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내고향은 소록도 파트 5

2012.01.23 12:33

연규호 조회 수:715 추천:22

2부: 아들이, 안에서 본 소록도 11장. 문둥병에 걸리다니..... 제 1부에서 저의 아버지, 강석호씨의 사연을 읽으신 독자 여러분! 이번에는 문둥병에 걸려 소록도로 들어갔던 아들의 사연을 들어 주십시요. 제 이름은 강홍조라고 하며 금년(2006년)에 28세가 되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1996년 4월 2일 문둥병 환자(나병, 한센씨병)로 진단을 받고 사회로부터 격리 치료를 받기 위해 안성 집을 떠나, 4월 15일, 전라남도 고흥군 소록도 국립 병원에 입원하여 양성 나병 환자로서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문둥병 환자로 진단을 받았을 때 저는 죽고 싶은 마음이었으나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소록도 길을 택했답니다. 아버지는 나를 만나러 25회나 소록도로 찾아 왔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뜻밖에도 중풍으로 오른쪽 팔과 다리가 마비되어 혼자 살 수가 없게 되었답니다. 마음에는 내키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첫째와 둘째, 두 형님들의 초청으로 미국(뉴욕과 로스앤젤레스)으로 이사 갔는데, 그것이 2004년 1월이었습니다. 두 형님들은 각각 서울 공대와 상대를 나와 대기업에 취직이 되었으며 경제적으로도 크게 성공을 해 부유하게 살고 있답니다. 아버지가 미국으로 가시자 나는 마치 고아가 된 마음이었지요. 자포자기해서 죽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 왔습니다. 그런데, 못 볼 줄 알았던 아버지가 미국에서 다시 돌아 오셨습니다. 약한 아버지의 오른 쪽 손을 나는 꼭 잡았답니다. 아버지의 손은 아직도 따뜻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눈물도 내 눈물처럼 따뜻했답니다. 너무나 감격스러웠던지 아버지는 ‘하나님’이라고 감탄하시더군요. 아버지의 두 손을 꼭 잡고 문둥병 환자로 살아 온 외롭고 한스러웠던 10년을 얘기해 드렸답니다. -‘왜 나는 문둥병에 걸려야 했는가? 그렇다면 문둥병 환자는 쓸모가 없는 존재인가? 나와 아버지는 하늘의 벌을 받았단 말인가?‘ 우리는 밤새 얘기하였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여러분들에게도 제 문둥이 얘기를 들려 드리고자 하니 들어주십시오. * - 내(강홍조)가 태어난 것은 1978년 가을이었다. 불행하게도 4개월 후, 어머니는 심장병으로 돌아가셨기에 나는 할머니가 우유를 먹여 길러 주셨다. 가까스레 생명을 유지 할 수가 있었다. 어머니 없이 살아서 그런지 나는 말이 적었으며 사람보다 동물을 더 좋아해 내가 사는 안성근교의 낙농장에 가서 젖소, 염소 그리고 닭을 보며 즐거워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농사꾼이 되고 싶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이곳 안성에서 소와 닭을 기르며 살고 싶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날 벼락이란 말인가? 고등학교 2학년 이 학기에 들어서면서 피부에서 진물이 흐르며 손가락 마디가 뭉툭해지더니 감각마저 무뎌지고 있었다. 사람들의 입에서 ‘문둥병’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피부과 의사들도 문둥병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문둥병?” 나는 놀랐으나 아니라고 부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내 주변에 있는 친구들과 친척들의 얼굴 표정에서 먼저 나타나고 있었다. 나를 피했으며 ‘쉬쉬’ 하며 자기들끼리 수근거리고 있었다. 학교에 가면 선생님도 그렇고 친구들도 내 곁에 오기를 꺼리고 있었으며 심지어는 나와 마주치기만 해도 흠칫 놀라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나의 친구들이 나에게 노골적으로 말했다. “너, 문둥병에 걸렸다는데, 학교에 오지 말거라. 우리들마저 옮을까 겁난다.” “...........” 나는 말을 못하고 교실에서 빠져 나왔다. 그리고 며칠 후 학교에서 친구들로부터 돌 세례를 받았다. 누군가가 내 뒤에서 돌을 던지면서 “야-문둥이 새끼, 썩 꺼져!” 나는 돌을 맞고 그 자리에 나뒹굴고 말았다. ‘친구들이 돌을 던지다니....’ 너무나 억울해 목놓아 울고 말았다. 그러나 집에 와서는 일체 내색을 하지 않았다. 홀아비로 나만 믿고 살아 온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보건소에 가서 다시 진단을 받겠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보건소에 가서 다시 진단을 받았으나 만족하지 못해 나병의 권위자 유준 박사가 있는 세브란스 나병 연구소로 갔다. “예, 나병이 틀림없습니다. 강 석호씨!”유준 박사도 나병이라고 진단을 했다. “아니겠죠?” 나의 아버지는 아니라고 반박을 하고 있었다. “나병은 천형병도 아니며 단지 폐결핵과도 같은 전염병이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한 10년 잘 치료하면 완치가 된다네. 자, 강홍조군! 힘을 내게나! 힘을.” 유준 박사의 최종 진단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으며 절망이었다. 친척들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뭐라고? 문둥병? 아이고, 어쩔려고?” 친척들도 나를 피하기 시작했다. 나 혼자 있을 때는 분하고 서러워 울고 또 울었으나 아버지 앞에서는 아주 침착하게 아무 것도 아닌 듯이 행동을 했다. -문둥병 환자들의 모습이 떠 올랐다. 거적대기 옷을 입은 문둥이 거지들이 밥을 얻어 먹으려고 대문 앞에서 구걸을 하노라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야!, 이 문둥아, 저리 가라! 썩 꺼져라!”라고 소리를 치면서 갖고 있던 거지 깡통마저 집어던지던 모습이 애처러웠다. 거지, 문둥이, 사람 잡아 먹는 문둥이....이런 것이 문둥이에 대한 인식이었다.- 집에 숨어서 치료를 받으며 같이 살자고 하던 아버지를 설득해 소록도로 들어가던 날, 나는 마치 지옥의 한 구석으로 들어간다고 생각을 했다. 녹동 항구에 있는 그 작은 여관방에서 아버지는 진물에 튼 내 손을 잡고 잠을 청했으나 잠이 오지 않는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거리고 있었다. 나 또한 눈은 감았으나 현실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생각 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과 복수로 가득찬 문둥이들과 같이 살 수가 있을까?) (그들과 마음을 열고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소록도에 살고 있는 문둥병 환자들에게 맞아 죽는 것은 아닌가?