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단편소설: “아내의 파란 눈동자에 비친 내 얼굴” “강석호 선생님, 오후 4시입니다. 예정대로 항해를 시작하겠습니다.” 롱비치 항구, 멀리 바다에서 해안으로 계속해서 밀려오는 작은 파도 소리가 마치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듯하다. “오른 편에 등대, 그리고 앞에는 거대한 퀸 메리호, 그리고 왼편으로 수족관이 있습니다. 이제 앞으로 2마일을 더 가면 항구를 벗어나게 됩니다.” 1시간을 빌린 장의사(葬儀社) 요트에는 나와 형님 그리고 처형이 아무 말도 없이 검은 모자에 검은 예복을 입은 장의사 직원 인 선장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불과 3마일의 짧은 항해 후, 바다 한복판에서 선장이 엔진을 꺼버리자 바닷물 소리와 갈매기들의 울음소리가 뒤섞여 애처로워 진다. “강석호 선생님, 당신의 아내, 실비아 맥.나이트(Sylvia McKnight, Kang)의 화장 재(火葬 災)를 여기 바다에 뿌리겠습니다.” 그리고 선장은 두 손을 모아 간절한 축복기도를 올려 주었다. 단순한 선장이 아닌 영혼을 인도해 주는 목사인 것을 알고 나니 더 엄숙한 마음과 신뢰감이 들었다. 짧은 축복기도가 끝난 후, 네모진 함에 들어 있는 화장 재가 선장, 형님, 처형의 손에 의해 바다에 뿌려지고 있는 소리가 내 귀에서는 울음소리로 들린다. 아니, 내 형님과 처형이 실비아를 부르며 조금씩 바다에 뿌리다가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파도 소리에 묻혀 사라진다. 마침내 화장 재를 다 뿌리고, 네모진 빈 함이 상주인 내손에 쥐어지자 27년간 내 손을 잡고 살았던 아내는 내 손을 밀치고 멀리 하늘로 올라가는 긴 여행을 시작하는 듯하다. “여보, 실비아! 당신의 얼굴, 한번만 보면 안 될까?” 나는 마침내 참고 참았던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대서양이 뵈는 뉴욕, 롱 아이랜드(Long Island)에서 아이리쉬 이민의 후손으로 태어나, 태평양이 뵈는 롱비치(Long Beach)에서 한국 사람인 나를 중매로 만나 결혼해, 시각장애자로 불편하게 살다,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나의 아내가 한줌의 재로 변해 바다 물에 흩어져 망망한 대해에 흡수되다니, 비록 육신은 없어졌으나 영과 혼은 저 멀리 평온한 안식의 세계로 올라갔으리라 믿으면서 나의 빈 마음을 스스로 위로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고작의 일이다. “실비아! 다시 만나, 우리, 서로, 얼굴을 한번 바라보자. 당신의 얼굴과 나의 얼굴을.” 나는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닦았다. 잠간 사이에 우리를 태운 장의사 요트는 온 길을 되돌아 롱비치 항구에 정박했다. “강석호 선생님, 다시 한 번 깊은 슬픔의 조의를 표합니다. 하나님의 가호가 있으시기를.” 선장은 내 손을 잡아 마지막 인사를 한 후 친절하게 나를 부축해 요트에서 내려주었다. 마침내 내 아내의 장례식은 시신을 화장해 멀리 롱비치 바닷물에 뿌리는 것으로 마감을 했다. 그리고 우리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내 아파트로 되돌아오니 6시를 알리는 라디오의 시보가 울리고 있었다. “당신의 아내, 실비아는 더 이상 이 아파트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강석호씨!” 라고 말해 주는 듯하다. * 약 한 달 전, 선천성 맹인인 아내의 병세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만성 신장염으로 인해 일주일에 2-3회씩 혈액 투석을 해 겨우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었는데 마침내 명맥을 유지하던 심장마저 악화돼 심부전증(Congestive Heart Failure)으로 전신이 붓고 가슴이 아프며, 숨이 차 응급차에 실려 병원에 입원했다. 병세가 생각보다 심각했다. 관상동맥을 확장 시켰으며 수혈도 했으나 결국 인공호흡기에 의해 생명을 유지하게 됐다. 내 아내 실비아는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선천성 시각장애 뿐만 아니라 심장판막 부전증 그리고 왜소(矮小)한 신장(腎臟) 때문에 학교에도 못가보고 집에서 개인 교육을 받으며 살아온 불구자였다.