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와 지리공부를 평소에 좋아하였기에 나의 소설은 아름다운 과거의 역사와 내가 사는 현실을 소재로 글을 쓰고 있다. 왜 그럴까? 나는 중국의 한나라 초기에 살었던 궁녀, 왕짜오쥰과 기황후의 모습을 늘 생각해 보았으며, 보고 싶었다. 뜻밖의 일이었다. 내가 다니는 베델한인교회에서 몇 차례 찾아 간 몽골의 다르항과 그곳에 가서 선교를 하고 있는 '임전도사'의 편지를 받았다. 추운 겨울과 무더운 여름의 몽골은 천연적으로 버려진 땅이었다. 그런 그곳에 가서 모든 것을 희생하고 있는 선교사, 그리고 나의 모교인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파견한 몽골 친선병원과 그곳에서 봉사하고 있는 동문 의사들을 생각하며, 이 소설을 시작해 보았다. 과연 미국에 와서 내과 전문의사가 되어 개업을 하고 있는 나에게 느껴지는 것은, '나도 무엇인가 좋은 일을 해 보고 싶다'라는 강한 욕망이었다. 몇 년 전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나의 고교 동창인 닥터 조(은소)의 죽음을 생각해 보았다. 유망한 이비인후과 의사였는데, 너무나 일찍이 세상을 떠났다. 갑자기 나의 친구, 조은소가 보고 싶어진다. 그리고 그가 남긴 일들이 모두 다 나의 임무라고 생각을 하며, 이 글을 쓰고 말았다. 몽골의 여인은 이런 배경으로 내가 살던 청량리역과 뉴 저지, 그리고 이곳 캘리포니아를 배경으로 쓰여진 셈이다. 가든 글로브에서 저자 씀 차 례 책 머리에 나도 무엇인가 해 보고 싶다 ㆍ5 고비사막ㆍ17 내가 사랑한 여인들ㆍ23 두 번째 부탁ㆍ32 죽마고우ㆍ40 미국 이민ㆍ54 궁녀, 왕소군(왕짜오쥰)ㆍ77 사랑하기 때문에ㆍ85 몽고 사람들을 만나려고ㆍ99 바보같은 의사ㆍ106 무명초 인생ㆍ124 망상의 세계ㆍ136 혼돈의 세월ㆍ156 우울한 뉴욕ㆍ180 몽골에서 만난 여인들ㆍ190 진짜 목걸이ㆍ222 에필로그ㆍ229 '삼바이노?'(안녕하십니까?) * 어여쁜 아시아나항공의 여승무원의 안내 방송에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아! 나는 잠시 아주 멋진 꿈을 꾸고 있었구나!' 푸른 초원에서 나는 말을 타고 마음껏 달리고 있었다. 놀랍게도 징기스칸이 큰 칼을 차고 내 옆에 같이 있었으며, 여러 필의 말이 끄는 우람한 황금 수레에는 아름다운 여인들이 타고 있었다. '왕소군'(王昭君;왕짜오쥰)이라고 하는 한(漢)나라의 궁녀와 '기황후'(奇皇后)라는 고려(高麗)의 여인이 있었는데, 한결같이 아름답고 우아해 보였으나, 웬일인지 얼굴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황금 수레 속에는 징기스칸의 손자, 쿠빌라이가 방긋이 웃고 있었다. -"닥터 강? 몽골의 여인들이요, 당신이 보고 싶다고 찾아 온 몽골의 여인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왕소군과 기황후란 말이요"- '아! 참으로 아름다운 여인들이구나!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와도 같구나!' 나는 너무나 황홀한 꿈에서 깨어 난 것을 못내 아쉬워하며 눈을 비볐다. 꿈속에서 본 아름다운 여인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서 아른거리고 있었다. 서울을 떠나 황해 바다를 넘어 만리장성을 지나면서 피곤했던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2-30분 동안 잠에 빠져들면서 꿈을 꾸었던 것이다. * "여러분들을 태운 이 항공기는 중국의 내몽골을 지나 고비사막의 상공을 지나고 있습니다. 약 1시간 후에는 몽골의 수도인 우란 바톨(Ulan Bator)공항에 도착하게 되겠습니다." 계속되는 아시아나항공의 여승무원의 상냥한 안내 방송을 들으며, 나는 가슴 벅찬 흥분을 느끼고 있었다. 창문을 통해 고비사막을 자세히 살피고자 내려다보았지만 짙은 구름과 더운 7월의 황사로 인해 생각보다 희끗희끗하게 빛나는 모래와 드문드문 보이는 검은 등성이만 보일 뿐, 그 모습은 볼품없는 모래의 연속일 뿐이었다. 마치 캘리포니아에 있는 죽음의 계곡, 데스 밸리(Death Valley)를 연상케 할 뿐이었다. 기대했던 고비사막의 풍경은 사진을 통해 보았던 그 모습을 되새겨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 고비사막이란 어떤 것인가? -동서로 1,200마일, 남북으로 600마일의 모래로 된 분지인데, 온도의 차이가 심하며 황토흙과 모래의 연속이기에 나무와 동물들이 살기에는 불가능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 사막 속에 잡초도 자생하며 두더지, 들토끼, 그리고 여우와 같은 동물들도 살기에 독수리가 하늘을 날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사막에는 소위 오아시스에 해당되는 곳이 몇 군데 있어 사람들이 기거할 수 있는 집(겔)도 있다고 해서 항공기의 창문을 통해 찾아보고자 했던 어린시절의 나의 마음은 삽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내몽골(중국)에 있는 호아호트 시에서 시작된 철도가 고비사막을 남북으로 관통하여 우란 바톨까지 연결되는가 하면, 여름철에는 낙타를 몰고 가는 상인들의 긴 행렬이 있기에 더욱 죽지 않고 살아 움직인다고 아시아나항공의 기장이 방송을 통해 덧붙혀 주었다.- * '고비사막의 모래알은 도대체 몇 개나 될까?' 나는 뚱딴지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그것에 대한 관찰은 단념하였다. 순간 나는 나의 어깨에 기대어 아직도 단 잠을 자고 있는 '얼굴이 희고 지극히 우아해 보이는 백인 여인'를 의식하며, 창문쪽으로 기우렸던 나의 몸을 움츠렸을 때, 그녀는 나의 왼쪽 팔을 끼고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마치 부부처럼 승무원이 덮어준 담요를 가지런히 가슴까지 덮고 나란히 앉아 있었다. 이 때 많은 한국 사람들과 몽골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큰 소리로 떠들고 있었지만 이 백인 여인은 웬일인지 자기와는 상관 없다는 듯이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인천 국제공항에서 탑승할 때부터 여행객들은 이상한 듯이 나와 같이 앉아 있는 백인 여인을 흘끔흘끔 처다 보곤하였다. '백인 여자와 한국 남자가 같이 탑승하였다. 그러면 부부인가? 설마? 아니겠지, 그러면?'