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내가 사랑한 몬골의 여인들 파트 2

2012.01.25 13:15

연규호 조회 수:643 추천:28

갑자기 비행기가 흔들리고 있다. 옆에 앉아 있는 하이디는 계속 나의 손을 꼭 잡고 잠을 자고 있었다. 그리고 여 승무원의 안내 방송에 문득 고비사막을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과거의 꿈에서 깨어나야만 했다. 두 가지 약속을 말하고자 했었는데, 엉뚱하게도 나의 못난 과거를 잠시 들려 준 셈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나에게는 잊혀지지 않는 여인들이 하이디 말고 또 있다는 말이었다. 성혜와 옥녀라는 여인들 말고, 그렇다면 나는 정말로 바보 같은 남자였나? 세 명의 여자 중에 정작 하나도 차지하지 못하고 혼자 살고 있는 지지리도 여자 복이 없는 마취과 의사란 말인가! "고비사막에는 심한 바람이 불어 비행기가 흔들리니, 안전벨트를 매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여 승무원이 거듭거듭 말하고 있었다. '얼마 후면 우리는 몽골에 도착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몽골 여인들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나는 혼자 생각해 보며, 옆에 앉아 있는 하이디와의 앞날을 생각해 보았다. 세 명의 여인 중에 가장 아름다운 하이디와 다시 만나 애인으로 지내게 되었으며, 때가 되면 결혼도 하여 가정을 갖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감개무량하였다. 내 나이가 몇인데? 56살이면 손자, 손녀를 보는 나이가 아니던가? * 나는 분명히 하이디를 사랑하고 있다. 내가 하이디를 처음 만나게 된 것은 1973년 가을이었다. 한국에서 육군 군의관 복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꿈에도 그리던 미국 땅을 밟은 것은 꽤나 더운 1973년 7월 7일이었다. 독립기념일이 지나고 난 뉴욕 주 마운트 버논은 무더웠다. 예정일보다 1주일 늦게 도착한 나에게 맡겨진 병원의 인턴 일은 혹독한 야간 당직으로부터 시작이 되었다. 마운트 버논은 뉴욕 시 브롱스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서쪽으로 허드슨 강이 흘러가고 있는 고급 주택지로서 뉴욕 시와는 달리 백인들이 많이 사는 곳이었다. 마운트 버논 병원도 그러했다. 생각보다는 백인들이 대부분이었으며, 흑인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기에 어쩌다 만난 나의 친구 의사들이 근무하는 뉴욕 시의 병원과는 너무나 달랐다. 흑인들이 우굴거리고 총상, 자동차 사고, 마약 환자들로 득실거리는 브롱스 브르클린의 병원에 비교하면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나의 인생은 늘 나의 친구, 기성환의 뒤를 밟는다고 하였듯이 내가 이곳으로 오게 된 것도 바로 성환의 힘이었다. 그의 혜택을 또 다시 본 것이다. * 1969년 2월, 나와 성환은 A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 히포크라테스의 선언을 읽으면서 우리는 똑같은 졸업장을 받으며 의사가 되었으나, 사실을 보면 같은 의사라고 해도 나와 성환은 너무나 차이가 났다. 성환은 탄탄히 다져진 알찬 의사였으나, 나는 그렇지가 않았다. 내가 의과대학을 졸업한 것은 너무나 기적이었으니까. 겨우 겨우 등록금 마련하고 가정교사와 변두리 학원 강사를 하여 외삼촌을 도왔으니 제대로 공부도 못한 보통의 의사였다. 졸업 후, 대학 병원에서 인턴을 하는 친구들이 반 이상이었으며, 나머지는 미국에 가서 인턴을 하고자 우선 공군과 해군에 지원하였다. 그리고 남는 다른 친구들은 무조건 육군 군의관으로 입대를 하는 것이 의사들의 길이였다. 특별히 놀라운 것은 더 우수한 몇 명의 친구들이 대학 병원을 마다하고 작은 사립 병원에서 인턴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3월 말, 육군 군의학교로 입소하기 전 나는 나의 친구를 만나 청량리 맥주집에서 이별주를 마신 일이 있었다. 