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어느 미주 교포의 3일

2012.12.09 13:34

연규호 조회 수:837 추천:57

14. 단편 소설, 어느 미주 교포의 3일 1. “앞으로 30분이면, 이 여객기는 인천공항에 도착하게 되니 컴퓨터와 전자기계를 꺼주기 바란다”는 대한항공 여자 승무원의 맑고 낭낭한 안내방송을 듣자 나는 깜짝 놀라 창밖을 열심히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내가 탄 이 여객기는 일본 열도를 지나 동해로 접어들어 한반도를 가로질러 인천공항으로 가고 있다는 항로의 표시가 앞에 놓인 안내판에 화살표로 가르치고 있었다. 인천공항이 점차 가까워지면서 컴퓨터 칩 속에 차곡차곡 뭉뚱그려 저장되어 있던 44년의 길고 한스러웠던 내 과거가 마치 추운 겨울을 동굴에서 깊은 겨울잠으로 보내고 따스한 봄이 되자 기지개를 펴고 먹이를 찾아 밖으로 엉금엉금 기어 나오는 곰처럼 튀어 나오고 있었다. 강능을 지나 서울을 비켜 서해안 인천으로 비행기는 방향을 바꾸는 듯했다. 밖에 활짝 펄쳐저 뵈는 서울의 모습이 엄청나기에 급속히 발전한 한국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내가 한국을 떠났던 1967년의 5월과는 도저히 비교가 되질 않았다. “닥터. 강? 당신의 조국, 대한민국은 경제대국이 됐습니다. 올림픽도 치루고 다른 나라를 돕는 자랑스러운 나라가 됐답니다.”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 온 미국인 흉곽외과 교수가 내게 몇 년 전에 들려준 말이 이제 실감이 나고 있었다. 일본식민지에서 겨우 벗어났는가 했는데 6.25(한국전쟁)라는 무지막지한 동족간의 내전으로 인해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였던 대한민국이 박정희 대통령의 영도아래 잘 살아 보자고 삽질을 하며 건설하던 1967년 5월, 나는 “다시는 한국에 돌아오지 않으마” 라고 입술을 깨물었다. 김포공항에서 “잘 다녀오라는” 아버지의 마지막 말을 태평양에 내 던져 버리고 미국 유학생 신분으로 켄터키-오하이오로 가는 비행기를 탓었다. 그것이 내가 본 마지막 한국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44년, “돌아오지 않으마” 라고 깨물었던 입술을 번복하고 한국을 다시 찾아오게 된 것은 죽음을 앞둔 사람의 마음에 스며드는 고향생각, 귀소본능(歸巢本能) 때문이리라. 죽음과 귀소본능이라?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어느 누구나 죽어야 하는 것처럼, 나도 죽음을 기다리는 폐암 말기 환자가 됐기 때문이다. 미국 켄터키와 오하이오주에 사는 사람들은 루이빌 의과대학병원 호흡기 내과 교수인, 나, 제임스 강(한국이름. 강석호)을 폐암의 대가라고 부른다. 동양사람을 은근히 깔보는 백인들도 나에게 진찰을 받고자 오하이오와 켄터키 그리고 인근 인디아나에서 찾아오기 때문에 많은 환자가 대기 상태이며, 나의 하루는 바쁘기 마련이다. 그렇던 나에게도 수개월 전부터 잔기침이 나고 몸이 쇠약해짐을 현저하게 느꼈지만 워낙 바쁜 환자 일정을 소화하다보니 정작 나의 건강을 등한시 하고 말았다. 보다 못해 동료의사가 나를 강제로 잡아 진찰해 주었다. 그 결과 왼쪽 폐에 큰 암 덩어리가 발견됐으며 불행하게도 기관지 주위에 있는 임파선과 간에 전이가 돼있는 중증 말기 환자로 판명이 났다. 처음에는 나 자신도 당황했으며 주위 동료들도 수군거렸다. “아니? 폐암 박사가 폐암에 걸리다니? 중이 제 머릴 못 깍는구먼." 동료 의사, 간호사 그리고 환자들마저 나를 두고 수군거렸다. “동양 의사 주제에 교수라고 설치더니, 폐암에 걸리다니, 정말 웃기는구먼...” 백인들은 아예 대놓고 비아냥거렸다. 불과 4개월 전의 일이었다. 나는 내가 맡은 환자들을 동료 내과 의사에게 넘겨주고 교수직도 사임했다. 그리고 마지막 방법으로 항암 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받기 시작했으나 차도가 없었다. 비록 폐암의 대가라고는 하지만, 나도 연약한 사람이기에, 처음에는 다른 환자들처럼, 죽음에 대한 공포와 심한 우울증에서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죽는다고 생각하니 두렵고 떨렸다. 한국을 떠나 백인들이 주류인 이곳, 오하이오와 켄터키주에서 보낸 40여년의 세월이 마치 무인도에 와서 외롭게 보낸 느낌이었다. 부모 형제 그리고 친구들을 버리고 여기 와서 한국말은 잊어버리고 알량한 영어만 쓰면서 살아온 것이 어찌 보면 바보스러웠으며 차라리 비참하게 앓다가 죽는 것 보다 내 손으로 죽고 싶었다. 마취 주사를 과다하게 맞고 정신을 잃고 죽고 싶었다. 나와 결혼해 30년 가까이 살아온 백인 아내(신디. 