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꺼무칙칙한 얼굴을 한 동양 사람인 나와 마치 백조처럼 흰 얼굴을 한 이 백인 여자와는 너무나 격이 맞지 않아 어느 누구도 부부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멀리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한국을 거쳐 만리장성을 넘어오느라 지쳐 있었기 때문에 항공기에 오르자마자 체면을 불구하고 나의 어깨에 기대어 코를 골고 있었던 것이다. * 나는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을 해 보았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지난 몇 개월 동안에 그녀와 나 사이에 일어난 미묘한 감정의 변화로 나 자신도 너무나 놀라고 있었다. -'이 여인이 누구냐? 내 친구의 아내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유부녀가 아닌가! 그런데, 어쩌자고 나는 이렇게 한 비행기를 타고 몽골로 가고 있단 말인가? 더구나 그녀는 나의 손을 꼭 잡고 나의 어깨에 기대어 마치 내 아내인것처럼 잠을 자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남들의 눈에는 우리가 불륜의 관계로 보일 수도 있겠지, 불륜이라고!' * "하이디! 하이디! 드디어 우리는 몽골의 우란 바톨도 공항에 왔습니다." 나는 곤히 잠자고 있는 그녀를 흔들어 깨우며 말했다. "어! 어? 닥터 강! 나 졸려요, 가만히 두세요." 하이디는 어리광스럽게 짧게 대답을 하고는 이내 나의 어깨에 기대어 또다시 잠이 들고 말았다. "그래? 깨워 줄게, 조금만 더 자라고!" 나는 대답을 하면서 눈을 감았다. 잠을 자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난 몇 개월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 나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 나와 하이디는 몽골을 방문하고 있는 중이었다. '몽고라! 몽고? 아니 몽골!' -이 세상에 숨겨진 나라가 몇 군데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몽골이라는 나라이다. 땅 덩어리는 텍사스의 2배가 되지만 인구는 겨우 350만 명이라고 하며, 이 지구 상에서 가장 못 사는 나라 중에 하나이지만 한때는 온 세계를 지배한 적이 있는 믿지 못할 신비의 나라이다.- 우리가 몽골에 가고자 하는 이유는 너무나 단순했다. 몽골에 가면 '몇 명의 몽골 여인들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하는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몽골 여인들의 음성이라고요?" 누군가 내게 묻고 있는 듯 하였다. "그렇습니다. 몽골의 여인들! 아름다웠던 여인, 그리고 외로웠던 여인, 고국을 그리워 하다가 죽었던 몽골의 딸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입니다." "몽골의 딸이라니? 그게 누굽니까?" "예, 예. 왕소군, 기황후, 훈(Hun)족의 딸들입니다." "예? 그런데, 그들의 목소리를 어디에 가서 들으려고 합니까?" "예, 우란 바톨, 다르항, 카라코름, 호아호트 시라는 도시에서요." 나는 큰 소리로 말했다. "닥터 강? 무슨 말을 하십니까?" 잠을 잔다고 생각했던 하이디가 내게 묻고 있었다. "……" 그러나 나의 귓속 깊은 곳에 있는 청신경(聽神經)이 서로 엉켜 있는 미로의 액체 속에서 들려오는 여인들의 울음이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몽골의 딸들이 부르는 소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목소리는 분명히 이렇게 부르짖고 있었다. '내 고향에 가서 어머니 곁에 하루라도 살고 싶소이다.' 라고. "그렇습니다. 나는 미국 로스앤젤레스남쪽, 아나하임에 살고 있는 마취과 의사, 강석호(姜錫浩)입니다. 금년이 2001년이니 내 나이가 56살이 됩니다. 2차 대전이 끝나기 반 년 전에 태어났으니 말입니다. 소위 해방둥이라고 불리지만 말이 그렇지 나의 어머니가 나를 임신하고 10개월 동안 먹은 것이라고는 배급으로 받은 약간의 쌀과 조, 수수, 초근목피였으니 태어날 때부터 몸이 작고, 얼굴이 검고 못생긴 아이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가지 특이한 것은 '몽골족'답게 엉덩이에는 손바닥 만한 '몽골리안 스포트'라고 하는 푸른 반점이 있었다고 했어요. 소위 삼신할머니가 '세상에 나아가 명 길게 오래 잘 살라'고 손으로 쳐서 내 보낸 자리라고 하지요. 그러고 보니, 나의 출생부터가 그리 행복하지 않았듯이 그 후의 인생살이도 평탄했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강원도 금화군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살다가 6.25전쟁으로 인해 서울 청량리역 부근으로 이사와서 아주 가난한 소년 시절을 보냈지요. 가난뱅이가 용하게도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으니, 소위 '개천에서 용'이 난 셈이지요. 그 뿐인가, 그 당시로는 '꿈만 같은 미국으로 유학하여 마취과 전문의사'가 되어 돈도 꽤 벌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제일 살기 좋다는 아나하임 힐에 한국 사람들이 와 보면, 마치 작은 궁궐 같은 저택에서 개 두 마리를 기르면서 달랑 나 혼자 '외롭고 쓸쓸하게 살고 있는 이해가 안가는 의사'입니다. 세상 사람의 눈이 두려워 스페인 여인 한 명을 가정부로 채용했었는데, 그녀는 매주 두 번씩 집에 와서 빨래, 청소 등을 하고 갑니다만 한 때는 이것이 한국 교민들 사이에 나쁜 소문으로 번진적도 있습니다. '아나하임 힐에 사는 마취과 의사, 강석호는 스페인 여자와 살고 있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와전된 말이었습니다. 그것은 나의 종교관에 비춰봐도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또 나는 도덕적으로 하나의 흠도 없이 살아 온 사람이니까요. 너무 내 소개가 길었군요. 그리고 더 궁굼한 것은 나와 같이 동행하는 '이 백인 여인이 누구냐?'하는 것이지요. 그래요. 그녀는 하이디라고 하며, 나의 친구, 기성환(奇成桓;Dr. Samuel Khee)의 아내입니다. '친구의 부인?'