그리고 대구로 가서 훈련을 받고 서울로 다시 와 그를 만나 이번에는 대학병원 근처에 있는 맥주집에서 술을 마셨다. 6월 초였다. 졸업 3개월 후의 동창들의 진로는 완연히 달라졌다. 대학 병원에 남은 친구들은 정말 의사처럼 학구적이요, 진지했으나 군의관이 된 또 다른 무리들은 '군대 마치고 나면 미국으로 가서 인턴을 한다. 그것도 미국!'이라고 하는 미래를 생각하며, 그간에 배운 알량한 지식을 모두 잊고, 얼굴은 검은 색으로 변해 있었다. 언제부터 그토록 사나이로 태어났었는지, 마치 애국자나 된 듯이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너와 나, 나라 지키는 용맹의 사나이다'라고 소리를 치며, 마음껏 맥주를 들이켰다. 그리고 며칠 후, '대한민국 육군 군위관 중위, 강석호'는 가장 근무하기 힘들다고 하는 강원도 원통 골로 가게 되었다. 원통 골로 가기 이틀 전, 나는 기성환의 집으로 인사를 하고자 찾아갔다. 지난 16년 간 나를 아버지처럼 돌보아 주셨던 기박사님과 비록 나를 진심으로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나를 돌보아 준 성환의 어머니에게 인사를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보다 더 절실했던 것은 성혜를 만나서 청혼을 할 마음과 부모들의 마음을 알아 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두 가지 모두가 뜻밖의 일로 끝나고 말았다. "성환이는 다음 주에 뉴욕으로 가서 인턴을 하게 되었다네." '아니? 군 복무도 안하고?' 나는 속으로 울부짖고 싶었다. "응- 성환이는 몸이 조금 약해서 병역 면제를 받았지. 어쨌든 뉴욕으로 간다는구나! 마운트 버논 병원이라고 하던가?" "……" 나는 속으로 울면서 인정을 하였다. '그래, 그래. 한국은 모든 것이 이런 식으로 돈과 빽만 있으면 불가능한 것도 가능하게 될 수 있는 나라야! 그런데, 내가 왜? 울분을 토하고 있지. 성환에게 얼마나 많은 신세를 젓는데, 축하는 못해 줄망정… 잘 되었구나!' 기성환은 빽을 써서 군대를 면제받고 미국으로 직접 가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나같은 놈은 강원도 원통 골로 가는 신세였다. 아니, 대한민국의 남아로서는 당연히 해야 할 의무였으니 억울할 것도 없다. 그리고 또 하나의 충격이 있었다. "석호야? 성혜도 미술대학을 졸업했으니, 곧 멀리 뉴욕으로 미술 공부하러 간단다. 아마 가기 전에 약혼도 하게 될 거야. 너도 한번 보았을 게다. K건설회사 사장의 아들, 미스터 리 말이야!" 성혜의 어머니가 내게 큰 소리로 말을 해 주웠다. 마치 너 같은 거지 출신의 의사는 나의 딸을 쳐다도 보지 말라고 하는 듯 했다. "……" 나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성환의 집을 나서야만 했다. 그리고 나는 외삼촌 댁으로 패잔병과도 같이 터덜터덜 걸어서 갔다. 나는 그래도 의과대학을 졸업하면 의사로서 인정을 받고 성혜와 결혼이라도 할 줄로 믿었다. 더구나 군의관 훈련도 마쳤으니 이젠 결혼을 허락해 주리라고 은근히 생각을 하고 갔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다른 남자와 곧 결혼도 하고 뉴욕으로 가서 미술 공부를 한다고 하니, 너무나 허무했다. 마치 그녀는 나에게 있어서 선녀와 같았는데, 그런 그 선녀 같은 공주가 멀리 미국으로 유학을 간다고 한다. -성혜는 동화에 나오는 그 선녀! 그래 바로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을 하고 있던 세 명의 선녀 중에 하나였다. 나는 선녀의 옷을 감춘 그 나무꾼이라고 생각하며 살아 왔었다. 그리고 성혜의 아버지는 바로 하늘에 있는 옥황상제였다. 나는 성혜의 날개를 훔쳐 놓았다고 철석같이 믿고, 그녀는 으례히 나와 결혼을 해 줄 것으로 생각하고 살아 왔었다. 비록 고아로 가난은 했지만 옥황상제가 나를 그동안 뒤에서 돌보아 주었으니까. 