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내고향은 소록도 파트 4

2012.01.23 12:31

연규호 조회 수:612 추천:20

9장: 미국으로 2003년 겨울은 유난히도 매섭게 추웠기에 바깥 출입을 삼가라는 의사들의 권유를 따라야했다. 안성 땅에도 눈이 내리고 찬 바람이 불었다. -“아버지, 곧 미국으로 오십시오. 이곳 로스앤젤스는 따뜻합니다. 제가 곧 모시러 나갈 테니 준비해 두세요. 둘째 아들 드림.”- 2004년 1월 28일 마침내 둘째 아들이 나를 미국으로 데리고 가려고 안성으로 찾아 왔다. 아들을 만나는 순간 마음이 포근하였으며 마치 망망대해에서 등대를 발견한 듯 했다. 안성집을 정리했으며 뒷 처리를 처남에게 부탁했다. 한편, 이제 안성을 떠난다고 생각을 하니 마치 먼 화성으로 귀양을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비록 추운 겨울이기는 했으나 아들을 데리고 선친과 조부가 묻힌 안성, 비봉산 기슭을 찾았다. 눈이 온 산길이 나에게는 버거웠으나 미국으로 가기 전에 조상님들에게 하직 인사를 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을 했다. ‘미국 사람들은 조상도 모르고 산다는데...’ 미국이란 나라가 달갑지 않았지만 중풍으로 손을 제대로 못쓰는 입장이니 아들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미국에 가서 몸조리 잘하시고 완쾌되어 돌아오세요. 강석호 씨. 어쨋든 부럽습니다. 아들을 잘 두어서...” 안성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미국으로 간다는 소문이 쫙 퍼졌다. * 2004년, 2월 7일, 마침내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게 됐다. 비록 지팽이를 짚기는 했으나 든든한 아들과 같이 비행기를 타고 보니 마음이 놓였다. 불구자처럼 휠체어에 앉기를 거부하고 비록 힘은 들었으나 당당하게 걸어서 비행기에 탑승을 했다. 평생 처음으로 타보는 국제선 비행기였는데 과연 큰 비행기에 수 많은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다. 이 비행기가 이륙하면 나는 미국으로 가 살다가 그곳에서 죽어 묻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인천 공항과 멀어져 가는 한국을 마음 속 깊이 묻고 싶었다. -로스앤젤스에 있는 작은 아들의 집에서 잠시 머물다가 뉴욕으로 가 첫 아들의 집에서 살기로 예정됐다. 필요에 따라 작은 아들이 사는 로스앤젤스에 가게 되겠지만 아무래도 큰 아들의 집에서 살기로 했다.- 비행기는 태평양 상공을 10시간 이상을 비행하여 마침내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스 국제 공항에 도착했다. 태평양을 날아 10시간---- -내게 있어 그 시간은 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버린 시간이었다. 59년간 살아온 한국을 버렸음은 물론, 내 모든 명예와 희망도 다 버리고 빈 몸으로 도착한 셈이었다. 그리고 내게는 “전생에 지은 죄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는 막내 아들에 대한 죄책감”을 떨쳐 버리려고 했으나 그것은 반대로 더 심각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빈 마음과 병든 몸으로 잘 난 두 아들에게로 찾아 온 패장과도 같았다.- 로스앤젤스 공항 대기실에서 만난 둘째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손녀 딸을 보면서 나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듣던 대로 둘째 며느리는 한국 사람과는 영 다르게 생긴 얼굴을 하고 있었으며 한국말로 “아버님 어서 오십시요!”라고 인사를 했기에 그나마 내 식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녀 딸은 한국 사람과 히스페닉을 적당히 섞어 놓은 예쁜 혼혈의 아이였다. 눈이 유난스레 맑았으며 머리카락은 검은 색과 금발이 섞인 갈색이었다. “그랜드 파! 웰컴!”이라고 띠엄띠엄 말을 할 때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와! 내 손녀 딸....” 나는 손녀 딸을 포옹했다. 공항 청사를 나오면서 내 눈에 띈 야자나무가 “아- 여기가 바로 아열대로구나!”라는 느낌을 주었으며 새로운 세상임을 실감하게 했다. 둘째 아들은 내 손을 잡고 연신 말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 잘 오셨어요. 여기서 저희들과 같이 사십시다. 저희가 잘 모시겠습니다.” 옆에 서 있는 며느리도 그 말의 뜻을 아는지 “예스. 대디. 예스.”라고 반복을 해 주었다. 아들이 직접 운전하는 승용차에서 나는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로스앤젤스를 바라다 보았다. 역시 이곳 로스앤젤스도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는데, 여러 종류의 인종들이 어울려 있어 안성에서 온 내 눈에는 신기함을 더하여 주었다. 30분이나 달렸을까, 우리를 태운 승용차는 한인타운에 속한다는 ‘행콕. 팍Hancock park)'의 큰 저택 앞에서 멈추었다. “아니? 이게 너의 집이냐? 대궐 같구나...” “예. 아버지. 이곳에서 저희들과 같이 사는 겁니다.” “그래.” 나는 고개를 끄떡였다. -한인타운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으며 아들과 같이 그 곳으로 나가 점심 식사를 했다. 