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내고향은 소록도 파트 7

2012.01.23 12:37

연규호 조회 수:496 추천:16

19장. 아버지가 미국에 계신 동안에.... 마침내 아버지가 미국으로 형님들을 찾아 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아버지에 대한 연민의 정이 더 커지고 있었다. 아버지가 살아온 인생은 자식에 대한 희생과 봉사였을 뿐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미국에 가서 남은 인생을 성공한 두 형님들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아버지! 미국에 가서 잘 사세요. 당연히 그래야죠. 안녕히 가세요.” 아버지가 행복하시기를 마음 깊이에서 빌고 또 빌었다. 아버지에 대한 집념을 깨끗이 비우기로 했다. 대신 내 현실을 그 빈 마음에 가득 채우기로 마음을 정했다. 돌이켜 보면 지난 10여 년, 형님들로부터 받은 편지는 전혀 없었다. 원망스럽다고 생각을 하며 살아 왔는데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 나 또한 형님들에게 편지 한 통 보낸 기억이 없었다. “왜, 형님들은 나를 몰라주나.” 나 중심으로 원망을 하며 살아 온 셈이었으니 나는 분명 이기적인 인간이었다. 나야 주는 밥 먹고 문둥병 치료만 하면 됐지만 형님들은 남들에게 밥을 먹여 주는 경영자이기에 시간이 없었다. 큰 형님이 산다는 뉴욕과 롱 아일랜드를 지도에서 찾아보니 여기 소록도처럼 바다로 둘러싸인 긴 섬이었다. 편지를 써서 바다에 띄운다면 언젠가는 태평양을 넘어 멀리 희망봉을 돌아 대서양으로 나와 미국 동부 롱 아일랜드에 도달하리라.... 나는 편지를 써서 바다에 띄어 보냈다. “사랑하는 형님들, 저 셋째는 여기 소록도에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저의 병세도 점점 호전되고 있습니다. 이젠 더 이상의 악화가 없는 것으로 보아 저도 언젠가는 음성 나환자로 판단을 받게 될 겁니다. 그러면 저도 다시 태어난 사람이 된답니다. 아버지를 끝가지 모시지 못한 셋째는 불효자입니다. 용서하십시오. 아버지를 행복하게 해 주세요. 형님들... 소록도에서 셋째, 강홍조가 부탁드립니다. “ 그러나 이 편지는 태평양을 건너 희망봉을 돌아가지 못했는지 아니면 태평양을 넘어 멀리 남미 칠레 해협을 통과하지 못했는지 형님들로부터 받았다는 답장이 없었다. 나는 틈만 나면 소록도 남서쪽 해변가에 앉아 바다를 바라다보는 습관이 생겼으며 가까이 보이는 거금도와 그 섬으로 연결하려고 건설중인 거금 연륙교를 바라다보곤 했다. -2001년에 착공된 소록도와 거금도를 잊는 연륙교도 점차 그 위엄을 들어내기 시작한 것이 바로 2005년이었다. * 생각해 보면 정말 어처구니없던 생각이 현실이 되고 있었다. -1996년, 녹동 여관 주인 아주머니를 ‘꿈이 큰 여인, 아니면 정신이 돈 과대망상적인 사람’으로 생각했었다. “학생! 여기 녹동항구와 소록도에 다리를 놓으면 문둥이들과 성한 사람들이 마음을 터 놓고 왔다갔다하게 되지. 그러면 서로 싸울 이유도 없고 문둥병 환자들도 인간 대접을 받게 된단 말여....” 나는 그 때 아주머니가 정신 나간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었다. “아니, 아주머니? 바다와 섬을 연결하는 다리를 놓다니,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나는 반문을 했다. 그런데 그 말이 점차 현실이 되었다. “소록도와 녹동을 잇는 다리를 놓는다는 구먼!” 어느 문둥병 환자가 소식을 전했을 때 각가지 반응이 생겼었다. “다리가 완공되면 90년의 한이 풀리겠구먼... 내가 여기 소록도에 온 지도 60년이네. 나도 다리를 건너 고향에 가 아버지 산소에 성묘를 하게 됐네. 아! 내 나이 73살이네... “ 어느 할아버지가 큰 소리로 말을 하더니 엉엉 울고 말았다. 