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사자 사냥

2012.12.09 13:30

연규호 조회 수:784 추천:47

12.단편 소설: 사자(獅子) 사냥. 1. 도대체 무슨 뱃장이었을까? 16일 동안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사무실을 비어 놓고 ‘아프리카 탄자니아 배낭여행’을 하고 기진맥진한 상태로 저녁도 굶은 채 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예상대로 나를 기다리는 사람은 없고 ‘미합중국 국세청(IRS)’으로부터 날라 온 ‘세무 조사’ 통보가 등기 우편으로 배달돼 있었는데 마치 쩍 벌린 악어 입 같아보였다. 공인 회계사 개업을 한지 어느 듯 30년, 그동안 공식적으로 받은 세무조사가 5번 있었다. 매번 조사를 받을 때마다 잘못이 들통이나 교도소에 가지나 않을 까 걱정을 하곤 했었는데 그래도 별 탈 없이 용케 잘 넘어갔었다. 그런데, 웬일일까? 이번에는 마음 한 구석에 음흉한 하이에나(늑대)가 먹이를 찾듯이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고 있는 듯해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긴 여행으로 끈적끈적해 진 몸부터 씻기 위해 만사를 다 재끼고 샤워장 문부터 열었다. 샤워 꼭지에서 시원하게 쏟아져 나오는 물줄기가 이토록 고마운 것을 새삼 느끼게 된 것은, 물이 없어 샤워를 못해 고통스러웠던 낙후된 아프리카 탄자니아 때문이었다. 로스앤젤스-시드니-요하네스버그-달 에스 살람-모쉬-킬리만자로-빅토리아 호수로 갔다 돌아오는 길은 멀고 지루했다. 그리고 아주 위험했다. 태양이 이글이글 타는 적도 아래에 역설적으로, “5895미터 정상의 킬리만자로에는 하얀 눈이 덮혀 있어” 보기에 좋았지만 내게는 아프리카의 사파리 관광이 더 흥미롭고 인상적이었다. 떼를 지어 풀을 뜯는 사슴, 얼룩말 그리고 그들을 노리는 사자와 하이에나의 음흉한 모습이 킬리만자로 산 정상의 만년설(萬年雪)을 녹이는 듯했으며 붉은 피가 역동적이었다. * 등기 우편으로 보내온 국세청 편지를 뜯어보니 예상대로 기분 나쁜 내용이었다. “공인회계사, 강석호와 동서(東西)수퍼마케트(EW Supermarket Co.) 사장, 마리오 마징기(Mario Mazingi)는 지난 2007년 이후의 모든 영업상의 손. 이익에 관한 서류와 각각의 상세한 내역, 세금 보고서 및 종업원 관리에 관한 제반 서류, 영수증을 준비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덧붙인 글귀가 위협적이었다. “세무조사 결과, 과실이 인정되면 징역 5년 이하에 처할 수 있음” 내 나이 28살 되던 해부터 공인회계사 사무실을 열고 처갓집 식구들의 사업인 ‘세탁소’, ‘동서(EW)잡화점’ 그리고 ‘동서(EW) 수퍼마켙’의 금전 회계관리를 책임지고 맡아왔음은 특별한 인연 때문이었다. 마징기-미쉘-강석호-동서 잡화점-동서 수퍼 마케트-마징기-미쉘-강석호.... 마치 꼬리를 물고 돌아가는 강강수월래가 펼쳐지고 있는 듯하다. 내가 국세청으로부터 호된 세무조사를 처음 받은 것이 1979년 여름이었다. 내 나이 29살로 처가에서 운영하는 세탁소와 연이어 개업한 동서 잡화상이 제출한 세무보고 때문이었다. 워낙 주먹구구식에 무대포로 경영하며 고의로 엄청난 액수의 돈을 탈세한 증거가 발견됐기 때문에 진땀을 흘리다 못해 정신을 잃을 번했었다. 미국 세법을 교묘하게 이용한 장인 마징기 씨는 사위인 나에게 세금 한 푼 안내고 탈세를 해결하라고 강요하였다. “자네? 자네 공인회계사이니 서류를 잘 만들어 세금 한 푼 안내게 하란 말야! 알겠나?” “예? 공인회계사이니까?” 나는 사장이 하는 말이 참으로 황당했다. 