“ (아버지를 다시 만날 수가 있을까?) (소록도에서 살아서 바깥 세상으로 나올 수가 있을까?) (과연 나는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병에 걸려 죽는단 말인가?) 묻고 또 물으면서 통통선을 타고 소록도로 들어갔다. 선착장에 내리니 내 눈에 띄는 일곱 글자의 구호가 눈에 들어왔다. “한.센.병.은. 낫.는.다” 한센병은 낫는다! 나는 이 구호를 마음속으로 따라 읽었다. 한센병은 낫는다! 위로가 생겼으며 희망이 생겼다. 유준 박사의 말대로 10년이면 낫는다고 했는데 날 것 같았다. 소록도 1번지(官舍地帶)에서 환자 수속을 했다. 정식으로 소록도 주민(나환자)이 됐으며 주민증도 받았다. 병원에 들려 간단한 안내 교육을 받은 후 아버지와 같이 소록도 2번지(病舍地帶)로 들어갔다. 소록도 1번지에서 본 직원 사택들에 비해 2번지에 있는 주택들은 환자들이 사는 아파트 형태의 단층 건물들이었다. 음성 나환자들은 비교적 자유스럽게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양성 나환자 촌은 다소 달랐다. 중간 중간에 쳐진 철조망을 두고 격리됐으며 출입이 까다로웠다. 감염이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무단 출입을 금함. 당국의 허락을 받아야 함’이라고 쓴 팻말이 눈에 띄었다. 마침내 아버지와 나는 내가 살아야 할 단층 집으로 안내됐다. ‘이 집에서 나는 일년, 2년 아니 10년, 20년 30년, 60년을 살다가 죽어야 하나?’ 암담한 느낌을 갖고 있었으나 아버지를 보아서도 태연한 척 했다. 분명, 아버지의 눈가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먹고 잘 침대와 의자에 앉아 보기도 하고 창문을 만져 보기도 했다. 같은 방에서 살게 된 김정섭이라는 나환자와 옆방에 산다는 임 선생에게 잘 부탁한다고 정중히 인사를 했다. 모든 수속이 끝나자 안내원은 이만 집으로 돌아가라고 아버지를 재촉했다. 안내소를 사이에 두고 나와 아버지는 손을 흔들며 혜어져야 했다. “면회는 일주일에 한번만 허락됩니다. 강홍조씨!” 안내인은 면회에 대해 강조했다. 안내소를 뒤로하고 혜어진 후, 못내 아쉬어 뒤를 돌아보며 또 돌아보던 아버지는 통통선을 타려고 발길을 돌렸다. 마침내 아버지의 모습이 내 시야로부터 사라지던 그 때 나는 땅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 세상이 모두 끝났다고 결론을 지었다. 죽고 싶었다. 목을 매든지 칼로 나를 찌르든지 아니면 소록도 바닷가에 가서 물에 빠지고 싶었다. “아버지! 아버지! 가지마세요. 가지마세요.” 내 마음은 큰 소리로 울고 있었다. 그 순간 진물나는 내 손을 잡는 또 다른 진물나는 손이 있었다. 나와 같이 방을 쓰게 된 ‘형’이라는 사람이었다. “홍조군? 일어나게. 나를 형이라고 불러라. 나, 김정석이야. 어서. 아버지는 가셨어. 이젠 너는 우리와 한 식구가 되는거여.” “한 식구?” “그래, 한 식구. 우리는 이제, 한 식구다. 한 식구.” 옆에 서있던 내 아버지와 같은 나이의 임진석씨가 나의 또 다른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아니? 문둥이들도 한 식구가 된단 말인가?’ ‘아니 문둥이들에게도 사랑이 있나보군.’ 혼동스러웠다. 문둥이들은 인정도 없이 서로를 미워하며 죽이려 한다고 들었는데, 그건 완전히 오산이었나 보다. 문둥이들도 가족이 있었으며 눈물을 같이 흘리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12장: 문둥이 가족들 아버지와 같은 나이의 임 선생님과 나보다 8세가 더 많은 김정석 형님을 따라 양성 나환자 촌의 입원실로 돌아 왔다. 방이라고 했지만 두 개의 나무 침대와 두 개의 책상 그리고 의자가 있는 작은 방이었다. 어느새 알고 몇 명의 문둥병 환자들이 내 방으로 와서 기웃거리기도 하며 내가 무엇을 가지고 왔는지 나의 소지품을 구경하기도 했다. 다소 불안했다. 나무침대에 누워 잠시 눈을 부치고자 했으나 잠이 올 리가 없었으며 눈물이 계속 흐르고 있었다. “학생? 홍조라고 했지? 너무 울지 말거라. 그래도 너는 아버지가 있잖아! 부럽구나. 이 형은 아버지도 없다. 고아나 마찬가지여. 아무도 나를 찾아오는 사람도 없으니까...” “예! 고아라구요? 형님?” 자연스레 그를 형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래! 잘 했다 형님이라고 부르거라. 너는 나와 같이 살면서 병 치료를 하는거다. 홍조야!” “예.” 나는 순순하게 대답을 하고 말았다. 달리 특별한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기 정석이 형과 임선생님, 그리고 같이 밥을 먹어야 하는 몇 명의 문둥이들이 바로 나와 같이 숨을 쉬며 살아야 하는 문둥이 가족이었다. “자! 홍조야! 저녁 먹을 시간이 되었구나. 저기 땡땡 치는 종소리는 식당에서 울려오는 소리야. 자, 가자!” 형을 따라 환자 식당으로 갔다. 식당이라야 벽돌로 지은 단층 집에 주방이 있으며 책상처럼 만들어진 식탁이 6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리고 각각 상마다 6개의 나무 의자가 놓여 있었다. 군대에서 쓰는 트레이에 밥, 반찬 그리고 국을 받아서 식탁으로 갔다. 두 손을 마주 잡고 기도하는 환자도 더러 있었으며 십자가 성호를 긋는 환자도 있었다. 임 선생과 형도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내게는 별 의미가 없었다. 밥을 앞에 놓고 기도를 해본 기억이 없었던 것은 우리 가족이 대대로 내려오는 유교 집안이었기 때문이었다. 식사를 하는 동안 별로 말들이 없었으며 다 먹은 트레이를 주방에 갖다 주는 환자도 없었기에 주방 직원(주로 음성 나환자)들이 투덜거리며 들고 갔다. 주어진 밥을 반도 못 먹고 주방에 들고 갔다. “첫날에는 밥맛이 없는 법이지...나도 그랬어. 그러나 앞으로는 잘 먹어야 해. 그래야 병이 빨리 낫는다구.” 형은 큰 소리로 말을 했다. 첫날은 나도 모르게 불안한 마음으로 보냈으며 다음날 아침 소록도 병원 외래에 들려 환자 번호표를 받았다. 그리고 정식으로 소록도 병원 의사들에게서 진단을 다시 받았다. 병원의사는 몇 명 되지 않았으며 외래와 중환자실도 변변치 않았지만 이곳이 바로 내가 치료를 받아 완치 돼야할 곳이었다. 의사들은 한결같이 나이가 들었으며 피부과 약을 처방하는 일반 의사들이었다. 피부병 약이나 주는 단순한 일을 하는 의사들이기에 심장병, 당뇨 그리고 합병증이 있는 중환자들은 육지에서 일주일에 한번 출장 오는 전문의에게 의존했다. “중한 내과 질병으로 죽어 가는 나병 환자가 꽤나 많지. 내과 전문의사와 외과 전문의사가 한 두 명은 있어야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여기 소록도 병원에는 없어. 한 두명은 있어야 하는데...” 임선생은 내게 말했다. * 일주일이 지나면서 나와 같이 살고 있는 임진석 선생님에 대해 조금은 알게 되었다. 임진석 선생--- -그는 금년(1996년)에 51세가 된다고 하니 공교롭게도 아버지와 같은 나이였다. 그래서 그런지 임 선생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었으나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키는 훌쭉 큰데 호리호리 말랐으며 얼굴의 광대뼈가 툭 튀어 나왔다. 