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것은 청각(聽覺)의 발달로 인해 노래를 한번만 들어도 정확히 외워 피아노를 치는 천부적인 재주가 있었다. 나와 결혼한 후, 형님과 처형, 그리고 미국 정부의 도움이 있었기에 오늘까지 여기 이 아파트에서 27년간 큰 탈 없이 살아 온 것이 기적이었다. 스스로 밥을 먹고 화장실에도 갈 수 있었지만 대부분은 나와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살아온 맹인이었다. 그런 중, 나를 만났기에 행복하게 살아왔다고 여러 차례 고백할 때마다 나는 그녀를 더 사랑했다. 그러나 50살이 넘어 신장기능(腎臟機能)이 갑작스레 악화되자 매주 3회에 걸쳐 혈액 투석을 했으며 숨어 있던 심장병마저 악화되기 시작하니,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고 의사들은 귀 뜸을 해줘 죽음에 대한 준비는 하고 살아왔다. 마침내 그 날이 찾아왔다. 중환자실에 입원된 그녀의 병세는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죽음을 앞둔 것을 알게 된 아내는 내 손을 꼭 잡고 안타까운 말을 했다. “여보? 나 죽기 전에 당신의 얼굴을 한번만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당연한 욕망이었다. 결혼 한지 27년, 그녀는 내 얼굴을 매 만지고 내 가슴을 더듬었지만 내 얼굴을 실제로 볼 수 없었기에 내 얼굴이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설명해 달라고 아이처럼 말하곤 했었다. 몇 년 전에는 소위 점자(點字)사진으로 내 모습을 더듬어 보아 비슷하게 알고 있는 듯했으나 눈을 뜨고 보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아내는 어린 아이처럼 모든 것이 궁금한지 나에게 쩍하면 묻곤 했다. -“한국 사람과 아이리쉬 사람은 어떻게 다른가?” “한국 사람은 황인종이고 아이리쉬는 백인종이다.”라고 설명을 했으나 선천성 맹인에게는 색깔에 관한 인식이 전혀 없기에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그녀가 아는 색깔은 꿈속에서 본 흑백(黑白)뿐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57년간 살아온 내 아내의 일생에서 가장 궁금한 것이 바로 보는 것과 색깔이었다. “여보, 석호. 당신은 어떻게 생겼어?” “어, 나, 키가 5피트 7인치에 160파운드야. 그리고 팔 다리가 건강한 남자야...” 그러나 그녀에게는 큰 키와 무게에 관한 개념도 문제였다. “당신의 목소리가 너무나 좋아요. 당신의 마음이 따스해.” 결국 그녀는 시각을 잃은 대신 소리(聽覺)와 감정(感情)에 아주 예민해 그것으로 그녀의 인생을 보완했다. 인간은 육(肉)과 영혼(靈魂)으로 구성되었는데 아내는 육(肉體)에 있어 문제가 있을 뿐 영과 혼은 아주 건강하였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내 아내는 아주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살아왔다. 그녀가 좋아 하는 찬송, “나 어느 날 꿈속을 헤매며”가 생각난다. ‘나 어느 날 꿈속을 헤매며 어느 바닷가 거닐 때, 그 갈리리 오신 이, 따르는 많은 무리를 보았네. 나 그 때에 확실히 소경(盲人)이 눈을 뜨는 것 보았네. 그 갈리리 오신 이 능력이 나를 놀라게 하였네. 내가 영원히 사모할 주님, 부드러운 그 모습을 나 뵈옵고 그 후로부터 내 구주로 섬겼네.’ 내 아내는 이 찬송을 부르며 내 얼굴, 코, 눈, 귀, 목, 가슴 그리고 손을 만지며 나를 확인하고 또 확인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갈리리에서 온 예수가 그녀의 눈을 뜨게 해 줄 거라고 확신하며 살아왔다. * 그날 밤, 불안한 마음으로 뒤척이고 있는데, 내 아파트로 걸려온 전화가 있었다. “강석호 씨? 중환자실입니다. 조금 전에 당신의 아내 실비아가 임종했습니다.” 롱비치 병원 중환자 실에서 간호원이 사무적으로 알려준 전화였다. “실비아! 실비아!” 나는 울기만 할 뿐 나 혼자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나의 형이 아파트로 달려와 나를 데리고 병원 중환자실로 달려갔다. 나를 위해 특별히 시신을 중환자실에 누여 놓고 내가 오기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실비아!”