로브링, Cindy Robling)의 얼굴이 마치 콩쥐 팥쥐에 나오는 악독한 계모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켄터키 출신의 부자, 로브링 가문의 딸이기에 가난한 동양 사람인 나를 은근히 깔보는 듯 했으며 남편인 나를 단지 돈 벌어 오는 주식회사 외무사원처럼 취급했다고 생각하니 분노가 솟았다. 내 나이 66세, 살 만큼은 살았으니 후회는 없다마는 앞으로 잘 살아 봐야 일 년, 그렇다면 죽을 준비를 해야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짜피 죽는 것이라면 그래도 죽기 전에 몇 가지 못해 본 것을 꼭 해보고 죽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마지막 전화를 해 죽음을 알려주고 싶었다. 켄터키에 있는 미국사람 전용, 공원묘지에 외롭게 묻히고 싶지는 않았다. 죽어서라도 한국에 가 묻히고 싶었다. “허니? 나, 한국에 가서 몇 가지 해결하고 싶은 것이 있으니 다녀오리다.” 나는 아내 신디에게 결심하고 말했다. “뭐라고, 허니? 당신 정신 있소? 항암 치료, 방사선 치료를 해야 회복이 되지! 한국에 가면 당신 죽소!” 아내는 펄쩍 뛰며 강력하게 반대를 했다. “허니? 당신이 뭐라고 하던 나는 갔다 와야 겠어. 정 그렇다면 당신도 같이 갑시다.” “무슨 소리를? 내가 한국에 왜가? 안 돼!” “안되긴, 나 지난 44년간 내 고향을 잊고 타향에서 살았어.” “고향? 당신의 고향은 여기 켄터키요. 켄터키!” “켄터키는 당신 고향이고, 허니? 나는 다녀와야겠어.” 나는 양보하지 않았다. “허니? 당신 내 말 듣지 않고 한국에 간다면 이혼해, 알겠소!” 아내의 반대도 강력했다. “이혼? 이혼! 웃기는 구먼. 죽는 마당에 이혼이라....” 내 입에서 나온 대답이 생각 밖이었다. 자존심 강한 백인 아내의 반대를 뿌리치고 나는 한국행 비행기를 탄 것은 나에게도 큰 모험이었으며 나도 나 자신을 어떻게 하질 못했다. * 여객기는 마지막 착륙을 준비하고 있기에 창문을 모두 닫고 좌석 벨트를 매고 긴장된 마음으로 조종사의 안내 방송을 듣는다. 인천 공항에 대한 안내 방송 소리가 마치 44년 전, 김포공항을 떠나 미국으로 향하던 그 때의 일로 들렸다. -충청북도 내수 근처 시골에서 밭농사와 담배 농사를 하던 아버지 덕분에 청주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 문리대, 물리과에 입학한 것 까지는 모든 것이 좋았다. 서울, 청량리에서 하숙을 하며 일 년을 지냈는데 2학년 때, 뜻밖에도 어머니가 급사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40대 초, 젊은 어머니가 속절없이 갑자기 죽다니... -아버지가 의도적으로 약을 먹여 죽였다는 말도 있었으며, 아버지가 바람을 피자 어머니는 화병이 도져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말도 있었다. 그러기에 나는 아버지가 싫었다. 살인자로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어머니의 장례를 초라하게 지낸지 불과 4개월 만에 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이 나보다 겨우 8살 더 많은 젊은 여인과 다시 결혼을 하며 내게 “어머니”라고 부르라 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듯 했다. 역겨웠다. 아내를 죽인 철면피 인간, 그리고 악독한 인간으로 보였다. 아버지의 얼굴을 보기도 싫었다. 그런데도 경찰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세상이 불공평했다. 정의가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경찰에 가 아버지를 조사해 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결국 나는 학교를 스스로 포기하고 군에 자진 입대했다. 아버지도 싫고 돌아가는 세상도 싫었기에 미국으로 무작정 유학이라도 가고자 했다. 미국에만 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다. 미국에 가면 결코 한국으로 다시 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유학시험도 치고 제대를 한 후 나는 마침내 켄터키 주 코빙톤에 있는 주립대학에 가게 됐다. 1967년, 노스웨스트 항공편으로 동경, 호노룰루를 거쳐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한 후, 국내선을 이용해 신시내티 코빙톤 공항에 내린 나는 망망한 바다 한 복판에 놓인 난파선처럼 느껴졌다. 무엇부터 시작을 해야 할지 어느 누구를 만나야 할지 모든 것이 새로웠으며 난감했다. 