소록도 주민 이남철(58세)씨는 2001년 6월 거금 연륙교와 거금 연도교가 착공되던 때부터 디지털 카메라에 역사적인 다리 공사를 찍어 두었다. “17살에 아버지가 나를 여기로 데리고 온 이후 나는 사진사가 되는 게 꿈이었어. 비록 손가락은 무뎌졌지만 사진은 아직도 찍을 수가 있으니께...” 녹동과 소록도를 잇는 거금 연륙교의 모습이 점차 그 위용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많은 문둥병 환자들은 공사 현장 주위에서 녹동 항구를 바라다보곤 했다. “고향이 그리운 사람들의 눈초리였다. 아니 고향에서 버림받은 문둥이들의 눈초리였다. ” 나도 그러했다. 멀리 태평양으로 보낸 편지가 무사히 아버지에게 전달되기를 바라는 어리석은 청년이었다. 놀라운 사건이 생기고 있었다. - 2005년 7월 15일, 소록도와 녹동을 잇는 다리가 하루동안 개통이 되었다. 91년간 단절되었던 소록도와 육지가 서로 연결되는 날이었다. 소록도는 더 이상 육지와 단절된 형무소가 아니었다. 육지 사람들과 소록도 사람들이 다리에서 만나 악수를 했으며 그 동안 단절됐던 마음을 터 놓게 됐다. “가도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이제 한하운의 싯귀가 우리 문둥이들로부터 사라지게 됐다. 그 뿐인가 11월 초에는 녹동 사람들과 소록도 사람들이 다리에서 만나 사진도 같이 찍고 배를 타고 제주도로 2박 3일간의 여행을 했다. 한때 6000명이 넘던 이 곳 소록도 섬에 이젠 640여명만이 환자로 살고 있을 뿐 대부분은 성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 되었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음성 나환자가 아니었다. 양성 나환자로 분류되어 있었다. * 그러나 내게는 “임 혜선”이라는 아름답고 훌륭한 간호사로부터 오는 격려의 편지와 방문으로 양성 나환자이기는 하나 당당히 도서관에 가서 고등학교와 초급대학 과정의 공부를 하고 있었다. “내게도 완치되어 이곳을 나가는 날이 올 것이니까....그리고 의과 대학에도 가야 하니까. ” 나는 열심히 공부를 했으며 약도 부지런히 챙겨 먹었다. 그리고 틈틈히 김경민 선생님과 혜선씨가 보내준 대학 과정의 생물, 화학 그리고 전문 서적을 읽고 있었다. 얼마 전, 혜선씨가 보내준 편지를 소개한다. 편지: “홍조씨! 참으로 놀랄만한 소식이 있습니다. 어려서 축구공에 맞아 실명한 어느 남자와 그를 도와준 어느 여자분의 순애보같은 일화입니다. 중학교 일학년 때, 이 남자는 눈이 멀었으며 엎친대 겹친 격으로 양친 부모마저 죽고 말았답니다. 눈먼 이 남자를 이끌어 주던 누나마저 공장에서 일하다가 과로로 죽고 나니 이 맹인은 어쩔 수가 없는 고아가 되었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으며 절망뿐이었지요. 그러나 그에게는 말할 수 없는 불행 중에도 꿈을 잃지 않았답니다. 굽히지 않는 꿈이 있었기에 그는 맹인이라는 역경을 이기고 박사학위를 받음은 물론 높은 공직자로서 사회에 큰 공헌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불행을 이길 수가 있었을까요?’ 보잘 것 없는 이 맹인은 어느 사랑하는 여인의 순애보와 같은 도움으로 이토록 훌륭하게 성공을 했답니다. 박사학위를 소유한 어느 여인이 이 남자를 위해 눈이 됐으며 등대가 됐답니다. 이 여인의 도움으로 그는 우뚝 설 수가 있었답니다. 보잘 것 없는 나, 임혜선도 홍조씨를 위해 손과 발이 되어드리고자 합니다. 홍조씨가 나의 아버지를 위해 하신 것을 보답하려고 합니다. 점점 사랑하게 되는군요. 임혜선 드림. “ “아-나같은 문둥이를 이렇게 아껴 주다니.” 나는 감격해 울고 말았다. 20장: 소록도의 천사들... 2005년 11월 21일, 소록도에는 큰 사건이 발생했다. 내가 평소에 흠모하던 소록도의 할매, 두 수녀( 마가레트 피사렉과 마리안네 스퇴거)들이 달랑 편지 한 장만을 남겨 둔채 소록도를 떠나 그녀들의 고향인 오스트리아로 돌아간 사건이었다. 