그러나 막상 대학을 졸업한 성혜는 비록 마음은 나에게 있었지만 나를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간다고! 역시 집안과 돈이 중요했나 보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문제는 바로 성혜의 어머니였다. 너무나 강력하게 딸을 밀어 붙이니 그녀도 어쩔 수가 없었다. 내가 감춰 두었던 선녀의 옷도 아무런 효력이 없었다.- * 언젠가 성환이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석호야! 너 내 동생, 성혜를 어떻게 생각하니? 웬만하면 너 그 애를 마음에 두거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의 친구, 성환이도 나에게 동생을 부탁하였다. 그런데, 그녀가 강석호가 아닌 다른 남자와 결혼도 하고 뉴욕으로 간다고! * 터덜터덜 집으로 오면서 문득 생각이 난 것은 그동안 잊고 살아 왔던 가난했던 옥녀였다. 옥녀! 그녀는 그동안 많이 달라져 있었다. 옥녀는 대학에도 못가고 청량리 역 주변을 빙빙 돌며 장사를 했으며, 한때는 다방에서, 또 요정에서 종업원으로 일했다고 했다. "오빠! 나 버린 몸이여! 버린 몸?" -그녀가 내게 언젠가 내 뱉은 말이였다. 그때가 바로 내가 의과대학에 합격했던 때였다. 2년 후, 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술대학에 입학을 한 성혜의 모습은 너무나도 우아했으나, 반대로 대학에 못간 옥녀의 모습은 너무나 초라했다. 결국 가난한 강석호는 부유한 성혜를 택하게 된 것이다. 가난하고 초라한 옥녀보다는 역시 돈도 있고, 좋은 학교에 입학한 성혜가 더 필요했으며, 내가 성공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을 하였다. '그렇다면 옥녀가 말하는 버린 몸이란 무엇인가?' 나는 그때 그 말의 참 의미를 몰랐으며, 단지 그녀는 대학에도 못가고 돈벌러 다녀야 하는 공순이가 된 것에 대한 화풀이의 말로 생각했다. 그런데, 문득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그녀가 말하는 버린 몸이라고 하는 것은 혹시라도, '비 오던 어느 날, 그녀가 내게 바친 첫 순정에 대한 후회의 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리고 6년이 지나 의사가 되었지만 나는 선녀와 같은 예쁜 성혜를 갖지 못하고 군발이가 되어 패잔병처럼 강원도 원통 골로 힘없이 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내 나이 24살이고, 옥녀는 21살이었다. 꽃같은 나이였다. 물론 그녀는 고생으로 시들어 있었다. 그리고 학벌도 변변치 않고 가난한 옥녀 따위는 나의 안중에도 없었다. 나의 아내가 될 수가 없었다. 부잣집에서 태어나 미술 대학을 졸업한 성혜만이 바로 나의 아내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 마침 옥녀는 집에 있었다. 이제 그녀의 집은 판자집이 아니었다. 그들도 노력하여 홍능으로 가는 길 가에 있는 깨끗한 한식집을 사서 어엿하게 살고 있었다. "옥녀야, 나 강원도 원통 골로 간다. 잘 있어!"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이별을 했다. "잘 가 석호 오빠!" 하면서 그녀는 갑자기 울었다. 마치 내가 죽으러 가는 줄로 착각을 한 듯 하였다. "그래, 옥녀야!" 나는 그녀의 손을 놓으면서 몹시도 따뜻한 느낌을 받았다. 성혜의 손을 잡는 것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었다. 문득 6년 전, 비가 오던 어느 여름, 퀘퀘한 곰팡이 냄새가 나는 옥녀의 판잣집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포옹을 하였으며, 남녀의 첫 경험을 하였던 그때 그 일들이 생생하게 머리에 떠 올랐다. 나는 그녀를 다시 덥썩 끌어 안았다. "옥녀야! 잘 있어. 다녀올게!" 그리고 그녀의 손을 놓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녀는 뜻밖이었다. "석호 오빠? 