공인회계사가 되면 세금을 안내게 해 주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의 잘 못 된 의식구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해 동서 잡화점은 6만 딸라의 벌금을 추징 받았다. “아니? 이것 봐! 자네, 6만 딸라면 집하나 살 돈이야! 그러고도 공인회계사, 맞아?” 마징기 씨는 내게 손이라도 볼 듯이 큰 소리로 분풀이를 했다. “사장님? 6만 딸라로 해결 된 것도 다행입니다. 아니면 교도소에 갔을 뻔 했습니다.” “뭐라고? 누가 교도소에 간단 말야?” “그거야, 사장님이죠.” “뭐시? 내가?” “예. 사장님이.... “병신 같은 놈, 그것 하나 해결 못하고 무슨 공인회계사야? 빌어먹을......” 그는 허공에 대고 병신 같다고 말했다. 욱하는 울분이 솟았으나 나는 꾹 참았던 일이 있었다. ‘세금 다 내고 돈 벌 수 있나? 공인회계사가 할 일이 그거, 세금을 줄이는 것 아닌가?’ 사장이 내게 정색을 하고 말하던 그 모습이 마치 사슴을 노려보던 배고픈 사자의 모습으로 보였었다. 2. 내가 사무실 문을 닫고 탄자니아로 여행간 것은 아내에 대한 분노로 생긴 우발 적인 행동이었다. -내 나이 60, 환갑, 어느새 인생의 황혼 길에 섰다니, 나는 어디고 훌쩍 가고 싶었다. 아니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매사에 까장까장한 나보다 4살 연상의 아내에게 60 생일을 맞아 한국의 남해안이나 멀리 아프리카에 잠시 다녀오자고 제안을 했다. “한국? 아프리카? 아니 그곳에 가서 뭘 볼 것이 있단 말요? 더구나 미개한 나라에 가서 고생만 하지.“ 아내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게 아니고, 죽기 전에 내 고향에 한번 가보고 싶단 말요. 내가 낳고 자란 곳에.” “그렇다면 혼자 갔다 오소. 나는 아버지 모시고 가족끼리 지중해, 이태리 여행이나 하고 오겠소.” “이태리?” “그래, 아버지도 죽기 전에 고향에 가보고 싶다고 했어. 시실리 섬에 말요.” “맙소사! 시실리 섬?” 나는 아내의 고집을 알기에 미리 단념했다. 결국 아내는 90세 노인을 모시고 이태리와 지중해 그리고 시실리 섬을 한 바퀴 빙 돌고 오겠다고 했다. “90세 노인을 데리고, 지중해로? 게다가 시실리 섬까지.” 나는 어이없다는 투로 대답을 했는데, 아내의 자존심을 건드렸는지 아내의 얼굴이 즉시 궂어 졌다. “싫으면 그만두지! 어기 짱을 놓는구먼! 그러니까, 당신은 당신대로 한국에 그리고 나는 아버지 모시고, 우리끼리 이태리에 다녀오리다.” 아내는 즉각 반응을 했다. 이 일로 인해, 사장과 처갓집 식구들에게 나는 미움을 받았다. 더 괘씸한 것은 나를 제쳐두고 처가 식구들만 다녀온다고 하며 지중해 관광으로 훌쩍 떠나고 보니 나는 낙동강 오리알처럼 홀로 남게 되었다. “제길 할! 토사구팽이라더니.” 결국 나도 홧김에 여행사에 문의해 탄자니아북쪽에 있는 킬리만자로 산을 보기위해 배낭 관광을 하게 되었다. 처가 식구들이 비행기를 타고 로마로 가고 난 다음날 오후 나는 호노룰루를 거쳐 요하네스버그로 가는 비행기를 탓다. 비행기 여행은 생각보다 지루했다. 호노눌루에서 2시간, 요하네스버그에서 무려 6시간을 기다려 탄자니아의 수도 ‘다르 에스 살렘’으로 갔다. 아프리카에 초행길이니 조심조심해야했다. 말이 호텔이지 여기 미국의 싸구려 모텔과 같은 곳에서 샤워도 제대로 못하고 하룻밤을 지새웠다. 아프리카, 탄자니아와 킬리만자로 산 그리고 그 정상에 있는 만년설이 보고 싶었던 것은 헤밍웨이의 소설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프리카 내륙에 있는 빅토리아, 말라위 호수 등 주변에 펼쳐진 열대림과 그곳에서 살고 있는 사슴, 얼룩말, 늑대, 하이에나, 치타 그리고 사자들의 생태계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탄자니아의 수도 다르 에스 살렘에서 관광버스를 타고 해안과 평야를 끼고 달려 몸바사(Mombasa)에 도착해 점심식사를 하면서 본 탄자니아 사람들은 생각보다 재빨랐다. 