1960년대, 20대의 꽃다운 처녀들로 이곳 소록도로 들어와 6000명이 넘는 문둥병 환자들을 돌보아 온 소록도의 천사들이었다. 3평 남짓한 방 한 칸에 변변한 가구도 없이 살아 온 이들은 40년 동안 같이 일해 온 소록도 병원 간호원장이 사임하자 이 두 수녀들도 “더 이상 이곳에서 할 일이 없다”라는 이유로 고국으로 돌아갔다. 두 분은 소록도에 있는 동안 그들에게 주어진 많은 훈장도 마다하였다. 두 수녀는 이른 새벽에 아무도 모르게 섬을 떠나면서,“사랑하는 친구 은인들에게”라는 편지 한 장을 남겨 두었다. 편지: -“나이가 들어 제대로 일을 할 수가 없으며, 우리가 오히려 부담을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부족한 외국인으로 한국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아 감사합니다. 그러나 우리 둘로 인해 마음 아프게 해드린 것을 이 편지로 용서를 빕니다.”- * 나는 지난 9년 동안 이들 두 수녀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치료는 물론 늘 웃어 주던 그 인자한 모습에서 용기를 얻었다. 수천의 문둥병 환자들의 손과 발을 닦아주던 그 수녀들의 모습이 생생했다. 나는 급히 수녀들이 살았던 숙소로 찾아가 보았더니 어느새 많은 문둥이들이 와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마음은 허전하였으나 한편으로는 대견했다. 20대 꽃다운 나이로 이곳으로 와 나와 같은 문둥이들의 피 고름을 닦아 내다가 어느새 70이 넘어 고국으로 간 그녀들이 자랑스러워 보였다. -나를 위한 생이 아니고 철저히 남을 위한 희생의 삶 속에서 그들은 즐거움을 느끼고 살았다.- 나는 그날 저녁, 중앙교회에서 베풀어진 두 수녀님들을 위한 기도회에 참석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수녀님들을 위한 기도보다 나를 위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주님! 내게도 치유의 은사를 주시옵소서. 저를 완치 시켜 주소서. 주님.” 나는 울고 있었다. 두 수녀들을 보내면서 나는 오히려 마음속에 기쁨과 감격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것은 ‘이제부터 나도 할 일이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어느새, 내 마음 속 깊이에 창조주를 모시는 겸손함을 배우고 있었다. * 추운 겨울이었지만 춥지 않았음은 떠나버린 소록도의 천사들을 대신하여 찾아 온 다른 천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2006년 2월이었다. 소록도의 봄은 육지보다 다소 빠르게 시작된다. 동백꽃은 물론 상록수들의 잎새에서 나는 싱싱함을 느끼곤 했다. 김경민 의사선생이 할 말이 있다고 하면서 나를 그의 사무실로 불렀다. 아침 11시는 되었을 게다. 소록도 1번지에 있는 국립 소록도 병원 내과 병동에 있는 그의 방으로 나는 찾아갔다. 무슨 일일까? 궁굼하였으나 알 수가 없었다. 모르기는 해도 나에게 의과대학에 갈 준비가 되었는지를 묻지나 않을까 추측을 할 뿐이었다. 설령 준비가 되었다고 해도 아직도 양성 환자인 내게 그런 기회가 주어질 수도 없었다. 내가 김경민 선생님의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곳에는 내과 수 간호원이 같이 있다가 나를 반겨 주었다. “강홍조씨?” 뜻밖에도 김경민 의사는 나에게 존칭으로 불렀다. “예?” 나는 황송한 마음으로 대답을 했다. “강홍조 나병 환자! 당신은 오늘부터 더 이상, 나병 환자가 아니요. 음성 나환자, 아니 정상 사람이 되었소.” “예? 무슨 말씀을?” 나는 더듬거리며 물었다. “이것 봐, 강군! 나병에서 해방이 되었어. 축하해.” 그리고 그는 내게로 다가와 힘껒 포옹하여 주었다. “다 나 았다구요. 완치 되었다구요? 정말입니까?” 