불행하게도 양성 나환자이기에 역시 손등에 진물이 흐르고 있어 늘 장갑을 끼고 있었다. 그리고 얼굴에는 나처럼 두꺼운 각질이 있으며 눈썹이 많이 빠져 문둥병 환자 특유의 사자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소록도로 들어온 지 어느덧 2년이 되었는데 어느 누구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고 하며 한숨을 쉬었다. “고독해...그리고 버림 받았지! 배신을...” “왜요?” 나는 그에게 물었으나 그는 이 한마디만을 하고는 입을 꾹 다물었기에 더 이상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정섭 형의 말을 빌리면 임 선생은 경기도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교감 선생으로 재직을 하던 중 문둥병이 발병하여 소록도로 왔다고 했다. “교감 선생님?” “그래 교감 선생님...그러니 선생님이라고 꼭 부르거라, 그리고 선생님에게 모르는 것이 있으면 질문을 하거라! 친절하게도 가르쳐 주신다.” 정섭 형은 내게 살며시 알려 주었다. ‘교감 선생님, 그리고 고독한 남자. 배신 받은 선생...’ 나는 그날부터 임 선생을 마치 아버지를 대하듯이 존경했다.- 그뿐인가, 한 방에서 먹고 자며 생활을 하는 김정섭 형의 경우는 더 처참했다. -금년, 26세인 형은 7년 전에 이곳으로 강제로 들어 왔다고 한다. 경남 하동, 섬진강 가에서 살던 그는 대학입시에 낙방을 하고 재수 공부를 하고 있었다. 재수를 하다보니 집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하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였는데 피부에 발진이 생기고 진물이 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이 사실을 감추고 살았다. 그러다가 그는 군대에 입대하라는 영장을 받고 군 입대를 결정했다. 그리고 그는 논산 훈련소로 갔다. 논산 훈련소에서 어찌 된 일인지 갑종으로 판단되어 연무대에서 군사 훈련을 받게 됐다. 그런데 그는 훈련중에 점점 힘이 빠지고 눈에 띄게 보이는 피부의 반점과 흠집으로 인해 문둥병 환자로 진단을 받으면서 퇴교를 당했다. “문둥이가 군대에 들어오다니! 꺼져!” 그리고 그는 몰매를 여러 차례 맞았다. 퇴교를 당하고 보니 이젠 갈 곳이 없었다. 집으로 간들 재수생 하다가 소식도 없이 군대에 갔으니 집안으로부터 버려진 신세였다. 당장 먹고 살기가 힘들어 그는 막노동하는 곳으로 가 벽돌을 나르며 땅을 파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문둥병이 발견되어 직장을 잃는 것은 물론 몰매를 맞고 노동자 숙소에서도 쫒겨 나고 말았다. 어디가서 잘 곳도 없었으며 먹을 곳도 없었으니 그는 정말 고아나 마찬가지였다. 집에서는 집을 뛰쳐나간 아들을 찾는 기색도 없었다. 결국 갈곳이 없고 먹고 살길이 막연해 그는 소록도로 찾아와 입원을 했다. 아직도 하동에 있는 식구들은 그의 소재를 모르는 듯하다고 했다. 하동이라야 녹동 항구에서 버스를 타면 불과 1시간 밖에 안되는 거리인데 그에게는 마치 지구 저 바깥 세상과도 같았다. 김정섭 형은 그래도 비록 양성 나환자라고는 하나 언젠가는 대학에 다시 입학을 하겠다고 아직도 책을 읽기 위해 소록도 병원 도서관에 찾아간다고 했다.- ‘아- 외로운 사람....그리고 버림받은 사람...집안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 이것이 바로 문둥병 환자임을 실감하게 됐다. * 그러나 역설적으로 나는 이런 외로운 사람들을 통해 내 외로움을 떨쳐 버리려고 했다. 나도 사람이었기에 문둥병에 대한 공포가 상상외로 심각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였다. 그뿐인가 다른 건강한 친구들과 비교해 보면 비참하리만큼 인생의 패배를 한 꼴이 되었으며 인간 세상에서 버림받는 인간 이하의 사람이 됐다는 사실이었다. 죽고 싶었다. 살아서 무엇을 한단 말인가? 이곳 소록도로 들어와서 본 음성, 그리고 양성 나환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아무런 희망도 없이 하루하루를 지내는 바닥의 인생이었기 때문이었다. 모르긴 해도 김정섭 형과 임진석 선생님의 격려가 없었다면 나는 죽었을 것이다. * 철조망과 안내소(愁嘆場)을 넘어 소록도 1번지, 소록도 병원으로 가는 날은 반드시 음성 나환자 숙소를 지나게 됐는데 나는 몇 명의 노인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만나곤 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이곳 소록도에 들어온지 60년이 넘는다고 했으며 소록도 밖에 아들이 있는 할아버지도 있었다. “아드님이 바깥 세상에 살아 있어요?” “그럼, 그럼. 내 아들이 바깥 세상에 살고 있지.” “보고 싶으세요? 아드님이?” “그럼, 보고 십제. 나 죽기 전에. 한번이라도.” * 소록도에 들어온지도 어느새 일개월, 그 사이에 아버지는 두 번 다녀가셨다. 올 때 마다 먹을 음식과 옷을 가지고 오셨다. 그러나 내 병은 웬일인지 더 악화되고 있었다. 손가락과 발가락이 점점 더 무뎌지고 있으며 코도 납작해 지고 있었다. 그 뿐인가 신경이 무뎌져 감각을 잃고 있었다. 아버지를 보고 싶지 않았다. 아니 아버지가 찾아오는 것이 오히려 부담이 되었다. 내가 와서 관찰 해 보니 소록도를 방문하는 가족들이 의외로 적었다. 형, 김정섭씨와 임 선생님은 아예 가족이 포기를 했는지 한번도 찾아오지를 않았으며 나 처럼 가족들이 있는 사람도 일년에 한번 정도였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진심으로 더 이상 찾아오지 말라고 부탁을 했는데 아버지는 그 뜻을 이해 못하는 듯했다. 1996년은 나에게 있어 가장 힘들고 외로운 한 해였다. * 한 때는 6000여명의 나병 환자들이 수용 되였던 이 소록도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현대 의학과 좋은 약으로 치료와 예방이 잘 되어, 육지에서 들어오는 환자는 현저하게 줄었으며 반면 나이 들어 죽는 나 환자들이 많다보니 이곳에 사는 나환자들의 숫자가 매년 줄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 경제의 발전과 일반인들의 인식도 바뀌어 소록도의 나병 환자들도 더 좋은 대접을 받게 됐다. 결국 양성 나환자 촌은 점점 축소됐으며 반대로 음성 나환자 촌은 더 커지고 있었다. 음성 나환자들은 한 달에 2회 외출을 할 수가 있으며 한 달에 한번은 외박을 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리고 양성 나환자 촌의 위생시설도 좋아지고 급식도 좋아졌다. 그러나 가장 반가운 것은 인간의 굴레처럼 처 있던 철조망이 조금씩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 내가 만난 어느 할머니의 얘기가 눈물겨웠다. 그러나 이 얘기는 나에게 적용될지도 모르는 얘기였다. -금년 66세가 되는 이은미 할머니의 사연이었다. 