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리고 내 얼굴을 그녀의 얼굴에 포개었다. “아-아-” 그녀의 손과 얼굴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육체에서 영혼이 이미 떠나갔는지 얼음처럼 차가웠다. 아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아내의 얼굴을 나도 볼 수가 없었다. 단지 그녀의 얼굴을 상상해 볼 뿐이었다. “당신의 아내, 실비아는 이제 세상을 떠나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때를 맞춰 찾아온 병원 목사님이 내 손과 아내의 손을 같이 잡고 간절한 기도를 올려 주었다. 평생 눈을 뜨지 못하고 빛과 색깔을 구별 못하고 살아온 시각장애자의 인생에서 빛과 색깔이 화려한 천국에 가 모든 것을 보며 행복하게 살기를 빈다는 목사님의 기도소리가 나를 울려 주었다. “실비아, 당신 저 천국에서는 내 얼굴을 알아보겠지?” 나는 평생 내 얼굴을 보지 못하고 떠난 아내의 얼굴을 내 손으로 다시 한 번 만지고 내 얼굴에 그녀의 손을 들어 내 얼굴에 가져다 대었다. “잘 가...실비아.” 병원 직원이 죽은 아내를 흰 모포에 덮었다. 그리고 바퀴달린 침대를 밀고 지하에 있는 시체 안치소로 내려간다고 했다. * 3일 후에 있은 아내의 장례식은 뉴 포트 퍼시픽 헤이븐 장의사에서 아주 조촐하게 거행됐다. 평생을 장애인으로 고생해 온 아내를 기억할 만한 사람들도 많지 않았으며 죽어서 까지 다른 사람들의 신세를 질 이유가 없다고 한 아내의 의견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장보다는 화장을 해 바다에 재를 뿌려달라고 한 유언도 존중되었다. 아내의 가족과 나의 가족 모두 합쳐 20명은 되었다. 남편의 이름으로 보낸 화환과 교회에서 보내준 화환이 식장을 빛내주었다. 교회 장애자 사역을 하는 김 목사님이 집례를 해 주었다. 나무로 잘 만든 관에 누운 아내를 다시 만져 볼 수가 있었다. 화장을 했지만 얼음처럼 차기는 마찬가지였으나 그 속에 나에 대한 정과 추억이 있기에 역설적으로 따스했다. 장례식 내내 나는 아내가 내게 한 말을 되씹고 되씹었다. “여보? 죽어 천국에 가면 낮보다 더 밝고 그곳에 가면 내 눈도 떠진다고 해. 나도 볼 수가 있어. 여보 나, 먼저 가서 당신을 생각하며 기다릴게... 여보, 당신을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당신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천국에 가서 당신 얼굴 볼 거야. 당신 아주 잘난 남자인데...“ 27년간 같이 살면서 얼마나 내 얼굴을 보고 싶어 했을까, 나는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고 이해한다. 장례식이 끝난 후 잠시 그녀의 얼굴과 몸을 만지며 육신의 이별을 하였다. 그리고 그녀의 시신은 장의사 차에 실려 화장터로 옮겨졌다. 형님과 처형의 입회하에 다음 날 화장이 됐으며 한줌의 재가 돼 네모진 함속에 담겨졌다. 그리고 그 함을 내게 만져보라고 주었을 대, 나는 그녀와 내 인생이 한줌의 재가 돼 하나가 됐음을 느끼고 있었다. 2 57년의 인생, 그중 27년은 나와 살아온 정들었던 인생이었다. -27년 전, 어느 날, 그녀를 내게 중매해 준 분들은 다름 아닌 내 형님과 그녀의 언니였다. “석호야! 너와 같이 서로 위로하고 의지하며 살 좋은 여인이 있어. 어떻겠니? 만나보고 좋으면 결혼을 하거라. 혼자 사는 것보다 같이 사는 것이 좋지 않겠니?”- 내 나이 25세 그녀는 나보다 5살이 더 많아, 30세였다. 게다가 나는 한국 사람인데 그녀는 백인(아이리쉬)여자라고 했다. 날 때부터 눈이 안 뵈는 선천성 시각장애자라고 했다. “선천성 시각 장애자를?” 나는 처음에는 망서렸다. 맹인이라면 나보고 그녀를 도와주라는 말인데.... 아니 나도 힘든데, 나를 도와 줄 사람이 필요한데... “석호야? 결혼이란 누구의 덕을 보고 도와주고 하는 것이 아니지...서로 의지하고 돕는 거지.. 돕는 거.... 너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잖아. 그러다보면 사랑이 생기고 목숨도 바칠 만큼의 아가페 사랑이 생기는 거지....” “형님! 내 나이 25살인데 여자는 나보다 5살이나 더 많고 게다가 맹인에 백인여자라... 형님! 나보고 종살이 하라는 말입니까? 내 한 몸도 힘든데. 그만두쇼! 그만둬! 대학 다닐 때 백인 애인 하나 있었는데 별 볼일 없으니까, 쨍! 하고 칼로 무 자르듯이 사라졌어요! 아시겠소? 형님!“ “그래, 네 말, 알아듣는다. 며칠 여유를 주마. 한번 생각해 보거라. 