점심으로 나온 바나나와 구운 옥수수가 맛있었다. 스칸디나비아 버스는 다시 달려 모시(Moshi)에 도착하니 저녁 6시가 되었다. 다음날 아침 킬리만자로 국립공원으로 들어가 산정 상으로 오르는 중턱에서 점심을 먹기로 예정이 돼 있었다. 멀리 뵈는 산 정상의 만년설(萬年雪)이 나를 부르는 것 같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번 기회에 나는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내려오는 관광 루트보다 이곳 탄자니아가 더 좋은 길임을 알게 됐다. 킬리만자로 남쪽 모시에서 출발한 관광버스는 산 중턱까지 올라가 그곳에 관광객들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2시간의 여유를 받아 조금 더 올라가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산을 올라 갈수록 식물대가 바뀌었다. 그러나 정작 정상의 만년설은 평지에서 찍은 사진이 더 인상적이었다. 산 중턱에서 먹은 바나나, 옥수수 점심은 정말 꿀맛이었으며 내 생애에 가장 인상 깊은 식사였다. 킬리만자로를 뒤로하고 아루사(Arusha)로 가는 길에 나는 멀리 뵈는 킬리만자로의 정상을 다시 한 번 바라보며 사진에 담았다. 아루사에 하루 밤을 지내고 다음 날, 서북쪽으로 달려가는 길은 빅토리아 호수였다. 가는 길에 나는 몇 차례에 걸쳐 사자에게 쫒기는 사슴 떼와 얼룩말 떼를 볼 수가 있었다. 사슴 떼를 노려보던 사자에게 절룩이는 사슴과 얼룩말은 동물왕국의 왕 사자들의 밥이 돼 사라져 버렸다. 3. 탄자니아에서 돌아 온 나는 킬리만자로의 만년설 보다 사자에게 잡혀 먹히던 사슴과 얼룩말이 생각났다. 아니나 다를까 사자가 사슴을 잡아먹는 꿈을 꾸었다. 잔인한 꿈이었기에 내 얼굴에서는 식은땀이 주르르 흘렀다. -아루사에서 서북쪽으로 가는 길에 넓게 펴진 초원이 보였다. 문득 사슴 떼가 풀을 뜯고 있었다. 평화로웠다. 시냇물에는 물이 졸졸 흐르며 길게 자란 초원의 풀들이 싱그러웠다. 큰 사슴, 작은 사슴, 뿔이 큰 녀석 그리고 뿔이 작은 사슴들이 주위를 흘끗흘끗 바라보며 풀을 뜯고 있었다. 문득 스콜이 오는지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사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사슴 떼를 향해 어흥! 소리를 치며 달려들자 사슴들은 있는 힘을 다해 앞으로 달려갔다. 승부는 곧 나고 말았다. 실족한 사슴한 마리가 다리를 절룩이며 뒤로 처지자 사자들은 처진 사슴을 향해 달려들어 순식간에 뒷다리와 목을 물어 버리니 사슴은 그 자리에 풀썩 쓸어져 피를 흘리며 죽었다. 동물의 왕, 사자들은 사슴을 예리한 잇빨로 물어 씹어 먹기 시작했다. “아!” 나는 소스라쳐 눈을 떳다. 다행이 꿈이었다마는 죽어간 그 사슴, 절룩이던 그 사슴이 생각나고 또 생각났다. 순간 나는 그 사슴이 나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슴 떼와 같이 있으면 사자의 밥이 되지 않으나 다리를 다쳐 절룩이면 사자의 밥이 된다...사자의 밥..... 처진 놈은 죽는다. 사자에게.....’ ‘인간의 세계도 그렇다. 힘이 없는 자는 생존 경재에서 밀려 죽는다. 죽는다!’라고 죽어 가는 사슴이 내게 외치는 것 같아 안타깝다. 4. 동서 수퍼마켙과 강석호의 만남도 사자와 사슴 떼의 만남과 비슷했다. 1950년대 말, 이태리, 시실리 섬에서 포도 농사를 하다 모든 재산 훌훌 털어버리고 이민 온 마리오 마징기씨의 가족은 로스앤젤스에서 남의 집과 건물 청소하는 청소부로 시작했다. 