이라고 놀라겠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나의 친구는 외과 의사였는데, 아깝게도 5년 전 1996년 봄에 몹쓸 놈의 신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닥터 기는 나와는 어려서부터 같이 살아 온 죽마고우 사이입니다. 마치 소의 머리와 꼬리와도 같다고나 할까요. 무슨 소리냐고요? '닥터 기는 머리요, 나는 꼬리'라는 말로 그만큼 그는 늘 선두에서 유능하게 살았으며, 어찌된 셈인지 나는 늘 꼴찌에서 겨우겨우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녀의 이름은 하이디 마리아 리스츠(Heidi Maria Listz) 입니다. 그녀의 이름에서 풍기듯이 그녀는 5피트 7인치의 큰 키에 몸매가 아름다운 백인 여인으로 그 유명한 헝가리 출신의 음악가 후란즈 리스츠(Franz Liszt)가 그녀의 4대 할아버지가 된다고 하며, 자부심도 강한 여자입니다. 1996년, 그녀는 남편, 닥터 기가 죽자마자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 많은 생명보험금을 받아 가지고 그녀의 친정이 있는 뉴욕주 마운트 버논(Mt. Vernon)으로 떠나 버렸던 것인데, 그것을 본 많은 사람들, 특히 그를 아는 동창들은 더욱 실망을 했다. '그것 보라고! 미국 여자하고 결혼해 봐야 결과는 뻔한거라고. 미국 여성들은 남편이 죽으면 재산을 정리해 가지고 결국은 다른 남자를 만나 다시 살게 뻔한 거라고! 미국 여자는 왜? 한국 사람하고, 그것도 의사하고 결혼을 한담!' 돈 잘 버는 흑인 운동선수들을 보라고? 쭉쭉 빠진 백인 여인들을 데리고 살지만 1-2년 지나면 곧바로 이혼을 한다고 이혼을! 그리고 몇 백만 달러와 저택을 빼앗아 버린다고! '닥터 기? 그가 그 꼴이지 뭐야! 죽어라고 의사 노릇해서 번 돈과 뉴 포트에 있는 저택과 욧트, 결국은 놈팽이 같은 미국 놈이 갖게 될 거 잖아!' 정말 그러했다. 5년 전에 동부로 훌쩍 떠나버린 하이디에게서 아무런 소식도 없었으니까요. * 사실이었다. 닥터 기의 장례식 때 찾아와 진심으로 눈물을 흘리며 애도를 해준 고등학교, 대학 동창들에게 감사하다는 말 한 마디도 없이, 아니 그 흔한 '땡큐'라는 카드 한 장도 보내지 않은 채 200만 달러의 생명보험금과 뉴 포트의 집과 욧트 등을 정리하고는 딸, 제니퍼를 데리고 그녀는 뉴욕으로 가 버렸다. 그것을 보면, 그녀가 아무리 그 유명한 음악가 후란즈 리스츠의 후손이라고 자랑을 해 보였지만 그녀도 별 수 없이 돈만 아는 여인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거의 잊어 버리고 살고 있었다. 어느 듯 닥터 기가 죽은지도 5년이 지나고 보니, 나의 머리 속에서는 '닥터 기'라고 하는 친구도, 한때 내 마음을 사로 잡았던 미모의 '하이디 마리아 리스츠 기'라는 이름도 나의 대뇌와 연결된 히포캄푸스(Hippocampus)에서 말끔히 잊혀가고 있었다. * 그러나 그 뜻밖의 편지를 받은 것은 지난 겨울, 크리스마스를 앞둔 시점이었다. 두 통의 편지를 받았는데, 하나는 뉴욕주 마운트 버논에 사는 하이디로부터 온 긴 사연의 편지였으며, 또 다른 하나는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기성혜(奇成惠)로부터 온 짧은 편지였다. 잠시 설명을 하면, 기성혜는 내 친구, 닥터 기의 여동생으로 나보다 2살 반이 작으며, 미모의 여류 화가다. 6년 전 미국 남자와 재혼을 하여 샌프란시스코에서 살고 있는데, 5년 전 오빠의 장례식에서 잠시 만나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 뜻밖에 받은 두 통의 편지는 다음과 같았다. 편지-1 〔사랑하는 닥터 강, 아니 석호씨! 저, 하이디예요, 하이디? 5년 전 남편, 닥터 기의 장례식을 마치고 우울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친정이 있는 뉴욕주 마운트 버논으로 되 돌아 왔습니다.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떠난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지난 5년 동안 아무런 소식도 전해 드리지 못했음을 더욱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남편의 죽음은 분명히 내게는 절망이었습니다. 석호씨! 뉴욕주 마운트 버논에서 1973년인지, 아니면 1975년인지 어느 가을날, '하이디! 당신도 아마 몽골의 후예일겁니다. 몽골의 딸이란 말이요'라고 나에게 한 말씀이 오늘 갑자기 떠올랐습니다. '한고조(漢高祖)의 궁녀였던 아름다운 왕소군의 피를 이어 받은 훈족의 후손이라고 말했지요. 소름끼치는 야만인 아틸라(Attilah)의 후예일지도 모른다고!' "무슨 말을 하는 게요? 닥터 강!" 나는 화가나서 당신에게 항의했었지요. 항가리 음악의 거장 후란즈 리스츠의 피를 이어 받은 나를 당신이 경멸하고 있다고 생각을 했답니다. "닥터 강! 훈족이란 야만족의 괴수요, 유럽 사람들이 싫어하는 야만족이란 말이요." 나는 당신에게 큰 소리를 쳤지요. 그 후부터 나는 당신이 아무리 내 남편, 닥터 기의 죽마고우라고 해도 무조건 싫었지요. 그런데, 당신은 내게 또 다른 사실을 알려 주었지요. '나의 남편, 닥터 기는 징기스칸이 건설한 원(元)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순제(順帝)와 피를 나눈 가문이며, 아름다운 기황후의 후손이라고. 그러기에 나, 하이디와 어쩌면 같은 피를 나눈 몽골의 후손이라고?' 닥터 강!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많은 생각을 해 보았어요. 그리고 재혼을 할 기회도 있었으나, 당신이 일러준 몽골의 딸이라고 하는 생각을 하며, 지금까지 살아 왔습니다. 닥터 강! 아니, 석호씨? 왜 그럴까요? 문득 당신을 만나고 싶어집니다. 당신을 만나 못 들었던 옛 얘기를 더 듣고 싶어요. 그리고 당신 곁에 있고 싶군요. 안될까요? 석호씨! 나는 갑자기 당신이 좋아 졌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가슴에 품게 되었나 봐요. 저에게 전화를 주시든지, 아니면 이메일을 주세요.(E­Mail: Heidikhee@yahoo.com) 기다리겠습니다. 사랑해요. 뉴욕주 마운트 버논에서 당신의 하이디 마리아.〕 * 그리고 또 다른 편지는 생각보다 짧았으며, 사무적이었다. 편지-2 〔석호 오빠! 성혜예요. 2001년도 어느듯 저물어 갑니다. 오빠! 기쁜 성탄과 축복받는 새해를 맞으십시오. 그리고, 석호 오빠! 좋은 여자를 만나 새 해에는 결혼을 하여 가정을 가지세요. 