여기저기에 쓰여진 한국 간판들이 나를 위로해 주었다. 일부러 찾아 가 보여준 ‘김방아’란 간판이 나를 더더욱 포근하게 해 주었다. “저기 저 김 방아간 주인은 금년에 100살이 된답니다. 100살이요.” “100살? 한국사람인데?” “예, 김씨니까, 한국사람이지요.” 로스앤젤레스는 우선 날씨가 포근해 좋았다. 한국을 떠날 때 안성은 꽤 나 추운 겨울이었는데 여기 로스앤젤스는 포근하다 못해, 꽃이 여기저기에 피어 있었다. 한국의 5월과도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랜만에 아들과 같이 김치 찌개와 된장 찌개를 먹으면서 죽은 아내가 해준 김치, 된장 찌개를 먹고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툰 젓가락질을 멈추고 포크로 김치를 물에 빨아먹고 있는 외국 며느리를 보면서 나는 “아- 여기가 로스앤젤스이로구나.”라고 본연의 자리로 돌아오게 됐다. 그날, 저녁 다소 피곤하여 눈이 감기고 있었으나 아들과 며느리를 옆에 두고 미국 텔레비존 속에 나오는 한국 방송을 시청하면서 또 한번의 착각을 하고 있었다.- 미국에 도착한 첫날, 나는 한국과 미국으로 왔다갔다하는 혼돈 속에서 지내다가 밤 늦게서야 피곤에 지쳐 푹신한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깨끗하게 단장된 내 방은 생각보다 넓었으며 특별히 불구자를 위해 설치된 샤워 시설과 화장실이 내 마음을 즐겁게 했다. 따로 마련된 텔레비존과 전화기가 나의 방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으며 둘째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손녀 딸이 환하게 웃고 있는 큼직한 사진이 나를 즐겁게 했다. 그날 밤, 나는 많은 생각을 하면서 엎치락 뒤치락거리고 있었다. -죽은 아내와 어머니, 그리고 비봉산과 약수터가 있는 안성...그리고 셋째 아들이 살고 있는 철조망의 섬, 소록도가 밤새 나의 눈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다음날 아침, 나는 멀리 뉴욕에서 걸려온 큰 아들과 며느리의 전화를 받으면서 비로소 미국이 큰 나라임을 실감했다. 뿐만 아니라 영어로만 “그랜드 파!”라고 부르는 큰 손자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내가 이토록 늙었음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 로스앤젤스에서 약 1개월간 머무르면서 나는 한인타운에도 나가고 한국 방송도 들으면서 이곳에 익숙해졌다. 그럴 무렵, 뉴욕에 있는 큰 아들과 며느리가 나를 데리러 왔다. “여기에 있게 해다오.” “안됩니다. 뉴욕으로 가셔야지요. 뉴욕.” 큰며느리와 아들이 말했다. 무엇보다도 큰 며느리는 둘째 며느리가 외국인이라 언어도 안 통하며 불편하니 한국 며느리인 자기와 같이 살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 이면을 보면 큰 며느리라는 자존심과 큰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모른 체 한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다는 이유가 더 컸다. -일개 월 동안 나는 히스페닉계의 둘째 며느리와 많이 친해지고 있었다. 작은 며느리는 생각보다 시아버지인 내게 대한 배려가 컸으며 마음도 시원스레 열고 대했기에 별 불편이 없었다. 흰 피부에 활짝 웃는 히스페닉 특유의 미소가 내 마음을 부드럽게 했다. 더 좋은 것은 이곳 로스앤젤스에는 많은 한국인, 특히 나와 같은 중년과 노인들이 꽤나 많이 살고 있기에 쉽게 친구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59세의 나이는 젊은 할아버지였다. 70이 넘은 한국 노인들 중에 운전도 하며 골프도 치는 튼튼한 사람들이 부지기 수 였기에 나는 영어 학교나 컴퓨터 학교에라도 입학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는데 뉴욕으로 가자고 하니 처음에는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큰 아들의 간청과 그의 위신도 생각해야 했다. - 2004년 3월 초, 나는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게 됐다. 뉴-욕- -또 다른 도시였다. 언뜻 보기에는 지저분한 맨하탄에서 잠시 외곽으로 나가면 수풀이 우거진 아름다운 전원 도시와 바닷가가 시원스럽게 펼쳐졌다. 뉴욕에서 조금 떨어진 나소 카운티(Nasau County)에 있는 글렌 코브(Glen Cove) 라는 해안도시에 큰 아들의 집이 있었다. 대서양이 보이는 언덕에 있는 대 저택이었다. 붉은 벽돌로 지은 오랜된 건물과 근자에 신축한 초 현대식 작은 건물, 그리고 초목이 우거진 정원이 마치 한 폭의 그림을 이루는 듯한 글렌 코브의 집은 안성의 내 집을 초라하게 만들었다. 큰 며느리는 역시 재벌의 딸 답게 우아하게 가정부를 하나 두고 시간의 여유를 즐겼다. 뿐만 아니라 시아버지에게 큰 관심을 갖고 잘 대해 주는 편이었다. 9년 전에 결혼을 해 아들을 하나 그리고 작년에 딸을 나았으니 나에게는 손자 하나 손녀 하나가 되는 셈이었다. 큰 손자는 어느새 8살,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아침이 되면 노란 색깔의 학교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갔다가 3시가 지나면 집으로 돌아왔다. 한국 말이라고는 “할아버지, 밥 줘!” 등 몇 개 안되는 단어뿐, 대부분 영어로 떠들고 있었다. 