조금만 더." 라고 말하며, 그녀는 떨어지지를 않았다. "……" "석호 오빠? 나 오빠를 사랑해. 그러나 오빠는 나 같은 것 하고는 격이 안 맞을 거야! 이제 이렇게 놓아 줄테니 성혜를 만나 결혼해. 돈도 있고, 얼굴도 예쁘고, 좋은 학교도 나왔으니…" "……" 나는 말을 잊지 못하고 말았다. 그리고 군의관 중위, 강석호는 강원도 원통 골로 갔다. 원통 골에 있는 동안 나의 사랑하는 성혜는 미스터 리와 결혼을 해서 화가가 되고자 미국으로 유학을, 역시 나의 친한 친구도 군대를 면제 받고는 미국으로 가서 인턴을 시작했다. 결국 돈 없고, 빽도 없는 나는 첩첩 산중에서 북녘을 향해 총을 들고 국토 방위에 전념을 하여야 했다. 또 듣기 싫은 이북 선전 방송을 들어야만 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장군 덕분에 우리는 낙원에서 산다'라고 하는 억지 같은 선전이었다. 역겨웠다. '낙원? 좋아하네! 낙원이 어딘데. 야 이놈들아! 나는 3년 간 군대 복무하고 나면 미국으로 간단 말이야. 미국이 진짜 낙원'이다. 나는 하늘을 향해 큰 소리쳤다. * 그리고 3년 후에 나는 경기도 의정부에서 제대를 하였다. 나는 부랴부랴 인턴 자리를 구하기 위해 미국의 병원을 수소문하던 중 나의 친구 알선으로 운좋게 하늘의 별 따기보다 힘든 미국 병원 인턴 자리를 뉴욕 주 마운트 버논에서 구하여 제대를 하자마자 미국으로 떠났다. 역시 나는 나의 친구, 성환의 뒤를 밟고 다니는 의사였으며, 이번에도 그의 신세를 진 셈이었다. 내가 한국을 떠나던 날, 나는 어렵게 살아왔던 나의 과거와 빈부의 차이에서 오는 사회적인 부조리를 모두 잊어 버리고 떠나왔다. '부조리와 경멸로 가득찬 한국을 다시는 처다 보지 않으리라. 한국이란 나라는 내 마음에서, 이제는 더 이상 없노라.' 라고 다짐하였다. 그래도 한 가지 잊지 못하고 온 것은 나를 길러 준 외삼촌과 나를 여러 모로 도와 준 기박사 부부였다. 그리고 비행기를 타고 건너 오면서, '아- 내가 왜 바보처럼 이 사람들을 잊었던가!'하고 한탄을 한 것은 바로 나와 같이 이웃으로 살아왔던 가난하고 못 배웠던 종일과, 술과 싸움으로 살아 온 종일의 부모와 짙은 화장을 하고 술집으로, 양품점으로 돈 벌러 다니던 무식한 옥녀였다. -비오던 어느 여름, 곰팡이 냄새가 나는 옥녀네 집에서 그녀를 꼭 껴안아 주던 그 날, 우리는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았던 그 일도 스스로 했었다. 그러기에 옥녀는 나의 처음 여자였지만 미국으로 오던 날 모든 것을 잊기로 했다. 내 마음에서 옥녀는 더 이상 없노라!- 라고. * 미국에 도착하던 그 날, 나는 내게 펼쳐질 희망차고 아름다운 미국 생활을 꿈꾸면서 첫 발을 내렸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뉴욕 주 마운트 버논에는 천둥 번개가 치고 있었으며, 뉴욕 국제 공항(케네디)에 내린 나에게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다. 너무도 외로웠고, 무서웠다. 흑인의 얼굴에 유난히 빛나던 하얀 이빨이 더욱 나를 무섭게 하였다. 그리고 버려진 나, 강석호의 얼굴에 몰아치는 여름날의 비가 나를 겁나게 만들고 있었다. * 〔그랬었다. 내가 처음 미국에 도착했던 30년 전 밤에도 비가 왔었다. 사정없는 외국의 폭우가 무서워 젊은 상심이 오금도 펴지 못하고 어두운 진창 속에 던져 버려졌었다. 그렇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당신을 포기하던 첫 날 밤에도 나는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술을 마셨다. 시인, 마종기〕 * 과연 미국은 다른 나라였다. 한국과는 판이하게 다른 천국과도 같이 아름답게 짜여진 나라, 청량리 역에서 살다 온 나에게 비친 미국은 온통 아름답고 부유한 그런 나라였다. 마운트 버논은 뉴욕 주의 한 전원 도시답게 모든 것이 아름다웠으며 편리하였지만 그러나 없는 자에게는 오히려 한국보다 더 불편한 나라였다. 한국에서는 버스를 타던지 아니면 걸어서라도 갈 수가 있었으나, 미국은 어디를 가든지 자동차가 있어야 했으며, 시계 바늘에 맞춰 행동을 하지 않으면 낙오자가 되게 마련이었다. 