람들이 우글거리며 간이라도 떼낼듯한 요란한 총성이 들리는가 하면 밤에 길거리를 걷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다는 뉴욕, 부르크린에 있는 다운스테이트 병원에서 5년에 걸쳐 인턴과 레지덴트 과정을 어렵게 수련했다. 말이 미국이지 지옥 같은 곳에서, 외과 전문의사가 되는 길은 너무나 힘들었다. 당직, 응급환자, 칼부림, 총상, 강간, 살인 그리고 공포..... 내가 찾아온 부르클린은 지옥이었다. 차라리 서울에서 외과 전문의 과정을 무난하게 마쳤어야 했는데, 내가 돌았지, 미국이 무슨 천국이라고 왔는가? 밤낮 없이 오고 간 험악한 부르클린 길은 아내에게는 더 무시무시한 길이었다. 미국가면 공주처럼 화사하게 긴 드레스를 입고 파티에 가서 애써 배워온 춤을 추며 붉은 와인을 마시며 살 거라고 생각했던 야무졌던 꿈은 한갓 망상이었다. 파티는 커녕 사람만나는 것조차 무서웠다. 대학도 포기하고 남편의 성공을 위해 모든 월급도 시간도 그리고 얼굴 가꿈도 희생했던 아내가 흑인 촌에서 겪은 고통을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 명암(明暗)처럼 미국사회는 극명하게 두 사회가 공존하고 있다. 미국 외과 전문의사가 돼, 칼리포니아, 롱비치(Long Beach)에서 개업을 했다. 그림 같은 잔디와 화사한 장미가 피는 이층집에서 내려다 뵈는 잔잔한 바다와 자가용 비행기가 10여대 주차해 있는 사설 비행장을 보노라면 내가 어디에 있는가? 분명 부르클린과는 100% 다른 천국이었다. 마찬가지로 나의 아내도 점점 얼굴을 가꾸며 매끈한 벤즈 차를 몰며 나들이 하는 것을 보면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이 새로웠다. 외과 전문의사에 대한 대접은 한국사회뿐만 아니라 백인들 사회에서도 융숭한 것을 보면, 미국이란 나라 영락없이 돈과 금전의 나라임에 틀림없다. 돈 잘 버는 전문직에 있는 것이 소위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했다. 그러나, 당사자인 나 외과 전문의사의 생각은 달랐다. -외과 의사는 백인사회이건 흑인 사회이건 응급, 총상, 살인을 다루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백인 사회는 한술 더 떠 은근한 질시, 비하, 인종차별이 더 극심했다. 겉으로 말만 안했지, 속 내용은 더 심했다. 차라리 한국에서 살걸, 괜히 미국에 와서 이 고생을 한담! 사실 내 경우는 아내가 미국에 오기를 더 희망했었다. 아침 새벽에 병원에 가 토스트와 커피를 마시고 예정된 1-2건의 수술을 마치고 나면 축 처지게 된다. 급히 회진을 돌고 사무실 크리닉으로 오면 나를 기다리는 환자들이 있는데 지긋지긋해 어디로 피하고 싶었다. 또다시 응급실에서 나를 부른다. 배가 아프다고 아우성치는 백인 여성은 장 중첩으로 응급 수술이 필요했다. 오후, 저녁 그리고 집에 가는 시간은 밤 10시경.....이젠 아내를 정상적으로 보기도 힘들지만 의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많은 세금, 그리고 헌금으로 많은 돈이 나가야 한다. 모든 것을 아내가 관장해야만 했다. 언제부터인가 저금통장에 돈이 쌓이기 시작하고 벤즈 자동차를 몰게 되자 나는 칼리포니아에서 부유한 사람 중의 하나가 됐으며 아메리칸 드림의 성공자라고 불리웠다. 아메리칸 드림....그 성공자.... 그러나 나는 눈 코 뜰 새 없이 일하는 일벌레, 아니 돈벌레...결국 일과 돈의 노예가 되어 내 시간과 주관도 없는 피곤함과 졸리움 속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 나의 불만은 하루만이라도 마음 놓고 푹 잠에 빠져 보는 것이다. 한편 나의 아내의 불만은 달랐다. 비록 가고 싶었던 대학에는 못 갔지만 남들 못가는 미국에 와 의사 남편 거느리고 저금통장에 돈이 두둑한 것이 못내 즐거웠다. 