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내고향은 소록도 파트 3

2012.01.23 12:29

연규호 조회 수:638 추천:18

7장.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소록도 길. 국립 소록도 병원에 아들을 입원시키고 돌아오면서 나는 소록도를 생각해야 하며 주기적으로 찾아가야 하는 운명의 사나이가 됐다. -소록도! 가족과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인권마저 잃어 버린 채 외롭게 살다가 그곳에서 죽어 화장되어 납골당에 버려진다는 곳... - “일주일에 한번 씩 면회가 가능합니다마는...” 안내원이 나에게 일러준 규칙이 생각났다. 나는 일주일이 마치 일년과도 같았으며 집안에 나 혼자만 살고 있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 숨 막히도록 힘들었다. 아니 외로웠다. 외로움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6.25때 총살에 의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외로웠으나 그래도 나와 어머니 둘이 었기에 외로움을 극복할 수가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가 셋째 아들을 낳은지 4개월 후에 세상을 떠났을 때도 나와 어머니 그리고 아들 셋이 남아 있었기에 외로움을 이길 수가 있었다. 그 때 내 나이 고작 34세의 청년이었기에 새 장가를 들라고 하는 유혹도 많았으나 나는 아내를 배반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죽고 첫째 아들은 미국으로 갔으며 둘째 아들마저 군대에 입대하였기에 집안은 횡 빈 듯 했다. 그래도 셋째 아들이 옆에 있었기에 외로움을 잊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셋 째 아들을 소록도에 남겨두고 돌아 온 내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텅 빈 집안에 밀려들어오는 외로움은 두려움으로 변했다. (문둥이들은 서로 살려고 싸운다는데.... 문둥병 환자들은 도무지 정서도 없으며 인간의 정도 없다는데... 문둥병 환자들은 미래도 없이 그저 살다가 죽는다는데... 그렇다면 아들은 지금 그 문둥이들 속에서 말 한 마디 하지 못하고 벌벌 떨며 지내리라. 그뿐인가, 어느 누구도 내 아들에게 따슷한 말 한마디 해주는 친구도 없으리라. 가정과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문둥병 환자들은 온통 원한과 복수만을 생각할 뿐이라고 하던데... 그렇다면 괜히 아들을 그곳에 입원을 시켰나? 괜히!) 나는 외로움과 공포 그리고 후회로 가득찬 한 주일을 보내고 말았다. ‘아버지 배고파 죽겠습니다. 아버지!’ 소록도에 있는 아들이 나를 향해 고함을 치고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었다. “안돼! 아들아! 내가 가마! 그리로 가마!” 나는 마침내 옷 보따리와 음식을 준비하여 소록도로 가 아들을 만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나는 한하운의 시집을 다시 꺼내 읽기 시작했다. [시: 파랑새.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푸른 하늘/ 푸른 들/날아다니며/푸른 노래/푸른 울음/ 울어 예으리/나는/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 ] 나는 한하운이 그 소록도에서 나오고 싶어 외치던 그 시를 나의 아들이 지금쯤 외치고 있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 파랑새가 되어 소록도에서 훌쩍 나오거라. 이 아버지가 너를 받아 주리라.” 나는 소록도에 갇혀 있는 아들을 구하러 간다고 착각 하기 시작했다. * 다음날 아침, 안성 시외 버스 정거장에서 버스를 타고 천안으로 향했다. 내 평생에 세 번째 찾아가는 소록도 길이었다. 천안에서 호남선 열차를 타고 대전을 거쳐 광주로 오는 길에 나는 온통 부정적인 생각만 하고 있었다. ‘과연 문둥병은 내가 전생에 지은 죄의 결과인가?’ ‘과연 문둥병은 치료가 되는가?’ ‘문둥병 환자들에게도 인간의 감성과 정(情)이 있는가?’ ‘과연 나의 아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버지를 원망하고 있을까? ’ 광주를 거쳐 녹동 항구에 도착하니 역시 저녁 5시가 됐다. 터벅터벅 ‘아주머니가 경영하는 녹동 여관’으로 찾아 갔다. “아니! 일주일만에 또 온당께?” 아주머니는 너무나 일찍 면회를 온 것이 신기한 듯 물었다. “예. 아들이 보고 싶구요. 그리고 불안해서요..” “불안하다? 아-나병 환자들 사이에 무슨 알력이나 범죄 행위를 걱정하시는군요?” “예.” “강선생님? 내가 알기는 문둥병 환자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감정도 있고... 울음도 있고 그리고 웃음도 있는...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단지 피부가 우리와 다르다는 것일 뿐... 너무 걱정하지마쇼. 아시겠습니까? 강 선생님.“ “예.” 나는 여관집 아주머니의 말이 사실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대답을 했다. 여관집 아주머니로부터 들은 문둥병 환자의 단편적인 얘기가 기억에 났다. -75세가 되는 문둥병 할아버지가 이 여관에서 작년 가을에 며칠을 묵고 갔다고 했다. 무려 50년 전, 27세가 되던 때, 그는 문둥병이 발병돼 집안 식구들 모르게 소록도로 들어와 입원을 했다고 한다. 일년 뒤 시골에 사는 그의 어머니가 소록도로 찾아 왔다고 한다. 아들을 찾으러 방방 곡곡을 돌아 다니다가 소록도에 와 있음을 알고 찾아왔다. 어머니는 아들과 떠어지고 싶지 않아 육지로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소록도 음성 나환자 촌에 방을 하나 얻어 아들을 간호하며 같이 살겠다고 했다. 소록도 측에서 어머니의 모성애를 너무나 가엾게 보아 허락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30년 후 어머니는 소록도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비록 정상 사람이기는 하나 소록도의 규칙에 따라 화장을 하려고 하자 아들은 밤에 죽은 어머니를 싸 들고 육지로 탈출하여 고흥 언덕에 장례를 지내주고 돌아 왔다고 했다. 그 문둥병 환자는 그 동안 양성 나환자 여인과 결혼을 하여 몇 년을 살았으나 부인마저 죽자 화장을 하였으며 다음해, 그는 또 다른 여자 나환자와 결혼을 하여 지금까지 살고 있는데 추석을 맞아 어머니의 묘에 가고 싶어 소록도 당국의 특별 허락을 받고 녹동으로 나와 이 여관에서 며칠을 머무르며 고흥에 가서 어머니 묘에 성묘를 했다고 하는 얘기였다.- “나병 환자들도 결혼을 한단 말이요? 그러고 추석도 지키고?” “그렇습니다. 나병 환자들도 우리와 똑 같은 그런 사람들입니다. 고향도 그리워하며, 조상들 묘에 가서 성묘도 하고 싶은 사람들이랍니다. ” “아- 잘 알겠습니다. 아주머니...” 나는 진심으로 감사의 표시를 하였다. 