그래도 내게는 사랑스러운 강씨의 대를 이을 종손이었기에 그를 볼 때마다 대견스러웠다..- 영어를 못하며 자동차 운전도 못하는 나로서는 뉴욕은 거대한 감옥소라고 보아야 했다. 설령 탈출을 한다고 해도 어디로 가야할지 전혀 종잡을 수 없는 그런 곳이었다. 아침에 먹는 뻐터 바른 빵과 밀크가 싫었다. 그렇다고 바쁜 며느리에게 밥을 해 달라고 말하기도 어려워서 가끔 가정부에게 한국 음식을 부탁도 하였으며 라면도 얻어 먹었다. 로스앤젤레스보다 더 불편한 것은 한국 테레비존과 라디오 방송의 시간이 조금은 짧아서 듣기 힘든 미국 방송도 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보소! 한국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은 여기 없소?” 나는 한국인 가정부에게 물었다. “예, 할아버지? 여기, 롱 아일랜드에는 한국 사람들이 얼마 안되고요, 후러싱이나 뉴저지 버겐 카운티에 가면 많이 모여 살지요.” “얼마나 먼데요?” “아이구, 지하철 타고, 버스도 타고 가면 약 한시간 반은 걸리고요...그런데 지하철은 못타요. 너무 비집어서....” “그럼 댁은 여길 어떻게 왔소?” “예. 저야, 후러싱에서 버스를 두 번 갈아 타고 오지요.” “후러싱에 가면 한국사람이 많소?” “예. 한 7만명은 되겠지요.” “그렇게나 많이?” 나는 깜짝 놀랐다. 뉴욕에도 여기저기에 한국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뉴욕을 좋아 하는 사람은 다른 도시에 안 갈려고 한다는 묘한 사실도 알게 됐다. * 비록 지사장의 일로 바쁘게 지내는 아들이었지만 한국에서 온 아버지를 크게 배려해서 주말이나 휴일에는 어김없이 밴을 타고 뉴욕과 인근에 있는 좋은 곳으로 데리고 갔다. 롱 아일랜드의 맨 마지막 끝에 있는 맨톡과 그곳에 있는 등대를 보노라니 소록도에서 빤히 보이는 녹동 항구의 등대가 생각났다. 그래도 나는 글렌코브 이층에서 멀리 내려다 보이는 대서양을 바라다 보는 것을 낙으로 삼고 살았다. 멀리선 보이는 대서양은 푸른 색깔이 마치 소록도 앞으로 펼쳐진 그 바다와 다를 바가 없었다. 바다는 역시 넓은 마음으로 좁은 우리들을 포옹해 준다고 느꼈다. 아들과 같이 만하탄에 간 일이 있었다. 바둑판 처럼 쭉쭉 뻗은 길을 따라 가다보니 온갖 인종들이 다양한 옷을 걸치고 있었다. “와! 여기, 뉴욕은 마치 인간 전시장 같구나.” “그렇죠, 아버지. 그런데 이 번화한 만하탄 섬을 미국 사람들이 단돈 24 달라를 주고 인디안들로부터 삿다고 합니다.” “24달러? ” “예. 지금 돈으로 치면 꽤 많겠지만 아주 헐값으로 산거지요. 마치 알라스카를 헐값에 샀던 것처럼 말입니다.” 나와 아들은 모처럼 삼복 식당(三福 食堂)에 들려 한식을 먹으며 오봇한 시간을 가져 보았다. 큰 아들을 생각할 때마다 느껴 오던 감정이 있었다. ‘아들을 재벌 집에 빼앗긴 느낌이었다. 아니 돈에 팔려 갔다고 느꼈었다.’ 장가 든 이후 그는 바쁘다는 핑계로 안성에 들리지도 않았으며 셋째 아들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버지에게 동정심도 없어 보였다. 비록 부족하더라고 내 곁에서 나와 같이 동고동락하는 그런 아들을 갖고 싶었다. 큰 돈을 벌거나 지위가 높아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나와 같이 숨쉬고 같이 울고 웃는 그런 가족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뉴욕에 와서 잠시나마 그런 시간을 갖게 되니 마음이 뿌듯했다. * 뉴욕에서 아주 단순한 생활 속에서 하루하루를 만족해야 했다. 운전도 못할뿐더러 아들이 너무나 바쁘다보니 어디고 가자고 부탁을 할 수가 없었으며 며느리는 나와 격이 맞지 않는지 대화가 쉽지 않았다. 하루에 달랑 몇 시간 방영되는 한국 라디오와 텔레비존이 그런대로 나를 즐겁게 해 주었으며 일주일에 한번씩 가정부가 빌려오는 한국 비디오가 유일한 나의 벗이었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됐다. 로스앤젤스에 사는 둘째 아들의 가족이 잠시 다니러왔다. 그리고 그들과 같이 큰 차를 타고 와싱톤과 뉴저지를 여행했다. 오랜만에 나는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즐거움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러나 둘째가 로스앤젤스로 가버리고 나니 찾아오는 것은 더 큰 외로움과 그리움이었다. -소록도에서 나를 생각하고 있을 셋째 아들이 더 더욱 그리워지고 있었다.- 큰 아들은 내 마음을 뚫어 보았는지 다음날부터 나를 데리고 가끔 만하탄과 후러싱으로 갔다. 그곳 노인정에서 노인들을 만나 담소를 즐기게 되었다. -노인정에서 나는 이곳 뉴욕에 와 살고 있는 노인들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게 됐다. 그리고 매 주 화요일마다 찾아오는 후러싱 교회의 목사가 내게 접근했다. 그는 기독교를 전도하려고 무던히 노력을 하면서 내 외로움을 덜어주려고도 했다. “강 선생님, 셋째 아드님의 병은 결코 선생님의 죄 때문에 받고 있는 천형의 벌이 아닙니다.” “아니라구요? 무슨 말씀이요?” “ 어느 사람이고 다 하나님의 계획대로 태어난 것입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괜히 나를 어설프게 위로하려 하지 마시오.”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껴 보십시오. 강 선생님!” “하나님의 사랑? 여보소! 이젠 그런 얘기 하지마소!” 나는 그 목사가 싫어졌다. 마침내 노인정에 찾아가는 것을 중지하고 말았다. 