그러나, 밤잠 못자고 병원에서 응급수술하며 이리저리 쫒기는 남편이 처음에는 가엾고 안스러웠으나 세월이 가면서 오히려 불만의 대상이었다. 가정도 모르는 남편, 남들처럼 여행 한번 못가는 남편이니까. 가정에 불만이 쌓이든 말든, 외과 개업은 번창하여 나는 궁궐 같은 저택을 구입했으며 고가의 자동차들, 그리고 뉴욕과 칼리포니아등지에 부동산을 사두어 은퇴 후에 안락하게 살리라고 마음을 먹었다. 오늘도 나는 3건의 수술을 했으며 응급실과 수술실을 여러 차례 왔다 갔다 하다가 하마터면 너무나 졸려 앞서가던 자동차를 들어 받을 번했다. “아! 하나님!”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탄식의 말이 나왔다. 3. 언제부터인가, 아내는 기독교에 심취하기 시작했는데 모르기는 해도 나에 대한 불만 해소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듯했다. 외로움과 허전함을 위로해 주며, 공포로부터 보호해주는 기독교, 그리고 짧은 이 세상에서 아옹다옹하기보다 먼 영생을 믿는 신앙심이 내 아내의 허전한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봉사와 헌신이란 명제는 모든 의사들에게 마치 아킬레스 건과 같은 첨예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의과대학에 입학하면서 항상, 주입 받는 사상이 “인술(仁術)과 봉사(奉仕)”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몸을 내주고 환자들을 치료해 주다가 죽은 많은 의사들의 얘기를 들어 왔으며 암암리에 강요되기도 했다. 언제부터인가, 내 마음에도 ‘나도 언젠가는 불쌍한 환자들을 돕는 의사가 되리라’ 라는 마음이 자라고 있었다. 아내는 내가 병원 일로 바빠 집을 비우는 것과 비례해, 교회에 나가 봉사를 하며 사회봉사에도 적극 가담하였다. 그리고 아내는 마침내 나에게 노골적으로 기독교봉사를 요구하기 시작했는데 나에게는 오히려 반감과 역겨움이 생겼다. 차라리 밤잠 설치며 일하지 말고 적당히 휴식을 취하라고 하는 배려를 해준다면 고마울 터인데. 바쁜 일을 제치고 아내처럼 교회봉사와 사회봉사에 참여하기는 불가능했으니까... * 내 나이 50세(아내는 나보다 3개월 연상이다.)되던 해, 나는 아내가 이런 마음을 품고 있음을 알게 됐으며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남편, 강석호 외과 의사는 가난 속에서 외과 전문의사가 됐으니 개천에서 용 난 셈이다. 그러기에 평생을 밤낮 없이 병원에서 수술이나 하며 많은 돈을 벌어야 하는 감방속의 죄수일 뿐이다. 아내인 나, 김순애는 대학도 안가고 벌은 돈과 아까운 처녀시절을 오로지 남편에게 강석호에게 다 바쳤다. 뿐만 아니라 결혼 후에도 먹고 입는 것도 희생하고 오로지 남편의 성공을 위해 내 모든 것을 희생했으니, 감방속의 죄수 강석호는 평생 아내, 김순애를 위해 열심히 일해 돈을 벌어다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4. 그 후 10년은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밤잠도 자지 못하고 외과 수술을 해 많은 수입을 올려 아내에게 주었다. 날개 돋힌 듯이 아내의 사회봉사와 개인 취미생활은 더 활발했으며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부러움을 받았다. 나는 아내를 즐겁게 해준다는 것이 행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아들에게 의과대학에 입학해 의사가 되라고 말을 했는데, 아주 뜻밖의 말을 아들로부터 듣고 나는 기겁을 했다. “밤낮 없이 뛰어다니며 개인 생활과 취미생활을 희생해야 하는 외과 의사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아버지!” 