그 날 밤 잠자리에 들면서 또 다시 아들 걱정을 하고 있었다. * 다음 날 아침, 역시 통통선을 타고 소록도 안내소에 가서 면회를 신청했다. “면회를 오셨군요? 일주일만에?” “예. 아들이 보고 싶어서요.” “다들 처음에는 일주 일 만에 찾아오다가 점점 횟수가 줄지요. 그러다가 아주 안 온답니다. 참! 기억나시죠? 철조망 밖에서 약 5-10분간 면회가 허락됩니다. 그리고 1.5미터 밖에서 말을 해야 하며 손을 잡으면 안됩니다. 아시겠죠?” “예.” 직원은 나를 데리고 중앙 교회를 지나 병원 뒷 편으로 이어진 아스팔트 길로 들어가 양성 나환자 촌 앞에 설치된 면회소로 갔다. 진물이 흐르며 더덕더덕 군덕 살이 낀 양성 나병 환자들이 4월 봄 바람을 즐기고 있는 듯했다. 아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문둥이 한테 맞아서 누워 있나?“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에 환자복을 입은 아들이 철조망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아버지를 보고도 웃지도 않았으며 반가운 표정도 없었다. “아들아!”나는 반가워 큰 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왜 오셨어요? 10년 후에 오시라고 했는데...” “10년이라고?” “예.” “어떠냐? 지낼 만 하냐?” “예.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니까요. 아버지 제 걱정은 마세요. 정섭이 형님과 임진석 선생님이 잘 해 주신 답니다.” “정섭? 임진석 선생님? 누구지?” “잊으셨서요? 제 방에 같이 사는 형님과 옆방에 계시는 선생님 말이요.” “아- 그래. 그렇지.”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나는 가지고 온 음식과 내의를 아들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다시 소록도를 떠나 녹동으로 돌아 왔다. “벌써 다녀 오시는군요. 그래, 잘 만나 봤습니까?” 여관집 아주머니가 반갑게 물었다. “예. 다행히도 같은 방을 쓰는 형님과 옆방의 선생님이 잘 해주는 모양이던군요.” “그러게, 너무 걱정을 마시라고 하였지요. 걱정 마시고 이젠 읽을 책이라도 같다 주시지요. 병이 다 나으면 사회에 나와 사람 구실을 해야 할게 아닙니까?“ “.....................” 나는 크게 놀랐다. 녹동 항구에서 오고 가는 사람들 잠이나 재워 주고 돈이나 버는 그런 하잖은 여자로 보았는데 완치 된 후를 걱정하는 원대한 식견을 갖고 있다니... 집으로 오는 길이 훨씬 평안했으며 아들에 대한 기대가 막연하나마 내 가슴에서 다시 움트고 있었다. 그러나 안성집에 들어오니 그놈의 “외로움”이 같이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외로웠다. 집안이 텅 빈 듯 했다. * 나는 소록도로 오고 가는 일들을 자세히 기록하기 시작했다. 아들의 숨 소리를 그곳에 기록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 4번째 소록도 방문은 그로부터 2주 후였으니 오월 10일쯤 되었을 게다. 모내기가 한창인 농사철이었으나 아들이 보고 싶어 또 다시 보따리를 싸 들고 안성을 떠나 똑 같은 경로로 녹동에 도착하니 역시 오후 5시경이었으며 낮이 길어져서 그런지 아직도 부둣가에는 뙤약 볕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오는 길에 본 유자꽃이 아름다웠다. 유자차가 생산되는 고흥반도에는 온통 유자 향기로 진동하는 듯 했다. 녹동 항구의 여관집 아주머니는 변함없이 친절했으며 나를 위해 약속대로 좋은 방을 준비해 주었다. 그뿐인가 저녁 식사와 아침도 준비해 주었기에 이젠 녹동에 와서 잘 방이나 먹을 음식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아들을 위해 무엇을 가지고 왔습니까“ “예. 고교 3학년 과정의 책을 들고 왔지요.” “잘 하셨구만요.” 과연 그랬다. 다음날, 면회를 가서 만난 아들은 고3 과정의 책을 가지고 온 것을 몹시 반가와 하면서도 진도가 앞선 친구들을 생각하면서 아쉬워했다. “교양서적도 갖다 주세요. 아버지.” 아들의 몰골이 전보다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손발에 진물이 더 흐르고 있는 듯 했다. 담당 의사를 만나 물어 보니 피부 질환이 더 심해졌으며 최근에 투약한 댚손(Dapson)에서 부작용이 생기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의사는 생각보다 진실하지 않아 보였으며 병 치료에도 자신이 없어 보였다. 불성실하며 신실하지 못한 의사가 주는 약이 과연 효력을 줄 수가 있을까? 처음 만난 이 의사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 5번째 소록도 방문은 농사 일로 인해 6월 초에 이루어 졌다. 소록도로 간지 어느새 2개월이 지났다. 나는 나대로, 아들은 아들대로의 생활을 꾸려 나갔다. 비록 외롭고 힘들었지만 그래도 내게 주어진 길이었기에 오늘도 축사와 양계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마침 둘째 아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제대하기 전에 갖는 마지막 휴가 때 나와 같이 소록도에 같이 가 동생을 보고 싶다고 했다. 이 말을 듣고 보니 마음이 가벼웠다. 오랜만에 가져보는 가족의 따스함을 느끼고 있었다. 둘째 아들은 큰 아들보다 키는 조금 작으나 체격은 단단하며, 말이 적어 무척 매서운 인상을 하고 있었다. 드디어 나는 휴가차 나온 작은아들과 같이 하루 밤을 지내고 광주로 갔다. 광주역 앞에 있는 괜찮은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후 녹동 항구에 도달하니 역시 오후 5시경이 되었다. 6월인지라 해는 아직도 이글거리고 있었다. “저기 보이는 저 섬이 바로 소록도란다.” 둘째 아들에게 소록도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아름답군요, 아버지.” 둘째 아들도 내가 처음으로 소록도를 보았을 때 느끼던 그 인상을 받고 있는 듯했다. “또 오셨군요? 강 선생님? 그런데 이분은?” 여관집 아주머니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둘째 아들입니다.” “아휴! 잘도 생겼군요.” 여관집 아주머니는 진심으로 둘째 아들을 보고 감탄하는 듯 했다. 다음날 아침, 늘 하던 대로 통통선을 타고 섬으로 갔으며 입구에서 역시 면회를 신청했다. 둘째 아들도 처음 보는 소록도에 대해 감탄과 비통한 맘을 동시에 느끼고 있는지 말이 없었다. 아니, 혹시라도 나병 환자들로부터 몹쓸 나병 균이라도 옮길까 봐 조심하는 듯했다. 주위에 펼쳐지는 전나무, 상록수와 가까이에서 보이는 중앙공원의 울창한 나무들과 “국립 소록도 병원”이라는 안내판을 보면서 둘째 아들은 마치 다른 세상에 온 듯함을 느끼고 있는 듯 했다. 나는 둘째 아들을 데리고 소록도 1번지를 지나 2번지에 도달했다. 철조망이 쳐진 양성 나환자 촌의 면회소에서 셋째 아들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진물이 흐르며 발가락이 떨어진 나병 환자들이 오고 가고 있는가 하면 집 앞에서 음식을 먹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환자촌 중앙부에 있는 식당 입구에서 나환자들이 웅성거리고 있는가 하면 간간이 다투는 듯한 소리가 귀에 들렸다. 15분, 그리고 30분이 지났는데도 셋째 아들은 나타나지를 않았다. 