나도 그를 힘껒 포옹하며 큰 소리로 외쳤다. “그렇다니까...이젠 집으로 가도 돼. 집으로...” “아!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버지, 아버지, 다 나았대요. 아버지...” 나는 뜻밖에도 미국에 계신 아버지를 부르고 있었다. “강군? 자네의 병은 어떤 은인이 준 면역에 의해서 완치되었다고 나는 확신한다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래, 자네의 혈액 속에 면역이 생기면서 자네 몸 속에 있던 나병균들이 모두 죽어 없어진 거라네. 사람이 누구를 사랑하면 몸 속에 엔돌핀도 나오고 모든 균을 죽일 수 있는 면역체가 생긴다네. 혹시 강군? 자네, 누구를 사랑하고 있나?” “예?” “부끄러워 말고, 아니면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있나?” “예.” “누군데?” “........” “말을 못하는군...그렇겠지. 문둥이 입장에서 감히 성한 사람을 사랑하기가 부담이 가겠지.. 강군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하면 문둥병도 낫는 법이지.“ “......” “강군? 자네는 이제 정상 사람이니 사람을 사랑해도 된다네.” “정상 사람? 그리고 사랑?” “그래. 너는 사람이야. 정상 사람.” 순간 방문이 열리면서 들어오는 여인이 있었다. “홍조씨! 축하합니다. 완치됐군요. 그리고 새 사람이 됐군요.” “아-혜선 씨!” 그녀가 내게 다가와 나를 포옹할 때 비로서 나도 같은 인간임을 느끼게 되었다. * 마침내 나는 문둥병에서 완치되었음을 김경민 의사로부터 공식으로 통고를 받았으며 임혜선씨로부터 축하를 받았다. 생각해 보면 1996년 4월 2일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유준 박사로부터 문둥병이라는 최종 진단을 받은 지 꼭 10년만에 하늘이 내린 병이라는 문둥병으로부터 완치되었다. “10년은 걸릴 걸세. 열심히 치료를 받게나.” 유준 박사가 말한 그 10년이었다. * 중병에 걸렸던 사람들은 누구나 나의 기쁜 마음을 이해하리라. 그러나 문둥병은 사정이 달랐다. 잘 아는 대로 결핵에 결렸다가 회복이 되면 폐에는 흔적이 남으나 외모에는 아무런 흔적이 없어 정상 사람처럼 보이지만 문둥병은 그렇지가 않았다. 신경계의 마비와 피부와 관절에 미치는 후유증으로 문둥병 환자는 “장애자”가 되는 셈이다. 관절이 위축되거나 피부가 없어졌기에 흉한 모습을 보이며 눈의 시력이 떨어지기도 한다. 그러기에 문둥병에서 완치되었다고는 하나 소록도 밖으로 나가 살 경제적인 힘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사람으로 받아 주기를 꺼려하기에 이곳에 남아 장애자로 살던지 경상도나 경기도에 있는 음성 나환자 정착촌에 가서 집단으로 모여 살게 된다. 이마에 ‘나는 문둥병 환자가 아닙니다.’ 라고 써 부쳐 본들 어느 누구도 정상 사람으로 대해 주지 않는다고 했다. 결국 나는 이곳 소록도에 남아 음성 환자로 중앙교회에서 목사님을 보조하기로 마음을 정하였다. 죽은 사람들을 장례 하거나 화장 할 때 곁에서 도와주면서 나의 갈 길을 생각해 보기로 했다.. 김경민 의사의 개인 지도로 의과대학에 들어 갈 준비도 했다. 의과대학에 설령 들어간다 해도 과연 동료들이 나를 정상적인 사람으로 대해 줄까? 28세난 되는 나이로 20세의 젊은 이들을 따라 갈 수가 있을까? 나는 문제가 예상보다 큰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회가 주어지면 반드시 하리라.’ 나는 다짐을 했다. 그뿐 아니라 나를 뒤에서 밀어 주는 임혜선씨를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하리라. 나는 다짐하고 나 스스로를 격려했다. 제 3부. 아버지와 아들이 같이 본 소록도. (1부와 2부를 읽어 주신 독자 여러분, 다시 나, 강석호의 말을 들어주십시오.) * 21장: 에필로그. 