부부, 그리고 여섯 명의 자식들, 모두가 합심해서 일을 하다 보니 돈이 모아졌다. 그리고 다시 시작한 일이 세탁소였다. 역시 열심히 그리고 밤늦게까지 정성들여 노동을 했다. 돈이 더 모여졌다. 큰 집을 삿으며 그 증 방 두 개는 하숙을 쳤다. 인근, UCLA에 다니는 젊은이 네 명이 이집에서 하숙을 했다. 그중 하나가 회계학 공부를 하던 강석호였다. 강석호-나도 또한 가난한 이민자였다. 1950년 6.25가 나던 해 한국에서 태어났는데 내 나이 10살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거지처럼 살았다. 뜻밖에도 오산 근처, 미군부대에서 하우스 보이가 돼 미군의 도움을 받았다. 미군 군목이 내 나이 14살 되던 1964년 나와 어머니를 미국으로 이민 보내 주었다. 여기저기에서 도움을 받고 어머니의 노력으로 중학, 고등학교를 겨우 마치고 UCLA에 입학한 것이 내 나이 20살 되던 해였다. 어머니는 15살 더 나이 먹은 한국사람 홀아비와 결혼해 한인 타운에서 살았기에 나는 UCLA 근처에서 하숙을 하며 학교를 다녔다. 사람의 운명은 너무도 어이없이 꼬이고 있었다. 마징기의 예쁜 딸 중 하나인 미셀 마징기는 나보다 4살이 더 많았는데 아주 예뻣다. 그녀는 3년 전, 영국계 백인 윌리암스와 결혼해 딸을 하나 두었는데 작년에 남편이 고속도로에서 모토사이클을 타고 가다 자동차에 받쳐 현장에서 즉사하였다. 결국 미망인으로 혼자 아버지와 같이 살고 있었다. 내가 하숙생이 돼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나는 뿅 가고 말았다. 너무나 예뻣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교통사고로 죽은 슬픈 내용을 듣고 나는 동정심을 갖고 그녀를 누나처럼 생각했다. 그녀는 가끔 슬피 울기도 했으며 홀로 먼 하늘을 바라다보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내 마음도 옥조였다. 내 나이 22살, 그녀는 26살이었다. -남편이 죽은 지 2년 되던 그 기일(忌日) 날, 차편이 없다고 마음 아파하는 그녀를 내차에 태워 로즈 힐, 공원묘지에 갔었다. 넓은 공원묘지 언덕에 그의 묘지가 쓸쓸해 보였다. 장미꽃 몇 송이를 꽂아 놓으니 조금은 좋아보였다.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인생의 끝이 캄캄하다고 하며 그녀는 흐느꼈다. 그녀는 일어서다가 휘청 쓰러지려고 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녀를 끌어안았기에 그녀는 넘어짐을 모면했으나 나와 그녀사이에는 묘한 감정이 발동되기 시작했다. 사별녀(死別女)와 총각의 관계는 동정심에서 사랑으로 조금씩 조금씩 자라고 있었다. 사별녀의 딸이 때로는 나의 딸이었으면 하는 마음도 생겼다. 그리고 사람이 없는 날은 사별녀, 미쉘은 내 방으로 들어와 나에게 커피와 더불어 그녀의 입술도 선물했다. * 세탁소가 성공적으로 번창해 더 많은 돈이 모였다. 마징기씨는 세탁소를 팔고 이태리 사람들과 동양사람들을 위한 식료품 잡화상을 개업했는데 뜻밖에도 성공적이었다. 문제는 돈벌이에 눈이 먼 이태리 사람 마징기씨였다. 돈벌이에 급급하다보니 미국의 세법(稅法)을 교묘히 그리고 우직하게 위반하였다. 매상을 줄이고 이중장부를 사용했다. 식료품 잡화점의 상호를 동서(East & West) 식품이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마징기씨는 꽤 많은 돈을 벌어 부동산을 구입하였기에 백만장자가 되었다. * 1976년 내 나이 26살, 나는 가까스로 UCLA를 졸업, 그리고 공인회계사 시험에 한 번에 합격했다. 하우스보이 출신인 내가 어엿한 미국 공인 회계사가 됐으니 세상이 밝아 보였으며 모든 것이 자신 만만했다. 뿐만 아니라 나와 미쉘의 관계는 어엿한 애인관로 발전 했으니 마징기씨는 대 놓고 선언했다. “강석호! 