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내고향은 소록도 파트 2

2012.01.23 12:25

연규호 조회 수:587 추천:26

5장: 나병이 발견되기까지... -다시 1967년 나의 신혼 시절로 돌아가렵니다.- * 소록도를 다녀온 후 안성군청, 농정 과장은 안성군 부업으로 마늘을 심으려던 사업을 추진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문둥이 콧구멍에 밖힌 마늘을 빼 먹으려던 계획’을 철회한 듯 했으며, 웬일인지 과장은 나를 전보다 더 아껴 주었다. 소록도에 관한 기억은 완전히 내 머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2년 후 1969년 큰 아들(신조)을 보게 됐다. 그리고 3년 후 1972년 둘째 아들(창조)을 얻었다. 안성 군청의 축산 계장 서리인 나에게도 문제가 생기고 있었다. 고등학교만 졸업한 나에게는 진급의 기회가 점점 힘들어 지고 있었음은 물론 잘 못하다가는 대학졸업자에게 밀려 나야했다. 나는 살기 위해 독학으로 영어, 그리고 축산업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1978년 10월 나는 셋째 아들(홍조)을 낳았다. 호사다마라고 하였을까? -셋째 아들을 낳은 후 나의 아내는 몸이 붓고 숨이 차기 시작했다. 심부전증(Congestive Heart Disease)이라고 해서 강심제를 복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4개월 후, 아내는 내가 군청에서 근무하고 있는 도중에 손도 못 써보고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다. 병원 응급실로 달려가 보니 이미 아내는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었다. 아내가 죽다니! 아내가..... 4개월 된 핏덩어리를 남겨두고 이 세상을 떠나다니... 작은 목장을 하나 갖고 싶어 했던 나의 아내는 아들만 셋 낳고는 세상을 떠나버렸으며 갖난애를 기르려고 하니 암담하였다. 이빨이 없으면 잇몸으로 먹는다고, 아내가 죽고 보니 결국 나이 많은 할머니(나의 어머니)가 갖난 애를 맡아 길러야 했다. 셋째 아들이 내게는 너무나 마음 아픈 존재였다. 불쌍했다. 젖을 제대로 못 먹다보니 영양 실조가 되었는지 크지도 못했다. “강계장! 자네 심봉사같은 꼴이 되었구먼...그러지 말고 재혼을 하지 그래.” 농정 과장이 내게 말했다. “무슨 말씀을?” 아내의 죽음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비록 고등학교 졸업이 고작인 나도 열심히 근무를 했기에 축산 계장으로 안성군에서 잘 알려지고 있었다. 낙농장, 양계장 그리고 비닐 하우스를 두루 다니며 농업과 축산의 기술을 가르쳐 주는 일이 나의 임무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 밤늦게 까지 책을 읽고 공부를 하여야 했으며 영어도 열심히 공부를 했다. 1980년 그리고 1988년, 서울 올림픽이 거행되었을 때, 내 이름은 안성에서 꽤나 알려지고 있었다. -첫째 아들이 안성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입학하여 어느덧 2학년이 되었으며 그리고 2년 후 작은 아들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입학을 했다. ‘안성에서 서울대학교에 두 아들을 입학시킨 아버지, 강석호씨, 천재 아들을 둔 강석호씨’로 유명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을 하는 것도 힘든데, 서울 대학교에 두 아들이...입학 그리고 졸업을 하다니.....’ 큰 아들은 졸업 후 군대에 입대하였으며 작은 아들은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1995년, 큰 아들은 승승장구하여, 서울에 있는 대기업에서 과장 진급을 하더니 급기야는 사장의 딸과 결혼을 하여 미국, 뉴욕에 있는 지사로 파견 나가게 되었다. ‘대기업의 사위로 뉴욕 지사에 파견 나가다니...’ 안성에서는 큰 화제 거리였다. “와! 강석호씨. 부럽구먼...” 나는 몇 년전 안성 군청에서 사임하고 안성 근교에서 규모는 적으나 축산업을 하고 있었다. ‘내가 갖고 있었던 꿈이었다. 그리고 죽은 아내의 꿈이었다.“ -둘째 아들은 서울 상대를 졸업한 후 군에 입대를 하였으며 역시 대기업에 취직이 되었다. 큰 아들보다 오히려 작은 아들이 대기업에서 더 환영을 받고 있는 듯 했다. 