아들은 단호하게 의사가 되기를 거부했으며 오히려 음악가가 되고 싶어 했을 때 나는 아버지로서의 자긍심을 잃게 됐다. 뿐만 아니라 지난 36년의 의사 생활이 허탈했다. “과연 나는 무엇을 했던가? 허수아비나 신기루를 쫒아 다닌 세월이었나? 동기 동창 중에는 여러모로 성공한 사람이 많았는데 나는 무엇을 했던가? 학문? 돈벌이? 사회봉사? 어느 것 하나 나는 성공한 것이 없었다. * 내 나이 60이 되던 날, 나는 허탈한 마음으로 아내가 차려준 미역국을 먹고 병원 수술실로 달려갔다. 그날따라 나는 수술하기가 싫었으며 지루하고 피곤했다. “닥터. 강? 어제, 잠을 못자셨나? 정신 차리세요!” 간호원이 내게 충고를 해주었을 때 나는 번뜩 정신이 들었다. 담도(膽道)절제 수술이 오늘 따라 힘이 들었다. 잘못하다가 동맥이라도 자른다면 낭패인데... 겨우 수술을 마치고 두 번째 환자의 배를 메스로 개복하고 위의 60%를 절제해 하려고 했다. 수없이 해온 수술이건만 수술 시간도 배가 걸렸으며 매끄럽지도 못했다. 이런 현상이 자주 나타나기 시작하자, 선배 의사가 내게 충고를 해 주었다. “닥터. 강? 외과 의사는 몸에 이상이 오면 곧 은퇴를 하는 것이 자네를 위해서도 좋고 환자를 위해서도 좋다네.... 60이란 나이, 내과 의사는 몰라도, 외과 의사에겐 이젠 노인이란 말야.” 우울해지며 고독해졌다. -그동안 경제적으로 성공을 한 편이건만 근자에 모든 경제권을 아내에게 내주고 보니 갑작스레 거지가 된 느낌이었다. 다시 말하면 소유권(所有權)과 사용권(使用權)을 모두 잃어 버렸단 말이다. 게다가 60이 넘으면서 눈도 침침하고 기력도 떨어지고 보니 무력함을 느끼게 되었다. 무슨 뾰족한 수가 없을까? 나는 뾰족한 수를 찾기 시작했다. 어디로든지 뛰쳐나가고 싶었다. 어디로든지....어디든지.... 5. 근자에는 수술하기가 싫어졌으며 능률도 떨어져 동료 외과 의사들이 수군거렸다. “닥터. 강, 요 근래, 자주 실수를 하는구먼. 그러다가 소송에 걸려 망신당할 터인데.” 나는 조용히 앉아 나를 생각하면서, “그래, 많이 피곤하구나. 조금 쉬자. 재충전하자. 아내와 같이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오자.”라고 생각하였다. 그날 저녁 나는 저녁 식사를 하면서 “잠시 쉬고, 여행이라도 하자”고 아내에게 제안했다. “뭐라고? 쉰다고? 그럼, 돈은 안 벌고?” 아내의 얼굴은 벌겋게 흥분되기 시작했다. “60이 넘으면서 손도 떨리고 수술 중에 실수를 하는구먼... 아무래도 외과의사는 접어야겠어.” 나는 아내가 위로와 동의를 해주리라고 믿었는데 아내의 반응은 차가웠다. 아니 경멸하는 눈초리였다. 순간 나는 얼룩말 떼가 풀을 뜯고 있는데 그 주위에서 노려다 보고 있는 사자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분명 사자들이 다리를 다쳐 뒤로 쳐진 얼룩말을 공격하여 그 몸뚱이를 갈기갈기 찢어 포식하는 장면이 나를 소름끼치게 했음은 ‘그 뒤에 쳐저 잡힌 얼룩말이 바로 나라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아-’ 탄식을 하는 순간 나는 지금까지 까맣게 잊고 살았던 명제가 떠올랐다. “내가 병들어 죽으면 나는 어디로 가는가?” 그러고 보니 나는 외과의사로 돈과 명예에 관심을 두었었지 나의 미래를 생각해 보지 않았었다. 이렇게 살다가 죽을 수는 없다. 나도 어느 누구에게 나의 최선을 주고 싶다. 그것이 물질이든 사랑이든 누구이든 좋다. 나를 필요로 한다면, 나를 바치고 싶다. 아내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이 거칠어지고 가슴을 퍽 찌르는 듯한 비평의 말이 잦아질수록 나는 사랑이 더 그리워졌으며 거기에 비례 내 마음은 더 더욱 굳어졌다. * 오늘도 저녁을 먹고 난 후 혼자 집에서 한국 신문을 보고 있었다. 