우리들의 고향. 2006년 여름(7월)- - 한국에 돌아 온 나(강석호)는 공교롭게 시작된 일주일간의 장마비가 끝난. 7월 15일 소록도를 방문하였는데 놀랍게도 내 아들, 강홍조는 문둥병으로부터 완치가 되었으며 소록도 중앙교회에서 목사를 도와 며칠 전에 죽은 나병 환자의 장례를 지내고 있었다. 나와 아들은 서로 포옹을 했다. 그리고 지난 2년 반, 아니 10년을 이야기하면서 나는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다. 그리고 이젠 ‘우리’가 되었다. 듣고 보니 아들은 더 이상 외로운 존재가 아니었다. 그 동안 그를 위로 해준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세상을 떠난 임 선생, 김 정섭 형님, 새로 부임한 의사 김경민, 녹동 항구의 여관집 아주머니 그리고 천사같은 임 혜선씨를 통해서 내 아들은 희망과 비존을 가진 건전한 청년으로 성장하였음을 알게 됐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태어난 곳은 안성이지만 이곳 소록도가 그의 고향이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사람을 사람 취급해 주며 같이 울고 웃는 곳, 그곳이 고향이라고 했다. 또 한가지, 문둥병은 결코 하늘이 내린 형벌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그가 가진 사명과 임무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러기에 아들은 그가 받은 문둥병, 10년을 통해 그는 그가 무엇을 하여야 할지를 깨닫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비록 60이 넘은 아들을 통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다. 나는 이제 아들과 그를 둘러싼 사람들과 한 마음이 되다보니 ‘나’라는 생각에서 ‘우리’라는 개념을 갖게 되었다. 소록도는 우리들의 세계가 되었으며 이젠 “슬픈 곳, 형벌을 받는 곳, 버림 받은 지옥과도 같은 곳”이 아닌 진정 “우리들의 천국”이라고 부르고 싶었다. -우리들의 천국, 바로 우리들의 고향이 되었다.- 나는 안성을 버리고 소록도에 와서 살기로 했다. 아들과 같이 살면서 여기서 할 일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비록 중풍 환자이긴 하나 더 이상 장애인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 내가 여기 소록도로 온지 어느덧 일개 월이 되었다. 나는 두 사람과 특별한 만남을 갖게 되었다. 한 사람은 소록도의 김경민 의사였다. -“강홍조군 그리고 아버님?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분명,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며 구하는 자에게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며칠 전 나의 모교로부터 강홍조군에 대한 입학 약속을 받아 내었습니다. 2007년 3월부터 나의 모교, 의과대학에서 강홍조군을 신입생으로 특별히 받아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의과대학에서 저를 받아 준다고요? 어떻게요?” 아들은 큰 소리로 물었다. “기뻐해 주십시오. 나는 강군을 위해 의과대학 학장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강군에 대해 설명을 했는데 처음에는 농담인줄로 생각하던군요. 그러나 진지하게 간청하는 내게 학장님은 생각을 바꿨습니다. “의과대학생을 선발 할 때 학교 성적만 가지고 결정하기보다 과연 의사가 될 가치관을 갖고 있는지,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긍휼(Compassion)한 마음이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비천함에 처했던 사람은 그 긍휼(Compassion)을 더 이해하며 실행하리라고 봅니다. 