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내고향은 소록도 파트 6

2012.01.23 12:35

연규호 조회 수:536 추천:15

15. 또 다른 문둥이 가족, 다미엔 신부. 두 분 수녀들을 통해 들은 다미엔 신부의 얘기는 내 마음에 큰 감동을 주었다. “다미엔 신부를 생각하며 우리는 여기 소록도로 왔어...” 다미엔 신부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 수녀에게 그 분이 어떤 분인가를 들려 달라고 졸랐다. -세계적으로 큰 나라 미국(당시는 하와이 제국)에도 한 때 문둥병이 창궐하였으며 국가적인 문제가 됐다. 하와이 정부는 문둥병 환자들을 하와이 군도의 한 섬, 몰로카이(Molokai)로 강제로 보내 격리 시켰다. 몰로카이 섬! 오하우, 카우이, 하와이, 마우이섬들도 아름답지만 몰로카이 섬은 더 더욱 아름다웠다. 하와이가 미국의 한 주로 승격되기 전, 하와이 군도는 카메하메아 왕에 의해 하와이 왕국으로 통일이 되었으며 미국, 영국등 외국 세력이 하와이 왕국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카메하메아 일세가 죽고 2세 3세 4세등에 의해 통치되던 시절, 하와이 등지에 나병이 극성을 부리게 되자 하와이 정부는 환자들을 강제로 몰로카이 섬으로 격리 시켰다. 몰로카이 섬은 아름다우나 바위가 많고 해안이 절벽으로 된 곳이 많았다. 특별히 칼라우파파 반도에 있는 가파른 암벽으로 둘러 싸인 팔리 계곡에는 수 많은 문둥병 환자들이 격리돼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병 환자들은 집단 수용소에 버려진 채 굶주림과 병으로 죽어 가고 있었다. 피부가 썩어 악취가 나며 삶을 포기한 문둥병 환자들은 아무런 희망도 없이 죽어 가야 했으나 누구도 이를 도와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병 환자들의 실태가 조금씩 밖으로 알려지면서 자원 봉사하려고 하는 사람들과 단체가 나타나고 있었다. 벨지움에 살고 있던 요셉 드 브스터(Jeseph De Veuster)는 19세에 Scared Hearts Community(심장병회)의 멤버가 됐다. 그에게는 형이 있었다. 그 형은 문둥병 환자들을 돕기 위해 신부(神父) 공부를 하던 중 과로로 죽고 말았다. 동생, 요셉은 죽은 형을 대신해 신부 수업을 받았으며 다미엔(Damien) 이란 이름을 받게 됐다. 1873년, 33세의 다미엔 신부는 하와이 섬으로 들어가 선교 생활을 시작하던 중 나병이 극성을 부리자 몰로카이 섬으로 가기를 자원했다. 신부. 다미엔은 나병 환자들을 위해 성당의 보수 공사를 했으며 농사 짖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함께 운동을 하며 꽃도 심어 주었다. “나환자(癩患者), 누구의 몸에도 절대 손을 대지 말라.”라는 주교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는 문둥이들을 껴안아 주었건만 문둥병 환자들은 천주교 신자가 되지를 않았다. 매주 12명씩 죽어 가고 있었다. 10년간 전도를 하였으나 문둥병 환자들은 신자가 되기를 거부했다. 이유는 간단 했다. “다미엔 신부, 당신은 우리와 같은 문둥이가 아니요. 그러기에 당신은 우리들을 진정으로 이해 할 수가 없소.” “우리라고 했소?” “그렇소. 우리---” “우리? 우리? 우리 문둥이? 아! 우리 문둥이....” 그는 나환자가 되기를 기도했다. “이 땅에 인류를 구하기 위해 몸소 오신 예수처럼 문둥이를 구하기 위해 나도 문둥이가 되게 하소서. 문둥이와 한 식구인 우리가 되게 하소서.” 다미엔 신부는 간절히 기도를 했다. 얼마 후, 일년..이년.. 그는 타고 있던 촛대에 손을 언졌는데도 뜨거운 감각을 못 느끼고 있었다. “아니? 감각이 없어지다니....” 다미엔 신부는 무릎을 끓고 감사 기도를 했다. “감사합니다. 저도 문둥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문둥이들 앞에 나가 문둥이가 된 것을 선언하고 “우리 문둥이”로 시작되는 강론을 하였다. “우리, 문둥이....우리 문둥이...” 우리란 말이 문둥병 환자들을 감동시키기 시작했다. 그후 단 3년 만에 죽음의 섬에서 800명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대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다. 그리고 그는 몇 년 후 문둥병으로 인해 죽어 몰로카이 섬에 묻혔다. 문둥이들이 죽어 묻히는 몰로카이 섬, 해안에 그도 나란히 묻혔다. 1936년 벨기에 정부의 요청으로 다미엔 신부의 시신은 고향 땅으로 이장되었는데, 몰로카이 사람들은 사랑하는 신부의 시신의 일부라도 그들에게 돌려 달라고 요구했다. “우리의 선생, 다미엔 신부의 일부라도 돌려주소...” 몰로카이 섬의 문둥이들은 눈물로 호소했다. 벨지움 정부는 그들 문둥병자들을 어루만지던 다미엔 신부의 손(手)을 몰로카이로 돌려보내 주었다. “내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친 나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내가 죽거든 새벽마다 엎드려 기도하던 해변가의 빠뿌아 나무 그늘 밑에 나를 묻어 다오” 그는 빠뿌아 나무 아래 묻혔다. 오늘날도 몰로카이 섬은 관광객이 오지 않으나 그래도 다미엔 신부가 문둥병 환자들과 같이 살다 죽은 팔리 계곡을 찾는 사람들의 눈시울이 뜨거운 것은 “받은 은혜가 고마워 남에게 모든 것으로 베풀었던 그 믿음”때문이었다. “강홍조 군! 다미엔 신부의 이 정신을 나는 17살 때 부터 흠모하였네. 그래서 나는 간호학교에 입학했으며 이곳 소록도로 온 거지...” 마리안네 수녀가 내 손을 꼭 잡고 말해 주었을 때 나는 온몸에 전율을 느끼고 있었다. ‘남을 위해 스스로 문둥이가 되다니.., 문둥이의 피고름을 입으로 빨았던 손양원 목사, 다미엔 신부...’ 나는 두 기독교인들을 마음속에 흠모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유교의 집안임을 내 마음속에서 놓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기독교 신자가 될 수 없다!” 16장: 또 다른 문둥병 가족. “김경민(金庚旻) 내과(內科) 전문의사(專門醫師)” 소록도에 들어 온 지 어느덧 5년이 되는 2001년 3월이었다. 소록도 병원에 아주 젊은 의사가 부임해 왔다. 멀리 서울에 있는 세브란스 병원에서 내과전문의사와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전임강사를 거쳐 조교수로 갓 승진된 젊은 의사였다. 소록도 병원 원장은 그가 이곳에 자원하는 원서를 보냈을 때 반신반의 했다. “소록도 병원의 의사? 여긴 갈 곳 없는 늙은 의사나 아니면 군대에서 막 썩다가 온 아무 것도 모르는 퇴역 군인출신 의사나 와서 시간이나 보내며 월급이나 타는 곳으로 알려 졌는데, 연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호흡기 내과 전문의사가 여기에 오겠다니... 이 친구 돌았나? 허긴 우리 문둥병 환자들도 이젠 사람 대접을 받아야지. 실력 있는 의사가 와서 제 때 손을 쓰면 좋을 텐데... 농담이겠지. 괜히 해본 소리겠지.“ 소록도 원장은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경민 전문의사는 예정대로 소록도 병원으로 부임해 왔다. -소록도에 나병환자를 위한 병원이 개설 된 이후 수많은 의사들이 “소록도 천국”을 외치며 많은 계획을 세웠었지만 나병 환자들의 생각과는 아주 동떨어진 결과를 초래하고 손. 발가락이 떨어진 나환자들을 혹사시키고만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정치적인 야망에서 나온 보건 정책으로 많은 문둥병 환자들이 죽어나가기도 했으며 심지어 수호이란 원장은 문둥병 환자의 칼에 찔려 죽기조차 했었다. 소설가 이성춘이 쓴 “당신들의 천국”이란 소설도 알고 보면 소록도에 부임한 의사 원장과 원생들 사이의 갈등을 써낸 소설로 인기를 끌었다. 고무 장갑을 안 끼고 맨손으로 환자들의 고름을 짜주었다는 의사는 없었으나 간호사들은 있었다. 