문득 눈에 띄는 안내-광고가 있었다. [광고: 아프리카 말라위에 있는 말라위 국립병원에서 무료로 3년간 외과 수술및 교육을 도와줄 외과 의사를 찾습니다. 기독교 신자이면 좋으나 기독교 봉사에 동의하시기만 해도 됩니다. 물론 자비(自費)로 하십니다. 말라위 병원에서는 숙소, 음식 그리고 교통편의를 제공합니다. 한국 기독교 봉사 센터, LA 지부로 연락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전화. 213 399 4162] “뭐라고? 말라위? 외과 의사를 찾는다고?”나는 크게 놀랐음은 물론 기쁜 마음으로 다시 한번 읽어 보았다. 그 이유는 여기 롱비치를 떠나 어디고 멀리 뛰쳐나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 가자! 말라위로......” 다음 날 나는 병원 일을 빼고 신문기사에 난 한국 기독교 센터를 찾아가 자원을 했다. “강석호 의사님!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결정하기 전에 현지를 한번 다녀오시고 마음을 정하시면 어떨런지요?” “왜죠?” “강석호 의사님? 말라위는 인구의 50%가 ”후천성 면역결핍증후군(AIDS, 에이즈) 환자입니다. 에이즈....에이즈 말입니다.“ “알고 있어요. 그런데 50%라고요?” “그렇습니다. 그래도 가시겠는지요?” “예. 가겠습니다. 꼭.....” “감사합니다. 강석호 박사님! 여기 서류에 사인을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그날, 집에 온 나는 아내에게 나의 결심을 말해주었다. “뭐라고요? 아프리카, 말라위? 말라위가 어디에 있는데, 거길 간다고?” 아내는 펄쩍 뛰었다. 나는 말라위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아프리카 중앙부에 있는 빅토리아 호수와 그 밑으로 연결된 말라위 호수에 1억 5천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아프리카의 심장부이다. 먹을 물이 항상 있어 사람 살기에 좋은 곳이다. 말라위는 과거 영국의 식민지로 최근에 독립한 국가이다. 이곳에, 의료시설이 부족해 죽어 가는 사람이 많으니 선교사들이 목숨 걸고 도와주며 예수님을 전파하고 있다. 불해하게도 인구의 50%가 에이즈 환자이듯이 선교사들에게 말라리아와 더불어 최악의 풍토병이라고 한다.- * “아니? 아프리카에 가서 3년을 보내면 우리는 무엇을 먹고 산단 말요? 당신 미쳤소!” “여보 나 미친거 아냐. 나도 의사로서 인술도 펴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은 순수한 마음으로 아프리카에 가려고 하는 거요.” “아니, 그동안 잠잠하다가 왜 갑자기, 아프리카에는 간다고....” 아내는 눈을 흘키며 악을 썻다. “외과 클릭닉은 3년간 닫고 가려고 하니, 당신도 같이 가서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줍시다. 당신이 나에게 바랬던 기독교 봉사잖소!” “아프리카? 에이즈가 우굴우굴 한다는 데... 왜 하필이면 그런 곳에?” “그렇다면, 서울 강남으로 갈까? 아니면 뉴욕 맨하탄으로 갈까요?” “맘대로 해! 마누라는 죽던 말던....” 아내는 문을 확 닫고 사라졌다. ‘아-저러고도 불쌍한 사람을 돕는 사람이라고 할까? 와!’ 나는 울컥 마음 속에서 솟구치는 분노가 있었다. 그러나 참아야 했다. 그것만이 아내를 건드리지 않는 최선이니까... 5. 지난 30년, 바쁘게 진료해오던 크리닉을 정리하고 아프리카로 떠난다는 것이 여간 힘들고 복잡한 것임을 준비하면서 알게 됐다. 아내는 물론 몇 명 안 되는 처갓집 식구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으며 심지어 친구 의사들도 말렸다. “왜 하필, 아프리카, 말라위? 