지금부터 53년 전, 다섯 살의 어린 나이로 문둥병에 걸린 어머니를 따라 소록도로 들어 왔다고 한다. 미감아인 딸(이은미)은 탁아소에 맡겨졌으며 어머니는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양성 나환자 촌에서 살게 되었다. 한 달에 한번 어머니를 볼 수가 있었는데 그것도 철조망을 사이에 둔 수탄장(愁嘆場)에서 1.5미터나 떨어진 거리에서였다. 어머니와 같이 살려면 양성 나환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되려면 손발에 감각이 없어야 한다고 했기에 이 어린 소녀는 일부러 안 아프다고 했다. 17세가 되던 해에 그녀는 마침내 나병 환자가 되어 어머니와 같이 살게 됐다. 그러나 다음해에 어머니는 죽고 말았다. 그녀는 나병 환자로 철조망 속에서 살았다. 몇 년 후 그녀는 음성 나환자로 치료되어 철조망 밖에 있는 음성 나환자 촌으로 나와 살면서 또 다른 음성 남자 나환자와 결혼을 했다. 40이 되던 해에 그녀는 임신을 했다. 그 당시에는 임신이 법으로 금지되었기에 그녀는 닭장에서 닭소리를 내면서 출산을 해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 아들을 이곳에서 기를 수가 없어 사망 신고서를 내고 아들을 몰래 육지로 빼 돌렸다고 한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그녀와 남편은 육지로 보낸 아들의 소식을 알아내고 말았다. “여보! 아들이 살아 있소! 아들이...” “그래! 그런데 언제나 만날 수가 있겠나? 만나 주겠나?” 이 두 부부는 아들을 만나보고 싶었기에 나를 만나면 마치 자신의 아들을 보는 것 같다고 하면서 나에게 음식을 주곤 했다. “강홍조? 내 아들도 살아 있으면 아마 자네 만하겠지... ” 이 부부는 나를 그들의 아들로 착각을 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그것이 싫지가 않았다. “아들이 보고 싶으세요?” 할머니에게 물었다. “그럼...그럼....” 그리고 그녀는 이미자의 노래, ‘동백 아가씨’를 구성지게 부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동백 꽃잎에 맺힌 사연...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젖어...” 동백 꽃잎에 맺힌 사연이 소록도에 핀 동백꽃에도 있었다. 할머니는 오늘도 사망 신고로 처리한 후 육지로 보낸 아들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들이 살아 있어...아들이...” 아들은 순천에 살고 있었다. * 해가 바뀌면서 나는 더 많은 한센씨들을 알게 됐으며 때로는 이곳을 탈출하고 싶은 욕망을 갖게 되었다. 가끔 소록도를 탈출했다가 다시 들어오는 주민(나병 환자)들을 보았다. 너무나 외로워, 버린 가족들이 보고 싶어 가까스레 탈출을 했으나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다시 소록도로 들어 왔다. 육지로 나가 밥을 얻어 먹기가 힘들었으며 잘 곳이 없었다. 그러나 더 힘든 것은 싸늘한 육지 사람들의 냉대와 경멸이었다. 1998년, 여름 나는 마침내 소록도를 탈출을 기도했다. 준비를 했다. 준비라야 좋은 옷을 입고 음식을 미리 가방에 싸 가지고 나가는 것일 뿐이었다. 제2 안내소 직원을 속이고 소록도 1번지를 지나 선착장에서 통통선을 타는 것이 우선 큰 문제였다. 700원을 내고 표를 샀다. 가까스레 나는 통통선을 타고 녹동 항구로 나오는데 성공을 했다. 조마조마한 5분간의 항해가 마치 천년과도 같았다. “어디로 간담...어디로...” 나는 갈 방향이 없었다. “아버지에게로...” 나는 안성을 향해 버스를 타고 출발했다. 광주로 가서 다시 기차를 타려고 했다. “이것봐! 너, 문둥이지?” 여객전무가 나를 알아보고는 광주역에서 나를 밖으로 밀어내었다. 나는 기차를 탈 수가 없었다. 그날 저녁 나는 광주역 근처에서 잠을 잤다. 여름이라고는 하나 밤 공기는 찻다. 광주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을 바라다 보니 안성 생각이 떠 올랐다. 불과 일주일 전에 면회 온 아버지를 나는 보기를 거부했었다. 그것이 내 마음에 아직도 미안하게 느껴져서 안성으로 갈려고 한 것이다. 다음 날 나는 광주역에서 호남선 열차를 탈 수가 있었으며 가까스레 천안을 거쳐 안성에 도착했다. 누가 알아 보지나 않을까? 걱정이 됐다. 아버지가 홀로 사시는 집 앞에까지 찾아 왔다. 그러나 대 낮에는 아버지를 찾을 수가 없었다. 지나가던 사람이나를 알아 본다면 낭패였기 때문이었다. 어두운 밤이 되어 아버지가 있을 집을 살금살금 찾아 갔다. 그런데 그날 저녁,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 오지 않았으며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밤새 기다렸으나 아버지는 어디에 가셨는지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날 새벽, 아버지를 못 만나고 안성을 빠져 나왔으나 어디로 갈 곳이 없었다. 문둥병이 판명이 된다면 사람들은 나에게 돌을 던질 것이 뻔했다. 맞아 죽을 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혹시라도 아는 친척이나 학교 친구들을 만난다면 더 낭패일 것 같았다. “어디로 간담...어디로....” 결국, 나는 소록도를 떠올렸다. “아- 문둥이에게는 소록도가 그래도 가장 안전한 곳이로구나!” 울면서 다시 녹동 항구까지 내려 왔다. ‘통통선을 타고 소록도로 가면 분명 병원에서 나를 징계하리라...’ 통통선이 끊겼기에 녹동에서 하루를 자야 했다. 바닷가에 놓여 있는 쓰레기 처리장이나 아니면 어디 빈 건물을 찾아야 했다. 문득 생각나는 곳이 있었다. “녹동 여관”이었다. 밤늦게 찾아간 녹동 여관에서 나는 그 때 그 여관집 아주머니를 만났다. “아니? 자네? 강씨 아들 아닌가?” “예.” 아버지가 보고 싶어 안성까지 갔다가 되돌아 온 일을 말해 주었다. “아버지를 만나러?” “예.” “위험했어. 앞으로는 탈출하지 말고 소록도 병원에서 착실히 치료를 받아 완치되거라. 잘 못 다니다가 맞아 죽는다.“ 아주머니는 참으로 친절하였다. 그리고 아주머니는 저녁밥을 한 상 차려 주었다. 나는 너무나 배가 고파 훌쩍 훌쩍 먹었다. 순간 나는 죽은 어머니를 만났다고 생각했다. 고마워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왜 우는거여?” “어머니 생각이 나서요.” “오메, 짠해라. 어째 엄니 생각이 안 나겄어!” “.......” 어머니가 나를 낳고 4개월 후에 죽었기에 어머니의 사랑을 모르고 살았다고 고백했다. “4개월만에? 4개월?” “예.” 아주머니는 자신을 어머니처럼 생각하라고 했으며, 탈출했던 일을 아버지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리고 언제고 다시 찾아오면 잠 재워주고 먹을 것을 주겠노라고 약속을 했다. “착실히 치료를 받으랑께. 그라고 언젱가는 완치 될텡께 시간 나는 대로 공부나 하랑께. 대학에도 가고 의사 되야지.”라고. “의사요?” “그렇당께. 의사. 그리고 저 소록도에 사는 나병 환자들을 치료하라고.....” 말도 안되는 얘기를 여관 집 아주머니는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면서 통통선을 타고 소록도로 갔다 그리고 아버지가 보고 싶어 탈출했다가 돌아 온 것을 보고하였다. 