마침내, 안내원이 알려주었다. “강석호씨, 아드님은 이른 아침에 병원에 가서 간단한 피부 수술을 받았는데 아마 그 일로 인해 못 나오는가 봅니다. 그냥 가시지요.” “아뇨! 둘째 형이 찾아 왔다고 전하면 올겝니다.” “잠간 기다리쇼!” 안내인은 다시 병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젊은 친구의 부축을 받고 셋째 아들은 밖으로 나왔다. 아마도 발가락을 절단하였는지 발등이 붕대로 감겨져 있었다. “홍조야! 형이다. 나야!” 둘째가 큰 소리로 말했다. “형! 여긴 왜 왔어요. 그냥 집에 계시지...” 셋째 아들은 철조망 가까이로 다가 왔을 때 나는 철조망 사이로 손을 내밀어 아들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아버지! 손 잡지 말라고 안내원이 주의를 주잖았어요? ” 둘째 아들이 내 손을 제지하였다. “어! 그래.....” 아버지는 손을 도로 거두었다. “아버지? 이젠 더 오지 마세요. 10년이라고 했잖아요.” 셋째 아들이 말했다. “10년? 10년이면?” 둘째 아들이 셋째 동생에게 물었다. “형, 10년만 치료하면 완치된다고 유준 박사가 말했어...” “그래, 그래. 10년? 홍조야, 나, 제대하면 아마 미국으로 가게 될 거 같구나. ” “미국으로? 아버지는 어쩌구?” “내가 생활비를 보내마. 성공해 미국으로 불러들이마. 너도.” “미국으로? 싫습니다.” “싫긴? 미국은 천국이라고 한다. 아버지를 아주 좋은 곳에서 모시련다.” “..............................” 동생도 나도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사실 나도 그랬다. 큰 아들이 미국 뉴욕으로 간 지가 벌써 일년이나 되건만 편지도 전화도 없어서 큰 아들을 잊고 사는 편이었다. 그런데 둘째 아들마저 미국으로 간다고 하니 우리 가족은 뿔뿔이 흩어진 이산 가족이 되고 마는 셈이었다. 절룩이는 셋째 아들을 어깨에 들쳐 메고 온 김정섭이라고 하는 이 문둥병 청년이 오히려 셋째 아들에게는 진정한 형님이라고 생각을 했다. 비록 문둥병으로 손등이 헐고 손가락이 떨어져 나갔으나 그 손과 발이 셋째 아들에게는 더 필요한 손발이었기 때문이었다. “내 아들을 보살펴 주어서 고맙소.” 진심으로 치하를 했다. “걱정 마세요. 선생님. 저희는 형제입니다. 임 선생님이 가르쳐 준 대로 우리는 서로의 손과 발이 되어 하루하루를 착실하게 살아가야 할 한 가족입니다. 선생님.” “임 선생이 그렇게 가르쳐 주셨니, 홍조야?”“ “예. 임 선생님이.” “침으로 훌륭하신 분이구나.” 문둥병 환자들 사이에도 인간미가 흐르며 발가락이 떨어져 나간 팔 다리에도 따슷한 정이 통하고 있음을 느꼈다. ‘문둥병 환자도, 가족이 그리운 게다. 가족이...비록 사회로부터 버림받고 여기와서 같이 있다고는 하나.....“ 안성집 돌아오니 밤 12가 가까운 시간이었다. 6월의 더위보다 더 따스한 문둥병 환자들의 체온이 온 몸에 느껴졌다. 다음날, 아침, 둘째 아들은 짐을 싸 들고 서울로 올라가면서 나를 위로했다. “아버지, 셋째를 그곳에 잘 보냈습니다. 집에 두셨더라면 더러운 균에 옮을지도 모르며 동네 사람들로부터 돌팔매나 받게 됐을 텐데...” 둘째가 떠나고 난 집안에는 적막과 고독만이 남아 있었으며 한 귀퉁이에서 셋째가 나타날 것만 같았다. * 여관집 아주머니의 얘기와 소록도 직원의 충고가 현실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일주일마다 찾아오다가는 한 달에 한 번 그리고 어떤 이들은 아예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다. 사실이 그러했다. 찾아가도 크게 변한 것도 없지만 볼 때마다, “오지 마세요”라는 말이 마음에 더 걸렸기 때문이었다. 6번째 소록도 방문은 8월 초였다. 후덥지근하며 비가 많이 오던 장마철이 지나고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고 있었다. 참외를 비롯한 여름 과일을 가득 샀으며 여름에 입을 셔츠를 준비했다. 그리고 아들이 부탁했던 교양서적 몇 권을 사들고 녹동에 도착하니 역시 오후 5시가 되었다. 해는 아직도 이글이글 뜨겁게 녹동 항구를 내려 쬐고 있었다. “이번에는 조금 뜸했군요?” 여관집 아주머니가 반겨 주었다. 그리고 다음날, 통통선을 타고 소록도 항구에 내려 면회 신청을 했다. 거의 2개월만에 만나는 아들의 모습은 전보다 더 초췌했고 피부도 몹시 상해 보였다. 문둥병 환자 특유의 모습인 ‘사자 얼굴’이 나타나고 있었다. 웬일일까? 웃음도 없었으며 말도 없었다. 아들이 화가 나 있다고 생각을 했다. 무려 2개월이나 지나서야 찾아 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역시 철조망이 있는 안내소에서 나는 아들과 면담을 했으나 역시 “이젠 오지 마세요 아버지!”라는 말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주어진 과일 바구니와 옷 가지를 들고 환자 병동으로 들어가 버렸다. 절룩거리면서...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멍청히 들어가는 아들의 모습을 바라다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 순간 나에게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강석호 선생님! 저, 임진석입니다. 아드님의 옆방에 기거하는, 알아보시겠습니까?” “아- 예. 아들이 언젠가 말하던 선생님이 아니시오?” “그렇습니다. 선생님? 아드님은 요즘 우울증으로 시달리고 있습니다. 인생 자체에 대한 의문으로...그렇습니다. 어쩌다가 문둥병에 걸렸는가? 전염병인지? 아니면 형벌인지? 아시다시피, 지금은 그 옛날, 한하운이 살던 시대와는 완전히 다르답니다. 정부에서 무료로 치료도 해주며 생활을 시켜 주니 열심히 나병 치료만 하면 된답니다. 그리고 이곳 양성 나환자 촌도 바깥 세상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비참한 곳도 아닙니다. 아드님은 자신의 병이 좋아지기 보다는 점점 나빠지는 것에 대해 비관하고 있지만 처음에 나병을 치료하다 보면 종종 악화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제가 아버지를 대신해 몇 가지 격려를 하고 있습니다. 문둥병의 치료도 사람의 마음을 치료하는 것과 꼭 같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먼저, 문둥병에서 빨리 회복되려고 하는 욕심을 버리고, 비운 자리에 ‘언젠가는 완치된다’ 라는 느긋한 희망을 꽉 채우면 마음의 안정이 오는 거지요. 마찬가지로 강석호씨도 아들에 대한 집념을 버리고 그 버린 마음에 내 아들도 평범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득 채우면 문둥병을 이해하실 수가 있을 겝니다.“ “예? 비우고, 채우고 나면 마음에 안정이 온다고요?” “그렇습니다. 강 선생님.” “감사합니다. 아들을 부탁합니다. 아버지처럼 곁에서 도와주신다고 하니, 그 은혜를...” “은혜라기는...그러나 이곳 문둥병 환자의 제일 큰 적은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배신감이지요. 