대신 만하탄에 있는 노인회를 찾아가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오히려 내게 도움이 됐다. 그리고 더 유익했다. 왜냐하면 영어만 쓰는 손자와 약간의 대화를 할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 뉴욕의 가을은 한국과 아주 비슷했다. 낙옆이 떨어지며 찬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큰 아들은 둘째 아들과 상의를 한 후 나를 데리고 로스앤젤스로 가기로 했다. “아무래도 따슷한 로스앤젤스로 가서 겨울을 나시고 다시 오시지요. 아버지.” 중풍을 앓고 난 후부터는 추운 겨울이 싫었기 때문에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11월 중순 로스앤젤스로 다시 돌아 왔다. 솔직히 뉴욕보다 로스앤젤스가 더 좋았다. 왜냐하면 둘째 아들의 집은 한국 타운에 있었기 때문에 걸어서 나 혼자 노인회와 영어 학교에 갈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더 큰 이유는 둘째 며느리가 첫째 며느리보다 말은 안 통했으나 더 부드럽고 대하기가 편했기 때문이었다. 12월 그리고 2005년 1월, 여름만 있다고 생각한 로스앤젤스에도 겨울다운 정취가 있었다. 다소 쌀쌀해지기도 하며 가끔 비가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인타운에는 동양 선교교회를 비롯한 많은 교회가 있었으며 천주교도 있었기에 뉴욕보다 더 변화가 있어 좋았다. 그뿐인가 라디오 티비 방송국 그리고 한국, 중앙일보가 가까이 있어 교양 강좌도 여기저기에서 열리고 있었다. 북한을 찬양하는 좌파 세력들의 모임도 가끔 눈에 띄였다. 중풍을 앓았던 노인 친구와 같이 찾아간 양로원이 인상적이었다. 한국 같으면 의욕도 없이 하루를 보냈어야 하는 노인들이 활력을 갖고 부지런히 무엇인가를 하고 있었다. 꽤 큰 교회의 목사님이 다음과 같은 얘기를 했는데 퍽이나 인상깊었다.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이 예수 앞으로 찾아 왔다. 제자들이 묻기를 “이 소경은 날 때부터 눈이 멀었는데 누구의 죄입니까? 부모입니까? 아니면 본인의 죄입니까?” “본인의 죄도 아니며 부모의 죄도 아니다. 단지 창조주가 뜻이 있어 그렇게 태어난 것이다.”라고 목사는 말하고 있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무슨 말을 하는 거요?” 나는 그 목사에게 되 물었다. “예, 강 선생님, 인간은 누구나 다 의미가 있는 출생을 하였다는 말이죠. 조물주의 계획대로...” 그렇다면 나의 셋째 아들이 문둥병이 된 것도 역시 조물주의 계획이란 말인가? 그러고 보니 뉴욕에서 보기 싫은 그 목사가 한 말이 생각났다. “목사들이란 서로 짜고 이런 말을 하는가?”나는 의아해 했으며 약간의 분노를 느꼈다. 자신들은 건강하니까 그런 말을 할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목사란 자들? 정말 저들이 진정으로 문둥병 환자를 사랑한다면 맨 손으로 피부에서 흘러 내리는 고름덩어리를 만져 보라고 하지...괜히 입으로만.....성인인체 하는자들...” 나는 이곳 로스앤젤스에서도 목사에 대한 반감이 솟구치고 있었다. * 뜻밖에도 안성에서 살다 온 ‘안성사람’을 만나게 됐다. 한인타운에 가서 설롱탕을 한 그릇 사먹다가 우연히 같이 앉아 식사를 하던 66세의 허름한 남자가 안성에서 살다가 30년 전에 이곳 로스앤젤스로 이민을 왔다고 했다. “30년 전에? 안성에 살다가요?” 나는 너무나 놀라워 입을 다물지를 못했다. “왜 그렇게 놀라슈?” “왜냐구요? 30년 전에 안성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오다니...안성에서? 도무지 상상이 되질 않아서요...” “그렇수! 나, 그 때 단돈 400딸라 들고 이민을 왔수다. 강선생은 어떻게 오셨수.?” “아들이 초청해서 왔습니다.” “좋으시겠습니다. 아들 덕을 보셨으니....” “.....................” 사실, 30년 전에 안성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간 사람을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66세의 노신사는 36세의 나이로 미국으로 이민을 와 세탁소를 경영하여 자식들은 모두 좋은 대학에 진학을 시켰으며 작년에 65세의 나이로 은퇴를 한 후 골프나 치며 평소에 못한 취미 생활로 하루를 보내고 있다고 했다. 비교적 자신감과 여유가 있어 보였기에 그를 통해 미국의 단면을 새삼스럽게 배울 수가 있었다. 비봉산과 약수터를 즐겼다는 사실 하나로도 이 노인과 급속히 친해지고 있었다. 이 노인과 매일 한번은 만나게 되었다. 아들도 좋지만 친구가 더 좋았다. 친구란? 비오는 날에 같이 우산을 쓰던지 아니면 비를 같이 맞으며 걷는 관계라고 했다. 66세의 안성에서 온 선배 노인과 59세의 젊은 노인의 만남은 나를 포근하게 했다. 고향이 같다보니...동향(同鄕) 사람이다보니...- * 가끔 두 며느리를 혼자 마음속으로 비교해 보기도 했다. -큰 며느리는 누가 보아도 한국 일류의 여성이었다. 재벌의 딸로 명문 여대, 미술학과를 졸업한 후 이곳 미국에 와서 뉴욕에 있는 미술학교에서 배우고 싶은 과목을 아무 부담 없이 이수했으며 귀국하면 좋은 그림을 사 모아 유명한 갤러리를 갖고 싶은 것이 그녀의 꿈이요 희망이었다. 시아버지인 나에 대한 그녀의 태도는 아주 예의 바른 듯 했으나 실은 마지못한 체면치레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시아버지인 나를 대하는 것이 무척 부담이 되는 듯했다. - 반대로 둘째 며느리는 큰 며느리와 아주 달랐다. 