다행히 코빙톤 주립대학은 친절하게 한국에서 유학 온 나를 도와주려고 했다. 2년제 대학에 입학하였으며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해 학비와 생활비를 벌 수가 있었다. 결국 2년 걸리는 전문대학을 4년 만에 겨우 마치고 켄터키 루이빌 대학교에 3학년, 물리학과로 편입이 됐다. 어렵기는 했지만 운도 좋았다. 루이빌 대학교를 졸업하고 뜻밖에도 루이빌 의과 대학에 입학 하는 행운아가 됐다. 내 고향 충청도 청주와 비슷한 켄터키에서 나는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오하이오 신시내티의과 대학 병원에서 내과 그리고 호흡기 내과 전문의 과정을 무사히 마쳤다. 미국 호흡기 내과 전문의사가 되고 보니 나는 신분이 향상되어 백인 주류사회와 터놓고 살게 됐다. 그뿐인가, 나는 루이빌 의과대학에서 내과 전임강사로 발령이 났으며 그 후 내과 교수가 됐으니 동양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내 나이 38세 되던 해, 나는 루이빌에서 백인 변호사인 신디. 로브링과 결혼을 하였다. 신디 로브링은 산프란시스코에 있는 금문교를 만든 건축가 로브링의 후손이기에 콧대가 세고 그 집안 전체가 자만심이 컸다. 결국 나는 이들 명문가의 한 가족이 돼 한국사회와는 담을 쌓고 43년을 살아왔다. 신디 로브링은 나의 공주요 주인이었다. 한국에서 산 22년 그리고 미국에서 산 44년, 결국 나는 미국시민이요, 백인의 데릴사위가 된 셈이었다. 2. 미국에서의 44년은 굴곡의 세월이었다.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위해 막 노동을 하던 때가 있었는가 하면 지금처럼 상위층 백인들과 어울려 지내는 풍요로움도 있다. 도도히 흐르는 오하이오 강이 있는가 하면 미역 감고 놀던 어린 시절의 고향, 청주에 있는 무심천(無心川)이 기억에서 난다. 세련되고 몸매가 좋은 백인 아내, 신디가 있는가 하면 무심천에서 메뚜기와 송사리를 잡으며 같이 놀았던 초등학교 여자 친구 김정선이 생각난다. -코 흘리개 김정선이란 계집애는 내가 서울대학에 입학 했을 때, 그녀는 청주 도립병원 간호전문학교(2년제)에 입학했다. 그녀는 석호야, “축하해. 축하해.”를 연발했다. 그리고 나의 어머니 장례식 때는 눈물을 흘리며 “아줌마, 아니, 어머니”라고 흐느꼈었다. 내가 군에 입대하기 전날, 그녀는 내게 말했다. “나, 정식 간호원이 됐어. 그리고 내수 보건소에 취직됐어....” 그리고 그녀는 내게 말했다. “석호. 나, 너만 기다릴 테니 성공해서 건강하게 돌아와.”라고. “정선아!”나는 몇 마디 말도 못하고 눈물만 찔끔 흘리고 말았다. 감격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미국 가기 전날, 그녀는 내게 미국 화폐, 50딸라를 내 손에 꼭 쥐어 주면서 말했다. “미국가서 써....석호, 나, 너, 기다린다.”라고. “정선아! 그래 기다려!.”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비행기를 탔었다.- 밭농사와 담배농사를 했던 아버지의 모습이 장인 지미. 로브링이 소유한 광활한 켄터키 담배 밭과 옥수수 밭에 비해 초라해 보인다. * 왜 그랬을까? 나는 한국이 싫었다. 아니, 아버지가 싫었기에 한국이 덩달아 싫어졌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겠지.... 그래서 미국을 마치 지상의 천국으로 그리고 도피처로 생각했기에 서울대학도 집어치고 미국으로 왔었다. 한국에서 산 22년의 곱절이 되는 44년의 미국 생활은 나를 바보로 만들었다. 한국말도 잊어 버렸으며 한국인의 정서도 잊어버렸다. 그리고 미국사람처럼 행동하며 살았다. 그러기에 한국 사람을 우연히 마주치면 외면했다. 모르는 척했다. “나는 미국시민이다. 그리고 루이빌 의과대학 교수다. 교수!” 라는 자만심이 얼굴에 가득히 그려 있었다. 그런데, 웬일일까? 폐암 선고를 받고 죽음 앞에 직면하고 보니 모든 것이 달라졌다. 내 존재를 되찾았다고 말하리다. 나는 내가 미국사람이 아닌 한국 사람임을 알게 됐다. 한국말을 하고 싶었다. 한국음식을 먹고 싶었다. 그리고 한국여자를 만나고 싶었다. 아니 아직도 나를 기다린다고 하며 50딸라 지폐를 내 손에 꼭 쥐어 줬던 코흘리개 여자 친구 김정선을 만나고 싶었다. 한국말만 하는 그녀, 정선을 가슴에 꽉 품고 싶어지는 마음은 무슨 이유일까? 정욕일까? 아니면 사랑일까? 백인 아내를 품에 안을 때마다 나는 마치 먼 외계에서 온 우주인을 억지로 가슴에 품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기에 그녀와의 성생활도 즐겁지도 않았다. 단지 남성으로서의 의무였을 뿐이었다. 같은 말, 같은 음식, 같은 풍습을 공유한다면 비록 가난할지라도 마음속에서는 더 풍요로운 사랑을 느꼈을 텐데. 