아무렴, 형님이 네 걱정하지, 널 종 사리 시키겠니?” 그리고 사흘이 지났다. 웬일일까? 내 마음에 변화가 생기고 있었다. “형님말씀대로 결혼하겠습니다.” “석호야, 내 말대로가 아냐! 네 말대로야. 그러니 잘 생각해 봐!” “예. 하겠습니다. 후회 없이......” “그런데 나와 처형에게 꼭 약속할 비밀(秘密)이 있어. 네가 꼭 지켜 주어야 할 약속(約束)이야.” “예? 비밀? 약속? 아니 눈먼 사람 결혼하는데 무슨 놈의 비밀, 무슨 놈의 약속이요? 형님!” “그래, 눈은 멀었지만 너는 남자야! 사나이란 말야! 못하겠으면 그만두고...” 그리고 형은 내게 꼭 지킬 비밀을 알려 주었다. "예? 그런 비밀의 약속을?“ “그렇다. 네가 남자라면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약속이야!” “.......” “왜? 자신 없어? 남자가 쫀쫀하긴...” 형님은 나를 비웃는 듯이 말했다. “예. 형님. 그 약속 꼭, 지키겠습니다.” “그래? 좋다! 대신 나와 처형은 너희들의 앞날을 책임지마!” “저희들의 미래를? 책임진다? 어떻게?” “어떻게? 그건 약속하마! 믿으라!” 형님은 내 손을 꼭 잡고 힘을 주어 흔들었다. 결국, 나와 실비아의 결혼은 너무나 쉽게 그러나 비밀을 지키는 조건으로 이루어졌다. -한국에서 이민 온 나와 5살 더 많은 눈먼 백인여성과의 결혼이라.... 백인? 파란 눈, 금발의 머리, 우뚝 솟은 코도 이상한데 너무도 다른 습관과 풍습으로 살아온 그녀를 이해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큰 부담이었다. 공주병에 들린 여자라면 힘든 데. 나를 다스리는 것도 힘든 데, 눈먼 연상의 백인 여자를 도와야 한다는 것이 큰 충격이었다.- * 처음 만나 소개 받던 날, 떨리는 마음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을 때 내 가슴은 쿵쿵 뛰었다. “실비아 맥 나이트라고 합니다.” 그녀가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아, 예. 저는 강석호라고 합니다.” 나는 머뭇머뭇했으며 말을 더듬었다. 그녀의 영어 발음이 퍽 부드러웠으며 자상한 누나를 만나는 느낌이었다. “강석호씨, 나는 당신의 아내가 되렵니다. 부디 날 받아 주소서.” “예? 아내라고 했나요?” “예. 강석호 씨의 아내.” 나의 아내가 되겠다고 말하는 그녀에게 나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실비아? 나도.”라고 말을 더듬었다. “나같은 맹인을 받아 주다니, 감사할 뿐....” 실비아는 나의 손을 꼭 잡았다. “실비아? 나도 다리와 손을 잘 못 쓰는 지체 장애자입니다.” “알고 있어요. 언니가 말해줘서.” 그녀는 이미 내가 불구자임을 알고 있었기에 마음이 놓였다. 마침내 나는 내 일생에 처음으로 실비아에게 거짓말을 해야 했다. -“실비아? 내가 세 살 때 소아마비(폴리오)를 앓아 오른쪽 다리가 약해 지팽이를 사용해야 합니다. 일어나고 앉을 때 그리고 걸을 때 반드시 접었다 펴는 알미늄 지팽이를 사용합니다. 게다가 7살 때 넘어져 왼쪽 팔목을 다쳐 왼손을 제대로 못 씀니다. 그래도 남에게 신세 안지고 지금까지 살아 왔습니다. 물론 형님 내외와 가족이 곁에서 도와주었으니까...” “석호씨! 그래도 볼 수 있으니 나보다 형편이 좋군요. 당신의 얼굴을 한번만 보았으면....” 그녀는 내 지팽이를 만져보았다. 결국 우리의 결혼은 단숨에 이루어진 셈이었다. 결혼이란 아주 힘들고 고된 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쉽사리 성사되다니, 나의 형님과 처형도 기쁜 듯이 서로 축하 하였다. “처형(실비아의 언니)님? 마음이 놓이는군요. 우리가 할 일은 옆에서 도와주는 것뿐이군요. 만족합니다. 마음이 놓이는 군요.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시는군요.” 내 형이 처형에게 고백했다. “그렇습니다. 강 선생님!” 처형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정확히 3개월 후 우리는 롱비치 항구 등대 곁에 있는 작은 교회에서 가족과 친한 친구들과 목사님을 모시고 결혼을 했다. 목사님은 나와 실비아의 손을 잡고 기도를 드렸다. -맹인 10명이 예수를 만나 기도를 받고 눈이 떠졌다. 너무나 기쁜 나머지 9명의 맹인은 집으로 달려갔으나 오직 한명의 맹인은 예수에게 돌아와 감사하다고 했다.- 나의 형님과 처형은 결혼 전에 우리를 위해 롱비치 항구 근처에 특별히 작은 아파트를 마련해 주었기에 나는 이미 이곳에서 3주전부터 입주해 살며 아파트의 내부와 구조물을 익히고 있었다. 