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내고향은 소록도 파트 1

2012.01.23 12:23

연규호 조회 수:671 추천:27

Leprosy 장편 소설: 제목, 내 고향은 소록도 저자: 연규호, (延圭昊, Kyuho Yun,M.D.) 문인협회(한국, 미주) 회원. A member of PEN USA & Korea * * * * 제목: 내 고향은 소록도(小鹿島) 작가의 말. 2005년 4월, 나는 중앙아메리카의 소국, 과테말라에 의료봉사를 하러 갔었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나는 존경하는 유한성 선교사의 숙소에 머물렀다. 보기 흉한 피부병으로 고생하는 과테말라의 마야. 인디안들을 치료해 주면서 나는 문득 1966년 여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시절, 친구들과 같이 미생물학 실습을 위해 방문했던 전라남도 고흥반도 끝에 있는 ‘아름다우나 슬픈 섬’, 소록도에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눈망울이 큰, 작은 사슴처럼 생겼다는 섬, 소록도에서 보았던 나병 환자들이 생각났다. 그 때 의료 선교 차 동행했던 강림 장로교회 김수환 목사님은 공교롭게도 문둥병 환자인 셋째 아들과 그를 기다리던 아버지의 서글픈 만남을 내용으로 한 아침설교를 했다. 그 설교를 들으며 나는 문둥병(나병-한센씨병)을 소재로 글을 쓰고 싶었다. 사람은 왜 태어났을까? 왜 어떤 사람은 문둥병에 걸려 오발탄 같은 인생을 살아야 한단 말인가? 과연 하늘이 내린 천벌을 받은 결과인가? 지상에 하늘의 관용이 아니면 벌받지 않고 살 수 있는 완벽한 사람이 있을까? 누가 운명을 자의로 선택 할 수 있는가? 한하운의 시에서 읽는 비통한 천형의 나병 환자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그들의 인격 또한 당연히 고귀한 것이다. 사람이 욕심을 버리고 그 빈 마음에 사랑과 인정을 가득 채우면 행복한 사람이 된다고 한다. 그 뿐인가 사람은 그 사랑을 나누어주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우러나오게 되어 불쌍한 사람을 찾아 나가 봉사를 하게된다. 바로 이것이 선교라고 나는 정의했다. * 나의 모교, 대광(大光)고등학교의 교훈, ‘경천애인(敬天愛人)’과 연세대학교의 교훈, ‘진리(眞理)와 자유(自由)’를 나는 내 인생의 교훈으로 삼고 살아 왔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 그렇다면 진리란 무엇인가? “내가 진리”라고 예수님은 말씀했다. 사랑의 샘물은 자연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 나는 여수, 애양원에서 나병환자들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손양원 목사, 스스로 문둥병 환자가 되어 그 환자들의 친구가 되었던 벨지움의 다미엔 신부, 숭고한 사랑과 희생을 몸소 실천한 오스트리아의 두 수녀(간호사) 마가레트와 마리안네를 생각해 보았다. 소록도와 녹동(鹿洞) 항구로 이어지는 불과 600미터 밖에 안 되는 소록도 대교를 통해 서로의 마음을 열고 손을 마주 잡는 소록도의 문둥병 환자들과 육지의 주민들의 모습을 나는 소설로 써 보려고 한다. * 부디 좋은 글이 되도록 하나님께 두 손 모아 기도를 드린다. 2007년 11월 26일 * * * 소설을 읽기 전에: 소록도의 현재 상황(2007년 9월22일)은 많이 좋아 졌습니다. * 1916년 일본 사람들에 의해 자혜병원으로 시작된 소록도 국립병원은 수많은 애환과 한을 품고 지금에 이르렀다. 한때 6500명의 나 환자들이(양성과 음성 합쳐서) 수용되었으나 의료시설의 발전과 사회 정책에 의해 2007년 9월22일 현재는 650명의 나환자가 소록도에 살고 있는데, 대부분이 음성 나환자로 병은 치료되었으나 갈 곳이 없어 이곳에 살고 있는 장애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평균 나이도 74세의 고령 환자들뿐이다. 사회와 가족들로부터 버림받고 한과 슬픔으로 이곳 소록도에서 평생 살다가 죽어 이곳 납골당(納骨堂)에 묻혀야 하는 한센씨 가족들과 육지 사람들이 마음을 트고 같이 즐거워 한 사건이 있었다. 2001년에 착공되었던 소록도 대교가 마침내 완공되어 2007년 9월 22일 약 일주간 임시 개통이 됐다. 소록도 병원 역사 91년만에 이루어진 눈물겨운 소록도 대교는 ‘작은 사슴(小鹿)’처럼 생겼다고 하는 소록도의 중간 부분을 지나 거금도로 연결된다.(2008년) 작가가 보았던 1966년의 소록도와 1996년의 소록도가 다르듯이 2007년의 소록도는 현대화 하였으며 멸시받았던 한센인들의 인권도 많이 향상됐다. 소록도는 녹동 항구에서 불과 600미터 떨어진 섬으로, 통통선을 타고 섬의 동쪽에 있는 선착장에 내리면 제일 안내소가 있으며 “한센병은 낫는다”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소록도는 두 부분으로 구분되는데 동쪽에 있는 사슴의 머리에 해당되는 부분을 소록도 제 1번지(官舍地帶)라고 부른다. 이곳에 소록도병원과 부속 시설이 있어 직원들이 사는, ‘직원거주지’또는 ‘관사지대’라고 불리며 일반 사람들이 자유롭게 방문 할 수가 있다. 사슴의 몸통에 해당되는 서쪽 부분을 소록도 2번지(病舍地帶)라고 부른다. 이곳에는 소록도 주민들(나환자)이 살고 있으며 일반인들은 면회를 신청한 후 제한 된 곳에만 들어 갈 수가 있다. 그 경계선을 수탄장(愁嘆場)이라고 부른다. 수탄장!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눈물로 가족을 만나던 곳...... 지금은 대부분이 음성 나환자들이나 1966년에 내가 방문했을 때는 철조망을 친 구역에 양성 나환자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음성 나환자는 철조망 밖에서 농사를 지으며 정부에서 주는 보조금으로 살고 있었다.- -1996년에 본 소록도는 많이 개선되었으나 역시 양성 나환자 촌에는 군데군데 철조망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1200여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2007년 현재 소록도는 환자가 사는 곳이라기보다 장애인들이 사는 곳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철조망은 완전히 없어졌다. 소록도 주민들은 이제 한 달에 두 번은 외출, 한 번은 외박을 할 수가 있을 만큼 자유로워 졌으며 국민들도 나환자들을 진심으로 받아 들이고 있으니 옛날과 비교하면 너무나 좋아진 현실이 됐다.- 소록도뿐만 아니라 경상북도 칠곡을 비롯한 89개소에 나환자(음성) 정착촌이 전국에 흩어져 있다고 한다. 소록도 대교가 개통이 되면서 소록도는 더 이상 외로운 섬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 사는 육지의 한 부분으로 과거의 한을 풀어 나가는 아름다운 천국으로 변하고 있다. 91년의 애환이 서린 소록도의 역사를 소설로 옮기다 보니 다소 어색한 표현도 있어 독자들의 양해를 바란다. * * * 내 고향(故鄕)은 소록도(小鹿島). 차례: 제 1부: 밖에서, 내가 본 소록도 주인공, "나“: 아버지, 강석호 제 2부: 안에서, 아들이 본 소록도 주인공, “나”: 아들, 강홍조 제 3부: 우리가 본 소록도 주인공: 우리(아버지와 아들) * * * 제 1부: 밖에서, 내가 본 소록도 (주인공: “나” 아버지, 강석호) 제 1장: 1996년 봄, 경기도 안성에서 생긴 일 -“야, 이놈들! 