배신감...”“ 배신감이라고요? 그러면 선생님도 가족으로부터 배신을?“ “아닙니다. 아드님을 잘 추 수려 보겠습니다.” 임 선생님은 아들이 들어갔던 그 병동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임 선생님! 감사합니다. ” 그곳을 향해 큰 소리를 쳤다. 안성으로 돌아오면서 임선생이 내게 한 말을 음미하고 또 음미했다. “마음을 비우고 그 비운 마음에 꽉 채우면 안정이 찾아온다”라는 그 말을... * 소록도로 가는 길은 끝도 없는 듯 했다. 7차. 8차 9차.....마침내 1996년 겨울이 저물고 말았다. 해를 넘겨 1997년 봄이 되었으니 아들이 소록도로 간지도 어느덧 일년이 됐다. 10번째 소록도 방문에서 신기한 광경을 보았다. -양성 나환자 촌 입구에서 아들을 기다리고 있다가 뜻밖의 광경을 목격했다. 병동 밖에서 두 백인 여인이 장갑도 끼지 않은 채 양성 나환자의 허벅지와 등에 난 종기를 소독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저 여인은 백인이 아니요?” 나는 안내소 직원에게 물었다. “아-저 수녀 간호원들 말입니까? 마리안네 수녀와 마가레트 수녀랍니다.” “수녀? 간호원? ” “아-오스트리아에서 온 수녀들인데, 1972년, 국민포장을 그리고 1996년, 작년에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은 천사들이지요. 한센인(나병 환자들) 자녀를 위한 영아원을 운영하며 보육, 자활 정착을 도와 주고 있지요.” “나병 환자를 위한 천사들이라?” 나는 코 끝이 찡함을 느끼면서 돌아왔다. * 소록도를 여러 차례 방문하다보니 아들을 못 만나는 경우도 있었고, 소록도 민가에서 민박으로 하루 저녁을 묵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문둥병자들의 마음 아픈 얘기뿐만 아니라 문둥병 환자를 위해 봉사한 사람들의 아픈 마음도 알게 됐다. -여수에서 애향원이라는 문둥병 병원을 세워 1000여명의 문둥이들을 돌보다가 6.25때 공산군에게 총살당해 죽은 손양원 목사의 일대기를 들으며 나는 존경심이 생겼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꼭 그렇게 하여야만 하나 라는 마음도 품었다. 문둥병과 봉사라는 말이 나오면 의례 미국에서 온 기독교 선교사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데 유교를 신봉하는 나에게는 단지 돈 많은 사람과 기독교에 미친 열성분자들의 몫이 먼저 떠오르곤 했다.- * 아마도 1998년도 어느 가을이었을 게다. 소록도에서 하루 저녁 민박을 하면서 우연히 읽은 소설이 있었다. 소설가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이라는 소설이었는데 꽤나 인기 있었던 소설로 소록도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공감이 가는 소설이었다. 국립 소록도 병원은 일본 총독부에 의해 1916년 5월17일에 자혜의원으로 개원을 했다. 제 2대 원장 하나이와 같은 좋은 의사 원장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원장들은 나병 환자들을 위해 복지 사업을 한답시고 오히려 나병 환자들을 괴롭힌 결과를 초래했다. 일본사람들이 물러난 후, 한국사람 원장들이 이곳 병원으로 부임해 왔다. 원장과 그 부하 직원들은 복지 사업을 통해 나환자들을 위한 천국을 만들겠다고 하는 꿈을 이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병 환자들은 그와 반대로 지옥과 같은 고통을 겪었다. 미래도 희망도 없는 나병환자들에게는 복지 사업보다는 병에서 치유된다고 하는 희망이 더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나병환자들의 천국이 되려면? 복지 사업한다고 나환자들을 동원하여 일을 시키는 것보다 차리리 그냥 놔두는 편이 오히려 나병 환자들의 천국을 만드는 것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나병 환자들은 의욕도 없었으며 오로지 이 세상이 싫기만 한 것이다. 차라리 빨리 이 세상을 떠나 멀리, 평안한 세상으로 가고 싶다는 말이었다. * 여러 차례 국립 소록도 병원으로 면회를 오면서 이곳에서 근무하는 의사들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다. 양성 나환자 촌(입원실)에 있던 나병 환자들은 나병만이 아닌 일반 내과와 외과적인 수술이 요구되는 질병이 문제였다. 사실, 나병의 치료제로는 댚손, 라이팜핀등 몇 가지 약뿐이기에 피부과 의사가 아니라 간호사만의 힘으로도 나병 치료는 너끈히 할 수가 있었다. 나병 환자라고 해서 평생 나병으로만 고생하라는 법은 없기 때문이었다. 고혈압, 중풍, 심장병, 암 등으로 소록도 병원의 중 환자실로 이송되어 가서 치료를 받기도 하며 수술도 받아야 했다. 그런데 내과와 외과 의사들이 없다보니 제대로 치료를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중환자들은 배를 타고 고흥 종합 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게되니 보호자들로서는 마음이 아팠다. 아들의 병세도 해가 갈수록 좋아지기 보다 오히려 악화되고 있었다. “아니? 약을 그렇게 쓰는 대도 왜 악화가 됩니까? 손 가락도 발가락도... 눈썹도 더 없어지며, 감각이 둔화가 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나는 소록도 병원 의사들을 향해 항의를 했다. “나병은 예측하기가 힘듭니다. 전염되는 경로도 불분명하며 병의 진행도 예측 불허입니다. 그래도 꾸준히 치료를 해 보십시다.” 나이 많은 진료부장이 말했으나 믿고 싶지가 않았다. 더더욱 분통 터지는 일이 1999년 가을에 있었다. -2개월만에 소록도를 방문하였을 때였다. 나의 아들은 폐렴으로 인해 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있었는데 코에는 산소 마스크를 하고 있었으며 손등에는 주사 바늘이 꽂혀 있었다. “아니? 이게 웬일입니까? 이 지경이 되도록 가족들에게 연락을 안 해도 된단 말이요!” 나는 큰 소리로 물으며 누어 있는 아들의 손목을 꼭 잡았다. “보호자가 없는 줄 알았습니다.” “뭐요? 보호자가 없다구. 아니 내가 매달 여기에 오는 대도...맙소사!” 결국 일주일간을 이곳 소록도에서 돈을 따로 주고 가까스레 민박을 했다. 알고 보니 민박은 법적으로 금하고 있는데 하도 막무가내로 우기다보니 눈을 감아 주었다. * 문둥병 환자는 사회적으로 그리고 가족으로부터 냉대를 받고 보니 웬만한 질병으로 입원을 해도 가족에게 연락이 없었다. 아니, 연락을 안 해도 상관이 없었다. 문둥병 환자들에게는 인권도 없다는 말인가? 죽어도 그만이란 말인가? 아니었다! (허준이라는 소설에서 보면 그 당시의 문둥병 환자들은 사회와 가족들로부터 철저히 버림받고 산 속에 갇혀 살고 있었다. 산 속이라고 하였지만 동굴이나 움막을 지어 놓고 거지들로 살았다. 어느 궁중 내의(內醫)의 눈물겹고 숭고한 기록이 눈에 띄었다. -유명한 허준 한의사가 존경한 이 궁중 내의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문둥병 환자들의 움막으로 가 맨손으로 침을 놓으며 약을 주어 치료를 했다. 어의가 되기를 포기하고 불쌍한 문둥병 환자들을 치료하다보니 문둥이들도 이 궁중 내의를 존경했다. 