부엌은 어디에 있으며 수도와 싱크대는 어떻게 놓였는지, 그리고 화장실은 어떤 구조이며 물은 얼마나 고이는지...화장지는 어디에 꽂혀 있는지, 등등을 미리 익혀 두었다. * 결혼 후 아파트에 입주한 실비아는 유치원 학생이 선생에게 질문하듯이 나에게 무엇이든지 모르는 것은 언제고 스스럼없이 물었다. “여보!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아무것도 본 것이 없어, 궁금한 것이 많아요. 당신은 정상사람이니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다 알려주세요.” “아- 그럴게, 실비아.” 나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을 했으나 자신이 없었다. -한국인은 어떻게 생겼는지? 아이리쉬와 어떻게 다른지?, 당신은 어떻게 생겼는지? 한국이란 나라는 어떤 나라인지? 백인과 흑인은 어떻게 다른지? 당신이 보는 나는 어떻게 생겼는지? 언제 미국에 왔는지? 당신이 다녔던 UCLA는 어떤 학교인지? 예수님은 어떻게 생겼는지?- 그녀의 질문은 모습, 형태에 관한 것과 색깔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대답했다. 내 키는 5피트 7인치, 한국인은 백인과 다른 황색의 피부를 가졌으며 실비아 당신은 흰 피부를 갖고 있기에 백인이라고 불린다. 예수님은 사진에 보면 백인처럼 생겼으며 머리칼이 길며 하나님은 우리 눈에 뵈지 않는 절대 영이다. 나는 미국에 온 것이 내 나이 14살 때였으며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UCLA에 입학했다. 그리고 그 대학은 서부의 명문대학이다-라고. * 아내는 새 아파트에 살면서 적응하기가 힘들어 툭하면 부딪치고 넘어졌다. 어디에 문고리가 있으며 전기 스위치가 있는지를 확인해 주어야했다. 더 중요한 것은 화장실의 위치와 물을 쓰는 방법, 그리고 전기스토브와 그 사용하는 방법을 익혀 주었으나 가끔 불상사를 내었다. 상처가 나 응급실에 실려 간 일도 있었다. 그러기에 나의 형과 처형이 번갈아 찾아와 우리를 도와주었으며 어느 날은 아파트에서 자고 가기도 했다. 맹인들의 필수인 점자 해독과 소리기구에도 익숙해지니 넘어지는 일도 뜸해 졌다. 밖에 나가거나 병원에 가는 일은 롱비치 시에서 특별히 제작된 장애인차를 보내줘 훨씬 쉬워졌다. 3. 뉴욕, 동쪽에 길게 뻗은 섬, 롱 아이랜드를 달려가면 햄톤(Hampton)시가 나온다. 여기에 실비아의 부모가 와서 정착한 것이 1930년대였다. 농사도 졌으며 어선을 이용해 고기를 잡기도 해 풍족한 삶을 이룬 아이리쉬 이민자들이었다. 멀리 바닷바람이 불고 비가 오면 두고 온 아이리쉬 섬을 생각하던 이들은 캐톨릭이 아닌 신교들이었다. 실비아가 태어나자 온 집안이 기뻐했다. 오랜만에 가진 예쁜 공주였기 때문이었다. 최상의 우유와 아이 옷으로 아이를 길렀다. 그런데, 웬일일까, 소리를 듣는 것 같은데 빛을 보지 못하는 듯해 롱 아이랜드 쥬이시 병원으로 가 특별 검사를 받은바, 청천벽력이랄까, 아이가 보지 못하는 선천성 불구자이며 신장의 발달이 덜된 미숙아였음을 알게 됐다. 뉴욕으로 나가 콜럼비아, 뉴욕 대학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았는데 결과는 똑 같았다. 다행히 지능지수는 정상 아이와 같아 ‘헬렌켈러’를 본받아 가정에서 교육을 시켰다. 실비아가 17세 되던 해, 1970년 초, 롱.아이랜드에서 햄톤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던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죽자 실비아의 언니는 동생을 위해 헬렌케러의 선생이었던 설리반처럼 동생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맹세를 했다. 어머니의 지병인 관절염이 점점 더 심해지자, 맥.나이트 가정은 재산을 정리하여 따스한 남가주의 신흥도시인 라구나로 이주했다. 실비아의 어머니는 그 후 양로병원과 집을 오가며 큰 딸과 같이 살았다. 큰 딸은 마침내 유태인 남성을 만나 결혼해 어머니를 모시고 동생을 보살피며 살아오다 동생, 실비아가 30세 되던 해 정말 우연히 나의 형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었는지 나와 혼담이 있어 우리는 결혼을 하게 된 것이 그녀의 간단한 과거사이다. * 내가 결혼할 때, 나는 형님과 처형에게 굳게 약속한 것이 있었다. 최소한 서로 믿는 사이가 될 때 까지 나의 입을 꼭 닫고 비밀을 지키라는 '신의의 약속‘ 아니“남자의 약속’이었다. 