그리고 믿고 갔던 나의 친구는 외과 레지덴트(수련 의사) 3년 차가 되어 뉴욕 시에 있는 마운트 시나이(Mount Sinai) 병원으로 3개월 간 파견으로 나가 있어 주말에나 잠시 만날 수가 있었고, 모든 것을 '자기가 알아서 스스로 하여야 하는 곳이 미국'이기에 그에게 마냥 기댈 수도 없었다. 인턴과 레지던트 3년 차란 하늘과 땅 만큼이나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보낸 군대 3년이 마치 겨울잠을 자고 깨어난 곰과 같다고나 할까! 군발이 3년 마치는 동안에 그는 이미 인턴, 외과 수련의 1, 2년 차를 무사히 마치고 3년 차가 되었다. 더구나 외과 레지던트를 구한다는 것은 그 당시로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설령 구한다고 해도 1년 차에서 2년 차로, 3년 차로, 마침내 4년 차에 올라가려면 치열한 경쟁을 하여 성공을 하든지 아니면 무참하게 탈락하여 다른 과를 택해야만 했다. 코피 나는 공부와 일벌레 같이 병원 일만 하여야 했다. 역시, 나의 친구는 능력도 있었으며, 유능하였기에 미국 와서도 인턴, 외과 1, 2년 차를 마치고 당당하게 3년 차에 올라가 있었으니, 갇 이민 온 나로서는 '와! 와!'하는 탄성만 나올 뿐이었다. '나는 무엇을 한담?' 나는 도저히 경쟁이 심한 외과나 내과 같은 전문 과목을 할 인물은 아니었다. 경쟁적이지 못하며, 내성적이어서 수줍어하는 타입의 인간이었으니, 경쟁이 없는 전문과정이라고 하면, 마취과, 물리재활과, 정신과가 고작이었다. "그래, 그래, 마취과를 택하자. 경쟁도 없어 전문의가 되기 수월하며, 외과 의사인 성환을 도와주며 같이 사는 거야!" 어이없게도 나는 나의 진로를 역시 성환의 옆에서 보조하는 역을 맞기로 했다. "인턴을 마치고 나면 전문과목으로 마취과를 하려고 하네!" 라고 내가 성환에게 말했을 때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마취과? 그것 쉽지 않아! 온통 스트레스뿐이라고! 하긴 의사치고 스트레스 없는 과가 어디 있겠나! 다 스트레스야. 스트레스!" 그의 말이 맞았다. 미국이나 한국의 의사들은 온통 스트레스에서 살고 있다고 봐야했다. 더욱이 미국의 경우에는 더 심하였다. 툭하면 고소였다. 결국 돈이란 말이었다. 뉴욕 주 마운트 버논의 병원은 깨끗하고 좋았지만 이곳에서 근무하는 간호사들은 더 예뻤으며 친절하였다. 가끔 친구들로부터 듣는 뉴욕에 있는 병원의 불친절한 간호사들과는 너무나 달랐기에 나는 혹시 내가 미국에 잘못 왔나하고 착각을 하고 있었다. * 영어도 서투르고 미국을 잘 모르는 나를 가끔 도와준 백인 간호사가 있었다. '뉴욕 양키 야구팀'을 좋아한다고 하는 5피트 7인치에 140파운드가 되는 얼굴이 희면서도 약간의 동양적인 얼굴을 한 간호사였다. 때로는, '한국에서 왔느냐?' '세울(Seoul)에서 살았느냐?'라고 묻기도 하였다. 그녀의 이름은 하이디라고 했다. 마운트 버논에서 나고 자랐으며, 이곳에서 직장을 갖고 있다가 이곳에서 죽을 거라고 했다. 하이디에 대한 나의 마음은 외롭고 피곤하기에 그랬는지는 몰라도 날이 갈수록 더 간절해 갔다. 그녀를 한 순간이라도 보지 않으면 보고 싶어 일부러 그녀가 있는 병동에 찾아가곤 하였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나를 좋아한다고 단정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오산이었다. 내가 미국 사람들을 잘 몰라서 생긴 일이었다. 그녀가 내게 친절한 것은 단지 미국 사람들 특유의 습관적인 친절일 뿐이었다. 그녀는 자존심도 컷으며, 동양 사람들에 대해 생각보다 인종 차별에 대한 말도 가끔 하였다. "한국이란 나라? 가난한 나라 아니요, 6.25를 겪어 고아도 많고, 더욱이 몽골의 후손이라고 하던데, 몽골이라고 하면 우리 유럽 사람들에게는 야만인이라고 불립니다. 야만인 아틸라(Barbarian Attilah)를 아시나요?" "……" 그렇다. 아틸라란 몽골 족속의 대표적인 야만인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우리같은 동양 사람들, 특히 한국 사람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는 그저 그런 백인 여자였다. 