차라리 한국의 시골에 가서 봉사하면 고향에 돌아와 좋고 안전해서 좋지.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꿔보게...” 나의 마음은 흔들렸다. 그러나 한 번의 약속을 파기하기가 싫었으며 말라위로 가려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2005년 8월, 무더운 여름, 나는 마음에는 내키지 않으나 억지로라도 나의 결정에 동의해 준 아내와 아들의 전송을 받으며 아프리카로 가는 비행기를 탓다. 독일 프랑크프르트에서 하루를 잔 후 케냐의 나이로비 그리고 말라위의 수도, 릴롱퀘(Lionwe)로 가는 긴 여정의 비행을 하게 됐다. 독일의 프랑크프르트에서 아름다운 라인 강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리고 이어진 케냐의 상공에서 본 킬리만자로의 눈이 인상 깊었다. 찌는 듯이 무더운 나이로비 공항에서 바꿔 탄 말라위 행 비행기에서 가난한 소국의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바다처럼 눈에 내려다 뵈는 빅토리아 호수 그리고 니아사(말라위)호와 그 동쪽으로 흐르는 시레강, 목적지 릴롱케가 눈에 보이기 시작하자 내 마음은 설레이기 시작했다. 앞으로 3년, 나는 여기 국립병원에서 외과 의사의 일을 하게 되며 몇 명 안 되는 말라위 의사들을 교육 훈련시킬 임무를 갖게 됐다. 인구 1200만 명, 20여개의 부족이 어울려 산다고는 하나 내 눈에 뵈기는 하나의 검은 인종이었다. 미국에서 보던 흑인들과 다른 것은 튀기가 많지 않아서인지 더 까만 얼굴에 반짝이는 유달리 반짝이는 흰 눈과 치아가 선명하게 흑과 백을 갈라주었다. 말라위의 8월은 거의 비가 오지 않는 건기라서 몹시 무더웠다. 에이즈와 말라리아 그리고 각종 풍토병으로 매일 200여명이 죽어 가며 평균 연령도 39세로 아프리카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중의 하나라고 하였다. 담배, 차 옥수수, 목화, 땅콩, 사탕수수를 재배하며 니아사(말라위)호수에는 수많은 고기가 있다고 하며 벽돌 시멘트 그리고 식품 가공업을 한다고 하는데 나라는 가난하다고 하니 내 마음도 아팠다. 국립 병원에서 보낸 차를 타고 릴롱케 시의 중앙부에 있는 병원에 도착했을 때 나는 완전히 지쳐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3년간 이들 검은 사람들과 같이 살아야 했다. 다행히도 나에게 전담 비서겸 간호원으로 40대 초반의 여성이 나를 도와주었다. 30대 초반에 국립병원 간호원으로 뉴욕시 부스 메모리알 병원으로 유학와 2년간 근무를 했다고 하며 미국이름으로 메리벨. 무타리카(Marybell)라고 했다. 말이 국립 병원이지 낡은 빌딩에 전기 시설도 부족해 수술도중에 전기가 끊기면 발전기를 돌려 수술을 마쳐야 했다. 수술 장갑도 낡고 혜어져 간호원들이 실로 꿰매 써야 했으며 약품은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내게 주어진 수술환자가 생각보다 많았으며 고질적인 피부 수술도 많았다. 미국에 있는 흑인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여기 흑인 의사들도 느리게 행동하며 이유 없이 빠지는 날이 많아 수술에 더 어려움을 느꼈다. 하루 일을 마치고 병원 숙소로 돌아오면 무더위에 땀이 뒤범벅이 돼 샤워를 하지 않으면 잠을 잘 수가 없었으나 물이 부족했다. 모기에 조심해야 했다. 그리고 끓인 물을 먹어야 했다. 가장 힘든 것은 멀리 미국에 있는 가족들과의 전화 통화였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인터네트를 통한 이메일이 가능해 소식 전하기가 수월했다. 