그런데 나는 이 약속을 지키는 것이 이처럼 힘들 줄을 상상도 못했다. 서로 신뢰하는 단계가 되지도 않았는데 나는 스스로 이 약속을 깨뜨리고 말았다. - “여보, 당신은 빛을 볼 수 있어 좋겠다. 그뿐인가 색깔을 구분 할 줄 아니 더 좋겠지?” “........” 나는 실비아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어 말을 아꼈다. 그런데 나는 정말 어처구니없이 ‘사나이의 약속’ 아니 결혼의 전제 조건인 ‘약속’을 깨는 불상사가 생겼다. -아내가 모처럼 옷을 벋고 샤워를 하게 돼 남편인 나는 의례 도와주어야 했다. 샤워 물의 온도를 적당히 맞춰 주며 “실비아! 온도가 맞으니 어서 샤워를 하지!”라고 말했을 때 그녀는 뜻밖의 말을 했다. “여보! 나를 그렇게 뚫어지게 바라보면 나 어떻게! 부끄러워!” “뭐라고? 실비아? 부끄럽다고?” “당신? 나를 그렇게 보면 어떻게 해?” 그녀는 몹시 당황해 하였다. “아- 실비아! 걱정 마! 나, 당신을 못 봐요. ” “못 보다니?” “여보, 나도 시각장애자로 살고 있어,” “뭐라고? 시각 장애자? 나처럼?” “그래요. 나도 시각을 잃은 지 7년이나 됐어요. 처형이 말해주지 않던가?” “말하지 않았는데....” “아- 맙소사.” 나는 뜻밖의 일로 내가 시각장애자임을 아내에게 밝히고 말았다. 처형과 형님과의 약속이 바로 ‘때가 될 때까지 내가 시각장애자임을 말하지 말라는 그 비밀의 약속’이었다. 지금 까지 아내는 내가 시각장애자인 것을 모르고 있었는데...... 시각장애자가 시각장애자를 속이고 결혼을 했으니 그 여파가 클 것이 뻔했다. 4. 부부간의 신의가 생길 때까지, 시각장애자임을 밝히지 말고 아내를 도와주라고 했는데 바보처럼 얼떨결에 비밀을 털어 놓았으니 아내의 분노는 대단했다. -배신을 당했다, 아니 사기를 당했다. 시각장애자에 지체 장애자인 주제에 나를 도와준다고 거짓말을 해서 돈이나 받으려고 하다니....당장 처형에게 연락해 집을 나가겠다. 아니 이혼을 하겠다고 했다. 심지어는 사람 갖지도 않은 동양 사람에게 모욕을 당했다. 아내에게 이토록 불같은 성질이 있을 줄이야, 아니, 미국 사회에 깔려 있는 인종적인 선임관이 선천적으로 눈멀어 모양과 색깔도 구분 못하는 아내에게도 있다니, 나는 황당했다. 마침내 처형에게 전화를 걸어 이혼하겠다고 말을 하며 당장 와서 데리고 가라고 소리를 쳤다. 얼마 후 처형이 오자 보따리를 싸가지고 아파트에서 나가 버렸다. “나쁜 사람! 감히 나를 속이다니...” 아내는 씩씩 거리며 소리쳤다. “한국 놈 주제에, 나를 속여! 돈이나 뜯으려고 거짓말을 해!” 아내의 목소리가 내 귀에서 뱅뱅 돌았다. 눈먼 주제에 한국사람 운운하다니... 게다가 돈을 받으려고 하다니... 온갖, 소리치며 나가는 아내가 문득 가엾게 느껴졌다. 눈이 안 뵈니 마음도 독해지는 구나. 저 혼자 서지도 못하면서, 공주병에 걸린 주제에,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이 삼 일후 처형으로부터 무슨 말을 들었는지 아내와 처형은 보따리를 도로 들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아파트로 돌아와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용서? 당신은 내가 필요한 시각장애자요. 내가 필요한...” 나는 나 지신이 놀라웠다. 내가 어쩌자고 이런 말을 하고 있다니...... “여보? 당신도 시각장애자라고 하는데 나보다 더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을 보면 완전 맹인이 아니고 단순히 시력이 약한 것이겠지. 그러기에 안경을 썻겠지?” 아내는 내가 맹인이 아닐 거라고 말했다. “실비아? 나도 완전 맹인이요. 아무런 빛도 보지 못하는....당신처럼.” 실비아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와락 내 가슴에 안기었다. “여보! 미안해. 내 속이 이리도 좁은 줄 이제야 알았어. 지금까지 공주처럼 대접만 받고 살았으니, 남을 생각해 보지도 않고. 용서해요. 여보!” 나는 깜짝 놀랐으며 그녀의 고백에 눈물이 찡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서로 신뢰하는 단계에 도달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문득 처형이 내게 한 말이 생각났다. “석호, 여보게? 강 서방, 자네는 그래도 빛을 보았잖아? 물건도 보고 색깔도 보며 살았던 과거의 그 경험이 있으니 날 때부터 빛을 전혀 보지 못한 실비아의 선생이 되네. 자네는 과거의 경험을 줄 수 있으니 내 동생 실비아를 잘 보살펴 주게. 부탁이요.” 그렇다. 