그렇지만 나의 가슴속에는 하이디를 사모하는 마음이 싹트고 있었다. 그녀의 웃음 짖는 모습이 밤마다 꿈속에서 아른아른 거리며, 그녀를 나는 짝사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련하게도 나는 미국에서는 하이디를 짝사랑하고, 한국에서는 기성혜를 짝사랑했다는 꼴이 되는 셈이다. * 내가 그토록 짝사랑하던 하이디를 개인적으로 만나게 된 것은 너무나도 뜻밖의 장소에서였다. 하필이면 이렇게 만나야 했는지 나 자신도 어처구니가 없었으며, 모든 기대가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1973년 늦가을, 미국 최대의 명절인 추수감사절의 휴가로 한창 바쁠 때, 고향을 떠나온 나에게는 유달리도 외롭고 서글픈 때였다. 뉴욕 시에 있는 마운트 시나이 병원에서 3개월간의 외과 실습을 마치고 마운트 버논의 병원으로 되돌아 온 나의 친구가 나를 위하여 그의 아파트에서 마련한 조촐한 파티에서였다. 눈 빠지게 바쁜 외과 레지던트를 하느라고 가끔 샌드위치나 먹으며 몇 마디 이야기는 하였지만 긴 시간동안 이야기 할 기회가 없었다. 뉴욕의 병원 아파트란 다 알다시피 바퀴 벌레가 우굴거리며, 지저분하기에 성환은 병원 근처에 있는 개인 아파트에 입주하여 살고 있었다. 나의 생활은 외로웠다. 비록 한국이라고 하는 부조리한 나라를 완전히 잊고 꿈의 나라 미국에서 마음껏 공부하여 전문의사가 되겠다고 마음은 먹었으나, 밝은 보름달을 바라다 보면서 나는 끝내 울고 말았다. 너무나 둥근 보름달이 나의 가슴속으로 들어오고 있는 듯 하였다. 한국이라는 나라를 나는 완전히 잊어버리겠다고, 죽어도 다시는 생각하지 않겠다고 맹세를 하였는데, 웬 일일까? '보고 싶은 얼굴들이 하나하나 떠오르고 있었다.' 나를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여 미국으로 왔다는 성혜의 얼굴, 청량리 역 어느 술집에서 남성들과 어울려 억지로 웃고 있을 옥녀의 얼굴, 오늘도 호탕하게 남을 도와주며 웃고 있을 기박사의 얼굴, 나를 욕하면서 찡그리고 있을 성혜 어머니의 얼굴들이었다. -한국을 떠나오기 얼마 전에 내게 모욕적인 행동을 했던 성환의 어머니 얼굴이 더더욱 그러했다. 성환의 어머니는 어려서부터 왜 그런지 나를 좋아하지 않고 구박을 하였는데, 지난 몇 년 간은 더 했다. 갑자기 떠 오르는 말이 있었다. "여보, 당신! 석호는 안 돼요, 안 돼! 생각해 보세요. 고아로 자라 가족도 없고, 돈도 없는 가난뱅이라고요. 어쩌다 우리 덕분에 의사가 되기는 했지만 그 녀석에게 성혜를 시집 보냈다가는 그애 굶어 죽는다고요!"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된 후, 내 딴에는 당당한 태도로 성혜네 집에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며, '저, 성혜를 사랑합니다'라고 고백을 했을 때, 성혜의 어머니가 남편을 향해 큰 소리로 소리를 친 말이었다.- 그때 나는 마치 패잔병이나 된 듯한 심정이었다. 한없이 서글펐기에 나는 밖에 나가 한동안 울다가 집으로 들어갔던 기억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것이 벌써 5년이나 되었다. 그러기에 오늘 나는 성환의 아파트에 가서 그와 같이 술 한 잔을 마시면서 '한 많던 그 회포'를 풀고 싶었다. 그러나 상황은 달랐다. 성환의 아파트에서 나는 뜻밖에도 가슴 속에 애타게 그리워 하던 하이디를 만나게 되었다. "와! 하이디? 어떻게 여기에…"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하이디는 그곳에 먼저 와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더욱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나의 친구와 하이디는 서로 데이트를 하고 있는 연인'의 사이라는 사실을 뒤 늦게 알게 된 후였다. 비교적 냉정하리만큼 사리를 구분하던 나도 하이디가 나의 친구의 팔에 매달려 있는 모습과 아주 행복한 듯이 웃는 모습을 보면서, '아차! 그랬었구나!'라고 소스라쳐 놀랐다. "닥터 강! 