웬놈들이냐!” “웬놈? 우린, 버림받은 문둥이들이다. 문둥이....” “뭐라고? 문둥이!” “그래, 넌, 우리를 위해 죽어줘야겠다!” “뭐라고? 죽어 달라고?” 나는 걸터앉아 있던 장수바위에서 뛰어 내려 있는 힘을 다해 비봉산 아래로 달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니, 약수터(藥水)까지 죽을 힘을 다해 도망을 치고 있었다. * (1996년 봄, 나는 진달래 꽃이 만발한 경기도 안성 근교 비봉산(해발 227미터) 중턱에 있는 장수바위로 혼자 올라가고 있었다.) 마음이 울적할 때면 의례 장수바위로 가 그곳에 걸터앉아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나면 마음이 안정되었기에 오늘도 활짝 피어난 진달래꽃을 구경하며 산에 올랐다. 약수터 근처에는 간간이 사람들이 눈에 띄였으나 주 중이라 그런지 장수 바위 근처에는 사람들이 전혀 없었다. 서쪽 하늘에 걸린 해가 그 빛을 잃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저녁이 가까워 진 듯 했다. 나는 거무튀튀한 장수바위에 걸터앉아 우선 담배를 한 대 피워 물고 어제 생겼던 불행한 일을 생각해 보았다. 불행한 일이란? -어제(1996년, 4월 2일) 아침, 17살 된 나의 셋째 아들녀석의 피부가 못된 전염병으로 인해 매일 매일 썩어 가고 있었는데, 안성 보건소 의사가 내린 최종 진단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강석호 씨? 당신의 아들은 한센씨병이라고 합니다. 나병이라고도 하고요...” “예? 한센씨병?“ “예. 문둥병이라고 하면 알아듣기 쉽겠지요.” 보건소 의사가 내게 들려준 청천 벽력같은 진단은 교수형 이상의 혹독한 진단이었다.)- “아니? 홍조가, 홍조가...문둥이라니? 문둥이...” 나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기에 줄담배만 거푸 빨고 있었다. 오늘따라 담배 연기가 목구멍을 더 자극을 하는지 나는 재채기를 하고 말았다. 순간 현기증이 나며 눈물이 핑 돌았다. “빌어먹을...”나는 담배꽁초를 장수바위 아래로 집어 던져 버렸다. 그 순간 모자를 깊이 쓴 두 명의 남자가 내 가까이로 다가오고 있었는데 그들의 옷차림은 남루하였으며 배가 고파 힘이 없는지 비틀거리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나는 그들이 산 속에서 가끔 행패를 부린다는 거지들임을 알아차리고 큰 소리를 쳤다. “야! 이놈들! 웬 놈들이냐!” 뜻밖이었다. 그들은 주위에 사람들이 없기에 나를 해치우기가 쉽다고 생각을 하였는지 “문둥이”라고 그들의 정체를 순순히 밝혔다. “뭐라고? 문둥이!” 그 순간 ‘문둥이에게 잡히면 죽는다’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문둥이는 사람의 간을 빼어 먹으면 문둥병이 치료된다고 믿기에 사람을 죽인다’라는 풍문이 나를 섬짓하게 하였기에 이유를 막론하고 바위에서 뛰어 내려 산 아래로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문둥이들도 질세라 나를 쫒아 오고 있었다. ‘잡히면 죽는다!’ 나는 나 자신에게 경고를 하며 죽을 힘을 다해 도망을 치고 있었다. “약수터까지만...아니, 사람들이 있는 곳까지만 도망가면 나는 살 수 있다..” 나는 숨을 헉헉 몰아 쉬며 달렸다. 꽤나 달렸을까, 나는 문둥이들을 따 돌렸다고 생각을 했으며 마침 나를 향해 올라오는 등산객이 보였기에 뛰기를 멈추었다. 가슴이 벌름벌름 거리고 있었으며 숨이 헉헉 막히고 있었다. 땅바닥에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 쉬다가 나를 향해 올라오는 사람을 쳐다보니 뜻밖에도 나의 아들, 강홍조(姜弘照)였다. “아니? 홍조야! 여긴 왜 올라오는 거냐?” “예? 아버지...아버지를 찾으러요.” “나를 찾으러?” 나는 더 놀라고 말았다. 문둥병 환자에게 쫒겨 나려 오는 나를 찾으러 어제 보건소에서 문둥병 진단을 받은 아들이 오다니... 혹시라도 아들놈도 저, 다른 문둥이들과 한패가 되어 아버지를 죽이려고 하는게 아닌가라는 의구심이 생기고 있었다. “아냐! 아냐!” 나는 소리를 쳤다. “아버지! 저예요. 아들, 홍조예요.” “아냐! 아냐! 이놈아!” 나는 소리를 쳤다. - * 그리고 눈을 떳다. 꿈(夢)이었다. 한바탕, 식은 땀나는 악몽(惡夢)이었다. 문둥병 환자들에게 추격을 당하다니? (비록 꿈속에서 일어난 일이라고는 하나 문둥이들 속에 내 아들도 있었으니 더더욱 난처했다. 내 사랑하는 아들도 문둥이들 속에서 멀쩡한 사람들을 잡아 그 간을 빼어 먹으려고 하다니...문둥이가 되면 다 그런가? 나는 눈 앞이 아찔했다.) “아버지? 왜 그러세요?” 나의 아들 홍조는 나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아니다. 아들아!” 나는 뭉클어진 아들의 손을 밀쳐 버렸다. 꿈속에서 나를 죽이려고 하던 문둥이들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아니? 내가 내 아들의 손을 밀쳐 버리다니...’ 나는 나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었다.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들어 나는 다시 아들에게 가까이 가서 그를 덥석 끌어안으며 말했다. “홍조야! 네가 어쩌다가 이런 병에 결렸단 말이냐! 어쩌다가...아! 하늘도 무심하지..하늘도 무심하지...” “아버지! ” 아들도 나의 품에 안겼다. “아들아!-- 아버지!” 아버지와 아들은 울고 또 울었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다고, 하느님도 무심하지 내 아들에게 천형병(天刑病)을 내리다니...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다고...” 나는 흑흑 울고 말았다. * “잠시 나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내 이름은 강석호(姜錫浩)라고 하며 금년(1996년 4월)에 51세가 됩니다. 나는 조상 대대로 경기도 안성에서 농사꾼으로 살아온 토박이랍니다. 불행하게도 나는 16년 전(1979년)에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늙은 어머니와 아들 셋을 거느리고 농사를 짖고 사는 가장이랍니다. 나는 아들만 셋을 두었는데 그들 중 첫째와 둘째 아들은 서울공대와 상대를 다니고 있기 때문에 이곳 안성, 시골 사람들에게는 상상도 못할 경이적인 일이랍니다. -강석호? 아! 서울대학교에 다니는 천재 아들 둘을 가진 사람!.-이라고 안성 땅에서는 알려졌답니다. 그러나 금년에 17세가 된 셋째 아들은 달랐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 대학 입시 준비를 열심히 하고 있어야 하는데, 불행하게도 문둥병에 감염이 되었다는 진단을 받았기에 학교는커녕 안성을 떠나 멀리 소록도로 강제 이송되어야 하는 신세가 됐답니다. 하늘이 내린 천벌을 받아야 하는 가련한 신세가 됐답니다. (“아니, 강석호씨? 당신의 셋째 아들이 문둥병 환자라구요?” “그렇습니다. 내 셋째 아들, 강홍조가 문둥병(나병, 한센씨병)에 걸렸답니다”) * -나의 셋째 아들이 문둥병에 걸린 경로는 이러했다. 잘 나가는 첫째와 둘째 아들에 비해 셋째 아들은 출생부터가 불행했다. 1979년 2월, 어느날이었다. 