우선 멕시코에서 이민온 2세이기에 가난을 겨우 벗어났으며 초급 대학을 마쳤을 뿐 무엇하나 대놓고 자랑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활달하게 웃으며 수치심도 없는지 팔다리를 제대로 못 쓰는 시아버지인 나를 위해 팔 걷어 부치고 도와주었다. 실수로 더럽힌 화장실도 아무 불평 없이 깨끗이 닦아주었으며 내 옷도 스스럼없이 세탁을 해 주었다. 비록 얼굴은 판이하게 달랐으나 마음은 한 마음이었으며 모든 것을 받아 주었다. 솔직히 둘째 며느리와 같이 있는 것이 첫째보다 몇 배나 더 편안했다. * 사는 것이 안정이 되고 보니 소록도와 그곳에 있는 셋째 아들이 점점 내 생각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로스앤젤스에서의 생활이 점점 익숙해지고 있으며 남의 도움이 없어도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2005년 봄 그리고 여름..... 뜻밖에도 뉴욕에 있는 큰 아들과 며느리가 갑작스레 로스앤젤스로 찾아와 나를 데리고 뉴욕으로 가겠다고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큰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것이 한국 사람들의 윤리요 전통이라고 했다. 게다가 둘째 며느리는 외국 사람이기에 더 더욱 큰 며느리가 모셔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큰 며느리의 마음 속 깊이 도사리고 있는 질투심 때문이었다. 최고의 교육을 받았으며 부유한 가문의 딸의 입장에서 볼 때, 한갖 멕시코 계통의 보잘 것 없는 여자와 비교의 대상이 되는 것 자체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큰 아들과 며느리는 아주 작심을 한 듯 막무가내였다. 2005년 8월, 보따리를 싸 가지고 다시 뉴욕으로 이주를 했다. “한. 두달 있다가 다시 돌아오마!”라고 큰 소리를 쳤지만 막상 뉴욕에 도착하고 보니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뉴욕에서의 생활은 소록도에 갇혀 있는 아들과 같은 그런 생활이었다. 비록 철조망만 처 있지 않을 뿐, 나를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으며 혼자 나갈 수도 없는 울안에 같힌 다리 부러진 짐승과 다를 바가 없었다. 언어가 안 통하고 생활 풍습도 다르며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인생은 죽은 인생보다도 더 한심했다. 참다 못해 큰 아들에게 부탁했다. “나를 다시 로스앤젤스로 보내 주던지 아니면 너와 같이 출퇴근을 하자.” “아버지, 집에서 손자하고 같이 계시면 좋잖아요?” 그 말도 일리는 있으나 손자와 내가 친구가 될 수는 없었다. 이번에는 내가 고집을 세웠으며 막무가내였다. 12월 추운 겨울 또 다시 따뜻한 로스앤젤스로 돌아 왔다. 비록 안성, 내 고향보다는 못했지만 그래도 안성 사람이 살고 있는 로스앤젤스가 더 포근했다. 그리고 얼굴은 다르나 멕시코 피를 받은 둘째 며느리가 더 편했기 때문이었다. 2006년 1월, 마침내 ‘안성’ 선배를 또 다시 로스앤젤스 한인타운에서 만나게 되었다. “안성 선배님? 다시 돌아 왔습니다.” “아-뉴욕에, 큰 아들집에서 잘 지내셨죠? 뉴욕에서?” “아뇨. 뉴욕은 내가 살 곳이 못된답니다.” 뉴욕에서 지낸 일들을 설명하여 주었다. “강 선생? 그러게 고향이 좋은 거요. 안성 고향 친구가..” “그렀습니다. 고향 친구가 좋습니다.” 나는 진심으로 대답을 했다. * 다시 돌아 온 로스앤젤레스......... 건강도 많이 좋아져서 이제는 지팡이 없이도 웬만한 거리를 걸을 수가 있었으며 버스를 타고 내리는 데 큰 지장이 없었다. 3월이 지나면서 변호사를 선임해 미국 영주권을 신청하기에 이르렀다. “영주권이라면? 나더러 여기 미국에서 살다가 여기에 뼈를 묻으라는 거 아녀?” 나는 허탈하게 물었다. 내 나이 60을 바라보는데 이제 와서 미국 영주권을 받아 무엇을 한단 말인가? 내가 여기에 묻히면 조상의 묘는 누가 돌본단 말인가? 불효자가 되란 말인가? 작은 아들의 성의는 고마웠으나 나는 확고하게 말했다. “나 죽으면 내 고향, 안성에 묻어 달라!” -생각해 보면 미국으로 올 때 나는 한국에 관한 모든 것을 다 잊고 태평양에 던져 버렸다고 생각을 했는데 2년간을 이곳 미국에서 살다보니 오히려 한국에 대한 애착이 더 생기고 있음을 느끼게 됐다. 아니, 한국에 가봐야 나를 반겨 줄 사람도 없겠지만 그래도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소록도에 있는 셋째 아들이 나를 반겨 줄 것을 확신했다. ‘병세가 좋아 졌는지? 아니면 악화 됐는지?’ 악화됐다고 해도 그는 내 아들임에 틀림이 없다. 회사의 중역인 첫째 그리고 둘째 아들은 스스로 잘 살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오히려 셋째를 더 도와야 하는 것이 아버지의 도리라고 생각이 됐다. ‘한국으로 돌아가자! 안성으로 돌아가자!’ 아들에게 내 마음을 얘기했다. “아버지? 안성에 가시면 누구하고 사시게요? 누가 밥을 해주고요? 누가 빨래를 해주고요? 안됩니다. 말도 안됩니다. 여기서 저희들과 같이 사시는 거예요. 여기 미국, 로스앤젤스에서요!” 둘째 아들은 물론 히스페닉 며느리까지도 나를 말렸다. 내 주장이 먹혀 들어 가지 않았으나 계속하여 둘째 아들에게 말했다. “나, 안성으로 보내 다고...안성으로...” “안됩니다. 아버지!” 둘째 아들은 진심으로 반대를 했으나 계속되는 내 주장을 꺽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7월 초, 한국으로 일단 귀국을 하기로 했다. “잠시 갔다가 다시 오는 겁니다. 