젊은 김경민 의사의 부임은 아주 신선한 충격이었다. -김경민 의사는 충청도 시골 출신으로 연세의대에 입학한 후 나병의 대가 유준 박사의 강연과 가르침으로 나병에 대해 남달리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항간에서는 나병을 피부병이라고 생각하나 피부에만 국한된 병이 아니고 신경, 뼈 그리고 사람이 갖고 있는 어느 장기에도 다 영향을 주는 전신 병이기에 피부과 의사에게만 의존한다면 치료에 큰 실패를 초래하기 마련이다. “피부과만 가지고는 안 된다. 나병 환자들도 인간이기에 그들도 심장, 고혈압, 당뇨 그리고 암에 의해 죽는 것이다. 그렇다면 피부과 의사도 훌륭하지만 응급을 다루는 호흡기 내과를 전공하자. 그는 의사가 되면서 어느새 이런 계획을 세우고 졸업과 더불어 내과 그리고 호흡기 전문의사 과정을 세브란스 병원에서 이수했다. 이어서 군의관으로 복무한 후 전임강사로 채용되었다가 조교수로 승진 된 것이 불과 몇 개월 전이었다. “아니? 앞길이 창창한 유능한 의사가 하필이면 소록도로 간단 말인가?” 세브란스 병원장은 물론 내과 과장도 말리고 또 말렸으나 그의 의지는 변하지 않았다. 그가 사랑하는 아내와 처가집에서도 맹렬한 반대를 했으며 아직도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김경민 의사는 혼자 소록도로 부임해 내려왔다. * 김경민 의사에 대한 평판은 듣던 대로 좋았다. 젊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는 정말 다미엔 신부나 손양원 목사처럼 희생적으로 환자를 진료했다. 그뿐인가 그는 월급을 털어 환자들을 돕고 있었다. ‘36세의 젊은 내과 의사... 그렇다면 그는 나보다 13세가 더 많구나. 내 나이 23살인데...’ 젊은 의사와 나를 비교해 보니 너무나 초라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를 존경하는 마음이 반대로 솟구치고 있었다. 병원 외래를 방문하여 진찰을 받으면서 나는 김경민 의사를 알게 됐다. “강홍조 씨? 젊은 나이군...아직도 양성 환자라? 벌써 6년이나 됐는데...” 그는 내 진료 일지를 읽으면서 내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도 치료가 안됐습니다. 양성이니까요” “그러게. 나을 때가 됐는데...왜 더딜까? 곧 나을 걸세. 곧! 힘내거라. 힘내.” 그는 내 손을 꼭잡고 흔들었다. “.....” 나는 대답을 못했지만 그의 말속에서 그리고 그의 손에서 많은 용기를 얻게 됐다. 그러나 충고는 고마웠으나 문둥병에서 완치되지 않는 한 우울했다. * 내가 김경민 의사와 정말 가까워진 것은 나의 심한 우울증과 그로 인한 합병증을 치료하면서였다. 2002년 가을, 추석이 찾아 왔다. 아버지가 많은 음식을 가지고 소록도로 찾아 왔다. “홍조야! 너의 형들이 나를 미국으로 오라고 초청을 했어. 뉴욕과 로스앤젤레스에서 잠시 살다 오마. 혼자 있을 수 있겠니?” “.........” 나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아내도 없이 세 아들을 위해 살아 왔다. 두 아들은 서울공대와 상대를 나와 모두 출세해 미국에 가서 잘 살고 있는데 굳이 소록도에 사는 나 같은 문둥병 환자 때문에 홀로 안성에서 고생을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도 이젠 몸이 많이 약해 졌어. 옛날 같지 않아...” “아버지! 미국에 가세요. 아무래도 형님들이 잘 해 줄겝니다. 아버지...” “그래, 홍조야! 나 없는 동안 몸 건강하거라. ” 아버지는 마침내 참고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우리는 혜어졌다. 추석 달이 중천에 떠 있었으며 밤 바람도 다소 선선하였다. 그날 이후 나는 눈에 띄게 우울해지고 있었다. 내 인생에 자신이 없었다. 문둥이 주제에, 그것도 양성 문둥이로 살면 무엇을 한단 말인가? 손가락도 없어지고 발가락도...그리고 입은 뭉클어 졌으며 신경세포가 죽어 감각도 무eu지고 있으니... 젊은 의사의 말대로 완치 될 때가 되었는데 아직도, 아직도 약을 먹다니... 게다가 아버지 마저 미국으로 가게 되면 고아가 되는 셈이었다. 급격히 내 인생이 서글퍼지며 희망도 없고 가치도 없는 인간임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살면 무얼하노? 살 이유가 없다.” 나는 먹는 것을 줄였으며 잠도 제대로 못 자며 설치기도 했다. “강군? 힘을 내게나.” 임 선생이 숨을 몰아 쉬면서 내게 용기를 내라고 격려를 했다. 2002년이 되면서 임 선생은 숨이 차며 가슴이 아픈 증상을 자주 보이고 있었는데 젊은 내과 의사의 진단으로는 협심증이라고 하며 육지에 있는 큰 병원에서 수술을 받도록 조처를 하고 있었다. 우울증은 목사님이나 신부님도 해결하기 힘든 증세로 악화되고 있었다. 김경민 내과 의사는 나를 불러 항 우울제를 투약하며 몇 가지 충고를 했다. “자네의 아버지는 몹시 피곤한 듯하네. 그냥 미국으로 가시도록 하게. 그 대신 자네는 열심히 약을 복용하게나. 그리고 오늘의 고통과 슬픔을 오히려 자네의 꿈으로 만들게.” “예? 나의 고통과 슬픔을 오히려 꿈으로 만들라고요?” “그래. 역경을 미래의 꿈으로 만들 수도 있지....” 김경민 의사의 충고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돌이켜 보니 나는 나의 아버지가 이곳으로 올 때마다 오지 말라고 말은 했지만 내 마음 속에서는 아버지 없이는 한 순간도 못사는 아주 약한 존재임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미국으로 간다니...나는 순간 나를 버티고 있던 큰 버팀목이 물에 쓸려 내려간다고 생각했다.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나침판 없는 작은 쪽배와도 같았다. 2-3주가 지났다. 도저히 해결할 길이 없었다. 문득 30년 전에 아들을 소록도로 보내 놓고 가슴속에 죄책감을 느꼈던 최주상 노인이 소록도 중앙교회 목사를 찾아 왔던 일화가 생각났다. 아들과 같이 죽으려고 바다에 빠졌다던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다. “그래, 바다에 빠져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 죽자!” -10월 중순, 나는 저녁을 먹고 있는 동료들 몰래 해안가로 빠져 나왔다. 제법 찬바람이 불어오고 있었으며 소록도 바닷가에는 사람들이 없었다. “아버지! 아버지!” 여러차례 아버지를 불러 보았으나 대답은 없었다. 생후 4개월만에 죽었다는 어머니도 불러 보았으나 그 얼굴은 더 더욱 기억이 없었다. 한하운의 시를 읽어 본 적이 있었다. “파랑새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푸른들 날아 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으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 희망도 없는 이 세상, 살아 무엇하리 차라리 죽어 파랑새 되어 자유로운 세상으로 날아가고 싶다고 울부짖던 한하운.... 이와 비슷한 분위기를 가진 시를 적어 놓고 즐겨 읽었던 기억도 떠올랐다. “지상의 이별들을/울어 주기 위해/갈대가 제자리로 돌아 오면// 나는 빨갛게 익은 내 아픔을/ 훈장처럼 들고 갈 거야// 한(恨)이 깊어도 쓰러지지 않는/갈대 사이에/바람도 표정을 잃었던/내 생을 눕히고// 모든 잎새들이/푸른 기억을 놓아버리는 날/이생의 연민은 그런 거라고/풀벌레처럼 태연이 훨씬/아름다운 거라고//질리도록 파랗게 허탈함을/악물고 마음을 비우는 하늘// 저 필사(必死)의 능선을 넘어/나는/ 가장 완숙한 승리의 빛깔로/내 앞에 열린/몫의 삶을 비행할거야.//(시인 정정인의 가을 독백) 나는 분명, 한하운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고된 인생, 희망도 없는 문둥병의 인생을 저주하고 또 저주했다. 가을이 짙어 지면서 더 더욱 외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이렇게 나를 학대하고 있었다. 