성혜는 추억속에서나 기억하는 여인으로 생각하시고요! 사랑하는 동생, 성혜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드립니다.〕 * 나를 놀라게 한 편지는 역시 하이디에게서 온 편지였다. '와! 하이디가 내게 편지를 보내다니! 하이디가!' 뉴욕으로 간 후 도무지 소식이 없었는데, 갑자기 편지를 보낸 것도 놀랬지만 그 내용에서 그녀는 은근히 내게 사랑의 고백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더더욱 놀라웠다. '그녀의 말이 정말일까? 아니면 남편이 죽고 혼자 살다보니 남자가 그리워진 것일까? 남편의 대행품 같은 나를 농락하려고! 그렇다면 그녀는 불륜을 기도하려고 하는 건지도 모르잖아?' 나는 마음 속으로 의구심을 갖고 그녀가 쓴 편지를 몇 번 더 읽어 보았다. 장난이 아닌 진실이 숨어 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몽골의 딸이니, 몽골의 여인이니 하는 말은 20여년 전에 내가 그녀에게 들려준 얘기였다.' 그런데, 그 얘기를 지금까지 그녀가 기억하고 있다고 하니 새삼 놀라웠다. 나는 언젠가 그녀에게 내가 아는 짧은 역사의 한 토막을 얘기해 준 적이 있었다. -한나라 고조가 만리장성을 넘어 온 몽골족인 '호얀하 선우왕과 묵특 선우장군'과의 전쟁에서 비참하게 패한 일이 있었다. 전쟁에서 진 한나라 고조는 그의 공주를 호얀하 선우왕, 아니 묵특 선우장군에게 보내기로 약속을 했는데, 차마 그의 딸을 오랑캐에게 보낼 수가 없어 궁녀를 공주라고 속이고 대신 보낸 아름다운 궁녀, 왕소군(왕짜오쥰)의 슬픈 얘기었다. 600년 후, 왕소군의 피를 이어 받은 '야만인 훈족, 아틸라'의 침공으로 유럽은 온통 피바다가 되고 말았다. 그곳에 남아 있던 훈족과 고트족의 후예인 마잘족(항가리족)이 있었다. 또 원제국에 끌려간 아름다운 고려의 처녀가 순제와 결혼하여 '기황후'가 된 얘기도 했었다. 그리고 기황후의 후손인 닥터 기와 왕소군-훈족의 피를 이어 받은 마잘족의 딸, 하이디와의 만남이 있었다.- <주> 몽골족;몽골족은 기원 전 2세기에 중국의 북방을 수시로 침공하였기에 진·한나라는 만리장성을 쌓아 몽골족(흉노, 동호, 선비족)과 싸웠다. 기원 후 4세기 몽골족은 서쪽으로 침공하였는데, 유럽에서는 훈족의 침입이라고 부른다. 훈족은 유럽과 이태리 등을 정복하였으며, 그 당시장군의 이름이 '아틸라'였으며, 유럽 사람들은 '야만인 아틸라'라고 부르며, 지금도 몽골족을 두려워 한다. 그리고 기원 12세기 경에 테무진이 중국과 아시아, 유럽을 또다시 정복하여 분리 통치를 하였다. 그러나 원제국이 망한 이후 몽골은 쇠퇴하여 이 지구상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다. * 결국 인류의 역사는 얽히고 설키며, 반복하고 반복하는 것이라고 나는 그녀에게 말하여 주었는데, 그녀는 그것을 20년이 지난 지금 이해를 하게 된 모양이었다. 아니, 남편이 죽은지 5년이나 지나서야 이해를 하고는 나, 강석호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다. 내가 살아 온 지난 56년을 도리켜 보면서 나는 결국 '인생은 어떻게 살았던 모든 것이 똑같은 결과를 갖게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질량불변의 법칙'이란 말이 실감난다. '시작이 좋으면 종말이 나쁘며, 반대로 시작은 안 좋았는데 종말이 좋은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나는 나의 친구, 기성환의 뒤를 따라 다닌 것이 '내 인생의 전부였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가난하기에 이리 저리 꼬여서 안될 것만 같은 운명이었는데, 그래도 지금까지 굶지 않고 살아 왔으며, 미국에 와서 마취과 의사도 되었다. 그 뿐인가, 좋은 집도 사고 부족함 없이 잘 살고 있으니, 나는 나를 오뚜기 인생으로 살아 왔다고 불러야 겠다.' 내 인생에서 기성환과 그의 가족들을 빼고 나면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내 친구는 으레히 1등이요, 나는 당연히 2등이었다. 나는 친구를 제치고 1등을 해서도 안되며, 그렇게 할 능력도 없었다. 또한 내 친구, 기성환은 1등을 유지할만큼 인간으로서의 그릇도 컷으며, 실력도 있었기에 비록 그는 나와 동기 동창의 친구지만 나는 존경심을 갖고 그를 대해왔다. 미국에 와서도 그는 당당한 외과 의사로, 나는 그를 보조해 주는 마취과 의사로 살아왔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닥터 기의 뒤를 따라 다니는 것이 편했고,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로부터 금전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많은 혜택을 받아 왔으며, 부탁을 그에게 하였지만 그는 나로부터 아무런 혜택도 받은 적이 없었으며, 단 두 번 내게 부탁한 일이 있었다. -단 두 번, 단 두 번의 부탁을…- * 두 번의 부탁을 하였다고 했는데, 그 첫 번째 것은 나중에 얘기하기로 하고, 두 번째부터 말하고자 한다. 지금부터 6년 전 1995년 가을이었다. 닥터 기와 나는 2시간 여에 걸친 담낭 절제(Gall Bladder-Common Bile Duct) 수술을 한 일이 있었다. 침착하게 수술을 해오던 닥터 기가 그 날은 웬일인지 몹시도 힘들어하며, 손이 떨리고 있음을 어깨 넘어로 바라보던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그는 비지땀을 흘리며,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닥터 기가 무슨 일이 있나? 왜 저렇지?' 나는 궁굼함을 느꼈다. 수술 후 회복실에서 나는 닥터 기에게 물었다. "성환아? 무슨 일 있니?" 나는 별일 없을 거라고 생각을 하면서 물었다. "아니! 아니야!" 그는 대답은 하였지만 힘이 없어 보였다. "그래? 다행이구나! 그런데, 왜 그리도 땀을 흘리니? 내가 너를 안지가 벌써 40년이 넘었는데,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는 것 같구나?" "……" "대답이 없구나? 성환아!" 나는 갑자기 불길한 예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석호야! 너만 알고 있거라. 아무래도 내게 큰 병이 생긴 듯 하구나! 요즘 가끔 소변에 피가 나오며, 왼쪽 옆구리가 꽤 아프구먼!" "혈뇨가? 혈뇨가?" 나는 놀래면서 물었다. 