셋째 아들이 태어난지 겨우 4개월 후, 시름시름 앓던 나의 아내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내 어머니가 살아 계셨기에 내 어머니가 간난쟁이 손자를 죽은 며느리 대신 길렀다. 이집 저집 다니며 젖 동냥을 했으며 우유도 먹여 기르다보니 셋째 아들은 어머니의 따슷한 정을 받지 못했는지 말이 적었으나 아버지인 나를 무척 따랐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셋째 아들은 공부보다는 내가 하는 농사와 축산을 도왔으며, 대학에 진학하기보다 고등학교 만 나온 후 아버지를 대신해 농사일을 전담하겠다고 했다. “그건 안돼! 너도 서울대학에 입학하여 의사가 되거라. 의사가 되는 거다...” 나는 아들을 격려했다. “아닙니다. 차라리 고등학교만 나와 아버지처럼 농사에 전념하렵니다.” “무슨 소리를! 의사가 되거라!” 나는 의사가 되라고 격려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으나 그는 공부보다는 축산과 농업에 흥미를 갖고 안성군 공도읍에 있는 한독 낙농장에 가서 젖소를 살펴보곤 했다. 그뿐인가 소, 말 그리고 닭등을 좋아했기에 그의 옷에는 짐승의 똥이 예사로 묻어 있었다. 소똥 말똥 등을 모아 퇴비로 만들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손등과 다리에 가시나 철사에 찔린 흔적도 곧잘 있었다. 사실, 아내가 없다보니 셋째 아들만이라도 나를 도와 농사일을 같이 해 주기를 은근히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사실이 그러했다. 큰 아들은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둘째 아들은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을 각각 졸업하여 군에 입대를 한 후 어느새 제대를 하자마자 일류 기업체에 취직을 하게 됐다. 그렇다면 셋째 아들만이라도 내곁에서 나의 직업인 농업을 이어 받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을 했다. 셋째 아들이 고등학교 2학년 이학기에 재학중이었다. 농사짖다 얻은 상처의 부위가 쉽게 낳지 않았으며 손가락, 발가락이 점점 뭉클어지고 있었다. 마지못해 나는 아들을 데리고 인근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다. “글쎄요? 피부병이군요.”라고 젊은 의사는 대수롭지 않은 듯이 말하면서 누런색에 하얀 색이 가미된 고약을 처방으로 주었다. 매일 두 번씩 피부에 정성껒 발랐다. 추운 12월과 다음해인 1996년 1월이 되었으나 그 피부병은 조금도 좋아지지 않았기에 안성 병원으로 가서 다시 진단을 받았다. “글쎄요? 꽤 오랫동안, 피부병이?.”라고 젊은 피부과 의사는 우물쭈물하더니 영어로 쓰인 피부약을 처방하여 주었으나 이번에도 별 차도가 없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고등학교 3학년은 정말로 눈 코 뜰새 없이 바쁜 시간임에 틀림이 없었다. 비록 경기도 안성, 시골이기는 하나 대학 입시 공부는 벅차고 힘들기는 마찬 가지었다. 밤낮 없이, 죽을 힘을 다해 공부를 해도 좋은 대학에 입학이 어려운데 셋째 아들은 목장에 가서 젖소나 만지며 비닐 하우스에 가 채소와 꽃을 가꾸는 일을 더 좋아하는 눈치였다. “야! 이 녀석아! 공부를 해야지! 공부를...” 나는 아들을 힐책했다. * 뜻밖의 소문이 돌고 있었다. “안성고등학교 3학년, 강홍조는 문둥병 환자다...그와 가까이 하지 말라!” 라는 소문이 학교에 파다하였으며 마침내 학교 담임 선생이 나를 찾아 왔다. “강 선생님? 아들을 병원에 보내십시오. 문둥병이라고 하는 소문인데....” “......................” 마침내 아들을 데리고 안성 보건소로 찾아가 의사에게 다시 보였더니 문둥병일지 모른다는 말을 했다. 믿을 수 없는 얘기를 들었다. 보건소 의사는 아들의 피부를 자세히 검사했으며 조직을 떼어 슬라이드로 만들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 병원에 보내 정확한 진단을 받겠다고 했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 다시 오라고 했다. 돌아오는 길에 다시 한번 아들의 피부를 바라다보았다. 작년보다 더 악화가 되었는지 손가락이 다소 뭉퉁해 졌으며 눈썹도 많이 빠져 보였기에 문둥병이라고 하는 의심이 더 들었다. 그러나 나의 마음속에는 “아냐! 아냐!”라고 부인을 하고 있었다. 당사자인 아들은 말도 없이 나를 따라 나섰으나 우울한 모습이었다. ‘아들 녀석은 얼마나 마음이 불편할까? 얼마나.....’ 며칠동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정확한 진단이 나올 때까지 학교를 가지 못하자 내 아들은 뜻밖에도 자기 방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 대견했다. 아마도 아들의 마음속에는 더 많은 갈등이 얽혀 있을 것 같았다. 모르기는 해도 그는 자기 방에서 혼자 울고 있었으리라.... 일주일 후(4월 2일)-- 아들을 데리고 약속한 대로 다시 안성 보건소로 갔다. “강석호씨! 아드님의 피부병은 한센씨 병입니다. 나병입니다.” “......................” 나와 아들은 말을 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나병? 한센씨병? 문둥병? 아니 천형병?, 병명이 꼬리를 물고 나의 머리 속에서 원을 그리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코가 찌부러지고 눈 섶이 빠진 거지 차림의 나병 환자들이 눈 앞에서 아른거렸다. “아! 맙소서! 내 아들이 문둥병이라니, 왜?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무슨 죄를!” 나는 보건소 의자를 마구 두드리며 울었다. ‘아! 내 아들이 무슨 죄를? 아냐! 내가, 내가 죄를 지은 거여! 내가...’ 나는 엉엉 울고 있었다. 나병이란, 천형병(天刑病)이라고 부르듯이 하늘이 내린 벌이라고 했다. ‘하늘이 내린 벌....’ 집으로 돌아오면서 울고 또 울었다. 그러나, 내 손을 잡고 따라 오는 아들은 울지 않았다. “독한 녀석.....” 나는 홀로 중얼대었다. 2장: 나의 과거. 나는 1945년 6월, 안성에서 태어났다. 일본 제국이 망하기 불과 두 달 전으로 살기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안성에서 평생을 살아 온 토박이 농사꾼의 후손이었다. -아버지는 1921년에 태어났으며, 1941년에 수원 농림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학도병이 되어 남양군도 과아달카날 전투에 강제로 차출되어 나갔다. 다음 해인 1942년 여름 왼쪽 다리, 무릎 아래가 절단된 채로 안성으로 돌아 왔다. 다리 한쪽을 잃고 목발을 집고 다녔기에 위대한 일본의 신민이라고 하여 안성군청에 특채되었으며 1944년 봄에 결혼, 이듬해에 나를 낳았다. 비록 목발을 짚고 다니기는 했으나 축산과 농업을 지도했기에 안성에서는 잘 알려진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안성에서 멀지 않은 장호원에서 시집온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그러나 1950년, 6.25가 나면서 잠시 안성도 인민군 천하가 되었다. 