나는 아내 실비아가 보지 못했던 그 빛(光)과 색깔(色), 그리고 형태와 모양을 과거에 경험했으니 그녀를 도와 줄 능력이 있는 거다. * “실비아? 나, 당신을 속이려고 한 거 아냐. 서로 믿는 신뢰가 생길 때, 당신에게 나도 당신처럼 완전 실명한 시각장애자라고 밝히고 싶었어요, 아니 형님과 처형이 나에게 신신 당부를 해 주었어요, 그런데 그만 내가......” “아냐, 고마워요. 그렇게 나를 배려해 주었다니....고맙군요. 우리는 서로 의지하고 살아야 할 불구자인데...더욱이 나를 위해 당신은 모든 것을 내 놓았는데....” 그리고 그녀는 나에 대한 궁금증이 화산처럼 폭발한다고 하며 알려달라고 했다. -“실비아? 당신은 나의 모든 것을 알아야 해.” 나는 마침내 나의 과거를 고백하게 됐다. 1960년, 4.19 혁명으로 가난한 나라에 민주화의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나도 그 바람에 편승해 태어났다. 아버지는 육사(陸士)를 나왔기에 다음해에 일어난 5.16 군사혁명과 더불어 영욕의 세월을 보냈다. 월남전에도 참전하였으며 정치에도 관여하였다. 군인들의 세계에는 상상 못할 일들이 많았다. 아버지는 불행하게도 1974년, 정치판에서 물러나 미국으로 이민을 와 칼리포니아 롱비치에서 먹고 살기위해 햄버거 가계를 열었으며 그 후 세탁소를 경영하며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였다. 나는 롱비치 중.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이민자였으나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UCLA에 입학하였다. “아! 내가 미국에 와 UCLA에 입학했다니....성공했다. 아니 성공하고 있다!” 나는 롱비치 바다를 향해 소리를 쳤다. 가슴이 으쓱했다. 동양계, 백인 친구 그리고 사랑하는 여자 친구도 생겼다. 모든 것이 희망적이요 행복한 미래가 내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그런데.... 아름다운 캠퍼스를 오가는 중, 머리가 심히 아파 잠시 벤치에 쉬었다가 기숙사로 가 쉬는 날이 몇 차례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어느 날은 심한 구토가 나며 머리가 빠개지는 것같이 아프더니 눈앞에서 불빛이 번쩍번쩍 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떠 보니 UCLA 병원 응급실에 누어있었으며 정밀 검사를 받기위해 신경외과에 입원됐었다. 정밀 검사를 통해 발견된 것은 뇌하수체 암(Pituitary Tumor)이었으며 오로지 수술만으로 치료가 된다고 했다. 수술이 성공하면 생명을 보존하나 시신경의 손상으로 완전 실명이 된다고 했다. 아니면 죽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완전 실명? 맹인?“ 나는 앞이 캄캄함을 느꼈다. 죽는 편이 나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아버지? 차라리 죽으렵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아버지는 호통을 치며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사귀고 있던 여자 친구는 대답이 없었다. 그녀에게는 죽는 거나 맹인이 되는 거나 마찬가지로 받아 드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후부터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맹인이 되는 것보다 한 여성으로부터 받은 배신이 더 마음을 아프게 했다. 뇌하수체 절제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 나는 생명을 건졌으나 앞을 전혀 못 보는 맹인이 되었다. 차라리 나면서부터 보지 못했다면 그러려니 하고 살터인데 빛을 보고 살던 내가 아무 것도 볼 수 없으니 답답하고 두려웠다. 각막 이식이나 심지어 안구를 기증받아 수술을 한다고 해도 시력 회복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툭하면 부딫치고 넘어지고 찔리고 보니 이렇게 살수가 없다고 생각돼 자살을 하려고 칼을 들었으나 용기가 없어 나를 찌를 수가 없었다. “비겁한 놈...”나는 나 스스로를 학대하였다. “희망도 없는 놈....” 그래도 나를 도와준 것은 생각지도 못했던 롱비치 교회 전도사와 그의 가족이었다. 걷기를 도와주었으며 점자(點字) 학습(學習) 그리고 재활 의학을 통해 나는 스스로 걷고 차를 타게 되었다. 