그리고 며칠 후 닥터 기는 내과와 비뇨기과 의사들에게 진찰을 받은 결과 놀랍게도 '악성 신장암'(Malignant Renal Cancer)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 결국 유능한 외과 의사에 의해 닥터 기는 신장 절제 수술을 받았으나 암은 이미 신장 주위의 임파선과 척추에 까지 퍼져 있었고, 항암 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받았지만 그의 병세는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었다. 닥터 기의 아내, 하이디는 물론 그의 부모들도 처참하게 죽어가는 유능한 외과 의사, 아들을 위해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어서 눈물로 그의 운명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아내에 대한 그의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하이디! 하이디! 오래오래 같이 살지 못하고 먼저 가게 되어 미안하구려!" 그는 담담하게 아내에게 말을 했다. 그는 죽음을 서서히 준비하였으며, 아내를 위해 생명보험금과 저택, 주식 등을 말끔히 정리하여 그의 아내에게 주었다. 그리고 친구인 내가 더욱 감격한 것은 천주님께 묵주 반지를 만지며, 기도하던 그의 모습이었다. 〔"천주님, 지난 50년을 이렇게 풍부하게 살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이제 이 세상일을 마감하고 천주님께로 가까히 가오니 받아 주소서."〕 * 꽤나 더웠던 남가주의 여름도 지나가고 제법 선선한 바람을 느끼게 하는 어느 겨울이었다. 비가 올 듯한 구름이 낀 하늘이 어느새 맑게 걷히고 있었다. 오늘따라 병원의 수술 스케쥴이 잡혀 있지 않아 한가하였다. 신장 수술을 받고 불구가 된 나의 친구, 닥터 기가 외과 진료실을 닫고 환자를 보지 못하게 되어 요즘 나에게는 마취 환자가 거의 없어졌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닥터 기가 하는 수술 환자의 마취는 거의 대부분 내가 맡아서 하였기 때문에 나는 환자 걱정을 해 본 일이 없었다. 닥터 기의 뒤를 따라 다니는 나에게는 필연적인 현실이었다. 나는 뉴 포트에 있는 닥터 기의 집으로 차를 몰았다. 남가주의 겨울도 포근하기는 하지만 역시 겨울이기에 어느새 컴컴한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닥터 기 혼자만이 집에 있었다. 그는 아내, 하이디는 잠시 수퍼에 갔다고 전한다. 닥터 기의 얼굴 모습은 너무나도 초췌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척추는 이제 암 세포의 침범으로 인해 하반신을 쓸 수가 없어 보였다. 창 넘어로 내려다 보이는 뉴 포트 항구와 해안에는 어느새 밝은 보안용 형광 등이 켜졌으며, 멀리 바다 저 끝에서 몰려오는 파도가 먹물로 번지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닥터 기를 언제라도 잡어 먹을 듯 하였다. 죽음과 삶이란 마치 빛이 없고 있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죽음이란 역시 두려운 것이었다. 잠시 밖을 내어다 보고 있던 닥터 기는 갑자기 나의 손을 꼭 잡았으나 힘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아직도 외과 의사답게 총총히 빛나고 있었다. "야! 석호야? 부탁하나 더 하자!" "……" 나는 갑자기 황당하였다. 벌써 30여년 전 1968년인지, 1969년 어느 날인지 그가 내게 부탁했던 것이 있었지만 완전히 물거품이 되었다. 물론 그것이 그가 내게 부탁한 첫 번째 부탁이었다. -"석호야! 부탁한다. 너, 내 동생, 성혜 말이야, 어떠냐? 어때? 부탁한다!" "성혜를? 성혜를?" "그래, 그렇다니까!" "……" 나는 대답을 못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가 나에게 처음으로 '성혜를 부탁한다'고 했던 그 부탁은 성혜의 어머니의 강력한 반대로 인해 물거품이 되었었다. 성혜와 결혼을 하여 잘 살아 달라고 하던 부탁이었는데, 그녀의 어머니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니, 나, 강석호의 바보 같은 부끄러움과 피동적인 성격 때문에 나와 결혼을 못하고 그녀는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샌프란시스코에서 유명한 미국인 화가와 살고 있는 셈이다.- * 그리고 30년 후인 오늘. "석호야! 또 한번 부탁한다. 두 번째 부탁을…" "또 한번 성혜를? 성혜는 결혼하여 잘 살고 있지 않아!" 나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말을 흘렸다. "그래! 석호야! 나 아무래도 멀지않아 죽게 되겠지? 그러면 혼자 남게 되는 하이디를 어떻게 해야지? 하이디를…" "……" 나는 난감했다. 하이디란 누구인가? 그의 아내가 아니던가? "석호야! 나 알고 있어. 너 하이디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지난 25년 동안 나는 너를 볼적마다 네가 하이디를 사모하고 있었다는 것을 늘 미안하게 생각해 왔어. 하이디를 부탁한다. 아니, 기회가 되면 하이디와 결혼도 해 다구! 하이디에게는 네가 필요해. 너 지금까지 결혼도 하지 않고 혼자 살았잖아! 어떻냐? 석호! 부탁해. 두 번째 부탁이다." "……" 너무나도 뜻밖의 부탁이었다. 아무리 나와 성환의 관계가 뗄 수 없는 죽마고우의 관계라고는 하나, 죽은 후에 자기의 아내인 하이디와 결혼을 해 달라고 부탁을 하다니, 믿을 수도 없었고, 있을 수도 없는 해괴한 일이었다. 내가 아무리 성환의 뒤를 밟고 다니는 친한 친구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나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지난 25년 동안 나는 하이디를 나의 마음속에 품고 살아 왔었다. 결혼도 하지 않고 기다려 온 것은 바로 하이디와 성혜 때문이었다. "부탁한다. 석호야?" 성환은 내 손을 또 한번 꼭 잡았다. "……" 나는 그의 손을 꼭 잡았으나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못하고 있었다. 잠시 후 성환의 아내가 집으로 돌아 왔다. 그리고 나를 알아보고는 무표정하게 인사를 하였다. 간단한 허깅도 악수도 없었다. 곧장 그녀는 남편인 성환에게 닥아가서 아내로서의 할 도리를 하고 있었다. 