자네는 내 사위야! 그리고 이젠 공인회계사가 됐으니 내 자산을 다 관리하는 것은 물론 내 딸, 미쉘도 같이 괸리하게....알겠나? 허허...그리고 내 재산, 네가 알아서 다 하란 말야! 다 너희들것이야!” 26살 가난뱅이 하우스보이 출신인 나는 솔깃했으며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나와 미쉘은 비벌리 힐톤 호텔에서 결혼하기로 서로 약속하고 긴 밤을 지냈다. 그리고 3개월 후 우리는 결혼을 했다. 나에게는 초혼이요, 미쉘에게는 애가 딸린 재혼이었다. 애가 딸리고 4살 더 많은 이태리 계 미국여자와의 결혼은 그렇다 치더라도 장인이 자수성가한 식품점 사장이기에 한국에서 가난뱅이로 온 나와의 결혼은 그런대로 공평하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그러나, 어찌 보면, 나는 나보다 인생을 더 잘 아는 미쉘의 꼬임에 말려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나에게 너무나도 친절했으며 매력적이었는데 알고 보니 그녀와 마징기 가족의 계략이었다. 하숙이라는 덧을 놓고 젊고 돈 없는 나를 생포한 사자들이었다. 결혼 후 나는 공인회계사 사무실을 개업했으나 마징기씨 집에 같이 살며 마징기씨를 사장이라고 부르며 그의 재산과 영업에 관한 일체를 관장하였다. 그러나 수입액수와 회계장부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석호? 너는 내 아들 딸 보다 더 나에게는 중요하단 말야! 알겠나?” 나는 결국 마징기씨의 한 가족으로 살았다. 5. 1979년 처음으로 당한 세무조사는 주먹구구식으로 나도 모르게 탈세한 것이 들통이 나고 말았다. 사실, 국세청 직원과 공인회계사는 같은 직종이기에 서로 우호적이며 협조하는 사이인데 워낙, 마징기씨가 탈세를 했기에 6만 불의 벌금으로 끝난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 1983년, 두 번째 받은 세무조사도 아주 비슷했다. 세탁소가 성황리에 잘되자 마징기씨는 비싼 값에 팔았다. 그리고 그는 사위되는 나를 십분 이용하였다. 그것은 이태리 사람들과 동양 사람들의 식성이 다르고 비슷함을 알고 “이태리-동양”을 접목한 식료품 가계를 한인타운에 버젓이 한국 사람인양 열었다. 영어가 서툴고 어수룩해 뵈는 한국사람과 동양사람들을 상대로 역시 탈세를 하였다. 이번에도 나의 능력이 발휘돼 얼마 안 되는 벌금으로 세무조사를 끝낼 수가 있었다. 그러나 강력한 단서가 있었다. “강석호 공인회계사? 매상 관리를 철저히 하지 않으면 벌금이나 징역을 받을 수 있소. 한 두 번 더 반복된다면 마징기씨는 물론 강석호 공인회계사무사도 법의 심판을 받습니다.” 세무조사에서 성공적으로 통과 되자, 사장 마징기와 딸 미쉘은 나를 최상으로 얼마동안 대우해 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가지 못했다. 한국사람들의 인구증가와 맛물려 동서 잡화점은 큰 돈을 벌었으며 미리 사두었던 땅값도 올라 자산이 많이 증가됐다. 거의 10년 만인 1990년, 마징기씨는 한인타운에서 운영을 포기한 미국 수퍼마켙을 매입해 큰돈을 드려 건물을 증축해 “동서 수퍼마켙”으로 개업을 하게 되니 명실공이 한인사회에서 갑부로 손 꼽혔으며 사위인 나도 또한 그 이름에 편승해 유명인사가 됐다. 세 번째 받은 세무사찰은 1991년이었다. -작은 잡화상에서 대형 수퍼마켙으로 발전하는 과정에 많은 돈이 오고갔다. 눈치 빠른 국세청은 의심을 하게 됐다. 이번 조사에서는 건물의 매각과 매입 그리고 은행 융자에 대한 비교적 큰 금액이 조사되었다. 과실이 발견되면 엄청난 벌금과 징역을 받게 됐다. * 세무조사를 받는 중에 나는 나이가 많아졌음을 실감했다. 어느새 42세가 됐으며 마징기씨의 충직한 청지기가 돼 있었다. 