큰 징계를 받게 됐으며 감시당할 환자로 낙인이 찍히고 말았다. 탈출에서 돌아 온 나는 김정섭 형과 임진석 선생님으로부터 한바탕 충고를 받고 말았다. 특히 임 선생님의 충고는 나의 심금을 울려 주고 말았다. -너는 이번에 큰 경험을 했어. 세상이 얼마나 냉정한지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왔어. 그것이 현실이야! 현실. “ 그리고 그는 나에게 이렇게 충고를 했다. “착실한 하루, 하루가 네 인생에 필요한 등대란다. 하루를 잘 살면 너의 전 인생이 잘 되는거야.” “착실한 하루라고요? 언제 완치될지도 모르는 인생인데. 하루가 무슨 문제입니까?” 임 선생님에게 되물었다. “하루를 착실하게 잘 살아라. 그러면 너의 10년이 잘 될 거야. 아니 너의 전 인생이... 시간 나는 대로 도서관에 들려 책을 읽거라. 너는 대학에도 가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 우리 문둥병 환자들을 돕거라. 의사가 되거라! 의사가... “ “...............” 임 선생의 충고가 마음 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마치 아버지가 나에게 꾸중을 하고 있다고 생각을 했다. ‘의사? 의사?’ 아버지와 임 선생, 그리고 여관집 아주머니를 번갈아 생각하고 있었다. ‘왜 의사가 되라고 하나? 무슨 이유일까?’ 생각해 보고 또 생각해 보았으나 자신이 없었다. ‘의사가 되려면 공부를 잘해야지. 게다가 일류 고등학교를 졸업해야지. 안성고등학교 중퇴인데, 될 법이나 하나?’ * 돌이켜 생각을 해보면 임 선생은 정말 단정하고 위엄이 있는 분이었다. 내가 임선생을 더 자세히 알게 된 것은 그후 일년 후였다. -추석이 됐다. 고향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곳 소록도에도 부지기 수로 있었다. 그러나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래도 정부에서는 우리 문둥병 환자들에게도 특별한 음식(別食)으로 콩나물 외에 송편을 나누어 줬다. 임선생은 방 구석에 혼자 앉아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지갑에서 무엇인가 꺼내어 보고 있었다. 나는 그가 고향을 생각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홍조야! 이리 와서 이 송편을 마저 먹거라.” 임 선생은 내게 송편을 더 먹으라고 권했다. “아닙니다. 선생님이 잡수셔야지요....” “어째, 너의 아버지는 이번에 오지 않는구나...너의 아버지는 정말로 좋은 사람이여. 그래서 너는 결코 외롭지 않아, 너는 행복한 사람이구나.” 그리고 그는 그의 가정 상황을 말해 주었다. (임선생은 수원시에 있는 매산 중학교 교감 선생이었다. 그는 좋은 가정을 갖고 있었다. 아내는 남달리 예뻤으며 젊어서 국민학교 선생을 했다. 젊은 시절, 교사들의 모임에서 만나 소개를 받고 교제를 해여 결혼을 했다. 경기도 화성군에서는 그런대로 안정되고 부유한 가정을 꾸려 갈 수가 있었다. 아들은 1979년에, 딸 하나는 1980년에 태어났으니 나와 한 두 살의 차이일 뿐이었다. 5년 전 어느날부터인지 피부에 반점이 생기기 시작하며 손 발의 감각이 떨어지고 있어 수원 빈센트 병원을 찾아가 진단을 받은 결과 문둥병 초기라고 했다. 임선생은 당분간 쉬쉬하며 숨기고 있었다. 그러나 문둥병은 진행되고 있었으며 마침내 눈썹이 빠지면서 문둥병이라는 소문이 학교와 주위에 알려지게 됐다. 학교 선생들도 경계를 했으며, 동네사람들은 격리시켜 달라고 경찰에 청원을 했다. 마침내 믿기지 않는 사건이 생겼다. 사랑하는 아내의 배신이었다. 잠자리도 거부를 했고 대낮에도 가까이 오지를 않았다. 아들과 딸도 아버지에게 가까이 가지 못하게 교육을 하는가 하면 동네 사람들에게도 알려 주어 동네로부터 추방을 당하게 됐다. “내 남편은 문둥이요. 그러니 소록도로 보내 치료를 받으렵니다.” “이럴 수가? 병든 나를 위로는 못할 망정 아내가 나를 이렇게 배신하다니...” 처가집 식구들은 대가족인 반면 이북에서 내려온 임 선생의 친척은 거의 없었다. 북한 정권에 의해 버림을 받은 임선생은 마침내 사랑하는 아내와 집안 식구들로부터 또 한차례 버림을 받았다. 가방 두 개를 들고 그는 소록도로 들어오게 됐다. “치료가 되어 다시 집으로 돌아오리다.” 그는 아내와 이별을 했으며 사랑하는 아들에게는 “아들아 공부를 열심히 하거라. 아버지는 꼭 완치되어 집으로 돌아 오마...”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열두 살 된 딸에게는 이 말을 하지 못하고 말았다. “아버지 가지마!”라고 달려드는 딸을 어머니가 떼어 놓았다. 그리고 그는 수원을 떠나,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전라도 길’, 소록도 길을 내려왔다.) “홍조야 네가 몇 살이냐? 내 아들은 너보다 한 살 아래, 딸은 너보다 두 살 아래... 너도 빨리 완치되어 이곳에서 나가야 되는데...” 그러고 보니 금년(1998년) 나는 20세가 되었으나 문둥병은 웬일인지 더 심해지고 있는 듯 했다. 아니 나아가기는커녕 문둥병을 치료하는 라이팜핀으로 인해 간 기능이 약화돼 쉽게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임선생의 아들과 딸... -19세 그리고 18세가 되었으니 아마도 대학생이라고 생각은 되나 한번도 그들을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이곳에 온 이후 한번도 그들은 면회를 오지 않았다. 임 선생은 가족들로부터 철저히 배신을 당한 셈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외로웠으며 가슴 한 구석에 분노가 도사리고 있었다. 나는 임 선생의 가족 사진을 한번 본 적이 있었다. 부인은 미인이었으며 아들은 건장했고 그 딸은 아리따운 12살 소녀였다. 임 혜선(林 橞善)이라고 했다. 나는 지난 몇 년동안, 임혜선이라는 이름과 함께 그 사진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내는 몰라도..... 아들과 딸은 꼭 보고 싶다. 아마도 금년에 대학에 들어 갔을 게다.” 임 선생은 이 말을 하면서 눈물을 쭈르르 흘리고 있었다. “내가 교감으로 재직했던 매산중고교에 다녔을 게다. 간호사가 되겠다고 했는데...” 임선생은 처음으로 내게 그의 처절하였던 과거를 일러주었다. 그리고 임선생은 또 한번 말했다. “열심히 치료를 받게나. 꼭 완치 될 거야. 문둥병은 꼭 완치 된다구... 시간이 걸릴 뿐...나는 아다시피 심장이 약해 숨이 차다네. 문둥병보다도. 심장 때문에 오래 못살 거 같애.” “심장병이?” “그래. 심장병. 홍조가 꼭 의사가 되어 내 심장도 고쳐주게나..” “예? 저더러 고쳐 달라구요?” “그래. 네가 고쳐 줘야지!” 임 선생을 통해 어떻게 해야 훌륭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 지를 알게 되었다. -‘하루를 충실히 사는 것’ 바로 그것이었으나 쉽지 않은 말이었다. 그리고 매산여자중학교에 다니고 있을 그의 딸 임 혜선이란 이름이 내 마음속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토록 보고 싶어하는 임 선생의 딸을 한번 보고싶은 마음이 생겼다. 