나는 인사를 하는둥 마는둥 하고는 아무도 기다려 주지 않는 나의 빈집으로 돌아오면서 많은 생각을 해 보았다. '죽은 후에 자기의 아내를 부탁한다고!' 그렇지만 당사자인 그녀의 표정은 너무나 차갑치 않던가? '강석호? 너 같은 남자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라고 말하고 있는 듯 하였다. 너무나 실망이 되었다. * 정확히 2주일 후, 나의 친구는 죽고 말았다. 병원에 가지 않고 그의 집에서 멀리 뉴 포트의 바닷가로 밀려 오는 큰 파도를 바라다 보며 그는 죽었다. 아프다고 하는 말도 없이 멍청하게 밖을 바라다 보다가 숨이 가빠지는 듯 하더니 이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리고 3일 후, 태평양이 내려다 보이는 라구나 해안 언덕에 있는 포레스트 론 공원 묘지에 묻히었다. 천주교 식의 장례였으며, 생각보다 적은 하객이 모여들었다. 장례를 집례해 준 신부님도 가고 몇몇 친한 친구와 그의 아내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친구들의 시선은 그리 곱지만은 않았다. '백인 아내가 어떻게 할지 궁굼했다. 동양 사람인 남편이 죽었는데도 결혼도 않고 혼자서 살까? 아닐 거야! 남편이 죽었으니 재산을 정리해 가지고 뉴욕으로 가서 옛날 남자 친구를 만나 재혼을 하겠지. 그렇다면 불쌍한 것은 바로 닥터 기야, 닥터 기! 성환이란 말이야!' 그러나 나는 하이디를 믿었다. '결코 그녀는 다른 남자와 재혼 따위는 안 할 것이다. 그녀는 기성환을 진정으로 사랑했으니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들의 결혼 뒤에는 아주 숭고한 사랑이 있었음을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의 친구가 곤경에 빠졌을 때, 그녀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기성환을 택한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 그리고 몇 개월 후, 혹시나 하고 조마조마했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고 말았다. 걱정했던 대로 그녀는 모든 재산을 정리하여 뉴욕으로 이사를 간다고 했을 때, 나는 그녀를 만나 바보 같은 질문을, 아니 사랑의 고백을 했다. 나의 친구가 내게 부탁한 대로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이디! 꼭 뉴욕으로 가야 합니까? 이곳에 살면 안 되겠습니까? 나, 말이요, 하이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러니 가지 마십시오." "……" 그러나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으며, 의아하게 생각하는 듯 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훌쩍 그는 뉴욕주 마운트 버논으로 가 버렸다. 결국 나는 사랑한다고 말은 하였으나 결혼을 하자는 말도 못 꺼내고 닭 쫒던 개처럼 되고 말았다. 그녀의 마음에는 나라고 하는 존재는 전혀 없음을 실감하고 말았다. 많은 친구들이 예상했던 대로 '남편이 죽고나니 기다렸다는 듯이 재산을 정리하여 훌쩍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녀로부터 5년이나 되도록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나의 친구가 내게 두 가지를 부탁했다고 했는데, 첫 번째는 자기의 여동생, 성혜와 결혼을 하라고 했던 것이요, 두 번째는 자기의 아내, 하이디와 결혼을 해 달라고 하는 믿지 못할 부탁이었다. "혹자는 내게 질문을 할지도 모른다. 아니, 닥터 강? 당신 친구인 닥터 기란 사람,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니요? 여동생은 몰라도 자기 아내와 결혼을 해 달라고 부탁을 하다니, 쯧쯧 정신이 나갔구먼!" 라고 말이다. 이것을 알기 쉽게 설명하려면 아무래도 나와 나의 친구, 기성환과의 어린 시절을 얘기해야만 되겠다. * 나는 나의 친구를 대등한 관계의 친구라기보다도 존경하는 친구라고 생각하며 살아 왔다고 했는데, 그것은 나의 인생에서 기성환과 그의 가족이 없었더라면 나는 의사는커녕 벌써 이 세상에서 굶어 죽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나는 기성환의 부모님들로부터 많은 경제적인 도움을 받았기에 지금까지 죽지 않고 살았으며, 의사도 되었다. 나의 가족은 강원도 금화군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는데, 6.25동란이 일어나기 몇 개월 전, 나의 어머니는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설상가상으로 전쟁이 일어나자 남쪽으로 피난을 나와 청량리역 판자촌에 정착을 하여 살고 있던 중 이번에는 1.4후퇴로 인해 아버지마저 평택 근처에서 폭격으로 세상을 떠나 보내야 했다. 결국 나는 나이 17살에 천애 고아가 되어 외삼촌 집에 얹혀서 살았다. 집이라고 해야 청량리역 성당 벽에 붙은 무허가 판잣집이었다. 다닥다닥 붙은 판잣집으로 된 좁은 골목을 조금 빠저 나가면 청량리역 정거장이 나오며, 다시 옆길로 빠지면 전농동 사창가로 연결되는 길이었다. 1952년의 청량리역은 전쟁 와중에 모든 것이 무질서했고, 많은 거지들이 정거장 근처에서 구걸을 했으며, 가끔 칼부림도 대낮에 벌어지곤 하였다. 어쨌든 나의 어린 시절은 가난하였기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서는 누구에게나 구걸을 하여야 했다. 그것이 바로 나의 친구, 기성환이었다. 부유한 기성환의 집안과 알게 된 것을 행운이라고 한다면, 또 다른 친구, 김종일을 알게 된 것은 불행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가난하여 술과 욕설로 살아 왔으므로 나는 그에게 아무런 혜택도 받을 수가 없었다. 김종일을 친구로 알게 된 것은 기성환이보다 2년 먼저였으며, 그와 우리는 판자로 된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아온 이웃이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30대 중반으로 막노동을 하는 노동자였고, 어머니는 인근 정거장 근처에 있는 선술집에서 막일을 하는 가정부였다. 또 그는 배운 것이 없어 늘 욕지거리를 했으며, 술 주정도 심하여 아내를 사정없이 두들겨 패서 옆 집에 사는 우리들에게도 적지 않은 피해가 있었다. 