학문과 직위에만 집착하는 이기적인 의사보다는 남을 배려하고 나를 죽이고 남을 위해 살려고 하는 사람만이 좋은 의사가 될 것임을 나는 확신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문둥병에서 회복이 되어 남을 돕고자 하는 마음(Compassion)을 가진 강홍조 군을 꼭 입학 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비록 나이는 많으나 분명 그는 열심히 공부하여 좋은 의사가 될 것을 확신합니다.“ “.........” “내 모교는, 인간을 위해 세상에 까지 찾아와 몸소 긍휼(compassion)을 실천한 기독정신을 가르치는 학교이기에 나는 믿습니다. 부디 입학을 허락해 주시기를...”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학장님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약속했다. “강군 그리고 아버님, 열심히 준비합시다. 남을 섬기는 긍휼의 마음을 품은 의사가 되도록 우리 다같이 노력하십시다.” “예.” 우리는 대답을 했다. * 그리고 며칠 후 수원에서 우리를 찾아 온 혜선씨를 만났다. 그녀는 우리를 향해 활짝 웃고 있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아 다시 찾아 왔습니다. 자주 찾아 오다보니 이젠 여기 소록도가 내 고향이 됐군요. 그리고 우리들의 천국이 됐습니다. 그래서 아예 이곳으로 이주(移住) 하렵니다. 전라남도 고흥군 소록도 2번지로 말입니다. 저를 받아 주시겠습니까? 소록도가 고향이신 주민 여러 분들?“ “물론이죠., 소록도는 나, 그리고 당신, 아니 우리들의 고향이니까요.” 소설 끝. 소설을 마치면서 존경하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동창 회장님! 1969년도 졸업생, 내과 전문, 연규호 후배가 삼가 이 소설을 드립니다. 2007년 10월 13일 금요일, 하와이 힐로에서 동창회장님으로부터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빛낸 동창”으로 공로패를 받으면서 저는 감격하여 울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공로상: 귀 동창께서는 한국문인협회 및 미주 문인협회 회원으로서 환자진료와 의료 선교등으로 바쁜 일정에서도 여러 소설을 집필하시고 영어와 스페인어로 번역하여 널리 읽히게 함으로서 모교의 위상을 높이셨습니다. 매우 드믄 의사문인으로 동창들의 모범이 되시고 모교와 동창회 발전에 기여 하신바 크므로 전 동창의 마음을 담아 이 패를 드립니다. 2007년 1월 27일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총 동창회 회장 이승호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여 의사가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이 부족한 소설을 통해 과연 참다운 의사의 가치관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1966년 7월 유준 교수님을 따라 미생물학 실습차 방문했던 소록도가 저의 소설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 배웠던 긍휼(Compassion)의 가르침이 아직도 저의 가치관이기 때문입니다. 동창 회장님이 제게 주신 공로패를 생각하며 부족하나마 이 소설로 보답을 하려고 합니다. 받아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부족한 후배, 연규호가 드림니다. * * * 아울러 갓 태어난 둘째 손녀, Luna Julia Yun, 둘째 아들(William Yun)과 약혼녀, 이상아(Eileen Lee)양의 행복을 기원하면서. 