군에서 제대를 하는 대로 그는 대 기업에 복귀하여 기획실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가지 원통한 것은 큰 아들이 미국으로 가기 전인 1994년 말, 나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다. 집안에 여자가 없다보니, 집안 일을 나와 막내 아들이 해야 했는데 뜻밖에도 막내 아들은 나를 잘 도와 줬다. 집안 청소, 빨래, 그리고 축산업도 도와 줬다. 서울 공대와 상대를 나온 훌륭한 두 아들이 있다고는 하나 이들은 멀리 서울에 가 있어서 집안 일이나 축산업을 같이 하자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막내 아들은 달랐다. “아버지, 나는 요. 대학에는 안가고 소와 닭을 기르고...아버지하고 농사를 지으렵니다.” “뭐시? 너도 서울대학에 가야지. 너는 의사가 되거라. 의사가.” “의사요?” “그래.” “아뇨. 나도 아버지 처럼 농업을 하렵니다.” 처음에는 말렸으나 아내도 없고 보니 농사 일을 같이 하며 집안에서 나와 같이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을 했다. 아들 세놈 중, 하나쯤은 내 곁에 두고 살고 싶었다. * 돌이켜 보면 쥐구멍에도 볓들 날이 있다고 하듯이, 1993년 가을, 잘 나가는 맏아들이 굴지의 대기업의 딸과 결혼을 해 사위가 되던 날은 온통 안성에 사는 농사꾼 강석호의 날이었다. 안성 농고를 나와 축산계에서 일하다가 작은 양계장이나 경영하고 있는 나, 강석호는 한국유수의 재벌의 딸을 며느리로 맞았다. 재벌이 나의 손을 덥석 잡고 고개를 푹 숙이면서 “잘 부탁합니다. 사돈!”이라고 말 할 때 나를 바라다 본 안성 사람들에게는 꿈과 같은 사건이었다. “와! 재벌이 고개숙여 강석호에게 절을 하다니!” 그러나 정작 결혼식을 올린 후 며느리와 아들은 안성집으로 내려와 달랑 하룻 저녁을 자고 갔을 뿐 그후 며느리를 만난 일이 없었다. 내게 큰 돈을 보내 주겠다는 아들 녀석에게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들아! 나, 네 돈 필요 없다. 나, 소 기르고 양계를 해서 넉넉히 살 수 있으니 돈 따위는 보낼 생각 말거라.” 그리고 4개월이 되었을 까, 큰 아들과 며느리는 뉴욕에 있는 지사로 파견 근무라는 이유로 기약 없이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와! 강석호 씨? 큰 아들이 미국으로 간다구요? 지사장으로? 와! 출세하셨군요.” 안성 사람들은 나를 부러워했지만 나에게는 별로 실감이 가지 않는 그렇고 그런 일이었다. 1995년 5월, 큰 아들과 며느리는 김포 공항을 떠나고 말았다. 공항에서 대기업의 회장되는 사돈을 만나 커피 한잔을 마시긴 했지만 아들이 미국에 가서 무엇을 하는 지도 모른 채 아들을 미국으로 떠 보내고 말았다. 돌아 오는 길에 나는 마음 한구석에 우울한 마음이 돋고 있었다. “김기사! 사돈님을 안성까지 잘 모셔다 드리고 오게!”라고 말하면서 회사로 들어가는 사돈의 뒷 모습을 보면서 마치 사자 앞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는 고양이로 내 자신이 느껴졌다. * 며칠 후 아직도 군대에 몸담고 있는 둘째 아들을 만났다. 금융 회사에 취직이 되어 있다가 군복무를 하고 있는 둘째 아들도 군에서 제대를 하는 대로 역시 미국으로 갈 계획이라고 했다. 큰 아들이 떠나고 나니 비록 군에 가 있기는 하나 둘째 아들이 내 텅빈 마음을 채워 주고 있었다. 둘째 아들! 그는 서울 상대를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졸업과 더불어 대 기업에 이미 취직이 되어 있었다. 안성 사람들은 한결같이 나를 부러워했다. “강석호씨! 당신은 정말 출세했소. 작은 아들마저 서울 상대를 수석으로 졸업하다니.... 게다가 대기업에 취직까지 됐다니....” 안성 바닥에서 나, 강석호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두 명의 수재 아들을 둔 농사꾼으로.... * 1995년 8월, 막내 아들은 공도에 있는 한독 낙농장에 가서 수의사를 도와 젖소를 치료해 주고 있었다. “야! 이놈아! 공부를 해야지. 고등학교 2학년 2학기가 되었는데, 공부는 안하고 젖소 농장에나 찾아가면 되냐? ”나는 아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내년이 되면 고3이 되여 곧 대학에 입학을 하게 되는데... 고등학교 2학년 10월이 되었다. 단풍이 들기 시작하며 하늘은 온통 푸르름 뿐이었다. 막내 아들에게 신체적인 이상이 발견되었다. 다리와 손등에 붉은 반점이 생기며 손가락 매디가 다소 두꺼워지는 듯했다. 안성 시내에 있는 피부과를 찾아 갔더니, 단순한 피부병일거라고 하며 크림을 조재하여 주었다. 