그런데 그녀와 나는 아니었다. “김정선? 지금 어디에 있니? 보고 싶다. 죽기 전에. 꼭 한번 보고 싶다.” * 잠시 44년 전, 옛 날을 생각하다보니 비행기는 인천 국제공항에 무사히 도착했으며 짐을 들고 비행기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듣던 대로 인천 공항은 세계 최고의 공항이었으나, 1967년, 눈물을 흘리며 쓸쓸히 빠져나왔던 김포공항에서 느꼈던 그 아련한 정서가 전혀 없었다. “잘 다녀와!”라고 퉁명스럽게 말해 주었던 아버지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죽은 어머니 대신 새로 장가들어 나은 아들이 나를 마중 나와 주었는데 생각해 보면 다행이었다. 아무도 없는 무관심보다는 그래도 나보다 24살 어린 이복동생이라도 폐암 말기인 내게는 반가웠다. “형님! 저, 저, 동생, 강석범입니다.” “석범? 어, 이렇게- 나와-줘서- 반-가워...” 내 입에서 나오는 한국말이 다소 어수룩했다. “무슨 말씀을, 당연히 제가 해야죠. 모처럼 오시는데...” 어머니가 죽자 기다렸다는 듯이 장가를 든 아버지는 1999년에 80세로 돌아갔으며 이복동생 석범은 나보다 8살 더 많은 어머니를 모시고 충청도 내수에서 아버지가 놓고 가신 유산, 땅과 집 그리고 스스로 노력해서 전자가계를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그뿐인가, 나를 대신해서 부모와 조상을 모시고 있다고 했다. “형님! 돌아가신 아버님과 큰 어머님은 합장했습니다. 그리고 자주 찾아뵙고 벌초를 합니다.” “합장? 그리고 벌초를?” “예. 형님.” 죽은 어머니에게도 깍듯이 공경하고 있다니,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180도 달랐다. 내가 한국에 없는 동안, 이복동생은 나를 대신해 부모 모시고 제사까지 지냈으니, 나는 그동안 무엇을 했던가? 미국시민이 돼, 백인 아내 데리고 부모도 잊고 오히려 원망하며 살아온 불효자요, 조국을 등진 매국노가 아니던가? ‘석범아! 고맙다.“ 나는 진심으로 그에게 사과했다. * 내가 미국에서 살면서 가장 궁굼하고 안타까웠던 것은 어머니의 묘소였다. 죽기 전에 꼭 찾아가 “어머니!”라고 부르고 묘소에 술 한잔을 따르고 싶었다. 아니, 어머니를 추모하는 예배를 나 혼자라도 드리고 싶었다. 이복동생, 석범의 차를 타고 중부고속도로를 통해 달려간 내 고향, 내수는 1967년도의 내수가 아니었다. 청주 국제공항이 근처에 있어 마치 신시내티-코빙톤 공항을 상상케 했다. 허술한 공동묘지 한 모퉁이에 초라하게 묻혔던 어머니의 묘는 없어지고 경관이 훌륭한 내수 공원묘지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합장돼 있었다. 공원묘지 주변, 활짝 펴진 들판에 벼이삭이 꼿꼿이 솟아오르고 있었으며 그 주위에서 메뚜기들이 튀고 있었다. ‘어머니? 어느새 45년이 됐어요. 싫던 좋던 아버지와 같이 묻혀 있으니 구색은 갖추었군요. 이복동생과 계모의 배려가 고맙습니다. 어머니. 생각지도 못한 인정이군요.’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 묘 앞에 넙죽 엎드려 삼배를 올렸다. 아무리 미국에서 오래 살았다고는 해도 이것만은 잊지 않고 살았으니까. 그리고 내가 죽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어머니? 나, 폐암 환자로 머지않아 죽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곁으로 갑니다.’ 내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초가을의 저녁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석범을 따라 그가 사는 집으로 갔다. 이층 양옥집으로 일층에는 전자 상점, 그리고 이층에는 사람 사는 가정집이었다. 40여 년 전에 마지못해 인사했던 계모도 많이 늙었으며 건강이 좋지 못함을 느끼게 했다. 어떻게 보면 그녀는 희생자였다. 어쩌다 아버지처럼 뵈는 농촌 남자를 만나 고된 농사짓고 밥, 빨래하다보니 아까운 청춘이 훌쩍 지나갔으니까.... 게다가 이가 몇 개 빠지고 보니 힘없는 할머니 같았다. 간단한 인사 후 정성껏 차려준 저녁 식사를 하며 나는 고마움을 표시했다. 내 몸이 수척해 뵈는지 그들은 가끔 흘끗흘끗 나를 처다 보았으나 나는 조금도 내가 환자임을 말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까지 나의 약함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으며 동정을 받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 그날 저녁,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나의 코 흘리개 친구, 김정선의 근황을 알게 된 것이다. 