아버지?” 잠시 다녀와서 본격적으로 영주권 수속을 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러나 막상 안성으로 돌아가려고 정하고 보니 ‘가서 어떻게 살까’라는 문제가 생기고 있었다. 가정부를 고용하여 음식과 빨래등을 해결한다고 해도 혼자서 외롭게 어떻게 살겠는가? 문제가 더 심각했다. 그래도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말도 안통하고 운전도 못하여 집에만 갇혀 있는 것 보다 그래도 한국말을 쓰며 자유롭게 밖에 나갈 수 있는 것이 더 바람직하게 느껴졌다. 아니 ‘셋째 아들을 만나 보고 그를 도와줘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2006년 7월 6일 아침 나는 마침내 로스앤젤스를 떠나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게 됐다. -귀국하는 날,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손녀와 아침을 같이 먹으면서 또 한번의 이별을 실감하게 됐다. 어느 아들이든 나에게는 다 중요함을 느끼고 있었다.- *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그리고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와 안성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2004년 2월 7일 분명히 여기 인천 공항에서 로스앤젤스로 가는 비행기를 탓는데 2년 5개월만에 되돌아 온 것이 마치 긴 인생을 멀리 미국에서 보내고 온 듯 했다. 그동안 많이 변했으며 사람들의 마음도 많이 달라져 보였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오다가 들어선 안성길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고향! 고향!’ 그렇다 고향은 어머니와 같다고 느꼈다. 처가집 식구들에게 맡겨 두고 온 안성집은 그동안 퇴락했으며 잡초도 많이 나 있었다. 그뿐인가, 집안에는 여기저기에서 거미줄이 쳐진 것으로 보아 사람이 살지 않은 듯했다. 그래도 이 집에서 나와 아들들이 태어나고 자랐으며 이제부터는 내가 홀로 살며 이곳에서 숨을 거두어야 할 보금자리였다. 부탁해 놓은 대로 가정부가 와서 밥을 지어 놓았으며 3일에 한번씩 와서 빨래도 하고 음식도 만들어 놓는다고 했다. “마침내 고향으로 되돌아 왔다. 되돌아 왔다!” 나는 기쁘다 못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10장: 다시 돌아 온 안성 그리고 소록도로 가는 길.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안성에 돌아 온 날이 2006년 7월 6일 이었다. “만사 제치고 아들을 만나러 내일 아침에 소록도로 가리라” 굳게 마음을 먹고 저녁 잠자리에 들었다. 잠자리에 들고 보니 생각하고 싶지 않은 뉴욕과 로스앤젤레스가 내 눈에서 아른거리고 있었다. 뉴욕의 만하탄, 삼복 식당, 자유의 여신상, 한국 교회, 방송국 등이 보였으며 로스앤젤레스는 더더욱 그랬다. 할리우드 거리, 한인타운, 동양 선교교회, 그리고 안성에서 온 66세의 선배님.... 그리고 히스페닉 며느리, 재벌 며느리 그리고 손자와 손녀가 눈에서 더더욱 나를 어지럽혔다. 중풍 후유증으로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나로서, 긴 여행 그 자체가 피곤했다. 자정이 가까워 오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침에도 다음날 아침에도...약 7일간 장마비처럼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다. 아들을 보고 싶은 마음에 지루하게 내리는 장마비가 야속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아들인데 비가 내리다니... 혹시라도 병이 악화가 되지는 않았을까? 아니면 그 동안 큰 병으로 몸져눕지나 않았을까?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만났던 나의 아들의 모습은 문둥병 특유의 사자 얼굴과 덕지덕지 묻은 피고름 덩어리가 마음을 아프게 했었는데... 밥이나 제대로 먹으며 살았을까? 나만 편안하게 살려고 두 아들을 따라 미국으로 갔던 것이 이토록 후회스러웠다. 소록도에 입원을 시키고 돌아오던 날 나는 “아들을 팽개치고 도망 나온 느낌”이었는데... 미국으로 떠나던 날은 “아들을 칼로 베고 도망 나온”느낌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녀석도 이제 28세가 됐다. 나 또한 61세가 넘었으니 인생에 대해서 알 만큼은 다 아는 나이였다. ‘28세? 28세? 그 나이에 나는 이미 결혼을 하여 아들을 하나 낳았는데.... 문둥병 환자들도 결혼을 한다는데...혹시 그 녀석, 좋은 애인이라도 생긴건지...‘ 아들이 너무나 보고 싶었다. 마침내 장마비가 그치고 온 하늘이 맑아 졌으며 무더위가 다시 엄습을 하기 시작했다. 준비했던 짐 꾸러미를 간단하게 싸 들고 이른 아침 안성 터미널에서 버스에 올랐다. 7월 17일 아침이었다. 26번째의 소록도 길- 더 이상의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전라도 길이 아니기를 마음속에 기도하며 천안을 거쳐 호남선 열차에 올랐다. 대전을 지나면서 광활한 김제, 만경평야를 지나고 있었다. 초록색으로 온통 덮힌 논을 바라다 보노라니 마음이 시원했다. 전라도 길은 옛날 그대로였다. 장성을 지나 광주에 도착했다. 아들과 같이 늦은 점심을 먹었던 그 순대 집을 찾아가 한 그릇 사 먹고 순천을 거쳐 녹동으로 가는 버스를 탓다. 