그러나 2개월이나 지났는데도 피부병은 낫기는커녕 손등에 진물이 흐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눈섭도 많이 빠지고 있었다. 안성 보건소를 찾아갔다. “글쎄요? 피부병인데...” 보건소 의사는 영어로 쓰인 크림을 한 통 나에게 주면서 “한 달만 바르고 오십시오.”라고 말했다. 한 달, 그리고 두 달... 피부병은 조금도 좋아지지 않았다. 보건소 의사도 당황하였는지 피부를 조금 떼어(조직검사) 서울에 있는 큰 병원으로 보냈다. 그리고 2주 후 결과 개연치 않다고 하며 다시 피부 조직을 떼어서 서울로 보냈다. 자세히 아들을 쳐다보니 눈썹도 빠지고 발가락 하나가 썩어가고 있었다. “나병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뿐인가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 온 내 아들은 온몸이 멍이 든 상태로 누어 있었다. 동네 사람들과 학교 친구들로부터 몰매를 맞았다고 했다. “나병(문둥병)”이라고” 친구들과 동네 사람들로부터 구타를 당했다고 했다. “아니! 학교 친구와 동네 사람들이 때리다니...” 기가 찼다. 다음날 학교에 찾아 가 교장선생과 담임 선생을 만나 항의를 했다. “분명 아드님의 피부가 조금은 이상한 듯 합니다. 가능한 빨리 정확한 진단을 받을 때까지....” “학교에 나오지 말라고요? 무슨 말이요?” “아니, 그런 것은 아니고, 정확한 진단이 필요하다는 말이지요.” 교장 선생은 말했다. 사태가 제법 심각함을 느끼게 되었다. 결국 수원에 있는 큰 병원으로 아들을 데리고 진찰을 받으러 갔다. “나병일 가능성이 크군요. 병리 검사를 기다린다고 하니....” 의사는 끝말을 흘리고 말았기에 나는 다시 안성으로 되돌아 왔다. 그러나 불안하기 시작했다. 가만히 보니 아들은 더 긴장되고 마음졸이고 있는 듯 했다. 학교 친구들과 동네 사람들로부터 몰매를 맞은 후 그는 문둥병의 심각성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비록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고는 하나 처음 2주 동안만 학교에 갔을 뿐 그 후에는 가지 못하고 집에서 진단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1996년, 4월 2일 운명의 날이 찾아 왔다. 보건소에 찾아 간 나와 아들은 잔인스럽게도 “나병(한센씨 병, 문둥병)”이라는 최종 진단을 받았다. 청천 벽력같은 진단을 받은 후 우울함을 달래기 위하여 비봉산으로 올라갔다가 문둥병 환자들을 만나는 꿈을 꾸었으며 아들을 데리고 나병으로 가장 유명하다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유준 박사를 만나기도 했다. 유준 박사를 만나고 온 후에도 아들의 문둥병은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눈썹이 빠지고 발가락에 진물이 생길 뿐만 아니라 감각마저 없어지고 있었다. 그뿐인가 손가락에도 진물이 생기며 뭉클어지고 있었다. 당연히 학교에 가는 것을 포기했으며 보건소 의사의 말대로 아니 명령대로 따라야 했다. “아무래도 소록도나 어디 나병 요양소로 가서 본격적인 치료를 받아야 됩니다. 그리고 오늘부터 댑손 과 라이팜핀을 지시해 준 대로 복용하십시오. 아시겠죠?“ 보건소 의사는 큰 소리로 말했다. 6.소록도로 가는 길. “하늘님! 맙소사! 어떻게 기른 아들인데 문둥병에 걸리다니....” 아들을 생각하면서 흐느껴 울고 말았다. 아들을 바라다보니 아무런 감정도 없는지 전혀 말이 없었다. 아니, 감정이 너무 많아 표현하기가 힘들어 말이 없는 것 같았다. 유교적인 집안에서 태어나 종교는 없으나 전생에 지은 죄라든지 윤회와 같은 불교의 사상에 대해서 다소 알고는 있었다. 그러기에 내 아들의 문둥병은 분명, 내 죄 때문이라고 생각이 들어 아들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너무나 괴롭다 못해 나는 군에 있는 둘째 아들을 불렀다. 허겁지겁 달려온 둘째 아들은 동생의 진단에 대해 단호하게 대답을 했다. “아버지, 나병은 전염병이라고 하니 격리시켜서 화학 치료를 받아야겠지요. 소록도로 보내세요. 그것 밖에는 어쩔 수가 없군요.” 그리고 그는 다음날, 부대로 돌아가면서 말했다. “제대하면 곧바로 저도 미국에 갈 겁니다. 아버지.”라고. * 안성 보건소에서 남자 직원이 집으로 찾아 왔다. “보건소 법에 의해 아무래도 아드님을 요양원으로 보내야 겠습니다. 보통 사람들과 격리를 해야 하니까요. 물론 음성 나환자가 되면 격리를 안 해도 되지만 지금으로서는 양성 환자임이 분명하니까요...” “꼭 그렇게 해야 되나요. 집에 있으면서 병원에 가서 약을 타 오면 안될까요?” “그게 안됩니다. 주위 사람들의 눈도 있고...한편으로는 아드님이 위험하지요. 