그녀는 살아 있었다. 내수에서 66년간 고향을 지키며 내수 보건소에서 간호사로 봉사하다가 얼마 전에 명예 퇴직했다고 한다.. -1967년 내가 켄터키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보낸 국제 편지는 김정선에게 보낸 장문의 글월이었다. 그리고 2년, 우리는 자주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먹고 살기에 급급한 나는 밤낮없이 노동일을 했기에 걸른 날도 많았다. 켄터키 담배농장에서, 백화점에서, 수퍼마켙에서, 아니 돈이 되는 곳이면 어디고 가서 일을 했었다. 아무리 피곤하고 힘들었어도 나는 김정선으로부터 온 편지를 받으면 모든 것이 평안했었다. 그녀와 같이 사는 꿈이 있었다. 미국 온지 4년, 나는 마침내 루이빌 대학교에 3학년으로 편입이 됐다. 코빙톤에서 루이빌로 이사를 갔다. 그리고 더 힘든 학교생활을 시작하였는데, 그녀로부터 내게 온 편지가 나를 괴롭혔다. 28살이 된 김정선에게 부모님들의 결혼 압력이 서서히 그리고 강하게 불어 왔는지, 그녀가 보낸 편지의 끝마무리가 나를 불안하게 했다. “석호씨, 금년 말, 한국에 나와 아버지를 만날 수 있을까? 약혼이라도 한다면..... 아버지의 성화가.... 석호씨.” 대학교에 다니다 말고 한국에 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학비를 벌어야 하는데...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편지를 보냈다. 염체 없는 편지였다마는.... “정선씨? 조금만 인내 하소! 1972년 3월부터, 김정선으로 부터 편지가 없었다. 내가 보낸 변명의 편지에 아무런 답장도 없었다. 그리고 다음해 나는 내가 사랑한 김정선이 내수 보건소 의사와 결혼했다는 말을 들었다. ‘의사와 결혼을? 의사와?’ 순간 나의 머릿속에 의사가 돼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의사가 되자. 의사가! 물리학자가 밥 먹여 주나!’ 나는 이를 악물고 공부를 계속했다. 결국 나는 루이빌 의과대학에 입학했으며 졸업 후 신시내티 병원을 거쳐 미국 호흡기 내과 전문의사 그리고 교수가 됐다. 한마디로 김정선을 생각하다보니 의사가 됐다.- “석호 형님? 김정선 간호사님은 홀로 사신답니다. 남편 되는 분은 10년 전에 죽었구요.” “.........”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보건소 옆에 있는 2층집에 사는데 언젠가 석호 형님은 한국에 안 오는가? 라고 묻던군요.” “한국에 안 오는가라고?” “예, 건강한지도 묻더군요.” “........” 나는 대답을 못했다. * 나는 계모가 정성껏 준비해준 아담한 방에서 한국 방문 첫날, 잠을 자게 됐다. 아무리 눈을 감고 자려해도 잠이 오지 않았음은 오늘 만난 어머니, 아버지, 계모, 이복 동생 그리고 아직도 혼자 살고 있는 김정선 때문이었다. 혼자 살고 있다는 그녀가 훌쩍이는 콧소리 때문이었다. 나의 한국 방문 첫날은 이렇게 분주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3. 참으로 놀라운 것은 고향에 온 후 나는 마치 폐암에서 완쾌된 건강한 사람으로 느껴졌다. ‘내 몸에 폐암이 퍼져 있다니’, 말도 안 되는 듯했다. 아침을 일찍 먹고 나는 계모와 이별을 했다. “아니 이렇게 빨리 가시면, 또 언제나 보나?” 계모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서울에 올라가 대학병원에서 강연도 하고 많은 의사들을 만난 후 미국으로 돌아간다고 내 일정을 말해 주었다. 이복동생이 태워주는 차편으로 청주로 가는 길에 지나친 보건소와 그 옆에 있는 아담한 2층집을 바라보며 나는 김정선의 얼굴을 떠 올렸다. 보건소 앞길에 코스모스가 피었으며 하얀 이층집 담벼락위로 감나무가 눈에 띄었다. ‘아- 저 집에 정선이가 살고 있다니, 그리고 그녀는 언제까지나 나를 기다린다고 약속을 했었는데. 비록 늙어 꼬불어진다고 해도.’ 그녀가 보냈던 편지 속의 한 구절이었는데 너무나 감격해 아직도 외우고 있다. 그러나 약속되지 못한 구절이 되고 말았다. 혹시 만나게 되면 김정선 간호사에게, 일정이 바빠 만나지 못하고 그냥 갔다고 전해 달라고 이복 동생에게 차 속에서 부탁을 하고 보니 눈시울이 뜨거웠다. ‘지금 가면 영영 못보고, 죽는데,’ 그녀를 못보고 죽는 것이 안타까웠다. -청주하면 나의 소년시절이 생각나는 곳. 코 흘리개, 초등학교 시절부터 울퉁불퉁한 근육을 만들던 고등학교 시절까지 살았던 곳. 김정선과 같이 무심천(無心川)에서 미역 감고 송사리 잡던 곳. 우암산(牛岩山)에 핀 불타는 진달래를 꺽으며 놀았던 그 산. 