사정은 그러했지만 그래도 같은 피난민이요, 이웃이기 때문에 서로 위로하며, 추운 겨울도 이겨 낼 수가 있었다. 김종일은 나보다 1살이 더 많았으며 우락부락하였다. 성질이 나면 집히는 대로 집어 던지기도 하고, 주먹을 휘둘렀기에 나도 가끔은 그로부터 행패를 당하기도 하였으나 본심은 좋은 친구였다. 김종일에게는 3살이 어린 여동생이 있었는데, 그녀는 코를 질질 흘리기도 하며, 세수를 하지 않아 껌둥이 같았지만 그녀를 옥녀(金玉女)라고 불렀다. 모두 부모가 변변치 못하다 보니 종일이나 그의 여동생인 옥녀, 그리고 나는 들판에 팽개쳐진 들개들과 같았다. 알아서 밥도 먹어야 했으며, 옷은 아예 빨래를 해 본 기억이 없었다. 가엾은 피난민 거지들이었다. * 새싹이 돋고 개나리가 피는 1953년 봄이었다. 판잣집에 사는 피난민들의 아들과 딸들에게도 초등학교에 입학하라는 통지를 받고 종일과 옥녀, 그리고 나는 인근에 있는 청량초등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그리고 나와 종일은 3학년, 옥녀는 1학년이었을 때, 우리들처럼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전쟁중이라고는 하나 아주 윤택하게 잘 사는 사람들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침도 못먹고 터벅터벅 걸어서 학교로 오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자가용 짚차를 타고 오는 학생도 있었다. 기성환이는 그들 중에 한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청량리에서 잘 나가는 의사로 부자이기도 하였지만 인품도 좋은 자선가로 더 알려져 있었다. 그러기에 급한 환자들은 무료로 진료를 해 주기도 하였으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늘 친절하였다. 더욱 더 고마운 것은 나의 외삼촌이 기성환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병원에서 청소하기, 지붕 고치기, 환자 나르기, 장작도 패주는 등, 무엇이든지 열심히 일을 하였기에 2년 후에는 옆집에 있는 한식집에 전세로 들어가 살 수 있게 되었다. 같은 청량리였지만 성당 옆에 있는 판자집과 기성환이 사는 정원이 있는 아름다운 일본식 2층 집과는 너무나 차이가 많았다. 마치 천국의 한 부분과 지옥의 한 부분을 연상케 하였다. 기성환의 집에는 피아노, 자전거, 짚차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김종일의 판잣집에는 마시다 남은 막걸리병과 구역질나는 오물들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그러기에 나는 김종일 보다는 기성환을 더 좋아하였으며, 그를 따랐다. 그래야 나는 먹고 살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 -나의 친구인 기성환은 늘 1등을 하였으며, 능력도 있어 반장의 일을 도맡아 하였을 때, 김종일은 자주 결석을 하는 문제 학생이었다. 내가 병원 진료실에 가던지, 그의 집에 가면 늘 아버지는 나를 반가히 맞아 주었으나, 어머니는 대조적으로 늘 못마땅하게 생각을 하고 계셨다. '왜? 성환의 어머니는 나를 싫어 할까? 나는 어머니가 없는데, 나의 어머니처럼 따뜻하게 대해 주면 안될까!' 나는 여러 차례 그녀를 보면서 운적도 있었다. 가난한 피난민이며, 성환의 집에서 막 일을 하는 나의 외삼촌을 의식해서인지 그녀는 늘 나를 무시하였으며, 노골적으로 싫어하였다. "성환아! 너 석호하고 너무 친하게 지내지 마라! 더구나 종일이라고 하는 애하고는 더욱 안된다. 그녀석들은 판잣촌에서 사는 가난뱅이들이다. 혹시 아니? 도적질이라도 할른지? 그러니 늘 조심해라." 라는 말을 나는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 졌고, 울분이 솟았으나 참아야 했다. "성혜! 너도 말 조심해! 석호를 오빠라고 부르지 말라고! 더구나 종일에게도 말야! 알겠니?" 성혜는 성환의 여동생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종일의 동생 옥녀와 같은 학년이었으며, 같은 나이였다. 성혜는 예뻤어 공주 같았으나 옥녀는 껌둥이처럼 지저분했으며, 코를 질질 흘리고 있었다.- * 죽마고우라고는 하지만 경제적으로 너무나 차이가 나고 보니 한 쪽은 거지처럼 늘 혜택을 받는 편이었고, 또 다른 한 편은 귀찮지만 주어야하는 편이었다. 휴전이 되어 상황은 많이 좋아 졌다고는 하지만 풀 뿌리같은 피난민 가족들은 아직도 굶주려야 했다. * 드디어 중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나의 친구, 기성환은 서울의 명문 A중학에 원서를 내었다. 내신 성적은 늘 1등이요, 부유한 집의 아들이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피난민 출신의 고아인 강석호가 똑같은 명문 A중학에 원서를 낸 사실을 안 친구의 어머니는 흥분하고 있었다. "아니! 석호가 A중학에 원서를 제출했다고? 제 분수를 알아야지! 분수를…" 그 뿐인가, 성환과 나의 이름이 합격자 명단에 나란히 붙어 있음을 알았을 때, 그녀의 흥분은 더 했다고 한다. "뭐라고? 석호도 합격했다고! 거지같은 녀석이!" 그러나 친구의 아버지와 동생, 성혜는 달랐다. "석호 그 놈! 비록 고아이기는 하지만 똑똑하고 겸손한 아이야. 도와주라고! 많이 도와 줘!" "석호 오빠! 축하해요." * 또 다른 친구, 김종일은 점점 삐뚤어 지고 있었다. 양아치 패인지, 아니면 깡패가 되어서 그런지 툭하면 집을 나가고 경찰서에 끌려가곤 했다. 한가지 이상한 사실은 아무리 내가 성환과 성혜의 아버지로부터 등록금과 많은 도움을 받았으나, 그들을 대할 때마다 나는 불편하고 미안함을 느꼈다. 그러기에 나는 같은 나이의 여자라고 해도 잘 나가는 성혜보다 가난한 옥녀를 대하기가 훨씬 더 편했다. 배고픈 옥녀에게 군고구마라도 한 개 가져다 주는 나의 마음이 행복했다. 왜냐하면, 부유한 성혜에게 군고마를 갖다 준다고 한들 그녀가 그것을 좋아할지, 나는 잘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나는 성혜를 좋아했다. 그녀를 좋아 하는 편이 더 유리하였으며, 먹고 살기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 3년 후, 명문 A고등학교에 입학한 것은 내게 있어서는 기적이었다. 중학교 3년 동안 나는 등록금 내기가 힘들었기에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것을 포기하고자 했다. 