일요일이면 인근 교회에 나가 예배를 보게 됐으며 생각보다 교인들은 내게 친절했다. 그래도 병원에서는 사람 조심을 하라고 충고 했다. 덧부쳐 무스림을 경계하라고 했다. 혹시라도 납치를 당해 끌려 갈 수도 있다면서.... 병원일도 점점 익숙해지고 보니 말라위 사람들과 친교도 하며 그들 사회에 나가 보고 싶었으며 점차 가능했다. 순박한 사림들이었으나 가난 때문에 마음 한구석에 방심 못할 의구심도 있었다. 릴롱케는 작은 도시였으며 조금만 밖으로 나가면 깡 촌으로 연결됐다. 말라위 호수에서 엄청난 양의 물고기를 보았다. 그리고 그 호수에서 나는 순박한 자연을 맛보았다. 짬을 내어 찾아가본 빅토리아 호수에서 나는 모든 것을 내던지고 예수 전도를 하려고 찾아온 한국인 선교사를 만나기도 했다. 미국에서 무료 봉사 차 온 외과의사 강석호의 사진과 기사가 말라위 신문에서 자주 보였으며 유명 인사가 됐다. 한국계 미국인이기에 그들에게 더 인상적이었다. 한 가지 유감은 말라위 정부로부터 주택(병원 옥탑방)과 식사 그리고 휴가비를 받는 것 외에 모든 것이 자비(自費)이기에 내 주머니에는 남을 도와줄 만한 돈은 없었다. 말라위 사회로부터 금전적인 기부를 요구 받았으나 어찌 할 수가 없었다. 2006년 7월 나는 휴가를 받아 미국으로 돌아오면서 가정의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비록 남편을 얕보고 경멸하는 듯한 아내가 아프리카에 홀로 있다 보니 그리웠다. 2006년 9월, 말라위로 되돌아갔으며 비슷한 생활을 하다가 2007년 7월에 다시 미국으로 휴가차 나왔다. 2008년 8월, 3년간의 의료봉사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 올 때 나는 말라위 보건 당국이 증정해 준 공로상을 받았으며 다시 돌아와 봉사하겠다고 약속을 하였다. 6. 미국으로 돌아오니 한국 신문에 나에 대한 기사가 특종으로 실렸다. ‘슈바이처와 같은 의사라느니, 목숨을 아끼지 않은 봉사정신’이라고 쓰였다. 친구들도 ‘참으로 힘든 일을 했다. 한국의사의 긍지를 보여 줬다’라고 등을 두드려 주었다. 교회에서는 나와 아내를 사람들 앞에 세우고 참된 예수님의 제자라고 불렀으며 나와 가족들에게 큰 복이 임하기를 기도해 주었다. 3개월이 훌쩍 지났다. 여기저기에서 받은 칭송이 마치 성자와 같았다. 그런데 2008년 11월, 나는 피곤함을 느낄 뿐만 아니라 피부에 붉고 푸른 반점들이 여기저기에서 생기고 있었다. 말라위 특유의 풍토병에 과로로 인한 피곤함이라고 생각하며 좋아 지겠지, 스스로를 위로하기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진맥진해 1-2개월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잠을 충분히 자며 맛있는 음식으로 영양보충을 하였다. 늦잠을 자며 힘들어 하는 나를 아내는 못마땅하게 여길 뿐만 아니라, 외과 개업을 다시 하던지 검진을 받아 보라고 성화를 했다. 마침내 나는 내과 개업하는 친구의사를 만나 종합 검사를 받게 됐다. 검사를 받은지 며칠 후, 친구의사는 나를 조용히 불렀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다소 심각해 보였기에 불길한 마음이 들었다. “석호야? 너, 혹시 아프리카에서, 수술 중에 바늘이나 메스에 찔린 적이 있니? 아니면 아프리카 여자하고 무슨 관계라도 있었니?”라고 물었을 때, 아차!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게 무슨 말야?” “석호야, 잘 들어둬. 혈액 검사에서 후천성 면역증후군(HIV-에이즈) 양성 반응이 나왔기에 묻는 거야.” “뭐라고? 에이즈?” “그렇다니까...석호야.” 그 순간 나는 앞이 캄캄해 졌다. 지난 몇 개월, 나는 눈에 띄게 줄어드는 체중과 여기저기에 생기는 반점으로 인해 혹시라도 에이즈가 아닌가 은근히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에이즈에 감염이 됐을까? 