나를 낳고 4개월만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 곁으로 가고 싶었다. 나는 순간 어머니가 그리웠다. 기억도 안 나는 어머니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신발을 바닷가에 벗어 두고 조금씩 조금씩 바다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겁도 났으며 후회도 생겼다. 그렇다고 무슨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소록도 제 2번지 남쪽 편, 화장터가 있는 바다 근처였다. 바다로 들어가면서 오로지 아버지 생각뿐이었다. 내가 죽으면 마음 편하게 미국에 가서 형들과 같이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을 하니 차라리 나같은 놈은 없어지는 편이 효도하는 길이라고 생각을 했다. 바닷물이 제법 차가웠기에 몸서리쳐지기도 했지만 한발 또 한발 들어 갔다. 마침내 내 얼굴이 물 속에 잠기는 곳까지 들어 왔다. 조금만 더 들어가면 나는 죽어, 파랑새처럼 여기 소록도를 벗어나 어머니가 계시는 먼 곳으로 가게 된다. 그러면 그곳에는 아무런 고통도 없으며 다른 사람들로부터 멸시도 편견도 받지 않으리라. 순간 바다가 가파라지면서 나는 바다 속으로 미끌어 지고 말았다. 무의식적으로 나는 허우적 거렸으나 나를 가눌 힘이 없었다. 그리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 꽤나 오랜 시간이 흘렀나보다. 나는 확성기에서 왕왕 거리며 나오는 큰 소리를 듣고 있었다. 마치 시골 학교에서 치루던 가을 운동회와 넓은 운동장에서 들리던 그 시끄러운 소리였다. “왕-왕-왕-” 얼마 후 눈을 뜨고 보니 내 눈 앞에는 밝은 불이 켜 있었는데 내가 있는 곳이 어딘지를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잠시 후 누군가가 내 곁에서 나를 흔들고 있었다. 온 몸이 안전 벨트로 매여저 있었으며 내 입에는 튜브가 박혀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나는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는데 마침 화장터에 있던 목사님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가까스레 구출되어 소록도 병원으로 후송됐다고 한다. 김경민 의사가 부임하기 전에는 응급치료나 한 후 육지 병원으로 후송을 하였는데 이번 경우에는 사뭇 달랐다. 김경민 의사는 민첩하게 산소를 투입하는가 하면 놀랍게도 나의 입에 그의 입술을 대고 숨을 불어넣어 나를 살렸다. 그 뿐인가 급히 도착한 인공 호흡기계를 설치하기 위해 민첩하게 내 입을 벌리고 튜브를 호흡기관에 투입했다. 그리고 인공 호흡기계를 연결하여 산소를 주게 되니 파랗게 변했던 내 얼굴에 화색이 돌면서 점점 의식을 찿기 시작했다. 주위에서 이를 지켜 보던 간호사들은 눈이 둥그래지면서 김경민 의사의 민첩한 행동과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문둥병 환자의 입술에 자기의 입술을 대고 인공호흡을 하는 모습에 경탄을 하고 있었다. “아니? 나환자의 입술에 자기의 입술을 대고 인공 호흡을 하다니...역시 내과 전문의사는 다르구나. 전문의사였기에 환자가 살아났어. 환자가 살았어.” 소록도 병원이 창설 된 이후 지금까지 이런 일은 없었다. 2대 원장이었던 하나이 원장은 인정이 많아 나환자들을 사랑했다고는 하나 김경민 의사처럼 하지는 못했다. 나는 다음날부터 스스로 숨을 쉬게 됐으며 사흘째 되던 날에 인공 호흡기계는 내 입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다음날 나의 성대를 가로질러 폐문으로 들어 가 있던 튜브도 철거됐다. 이 와중에 생명은 구했으나 폐렴이 발생해 항생제를 대량 투여했다. 그후 나는 완쾌됐다. 나는 분명, 김경민 의사로 인해 구출 받았다. 김경민 의사는 내 생명의 은인이었다. 보잘 것 없는 문둥이의 은인이었다. 내가 소록도 병원 중환자실에서 퇴원을 하게 된 것은 무려 3주가 지나서였는데 수척했다. 내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정석이 형과 임 선생은 매일같이 내 곁을 지켜주었다. 임 선생님은 내 손을 잡고 간절하게 기도를 하곤 했다. 마치 내 아버지처럼. 그는 내가 그토록 우울증에 빠져 있다고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충분히 예방할 수 있는 위험을 막지 못했다고 후회했다. 마을로 돌아왔지만 우울증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고 있었다. “나는 문둥이...그리고 우울한 문둥이...희망도 없는 문둥이...” 나는 한 숨을 쉬었다. 그날 저녁 뜻밖에도 김경민 내과 전문 의사가 내 누추한 방을 방문했다. 그는 누워 있는 내게 다가와 활짝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식사는 잘하는가?” “예-” 그를 보면서 ‘예’라는 대답이 저절로 내 입에서 터져나왔다. 알고 보니 내 생명을 구해준 분이 두 사람이었다. -나를 물에서 구해준 소록도 교회 김 목사님과 민첩하고 자상한 치료로 나를 살려준 김경민 의사가 바로 그들이었다. “강군! 좀 어떤가?” “예. 다 나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진심으로 감사의 표시를 했다. 오늘날 찾아보기 힘든 훌륭한 의사였다. 문둥병자의 입에 그의 입을 대고 인공 호흡을 하다니....그게 바로 나..나였다. “무엇이 강군을 그토록 우울하게 하나?” 나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주저주저 했다. 김경민 의사가 위대한 선생으로 보였다. “제가 잘못 생각한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미국에 가신다고 하여... 사실 따지고 보면 우울해 질 이유가 없었는데....” “그래, 아버지의 행복을 위해 네 마음속에 있는 욕심을 과감히 버려야지...” “예. 그런데, 김 선생님? 어찌 저 같은 문둥병 환자를 위해 귀하신 몸을 함부로 굴리십니까? 전염되면 어쩔라구요.” 나는 거듭 감사의 표시를 하면서 울먹였다. “강군, 금년에 몇 살인가?” “예 ,스물 넷이 됩니다.” “스물 넷. 그래 완치 될 때도 됐어. ” “완치라니요, 제가?” “그래, 완치 될 수 있단 말일세. 그런데 강군은 왜 세상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나?” “나 같은 인생? 오발탄과 같은 거 아닐까요. 잘 못 태어난거죠.” 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강군? 너무 비관 말게나. 어떻게 태어났던 사람은 누구나 인생관 그리고 가치관이 있는 법이니까.” “인생관? 가치관? 문둥병자에게 무슨?” 사실 나는 인생관도 없으며 가치관도 없는 문둥병 환자일 뿐이었다. “문둥병자도 사람일세. 강군, 내 인생관을 들려줄까? 혹시라도 네게 도움이 될까봐서...” “..............” 나는 너무나 놀라웠다. 그날 저녁 내게 들려준 김경민 의사는 자신이 살아온 과거와 앞으로의 계획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의사가 되고 싶었다. 결국 의사가 됐다. 의과대학 시절, 그에게 깊은 영향을 준 유준 박사의 뒤를 따라 피부과를 전공한 후 소록도나 문둥병 환자들의 정착촌에 가서 문둥병을 치료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의과대학을 졸업하면서 내과를 선택했다. 피부과 의사가 되어 이글어진 피부를 아름답게 성형하는 것도 좋으나 몸 전체를 고칠 수 있는 의사가 되어야 했다. ‘문둥병 환자들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피부만이 문제가 아니고 그들의 심장, 폐, 신장등 모든 기관이 다 병을 일으킨다. 