여기 하이디 리스츠와 인사를 하게!" 라고 성환이가 내게 말했다. "하이, 닥터 강! 내과 병동에서 일하는 간호사 하이디입니다." 그녀는 능청스럽게 말하였다. '너무나 놀라웠다. 나의 친한 친구가 이처럼 나를 깜쪽 같이 속였단 말인가?' 물론 그렇다고 해도 내가 감히 나의 친구의 애인을 넘볼 수가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하였다. 아니 그렇게 할 수가 없을만큼 나는 성환의 뒤를 밟고 다니는 인생이었으니까! 결국 나는 하이디를 단념하고 말았다. * 그래도 이날의 만남에서 한가지 수확은 있었다. 나는 모든 면에서 성환에게 뒤 떨어지지만 단 한가지 분야에서는 그래도 우수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역사와 지리에 관한 지식이었다. 그날, 나와 하이디간에 있었던 한가지 대화가 아직도 기억에 떠 오르고 있었다. "하이디 마리아 리스츠라고 하면, 혹시 그 유명한 작곡가 후란즈 리스츠의 후손입니까? 하이디씨?" 나는 새삼스럽게 그녀에게 물었다. "어머나! 리스츠를 기억하세요? 후란즈 리스츠라고요?" "그렇습니다. 아참! 닥터 기는 유명한 피아니스트입니다. 그에게 한번 부탁해 보십시오. 리스츠의 소나타 B단조나, 항가리 환상곡에 나오는 피아노곡을 말입니다." 나는 나의 친구를 수준 높은 피아니스트임을 말해 주었다. "예? 닥터 기가 피아노를 친다고요? 내게 그런 얘기를 한적이 없었는데요." 그녀는 신통한 듯이 닥터 기를 쳐다보았다. 그것은 당연했다. 내가 아는 나의 친구, 닥터 기는 겸손하면서도 자신이 있는 남자였기에 함부로 자기를 높이는 말을 하지 않았으리라. 그리고 그는 피아노를 훌륭하게 연주할 수 있다는 것을 그녀에게 자랑을 하지 않았단 것이다. 그가 사는 아파트에는 피아노 따위의 음악 기구는 없었고, 외과 수련의사를 바쁘게 하다보니 피아노가 옆에 있어도 쳐 볼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후일, 닥터 기의 피아노 연주를 듣기로 하고 그녀는 나와 대화를 나누었다. 유명한 작곡가 후란즈 리스츠가 그녀의 4대 할아버지에 해당되며, 리스츠의 가문임을 몹시도 자랑스럽게 생각을 하고 있었다. 리스츠의 고향인 레이딩(Raiding)과 항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 푸른 다뉴브 강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을 해 주는 것으로 보아 그녀는 분명히 헝가리에서 온 이민자 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리스츠의 후손이라고 생각했다. "당신은 항가리에서 온 이민자로군요?" 나는 다 아는 말을 되 묻고 있었다. "그렇소. 나는 항가리에서, 닥터 강은 한국에서, 한국 사람은 몽골에서 유래했다고 하지요?" 그녀는 나를 경멸하는 듯이 말했다. "그래요, 하이디씨!" 그리고 우리는 닥터 기가 준비한 음료수와 피자를 같이 먹었다. "내가 알기로는 몽골 사람들은 유럽에 와서 아주 야만적인 행동을 했답니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몽골 사람하면 야만인이요, 야만인 하면 아틸라라고 부른답니다." 하이디는 유럽에서 온 백인 여성답게 설명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너무도 얕보는 듯한 말을 하고 있기에 약간 화가나서 하이디에게 한마디 해 주고 말았다. "하이디씨? 내가 알기로는 엉덩이에 있는 파란 반점을 우리는 '몽골 사람들의 반점'(Mongolian spot)이라고 부르지요. 또 항가리, 핀랜드, 에스토니아 사람들도 알고 보면 몽골 사람에 속하지요. 하이디! 당신도 항가리 사람이라고 하면 분명히 엉덩이에 큰 반점이 있을 것이요, 몽골인의 파란 반점 말이요? 파란 반점!" "예? 항가리 사람들의 파란 반점이라고요? 몽골리안 스포트?" 하이디는 어이없다는 듯이 되 물었다. * 그렇다. 아무리 하이디가 리스츠의 후손이라고 자랑스러워 하지만 그녀는 항가리 사람이기에 그의 혈관 속에는 그들이 저주하는 야만인이라고 얕잡아 보던 몽골인의 피가 섞여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유럽은 6-7세기가 될 때까지 나라다운 나라가 없었다. 