아버지는 엉뚱하게도 ‘친일파’라는 죄목으로 총살을 당했으며 나는 홀어머니 밑에서 고생을 하여야만 했다. 어머니 혼자 힘으로는 살기가 막막했다. 나는 겨우 겨우 안성 농업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운 좋게 안성 군청에 취직해 몇 개월 다니다가 군에 자원했다. 군대를 마치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 형편이었기 때문이었다. 쉬울 것 같았던 군대 생활도 어처구니없이 월남으로 파병되어 퀴논(맹호부대)에서 일년간 근무를 하면서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귀국하여 보니 어머니는 가난과 고생으로 인해 얼굴이 반으로 쭈글어져 있었다. “어머니!” 나는 불쌍한 어머니를 부등껴 안고 울고 또 울었다. 다행히도 제대 후에 안성 군청, 축산계의 직원으로 복직이 됐다. “강석호 군! 자네의 아버지를 본받아 일 잘하는 축산계 직원이 되어 주게. 아버지는 참으로 성실한 분이었네.” “예. 아버지처럼, 열심히 근무를 하겠습니다.” 과장님에게 다짐을 했다. * 1967년, 축산계장이 개인 사정으로 사임하자 나는 대리로 승진이 됐다. 그 해 6월에 나를 위해 식모처럼 몸을 아끼지 않았던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결혼을 서둘렀다. 안성군 공도면에서 양계장을 경영하는 영세 축산업자의 딸이었다. “우리도 양계장과 젖소가 있는 목장을 한번 소유해 봅시다.” 이것이 나와 내 아내의 꿈이었다. ‘공도에 있는 한독 목장(韓獨牧場)과 같은 큰 규모는 아니라도 그것의 십분의 일쯤 되는 목장은 가질 수 있으리라... 내 평생에...그리고 아들 딸 낳고..힘들게 살아오신 어머니를 모시고...다복하게 살자!’ 이것이 우리들의 꿈이었다. 3장: 내가 처음 방문했던 소록도-(1967년 7월) 돌이켜 생각해 보니 소록도에 대한 애절한 추억이 있었는데 단지 내 마음속에 꽁꽁 숨겨두고 살아 온 셈이었다. 그런데 수십 년이 지난 오늘, 아들이 뜻밖에도 나병 환자로 진단을 받으면서 까맣게 잊혀졌던 소록도의 기억이 솟구쳐 올랐다. * 벌써, 29년 전, 1967년 7월14일의 일이었다. (결혼 한지 불과 한달... “강 계장? 신혼이기는 하지만, 자네, 출장 좀 다녀와야 겠어.” 농정과장이 나를 불러 놓고 한 말이었다. “출장이요? 그런데 어디로 갑니까?” 나는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어, 저기, 전라남도 남단에 있는 소록도로 갔다오게.” “소록도라고 하셨나요? 소록도?” “그렇다네. 아무도 가겠다고 하질 않으니... 아무래도 강 계장이 좀 다녀와야 겠군.” “예, 가지요.” 나는 대답은 하였으나 마음에 내키지가 않았다. 문둥병 환자들이 사는 섬이기에......) * 소록도! 문득 내게 다가오는 것은 눈이 이글어지고 손가락이 떨어져 나간 문둥이들이었다. ‘아니? 잘 못하다가는 잡혀 죽는다는데..하필이면 나더러 소록도에 가라고..‘ -1960년도의 소록도는 수많은 문둥병 환자들이 집단 수용되어 있는 대표적인 병원이었다. 혼란한 남한에는 여기저기에서 문둥병 환자들이 떼를 지어 다녔고 먹고살기 위해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그러기에 문둥병 환자들과 일반 사람들 사이에는 원한과 저주의 장벽이 놓여 있었다.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아야 하는 것이 문둥병 환자였다. ‘문둥병 그리고 소록도’ 하면 우선 떠오르는 시가 있다. 천형병(문둥병)을 한탄했던 시인, 한하운(韓何雲)이 절규한 시, “전라도 길”이었다. [ 전라도 길 -소록도로 가는 길에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 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수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룸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 * 문헌을 찾아보니 문둥병은 오랜 세월동안 인류와 같이 살아 온 하늘이 내린 병이었다. 중국 땅은 물론 중동 땅에도 문둥병은 존재했으며 문둥병 환자들은 일반 사람들과 격리되어 사람이하의 취급을 받아 왔다. 유다지방 그리고 멀리 로마시대에도 문둥병은 역시 상존했으며 유명한 영화 ‘벤허’가 생각났다. -동굴 속에서 문둥이들끼리 살며 어머니를 만나던 모습...그리고 로마의 경기장에서 피를 흘리며 싸우던 그 처절한 모습이었다.- * 다음날, 군청에 출근하니 농정 과장이 나를 불렀다. “내일 아침, 소록도로 가게.” 그리고 나에게 임무를 알려 주었다. - 전라남도 고흥반도와 소록도에서 소출 되는 마늘, 고추 그리고 유자차에 대해서 알아보고 오라는 임무였다.- “아니? 소록도에서 마늘이 생산되나요?” “그렇다니까. 우리 나라에서 생산되는 마늘과 고추 그리고 유자차의 20%가 고흥반도에서 나온다네. 게다가 양계도 한다네.” 과장님은 웃으면서 말했다. “아니, 문둥이가 심은 마늘과 고추를 먹어도 되나요?” 나는 어이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어허! 강계장! 문둥이도 사람이여. 우리와 똑 같은...” “....................” 신혼의 아내에게 소록도 출장을 간다고 말했을 때, 아내도 놀랬는지 “꼭 가나 되나요?”라고 물었다. “가야지, 과장님이 부탁하는데...” * 그날 밤, 나는 한하운의 시집을 읽고 또 읽었다. [나의 반생기란 글이 나의 맘에 들어 왔다. 나의 반생기: -고향 땅에 돌아 왔으나 이 꼴로 집에 갈 수가 없다. 더욱이 동리 사람들의 눈이 무서워서 도저히 밝은 낮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진종일 밤이 오기를 기다렸다. 사람이 안 다니는 들에서 진 종일 굶으며 기다려야 했다. 이제는 정말로 문둥이가 된 설움이 가슴을 찢는다. -] 그리고 연 이어 읽은 보리피리가 눈물을 나게 했다. [ 보리피리.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 니리. 보리피리 불며/꽃 청산(靑山)/어린 때 그리워/피-ㄹ니리 보리피리 불며/인환의 거리/인간사 그리워/피-ㄹ닐리리. 보리피리 불며/방랑의 기산하/눈물의 언덕을 지나/피-리닐리리.] 나는 소리쳤다. “문둥병이란 한번 걸리면 인간 세상과는 영영 멀어지는구나.” 한하운이란 시인이 너무나 애처러웠기에 그의 일생을 살펴보았다. -한하운 시인(1919-1975)은 함경남도 함주 출신으로 본명은 한태영이라고 한다. 함흥 제일 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이리 농림학교를 거쳐 일본으로 가 동경 세이케이 고등학교에서 2년간을 수료했다. 그리고 1943년 중국 북경 대학원 농학원을 졸업했다. 1944년부터 함경남도 도청 축산과에 근무했으나 1945년 나병의 악화로 인해 서점을 경영하다가 1948년 월남하여 유랑의 생활을 하게 되었다. 나병에 투병을 하면서 그는 성혜원, 신명 보육원을 설립하여 운영했으며 1953년에는 대한 한센 연맹 위원장으로 나환자 사업을 했다. 1966년에는 한국 사회 복귀 협회장으로 무하 문화사라는 출판사를 경영했다. 한편 그는 전라도길, 보리피리, 한하운 시전집등을 출판했으니 나병 환자로서 투병과 문학활동을 같이 한 비운의 시인이었다. 그는 나병에서 회복되기를 갈구하였는데 “파랑새”라는 작품이 그 대표적이다. 시: 파랑새. 