비록 돈은 못 벌더라도 죽음 앞에서 벌벌 떠는 공포를 해결해 주는 의사가 되고 싶었다. 그렇다면 내과를 하자! 호흡기 내과를 하여 중환자들을 다루자. 그것이 내가 선택해야 할 의사의 길이다.‘라고 결심을 했다. 소록도로 자원하여 들어오던 날, 그는 아내에게 말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오. 그런데 고통받는 나 환자들을 외면할 수가 없소. 그러니 나를 도와 주소.”. 그러나 그의 아내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 정말, 돌았소? 당신 같은 유능한 의사가 어찌 소록도에 가서 썩을려고 하오. 세브란스 병원에서 열심히 할 일을 하면 조교수, 부교수 그리고 교수가 될텐데. 그리고 병원장도 되고 한국에서 가장 훌륭한 내과 의사가 될텐데....뭐가 부족해서 소록도로 간단 말이요.” “여보!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가 이미 이처럼 큰데 어떻게 문둥병 환자들을 모른척하겠소. 내가 의사가 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내가 가진 행복과 의술을 나누어주는 것이요. 나는 소록도로 가겠소. 언제고 찾아오시오. 언제고 찾아와 나를 도와 주소.” “갔다가 그냥 오세요. 아니면 이혼을 하던지...” “여보, 의사란 어느 환자라도 치료를 해야 해요. 환자와 나, 우리가 되어야 한단 말요. 우리 ” * ‘받은 은혜가 너무나 커 그 은혜를 문둥병 환자들을 위해 드리겠다니... 그래서 나같은 문둥병 환자의 입술에 그의 입술을 대고 인공 호흡을 하여 나를 살리다니.’ “의사 선생님? 선생님과 나, 우리란 말입니까?” “그래 너와 나는 우리야. 우리. 같은 문둥이 식구.” “같은 식구.....” 나는 울고 말았다. 문둥병 환자들을 위해 피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었던 허준, 문둥병 환자들을 버릴 수가 없어 공산군에게 스스로 잡혀 총살을 당한 손양원 목사, 문둥병 환자가 되지 않고서는 ‘우리’가 될 수 없어 스스로 문둥병 환자가 되었던 다미엔 신부처럼, 여기 김경민 의사도 나와 같은 문둥병 환자이기를 바라다니.... 내가 존경하는 의사 선생님이 바로 나와 같은 우리, 문둥이 친구라니, 나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외로움을 같이 할 의사가 곁에 있다고 하는 사실에 새로운 힘이 솟아나고 있었다. “김경민 의사님? 나도 정말 완치될 수가 있을까요? ” “물론이지. 강군은 틀림없이 완치될거야.” “나같은 문둥병자도 희망과 꿈을 가져도 될까요?” “물론이지...희망과 꿈은 스스로 만들고 개척하는 거지.” “나도 의사가 될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 되고 말고 암, 돼야지. 내가 도와줄까?” “예. 저의 미래를 선생님에게 맡기렵니다.” “나에게 자네의 미래를 맡긴다고? 자네를 돕겠네. 허지만 내가 믿는 예수에게 먼저 자네를 맡기길 바라네. 그리고 의사란 너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고 남을 위해 헌신하는 직업임을 잊지 말게.” “알겠습니다. 의사 선생님” “강군! 돌이켜 보면 선조시대의 허준의사, 50여년 전의 손양원 목사 그리고 벨지움의 다미엔 신부는 문둥병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그들 자신들도 문둥병 환자가 되었지. 왜 그랬을까? 왜 자신의 몸을 문둥병 환자가 되도록 해야만 했는가? 문둥병 환자들은 몸이 성한 의사들과 목사-신부님을 자신과 같은 “우리”라고 인정을 하지 않은 거야.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놓을 수가 없었지. 마음을 열고 받아 들일 수가 없었어. 아니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어. 그래서 목사님과 신부님은 스스로 문둥이가 되어, 그들과 똑같은 문둥이, ‘우리’가 된 거지. 그때서야 문둥이들은 비로서 그들의 닫혔던 마음을 활짝 열어 놓은 거야. 강군! 나는 어느날, 성경을 읽으면서 이와 똑같은 진리를 터득하였지. 우리를 만든 창조주가 우리 인간들이 타락하였기에 구원하려고 했으나 창조주의 모습을 하고 사람들 앞에 나타나 ‘내가 너희들을 구원해 주마’라고 말한들 인간은 창조주를 믿지 않으려고 했지. 마치 문둥이들이 허준과 다미엔을 믿으려고 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야. 결국 창조주는 우리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였기에 스스로 인간이 되어 우리 인간 세계에 나려 온거지. 그리고 우리 인간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희생한 거야. 마치 허준에 나오는 궁중 내의(內醫)가 문둥이들을 살려 주려고 하였으나 문둥이들은 믿지 않고 오히려 내의의 아들을 죽였던 것 처럼말야. 더 놀라운 것은 내의는 그 문둥병 병자의 아들을 자기의 양 아들로 삼았을 때 그때서야 문둥이들은 궁중 내의의 참 뜻을 이해하고 마음을 열고 ‘우리’가 된 거지. 강군! 나는 이 진리가 너무나 감사하고 감격하였어. 나와 같은 인간도 이렇게 창조주의 은총에 의해 ‘우리’가 된 것이 너무나 감격스러웠어. 나는 생각해 보았지. 왜, 내가 의사가 되었는가? 명예를 얻으려고? 돈을 벌려고? 아냐, 아냐! 나도 내가 받은 은혜를 남에게 보상해 주는것이 바로 의사가 된 이유임을 알게 되었지. 그래서 선택한 곳이 바로 여기 소록도야. 창조주로부터 받은 은혜를 여기 소록도에서 갚아 보려고...“ “창조주가 스스로 우리 인간과 똑같이 되어 대신 죽어 우리를 구원했다고 하셨나요?” “그렇다네. 강군.” “감사합니다. 이제서야, 손양원 목사님, 다미엔 신부의 사랑을 이해할 수가 있군요. 의사 선생님이 존경스럽습니다. 나도 선생님처럼 살고 싶군요.” “내가 도와줄게.” “감사합니다.” 나는 길고 긴 암흑의 터널을 빠져 나온 기분이었다. 터널을 빠져 나오는 순간 눈앞에 확 펼쳐지는 시야와 내 눈으로 비쳐 들어오는 강한 햇살이 눈부셨다. 비록 양성 나환자이기는 하나 나는 창조주의 은혜로 다시 태어난 인간이었다. “나도 창조주가 인정해준 인간이다. 다시 태어난 인간. 그리고 의사가 될 수 있다!” 17장. 문둥이 가족, 아버지. 자살을 기도했던 것은 아버지에게 크나큰 불효를 저지른 결과가 됐다. 예고도 없이 아버지는 11월 초에 나를 찾아 왔다가 ‘자살을 기도했던 일과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몹시 분개했다. “아니? 이토록 중한 사태가 일어났는데 어째서 아버지인 나에게 알려 주지 않았습니까?” 아버지는 소록도 병원장에게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러나 이곳 소록도에서, 이와 같은 사건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선 보호자와 접촉이 힘들었으며 설령 알려 준다 한들 아무도 찾아오지 않기 때문에 이번에도 연락하지 않고 그냥 넘어갔던 것이다. 아버지는 나를 껴안고 말했다. “네가 그토록 우울했니? 그렇다면 미국에게 가려던 계획을 포기하마. 너를 포기 할 수가 없어. 네 곁에서 살게.” “아버지! 안됩니다. 미국으로 가십시오.”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은 했으나 실은 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홍조야! 이별이란 말은 하지 말거라. 이별을 할 이유가 없어. 알겠니?” 아버지는 소록도를 떠나 안성으로 돌아갔다. 허전했으며 아버지에게 몹쓸 죄를 지은 것 같아 밤새 울고 말았다. 보다 못해 임 선생이 위로해 주었다. “네 아버지는 너를 사랑하시니까 미국에 가지 않을 거다. 설령 간다고 해도 곧 올게다. 그러니 너도 문둥병에서 곧 완치 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살거라. 새로 부임한 김경민 의사를 보거라. 너를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더냐?” “압니다.” 