더 다행한 것은 삶에 대한 용기와 의미를 준 그들 전도사 가족을 나는 나의 멘토로 생각하며 살고 있다.- “아! 석호? 당신, 너무나 힘들었군! 역경을 이겼군요. 훌륭합니다.” 아내 실비아는 나의 과거를 듣고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당신도 도움이 필요한데 어찌 맹인임을 숨기고 도와주다니.. 나는 그것도 모르고 당신이 나를 기만했다고 생각했으니, 내가 부끄럽군요.“ “아-처형과 형님에게 약속을 했지요. 맹인이란 말을 하지 않고 당신을 도와주라고.. 그런데 그게 그렇게 쉽지 않았습니다. 역시 불구자는 불구자일 뿐.....나도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아니 우리 같이 도웁시다. 그것만이 우리의 살길이요..” “석호! ----” 생각해 보면 나는 그래도 실비아보다 훨씬 좋은 상황이었다. -나는 지난 17년 간, 빛을 보고 내 눈으로 물체를 보아 내 기억에 담고 있으니까... 티비, 라디오도 보고 들었으며 자동차에도 직접 타고 운전도 했었다. 하늘과 땅을 보아 알며 바다와 산천을 구분할 줄도 안다. 음식의 모양과 색깔도 알며 입고 있는 옷의 모양과 색깔도 알고 있으니 나는 정상 사람이나 마찬가지인데, 단지 캄캄한 밤에 불이 들어오지 않은 방에 혼자 있는 것과 같을 뿐이다. 실비아는 아예 처음부터 이런 것을 모르고 살았기에 불행하다는 말이다. 단지 처음에는 보던 것을 못 보게 되니 익숙해 질 때까지 불편할 뿐이었다.- “여보! 당신이 나의 눈이 됐어요. 나의 눈이.” “당신의 눈이 되려고 했을 뿐.....” * -내가 맹인이 되면서 크게 깨달은 것은 육체의 눈과 더불어 마음의 눈도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에서 그리고 미국에 와서 나는 눈 꼴 사나운 싸움을 많이 보았다. 모함과 모략으로 다투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맹인이 된 후부터는 눈 꼴 사나운 일을 보지 못했으며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캄캄한 세상에서 밝은 세상을 볼 수가 있었다. 실비아가 죽기 전, 나와 실비아는 서로 마주보고 상대의 눈을 만지면서 한 말이 있었다. “당신의 눈동자에 비친 나의 얼굴은 어떤 모습일까? 온화한 얼굴? 따스한 얼굴? ” “우리의 얼굴? 사랑의 얼굴이었어.... 형체를 모르는 둥근 사랑의 얼굴.” * 돌이켜 보면 나는 아내의 얼굴이 보고 싶어 그녀를 바라다보며 매일같이 그림을 그려봤다. -백인여자에 나보다 5살 더 많은 아이리쉬라. 얼굴이 다소 길며 이마가 좁으면서 머릿칼이 길게 늘어져 있다. 오른 쪽 얼굴에 보조개가 살짝 만저지고 눈섶이 꽤나 두꺼우며 눈은 쌍거풀이다. 입이 다소 적으며 코와 입사이 인중이 다소 깊게 느껴진다. 아! 감이 온다. 얼굴의 모습이.... “아! 여보! 당신의 얼굴, 여기에 있어. 그렸어. 마침내 그렸어.”- 그러나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어느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그리고 있었다. 눈과 귀, 코 그리고 입, 그리고 마지막 볼에 있는 점까지 다 그렸는데 한 가지 못 그린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노래와 분명, 달랐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그릴 수 가 없었으나 그녀의 마음을 확실하게 그릴 수 가 있었다. 27년 동안 마음의 눈으로 서로의 얼굴을 보고 살았다. * 오늘, 롱비치 앞 바다에 한줌의 재가 된 아내를 뿌려 멀리 보내고 집으로 돌아 왔는데 아내는 내 곁에서 아직도 나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내 눈동자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분명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여보, 실비아 당신의 파란 눈동자에 내 얼굴이 보이네.” 2012년 미주 문협 계간 겨울호에 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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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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