벌교에서부터 유난히 눈에 띄는 유자꽃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고흥 반도로 들어 서면서 왼편으로 펼쳐지는 팔영산의 자태가 점점 시야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백일홍이라고 불리우는 배롱나무 꽃이 지고 나면 벼가 익어 고개를 숙인다고 했다. 유자꽃과 배롱나무를 바라다 보니 어느새 버스는 녹동 항구에 도달했다. 역시 오후 5시경이었으나 아직도 해는 중천에 걸린 듯 했으며 바닷 바람이 시원했다. 그리고 내 눈에 선명하게 들어오는 것은 거의 공정을 마친 소록도 대교의 늠름한 위용이었다. 아-소록도 대교.....소록도와 육지를 이어주는 저 다리...아니 문둥병 환자들과 성한 사람들을 연결해 주는 저 다리...그리고 나의 아들이 마음놓고 걸어서 나올 수 있는 저 다리... 문득 여관집 아주머니의 말이 생각났다. “육지와 섬을 다리로 연결해 준다면 문둥병 환자들과 우리 육지 사람들이 마음을 터 놓고 살아 갈 수가 있는데...” ‘녹동 항구에서 불과 600미터 저 거리가 마치 태평양처럼 멀었는데, 나는 그 먼 태평양을 건너 왔노라. 아들아 너를 보러.’ 녹동 항구, 선창가에는 여전히 생선 비릿내가 나고 있었으나 조금도 역겹지가 않았다. 마치 어머니의 젖 냄새처럼 나에게 느껴지고 있었다. 절룩이면서 찾아 간 그 여관집에서 아주머니를 만나게 되었다. “아니? 누구랑가? 강선생 아니랑가?” 전라도 사투리가 나에게는 어머니의 목소리처럼 포근하게 들렸다. -“어떻게 됐오? 살라고 다시 왔오?” 아주머니는 나를 감싸 안았으며 절룩이는 다리를 손으로 만져 보기도 했다. 깜짝 놀랄 뉴스를 아주머니로부터 들었다. 아주머니가 생각하고 꿈 꾸었던 것이 현실이 된 얘기였다. 소록도와 육지, 아니 마음과 마음이 연결된다는 찐한 얘기였다. 2001년에 착공된 소록도와 녹동을 잇는 연륙교인, 소록도 대교와 소록도와 거금도를 잇는 거금도 대교는 해를 거듭 할수록 진척이 됐다. 내가 소록도를 마지막 방문했던 2003년 11월에는 기초 공사와 받침 공사가 한창이었기에 다리로서는 아직도 요원했었다. 그러던 다리공사가 진척되면서 작년 2005년 11월, 마침내 육지 사람들과 소록도 주민들이 손을 잡고 화해를 했다고 한다. “화해를?” 나는 놀라 물었다. 육지 사람들은 소록도 주민들이 이곳에 와서 목욕을 하거나 이발을 하는 것도 꺼려 배척을 했는데, 육지 사람들이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고 한다. 멸시와 천대를 받아 오던 소록도 주민들을 초청해 1박 2일로 제주도로 같이 여행을 다녀 왔다고 한다. 화해를 한 후부터 양편 주민들은 마음을 활짝 열고 육지 사람들은 소록도 주민을 위해 김치도 담가 주고 환자들의 머리를 손질해 주었다고 한다. 아직 다리가 완공이 되지를 않았지만 서로 왕래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이곳에 오기 불과 이틀 전, 2006년 7월 15일, - 소록도 대교가 임시로 개통을 해 육지 사람들이 걸어서 소록도로 들어가 꽃다발을 전해 주었다고 한다.- 그 행사에 참석한 녹동 인근 도덕면이 고향인 장씨 할머니(66세)는 다리가 완공되기를 고대해 왔는데 이제 다리가 놓여졌으니 편견과 차별이 없어지기를 소원했다. 이 할머니는 17살 처녀로 이곳 소록도로 들어와 한 평생을 저 다리 넘어 고향을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이제 다리가 놓여졌으니 걸어서 고향에 가보게 되었다고 하며 울었다고 한다. 또 다른 증인이 있었다. 58세의 이남철 씨는 역시 17살 소년으로 이곳으로 들어왔는데 나처럼 아버지가 데리고 왔다고 한다. 평생 이곳에서 살면서 소록도를 디지털 사진으로 모아 두었다고 하는 섬의 산 증인이었다. 놀랍게도 나환자로 그는 나환자 여성과 결혼을 해 가정을 갖고 살았다고 한다. 그도 눈물을 흘리며 육지로 나가 볼 수가 있게 된 것이 감격스러워 울고 또 울었다고 한다. “아주머니? 그 행사에 내 아들도 나왔던가요?” “아니, 못 보았습니다.” “임 선생은요?” “못 보았는데요....” ‘아-’ 나는 신음을 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내 아들과 임 선생은 아직도 양성 나환자로 살던지 아니면, 아니면...죽었을 지도 모른다.‘ “아니? 아주머니? 그저께 행사장에서도 못 보았나요? ”나는 뻔한 질문을 또 했다. “못 보았는데....어짜피 내일 가 보시면 만날 텐데...” 아주머니는 나를 외면하면서 대답을 했다. 저녁을 먹고 다시 항구로 나와 다리 입구에 찾아 왔다. 다리 입구에는 바리케이트가 쳐 있었다. “주민 여러분 2006년 10월 15일 완공을 합니다. 그리고 거금도 대교의 완공에 맞춰 개통이 됩니다. 조금만 더 참아 주시십시요.”라는 팻발이 붙어 있었다. ‘저 다리 너머 내 아들이 있다. 아들이....’ 나는 신음을 내고 말았다. 그리고 돌아 온 여관집에서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말았다. * 다음날 아침, 나는 녹동 항구에서 통통선을 타고 600미터의 바다를 건넜다. 600미터 거리의 이 바다를 26번째 건너가고 있었다. (문득 뉴욕에서 타 본 유람선이 생각났다. -큰 아들 식구들과 같이 롱 아이랜드의 가장 동쪽 끝에 있는 맨톡이라는 곳으로 간 적이 있었다. 대서양이 확 펴지면서 망망대해가 눈 앞에 끝이 없었다. 그 순간 나는 불과 600미터 거리의 녹동 항구와 소록도와 바다를 생각하면서 셋째 아들을 떠 올리고 있었다.-) 드디어 소록도 선착장에서 안내원의 부축을 받으면서 배에서 내렸다. “아- 마침내 찾아 온 소록도!” 큰 숨을 몰아 쉬고는 안내소로 갔다. 늘 상 보던 그 안내원이 아니었기에 약간의 시간이 걸려 아들의 면회가 허락됐다. 