나는 임선생, 형님 그리고 김경민 의사에게 무한한 감사를 느끼면서 잠이 들었다. * 그리고 한해가 지나 2003년 새해를 맞았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었다. 웬 일일까 아버지는 다시 오지 않았다. ‘미국에 간다고 하셨는데? 미국으로 가셨나?’ 나는 궁굼했으나 어찌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5월이 되었다. 아버지가 다녀간지도 어느새 6개월이나 됐다. ‘아버지는 미국으로 가셨나, 아니면?’ 아버지에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겼나? 나뿐만 아니라 임선생도 걱정을 하고 있었다. 김경민 의사를 찾아갔다. “많이 좋아 졌어. 강군!”그는 나를 보면서 말했다. “선생님? 부탁이 있습니다.” 아버지에 대해 자초지총을 말하고 아버지의 소식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어! 그래? 그렇다면 내가 알아보아 알려줄게.” 그리고 이틀 후 김경민 의사로부터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아버지는 2002년 12월, 추운 겨울 날, 갑자기 머리에 출혈이 되면서 중풍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을 한 후 겨우 회복이 됐다. 그리고 갈 곳이 없어 안성에 있는 양로병원에서 재활 치료를 받고 있었다. 아버지는 이 사실을 알리면 막내 아들인 내가 우울증이 더 악화 될까봐 연락을 일부러 하지 않고 있었다.- “자네 아버지는 많이 좋아 졌다네. 그러니 걱정을 말게.” 김경민 의사는 나를 위로하여 주었다. 나는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성공한 두 형이 미국에 있다고는 하나 아버지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를 않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아버지가 중풍으로 쓸어 진 이유가 바로 나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아버지는 내가 자살을 시도한 것으로 인해 혈압이 높아 졌으며 결국엔 뇌출혈을 일으켰으라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비통한 마음으로 며칠을 보내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김경민 의사가 찾아 와 나에게 3일간의 외박을 허락해줄테니 아버지를 보고 오라고 했다. “외박을? 어떻게?” 언젠가 섬을 탈출해 육지로 나가 보았지만 어디고 갈 수가 없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는 나에게 충분한 교통비와 마른 음식이 든 멋있는 가방과 깨끗하고 비싸 뵈는 신사복을 빌려주었다. 그리고 소록도 병원에서 증명하는 외출증을 전해 주었다. “멋있고 깨끗하게 차리고 나가면 너를 문둥병자라고 보지 않을 것이다. 요령껏 버스와 기차를 타고 가거라. 알겠니?” “예.” 나는 대답을 했다. 김경민 의사의 말을 듣고 보니 자신이 생겼다. 먹을 것이 있으니 우선 걱정은 덜 되었다. 잠은 어디고 가서 자면 되는 것이고 깨끗한 옷에 멋진 가방을 들고 보니 대중 버스나 기차를 쉽게 탈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우선 녹동까지 가는 것은 무리가 없었다. 녹동에서 탄 버스는 광주 터미널에 도착을 했다. 터미널에서 다시 기차를 타게 되었는데 옛날보다 사람들의 눈초리가 덜 심했다. 그만큼 한국 사회도 많이 개방된 듯 했다. 소록도로 오던 것과는 아주 정 반대로 호남선을 타고 천안을 거쳐 마침내 나는 안성 터미널에 도착했다. 경기도 안성! “아-내 고향!. 내 고향...” 어머니의 품에 안긴 듯 했다. 여기 안성에서 태어나 자란 곳..영원한 고향에 다시 찾아오니 가슴이 뛰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부등껴 안고 인사를 하고 싶었다. 지나는 길에 본 안성 고등학교 앞으로 많은 학생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7년 전까지만 해도 나도 이 학교 앞을 부지런히 오가곤 하였었다. 몇 차례 물어서 마침내 나는 안성 요양원에 도착했다. 건물 밖에서 어둡기를 기다렸다. 혹시라도 정체가 드러나 면회가 거부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고향인데, 어떨려고, 고향인데...그러나 그래도 문둥병자에 대한 사회의 편견을 무시할 수가 없었기에 밖에서 기다리면서 건물의 구조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어떻게 저 건물로 들어갈지...가서 어떻게 아버지의 병실을 찾을 수가 있을는지... 대충 2층 건물의 윤곽을 요모조모로 살펴본 후 컴컴해지자 옷을 단정하게 차린 후 병원 입구로 들어갔다. 아마도 저녁 식사시간이어서 그런지 간호원과 수위를 쉽게 따돌릴 수가 있었다. 그리고 간호사 방에 있는 칠판에서 나는 나의 아버지의 병실번호를 발견하게 되었다. 아버지! 나는 조용히 117호실로 걸어갔다. 지나가던 간호사가 흘낏 나를 쳐다보았으나 신사복에 좋은 가방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 그냥 지나쳤다. 117호실 문 앞에서 안을 들여다보니 아버지는 잠을 자고 있는 듯했다. 주위를 살피니 아무도 눈치를 챈 것 같지 않았기에 나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아버지의 얼굴은 전보다 수척해 보였다. “아버지!” 나는 자고 있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말했다. 두 번 세 번...마침내 아버지는 깜짝 놀라면서 눈을 크게 떳다. “아니! 홍조야! 네가, 네가...” “아버지! 아버지를 보려고 왔습니다.” “어떻게, 이 먼길을 왔느냐?” “의사선생님의 도움으로...” “그 젊은 의사선생 말이더냐? 고맙게도...” 아버지는 대견한 듯이 내게 반문했다. 순간 문밖에서 인기척 소리가 나는 듯 했다. “아버지, 혼자 걸을 수가 있습니까? 미국에 가서 치료를 받으시지요. 형님 곁에 가서..” “그래야겠지.. 그러나 너를 두고는 못 간다. 너를 여기에 두고는...” “가세요. 아버지. 제 걱정은 마시고요.” 갑자기 방문이 열리더니 검은 제복을 입은 수위와 간호사가 들어 왔다. “아니! 문둥이가 여길 어떻게 들어 왔나! 당장 나가라고. 당장! 안 나가면 끌어낸다!” 수위는 길길히 소리를 높여 나를 끌어내기 시작했다. “이보소! 잠간만! 할 말이 있어서 내가 불럿소.” 아버지는 수위에게 말했다. “문둥이를 방으로 불러 어쩌려고 그러슈! 규칙을 안 지켜려면 여기서 나가슈!” 그리고 또 다른 수위가 달려와 나의 팔을 질질 끌고 밖으로 나갔다. “아버지! 아버지!” 끌려나가면서 아버지를 불렀다. 이게 웬 꼴이던가?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에서 이토록 질질 끌려 쫒겨 나야 하다니..... 그날 저녁, 나는 내 집으로 돌아 왔다. 안성의 내 집으로...그러나 집은 굳게 문이 닫혀 있었으며 들어 갈 수가 없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나의 집에도 못 들어가다니... 담을 넘어 갈 수도 없었다. 집 주위에서 나는 동네 사람들을 만났다. “아니? 이게 누구여? 홍조 아닌가?” “예.” “아버지를 만났는가? ” “예.” “근데 여긴 왜 왔지라우?” “.........” “문둥이라고 쫒겨 왔나? 쯪쯪... 홍조야, 어서 들어오거라. 저녁이라도 먹거라.” 아주머니의 친절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저씨가 들어오기 전에 어서 저녁이라도 먼저 먹거라. 바깥 양반이 혹시라도 뭐라고 하지나 않을는지...” 이웃 사람들도 역시 문둥병에 대해 아직도 꺼리고 기피하고 있었다. 저녁은 잘 먹었으나 혹시 바깥 주인이 와서 뭐라고 할까봐 여관에 가서 자겠다고 밖으로 나왔다. “아주머니, 감사합니다. 