나는/나는/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푸른 들/날아 다니며/푸른 노래/푸른 울음/울어 예으리/ 나는/나는/죽어서/파랑새 되리.- 나는 이 시를 읽으며 “아-한하운 시인은 자유의 몸이 되고 싶어 파랑새를 노래했구나.”하고 감탄했다. 나는 한하운의 시를 읽으며 소록도는 낭만적인 섬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토록 무섭게 느껴졌던 문둥병 환자들이 한하운과 그의 시를 통해 동정이 가는 측은한 이웃으로 느껴지고 있었다. * 다음날 아침 나는 아내의 배웅을 받으며 안성을 떠나는 시외 버스를 탓다. 버스는 평택을 지나 천안으로 가 그곳에서 나는 호남선 열차를 타고 대전을 거쳐 광주에 도착하니 오후 2시였다. 다시 순천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순천에 도착하여 허겁지겁 고흥반도로 가는 직행 버스를 타고 녹동 항구에 도착하니 오후 5시였다. 여름이기에 아직도 해는 서편에서 이글거리고 있었다. 녹동 항구에는 많은 여관들이 있었으며 싱싱한 횟집도 여러군데 있었다. 소록도에는 여관이 없기에 녹동에서 하루 저녁을 지내야 했다. “소록도에는 왜 가시라우?” 30대 초반의 여관(녹동)집 아주머니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예. 출장을 갑니다. 마늘과 고추 농작을 직접 보려구요.” “공무원이시군요.” 여관 주인은 여관방을 열어 주면서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덧붙혔다. “이곳, 녹동과 소록도는 불과 600미터의 바다를 두고 떨어져 있는 가까운 거리이지만 소록도 주민과 녹동 주민들의 사이는 수 만리나 됩니다. 저희 녹동 여관에서는 나병 환자도 받습니다마는 웬만한 여관에서는 나병 환자는 받지 않습니다.” “그러시겠지요. 나병 환자를 받으면 아무래도 손님이 불쾌하겠지요.” 나는 혹시 이 여관의 이불에 나병 균이 묻어 있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여관집 아주머니의 말에 의하면 가끔 나병 환자가 소록도에서 탈출하여 녹동 항구로 나온다고 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하나 도와주지 않기에 배가 곺아 도적질을 하다가 주민들에게 잡혀 몰매를 맞다가 죽은 경우도 있다고 했다. 반대로 문둥병 환자들에게 잡혀 죽임을 당한 아이들도 더러 있기에 문둥병 환자들은 이곳 녹동 항구에서 발을 못 붙히고 여수나 광주로 찾아간다고 한다. “그러면 소록도에 있는 나병 환자들도 그럴까요?” 나는 걱정이 돼 여관집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아- 처음이시군요? 양성 나병 환자들은 병원과 철책을 친 ‘양성 나환자 촌(病舍地帶)’에 격리 되어 있구요. 음성 나환자는 섬 밖으로 나가 정착을 해도 좋으나 그들을 받아 주는 곳이 없어 할 수 없이 소록도에서 농사를 짓기도 하고 마늘을 재배하는 거지요.” 여관집 주인이 설명을 해 주었기에 이해 할 수가 있었다. 전라도 지방에는 나병 요양소가 몇 군데 더 있기는 하지만 많은 나병 환자들이 아직도 방황을 하고 있기에 사회적인 문제가 된다고 했다. 마침 박정희 대통령은 강력하게 나병 환자들을 단속하며 그들의 삶을 향상시켜 주고 있다고 했다. 문둥병 환자, 한하운 시인 그리고 사람 잡아 먹는 문둥병 환자들을 꿈속에서 만나면서 나는 뒤숭숭한 밤을 지냈다. * 아침이 되어 나는 눈을 떳다. 그리고 여관을 나와 녹동항구로 갔다. 녹동 항구는 꽤 나 큰 부두가 있었으며 소록도로 가는 여객선(철갑으로 두른 통통선), 거금도로 가는 여객선 그리고 멀리 거문도로 가는 더 큰 여객선이 있었다. 그리고 남해 안을 순항하는 여객선들이 생선 비릿내 나는 부둣가에 어지러히 정박해 있었다. 소록도는 불과 600미터 밖에 있었으며 눈으로 빤히 보이는 작은 섬이었다. 동과 서로 길게 놓인 마치 작은 사슴(小鹿)처럼 생긴 섬이었다. 얼마 안 되는 배싻을 내고 통통선에 타니 20여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소록도로 면회를 가는 가족과 장삿꾼 들이었다. 불과 7분만에 통통배는 소록도 동쪽에 있는 선착장에 도착했다. 녹동 항구에서 바라본 소록도는 무척 아름다웠는데 청정 해옆을 가르고 도착한 소록도 입구에서 나는 감탄을 하고 말았다. “아-여기는 천형의 섬이 아니고 천국이다” 나의 예상과는 완전히 다른 아름다운 섬이었기 때문이었다. 소록도! -나병 환자들을 위한 국립 소록도 병원이 있는 소록도는 우리나라 최남단 전남 고흥반도의 끝자락 녹동항구에서 불과 600미터 떨어진 섬으로 섬의 모양이 “눈망울이 큰 어린 사슴”과 비슷하다고 하여 소록도라고 불리운다. 섬의 면적은 여의도 면적의 1.5배인 15만평 정도로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자연 환경과 해안 절경 그리고 역사적 기념물로 인해 전남의 관광지가 되고 있다고 한다. 소록도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사슴의 머리에 해당되는 동쪽에 있는 지역(약 1/3 정도의 크기)을 소록도 1번지(官舍地帶)라고 부른다. 그리고 사슴의 몸통에 해당되는 서쪽으로 향한 나머지 2/3가 소록도 2번지(病舍地帶)이다. (소록도 1번지에는 안내소, 소록도 병원, 직원 숙소, 우체국, 학교 분교등 공공 기관이 있으며 일반 사람들도 어느 때고 방문을 할 수가 있는 곳인데 비해 소록도 2번지는 한센씨 병자들이 사는 곳이다. 한센씨 병자를 소록도 주민이라고 부른다. 소록도 주민들은 음성 나환자와 양성 나환자로 구분이 된다. 음성 나환자들은 병에서 치료가 된 사람들이기에 정상 사람과 같으나 얼굴과 손발이 뭉글어져 장애인이라고 불리운다. 장애인이기에 섬 밖에 나가도 할 일이 없으며 가족들도 환영을 하지 않으니 할 수 없이 정부에서 주는 보조금을 받으며 이곳 소록도에서 마늘 농사나 고추 농사 등을 하며 살고 있다. 물론 상당수의 음성 나환자들은 결혼도 하였으며 개중에는 자식도 갖고 있다. 그러나 양성 나환자들은 철저히 격리되어 섬 깊숙히 있는 나환자 촌에서 살면서 소록도 병원에 정기적으로 가서 검진을 받는다. 양성 환자들이 사는 곳에는 철조망이 쳐 있었으며 제 2 안내소가 있어 외부사람들과 면회도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이루어 졌다. (주: 과거에는 수탄장(愁嘆場)이라고 불렀으며 이곳에는 철조망이 쳐 있었다. 그러나 그후 점차적으로 철조망은 없어졌다.) 유명한 소록도 중앙교회, 중앙공원, 단종대, 생체 실험실등의 시설이 이곳 소록도 2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1990년 이후에는 이 규칙이 많이 완화됐으며 양성 나환자도 그 수가 격감했기 때문에 면회가 수월했다. 이 소설에서는 이 문제를 비교적 온화하게 취급했다. ) * 1916년 일본 명치 천황이 보내준 기금으로 설립된 소록도 자혜의원이 지금의 효시라고 한다. 병원 뒤에 있는 소록도 중앙 공원은 1936년 12월에 준공되었는데 수많은 나환자들이 강제동원 되어 노동력을 제공했으며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천형의 섬은 6.25와 5.16을 거치면서 ‘눈물의 섬’, ‘한의 섬’, ‘역사의 섬’으로 기록되고 있다. 눈망울이 큰 작은 사슴의 섬에는 50-100년생 수목으로 우거져 있었다. 향나무, 황금 편백을 비롯하여 노송, 삼나무, 히말리야시다, 동백, 팔손이나무, 치자나무, 피라킨타 금목서등 백여종에 이르는 관상수가 빽빽이 들어서 있었다. 