사랑하는 아내, Charles, 高根 美橞, Sora Joy,를 생각하면서. 2008년 3월. 빌라.팍(Villa Park) 서재에서. 아버지가 씀 * * * 저자 소개:(표지 용) * 연규호(延圭昊), Kyuho Yun, M.D.FACP 한국 문인협회, 미주 한국 문인협회 회원. 펜.클럽(PEN.Korea & USA) 회원. 오렌지 글 사랑 회원. * 약력. 경력. 청주 출생. 연세의대 졸업 미국 내과 전문의사 Diplomate, American Board of Internal Medicine. 12828 Harbor blvd. #320 Garden Grove CA 92840에서 개업중임. * 작품 소설: “안식처”. “깔리만탄의 사랑”. “망상” “사랑의 계곡” “마야의 눈물” “오하이오 강의 저녁 노을”“샤이엔” “내가 사랑한 몽골의 여인” “거문도에 핀 동백꽃은..” “마야의 꿈” “아프리카에서 온 편지” 연재 소설: 사랑의 약속(한맥 문학) 해변의 안식(순수 문학) 영문소설: "The valley of Love" "Cheyenne" "The Dream of Maya" 서반어 소설: “El Sueno de Maya" 산문집:“의사 그리고 25년” * 연락처: www.yunkyuho.com kyuhoyun@yahoo.com 714 636 0133 9982 Bixby cir. Villa Park CA 92861 끝. 발문(성기조 박사) 한국 문인협회 명예 이사장 한국 예총, 수석 부회장 *** 축하의 글: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총 동창회장님의 글. 친애하는 연규호 동창께. 안녕하십니까? 또 큰 수고를 하셨군요. 축하합니다. 둘째 손녀를 맞이하신 것도 축하합니다. 동창회장 8년을 하면서 수 많은 동창에게 공로패, 축하패를 드렸는데, 패를 받고 감격하여 울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었습니다. 역시 문학가라서 그런 감정도 풍부하신 것 같습니다. 본래 동창회에서 표창을 하는 절차는 포상위원회가 있어서 포상위원들이 폭 넓은 정보에 의하여 대상자를 결정합니다. 그러나 연규호 동창의 경우는 본인이 미주 동창회에 참석하여 공짜로 주신 역작, “거문도에 핀 동백꽃은..”“The valley of Love""Cheyenne"을 읽고 감격하여 직접 공로상을 드려야 되겠다고 회장단 회의에 제의했고 동기동창이신 김덕희 부회장도 찬성을 해주어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보내주신 ”내 고향은 소록도“도 환자 보는 틈틈히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소록도는 의과대학 재학중에 전남지방 무의촌 진료도중 들러 본 경험이 있고 여수 애양원은 나와 동기 동창인 김영조 선생 조카인 정형외과 의사 김인권이 원장으로 오랫동안 있어서 실감나게 읽었습니다. 대학입시 준비하던 약 60년 전 국어 선생님이 눈을 스르르 감으시면서 읊던 한하운의 시, 보리피리, 한하운의 연인과의 사랑 이야기등, 옛 추억에 잠길 수 있는 귀한 시간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작품마다 장로님 답게 선교의식이 물씬하게 나는 것도 저에게는 상큼한 감동입니다. 정식 출판제본이 되기도 전에 내용물을 볼 수 있도록 해 주신 것 제 평생에 두 번째 있는 일입니다. 제본된 책을 받았을 때 보다 연규호 동창이 옷을 다 벗고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 주시는 것 같아 더욱 친밀감을 느낍니다. 귀 동창의 작품이 메말랐던 내 머리와 가슴에 풍부한 영양을 주입해 주셨습니다. 훌륭한 후배 동창을 두어 무한 자랑스럽고 고맙습니다. 지난 1월26일 의과대학 동창회 총회 석상에서 유준 선생님을 뵈었는데 지팡이는 짚고 다니시지만 퍽 건강하십니다. 유준 선생님께서도 물론 이 소설을 읽으셨겠지요. 여러 가지로 감사합니다. 계속 건투 하십시오. 2008년 3월 10일.