저 문둥병, 다 나았습니다.”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그날 밤, 여관에 가서 다행히도 잠을 잘 수가 있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다시 안성 요양병원으로 갔다. 그러나 나는 문밖에서 수위들로부터 또 한차례 구박을 받았다. “이것 보소. 나 문둥병에서 완치되었습니다.” 그러나 수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들여보내지 않았다. 눈물이 흘렀다. 지척에 두고 아버지를 못 만나다니... 고향에 와서, 아버지를 못 만나다니... 지금까지 고향에 대해 착각을 하며 살아 왔다고 느꼈다. 그토록 가보고 싶었던 안성이 더 이상 내 고향이 될 수 없음을 알게 됐다. 문둥병 환자는 고향도, 갈 곳도 없는 외로움을 새삼 느꼈다. 고향과 친구 그리고 아내로부터 버림받은 임 선생이 새삼 내 마음에 떠올랐다. 나는 안성 터미널로 가 천안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그리고 아버지와 내가 같이 갔던 그 길, 소록도 길로 다시 내려가고 말았다. 눈물을 흘리면서 고향을 떠나야 했다. 그날 나는 녹동 항구에 있는 그 여관에서 하루를 자게 되었다. “아니, 이게 누구랑가?” 여관집 아주머니는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중풍으로 양로병원에 누워 있다고 하자 눈물을 흘리면서 “맙소사! 맙소사!”라고 소리를 쳤다. “그래도 희망을 가지소! 희망을..언젠가는 완치될거여.” 언젠가 느꼈던 어머니의 정을 여관집 아주머니를 통해 새삼 느껴보고 있었다. ‘어머니...어머니...’ 죽은 어머니를 불러 보았다. 부르면 부를수록 더 서러웠다. “어머니-어머니-” 다음 날 아침 녹동 항구에서 통통선을 타고 소록도로 들어갔다. 가자마자 김경민 의사를 만나 감사한 마음을 표시했다. “고향이란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곳이 아니네. 이제 자네가 정을 붙이고 같이 사는 곳, 친구가 있는 곳이 고향이야. 다시 말하면 여기 소록도가 자네의 고향일세...나도 여기 소록도를 나의 고향이라고 생각을 하며 살고 있다네...” “의사 선생님도요?” “그렇다네. 홍조.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고 온 모양이구먼...불쌍하게도 아버지를 제대로 못 만났다니...문둥병 환자의 멍든 가슴에 또 한번 침을 뱉었구먼. 이것이 현실이라네. 현실.” 김경민 의사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18. 문둥이 가족의 사랑. 소록도에 살면서 사랑하는 사람의 임종을 직접 지켜보았다. 내가 소록도로 입원하던 그날부터 오늘까지 아버지처럼 의지하며 살아온 임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임 선생님은 원래 문둥병뿐만 아니라 고혈압으로 인한 심장병을 앓고 있었다. 더욱이 문둥병으로 인해 소록도로 들어올 때, 가족들로부터 무참히 버림받은 충격이 그를 치명적인 심장병의 악화로 이끌었다. 소위 심부전증으로 인해 소록도 병원, 중환자 실에 여러 차례 입원을 했는데 새로 부임한 김경민 내과 전문의사 덕분에 연명해 온 셈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의사의 치료라고 해도 심장병에는 한계가 있는 법, 2003년 봄이 되면서 몸이 붓기 시작하고 가끔 숨도 차곤 했다. 신장 기능이 점점 악화가 되었다. 투약하는 약도 그에 비례하여 더 많아지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병이 진행된다면 머지 않아 인공 신장기를 이용해야 하는데...” 김경민 의사 선생도 걱정을 하였지만 여기 소록도 병원에서는 혈액 투석(Hemodialysis) 치료는 불가능했다. 만일의 사태가 발생하면 고흥 종합병원이나 광주로 보내야 했다. 3월 달, 안성 재활원에 입원해 있는 아버지를 만나고 온 이후, 나는 임 선생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다. 임 선생님! 그는 교육자였으나 문둥병으로 인해 꿈을 이루지도 못하고 사랑하는 아내로부터도 버림을 받았다. 그는 혼자 있을 때마다 가족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울기도 했다. 소록도의 7월! 장마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남해안 일대에 큰 바람도 불었다. 녹동 항구로 나가는 배도 며칠 끊겼다. 소록도는 마치 거대한 배 한 척이 바다에서 길을 잃은 듯했다. 임 선생의 증세가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다리가 붓고 숨이 차다고 했다. 빈혈로 인해 얼굴이 창백했으며 가슴도 아프다고 했다. 임 선생이 나를 그의 방으로 불렀다. 할말이 있다고 하면서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나에게 전해준 것은 그가 늘 꺼내 보던 사진 두 장이었다. 한 장은 아내, 아들 그리고 딸과 찍은 사진이었고 또 다른 한 장은 딸과 둘리서 찍은 오래된 사진이었다. 가냘픈 얼굴에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이 한송이 꽃처럼 보였다. “내 딸, 임 혜선(林橞仙)이라네. 금년, 22살이 되는군. 여긴 아들 임 종부이고...24살이 조금 넘었지. 그러고 보니 강군 자네는....” “예 금년 10월이 되면 만 25살이 되는군요. 25살...어느새.” “아! 그런가? 여기 온지 어느새 7년이 넘었구먼. 나는 10년이나 되었군.” 그리고 그는 집에 한번 가보고 싶다고 하면서 울먹였다. 가정이 없어 졌기에 가 볼 집이 없어 졌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아내는 모르기는 해도 다른 남자와 결혼을 했을 거라고 말하면서 아들과 딸이라도 보고 싶다고 했다. 첫 해에 두 번 면회를 오고 난 후 한번도 오지 않았다고 했다. 편지를 몇 차례 보냈지만 주소 불명으로 되돌아 왔기 때문에 그는 편지 보내기를 포기했었다. “강 군? 나를 한번만이라도 수원에 데려다 주겠나? 딸이 보고 싶어. 혜선이가 보고 싶어.” “가실 수 있으세요? 제가 부축한다면...” “그럼. 가고 말고...” “그러죠. 제가 모시고 가죠. 임 선생님.”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약속했다. 저녁이 됐다. 아직도 비는 내리고 있었다. 임 선생은 내 손을 꼭 잡으면서 부탁했다. “아무래도 이 몸을 이끌고...힘들겠어. 힘들어. 그리고 설령 간다고 해도 아무도 나를 반겨주지 않을 거야. 아무도...” “아닙니다.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게 간곡하게 부탁을 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유품들 중에 몇 가지를 수원에 살고 있을 아들이나 딸에게 전해 달라고 했다. 특히 딸, 임 혜선을 꼭 한번 만나 ‘아버지는 죽기까지 혜선이를 사랑하며 생각하다가 죽었다고’ 전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리고 그의 추측에 의하면 딸은 아마도 간호학교를 다니거나 졸업하여 수원에 있는 큰 병원에서 근무를 하고 있을 거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의 딸은 어려서부터 간호원이 되고 싶다고 했는데 분명 그렇게 됐을 거라고 임 선생은 확신하고 있었다. “아마, 지금은 숙녀가 됐겠지. 간호사가 됐을 거야. 결혼은 안한 것 같아. 왜냐고? 나에게 아직 소식을 알려 주지 않았으니까...” “간호사요?” 나는 덧붙여 물었다. “그래. 간호사. 혜선이는 간호사가 되겠다고 했으니까...” 나는 그가 준 두 장의 사진을 소중하게 간직했다. 그리고 2주 후, 8월초였다. 임 선생님은 숨이 더 차고 다리가 점점 더 부어 올라 김 경민 선생님은 그를 중환자실에 입원을 시켰다. 