문둥이 주제에 예쁜 임 선생의 따님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다. * -며칠전 (1999년)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최주상 할아버지의 장례식이 있었다. 최주상 할아버지는 문둥병 환자가 아닌 정상 사람인데 이곳 소록도에서 10년을 문둥병 아들(50세)과 같이 살다가 죽은 사람이다. 그 사연이 안타깝다 못해 내 아버지를 연상시키는 노인이다. 10여년 전, 최주상 노인은(당시 75세) 소록도 중앙 교회 김 목사님을 찾아 왔다. “김 목사님 저를 여기 소록도에서 살게 해 주십시오.” “아니 노인장께서는 정상인으로 보이는데 어찌 나환자와 같이 사시렵니까?” “예. 제발 저를 이곳에서, 내 아들과 같이 살게 해 주세요.” “아들이라니요?” “예 아들, 최민철(당시 40세)과 같이 살게 해 주십시요.” “ 최민철 집사님과 같이 살겠다는 말이군요? 그렇다면 노인장은? 아들, 최 민철을 버렸던 그의 아버지란 말이요?” “예. 내가 아들을 버렸었지요.”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여섯명의 자녀들 중에 불행하게도 막내 아들(10살)이 문둥병에 걸렸다. 발병이 되고 나니 동네 사람들과 다른 친척들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소록도에 나환자 촌이 있다는 말을 듣고 아들을 데리고 떠난 것은 어느 늦은 여름이었다. 교통이 불편해 하루 그리고 이틀에 걸려 먼지 나는 길을 걷다보니 지쳐 버리고 말았다. 어느 산 속 그늘에서 쉬는 중, 문득 잠에 골아 떨어진 아들을 죽이고 싶어 바위 돌을 들어 잠든 아이의 머리를 향해 힘껏 내던졌다. 그런데 돌은 빗 맞고 다른 곳으로 가서 떨어졌다. 다시 돌을 주어 던지려고 하였지만 최주상 노인(당시 45세)은 그런 짓을 더 할 수가 없었다. 아이를 깨워 가던 길을 재촉해 녹동 항구에 와서 배를 타려고 하니 손가락이며 코가 달아난 문둥병 환자들을 정면으로 보게 되었다. ‘아! 멀쩡한 아이를 여기에 어떻게 두고 가나...’ 최주상씨는 아들 민철을 두고 갈 수가 없어 배를 못 타고 있었다. ‘저런 모습으로 살아서 무엇을 하겠니? 몹쓸 운명이려니 생각하고 차라리 너하고 나 함께 죽자.’ 둘은 나룻터를 떠나 아무도 없는 바닷가로 갔다. 신발을 벗고 아들을 데리고 바다 속으로 한발 두발 걸어 들어 갔다. 키가 적은 아들은 갑자기 소리를 쳤다. ‘아버지? 아버지가 죽으면 형이나 누나는 아버지만 믿고 사는데...나만 죽을 테니 아버지는 나가세요!’ 아들은 완강하게 아버지를 떠밀었다. 최주상씨는 아들 민철을 와락 껴안고 말았다. 그리고 아들을 소록도에 입원시키고 돌아 갔다. 그리고 30년이 흘렀다. 다른 다섯명의 아들과 딸들은 대학을 나오고 결혼을 하여 손자 손녀를 낳고 잘 살고 있었다. 큰 아들이 최주상씨에게 시골 땅을 다 팔아서 서울로 올라와 같이 살자고 하였을 때 그의 마음은 문득 30년전에 소록도에 두고 온 막내 아들에게 가 있었다. 최주상씨는 스스로 죽이려고까지 했던 아들에게 사죄를 하고 싶어서 소록도 중앙교회 김 목사를 찾아와 이렇게 같이 살게 해 달라고 애원을 했다. 그리고 10년 최주상 노인과 최민철씨는 같이 살았다. 둘은 중앙교회에서 많은 문둥병 환자들을 위해 봉사를 했다. 85세의 노인 최주상씨는 죽어 문둥병 환자들 처럼 화장을 하여 납골당에 안치됐다.- 나는 최민철(현재 50세)씨를 아저씨처럼 따르고 있고 그도 나를 좋아한다. 어떻게 보면 내 아버지와 비슷한 운명을 지닌 사람들이었기에 내 마음을 활짝 열게 됐고 그분도 그의 마음을 열고 보니 서로를 좋아했다. * 최주상 노인의 죽음과 최민철씨와의 친교는 나를 소록도 중앙교회에 찾아 가 예배를 드리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내가 기독교 신자가 된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란 한갖 멀리 중동에서 일어난 그곳의 종교일 뿐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소록도 중앙교회의 김목사로부터 가슴 찡한 얘기를 듣게 되었다. 여수에 있었던 문둥병 요양소 애양원과 그곳에서 순교를 하였던 손양원 목사에 대한 얘기였다. 나는 손양원 목사의 애절한 순교의 얘기를 듣고 나서 기독교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13. 다른 문둥병 가족, 손양원 목사. 소록도에 들어 온 지도 어느듯 4년.... 아버지는 여전히 나를 찾아 오셨기에 나는 다른 환자들에 비해 덜 외로운 행운아였으나 내 병은 쉽사리 좋아지지 않고 오히려 악화돼 손가락이 두 개, 발가락이 세 개가 떨어져 나가거나 뭉클어 졌다. 코도 역시 문들어 졌으며 얼굴은 사자 얼굴처럼 변했다. 신경 세포도 많이 손상되어 감각도 많이 무뎌졌다. 다행히 임선생님, 그리고 정섭 형님, 최민철씨 덕분에 중앙교회에 참석하고 소록도 병원 도서관에서 책도 읽어, 못 다한 고등학교 과정도 마치게 됐다. 영어공부 그리고 생물학에 대한 책을 탐독했다. ‘의사가 되라!’던 그 말이 나에게 자극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병에서 완쾌되면 나도 의사가 될 수 있다. 아니 완쾌가 안되더라도..나도 의사가 될 수 있다.’라는 마음의 다짐도 해 보았으나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 소록도 중앙교회 김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손양원 목사의 일대기는 나를 감동시켰을 뿐만 아니라 내 삶 속에 깊숙이 자리잡았다. “강군! 내 말을 들어보게나. 나병 환자들을 위해 평생을 바친 손양원 목사의 일대기를 말일세. 손 목사님은 진정 우리 문둥이들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희생 했다네. 알고 보면 우리 문둥이들을 위해 스스로 문둥병에 걸렸던 사람들도 꽤나 있어. 나는 목사라고는 하나 손양원 목사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네. 부디 강군도 열심히 공부를 해 훌륭한 사람이 되기 바라네.” 그리고 김 목사가 나에게 들려준 손양원 목사의 일대기는 다음과 같았다. -산돌 손양원(孫 良源)목사는 1902년에 출생하여 한국전쟁이 치열하던 1950년 9월28일, 나환자들과 함께 교회를 지키다가 공산군에 의해 마흔 여덟의 나이로 총살당했다. 그러나 그가 산 48년은 결코 짧지 않았다. 손양원 목사는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일곱 살 때부터 교회를 다녔는데 함안의 칠원 공립보통학교 재학시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퇴학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에게 세례를 주었던 맥레(맹호은)선교사의 도움으로 복학을 해 1919년 18세의 나이로 보통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서울의 중동학교에 진학하였으나 극심한 가난으로 밤에 만두장사를 하면서 공부를 했다. 그러나 결국 수중에 남아 있던 70전을 안국동 교회에 헌금하고 고향으로 돌아 왔다. 