나는 습관처럼 소록도 병원을 바라다보며 걷기 시작했다. 2년 반 만에 찾아 온 소록도 병원과 그 뒤에 우뚝 솟은 소록도 중앙 교회가 나를 반겨 주고 있는 듯 했다. 뜻밖이었다. 제 2 안내소(愁嘆場)에는 “여기서부터는 외부인 출입 금지 구역입니다. 원생 자치회”라고 큰 안내판이 있을 뿐 철조망은 보이지 않았다. 그 뿐인가 마을로 들어가는 길도 아름답게 잘 정돈돼 있었다. “와! 그동안 소록도가 많이 변했구나! ”나는 너무나 기뻣다. 역시 새로운 사람이 안내를 보고 있었다. “강홍조씨라고요? 아- 지금 여기 없습니다. 잘못 오셨습니다.” “예? 여기 없다구요?” 나는 섬칫 놀라고 말았다. 여기 없다면 병원 중환자 실에 있거나 아니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아! 강홍조? 그 환자? 아마 중앙교회에 가보시면 만날겝니다.” 안내원은 다시 정정하여 주었다. “중앙교회에? 웬 일이 생겼습니까?” 그가 말하는 바를 이해 할 수가 없어서 되물었다. “나도 잘 모르니 그곳으로 가 보시오!” 그는 귀찮은 듯이 말했다. 몇 명 안되는 양성 나 환자들이 오늘도 어제처럼 기운없이 설렁 설렁 걷고 있었다. 다시 되돌아 중앙교회로 찾아 갔다. -중앙교회?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있으며 소록도의 산 역사가 되는 소록도를 버텨온 신앙의 장소였다. 1916년 일본 총독부에 의해 소록도에 자혜의원으로 개원한 후 1922년 제 2대 원장 하나이 젠기스(花井善吉)는 비록 일본 사람이기는 하지만 자신이 문둥병에 걸려 죽기까지 헌신한 참으로 좋은 의사였다. 일본 성결교단의 다나까 신사부(中道三郞)를 불러 소록도에서 복음을 전하게 했다. 그후 1938년, 이채권 전도원과 오석주 목사를 초청하여 주기적으로 예배를 보았다. 신사참배로 인해 일본으로부터 많은 고난을 받다가 1945년 해방된 후 역시 수많은 희생이 있었다. 손양원 목사의 전도 집회 후 안정을 찾았으나 1950년 9월, 김정복 담임 목사마저 공산당에 의해 순교를 당했다. 군사정권에 의해 많은 핍박을 받았으나 1500여명의 교인들이 낸 건축 헌금으로 1964년 11월, 오늘날의 중앙교회로 만들었다.- 내가 교회당을 찾아가기는 이번이 몇번 째가 된다. 뉴욕에서 찾아간 교회당과 로스앤젤스에 있는 동양 선교교회와 영락교회를 각각 한번씩 방문한 것이 내가 아는 교회당의 전부였다. 중앙교회 입구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들락날락 하는 것으로 보아 무슨 행사를 하고 있는 듯했다. 입구로 더 가까이 가보았다. 문둥병 환자가 죽어 영결식을 하고 있다고 했다. 영결식을 한 후 그 환자의 시체는 화장을 해 소록도에 있는 납골당에 안치된다고 한다. 나는 문 앞에서 교회당 안을 들여다 보았다. 십자가(十字架)가 보이는 단 앞에 나무 관이 하나 놓여 있었으며 검은 제복을 입은 목사님이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풀라스틱으로 만든 그릇에 물을 담아 받혀 들고 서 있는 청년 남자가 있었다. 자세히 보니, 아! 내 아들 홍조였다. “아니? 홍조가? 홍조가? ” 내 눈을 비비고 다시 바라다 보았다. 분명, 그는 내 아들, 홍조였다. 목사님 처럼 검은 제복을 입고 흰 손 장갑을 끼고 있었다. * “아들아! 나다. 아버지다.” 나의 아들을 향해 큰 소리로 불렀다. 문득 검은 제복을 입은 젊은 청년은 낮익은 목소리에 놀라 나를 바라다 보았다. “홍조야! 나다!” “아버지? 아버지!” 홍조는 나를 향해 달려왔다. 검은 제복을 입은 목사님과 장례에 참석한 가족들이 나를 일제히 바라다 보았다. “홍조야!”라고 부르면서 달려온 아들을 힘껏 포옹했다. “아버지, 여기엔 웬 일로 오셨습니까?” “너를 보러...” “그러면 미국에서 돌아 왔단 말입니까? 아버지.” "그런데, 아들아? 너는 어찌 된거냐?“ 포옹을 풀면서 아들에게 물었다. “아버지! 기뻐해 주세요. 아버지.” 아들은 나를 강하고 자랑스럽게 다시 포옹하면서 말했다. “기뻐 해 달라고? 아들아!” 그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이내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중앙교회 정면에 서 있는 십자가가 나를 향해 웃고 있는 듯 했다. “아- 하나님...” 내 평생 내 입에서 처음으로 진정 “하나님”을 부르고 있었다. -왜 하나님이란 말이 나왔을까? “문둥병은 하늘이 내린 벌이 아닙니다. 단지 박테리아로 인한 전염병일 뿐... 강 선생? 하나님을 믿으십니까?”라고 말했던 유준 박사의 말이 떠올랐으며, 미친놈이라고 욕했던 로스앤젤레스와 뉴욕에서 만났던 목사의 설교가 생각났다. “문둥병? 하나님은 어느 누구고 다 존중한답니다. 그러기에 문둥병도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발병한 거랍니다.”- 2부: 아들이, 안에서 본 소록도 11장. 문둥병에 걸리다니..... 제 1부에서 저의 아버지, 강석호씨의 사연을 읽으신 독자 여러분! 이번에는 문둥병에 걸려 소록도로 들어갔던 아들의 사연을 들어 주십시요. 제 이름은 강홍조라고 하며 금년(2006년)에 28세가 되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1996년 4월 2일 문둥병 환자(나병, 한센씨병)로 진단을 받고 사회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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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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