그 당시로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파격적인 의사였다. 어의(御醫)자리를 마다하고 문둥병자들을 위해 산골로 내려와 문둥병자들과 같이 먹고 자면서 치료를 해 주다니.... 지금으로부터 400여년 전, 조선 선조(宣祖)시대였다. 그런데 배은망덕하게도 문둥병 환자들은 이 궁중 내의의 사랑하는 아들을 납치해 살해한 후 그 몸에서 간을 빼 내, 먹어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문둥이들을 치료 해주는 궁중 내의의 아들을 문둥이들이 납치하여 죽여 간을 빼 내어 먹다니.... 궁중 내의의 집사들은 문둥병 환자들을 찾아가 아들을 납치해간 문둥이들을 무참하게 살해해 버렸다. 살해 한 후 산을 내려오다가 죽은 아들의 옷을 입고 있는 문둥이의 아들을 발견하였다. “아니! 네가 우리 주인 나리의 아들이 입던 옷을 입고 있다니...너도 죽어라!” 그러나 일단 문둥이의 아들을 잡아 산으로 끌고 내려와 내의 영감에게 보고를 했다. “어떻게 네가 그 옷을 입고 있느냐?” “저는 모릅니다. 단지 생선의 피를 먹었습니다. 생선의 피를....” “생선의 피를? 그러면 이 옷은? 어찌 된거냐?” “모릅니다.” 내의는 벌벌 떨고 있는 문둥이의 아들을 살려 주었다. “네가 무슨 죄가 있다고...어린 네가....”어의는 문둥이의 아들을 자신의 집에서 살게 했다. 그 뿐인가 아들을 살해한 문둥병 환자의 아들을 양 아들로 삼았다. 기가 막혔다. 죽은 아들을 대신해 문둥병 환자의 아들을 양 아들로 삼다니... 궁중 내의의 아내는 이해 할 수가 없었다. “대감? 아들을 죽인 문둥이의 아들을 양아들로 삼다니...나는 못하겠습니다. 대감!” 아들의 죽음을 비관한 아내마저 목을 매어 죽었다. “마님이 목매어 죽었습니다. 마님이...” “뭐시? 마님이 죽었다고?” 아내와 아들을 잃은 궁중 내의는 양 아들을 데리고 아예 산 속으로 들어가 문둥병자들을 치료했다. 양아들로 삼은 아들은 몇 년후 문둥병이 발병하였다. 양아들은 궁중 내의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궁중 내의의 아들을 죽인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으로 인해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 수가 없었다. 불안정한 인간이 됐다. 젊은 허준 의사는 여기 산 속으로 들어와 궁중 내의를 도와 문둥병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둥병 환자들은 순수한 마음을 가진 허준에게 반발을 했다. “당신은 우리를 진정 이해할 수가 없소! 당신은 문둥병 환자가 아니니까...” “문둥병 환자가 아니니까?” 허준은 당황했다. “당신은 단지, 우리를 돕는 치레를 하는 것 일뿐.....” “아냐! 아냐! 나는 너희를 진정으로 대하는 거야! 내의 어르신을 보라! 아들을 너희 문둥병 환자들에게 잃었으며 부모 잃은 그 아들을 양아들로 삼았는데도 너희는 내의 어르신의 마음을 모르느냐?” “어르신은 의사일 뿐, 우리와 같은 문둥병 환자가 아닙니다.” “너와 같은 문둥병 환자가 아니라고? 그렇다면 내가 너처럼 문둥병 환자가 된다면 네 마음을 열고 나를 믿을 수 있겠느냐?” “그렇습니다.” “아-” 허준은 문둥병 환자와 의사의 사이에 크나큰 강이 흐르고 있음을 실감하고 있었다.) “아-아-” 나는 400여년 전 조선 시대에 있었던 의사와 문둥병 환자와의 인간애를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의사가 열정과 사랑을 가지고 문둥병 환자들을 맨 손으로 치료를 한들, 문둥병 환자의 마음은 열지 않았다. 반면 문둥병을 보는 일반 사회 사람들도 돌을 던지며 외면하였던 그 현실은 4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불과 600미터의 바다를 사이에 두고서..... -육지에 사는 사람들과 이곳 소록도에 사는 문둥병 환자들과의 사이는 600미터 밖에 안되는데 실제로 그들 사이의 거리는 태평양과도 같았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곳 소록도 병원에 있는 의사들은 어떠한가? 진물이 흐르는 문둥병 환자의 피부를 맨손으로 만져주면서 치료를 할 수 있는 용감한 의사는 얼마나 될까? 궁중 내의(內醫) 같은 의사는 없는가? 아니 하와이 몰로카이 섬에서 죽은 다미엔 신부와 같은 의사는 없는가? 문둥병자들의 고름을 입으로 빨아낸 손양원 목사와 같은 의사는 이곳 소록도에는 없는가? 내 아들의 손을 꼭 잡고 치료해 주는 의사가 이곳 소록도에 있는가? 없는가? 나는 묻고 또 물었다. 없다고 생각을 했다. “그런 의사는 없어! 없어! 피부과 의사들? 서울에서 성형 수술을 하여 아름다운 여인들을 만들어 주는 것도 좋지만 소록도에 와서 문둥이 피부를 수술해 주는 것도 좋으련만.......그리고 왜? 소록도에는 내과 의사 그리고 외과 의사가 없는 거야? 왜?”- * 1996년 4월15일 소록도에 아들을 입원시킨 후 나는 어느새 20여 차례나 소록도를 방문했는데 이후로도 끝도 없을 것 같았다. 아들의 문둥병이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더 나빠지고 있었으며 아들은 거기에 비례하여 점점 더 우울해 지며 심지어는 내가 방문을 해도 면회를 거부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내 인내심도 점점 둔화되기 시작했으며 때로는 “차라리 죽는 게 낫지.”라는 생각도 했다. 마침내 2002년이 됐으니 6년의 세월이 흘렀다는 말이다. 24번째의 방문은 나를 더 어렵게 만들었다. * 2002년 9월, 가을 추수를 앞두고 소록도를 찾아갔다. -큰 아들이 미국에 간지도 어느새 7년이 됐으며 아들은 크게 성공하여 뉴욕 지사의 지사장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보내준 편지와 사진을 보면 롱 아일랜드에 있는 큰 저택에 살고 있는데, 손자 하나와 손녀의 모습이 너무나 귀여웠다. 둘째 아들도 로스앤젤레스로 간 지 어느새 5년이 됐으며 성격이 특출한 둘째 역시 중견 간부로 큰 일을 해 내고 있다고 했다. 뜻밖에도 작년에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백인여성과 결혼을 했다고 보내준 사진을 들여다보니 마치 영화에 나오는 백인 여배우 같았다. “강석호 선생, 당신은 정말 출세하셨소. 대기업체의 사돈이요, 떵떵거리는 두 아들을 두었으니...부럽소. 부러워. 세상에 태어나 당신처럼 한번 출세를 해보았으면 나는 한이 없겠소.” 안성에 사는 유지들이 한결같이 나를 부러워했다. 사실이 그랬다. 안성 땅에서 서울대학 출신 아들을 둘 씩 둔 사람은 없었으니까....- 9월이라고는 하나 전라도 땅은 더운 김이 물씬물씬 났으며 숨이 헉헉 막히고 있었다. 불길하게도 필립핀 근해에서 태풍이 발생해 3-4일내, 전라도 남해안으로 접근한다고 했다. 서둘러서 소록도로 찾아갔다. 태풍이 오기 전에 다녀오려고.. 소록도에 도착했을 때, 더운 김은 사라지고 비가 오려고 하는 전조가 여기저기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아들은 면회를 거부했으며 끝내 면회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아들과 같은 방에 사는 김정석씨를 불러달라고 했으나 그도 역시 나타나지 않았다. 