그 후 일본 동경으로 가 스가모 중학교 야간부를 졸업한 후 1923년 귀국한 다음해, 정양순 여사와 결혼을 하고 경남 성경학교에 입학을 했다. 큰 아들, 동인이가 한 살 되던 해, 부산 감만동 한센병자 교회 전도사로 부임을 했는데 당시 이 교회에는 600여명의 문둥병 환자들이 있어 교회개척과 문둥병 환자를 돌보는 일을 같이 했다. 1935년 평양 신학교에 입학했으며 대동강변의 능라도 교회의 전도사로 봉사를 했다. 선교사(교장) ‘로버트 나부열’도 신사참배를 반대했으며 그 결과 1938년 손 목사가 마지막으로 졸업한 평양 신학교는 폐교되고 말았다. 다음해 37세의 손목사는 여수 애양원에 딸린 애양원 교회로 부임하게 됐다. 애양원은 원래 광주 양림동에서 시작됐는데 그 당시 환자는 단 한 명이었으나 여수로 옮긴 후 1000명이 넘는 대규모의 한센병자 시설이 됐다. 손 목사는 이곳 애양원에서 10년간 목회를 했는데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는 것은 물론 목회 일도 하느라 바쁜 하루하루를 보냈다. 신도들 중에는 병마로 눈을 잃은 사람, 손이 꼬부라진 사람, 걸음걸이가 불편한 사람, 얼굴이 이글어 진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보통 사람들로부터 돌팔매질을 당했으며 가족들로부터 철저히 외면 당했다. 손목사는 그들에게 구원과 희망의 상징이었다. 비록 육체는 말도 못하게 일그러 졌지만 아름다운 예수의 가족으로 만들겠다고 마음을 먹고 환자들과 같이 먹고 잠자리를 같이 했으며 환자의 얼굴을 만지며 기도를 드린 목사였다. 손목사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일본에 의해 1940년 투옥됐으며 사상의 전향을 하라고 강요당했지만 그는 끝까지 신사참배를 반대했다. 6년간의 옥고를 치루고 있다가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출옥됐다. 김구 선생은 그를 서울에 있는 교회에 추천을 했으나 그는 사양하고 곧장 여수 애양원으로 내려와 시무를 했다. 비록 해방은 됐으나 남과 북의 이데올로기 차이로 인한 여순 반란 사건으로 그의 두 아들(큰 아들 동인-순천 사범학교, 둘째아들, 동신-순천 중학교)은 공산당에 잡혀 총살을 당했다. 동인은 24세 동신은 19세였다. 한번에 두 아들을 잃은 손 목사는 며칠동안 비통의 시간을 겪으면서 신음했다. 하지만 장례식 때에는 놀랍게도 기쁜 목소리로 이런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나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이 나오게 하였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로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두 아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두 아들을 죽인 좌익계 학생 안재선이 체포되어 총살 직전에 처했는데 그 소식을 들은 손 목사는 국군책임자를 찾아갔다. “내 아들들은 결코 자기들 때문에 친구가 죽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만일 이 학생을 죽인다면 그것은 동인 .동신 두 형제의 죽음을 값없이 만드는 것입니다.” 그는 원수를 사랑하라느느 성경의 가르침을 실천한 사랑의 사도였다. 안재선은 손재선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부산의 고려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로 활동하다가 1979년 서울에서 별세했다. 그러나 손 목사의 역경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 호남지방도 공산군의 수중에 떨어졌으나 피난을 가지 않고 교회에 남아 계속 문둥병 환자들을 돌보며 교회의 종을 쳤다. 애양원 교회 교인들은 그를 피난시키려고 했으나 그는 끝까지 피난을 가지 않았으며 1000명의 환자들을 돌보기 위해 탔 던 배에서 내려 애양원으로 돌아 왔다. 1950년 9월 13일 공산군에 체포되어 9월28일 11시 여수 근교 미평 과수원에서 총살을 당하였으니 그의 나이 48세였다. 자기를 죽이려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총 개머리 판으로 맞아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내 눈을 베고 내 코를 베고 내 입이 찢기고 내 손이 잘리고 내 발이 떨어지고 내 목이 끊겨서 석 되 밖에 안 되는 피가 다 쏟아지고 내 뼈가 부서져 가루가 되어도 주님의 사랑을 다 갚을 길이 없는데 내 어찌 피신하리요.” 이처럼 그는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도 두 손 모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하다가 순교를 했다. “나는 손 목사를 진정으로 존경한다네. 그래서 수시로 여수 애양원에 있는 그의 묘소를 찾곤 하지. 푸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그의 무덤 앞에 앉아 나는 그가 한 일의 10%만이라도 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한다네.” 김 목사는 말을 맺었다. “정말 훌륭하신 분이군요.” 나는 기독교에 대해 좀더 알게 됐으며 남을 위한 희생이 무엇인지도 알게 됐다. ‘문둥병 환자를 위해 죽다니...’ 이날 이후 나는 기독교 신자들을 다시 보았으며 소록도 중앙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으나 내 마음에 깊은 신앙심은 없었다. 단지 존경심과 호기심으로 나갔을 뿐이었다. ‘기독교란 결국 나를 희생하고 남을 살리는 사랑의 종교란 말이군... 예수를 보라. 그는 전지 전능한 신이다. 그러나 그가 창조한 인류들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인간이 되어 세상에 내려 왔다. 인간들이 지은 죄를 대신해 죽음으로 인간의 죄를 깨끗이 씻어 주었다. 나와 같은 문둥이들을 위해 스스로 문둥이가 되었고, 문둥이들은 깨끗이 나았다는 말이다. 이 암담하고 외로운 인생 길을 환하고 즐거운 천국으로 인도해 준다는 말이다.‘ 그러나 내게는 이 말의 뜻이 와 닫지 않았다. 구름에 뜬 귓 속말로 들렸다. “강군, 언젠가 강군에게 성령님이 임하시면 큰 은혜를 받고 대신 죽은 예수의 의미를 알게 될 걸세. 그러니 부지런히 교회에 참석해서 기도하고 더 자주 성경을 읽게나.” 김 목사는 내 손을 잡고 기도를 하며 축복했다. “언젠가는 강군도 문둥병으로부터 완치돼 자유로울 때가 오리다.” “고맙습니다. 목사님. ”나는 목사님의 손을 잡았다. 순간 내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연세의대 유준 박사가 내 손을 쥐어 주며 ‘10년이면 날 수 있어’ 라고 한 말이 떠오르고 있었다. 14장 또 다른 문둥병 가족, 오스트리아에서 온 마리안느, 마가레트 수녀들. 소록도는 사실 아름다운 섬이다. 단지 이 섬에 사는 우리 문둥병 환자들의 몰골이 흉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가까이 하기를 꺼릴 뿐이다. 일단 우리 문둥병 환자들과 마음이 통하면 이 섬은 천국이 될 것이다. 