내 기억에 남는 것은 수술 중 바늘에 찔린일이 몇 차례 있었는데, 그때 감염이 됐다는 말인데... 아-하나님, 에이즈에 감염되다니요...왜? 이런 일이 생겼을 까요? 나는 하나님이 야속했다. * 내가 에이즈에 감염된 사실을 알고 난 아내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어떻게 그런 병이 옮겼는지? 아내는 내가 말라위에서 창녀나 에이즈에 감염된 여자들과 무분별한 성관계를 했으리라고 단정하고 나를 아주 경멸하는 눈으로 바라보며 응당 받는 죄 값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동안 남편인 나로 인해 아내도 전염이 됐을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혈액검사도 했다. 그동안 나를 칭찬해 주었던 교회 신도들도 나를 불결한 성적 타락자로 몰아 부치며 수군수군 거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쌓아 올렸던 나의 명예가 하루아침에 곤두박질하고 말았다. 명예와 불명예는 한 장의 종이 차이였다. 발견 된지 일주일 후부터 나는 에이즈 치료를 시작했으며 격리되다시피 했다. 어쩌다, 사람들을 만나도 악수를 피했으며 음식을 같이 먹을 수도 없었다. 가끔 들려주는 목사님과 친구가 고작이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물질과 의사라는 영향력이 다 빠져 나갔다. 병들어 점점, 하루하루 죽어 가고 있는 시한부 인생이었다. 나의 영원한 동반자라고 생각했던 아내마저 내 곁에서 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장 나를 괴롭게 한 것은 교회와 친구들이 내게 정죄(定罪)한 후 등을 돌리기 시작하자 나는 모든 것이 캄캄해지고 고독해 지고 있었다. 죽음에 이르는 고독(孤獨)이 이토록 나를 괴롭히는지 이제야 이해 할 수가 있었다. 일 년 내에 죽을 지도 모른다는 진단을 받은 후 어느 듯 9개월이 지났으니 내 앞으로 남은 생은 단지 3개 월 뿐이다. 남은 3개 월! 아내는 아직도 죽어가는 나에게 분노를 품고 있다. 목사님과 친구들이 죽어가는 남편을 이젠 용서를 하고 평안하게 보내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충고하건만, 아내에게 있어 종교적인 거룩 때문에 남편을 용서 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몇 년 전에 악성 췌장암으로 죽은 친구의 죽음이 생각났다. 진실한 신자로 죽은 후에 올 천국을 확신하였기에 이 친구는 죽음 앞에서 아주 의연했다. 그리고 그는 아무 근심 없이 세상을 떠났는데, 나는 왜 그런지 온통 불안하고 고독한 죽음 앞에서 초라했다. 에이즈의 전염은 99%가 성관계를 통해서 온다고 강조하는 친구 의사의 저의는 무엇일까? 수술 중에 찔린 바늘의 피나 메스에 묻은 피로 전염된다는 것을 믿지 않는듯했다. 그러기에 그는 내가 아프리카에 있는 동안 에이즈에 전염된 여인들과 무분별한 성관계를 했으리라고 단정하는 듯했다. 폐염으로 일주일간 입원했다가 겨우 퇴원했다. 다행히도 원생동물(기생충)에 의한 폐염이 아닌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대장에서 출혈을 꽤 했기에 수혈도 했다. 먹는 것이 힘들어 집으로 간호사가 출장 와 링거와 알부민등의 수액을 공급해 주었다. 하루 하루 다르게 수척해 지는 남편에게 이젠 아내도 가까이 와 간호를 하곤 했다. 그러나 아내는 말이 없었다. 그리고 때때로 한숨을 쉬는 것으로 보아 남편에 대한 분노가 가슴속 깊이 도사리고 있는 듯했다. 결국 나는 집에서 치료를 못하고 호스피스(죽기 전에 머무는 양로병원과 같음)치료를 받게 돼 나의 죽음이 멀지 않음을 예측하고 있었다. 