섬의 80%가 상록 활엽수와 침엽수로 울창하게 뒤덮혀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삼림과 해변이 잘 보호되어 있어서 정취가 뛰어나며 걸어 다니면서 섬 주변을 둘러 볼 수 있게 길이 잘 닦여 있었다. 우체국, 관공서, 교회, 성당 원불교 그리고 초등학교 분교도 있었다.- * 소록도 입구에 있는 제일 안내소로 찾아가 여기에 온 용건을 말했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소록도 행정계장을 소개해 주었다. “아-소록도에서 생산되는 마늘에 대해 알고 싶다고요?” 의외로 계장은 친절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는 문둥병 환자들만 살고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여기에는 음성 나환자가 많습니다. 음성 나환자란 문둥병에서 치료가 되었으나 육지로 가서 살수가 없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결국 이곳에서 남아 농사, 특히 마늘과 고추을 재배해 육지에 내다 판답니다. 고흥군에서 수거를 하러 오기도 하고요....” “예? 음성 나환자들이 살기 위해서?” 나는 깜짝 놀랐다. “그렇습니다. 돈을 벌기 위한 수단뿐만 아니라, 마늘이 문둥병 치료에 좋다고 하여 문둥병 환자들의 치료제로도 공급이 된답니다.” 소록도 계장은 친절하게 설명했다. “문둥병의 치료제로요?” 나는 되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마늘은 문둥병 환자와 음성 나환자에게 아주 필요한 것이지요. 원래는 고흥에서 재배를 하였는데 이곳 소록도에서도 재배를 하는 바람에 고흥 주민들과 소록도 주민들 사이에 마늘 전쟁도 있었지요. 죽이고 살리는 싸움이었지요.” “마늘 전쟁?” “그래서 정부에서 책임지고 마늘을 사 준답니다.” 계장이 보여준 마늘과 고추밭은 꽤나 넓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머리에 수건을 쓰고 호미로 흙을 다듬고 있는 음성 나환자를 만나게 되었다. 말이 음성 나환자이지 손과 발이 뭉클어져 있었으며 눈섶도 많이 없었다. 얼굴에는 아무런 희망도 없는지 무뚝뚝했으며 인사도 하지 않았다. 소록도의 토양이나 안성의 토양이나 별반 차이는 없어 보였다. “마늘을 재배하는 특별한 이유가 또 있습니까?” 나는 소록도 계장에게 물었다. “뭐, 특별한 이유는 없으나 물이 잘 빠진다는 것밖에...” 생각보다 빨리 마늘 경작에 대한 정보와 토질등을 알아 낼 수가 있었다. 소록도 병원 식당에서 점심을 얻어 먹었다. 의사, 간호사 그리고 다른 직원들이 여기저기에서 보잘 것 없는 점심 한끼를 먹고 있었다. 나환자 식당은 물론 다른 곳에 있었으며 음성 나환자 그리고 소록도 직원들의 가족들은 각각 관사와 개인 집에서 식사를 한다고 하니 마치 안성의 한 부분에 찾아 온 느낌이었다. 그러나, 점심을 먹은 후 호기심을 갖고 기웃기웃 혼자 거닐며 구경한 소록도는 내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주었다. 소록도 직원과 음성 나환자들이 사는 곳은 소록도 입구와 가까웠으며 그곳에는 우체국, 면회소, 국민학교등이 있었다. 그러나 조금 더 섬 중앙으로 들어 가보니 교회가 보였다. 이곳부터가 바로 소록도 2번지에 해당되는 곳이었다. 단층으로 된 수 많은 집들이 나무 숲에 싸여 있었으며 꽃들도 여기저기에 피어 있었다. 음성 나환자 촌이라고 하였다. 나환자들은 나에게 아주 친절했으나 말이 없었다. 중앙교회 뒷 편쪽으로 철조망이 쳐 있었으며 그 철조망 안으로는 작은 시멘트 가옥들이 여기저기에서 보였는데 이곳을 소위 “양성 나 환자 촌(陽性 癩患者村)”이라고 했다. 아니 양성 환자들이 사는 입원실이라고 했다. 지금은 그래도 좋은 시설에 괜찮은 음식이 나오며 현대식 약품이 제공되지만 일제 시대에는 마치 도살장과도 같았다고 했다. 강제로 거세를 시켰으며 상태가 안 좋으면 그대로 죽게 방치한 후 화장을 해 버렸다고 했다. ‘인간 도살장! 인간 화장터!’였다. 철조망이 시작되는 입구에 제 2 안내소(경비소)가 있었다. 그리고 그 철조망과 출입문에는 “당국의 허락 없이 출입을 금함”이라고 쓰여 있었다. 안내소 안쪽으로 얼굴이 이글어진 양성 나병 환자들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다 보고 있었다. ‘아-저 사람들이 바로 양성 나병 환자들이구나......천형병 환자들...’ 마침 안내소에 아무도 없는 것 같기에 철조망 안으로 살그머니 들어가려고 했는데 언제,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험상궂게 생긴 안내원이 달려와서 나를 제지했다. “안돼! 들어가지 말라구!” “예? 안된다구요?” “그래! 그리고 젊은 친구! 나병 환자들과 절대로 악수를 하면 안돼! 그리고 말을 할 때는 반드시 1.5미터 거리를 두고 말 하라구. 침이나 피부에 묻은 진물 속에 나병균이 득시글 거린단 말여, 알겠나!” “예.” 나는 예상밖의 저지에 깜짝 놀라고 말았는데 안내원의 설명을 듣고 보니 양성 나 환자촌에 출입을 금지하는 것을 이해 할 수가 있었다. 잘못 들어갔다가 나병에 전염될 수가 있으며 문둥병 환자들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을 수가 없다는 말이었다. 낡은 집들 속에는 문둥병 환자들이 음식도 만들어 같이 먹으며 잠도 같이 잔다고 한다. 그리고 진료를 받기 위하여 허락을 받고 철조망 밖으로 나와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으며 약을 타간다고 했다. 가끔 내 앞에 보이는 환자들은 듣던 대로 얼굴이 이글어 지거나 손과 발가락이 떨어져 나갔으며 피부에 진물이 흐르고 있었다. 어느 누구의 얼굴에도 웃음은 없었다. 이 세상을 포기하고 그저 하루 하루를 연명해 가는 그런 불행한 모습이었다. 호흡을 제대로 못하는 환자도 간간히 보였으며 다리를 절며 기어다니는 환자도 있었다. 갑자기 제2 안내소 입구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몇 사람의 문둥병 환자와 소록도 병원 직원이 하얀 모포에 싼 죽은 시체를 구루마에 싣고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어느 누구도 울지 않았으며 일글어진 얼굴들은 무표정할 뿐이었다. “양성 환자가 또 죽었군요. 20년 전에 이곳에 들어왔는데...그간 한번도 섬 밖으로 나간 적이 없었지요. 친척이라곤 하나도 없는지 아무도 찾아오지도 않았구요. ” “20년 동안 한번도 못나가다니요?” “양성 환자는 못나갑니다. 음성 환자들은 바깥 세상에 나갈 수가 있지만....” “어디에다 매장을 하나요?” 나는 가슴 한 구석에 뭉클 한 덩어리가 엉키고 있음을 느꼈다. “아-매장은 하지 않고, 화장을 해 납골당에 모아 두지요.” “화장을?” 나는 허탈한 마음을 느끼고 있었다. 소록도에 한번 들어오면 음성 나환자가 되지 않는 한 이곳에서 죽어 한 줌의 재가 되어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불행하게도 나는 양성 나환자 촌 입구에서 죽어 나가는 나병 환자를 내 눈으로 보게 되었으니 소록도가 마치 죽음의 섬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 -나환자들의 천국이라는 소록도에는 탑과 비석이 유달리 많았는데 그곳에는 한과 눈물이 어려 있었다. 섬 입구에 서 있는 ‘순라탑(殉癩塔)’은 6.25 전쟁 때 순직한 동료들을 기리는 탑이고 ‘애환의 추모비’는 해방의 소용돌이 속에 희생된 영혼을 위로하는 비다. 