일반 사람들이 돌을 던지든지 아니면 죽이겠다고 할 겝니다. 제 생각으로는 소록도가 제일 무난합니다.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하며 좋은 의사들이 많이 있으니까요....” “소록도? 소록도....” 나는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문득, 30년 전(1967년 7월)에 방문했던 그 소록도가 내 눈앞에 활동 사진처럼 비쳐오고 있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전라도 길.... 그리고 천형의 한을 품고 그곳으로 가던 시인 한하운... 문득 그 양성 환자들의 입원실이라고 하던 세멘트로 지은 단층 집들과 그곳에서 보았던 이글어지고 온몸에 진물이 흐르던 양성 환자들이.... 그리고 죽은 환자를 화장하여 납골당에 넣어 두던 그 모습....- “아- ”나는 신음을 하고 말았다. “강석호 선생님, 서두르셔야 합니다. 아시겠죠!” 안성 보건소 직원은 큰 소리로 말을 하더니 소록도로 가는 서류를 놓고 갔다. “모래 아침에 다시 오겠습니다. 꼭 서류에 기입을 해 놓으시고요, 아드님에게는 잘 이야기를 하셔서 설득을 하세요.” 그날, 나는 아들과 같이 앉아 앞일을 의논했다. 뜻밖이었다. “아버지, 소록도로 가겠습니다. 가서 치료를 하고 오겠습니다. 유준 박사님이 말하셨지요. 잘 치료하면 깨끗이 낫는다고요.....” 아냐! 홍조야, 차라리, 네 외가집이 있는 장호원으로 가서 치료를 하거라. 외가집에 방 하나를 얻어 줄테니 거기서 꼼짝 말고 주는 밥 먹고 약을 먹으면 될 것 같은데...“ 나는 뜻밖에도 처가집이 있는 장호원 읍을 생각했다. “외가집에?” 그러나 그 계획도 얼마 후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장호원에 있는 큰 처남에게 전화로 내 생각을 말했더니 큰 소리로 반대를 했다. “매형! 나병 환자를 집에 두면 온 가족이 다 전염이 될지도 모르는데...매형 살자고 우리 집에 나병을 전염시킬 작정이세요. 안됩니다. 그냥 소록도로 보내세요.” “.....................” 나는 전화를 받으며 울고 말았다. ‘아니! 이렇게도 매몰찬 놈이 내 처남이라니...’ 그날 저녁, 방구석에만 앉아 있던 막내 아들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버지? 나를 소록도로 보내주세요. 그곳에서 치료를 하렵니다. 누구에게도 신세를 지고 싶지 않으니까요....아버지.” “홍조야!” 아들을 덥석 안고 또 한번 울고 말았다. “안돼! 너는 나하고 사는 거다, 나하고...” “아버지, 유준 박사의 말대로 치료를 하면 완치된다고 하니 기다려 주세요. 한 10년만...” “10년만? 10년씩이나?” “예.” 아들의 대답이 내 귀에서 메아리치고 있었다. ‘시이입녀언 아니, 배액녀언...’ * 이틀 후, 약속대로 안성 보건소 직원이 찾아와 서류를 달라고 했다. 나는 순순히 허락서를 그에게 주었다. “잘 하셨습니다. 일주일 후, 그러니까 4월 15일 날, 소록도로 내려가십시오. 소록도 입구에 있는 안내소에 가시면 안성에서 보낸 서류가 도달해 있을 겁니다. 그곳에서 하라는 대로 하십시오. 일주일 후에....” “아- 일주일.... 일주일 후면 나의 아들과 나는 영영 이 세상에서 다시 못 만나는 이별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니....이별을....” 마침내 집을 나와 버렸다. 갈곳이 없었다. 며칠 전 꿈에서 만났던 문둥이들이 무서웠기에 오늘은 사람들이 많이 오고 가는 비봉산 약수터로 갔다. 진달래, 개나리꽃이 피었으며 여기저기에서 산나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약수터 근처에 있는 나무 의자에 앉아 우선 담배를 한 대 피워 물었다. 혹시, 주위에서 문둥이들이 나오지 않을까 걱정을 하면서 담배를 또 한 대 피워 물었다. ‘혹시 온천을 하면 문둥병이 낳지 않을까?’ 나는 문득 온천을 하면 치료 효과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다음날 아침 아들을 데리고 자가용을 빌려 타고 수안보 온천으로 갔다. “혹시 나병 환자가 아니유?” 온천 주인이 먼저 알아보고 나에게 물었다. “.........” “이봐유! 나병 환자를 이곳에 데려오면 어쩔 셈이유? 원 참...당장 꺼져유. 아니면 사람들이 와서 뭇매를 때릴거유.” 현실 앞에 놓인 문둥병환자에 대한 편견의 벽이 생각보다 높은 것을 알게 되었다. 아침을 변변히 먹지를 않고 나왔기에 시장하여 음식점으로 갔다. “이보소! 혹시? 혹시? 나병, 어, 문둥병 환자가 아니유? “.......................” “썩 나가슈. 남들 보기 전에유. 에이 재수없게....” 