계속해서 부탁을 하니 거의 한시간이나 되었을 때, 같은 병동에 사는 임 선생이 나타났다. 오랜만에 임 선생을 본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건강 상태가 심각해 보이기 때문이었다. 문둥병이 문제가 아니라 일반 내과적인 문제가 터 커 보였다. 듣기로는 심부전증과 만성 신장 병으로 온 몸이 부어 있었으며 숨이 찬 듯 했다. ‘소록도 병원에는 피부과 의사보다도 내과 의사가 더 필요했다. “병원에 입원을 하시든지...아니면 고흥에 있는 종합병원으로 후송을 가시든지...” “아- 강석호 선생님, 제 걱정은 마세요. 근자에 여기 소록도 병원에 36세 되는 젊은 내과 의사가 부임했답니다. 서울에 있는 세브란스 병원에서 내과 전문의사로 근무하다가 유준 박사의 충고를 듣고 자원해서 여기로 내려 왔다고 합니다. 젊은 나이에...” “그러세요? 젊은 내과 의사가?” “예. 김경민이라는 내과 전문의사인데, 그 이 덕분에 나, 많이 좋아 졌답니다.” “다행이군요. 임 선생님. 그런데 내 아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그렇습니다. 요즘 우울증이 꽤나 심하군요. 말을 통 하질 않구요. 밥도 안 먹고... 그러나 걱정 마십시오. 제가 노력을 하겠습니다. 좋아지겠지요.” “부탁합니다. 선생님!” 나는 임 선생에게 깊은 사의를 표한 후 가지고 온 옷가지와 음식을 전달하고는 힘없이 되돌아오게 됐다. 되돌아오는 길이 너무나 힘들었으며 나 자신도 우울해 지고 있었다. “아들아! 아들아! 힘을 내거라! 네가 말했잖아, 10년이면 완쾌된다고...벌써 6년이 되었는데...” 안성 집으로 돌아 온 나는 기운이 없어 이불을 피고 누어버렸다. 24번째 소록도 방문은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으며 몸져눕게 했다. “더 이상 소록도로 가고 싶지 않다. 더 이상...” 나는 이렇게 결론을 지었는데 이 말이 씨가 되었나보다. 8장: 더 가고 싶지 않은 소록도 길. 추석이 가까웠으며 농사꾼들은 벼 베기를 시작했으나 나처럼 축산을 하는 경우는 조금 달랐다. 닭과 채소 그리고 몇 마리 안 되는 소를 기르는 것도 바쁘기는 마찬가지였다. 10월 초순, 젖소를 돌보고 있었다. 순간 앞이 컴컴해 지며 비틀거리고 있었다. 어지러웠으며 속이 메스꺼워 헛구역질을 하다가 왈칵 토하고 말았다. 그리고 참지 못 할 두통으로 인해 나는 젖소 사육장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아무 것도 기억할 수가 없었다. -사육장에 있던 청년 직원에 의해 나는 구급차에 실려 안성 도립병원으로 이송되었으며 정신을 잃은 나는 중환자 실에 입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인공호흡기(Respirator)에 의해 겨우 숨을 쉬며 생명을 유지할 수가 있었으며 이틀 후에 의식이 회복됐다고 한다. 의식이 회복된 후 내가 한 첫말은 ‘내 아들은 어찌 되었소?’였다고 한다. 병원 직원들은 놀랐다고 한다. 가족도 없이 실려온 60대의 환자로만 알고 있었는데 아들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들은 어디에 있으세요?” 병원 간호원이 물었을 때 나는 “소록도에 있습니다.”라고 더듬거리며 말을 했나보다. “서럭도? 사록도? 소록도!” 간호원은 정확한 발음을 요구하였다고 한다. 병원 직원들은 내가 한 말을 가까스레 알아내고는 아마도 뇌졸증으로 인해 혼동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을 했다고 한다. 뇌-단층 촬영에 의해 나는 왼편 대 뇌에 심한 뇌출혈이 발생했으며 운 좋게 회복이 된 듯 했다. 며칠 후 나는 일반 내과 병실로 옮겨졌으며 물리치료를 받게 됐다. 오른편 팔과 다리가 마비가 되었기에 나는 나 스스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간호사와 물리치료사의 도움으로 겨우 설 수가 있었으며 걷기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가족이 없기에 또 다른 문제가 생기고 있었다. -병원비를 제 때 낼 수가 없었으며 퇴원을 한다고 해도 도와줄 식구가 없었다. “강석호씨? 아드님을 오라고 하시든지요? 미국에 있다면서요?”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소록도에 있습니다.”라고 가까스레 대답을 했다. “소록도?” 병원 직원들은 내가 정신적으로 이상이 왔다고 단정했으며 수소문 끝에 공도에 살고 있는 처가집 식구들을 찾아내게 됐다. 공도에 사는 처남식구들이 찾아와 겨우 병원비를 지불했으며 양로원으로 가기로 잠정 합의를 했다. “아니? 강석호씨가 양로원으로 간다구요? 말도 안되지! 아들이 셋씩이나 있는데...아니? 미국에 가서 떼 돈을 번다는데...” “그러게 말여. 사돈이 재벌인데, 양로원으로 보내다니...쯧쯧...” 그래도 나에게 다행스러운 것은 비록 일찍 세상을 떠났다고는 하나 아내가 있었으며 그 후 결혼도 않고 세 아들을 데리고 살아오면서 가끔 만났던 처가집 식구들이 내게는 보호자가 돼주었다. 우선 양로원으로 옮겨 물리 치료와 언어 교정을 다시 해야 했다. 오른쪽 다리에 힘이 없으니 일어나기 힘들었다. ‘어서 속히 일어나야지...아들을 보러 소록도로 가려면...’나의 오로지 소원은 소록도에 가 아들을 만나 보는 것이었을 뿐...그러기에 희망이 있었다. 희망이 있다보니 회복이 빨랐다. 2002년 추운 겨울은 이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소록도의 아들을 못 본 지도 어느새 3개월...... 2003년 일월 말, 나는 스스로 일어나 몇 발작을 떼어 놓을 수가 있었으며 웬만한 말도 따라 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글자도 구별할 수 있었으며 대 소변도 혼자 할 수가 있으니 사람구실을 하기 시작했다. 양로원에 있으면서 내 재산은 많이 정리가 됐다. 양계장과 젖소들은 처남에게 넘겨 주고 대신 그로부터 생활비와 양로병원 비용을 받았다. 모든 것이 처남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사람이 육체적인 자유를 잃어버리고 보니 정신적인 자유도 사라지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한가지, ‘아들에 대한 생각’이 강하다보니 망망 대해에서 표류하던 배가 멀리 뵈는 등대 불을 좇아가는 느낌이었다.- 2003년 3월은 이곳 안성에도 찾아 왔는데, 아직도 추운 날이요 가끔 진눈개비가 내리곤 했다. 저녁 무렵이었다. 눈을 감고 누어 있었다. 지나간 옛 일들이 눈 앞에 선했다. 순간 아무도 없는 나의 방으로 누가 들어온 듯했다. 눈을 뜨고 보니 모자를 깊이 눌러 쓰고 검은 잠바와 말쑥한 양복바지를 입은 남자였다. 그가 내 아들임을 직감했다. “아들아!” “아버지!” 아들의 손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장갑을 낀 손이 내게 다가왔다. 그의 손을 왼손으로 잡고 힘없는 오른쪽 손을 포개려고 했다. 아들은 나를 보면서 흑흑 울고 있었다. “아버지, 아버지가 이렇게 누워 계신 것도 모르고 아버지를 원망하다니요....” “원망?” “아버지가 오시지 않기에...제가 만나드리지 않아서....” “아니다. 아냐. 내 전생에 지은 죄의 값으로....이렇게 벌을 받은 거여.” “아버지! 내가 여기 남아서 아버지를 돕겠습니다.” “그럼 너, 문둥병이 다 나았다는게냐? 