선정을 베푼 제 2대 하나이(花井善吉)원장 창덕비는 오늘도 변함없이 서있지만 환자들을 혹독하게 다루었던 제 4대 수호(周防正秀)원장의 비는 없어지고 그 자리에 소록도 병원 제 40주년 기념비가 서 있다. 뭐라고 해도 소록도의 상징탑은 ‘구라탑(救癩塔)’이다. 백의의 천사가 창으로 나병균을 찌르는 모습을 한 구라탑은 한센씨 병의 소원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1963년, 국제 웍 캠프단이 오마도 간척 공사에 봉사 활동을 하며 하루 속히 한센씨병이 근절 되기를 바라면서 세운 탑이라고 한다. 다소 낡은 모습을 한 소록도 국립 병원을 구경했다. 그리고 뒷 편에 있는 중앙공원으로 올라가니 공원이라기보다 성스러운 제단 앞에 선 느낌이었다. (1936년, 일제는 공원을 조성하면서 나환자들을 강제 동원하여 그들의 피와 땀과 눈물을 짜 냈다고 한다, 무려 3년, 연인원 6만 명의 나환자들이 동원돼 비탈진 산을 깎아 6천평 규모의 용지를 조성하고 인근 섬에 있는 암석을 운반했다고 하니 ....그 결과로 수많은 문둥병 환자들이 죽었다고 했다.) 구라탑을 뒤로하고 돌계단을 오르니 슬픈 시인 한하운의 비가 눈에 띄었다. 땅에 길게 누운 이 시비에는 그의 대표작, 보리피리가 새겨저 있었으며 비바람 눈보라 속에서도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내가 그날, 가장 놀랐던 것은 이 적은 소록도에 여러 개의 교회가 있었으며 천주교의 종탑도 보였다. “하늘이 내린 천형병으로 이 세상에서 사느니 어서 죽어 죽음도 없고 영원한 삶만 있다고 하는 천국으로 가리라.”라는 나병 환자들의 염원이었으리라고 생각을 했다. “문둥병은 과연, 하늘이 내린 벌인가?” 그들은 이렇게 절규하고 있었으며 한하운의 시를 읽노라니 모든 것이 한과 눈물뿐이었다. - 오후에 나는 통통선을 타고 600미터 밖에 떨어져 있는 육지, 녹동 항구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잠뱅이에 짐을 싣고 먼저 오른 장사꾼들과 육지로 나들이 가는 소록도 병원 직원들 몇이 나를 알아 보고 말했다. “무엇을 하고 갑니까?” “예, 소록도에서 나는 마늘과 고추 농사를 시찰하고 갑니다.” “마늘? 고추?” 그들은 뜻밖이라는 듯이 나를 쳐다 보았다. “붕-붕-” 통통선은 청정 해역을 혜치고 녹동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눈에 빤히 보이는 녹동의 방파제와 두 개의 등대가 나의 눈을 어지럽혔다. 소록도에 사는 문둥이들에게는 저 등대를 볼 때마다 고향에 사는 부모들이 보고 싶으리라... 고향이 그리워도 돌아가지 못하는 문둥병의 신세가 얼마나 한스러웠을까? 잘 못 나갔다가는 맞아 죽을 수도 있는 문둥이의 신세... 그들에게 보이는 저 등대는 고향을 생각하는 등대일 뿐이었다. 불과 7분만에 통통선은 녹동 항구에 도달했으며 나는 다시 묶었던 그 여관집을 향해 걸어갔다. 생선 비릿내가 코를 쏘았으며 대낮에 막걸리를 먹고 주정하는 사나이들의 고함소리가 내 뒤에서 들렸다. 배로 7분 거리, 600미터의 바다가 마치 먼 태평양보다 더 멀고 험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같은 한국 속에 외로이 떠 있는 인간 수용소라고 생각을 하면서 여관집으로 돌아 오니 아주머니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일은 잘 보셨나요?” “예. 그런데 소록도란, 슬픔과 한 그리고 눈물이 가득 고여 있는 아름다운 섬 속의 호수라고나 할까요...” 나는 한 숨을 쉬면서 아주머니에게 나의 슬픈 마음을 전하였다. “눈물이 고인 섬 속의 호수라?” “예, 피 눈물과 한이 고인 호수라고요.” “어서 저 소록도와 녹동을 연결해주는 다리라도 건설한다면 좋으련만....” “예? 다리를 건설하다니요? 아주머니!” “예. 녹동과 소록도는 저 600미터 밖에 안되는 바다로 인해 너무나 멀게만 느껴진답니다. 다리가 놓여 서로 왕래를 하며 마음을 터 놓는다면 더 이상의 원한과 피비릿내 나는 싸움도 없겠지요. 더 이상 문둥병자들을 학대해서는 안 된답니다. 문둥병 환자가 된 것도 억울한데 평생 섬 밖으로 나오지 못하다니....평생, 한을 품고 살다가 죽어야 한다니....” 나는 이 아주머니가 뚱딴지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을 했다. 아니 천사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을 했다. ‘녹동항구와 소록도 섬을 연결하는 다리를 놓고 서로 왕래하며, 마음을 터 놓고 산다면 원한이 씻어 진다고 하니...‘ 다음날 아침 나는 버스를 타고 고흥 군청으로 가 고흥반도에서 생산되는 마늘과 고추 그리고 토지에 대해 많은 정보를 구했다. 다음 날 버스와 기차를 타고 안성으로 돌아 오니 밤 10시가 넘은 시간이었으며 아내와 어머니는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러나 가끔 흘끔 흘끔 바라다 보는 것을 보니 혹시라도 내 몸에 문둥병이라도 옮겨졌나 의심을 하는 듯 했다. 그날 밤, 나는 곤하게 잠이 들었으나 간간히 꿈을 꾸었나보다. -녹동 항구에서 본 소록도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문둥병 환자들의 모습이었다. 눈이 찌그러졌으며 손가락이 군데 군데 없어진 곳에 덕지덕지 마치 코키리 피부처럼 비늘이 돋아 있었다. 그리고 가끔씩 나를 바라볼 때마다 “혹시라도 저 자들이 나를 잡아 먹으려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며 흠찢 흠찢 놀라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을 뿐 순박한 사람들이었다. 순박한 사람들.....- 다음날, 아침 나는 안성군청에 출근하여 농정 과장을 만나 출장보고를 했다. “수고했어. 강석호 서리. 이젠 나가봐도 좋네.” 라고 말했다. “과장님? 그런데 왜 하필이면 마늘에 대해...아니 마늘을?” “어-마늘을 이곳 안성에서도 대대적으로 재배하여 농가 수입을 올리려고 하네.” “농가 수입으로...그렇다면, 소록도에 사는 음성 나환자는 어쩌시려고요?” “어? 음성 나환자?” “예, 우리가 마늘 농사를 하면 그들 문둥이들은 굶어 죽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나? 강서리?” “과장님? 하필이면...문둥이 코 구멍에 밖힌 마늘을 빼먹으려고 합니까?” “어? 그게 무슨 소린가?” 과장님은 나를 쳐다보았다. “예. 벼룩이 간을 빼 먹는거나 마찬가지지요. 음성 나환자들은 마늘을 재배하여 나환자 치료도 하고, 그 수입으로 근근히 살아가야 하는데, 우리가 마늘을 재배하면 그들은 굶어 죽습니다. 과장님...” “...............”- 이상이 29년 전 내가 처음으로 방문했던 소록도의 기억이었다. * 참으로 얄궂은 운명이었다. 아니 하늘의 형벌이었다. 1967년 7월, 더운 여름 나는 이렇게 소록도를 다녀왔는데.... 그리고 까마득하게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살았는데.... 오늘, 29년 후, 1996년 4월2일--- 청천 벽력이지! 청천 벽력... 그 때 보았던 그 문둥병 환자들과 그들의 한 맺힌 설움이 오늘부터는 내 것이 되다니... 아니! 어쩌다가 아들이 그 무서운 문둥병 환자가 되었나. 29년 전 내가 방문했던 그 소록도에서 마늘을 검사하다가 내 손에 묻었을지도 모르는 나병균이 내 아들에게 전염이 되었단 말인가? 아니면 내가 전생에 지은 못 된 죄로 인해 내 아들에게 이런 병이 주어 졌나? 