나와 나의 아들은 온천도 못하고 음식도 못 사먹다가 겨우 어느 시골 허름한 식당에 들려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차를 타고 안성으로 되돌아 오고 말았다. 문둥병 환자임을 이내 알아 볼 뿐 만 아니라 혹독한 대접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소록도로 가기 위한 준비를 했다. 두 트렁크에 옷가지와 책 그리고 그릇 등을 채곡채곡 싸 넣었다. 나도 울고 아들도 울면서 우리는 짐을 챙겼다. 아들과 더불어 한 이불에서 잠을 잤다. 안 된다고 하는 아들을 더 힘껒 껴 안으며 잠을 잤다. “이제 가면 언제오나.... 기약 없는 서러운 이별”이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매정했다. 어느 누구 하나 찾아 와 위로를 하는 사람도 없었으며 학교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문둥병에게는 인정도 사랑도 아무 것도 없다고 우리는 생각을 하며 또 하루를 보냈다. -인간 세상은 모든 것이 평등하지는 않는 법.... 병든 자, 가난한 자, 힘없는 자들은 어차피 누군가에 의해 희생을 당하기 마련, 그리고 밟혀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더럽고 가치 없는 것들은 쓰레기통에 버려지기 마련이며 어느 누구도 그 가치를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아니, 차라리 인간 쓰레기들은 차라리 죽어 없어지는 것이 더 사회를 위해 유익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마음 정리를 하고 보니 아무 말 없이 소록도로 들어가 그곳에서 그렇게 사는 것도 순리에 맞게 느껴져 조금 위안이 됐다. “그래, 아들아, 소록도로 들어가 그렇게 살거라. 어짜피 죽어야 하는 인생이니까....” * 운명의 날(4월 15일)이 찾아 왔다. 큼직한 여행 가방 두 개를 들고 나와 아들은 이른 아침 안성 시외버스정류소로 갔다. 아들은 운동모자를 깊이 눌러 썼으며 손에까지 내려오는 검은 색깔의 얇은 잠바를 입었다. 게다가 목에 목도리를 둘렀으니 자세히 보지를 않고서는 문둥병 환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들과 비슷한 복장을 하였기에 마치 형제가 어디로 나들이 가는 것처럼 보였다. 시외 버스를 타고 평택을 거쳐 천안에서 내렸다 그리고 시간에 맞춰 광주로 가는 호남선 열차를 타고 보니 아침 9시경이었다. 아들은 창가에 앉았으며 나는 복도 쪽으로 앉아 등을 아들에게 기대었다. 가능한 다른 사람들에게 눈치 채이지 않도록 배려를 했다. 서대전을 지나고 보니 어느새 논산 강경을 지나 이리에 도착했다. 천안의 명물 호도과자와 강생회에서 파는 빵으로 점심을 대신했다. 마치 멀리 소풍을 가는 기분이었으나 사실은 죽음의 오지로 가는 운명의 기차였다. 넓은 만경평야의 논과 밭, 그리고 여기저기에 서 있는 비닐 하우스를 보고 있는 사이 기차는 어느새 백양사를 지나고 있었다. 대전에서부터 흘끔 흘끔 훔쳐보던 어느 남자가 내게 다가와서 물었다.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은 어디가 아픈가 보죠? 피부병?” “아-예. 아니요. 피부병이 조금...” “혹시? 문둥병?” “아뇨.!” 나는 큰 소리로 대답을 하였으나 뜻밖에도 주위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문둥병?” 누군가가 소리를 치며 우리를 바라다보았다. 뜻밖이었다. -아들은 이런 상황인데도 태연하게 책을 펴 놓고 읽고 있었다.- “아! 예, 고 3입니다. 열심히 공부를 하다보니...”나는 얼버무렸다. “아- 그러세요? 고 3?” 사람들은 고 3이라고 하니 동정심이 생겼는지 조용해지고 있었다. 기차는 장성을 거쳐 광주 시내로 들어가고 있었다. 광주에 내리니 어느새 오후 2시가 되었다. 순천으로 가는 직행 버스를 탔다. 순천에 내리니 출출했다. 터미널 근처에 있는 순대국 집으로 들어 갔다. 다행히, 주인은 아들이 문둥병 환자임을 눈치 채지 못한 듯이 순대 한 접시와 국물을 따로 가지고 왔다. 고추가루를 조금 더 치고 후추를 넣은 후 나와 아들은 훌훌 마셔 버렸다. 아! 이것이 마지막 식사일지도 모른다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펐다. 녹동으로 가는 직행 버스에 올랐다. 어느새 밖이 어둑어둑 해지고 있었다. 순천에서 고흥을 거쳐 녹동으로 가는 동안 창 밖을 바라다보니 유자꽃 나무가 보였으나 아직 잎새만 조금씩 푸를 뿐이었다. 녹동 항구에 도착하니 어느새 컴컴한 저녁이 되었다. 선창가에서 비린내가 풍겼으며 여기저기에 횟집과 여관들이 보였다. “녹동에서는 특별히 조심하세요. 