그리고 그의 코에는 산소 마스크가 부착되었다. 임 선생님은 가슴이 아프다고 호소를 했는데 협심증으로 오는 심장마비의 증세였다. ‘고흥이나 광주로 후송을 하여 관상동맥을 열어 줘야 합니다.“ 김경민 의사는 원장에게 말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리 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혈압이 급히 떨어지고 피부가 얼음처럼 찬 것으로 보아 심장의 기능이 원활하지 않은 것 같다고 김경민 의사는 무겁게 말했다. “임 선생은 오래 못 산다” 마침내 나는 그의 침대 옆에 앉아 최후의 임종을 지켜 보게 됐다. “임 선생이 돌아 가신다고요?” 믿을 수가 없었으나 내과 의사의 안목은 달랐다. 임 선생의 호흡기계가 일분간에 16회에 걸쳐 작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정신을 가누지 못하기 시작했다. 눈동자가 점점 흐려지며 눈가죽이 붙어 눈동자가 보이지 않았다. 점점 정신을 잃어 가고 있었다. 나는 그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도 나처럼 뭉뚱그려져 있었으며 오른 쪽 손의 네 번째 손가락 마디가 없었다. 우리는 분명히 문둥이였기에 아무런 불편 없이 손을 잡고 밥도 같이 먹었었다. 그래서 그는 가장 소중한 두 장의 사진을 내게 주었다. -수원시 구천동 16번지와. 임 혜선이란 여인이 바로 그의 가슴속에 간직됐던 고향이요, 위로자 였다. 숨결이 거칠어지자 호흡기계가 “찍 찍”하는 잡음을 냈으며 혈압도 100에서 90 그리고 80...마침내 70이하로 내려가고 있었다. 병실에 부착된 심전도의 심장 운동도 불규칙해 지더니 50, 그리고 40...그후 크고 작은 리듬들이 곡선을 그리다가 마침내 일직선이 되면서 숨이 멈췄다. “임 선생은 사망하셨네. 아주 평안한 곳으로 가셨다네. 하나님 곁으로 가셨어....” 김경민 의사는 하얀 시트로 옴 몸을 덮으면서 내게 말했다. “선생님! 선생님!” 점점 차가워지는 그의 손을 잡고 울었다. 2003년 8월 15일 아침이었다. * 시체는 곧바로 소록도 중앙교회로 운구 됐으며 우리 문둥이들끼리 모여 장례식을 가졌다. 다음날, 임 선생의 시신은 소록도 2번지 남서쪽 끝에 위치한 화장터에서 불에 타 한줌의 재로 변하고 말았다. 멀리 바다 저편에 보이는 거금도가 나를 부르고 있는 듯 했다. 그의 영혼은 육지 쪽으로 가지 않고 오히려 더 넓은 바다, 거금도를 향해 날라 가고 있는 듯했다. 임 선생의 죽음은 같은 병동에서 살아온 나와 형님에게는 아주 쓰라려 며칠 동안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9월이 됐다. 임 선생을 생각하면서 문득 문득 그의 가족들도 생각났다. 특히 그의 딸, 임 혜선에게 달려가 아버지의 죽음을 알려 주고 싶었다. * 임 선생님의 유품을 볼 때마다 내 아버지를 생각했다. 중풍으로 누어 있는 내 아버지의 모습이 내 눈에서는 떠나지를 않았다. 나는 그의 가족과 나의 가족을 한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 가족이었다. ‘우리, 우리, 문둥이 가족’이라고 생각했다. 마침내 김 경민 의사를 찾아가 임선생의 집을 찾아가 그의 죽음을 알려 주고 싶다고 했더니 뜻밖에도 흔쾌히 3일간의 외박을 허락해 주었다. 그리고 그는 덧붙여 알려 주었다. “임 선생님의 따님은 수원에 있는 성 빈센트 병원에서 간호원으로 근무하고 있다네. 그리고 아들과 어머니는 서울에서 같이 살고 있다네. 그러니 성 빈센트 병원으로 찾아가면 되겠네. 그리고 여기 이 편지는 혹시 병원에서 뭐라고 트집을 잡으면 보여주게나. 도움이 될터이니...” 김 경민 의사는 내게 충분한 교통비와 마른 음식이 든 가방을 주었다. 8월 더위에도 불구하고 긴 남방 셔츠를 입었다. 그리고 눈 섶을 진하게 그렸으며 얇은 흰 장갑을 몸에 지녔다. 다음날, 나는 녹동 항구로 가 그 곳에서 버스를 타고 광주에 도착했다. 그리고 잠시 음식점에 들려 설농탕을 한 그릇 사먹었다. 바쁜 탓인지는 몰라도 어느 누구도 나를 주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내가 옷을 잘 차려 입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사람들이 이젠 더 이상 남에게 관심을 주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호남선 열차를 타고 수원역에 도착 한 것은 오후 3시경이었다. 성 빈센트 병원을 찾아가 수위실에 가서 간호사 임혜선씨를 찾았더니 수위가 나를 흘끔 흘끔 보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혹시라도 안성에서처럼 나를 개처럼 끌고 나가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잠시 후 수간호원이 나를 보고, 임혜선씨를 찾는 이유를 물었다. 그리고 나쁜 피부병 환자가 아니냐고 은근히 물었다. 나는 김경민 의사가 준 편지를 수간호사에게 전해 주었다. “웬 편지를?” “예. 소록도 병원 내과 전문의사가 써 준 편지입니다.” 편지를 읽던 간호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따라 오라고 했다. 그리고 ‘이 방’에서 기다리라고 말했다. 카톨릭 병원답게 벽에는 성모 마리아가 어린 아이를 안고 있는 성화가 나를 포근하게 했다. ‘임혜선씨... 어떤 모습일까? 사진에서 본 임혜선씨는 교복을 입은 중학생이었는데...그리고 밝고 환하게 아버지와 같이 웃고 있었는데..’ 잠시 후 흰 제복을 입은 간호사가 방으로 들어왔다. 울었는지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얼른거리고 있었다. “소록도에서 오셨다구요? 임혜선이라고 합니다.” “예. 강홍조라고 합니다. 임 선생님을 7 년 동안 같은 집에서 아버님처럼 모시고 살았습니다. 아버님은 따님과 가족들을 생각하며 살았답니다. 지난 8월 15일날, 세상을 떠나셨지요. 아시겠지만...“ “예, 강홍조씨가 오기 얼마 전, 소록도 병원, 김경민 의사로부터 통보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강홍조씨가 오시면 잘 대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김경민 의사가?” 나는 너무나 자상한 그의 마음씨에 감동했다. “아버지! 아버지!” 갑작스레 간호사, 임혜선씨는 울기 시작했다. 흐느낄 때마다 그녀의 어깨가 들쑥거리곤 했다. 나는 멍하니 울고 있는 임혜선씨를 바라다보면서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가족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외로히 소록도에 갇혀 제한된 하늘과 바다를 바라다보면서 살았던 10년의 세월이 딸의 울음 속에서 또다시 밀려들어오는 듯 했다. 얼마 전, 안성에 갔을 때 아버지를 지척에 두고 쫒겨 나오면서 흐느껴 울었던 내 모습을 또 다시 보고 있는 듯했다. 아버지와 딸의 사랑도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처럼 숭고해 보였다. 내 아버지도 나를 생각하며 그렇게 울고 있으리라. 내 가방 속에 간직하여 뒀던 두 장의 사진을 꺼내 울고 있는 임혜선씨를 향해 “혜선씨, 아버지가 보고 또 보시던 사진들이 여기 있습니다. 이 사진 속에서 아버지의 냄새를 맡으세요..‘ “홍조 씨라고 했던가요?” “예. 강 홍조라고 합니다.” “그 동안 아버지를 위로 해주시고 같이 곁에 계셔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못한 효도를 대신해 주셨군요. 그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까요, 어떻게.” “은혜라니요? 임 선생님을 아버지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아버지라고요?” “예.” “감사합니다. 홍조씨.” 그녀는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내 손을 꼭 잡으면서 감사하다고 또 다시 인사를 했다. ‘혜선씨가 내 손을 잡다니.. 