그곳에서 나는 아직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방황하고 있는 듯했다. 일정이 바빠 무심천 맑은 물에 발을 담그지 못한 것도 안타까웠다. * 고속 버스를 타고 올라온 곳은 청량리 로타리였다. 오늘날, 서울대학교는 관악산에 집중해 있는 최고의 대학기관이지만 내가 입학했을 때는 대학들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문리대 이학부와 공대는 엉뚱하게도 청량리 로타리 북쪽편에 있는 붉은 벽돌 건물속에 있었다. 내수에서 올라온 나는 자연 질퍽질퍽한 굴다리 밖, 전농동에 있는 허름한 집에서 자취를 하며 학교까지 걸어 다녔다. 말이 자취지 굶는 날이 더 많았으며 공부하는 시간외에 청량리 역 근처에 있는 허름한 술집에서 술 마시고 노는 시간도 많았었다. 강원도, 전라도, 그리고 경상도에서 무작정 상경했다가 술집에서 그리고 판잣집에서 술도 팔고 몸도 팔던 애들도 많았다. 그 알량했던 문리대 건물과 몸 팔던 애들이 궁굼하다 못해 보고 싶어 그곳을 찾았다. 그러나 착각이었으며 흘러간 낭만이었다.. -붉은 벽돌집 문리대 건물은 온데 간데 없어졌고 그 자리에는 현대식 건물에 상가들이 들어 있었다. 우중충했던 청량리 역 주변의 뒷골목도 말끔히 정돈되었으며 롯데 백화점을 위시한 최신식 건물들이 꽉 들어 차 있었다. 학교도, 술집도 계집애들도 모두 사라졌고 나를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어디로 갔을까? 문명의 뒤안길로 사라졌으며 그 때 그 계집애들은 이젠 늙어 죽어 없어 졌거나 병들어 죽었으리라, 나처럼. 내친김에 찾아간 청량리 시장 또한 말끔히 지붕으로 덮혀 있었으며 내가 즐겨 먹었던 순대국과 똥집 튀김, 돼지 족발은 아직도 냄새를 풍기며 그 자리에 있어 마음이 기뻣다. 컬컬한 막걸리보다 확 쏘는 소주 한 잔을 마신 후 골뱅이 무침을 입에 물고 보니 막혔던 가슴이 확 트였다. 가슴속에 도사리고 있던 폐암이 일순간에 씻겨 나가는 듯했다. 미국에서 받는 방사선 치료와 항암 치료를 무색케 하는듯했다. 켄터키와 오하이오에 있는 술집이나 바와는 달랐다. 땅콩과 버터를 안주삼아 마시던 깡통 맥주 따위와는 내 뱃속에서 받아 드리는 느낌이 달랐다. ‘아! 이게 바로 고향의 맛이구나....고향의 맛.’ * 오후에 의과대학 내과에 들려 몇몇 옛 친구들과 인사를 하기로 약속이 돼 있었으나 웬일인지 그곳에 가고 싶지 않았다. 옛 문리대와 법대가 있던 자리에 마로니에 공원이 이채로웠다. 마치 루이빌의 한 광장에 온 느낌이었다. 뜻밖의 행운으로 대학로에서 마침 연극을 하고 있기에 나도 젊은 친구들 옆에 앉았다. 민주화 운동, 다시 말하면 반미 구호를 외치는 좌파내지 종북주의(從北) 자들을 풍자하는 연극이었다. -“민주화를 외치며 반미구호를 외치는 놈들, 알고 보니 제 자식들은 미국으로 보내 놓았구먼. 그러고서도 반미 구호을 외치다니, 것 다르고 속 다른 놈들이지.” “그러게, 좌파도 우파도 다 그게 그거란 말여....애국자인척 큰 소리치는 좌파 녀석들 더 역겨워....”- 뜻밖의 연극을 보며 나는 나 자신의 엉덩이가 들썩 거렸다. 나도 미국에 오랜 산것이 늘 마음에 걸렸는데 마치 나를 두고 하는 연극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자식들 내가 왔다고 나를 비켜서 하는 말인가? 이 놈들아 미국에 갔다고 다 매국노냐? 이래 봐도 나, 조국을 위해 할 건 다 했어....’ 나는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의과대학으로 가 그곳에서 몇 명의 의사들을 만났다. 한국의 의학 수준이 놀랍게 발달돼 있음을 내 눈으로 확인한 셈이었다. 켄터키-오하이오의 대학병원과 여기 서울에 있는 병원들을 비교하기가 힘들었다. ‘한국은 더 이상 나를 필요치 않을 만큼 발전했구나.’ 나는 더 이상 내가 미국에서 온 의사라고 말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단지 고향을 그리워 찾아온 이민자였을 뿐.... 오늘은 생각보다 피곤했다. 더 걷기가 힘들었기에 택시를 타고 예약해 둔 남산 하야트 호텔로 갔다. 서울 야경이 내려다 뵈는 꼭대기 스카이 라운지 올라갔다. 서울의 아름다운 밤 풍경을 내 가슴속에 심어 보았다. 이토록 아름다운 밤을 언제 보았던가? 신시내티와 켄터키를 이어주는 오하이오 강 다리’에서 내려다 본 신시내티의 야경을 보는 듯했다. 말기 암이기에 마시지 말라고 강력하게 금지했던 붉은 와인 한잔을 시켰다. 그리고 잘 익은 등심살 고기 정식을 먹으며 마치 신델레라의 궁전에서 공주님을 만나고 있는 느낌이었다.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확끈, 그리고 심장이 울렁거리는 느낌으로 호텔방으로 들어가 불을 끄고 침대에 누었다. 한국에서 보낸 둘째 날 밤, 술에 취했는지 깊은 잠에 들었다. 4. 