내가 생각해봐도 나는 마징기씨를 위해 엄청난 거짓 회계보고를 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용케도 나는 세무 검사에서 모면을 하게 됐다. “이것 보게! 사위! 잘했어. 잘했어. 역시 내 사위야, 공인회계사!” 마징기씨는 내 손을 잡고 칭찬해 주었다. 아내도 들떠 있었다. “여보! 아버지가 당신 덕에 세무사찰을 잘 끝냈다고, 콘도를 하나 사주셨어.” “그래? 그럼 그걸 어쩌려고?” “세를 놓아 잔돈 좀 받아쓰게 됐어.” 아내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러나 이 콘도는 아내의 이름으로 소유권이 돼 있었음을 알고 씁쓸했다. “세무사찰은 내가 하고 콘도는 당신이 갖고?” 따지고 보면 매사가 이러했었다. * 마징기씨의 동서 수퍼마켙은 한인타운의 명소가 됐으며 덩달아 큰 수입이 생겨 마징기씨는 건물과 땅을 사기 시작했다. 4번째 세무조사는 2000년 여름이었다. 규모가 대단히 컸으며 돈의 액수도 만만치 않았다. 내 나이 50세....지천명(智天命)의 나이요 불혹의 나이였다. 이번 세무조사 역시 탈세에 관한 의심이었으며 그동안 누군가 밀고를 했는지 국세청에서 어느 정도 내역을 알고 덤볐기에 덜미가 잡히고 말았다. 마징기씨의 명령에 따라 매상액이 상상 밖으로 축소가 돼 있었다. 이번 조사에서도 나는 역시 경고를 받았다. “공인회계사 자격을 박탈 당 할 수도 있고, 벌금과 징역을 받을 거요.”라는. * 5번째 세무조사는 2003년에 있었다. 누가 불평을 했는지는 모르나 종업원들에게 준 월급과 상해보험에 대한 조사였다. 이번에도 생각보다 쉽게 그리고 큰 벌금 없이 통과됐다. 내 나이 53세, 아들은 법과대학에서, 딸은 음악대학원에서...그리고 결혼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몸이 점점 둔해 지며 눈도 침침해져 안과를 찾아보니 백내장이 발견돼 수술을 받았다. 그동안 남들처럼 여행도 못했으며 한국에 가 친척들을 만나지도 못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외톨이 되었다. 나를 찾아오는 친구도 없었으며 찾아 갈 친구도 없었다. 외로웠다. 그리고 소속감이 없었다. 결국 이태리 사람들 사이에서 한국인도 미국인도 아닌, 무소속의 인간으로 살았으니 친구도 없었다. “친구가 없다니? 친구가 없다?” 친구를 만드는 것도 시간과 돈의 투자가 있어야 하는데, 나는 분명 미쉘과 마징기씨의 손아귀에서 뱅뱅 돌면서 살아온 인생이었다. 누군가를 죽도록 사랑하고 싶었으나 그런 대상도 없었다. 그렇다고 누군가가 나를 죽도록 사랑해 주지도 않으니 나는 결국 밥만 먹다가 60의 나이가 된 셈이었다. 6. 59세를 잘 넘기라고 사람들은 충고해 주었다. 일단 60세가 되면 오래 살 수 있을 거라고 했다. 환갑에 잔치보다는 여행을 가는 것이 좋을 거라고 친구들이 일러주었으며 ‘알라스카’ ‘지중해’ ‘북구라파’ ‘바하마’ 유람선을 타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어려서 고생했던 고향, 한국에 가고 싶었다. 내 나이 10살 되던 해, 나는 오산 근처에 있는 미군부대에서 하우스 보이로 살았다. 이젠 미국시민이 돼 백인 아내와 같이 고향에 다녀오고 싶었다. 아내와 더불어 고향에 가서 마음껏 즐기다 모고 싶었다. 그러나 아내는 내 제안을 강경하게 거부했으며 오히려 90이 되는 친정 아버지를 데리고 그들의 고향인 이태리와 시실리로 가버렸다. “나는 무엇인가? 어려서 거지처럼 버려진 나는 60이 돼서도 역시 버려진 존재가 아닌가?” 나는 우울해 지기 시작했다. 홧김에 서방질 한다고 했듯이 나는 짐을 싸들고 멀리 아프리카 탄자니아로 배낭 여행을 떠나 킬리만자로의 눈과 빅토리아 호수 주변 국가, 그리고 사슴, 얼룩말, 코키리, 치타, 사자, 그리고 하이에나가 눈을 이글거리는 탄자니아의 야생동물의 왕국을 보았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생각지도 않은 국세청으로부터 6번째 세무 조사 통지를 받았다. 