이 문둥이의 잘라진 손을....’ 죽은 내 어머니가 내 손을 잡는다고 느꼈다. 너무나 감격했다. 나같이 비참한 문둥이를 인간으로 대접해 주다니.... 내 눈가에서 눈물이 주르르 흐르고 있었다. * 선녀같아 뵈는 혜선으로부터 아름답고 눈물나는 고백이 있었다. -혜선 씨는 아버지가 소록도에서 죽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혜선에게 아버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알려 주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문둥병을 심하게 앓고 있기 때문에 옆에만 가도 전염이 된다고 가르쳤다. 그녀는 천진스럽게도 그렇게 믿었다. 일년 후 어머니는 뜻밖의 말을 했다. “네 아버지는 얼마 전에 소록도에서 돌아가셨다. 화장을 하여 그 재를 바다에 뿌렸기에 찾아 갈 무덤도 없다. 그리고 어머니는 엉엉 슬피 울었다.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한 번 만이라도, 아니 아버지의 재라도 한 번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단념을 했다. 바다에 뿌려진 아버지를 찾아간들 어쩔 수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한 번도 소록도를 찾지 않았다. 오늘 아침 소록도의 김경민 의사로부터 ‘아버지가 죽었다.’라는 소식을 듣고 그녀는 소스라쳐 놀랐다. ‘아니? 아버지는 가족들로부터 버림받고 살다가 돌아가셨다니... 그동안 아버지에게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었어.’ 그녀는 어머니를 원망했다. 분명, 어머니는 나쁜 맘을 먹고 거짓 말을 했음을 알게 됐다. 어머니가 보기 싫었다. 그녀는 심한 죄책감으로 잠시 실신을 했다. 가까스레 깨어나 안정을 취하고 있던 중, 아버지와 7년간을 같이 살면서 임종을 지켜본 청년이 불쑥 찾아왔기에 반가움보다 죄책감이 더 컸다.- 나는 임 선생님이 얼마나 가족을 그리워했는지를 설명해 주었다. “우리 가족을 원망하지 않았나요?” 그녀는 물었다. “원망을 하다니요? 늘 가족 걱정, 그리고 혜선 씨를 늘 자랑했지요. 예쁘고 총명하다고요. 그리고 간호사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돕고 있으리라고요.” “아버지가 그렇게 말하시던가요?” “예. 그뿐인가요, 임 선생님은 내게 많은 충고를 해 주었지요. ‘하루를 충실히 살라. 하루를..’그리고 의사가 되라고 격려를 했지요.” “의사가 되라고?” “예. 의사가 되어 남을 위해 살라고 하셨지요.” “아버지가 그렇게 가르쳤어요?” “그렇습니다.” “아- 훌륭한 아버지...” 임 혜선씨는 아버지가 자랑스럽다고 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날 저녁 그녀는 나를 데리고 그녀의 집으로 같이 갔다. 임 선생이 그렇게도 가고 싶어했던 구천동 집이었다. 맛있는 저녁으로 나를 대접했으며 따듯한 목욕물을 준비해 주었기에 모처럼 목욕도 했다. 따듯한 물로 가득찬 목욕탕 속에 누어 있으니 내 몸이 공중에 떠 있는 듯했다. 생각해 보니 7년 만에 처음으로 사람 사는 집에서 밥을 먹고 목욕을 한 셈이었다. "혜선씨, 나같은 문둥이를 인간으로 대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우리는 한 식구가 됐습니다.” “우리라뇨?” “홍조씨는 내 아버지와 같이 7년을 사셨으니까, 우리가 되는 거죠.” 혜선씨의 집에서 사람다운 대접을 받고 소록도로 돌아 온 나는 처음으로 ‘가정’에 대한 향수가 솟아났다. 내게도 가정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 것이 더 존재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일찍 돌아갔으며 형님들은 각각 미국으로 가 살고 있으니... 게다가 아버지마저 중풍으로 절룩이며 미국으로 가게 됐으니 나는 가정이 없는 고아였다. 남들처럼 가정을 갖고 싶다. 사랑스러운 여인을 만나 내 마음을 듬뿍 주기도 하며 그녀의 마음을 내 마음에 접목하여 또 다른 큰 나무를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문둥이에게는 불가능했다. * 2003년 11월,, - 이곳 소록도와 인근 거금도에도 찬바람이 불었다. 내가 좋아하는 동백꽃(冬柏꽃)이 내 마음을 태우듯이 몽우리를 만들고 있었다. 놀랍게도 아버지가 중풍에서 많이 회복하여 지팡이를 집고 절룩이며 소록도로 찾아 왔다. “아버지!” 아버지를 불러 보았다. “너를 두고 미국으로 가야하다니...” “가셔야지요. 가셔서 중풍을 치료하세요.” 아버지와 나는 이렇게 이별을 했다. 아버지는 절룩이면서 소록도 2번지를 떠나 1번지를 거쳐 녹동으로 가는 통통선을 탓다. 소록도를 향해 손을 흔들다 떠난 아버지의 모습이 내 눈에 선했다. 아버지의 모습이 시야에서 살아지고 난 후, 나는 완전히 ‘고아(孤兒)’가 되고 말았다. “아버지!” 큰 소리로 흐느끼며 불러 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처럼 의지하며 살았던 임 선생과 나의 아버지, 두 분이 모두 내 곁을 떠나고 말았다. “아버지! 임 선생님! 다 가셨군요. 다----” 또 다시 엄습해 오는 고독(孤獨)감으로 나는 몸을 부르르 떨고 말았다. 2004년 1월, - 나의 아버지는 예정대로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탓다고 하는 소식이 이곳 소록도로 도달했다. “아버지! 언제나 볼 수가 있을까요?” 나는 마지막 남은 나의 가족, 아버지마저 멀리 태평양 건너로 보내고 말았다. 모든 것이 사라졌다. 오로지 이곳 소록도만 달랑 남아 애처럽게 동백꽃을 피우고 있었다. * 참으로 인생은 돌고 도는 풍차와도 같다고 나는 생각을 했다. 물은 낮은 대로 흐르고 바람은 정해진 방향으로 돌진한다고 했다. 빈곳에는 다른 것으로 채워지고 잃은 자리에서 다른 것을 찾아내게 된다. 사랑하는 임 선생님과 아버지를 잃은 나의 빈 가슴속에 다른 사랑이 채워지고 있었다. -나에게 한 통의 편지가 전달됐는데 발신인은 수원에 사는 “임혜선”씨였다. 지난해 8월, 수원에서 만난지 오개월 만이었다. “혜선씨가?” 반가웠으며 궁굼했다. 지난 5개월, 혜선씨의 집에서 묶었던 하루를 마음속에 간직하며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사랑하는 연민의 정이 생겼지만 문둥이 주제에 섯불리 내 마음을 표연할 수가 없었다. 나는 황급히 그녀가 보낸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편지: -강홍조씨 귀하. 안녕하십니까? 지난 해 8월, 아버지의 유품을 가지고 오셨지요.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한 저의 무례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홍조씨! 지난 5개월, 저는 번민과 죄책, 그리고 후회로 나 자신과 싸우며 살았습니다. 그뿐인가요, 저는 심한 죄책감으로 인해 어머니와 오빠와 전혀 말도 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돌아가셨다고 간주한 아버지가 버젓이 소록도에서 14년이나 사시다가 가족들도 못 만나고 돌아가시다니, 나는 어머니를 원망하며 울었습니다. 아버지가 소록도로 가시던 그해, 나는 13살의 중학생이었으며 오빠는 15세였습니다. 분명히 어머니는 우리에게 “아버지는 문둥병을 치료하러 소록도로 갔는데 병이 악화돼 돌아가셨다.”라고 했지요. 우리는 아버지는 돌아 올 수 없는 사람으로 알고 살아 왔습니다. 그러던 아버지가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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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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