녹동 사람들은 문둥병 환자들을 아주 싫어한답니다.” 언젠가 광주에서 들은 말이 떠 올랐다. 횟집에 들어가 초장에 생선회를 듬뿍 뭍혀 먹었으며 뜨끈한 우동도 한 그릇 후루룩 먹었다. 그리고 1967년에 묵었던 그 ‘녹동 여관’을 찾아 갔다. 혹시라도 그 때 그 아주머니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60이 조금 넘은 듯하며 머리가 희끗한 아주머니가 그 곳에 있었는데 가만히 보니, 그 때 그 아주머니처럼 보였다.. “아주머니? 아주머니? 저, 저를 기억하시겟어요?” “예? 누구시던가요?” “아-29년 전..29년 전에 저 여기에서 하루를 묵었지요. ” “그러세요. 그런데....” “안성 군청에서 소록도에서 생산되는 마늘과 고추를 시찰하러 왔었지요. 그리고 그 때, 아주머니가 이렇게 말했지요. ‘녹동과 소록도를 연결하는 다리를 놓으면 소록도 사람들과 녹동 사람들이 서로 마음을 활짝 열어 놓게 되리라고....’” “아-그랬던가요? 그런데, 이번에는 웬 일로?” “내일 아침 소록도로 가야 합니다. 이 애를 데리고요.” “애라니요?” “아들입니다. ” “맙소사. 아들이...잘 생겼는데...저쪽 방이 아주 조용하고 비교적 넓으니...그 방을 쓰시지요.” 고맙기 짝이 없었다. 소록도에서 문둥병 환자를 재워 주는 여관이 몇 군데 없다고 했는데 아주머니는 스스럼 없이 우리에게 방을 내주었다. “푹 주무시고, 내일 아침 배를 타십시오. 아침을 준비해 드릴테니...” “아- 아주머니, 감사합니다.” 진정으로 고마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학생! 소록도에 가서 열심히 치료를 받게나. 완치되어 바깥 세상으로 나오는 사람도 꽤 많으니까.” “예.” 아들도 역시 감격하여 대답을 했다. 그날 밤 아들을 꼭 안고 잠을 청했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마치 말이나 소가 사는 마굿간과 같았던 양성 나병환자촌이 눈에서 아른거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죽어 나갔던 나환자와 무표정하게 철조망 밖에 서 있었던 수위들과 음성 환자들의 모습이 눈 앞에서 아른거렸다. 말없이 따라왔던 아들은 더 마음이 심란한지 눈만 감았지 숨 소리가 거칠고 빨랐다. “자거라. 그리고 열심히 치료를 받고 완치되거라.”나는 조용히 말했다. “아버지, 10년이면 낫는다고 유준 박사님이 말했으니까...10년만...10년만....” “10년이나?” 나는 이들에게 되물었다. 그리고 잠이 들었다. * 다음날 아침, 아들의 손을 잡고 녹동 항구 부두에서 29년 전에 출장 와서 타 보았던 통통선에 승선했다. 현대 문명의 발전 속에 통통선은 훨씬 더 깨끗했으며 배도 더 큰 모습이었다. 역시 6-7분만에 통통선은 소록도의 입구에 정박을 했다. 입구의 모습도 많이 바뀌어 있었다. 안내소는 산뜻하게 다시 지어져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면서 곧바로 보이는 소록도 병원 직원들과 소록도 섬 직원들의 관사들과 개인 집들도 깨끗이 페인트로 칠하여졌으며 전에 못 보던 공공 기관들로 학교 분교, 우체국 그리고 농협 지소가 눈에 띄어 퇴락 하여 세월이 흘렀음을 실감케 했다. 그뿐인가 소록도 병원도 현대식으로 잘 지어져있었으며 외래 입구에는 여러 대의 승용차들이 주차하고 있었다. 29년 전, “소록도에 출장 온 안성 군청 축산계장 서리 강석호 입니다.”라고 당당하게 신고했던 기억이 새삼 떠 올랐다. 그랬던 내 모습이 오늘은 너무나 초라했다. “아들을 이곳에 입원시키려고 경기도 안성에서 온 사람입니다.” 나는 죽어 가는 목소리로 제 1 안내소 직원에게 말했다. “어디, 서류 좀 봅시다.” 안내 직원이 큰 소리로 내게 말했을 때 떨리는 손으로 서류 뭉치를 건네주었다. “아! 아드님이시군요. 자 이리로 오시지요.” 안내소 직원을 따라 몇 군데를 들렸으며 손도장을 여러 번 찍었다. 낫 익은 건물이 눈에 띄었다. “소록도 국립 병원”이었다. 옛날 내가 보았던 그 건물은 어디로 갔는지 없어지고 새로운 현대식 건물로 번지런히 지어졌기에 다소 마음이 놓였다. -이곳 병원 식당에서 점심을 먹던 기억이 눈에 선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아들이 이 병원에서 진찰을 받고 약을 받아먹으며 기약 없이 살아야 한다고 생각을 하니 병원 건물이 갑자기 크게 보였다. 수속이 끝난 후 우리는 안내원을 따라 나환자 숙소가 있는 소록도 2번지로 향했다. 뒷 편에 있는 중앙 공원으로 가지 않고 병원 뒷길로 나 있는 아스팔트 길을 따라 가니 여기 저기에 음성 나환자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 같은 주택들이 눈에 보였다. 