한국에 와서 죽기 전에 꼭 보고 싶고 해 보고 싶었던 것이 많았으나 몸이 아프다 보니 100% 다 해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마음대로 되질 않았다. 종로 3가에 있었던 단성사 극장과 종로 2가에 있는 파고다 공원을 보고 싶었다. 지저분했던 그 단성사 극장과 그 주위는 초현대식 건축물과 상가로 단장됐으며 내가 보고 싶었던 그 더러움과 호기심의 종삼(鍾三)은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다. 남자의 심리가 꼭 이러한가? 보고 싶은 것이 무수히 많을 진데 하필이면 가장 지저분하고 비윤리적이었던 것을 찾는 것이 무슨 이유일까? 계면쩍은 생각이 났음은 한 가닥의 양심이 살아 있다는 증거 일게다. ‘이것이 바로 경제 부흥의 결과였구나... 그리고 보라 그 더러웠던 청계천을! 이곳은 한 폭의 그림이구나! 그림! 켄터키에서 보던 아름답고 깨끗한 개울이 바로 여기에 와 있구나...’ 나는 마음속에 뿌듯한 자긍심이 생기고 있었다. ‘켄터키, 오하이오에 사는 백인들아! 너희들 한번 여기 와서 한국을 보라!’ 나는 홀로 외치고 있었다. 파고다 공원에 모인 노인들의 나이가 나와 비슷했다. 60 노인, 70 노인 그리고 80 노인, 이들 모두가 백수였으며 보수와 진보로 나뉜 정치가들이었다. 그리고 애국자들이었다. 나는 이들 앞에선 한갓 기회주의자요, 매국노였다. 조국이 어려웠을 때, 외국으로 이민 나갔기 때문이었을까? 광화문 종각 그리고 그곳에 있었던 음악 감상실, 르네쌍스와 담배 연기 자욱했던 금란(金蘭) 다방은 어디로 갔는지, 내 가슴이 찡했다. 이곳에서 담배 피우며 쓴 커피를 마셨던 옛 친구들이 보고 싶었는데... ‘지고이네르바이젠,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감미로운 바이올린 음악이 내 귀에서 흐느끼는듯했다. ‘아! 그대, 내 친구는 어디로 갔는가?’ 담배 연기 자욱해 숨쉬기도 힘들었던 금란 다방에 남겨 두었던 내 옛 마음을 되찾으려고 했으나 허사였다. 문득 내 손을 뿌리치고 사라졌던 김정선을 찾아 헤맸던 그 창성동 한옥(韓屋) 골목길이 생각났다. 중앙청 청사는 물론 담벼락, 그리고 창성동 한옥 동네는 토네이도에 날려갔는지 그곳에는 현대식 아파트가 드높았으며 3층 발코니에서 늙은 어느 여인이 창가로 밖을 내다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윤기 나고 보드러웠던 그녀의 얼굴이 어쩌다 저렇게 쭈그러졌을까? 44년 전의 그녀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효자동 길에서 주었던 그 은행 나뭇잎은 그대로 있는데.... 44년 동안 돋아나고 바래고 그리고 땅에 떨어지기를 반복한 그 은행나무 아래에 나는 털썩 주저앉았다. 오가는 사람들이 나를 흘끗흘끗 바라보고 지나간다. 미국에서 온 재미 교포라고 이마에 쓰여 있기라고 한지, 나를 외국에서 온 방랑자로 쳐다보는 듯했다. 고향이 그리워 찾아 온 폐암 말기 환자일 뿐인데.... 머지 않아 은행 나뭇잎새 처럼 색이 바래 가지로부터 떨어져 땅바닥에서 나 뒹글어야 하는 자연의 이치가 동정심으로 느껴지다니... * “아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나? 값싼 동정심을 바라고 있다니... 나는 미국에서 온 호흡기 내과 전문의사인데....말도 안되지!” 나는 땅바닥에서 벌떡 일어나 택시를 탔다. 꼭 가보아 야 할 곳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학생? 사람이 죽으면 몸은 땅에 묻혀 썩어지고 영과 혼은 하늘 나라에 들어 간다. 그러기에 그러기에 평소에 너 자신을 준비해야 한다.”라고 어느 젊은 목사가 외치던 것이 기억에 떠올랐다. 남대문 교회와 김 목사님이었다. 학생 때 잠시 찾아 갔던 그 남대문 교회는 현대식 건물로 개조 됐으며 나에게 죽음과 영생을 설명해 주었던 그 젊은 목사님은 지금 미국 로스앤젤스에서 은퇴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미국, 로스앤젤스에서?” 나는 교인에게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70 중반이 돼 중풍으로 잠시 쓰러졌다가 회복이 됐는데, 아들들이 미국에서 찾아와 목사님을 모시고 갔답니다.” ‘그렇다. 죽음 다음에 찾아 올 세계는 분명 존재 한다. 폐암으로 죽으면 그 세계로 옮겨지는 법! 더 평화로운 곳. 돈과 지식을 초월한 곳으로!’ 나는 남대문 교회를 나왔다. 순간 내 눈에 뵈는 것은 ‘아! 대한민국 국보 제 1호, 남대문(숭례문)의 불 탄 모습이었다. 불에 탄지 어느듯 3년. 분을 참지 못한 어느 무지한 늙은이에 의해 그 숭례문이 타버리다니.... 그리고 아직도 복원이 되지 못하다니......대한민국의 긍지가 불에 탄 느낌이었다. 