소록도! 까마득하게 잊혀 졌던 그 소록도와 나의 피치 못할 운명이 그 때부터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었나 보다. 29년 동안, 조금씩, 살그머니 살그머니.... 나는 아들의 손을 잡고 울고 또 울었다. 그리고 못난 아버지의 죄 탓이라고 용서를 빌고 빌었다. 내 잘못이라고... 4장: 한센씨 병이란?(Leprosy) 하늘이 무너질 듯한 ‘나병’ 진단 결과를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아들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와 세브란스 병원,‘나병 연구소’를 찾아갔다. “강 선생? 보건소의 진단이 만족치 않으면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유준 교수라는 분이 문둥병의 대가라고 하니, 세브란스 병원으로 찾아가 정확한 진단을 받아 보시죠.” 라고 안성 보건소 의사가 귀뜸을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 한센씨병(나병, 문둥병)이란 문둥병균에 의한 만성 전염병이라고 한다. (Hansen'sdisease is a chronic infectious disease caused by the Mycobacterium leprae. Leprosy is primarily a granulomatous disease of the peripheral nerves and mucosa of the upper respiratory tract. Skin lesions are the primary external symptom. Left untreated, leprosy can be progressive, causing permanent damage to the skin, nerves, limbs, and eyes.) 역사적으로 나병은 BC 300년 이래로 고대 중국, 인도 이집트에도 기록이 되어 있으며 로마시대 그리고 유대인들을 비롯한 성경에도 기록이 되어 있다. 나병균은 결핵균과 아주 유사하며 나병은 크게 세가지, Lepromatous(나균형 나병), tuberculoid(결핵성 나병), 그리고 혼합형(borderline leprosy)으로 나누인다. 문둥병이 발병되면 처음에는 피부에 반점이 생기게 되며 고름이 생기기 시작한다. 눈썹도 빠지며 눈동자가 노려보는 것처럼 된다. 성대도 변하며 신경도 마비되며 호흡도 가빠지게 된다. 나중에는 신체의 부분 부분이 떨어져 나가며 손가락 발가락 마디가 떨어져 나가며 코도 문들어지게 된다. 얼굴 모양은 흉하게 이그러져 가며 늘 눈에는 눈물이 흐르게 된다. 마지막에는 균이 뇌로 들어가 혼수상태로 빠지며 결국 죽게 되는데 대략 20-30년을 고생하다가 죽게 된다. 그래서 이 병에 걸리면 죽은 자로 취급을 했으며 가정에서도 쫒겨나고 사회에서도 격리되어 일반 사람들과는 교제를 할 수가 없게 된다. 문둥병자들은 길을 걸을 때도 “나는 부정하다”라고 고함을 치며 다니게 했다. 다행히 현대 의술은 나병을 완치시킬 수도 있다고 한다. 치료약으로는 라이팜핀(Rifampin),클로파지민(Clofazimine),그리고 오래전부터 쓰여 온 댚손( Dapsone)을 병합하여 사용한다. 문제는 양성 나환자가 치료되면 음성 나환자로 되는데 병을 앓았던 환부가 흉하게 남기에 사람들과 사귀기가 힘이 들며 고독하게 마련이다.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미생물학과에서는 나병의 전염 경로를 알기 위해 병아리 발바닥에 나병균을 심어 주어 나병을 일으킨 예도 많으나 아직도 전염 경로가 명확하게 판명되지 않았다고 유준 박사는 설명해 주었다. 세계 보건기구와 현대 의학의 노력으로 이 지구상에서 나병 환자는 점점 줄어들고 있으며 나병 환자에 대한 인식도 점점 좋아지고 있다고 유준 박사는 덧 붙혀 주었다. * 마침내, 유준 박사는 나와 아들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강선생님, 내가 봐도 분명, 한센씨병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하늘이 내린 병도 아니며 단지 전염병일 뿐입니다. 소록도에 가서 열심히 치료를 한다면 분명히 치료가 될 것입니다. 실망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강홍조군! 열심히 치료를 받게나. 분명, 완치가 될 걸세.“ “감사합니다. 유박사님.” 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하나님을 믿습니까? 강선생?” “아니요.” 나는 당황스럽게 대답을 했다. “문둥병도 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유박사는 뜻밖의 말을 했다. “예? 하나님의 뜻이라구요?” “그렇소.” “아닙니다. 하늘이 내린 벌이란 말입니다.!” 나는 큰소리로 대답을 했다. “벌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란 말이지요. 계획이란 말이지요.” “예? 계획이라고요. 계획! 그런 계획을 왜 내 아들에게...왜요!” 나는 큰 소리로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열심히 치료를 하십시오. 자 안녕히 가십시오.” 유박사는 나와 아들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세브란스 병원을 나오면서 다소 불쾌한 마음도 있었으나 그래도 약을 잘 사용하면 치료가 된다고 하는 유박사의 말이 큰 위로가 되었다. ‘하나님의 뜻이요 계획이라니...’ 나는 그 의미를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유준 박사가 말하는 하나님 따위에 대해서는 아는 바도 없었고 흥미도 없었다. * 어쨋거나 1996년 4월은 나와 내 아들에게 “잔인한 달”이었다. (주: 한센씨 병은 결코 유전병이 아닌 박테리아에 의한 전염병이다. 한센씨 병은 일단 댚손과 라이팜핀 치료를 시작하면 다른 사람에게 전염을 시키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한센씨병은 의학적인 병이라기보다 사회적인 병이 되었다. 다시 말하면 완치가 되더라도 신경계통의 마비와 외부의 기형으로 인해 장애인이 되기 때문에 홀로 독립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완치된다고 해도 여전히 가족과 사회로부터 냉대를 받게 돼 한센씨 환자들끼리 정착을 하여야 하는 그런 병이다.) 5장: 나병이 발견되기까지... -다시 1967년 나의 신혼 시절로 돌아가렵니다.- * 소록도를 다녀온 후 안성군청, 농정 과장은 안성군 부업으로 마늘을 심으려던 사업을 추진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문둥이 콧구멍에 밖힌 마늘을 빼 먹으려던 계획’을 철회한 듯 했으며, 웬일인지 과장은 나를 전보다 더 아껴 주었다. 소록도에 관한 기억은 완전히 내 머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2년 후 1969년 큰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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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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