중학교를 마쳤으니, 이젠 공장에 취직을 하든지, 아니면 큰 회사의 사환으로 취직을 하여 가정 일도 도우며, 돈을 절약하면 몇 년 후에는 그 돈으로 검정 고시를 보아 대학에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외삼촌은 진지하게 나에게 말하였기 때문이었다. A고등학교는 명문이기에 180명은 자동적으로 중학교에서 무시험으로 진학되지만 나머지 120명은 시험을 보아야 했다. 예상대로 나의 친구, 기성환은 무시험으로 진학이 되었으나, 나는 시험을 보아야 했는데, A중학에서 성적이 바닥에서 헤메는 처지였으니까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차라리 2류 고등학교로 진학하여 장학금을 받으려무나!" 라고 성환의 어머니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말을 했다. 어쨌든 그녀는 모든 것이 마땅치 않았는지 나에 대해서는 늘 반대였다. 그러나 뜻밖의 일이 생겼다. "석호야! 내가 도와 주마, 시험을 보거라!" 성환의 아버지가 집으로 들어오시다가 나를 보고 말씀하셨다. 원서를 내던 그 날, 나는 친구를 만나러 그의 집에 갔었다. 사실, 구걸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반드시 A고등학교에 갈 이유는 없었기에 성환을 만나 2류 학교나 아니면 야간 고등학교에 진학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들렸었다. 그런데, 기박사의 말을 듣고는 나는 마치 죽었던 아버지가 다시 살아나서 불쌍한 아들을 위로해 주는 듯 착각을 했다. 그래서 나는 A고등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나는 친구와 같이 A고교에 입학하여 3년 간을 공부하게 되었으며, 기박사는 약속대로 나를 위해 등록금을 지불하여 주셨다. 반대로 또 다른 나의 친구, 종일은 고등학교를 포기하고 어디로인지 사라져 버렸다. 옥녀의 말에 의하면, 그는 깡패들을 따라 나갔다고 하며, 그녀는 한없이 울었다. "그냥 두거라! 나쁜 녀석! 나가 죽든지, 말던지!" 종일의 아버지는 술에 취해 소리를 버럭 쳤다. "어떻게 하지? 석호 오빠?" 옥녀는 나에게 매달리며 말했다. 나의 생활은 힘들었다. 새벽 일찍 일어나 신문을 배달했으며, 방과 후에는 삼촌댁 식당에서 허드레 일을 도와주워야 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서 나는 '대학을 가느냐? 아니면 취직을 하느냐?'하는 많은 고민이 찾아 왔다. '육군사관학교를 가면 전액 장학금에 생활비를 준다고 하여 시험을 볼까'하는 생각을 해 보았으나, 나는 도무지 군인이 될 그런 체질이 아니었다. 늘 남의 뒤나 따라 다니는 피동적인 성격이었으니까. *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나는 또 다시 기로에 서 있었다. 지난 10여년 간 나는 기박사님과 성환으로부터 많은 신세를 지고 살았기에 이젠 더 이상 도와 달라고 하기도 힘들었다. 내가 나를 보아도 한심했다. 부모도 없는 고아를 위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10년이란 세월을 기박사와 성환은 나를 도와 주었다. 그래서 명문 A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대학을 안 간다고해도 서운할 이유는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취직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뜻밖의 제안이 왔다. 성환의 동생, 성혜로부터였다. "석호 오빠? 오빠도 성환 오빠처럼 의과대학에 가 보면 어떨까?" "뭐라고? 성혜? 성환이처럼…" 나로서는 상상도 못할 제안이었다. "석호 오빠? 좋은 의사가 되어야 해. 성질이 조용하고 차분하니까, 잘 할 것 같아요." 그녀는 거듭해서 말했다. 어쨌거나, 나는 나를 밀어 주는 사람, 그것도 다름 아닌 공주처럼 예쁜 성혜라고 생각하니 너무나 기뻤다. 그러나 의과대학은 들어가기도 힘들 뿐만 아니라, 6년 동안에 지출해야 할 학비를 생각하면 앗찔하기에 아예 포기를 하고 말았다. 그런데, 성혜의 격려를 듣고는, '어짜피 못 가는 의과대학이라면 한번 시험이라도 봐 보자.' 결국 나는 원서를 내기로 결심하였다. * 이때 놀란 것은 담임선생이었다. 대학에 가는 것을 단념한 것으로 생각했던 내가 대학에 가겠다고 원서를 들고 왔는데, 그것도 전교에서 1, 2등을 하는 기성환과 같은 수재들이나 지원하는 A대학교 의예과였으니 놀랄만도 했다. "석호! 의과대학 의예과에 가려고?" 담임선생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내가 건내 준 입학원서를 들고 나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이 소식을 들은 성환의 어머니는 마치 석호 같이 보잘 것 없는 학생이 자기 아들의 뒤를 밟고 다니는 것이 불쾌한 듯이 큰 소리로 소리쳤다. "이것 봐, 석호야! 네가 의예과에 간다고? 의과대학은 6년이고, 학비가 많이 든단 말이여! 무슨 수로 등록금을 낼려고 그래?" 그러나 기박사의 대답은 또 달랐다. "아니야! 석호, 그 애는 의사로서는 제격이라고? 성환이와 같이 의사가 되어 좋은 일 같이 해 보라구! 내가 계속 도와주마?" 나는 생각해 보았다. '그렇다. 나는 성환이와 같이 잘 해 낼 거야. 성환을 뒤에서 충실히 도와 줘야 해.' 역시 나는 아직도 성환의 뒷 그늘에 묻힌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난 10여 년간 성환과 학교를 같이 다니면서 보아 온데로 나는 그의 적수가 되지는 못하지만 그와 같이 일을 할 수는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와 성환은 의과대학 시험에 응시하였으며, 놀랍게도 우리 둘은 나란히 합격을 하였다. 담임선생은 물론, 성환의 어머니, 나의 외삼촌까지도 놀라고 말았다. 가장 감격한 사람은 나를 한결같이 밀어 주었던 성혜와 옥녀였다. -성혜와 옥녀, 분명히 둘은 같은 나이의 귀여운 아가씨들이었으나, 단지 다른 것은 돈 있는 아버지와 돈 없는 아버지를 가진 것 뿐 이었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는 모두 다 소중한 여동생들로 내 가슴에서 애정의 싻이 트고 있는 아가씨들이었다.- 갑자기 비행기가 흔들리고 있다. 옆에 앉아 있는 하이디는 계속 나의 손을 꼭 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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