이번에는 예감이 나뻤다. 아무래도 탈세 혐의가 꼬리를 들어 낼 것 같았다. 두 번씩이나 받은 경고장이 생각났다. “강석호 공인회계사? 탈세를 도와준 혐의가 포착되면 징계를 받아 면허가 취소됨은 물론 징역을 받을 수도 있소. 아시겠죠?” 세무조사를 위한 준비 사항이 너무나 많았으며 방대했다. 더더욱 불길한 것은 마징기씨로부터 증거가 될 영수증을 받지 못하고 보니 거짓말 투성이가 되고 말았다. 겂이 났다. 마징기씨의 영역에서 도망을 가고 싶었다. 아니 그들과 연결되는 사업으로부터 손을 떼고 싶었다. “이것 보게! 이번 세무조사도 자네가 원만하게 해결해주게. 그래서 큰 선물을 준비해 두었네. 알겠나?” “.......” 내 나이 60세, 언제까지 국세청을 속이는 공인회계사가 돼야 하는가? 나는 스스로 생각을 해 보았다. 공인회계사가 된지 어언 32년인데, 한 개인의 욕망을 위해 나의 양심도 버리고 탈세를 도와주다니.... 내 자신이 가여웠다. 세무감사를 위해 준비한 영수증과 기록이 부실했다. 세무조사에서 통과한다는 것은 자신이 없었다. 돈을 세탁하고 숨겨둔 돈이 너무나 많았으며 그 의도가 눈에 환해 보였다. 이번 감사에서 살아 날 길이 없어 보였다. 엄청난 액수의 벌금은 고사하고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것이 뻔했다. 한 달 동안 준비를 해 국세청에서 지정해준 사무실에서 담당관을 만나 주의사항을 듣고 서류를 넘겨주었다. 그 후 국세청 담당관이 지시하는 대로 협조해 주어야했다. 약 일주일 후 나는 국세청 직원을 다시 만났다. “당신? 공인회계사가 맞소?” 그는 얼굴을 붉히면서 말하였다. “예?” 나는 당황했으며 일이 꼬이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내게 준 것은 엄청난 양의 증빙 서류와 영수증이었다. 사무실로 와 준비할 증빙서류와 영수증을 구할 길이 없었다. ‘아! 이토록 탈세를 많이 했을까? 공인회계사도 모르게.....’ 나는 자신이 없었다. 애꿋은 커피 한잔을 마시고 한숨을 푹 쉬었다. 그날 저녁 나는 마징기 사장을 만나 그 많은 돈을 영수증도 없이 탈세한 것을 질책했다. “무슨 소리야? 한 푼도 숨긴 것 없어!” 그는 오히려 큰소리로 나를 질책했다. “엄청난 벌금에 징역 몇 년은 각오 하십시다. 사장님은 물론 나도 말입니다.” “뭐시? 징역을?” 마징기 씨는 얼굴을 붉히면서 나를 노려봤다. 순간 나는 탄자니아 사파리에서 보았던 사슴과 사자 모습을 떠 올렸다. 나는 분명 사자의 밥이었다. 그렇다면 저 사자는 누가 벌을 준담?“ 나는 울분이 솟았다. ‘아무도 없어...사자, 독수리, 용등은 천적(天敵)이 없어. 천적이 없어.’ 누군가 내 뒤에서 알려주고 있었다. ‘천적이 없다? 천적이.....’ 아무렴, 동물의 세계에도 질서와 규율이 있을 텐데...‘ 나는 혼자말로 중얼대며 집으로 돌아왔다. * 두 번의 경고를 받았기에 이번 세무사찰에서 의도적인 범법(犯法)이 인정되면 공인회계사 자격증을 빼앗긴다고 강력하게 국세청직원이 내게 말해 주었다. 그 뿐인가 마징기 사장은 악질적으로 탈세를 했기에 벌금은 물론 징역을 받을 거라고 말해 주었다. 잠을 자려고 누었으나 눈이 말똥말똥해지며 국세청 직원의 위협적인 말이 귀에서 산울림처럼 뱅뱅 돌았다. ‘면허 취소, 벌금 그리고 징역’ 밤 12시가 넘어서야 눈이 감기면서 잠이 들었나보다. -탄자니아의 사파리에서 사슴을 잡아 사자들이 찢어 먹고 있었다. 바로 그 사슴, 다리를 다쳐 절룩이던 그 사슴이었다. 다른 사슴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으나 불쌍하게도 다리 다친 이 사슴은 사자들의 먹이가 되었다. ‘아! 