그러기에 소설가 이청준은 “당신들의 천국”이라는 제목으로 소설을 써 크게 감명을 주었으며 이로 인해 소록도는 더 많이 세상에 알려 졌다. 이청준이 쓴 소설은 다분히 이곳에서 일어난 정치적인 글이기에 이해를 달리 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나는 그가 쓴 소설을 여러 차례 읽어봤다. 비록 나의 신분은 양성 나환자라고는 하나 음성 나환자들과도 서로 친근하게 지낼 뿐만 아니라 한 가족처럼 살게 되었다. 어느덧 2000년이 되었으니 내가 이곳에 들어 온 지도 4년이 되었으며 21세기를 맞았다. 나는 이곳에서 천주교를 알게 됐다. 내가 살던 안성에도 천주교가 있지만 이렇게 실감나게 천주교를 알게 된 것은 이곳에 와 있는 두 명의 간호사들 때문이었다. 놀랍게도 두명의 수녀, 간호사들은 멀리 유럽의 오스트리아에서 온 마리안네 스퇴거, 마가레트 피사렉이며 일찍이 돌아갔던 마리아 수녀까지 포함에 3M이라고 부른다. 금발의 머리를 가진 이들 세 수녀들은 여기 소록도에 1960년도에 찾아와 간호를 시작했다. 마리안네 수녀는 1959년에, 마가레트 수녀는 1962년에 각각 소록도로 왔다. 마리아 수녀는 비슷한 시기에 왔으나 일찍이 오스트리아로 돌아갔기 때문에 그녀를 본적이 없다. 하얀 머리를 가진 이들 수녀들은 정말로 남루한 옷을 입고 우리 문둥병 환자들의 환부를 장갑도 안 끼고 약을 발라 주곤 했다. 내가 여기 소록도에 온 지 불과 일주일 후에 나는 백인의 수녀를 만났다. 댑손이란 약을 직접 가지고 왔으며 ‘설파제’라고 하는 피부약을 내 손과 발에 직접 발라 줬다. 나는 깜짝 놀랐다. 내 친구들은 내 손만 그들의 피부에 닿아도 흠칫 놀랐으며 내가 보는 앞에서 물로 씻었으니까... 병원 외래에 가면 그 두 수녀들을 쉽게 볼 수가 있었다. 나는 그 수녀들이 의사인줄 알았으나 간호원임을 알고는 더 놀랐다. 그 두 수녀들은 전라도 말을 자유롭게 쓰고 있었기에 우리 문둥병 환자들은 두분 수녀를 ‘할매’라고 부른다. “빨리 오랑께...약, 먹어야저!” 수녀들은 나를 보고 빨리 와서 약을 먹으라고 전라도 말로 불렀다. 병원 직원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에 따르면 두 수녀들은 오스트리아 인스부르그에서 간호학교를 각각 졸업을 했을 때 우연히 ‘멀리 극동의 한 나라, 한국, 소록도 나병 병원에서 간호사를 원한다’라는 수녀회의 소식을 듣고 1962년과 1966년에 자원해서 소록도로 찾아 왔다. 당시 소록도에는 6000여명의 환자가 있었으며 아이들도 200여명이나 되었기에 ‘아- 이섬에서 평생 이들을 돌보며 살아야 겠구나’라고 결심을 한 후 가족들에게는 귀국하지 않을 거라고 연락을 했다. 뿐만 아니라 소록도에서 죽어 여기에서 화장되어 묻힐 것이라고 결심을 했다. 수녀들은 맨손으로 피 고름을 치료했으며 외국의 의료진을 초청하여 장애 교정 수술도 받게 했으며 고국에서 보내온 지원금으로 돼지를 기르는 자활 사업도 했다. 쓰러져 가는 초가를 현대식으로 개량했다. 수녀들은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온 종일 환자들을 돌보는 데 전 생애를 보내고 있다. 어쩌다 수녀들이 사는 방을 가 보았다. 텔레비존도 없는 방에는 장롱 하나만 달랑 놓여 있었으며 다른 가구는 일체 없었다. 본국 수녀회에서 보내온 생활비까지도 환자들의 우유값과 간식비로 나누어 주었다. 뿐만 아니라 매월 10만원씩 나오는 장기봉사자 식비도 받지 않았으니 놀라움을 넘어서 이 사람들이 과연 사람인가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수녀들을 볼 때마다 우리 문둥이들은 우리들과 같은 식구라고 생각을 하고 있다. 이들이 근무하는 간호실 문 앞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 “너를 위하여 나는 무엇이 될까/너의 등불이 되어/너의 별이 되어/달이 되어/너의 마스코트처럼/네가 마주보는 거울처럼/나는 네가 되고 싶다/우린 서로 지켜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 * 나는 마리안느 수녀에게 물었다. “수녀님? 수녀님은 왜 이렇게 우리를 돕습니까? 왜요?” “우리는 천주님으로부터 큰 은혜를 받았어. 그 은혜를 받고 보니 너무나 기쁘고 겸손해 지는 군...그리고 우리는 이 받은 은혜를 누군가를 위해 헌신을 해야 해.” “큰 은혜? 그게 무슨 말이요?” “천주님은 그의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 우리를 위해 대신 죽었어. 우리는 그를 믿기만 하면 영원한 천국에 가는 거야. 이토록 천주님은 우리 인간을 사랑하는데 우리 인간들은 천주님의 사랑을 모르고 있어.” 나는 소스라쳐 놀랐다. -천주교의 수녀나 기독교의 목사님이나 똑같은 말을 하고 있으니까....- “강홍조 형제? 당신과 같은 문둥병 환자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 다미엔 신부를 기억하게나.. 나는 다미엔 신부를 생각하며 이곳 소록도로 들어 왔다네. 다미엔 신부처럼 나도 여기에서 문둥병 환자가 되어 당신들과 같이 살다가 죽어 여기에 묻히려고....“ “예? 여기에서 죽어 묻히려고요?” 나는 마리안느 수녀를 마치 천사처럼 바라다보았다. ‘천사다! 천사....’ 나는 두 수녀들을 흠모하며 존경하기 시작했다. “네가 마주보는 거울처럼... 나는 네가 되고 싶다. 우린 서로 지켜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 사.람.이. 되.고.싶.다. 나는 아직도 사람이 아닌 문둥이 일뿐....... 15. 또 다른 문둥이 가족, 다미엔 신부. 두 분 수녀들을 통해 들은 다미엔 신부의 얘기는 내 마음에 큰 감동을 주었다. “다미엔 신부를 생각하며 우리는 여기 소록도로 왔어...” 다미엔 신부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 수녀에게 그 분이 어떤 분인가를 들려 달라고 졸랐다. -세계적으로 큰 나라 미국(당시는 하와이 제국)에도 한 때 문둥병이 창궐하였으며 국가적인 문제가 됐다. 하와이 정부는 문둥병 환자들을 하와이 군도의 한 섬, 몰로카이(Molokai)로 강제로 보내 격리 시켰다. 몰로카이 섬! 오하우, 카우이, 하와이, 마우이섬들도 아름답지만 몰로카이 섬은 더 더욱 아름다웠다. 하와이가 미국의 한 주로 승격되기 전, 하와이 군도는 카메하메아 왕에 의해 하와이 왕국으로 통일이 되었으며 미국, 영국등 외국 세력이 하와이 왕국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카메하메아 일세가 죽고 2세 3세 4세등에 의해 통치되던 시절, 하와이 등지에 나병이 극성을 부리게 되자 하와이 정부는 환자들을 강제로 몰로카이 섬으로 격리 시켰다. 몰로카이 섬은 아름다우나 바위가 많고 해안이 절벽으로 된 곳이 많았다. 특별히 칼라우파파 반도에 있는 가파른 암벽으로 둘러 싸인 팔리 계곡에는 수 많은 문둥병 환자들이 격리돼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병 환자들은 집단 수용소에 버려진 채 굶주림과 병으로 죽어 가고 있었다. 피부가 썩어

회원:
1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0
어제:
0
전체:
59,0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