가족이나 친구들이 떠나고 난 밤늦게 홀로 누어있노라면 나에게 엄습해 오는 고독으로 인해 눈물을 흘리곤 했다. 뜻밖의 편지를 한통 받았다. 멀리 말라위 릴롱게 국립병원에서 나를 도와주었던 간호사 겸 비서, 메리벨 무타리카가 내게 보낸 편지였다. 메리벨! 메리벨! 나는 그녀의 편지를 받으면서 그녀가 내게 주었던 위로를 기억할 수가 있었다. 르완다 학살 때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남편은 반군들에 의해 학살됐으나 그녀는 가까스레 도망쳐 남쪽으로 도망 온 곳이 말라위였다. 르완다 쪽을 바라다 보며 눈물을 흘리던 메리벨을 이해하게 된 것은 그녀를 만난지 거의 3개월 후였다. 그녀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멀리 미국에서 온 외과 의사 강석호의 고독에 쏫아 부었다. 그녀는 내게 나는 그녀에게 위로를 하며 3년을 살았으니 우리는 한 식구였다. 내가 말라위를 떠나 미국으로 가던 날 그녀는 엄습해 온 고독을 극복하기 힘들었다고 했다. 마치 아버지와 남편을 멀리 떠나보낸다고 생각하며 한없이 울었다고 했다. 그녀가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 외로움에서 잠시 일깨워 주었다. 강석호 의사님: 말라위를 떠나가신지 어느듯 11개월, 거의 일 년이 됐군요. 건강하신지요? 저는 선생님의 배려로 이렇게 건강하게 하루하루 간호사의 일을 하고 있답니다. 말라위에서 그토록 외로워 하셨는데 이젠 가족들과 같이 계시니 얼마나 행복하십니까? 강석호 의사님이 베풀어 주신 아버지 같은 위로 때문에 저는 오늘도 열심히 간호사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가신 후 저는 고독이란 무엇일까?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부모와 남편을 잃은 저도 고독했지요마는 더 고독했던 분을 찾아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내려와 죽을 수 밖에 없는 인류를 대신해 죽은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밖혀 달렸을 때, 내가 겪은 외로움보다 몇 백배 더 힘든 고독을 느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권세도 제자들도 그리고 다른 모든 것을 다 두고 가장 흉악한 범죄자들이 달려 죽어야 하는 십자가에 달려 피를 토하며 죽은 예수의 고독을 생각하면 우리 인간들이 갖는 고독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기에 인간이 갖는 고독은 예수님의 위로로 치료가 됩니다. 강석호 의사님에게도 예수님의 위로가 임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말라위의 수도, 릴롱게에서 선생님의 위로로 치유된 간호사, 메리벨 무타리카 드림. 세상을 비관하고 자살을 기도하리만큼 절망적이었던 그녀가 내가 내민 위로의 손을 통해 고독에서 회복된 후, 이제는 더 고독했던 예수의 위로를 통해 평안을 누린다고 한다. 비록 에이즈 감염 때문에 교회와 아내로부터 받는 오해와 고독이 아무리 무섭다고 해도, 예수님의 위로가 내마음속에 버티고 있는 한 나는 평안한 마음으로 남은 3개월을 더 살다 가리라. 2012년 창조 문예 9월호에 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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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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