완치됐느냐?” “아니요. 아버지. 그래도 여기서 아버지를...돕겠습니다. 아버지.” 내 머리 속에는 아직도 전생에 지은 죄와 그 죄의 대가를 치루고 있는 나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 순간 병원 간호원이 수위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왔다. “강석호씨! 여기에 문둥병 아들을 들이면 어쩔러구! 차라리 퇴원을 하던가, 아니면 아들을 쫒아 내시든지. 문둥병 환자를 감히 여기에 드리다니!. 다른 환자들이 알면 큰일이니. 어서 나가시오. 어서.” 수위는 아들의 잠바를 끌어 잡아당기고 있었는데 혹시라도 병균이 옮을 가봐 당혹해 하는 표정이었다. “안돼요! 아버지가 이렇게 되었는데, 내가 있어야돼요! 그러니....” “잔말 말고 나가라구! 잔말말구.” 수위는 아들을 질질 끌고 밖으로 나갔다. 아들은 나를 바라보며 울먹이고 있는 것 같았다. “안돼!” 나는 소리를 치며 벌떡 일어났으나 오른 쪽 다리가 약한 것을 잊었기에 침대에서 바닥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아버지! 아버지!” 라고 부르는 소리가 점점 작아지는 것으로 보아 아들은 비참하게 양로원 건물 밖으로 쫒겨 나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버지가 버젓이 보는 앞에서 문둥병 아들은 ‘아버지’만 부르다가 쫒겨 나가고 있었는데 어느 누구 하나 거들어 주는 사람은 없었고 오히려 그것이 더 정당한 듯이 바라다보고만 있었다. 그것이 20세기 말의 현실이었다. 400년 전, 선조시대 때의 문둥병 환자나 금세기나 다를 바가 없는 듯 했다. ‘이것이 바로 사회 정의요 질서’였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이를 악물고 물리치료에 임했다. ‘한 발짝이라도 더 걸어야 한다. 말을 더 잘하도록 훈련을 하자. 이것만이 내 아들을 찾아가서 보는 방법이었다. 이것만이.....‘ * 봄이 오니 모든 것이 소생하듯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큰 아들과 둘째 아들이 며칠 사이로 미국에서 나를 찾아 왔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아버지! 보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한 후 “너무 바빠서 아버지를 못 모셨습니다.”라는 변명이 붙었다. 어쨌거나 나는 그들이 찾아 준 것만도 기뻤으며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그것도 이틀, 그들은 바쁘다는 이유로 훌쩍 미국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물론 꽤 되는 돈을 통장에 넣어 주긴 하였지만... 아들 들이 다녀간 후 양로원으로부터 대접이 훨씬 융숭해졌으며 물리 치료와 언어치료도 더 강화됐다. 내가 보아도 하루하루가 달랐다. 그것은 돈으로 주고 산 치료라기보다 ‘아들을 만난 기쁨과 만나려고 하는 희망’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적으로 성공한 두 아들보다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저주받고 외로운 소록도에서 보내고 있을 셋째 아들을 만나고자 하는 희망 때문이었다. 2003년 7월 마침내 양로원에서 퇴원을 해 안성 집으로 돌아오게 됐다. 이젠 지팡이를 짚고 웬만큼 걸을 수가 있었으며 말도 예전처럼 자유롭지는 않나 읽고 쓰고 듣고 했기 때문에 더 이상 울타리 속에 갇힌 짐승처럼 양로원에 있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끊임없는 첫째와 둘째 아들의 효도 때문이었다. “아버지! 회복되시는 대로 미국으로 오셔서 더 좋은 치료를 받아 완치하십시다. 그리고 이젠 이곳으로 오셔서 손자 손녀들과 같이 즐기시고 평안하게 사십시오.” 그리고 그들은 나를 미국으로 초청하는 수속을 하고 있었다. 2003년 가을쯤 미국으로 데려갈 계획이었다. 나도 또한 마음이 바뀌고 있었다. 가족도 없이 텅빈 안성 집에서 일주일에 몇 차례 돈 받고 찾아와 주는 가정부의 도움을 받고 사느니 며느리와 아들들과 사는 편이 좋으리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 웬일일까? 미국으로 갈 준비를 하면 할수록 소록도로 가고 싶은 욕망이 더 커지고 있었다. 소록도로 가는 길 대신 미국으로 간다고 하는 것이 마치 셋째 아들을 배신하고 고향과 나라를 배신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냐! 소록도로 가야 해...” 매일같이 걷기 연습도 하였으며 안성 시외버스를 타고 천안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연습도 했다. 생각보다 더 많이 걸을 수도 있었으며 피곤하지 않았다. 2003년 11월, 중풍에 걸린 지 일년 4개월만에 소록도로 가는 버스를 타게 됐다. * 25번째 가는 소록도 길이었다. 비록 지팡이를 집고 절룩이기는 했으나 버스타고 소록도 가는 데 큰 지장은 없을 것 같아 기뻤다. 물론 그동안 버스타고 다니는 연습을 충분히 했으니까... 오른쪽 손에 힘이 없고 오른 손 팔꿈치가 덜 펴져서 엉거주춤한 모습이지만 그 팔에 가벼운 손가방이 하나 덜렁 걸려 있었다. 지난 수년간 타고 다녔던 그 버스를 타고 천안으로 가 다시 호남선으로 갈아타고 광주에 도착하니 다소 피곤했다. 그러나 아들을 본다는 긴장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문둥병 환자라고 양로원까지 찾아 왔다가 아버지 앞에서 수위에게 끌려나가며 “아버지! 아버지!”라고 부르던 그 목소리가 처절하게 내 귀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래! 아들아!”손을 불끈 쥐어 보았다. 가는 길에 보았던, 추수가 끝나고 난 후의 논과 밭, 그리고 멀리 보이던 단풍나무들이 겨울을 예고하고 있었다. ‘인생의 겨울도 마찬가지라고 느껴졌다. 내 나이 이제 겨우 58세인데, 중풍이라니...중풍...말도 안됐다. 내가 어느새 불구자, 노인이 되다니..... 백양사, 장성백이를 넘으면서 보았던 앙상한 나무들과 뒤늦은 단풍나무같이 초라하구나...‘ 인생이 이곳에서 끝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더욱이 이번 소록도 방문을 마치고 미국으로 가게 됐으니, ‘이번 소록도 방문이 마지막 길이구나..’ 모든 것을 내 머리 속에 가지런히 담아 두고 싶었다. 순천을 거쳐 녹동 항구에 도착하니 어느새 어둑어둑한 저녁이 됐다. 겨울을 맞이하는 녹동 항구에 달라진 것이 있었다. 녹동항구와 소록도를 연결하는 소록도 대교가 어느새 착공이 돼 여기저기에서 골조가 올라가고 있었으며 항구가 건설로 인해 지저분해진 느낌이었다 “아니? 강 선생 아니랑가요? 근데, 웬 지팡이는?” 여관집 아주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큰 소리로 반가와 하며 물었다. 이럭저럭 일년 3개월만에 만나고 보니 마치 수십 년을 못 본 듯했으며 더욱이 절룩거리며 지팡이를 짚은 나를 본 여관집 주인의 눈에는 더 더욱 감회가 깊었나보다. -지난 해 이곳을 방문한 후 갑작스레 생긴 중풍으로 병원에 입원했던 일들을 설명했다. “아-그랬었군요? 그런데, 왜 강 선생님은 자신을 학대하십니까? 