몹시 피곤함을 느끼며 나는 택시를 타고 남산 하야트 호텔로 되돌아 왔다. 아직도 서쪽 하늘을 꽉 잡아 컴컴한 항아리 속으로 집어 던져야 밤이 오려는지..... 어제처럼 스카이 라운지에서 저녁을 먹고 와인 한잔을 마시고 호텔 방에서 이 생각 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일 오후 1시, 나는 미국 로스앤레스로 가는 대한 항공을 타야 했다. 그 이유는 루이빌에 돌아가 항암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어제보다 다소 일찍 잠자리에 들려고 호텔방 불을 끄고 푹신한 고급 침대에 누었다. 고국에서 보낸 3일 그리고 그 밤이 저물고 있었다. 5. 고국 방문을 3일에 끝내고 미국으로 가야 하는 일정은 백인 아내가 여행사에 가서 그녀가 스스로 만든 일정이었다. 어쨋거나, 내일 오후 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는 내 친구 의사의 강력한 권유때문이기도 했다. “닥터.강? 자네도 알다시피 자네가 앓고 있는 폐암은 항암치료와 특히 방사선 치료에 탁월한 반응을 하기 때문에 잘만 하면 자네는 완치 될 수도 있네. 그러니 한국에서 너무 오래 있지 말고 속히 돌아오게. 알겠니?” 친구의 말은 그럴싸하지만 엄밀히 보면 잘 살아 봐야 6개월, 아니면 3개월 후면 나는 이 세상 을 하직해야 한다. 항암치료하고 6개월을 더 살다 죽느냐? 아니면 그런저런 하다 3개월 후에 죽느냐? 나는 생각해 보았다. 6개월? 아니 3개월? 루이빌에서 내과 의사로 정리할 일들이 많았다. 죽는 것은 불가항력이나 그간 써 둔 의학 논문을 정리하는 것도 중요했다. 그뿐인가, 그간 얻은 금전과 부동산을 죽기 전에 아내와 자식에게 전달하는 신탁증서도 완성해야 했다. 모든 것이 계획된 순서가 있었기에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잠이 오질 않아 갖고 온 수면제를 한정 복용했기에 가까스로 눈을 감을 수가 있었다. 아침이 돼 조반을 호텔에서 먹고 짐을 대충 꾸렸다. 호텔에서 10시 반에 준비된 리무진을 타면 11시 반 경에 공항에 도착해 수속을 할 수가 있었다. 인천 공항으로 가는 리무진에 오른 승객은 줄잡아 20여명은 돼 보였다. 대부분 미국행 비행기를 타는 손님이었다. 리무진은 스르르 미끌어져 한강변을 돌아 인천 공항으로 달려간다. 44년 전, 아버지를 뒤로하고 한국을 떠나던 그 날이 새롭게 떠오른다. 문득 눈에 뵈는 가을 논밭에 머리 숙인 벼이삭이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청주 무심천과 코 흘리개 김정선의 모습이었다. -내가 미국으로 떠나는 비행기를 타기 전, 코 흘리개 김정선이 내 손을 잡고 부끄러운 듯이 그리고 당당하게 말한 것이 기억에 떠올랐다. “석호! 언제고 힘들면 내게로 와! 간호사 월급이면 둘이 살만해. 설령 나이 들어온다 해도, 아니 병들어 온다 해도 내가 곁에 있을 거야.” “곁에?” “그래. 석호.”- 리무진은 마침내 인천 공항에 도착했으며 각자의 짐을 운전수가 꺼내 주었다. “좋은 여행 되세요! 손님.” 리무진은 나를 터미널에 내려 주고 사라졌다. “손님? 미국행 비행기는 2번 게이트입니다.” 공항에서 수속해 주는 아가씨가 나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여주었다. “예. 감사합니다.” 나는 대답을 하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순간 내 눈에 뵈는 것은 길 건너편에 기다리고 있는 노란 택시였다. 그리고 그 곁에 챙이 큰 흰 모자를 쓴 어느 여인이 나를 오라고 부르고 있었다. “정선아? 거기 있어! 거기에!” 나는 소리를 쳤다. 나는 가방을 들고 길을 건너가기 시작했다. 흰 모자를 쓴 정선의 모습이 내 눈에서 사라졌으나 그 잔영이 내 눈에서 계속 손을 흔들고 있었다. 마침내 그 노란 택시 앞에 서자 검은 모자를 쓴 택시 운전사가 택시에 타라고 손짓을 하며 문을 열어 주었다. “충청북도 내수 보건소까지 갑시다.” “내수, 보건소요? 꽤 먼 거리인데.... 예, 타십시오. 손님.” 택시는 스르르 미끌어져 공항을 빠져 나왔다. 내 눈에는 코흘리개 친구, 김정선의 웃는 모습이 선명했다. ‘석호. 미국에서 살다, 언제고 힘들면 내게로 와, 설령 병들어 몸을 못 가눠도... 내 곁으로와! 나, 널 기다릴게.’ 그녀의 목소리가 내 귀에서 강하게 들리고 있었다. 소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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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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