뿐만 아니라 병원에서 주는 배급을 타고 있는 나환자들의 모습도 보였으며, 자전거를 타는 사람, 심지어는 스쿠터를 타는 나환자도 보였기에 나는 그런대로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조금 더 가니 철조망이 길게 쳐 진 양성 나환자 입원실(거주지)이 내 눈에 보였다. “당국의 허락 없이는 들어가지 못함”이라고 쓴 팻말이 여전했으며 힘깨나 쓰는 장정 몇이 지키고 있는 제2 안내소(면회소)로 인도되었다. 29년 전, 아무도 보지 않은지 알고 슬그머니 들어가려다가 저지 당했던 바로 그곳이었는데 면회소는 깨끗이 바뀌어 있었다. “강석호씨! 여기서 부터는 양성 나환자 촌입니다. 이 안으로는 못 들어 갑니다마는 오늘은 입원하는 날이기에 특별히 병실을 보여 드립니다. 이곳에서 아드님은 먹고 자고 치료받고 살아야 할 곳입니다. 아시다시피 과거에 듣던 그런 소록도가 아닙니다. 위생시설도 좋아 졌으며 급식과 치료약도 많이 좋아 졌기에 많은 환자들이 완치되어 음성 나환자가 됩니다. 의사 선생님도 여럿이 계셔서 나병 뿐만 아니라 일반 내과 그리고 외과 질병도 여기에서 치료를 해 주기에 사망률도 적습니다. 이 병원 안에서 더 이상 폭력 사태나 도난 같은 것은 없습니다. 이청준이라는 소설가가 쓴 ‘당신들의 천국’이라는 얘기는 더 이상 여기에 없습니다. 그러니, 강석호씨!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국가가 책임지고 아드님을 치료하겠습니다.“ “.....................” 나는 감격했다. 소록도 직원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어도 될 것 같아 안도의 숨을 쉬며 아들의 손을 꼭 쥐었다. “그리고 면회는 일 주일에 한번만 허용이 됩니다마는.....면회시에는 전염의 위험성 때문에 1.5미터 가량 떨어져서 말을 해야 하며 손을 잡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 29년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자, 같이 들어가십시다. 양성 나환자와는 일체 악수도 말도 하지 마십시오. 아시겠죠?” 직원은 세멘트 불록으로 쌓아 만든 단층 건물을 몇 동 지나 어느 허스럼한 단층 건물 앞에 섰다. “여기가 아드님의 입원실입니다. 이 건물에는 12명의 환자가 있으며 아드님이 기거할 방에는 28살 된 남자가 있습니다.” 방문은 열려 있었으며 그 안에 낡은 나무 침대 두 개가 가장자리에 놓여 있었다. 침대 옆에는 오랜된 나무 책상 두 개와 나무 의자 두 개가 있었다. 화장실은 건물 내에 있었는데 비교적 깨끗했다. 29년 전에 보았던 그 악취 냄새가 풍기던 모습은 아니었다. 활동할 수 있는 나환자들은 건물 중앙에 있는 식당을 이용했는데 생각보다 깨끗했다. 그리고 음식도 다양해서 그 동안 정부에서 나환자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였음을 실감했다. 그러나 한가지 안 변한 것은 삶에 대한 희망과 의욕을 잃은 나환자들이 여기저기에서 거지처럼 들어 누어 잠을 자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직도 문둥병 환자들은 그들의 삶을 포기하고 어서 죽기를 기다리는 염세주의적인 사고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키가 큰 남자 환자가 내 앞에 와서 넙죽 인사를 하였다. “아드님과 같은 방에서 살게 된 김정석입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제가 잘 인도하겠습니다.” “아!-예...” 반가웠고 고마웠다. 김정석이라는 청년 환자는 금년, 23세였으며 소록도 병원에 입원한 지가 어느덧 4년이 됐다고 했다. 그러나 지난 4년 동안 어느 누구 하나 찾아 온 사람이 없었다. “의자에 편히 앉으세요. 아드님의 의자이니까요...” 나무 의자에 앉으며 생각했다. ‘아-이 의자와 이 책상, 그리고 침대에서 나의 아들은....’ 나는 더 이상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생각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모든 것이 운명이라고 생각을 하기로 했다. 아니, 전생에 내가 지은 죄 값이라고 생각을 했다. 아들이 살기로 된 그 방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오는 길에 옆방에 앉아 있는 장년의 나병 환자를 만난 것이 그래도 나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다. “임진석이라고 합니다. 금년 51살입니다.”라고 스스로를 소개한 나환자였다. “아니? 나도 51세입니다.” 