어째서 그런 일이 전생의 죄라고 생각을 합니까?” “그거야, 전생의 업보라고나 할까요....” 여관집 아주머니는 아니라고 했다. 그 뿐인가 이곳 소록도에 와 있는 문둥병 환자들은 어느 누구의 죄도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그동안에 생겼던 일을 설명했다. -2001년에 착공된 소록도와 녹동을 연결하는 다리 공사가 시작되었을 때, 여관집 아주머니는 그녀가 막연하게 생각하였던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했다. 600미터 밖에 안 되는 소록도와 육지가 마치 태평양과도 같이 멀었으며 소록도에 사는 문둥병 환자들이 느끼던 마음의 고통도 다리가 연결되어 서로의 마음을 터놓던 날, ‘문둥병 환자들도 우리와 꼭 같은 인간이 되리라고 생각’을 했는데 과연 그 꿈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했다. 소록도 대교는 오늘도 조금씩 조끔씩 진척되고 있었다. 이제 다리의 윤곽도 사람들의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다리가 진척되는 만큼 육지 사람들과 소록도 환자들과의 사이는 비례해서 가까워지고 있다고 여관집 아주머니는 울먹이며 말했다.- * 뜬눈으로 밤을 세웠다. 처음 아들을 데리고 오던 그날보다도 더 가슴이 떨렸다. -내일, 마지막으로 아들을 본 후 미국으로 가버리고 마는데, 언제 다시 아들을 볼 수 있을까, 아- 이것이 마지막 소록도 방문이겠구나. “아-이제 미국으로 가면 언제 아들을 다시 본단 말인가? 언제?”- 다음날 아침, 소록도로 가는 통통선을 탓다. 지팡이를 짚고 배에 오르니 선원이 나를 부축해 주면서 특별히 앞자리에 앉으라고 권했다. “아니? 그 동안, 몸이 불편하셨군요?” 선원은 나를 알아보고 친절하게 부축해 주었다. “예. 천벌을 받았지요. 몹쓸 놈의 중풍을 받았지요.” “천벌이라니요? 무슨?” 선원은 가볍게 나를 힐책했다. 600미터의 바닷길, 단 7분만에 도달한 ‘눈망울이 큰 작은 사슴의 섬, 소록도’의 제일 안내소에서 아들의 면회를 신청했다. “자! 가셔서 만나시지요” 나는 허락을 받고 소록도 2번지를 향해 걸었다. 절룩거리며 걷다보니 꽤나 먼 길이었다. 제2 안내소에서 나와 아들은 마침내 만났다. 놀랍게도 조금 남아 있던 철조망도 다 없어졌으며 그곳에는 “당국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라는 안내판이 유난히도 크게 써 있었다. 양성 나환자의 수가 서기 2000년을 지나면서 현저히 줄어들었으며 섬에서 탈출을 하려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이젠 감염의 위험성도 많이 줄었기에 철조망은 더 이상 필요 없었다. 철조망이 없어진 양성 나환자 촌을 보면서 기뻤다. -나의 아들도 머지 않아 완치되리라는 기대를 갖게 되었으니까...- “아버지! 오셨군요? 그동안 아버지를 섭섭하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아버지, 계획대로 형님들이 계시는 미국으로 가셔서 평안한 생활을 하십시오. 3년이 지난 후에 오세요. 아버지!“ “3년 후에? ” “예. 3년 후에, 아버지. 건강하세요.” “그러마! 홍조야.” 나는 울고 말았다. * 아들과 이별하기 전에 들은 슬픈 소식이 하나 있었다. -나대신 아버지처럼 대해 준다는 임 선생의 병세가 악화되기 시작해 이젠 숨이 차고 몸이 부어 소록도 병원 중환자실을 오고간다고 하는 말이었다. ‘나대신 아버지처럼 아들을 돌봐 주었다고 하던데....’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소록도 중앙교회 앞을 지나면서 임 선생이 어서 속히 회복되기를 두 손 모아 기원을 했다.- ‘저기 보이는 저 교회당의 의미가 과연 무엇인가?’ ‘나약한 문둥병자들을 위해 저 교회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는 중앙교회를 바라다보면서 반신반의 하고 있었다. 지팡이를 짚고 절룩이며 뒤돌아다 봤다. 가엾게도 내 아들은 안내소 벽에 기대어 내가 멀어져 가는 모습을 바라다보며 울고 있는 듯했다. 이제 이 소록도를 벗어나면 겨울동안 이곳에 올 수가 없으며 봄이 되면 미국으로 가 두 아들을 만나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여야 했다. 소록도에 펼쳐진 마늘밭과 고추밭에는 추수 후에 남겨진 쓰레기들이 어지럽게 나뒹굴고 있었다. “아들아! 아들아!” 나는 참고 참았던 서러운 눈물을 한하운의 비석 앞에 뿌리고 말았다. -“아득히 아득히 몇 억겁을 두고 두고/ 울고 온 소리냐, 인골적 소리냐/ 엉엉 못 살고 죽은 생령이 운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 뿐이더라/” 그러나, 이젠 더 이상 찾아오지 못할 길이 됐다.- 녹동 항구로 가는 통통선을 도저히 탈 수가 없었다. ‘이제 통통선을 타게 되면 더 못 올 소록도 길이 된다니....’ 조금이라도 더 여기 소록도에 있고 싶었다. 저녁이 되어 캄캄해지고 있었다. “강 선생? 이번 배가 마지막 배입니다. 어서 타시죠.” 여객선 안내원이 내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 “강 선생. 여기 소록도에서 더 있으려우. 자 가십시다. 녹동으로...” 안내원은 강제로 나를 배에 태웠다. 마지막 배를 타고 소록도를 벗어나고 있었다. 녹동 항구에 있는 두 개의 등대불이 오늘 따라 밝게 비쳐지고 있었다. 비릿내 나는 녹동 항구의 부두에 도착했다. 철썩거리는 바닷물 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 여관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마치 패잔병의 걸음처럼 무거웠으며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드님과 이별을 하고 오시는군요? 강 선생님!” “그렇습니다. 이젠, 아들을 보기가 힘들게 됐습니다. 그래도 언젠가는 꼭 다시 찾아오렵니다. 꼭...” “언젠가라면? 3년이라고 했죠? 3년!” “그렇습니다. 3년.” * 안성 집으로 되돌아 오는 길은 피곤하고 힘든 길이었다. 그러나 더 괴로운 것은 이별이라는 아픔이었다. “아- 미국으로 가야하나? ” 나는 미국으로 가려는 계획 앞에서 무기력한 아이에 불과 했다. “왜? 고향, 안성을 버리고...미국에 가야한담...안성은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고향인데.” 9장: 미국으로 2003년 겨울은 유난히도 매섭게 추웠기에 바깥 출입을 삼가라는 의사들의 권유를 따라야했다. 안성 땅에도 눈이 내리고 찬 바람이 불었다. -“아버지, 곧 미국으로 오십시오. 이곳 로스앤젤스는 따뜻합니다. 제가 곧 모시러 나갈 테니 준비해 두세요. 둘째 아들 드림.”- 2004년 1월 28일 마침내 둘째 아들이 나를 미국으로 데리고 가려고 안성으로 찾아 왔다. 아들을 만나는 순간 마음이 포근하였으며 마치 망망대해에서 등대를 발견한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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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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