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총동창회 명예 회장 이승호. 추천사: “그의 눈길이 닿는 곳에서 피는 꽃” 미주 한국 문인협회 회장, 김동찬. 연규호 소설가의 시선은 늘 겨울에 가 있다. 그러나 그의 눈길이 닿는 곳은 마냥 찬 바람과 눈보라만 끝없이 날리는 절망의 동토는 아니다. 훈훈한 바람이 불러 싹이 돋고 꽃이 피어나는 봄을 기다리는 길목이고 정거장이다. 겨울이 길면 봄은 더욱 환하다. 혹독한 찬 바람에 얼어붙어 있던 땅이 녹고 마른 나뭇가지에 싹이 돋는 장면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 나는 기적이고 감격이다. 그러나 겨울에도 꽃이 지천인 엘에이에 살다보니 봄을 맞는 느낌이 한국에서 봄을 맞을 때와 같지 않다. 내 배가 부르고 등이 따뜻하면 금방 겨울은 잊어버리게 되나 보다. 하물며 남이 겪고 있는 겨울까지야 머나먼 남의 이야기로 들릴 뿐이다. 그러나 연 작가는 의사라서 그런지,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을 갖고 있다. 그의 시선은 늘 음지에서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 차별을 겪고 있는 사람들,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을 향한다. 당연한 결과로 그의 소설에는 그런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그러나 주인공들은 어두운 시간 속에서 상처를 들려다보고 손을 놓고 앉아 있지 않는다. 절망 속에서 일어서며, 사랑을 회복하고 끝끝내 겨울을 극복하고 봄을 맞이하는 부활의 기적을 만들어 낸다. 소설<내고향은 소록도>도 한 때 모든 사람들이 기억 속에서 지우고 싶어했던 소록도 나병환자들의 이야기다. 주인공인 강홍조는 어렸을 적에 어머니를 잃는다. 고등하교 때 갑자기 나병이 생겨 아버지를 떠나 소록도로 가게 된다. 10년 동안의 눈믈겨운 투병을 통해 바명을 물리친다. 그러나 소록도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환자들을 위한 의사가 돼서 영원히 그곳에 살기 위해 의대에 입학허가를 받는다. 소록도에서 보낸 투병기간이 ‘나를 위!해서 살지 않고 남을 위해 살 수 있도록 ’ 인생관을 바꾸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그래서 소록도의 10년 생활은 어둡고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오히려 찬란한 봄을 맞이할 수 있도록 단련시키는 계절이다.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같은 처지에 있는 나환자들의 우정과 도움이 있고 자원 봉사자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하다. 나병환자들을 삶이 사는 세상으로부터 격리시킨 우리가 오히려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이고 비정한 환자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과연 물질이 가져다준 풍요가 우리를 행복하게 했는가. 메마른 세상에서 진정한 영웅은 누구인가. 혹독한 시련은 견딜만한 가치가 있는가. 신이 우리에게 마련해준 겨울의 의미는 무엇인가. 연규호 소설가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세상에 겨울이 있는 한 연 소설가는 그곳에 눈길을 주어왔고 또 줄 것이다. 그의 따뜻한 눈빛은 얼어붙은 땅을 녹여 봄을 가져오고야 만다. 그래서 소설가이자 의사인 그는 치료로, 소설로, 선교로 우리들 차가운 가슴을 녹이고 기어이 꽃을 피워내고야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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