나는 뜻밖의 동갑내기를 만나면서 놀랐으며 반가웠다. “예, 그러세요. 동갑이군요. 아들처럼 생각하며 살겠습니다. 강 선생님...” “고맙습니다. 제발 부탁합니다. 임진석 선생님.” 진심으로 그리고 마치 구세주를 만난 기분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 형님이 되겠다고 자처한 청년이 있었으며 아버지처럼 생각하며 살겠다는 분도 만나고 보니 마음이 놓였다. * 양성 나환자 병동을 나올 시간이 되었다. 거기 까지 따라 나온 아들의 손을 꼭 잡았다. 분명 규율에 어긋나는 행위였으나 첫 날이라 눈 감아 주는 듯했다. “자주 오마, 너를 보러.” “아버지! 자주 오지 마세요. 10년 후면 완전히 낫는다고 하니....” “10년 후나?” “예.” “아니다. 자주 오마.” “.....................” 직원의 손에 이끌려 양성 나환자 안내소 밖으로 나왔다. “아-아- 이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이젠......이젠.......” 엉엉 울고 말았다. “강선생! 이러면 안됩니다. 어서 울음을 그치세요!” 울음을 그치고 말았다. 큰 가방 두 개를 그곳에 두고 나와서 손이 허전했다. 모든 것을 던져 버리고 온 듯했다. 아니 전부를 빼앗기고 빈손으로 쫒겨 나오는 그런 느낌이었다.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니 아들은 눈물을 흘리며 손을 흔들고 서 있었다. 나도 손을 흔들어 주었다. 소록도 1번지로 들어오면서 양성 나환자 촌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으며 아들의 모습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소록도 입구에서 몇 시간을 멍청히 서 있었다. 병원 뒷편, 양성 나환자 촌에 아직도 서서 나를 생각하고 있을 아들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았다. “여보쇼! 캄캄해지면 녹동으로 가는 통통선은 끊깁니다. 여기 소록도 1번지에는 여관도 없소. 아시겠소! 그러니 어서 이 마지막 통통선을 타쇼!” 안내소 직원이 보다 못해 나를 밀어 통통선에 태웠기에 마지못해 녹동으로 향했다. 붕- 붕- 통통선에서 멀어져 가는 소록도를 바라다보았으나 이젠 불빛만 보일 뿐이었다. 녹동 항구에는 생선 비릿내가 풍기고 있었다. 다시 어제 머물렀던 녹동 여관으로 비틀거리며 찾아갔다. “아- 아드님을 두고 오셨지라우?” “예.” “치료가 잘 될 것이요. 걱정마시랑께.” 여관집 아주머니는 걱정을 하고 있는 나를 위로했다. 그날 밤 그 여관방에서 거의 뜬 눈으로 지새웠다. 아들 생각을 하다 보니 잠을 질 수가 없었다. 다음날, 눈물을 흘리며 여관을 떠나게 되었다. “언제고 오십시오. 방은 준비해 드릴터이니.......” “아주머니, 감사합니다. 또 오겠습니다.” 고흥, 순천 광주 그리고 천안을 거쳐 안성에 돌아 오니 오후 4시가 넘었다. 생각해 보니 물 한 모금도 먹지 않았다. 그런대도 조금도 배가 고프질 않았다. 안성 집에는 아무도 없었으며 이제부터는 나 혼자 먹고 자야 하는 외로운 남자가 됐다. * 29년 전에 찾아 갔던 소록도를 이제는 수시로 찾아가야 하는 또 다른 한하운이 된 셈이었다. 지까디비가 다 닳도록 찾아가야 하는 소록도 길을 1996년 4월 15일부터 시작을 하게 됐는데 나는 이것을 운명이라고 단정 지었다. ‘운명...운명... 전생에 내가 지은 운명이라고.’ 7장.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소록도 길. 국립 소록도 병원에 아들을 입원시키고 돌아오면서 나는 소록도를 생각해야 하며 주기적으로 찾아가야 하는 운명의 사나이가 됐다. -소록도! 가족과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인권마저 잃어 버린 채 외롭게 살다가 그곳에서 죽어 화장되어 납골당에 버려진다는 곳... - “일주일에 한번 씩 면회가 가능합니다마는...” 안내원이 나에게 일러준 규칙이 생각났다. 나는 일주일이 마치 일년과도 같았으며 집안에 나 혼자만 살고 있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 숨 막히도록 힘들었다. 아니 외로웠다. 외로움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6.25때 총살에 의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외로웠으나 그래도 나와 어머니 둘

회원:
1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0
어제:
0
전체:
59,0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