가엾은 다리 다친 사슴아!’ 나는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사슴을 찢어 먹은 사자들은 배가 부른지 잠을 자기도 하고 이리저리 포효하며 어스렁 거리고 있었다. 순간 덩치가 큰 숫 사자 한 마리가 움퍽 파인 웅덩이에 다리가 빠져 들더니 아픈 소리를 쳤다. 잠시 후 그 숫 사자는 절룩거리고 있었다. 마치 사슴이 절룩이듯이..... 절룩이는 사슴은 사자에게 잡혀 밥이 되었는데, 사자는 어느 동물도 건드릴 수가 없음은 천적이 없는 동물의 왕이기 때문이다. 절룩이는 사자는 뜻밖에도 대퇴골을 다친듯했다. 다음 날, 다른 사자들은 먹이 감을 구하러 사파리로 나갔으나 대퇴골을 다친 이 사자는 어린 새끼들과 같이 집에 머물러 있었다. 밤이 되었다. 사자들은 장소를 옮기는지 이동을 시작했다. 앗뿔싸, 사자들은 다리를 다친 사자가 대열에서 처진 것을 모르는지 아니면 무시하는지 어디론지 떼 지어 사라져 버렸다. 초생 달이 뜨고 사파리 산속은 정적이 감돌았다. 가끔 늑대 소리가 정적을 깨뜨리며 음산하게 만들었다. 다리를 다친 사자는 신음 소리를 내며 바위 곁에서 잠을 자고 있는듯했다. 순간, 산 뒤쪽에서 30여 마리가 되는 하이에나 무리가 사자를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탄자니아에서 볼 수 있는 점 박힌 하이에나들이 대장(주로 암컷임)을 중심으로 아우, 아우 소리를 내고 있었다. 다리 다친 사자는 하이에나들을 쳐다보며 긴장하고 있었다. 건장한 숫 컷 사자는 당장 달려가 암컷 하이에나 대장을 한 입에 물어뜯어 죽이면 다른 하이에나들은 줄행낭을 치며 도망가기 마련인데, 다리를 다친 사자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사정이 180도 달랐다. 그렇다고 그를 도와 줄 동료 사자들도 곁에는 없었다. 홀로된, 다리 다친 사자....그는 더 이상의 사자가 아니었다. 아니 동물의 왕이 아니었다. 빙 둘러싼 하이에나들은 사자 뒤편에 있는 놈들이 먼저 달려들어 사자다리를 물었다. 그리고 앞쪽 놈들이 사자의 몸통을 물었다. 동물의 왕, 사자도 대퇴골을 다치고 보니 떼를 지어 달려드는 하이에나들의 적수가 되지 못하고 피투성이가 돼 숨을 거두었다. 음흉한 하이에나들은 사자를 갈 갈이 찢어 먹기 시작했다. ‘와! 사자를 잡아먹는 하이에나! 끔찍하군!’ 순간 나는 눈을 떳다. 아! 꿈이었다. -다리 다친 사슴이 사자에게 잡히던 꿈에 이어 이번에는 다리 다친 사자가 하이에나에게 잡히는 꿈을 꾸었다. 탄자니아 사파리에서 보았던 그 사자들과 하이에나들의 싸움을 꿈에서 다시 보다니....... 이 무슨 징조일까? * 4주 후 나와 마징기 사장은 국세청에 의해 검찰에 고소를 당하였다. ‘고의적이며 반사회적인 탈세의 혐의가 발견돼 법에 의해 검찰에 고소를 한다'는 국세청의 통보를 받은 나는 올 것이 왔음을 알고 체념했으나 마징기씨의 반응은 거칠었다. 그리고 세무사찰을 제대로 처리 못한 나에 대한 불만이 마치 다리 다친 사자가 음흉해 뵈는 하이에나에게 둘러싸여 어쩔 줄을 모르는 그 모습이었다. ‘병신 같은 놈! 세무사찰도 막지 못하다니. 내가 누군데. 병신 같은 놈!’ 마침내, 하이에나의 사자공격이 임박했다. 하이에나가 가까이 닥아 와 뒷다리를 물었다. 그리고 골통을 꽉 물고 흔들었다. 다리 다친 사자는 단념했는지 눈을 지그시 감는듯하다. 탄자니아 사파리에서 본 그 다리 다친 사자가 하이에나에게 잡혀 먹혔던 것처럼.......... 소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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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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