단지 지중해를 중심으로한 로마 제국만이 있었다. 예수님이 태어난 해인 A.D. 1년의 세계 지도를 살펴 보면, 에집트, 메소포타미아, 유태, 그리스, 로마가 유럽과 서 아시아에 있을 뿐이었다. 물론 동양에는 한나라, 한국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있었다. 그러나 일본에는 나라다운 나라가 없었다. 중국 사람들이 걱정하여 쌓아 놓은 만리장성 북쪽에는 동호와 선우라고 불리던 몽골족이 살았다. 그런데, 이 몽골족은 역사적으로 보면 한국 민족과 언어의 근원도 같은 알타이족으로 큰 의미가 있는 민족이었다. 중국의 한족은 몽골족으로 인해 주기적으로 많은 핍박을 받았다. -A.D. 4세기 경이었다. 소위 오랑캐라고 불리던 몽골족들이 서쪽으로 진출하여 다뉴브 강까지 이르렀다. 지금의 항가리가 있는 곳이었다.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야만인 대장, 아틸라가 이끄는 몽골군은 파죽지세로 전 유럽을 휩쓸었으며, 그 일부는 로마로 침공하여 서 로마를 멸망시키었다. 몽골족이 얼마나 잔인하게 침공을 하였는지 가는 곳마다 약탈과 살육을 하였으며, 그들은 죽은 자의 귀를 짤라 그것으로 전공을 측정하였다고 했다. 역사 학자들은 훈족의 유럽 침공이라고 표현하였다. 야만인 대장, 아틸라가 죽은 후 몽골군은 중앙아시아로 퇴각을 하였지만 일부의 몽골 사람들은 그곳에 남아 원주민, 고트족(지금의 동 유럽인들)과 같이 살았다. 그리고 7세기 경, 이들은 유럽으로 이주하여 지금의 항가리를 건국하였다. 그들을 마잘족이라고 부른다. 이와 유사한 민족이 필랜드와 에스토니아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이들에게는 몽골 사람들의 특징인 반점이 엉덩이에 있다는 것이다. 리스츠에게도 반점이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모름지기 그에게도 반점이 있었으리라. 훈족(몽골)의 왕, 아틸라에게 혼난 유럽 사람들은 지금도 '야만인 아틸라'라고 부르며, 몽골 사람들을 경멸하지만 신기하게도 몽골 사람들은 몇 백년에 한번씩 온 세계를 뒤 흔들어 놓은 특이한 민족이었다.- * 리스츠의 후손이라고 뽐내던 하이디는 나의 설명을 듣고는 조용히 고개만 끄떡였다. 그리고 우리는 헤어졌다. "하이디? 당신은 마잘족의 몽골인이요, 나는 한국의 몽골족이니 같은 피를 갖고 있습니다." 나의 친구는 헤어질 때, 그의 애인, 하이디에게 큰 소리로 말하였다. "그래요. 당신과 나는 같은 민족입니다. 사랑해요." 그녀는 애인, 닥터 기에게 웃으면서 내 앞에서 키스를 해 주웠다. '와!' 나는 한숨을 쉬고 말았다. 그리고 우리는 또다시 바쁜 인턴과 레지던트의 일에 열중하여야 했으며, 하이디를 향한 나의 사랑은 일단 포기하여야 했다. 감히 내가 친구의 애인을 사모해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친구의 애인을 사랑하였다가 일시에 포기한다고 해서 나의 가슴에 새겨진 좋은 감정이 말끔하게 씻어 질 수는 없었다. 몽골족과 항가리족의 관계를 말 해 주고 난 후부터 그녀는 눈에 띄게 나에게 친근함을 보여 주었다. 나는 혹시라도 그녀가 나의 친구를 포기하고 나를 좋아하지나 않을까 하여 마음을 조였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1974년 인턴의 과정이 거의 끝날 무렵, 나는 하이디를 또다시 나의 친구의 아파트에서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는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 것을 모르는지 전혀 어색한 눈치를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성환은 약속대로 아파트 휴게실에 있는 피아노를 이용하여 리스츠의 B 단조의 일부를 연주하였다. 그동안 피아노를 치지 않았기 때문에 악보를 보고 연주를 하였지만 나와 하이디에게는 너무나 감동을 주는 연주였다. '설마, 한국 사람 주제에 무슨 피아노를?'이라고 생각했던 그녀의 불신감을 말끔히 씻어 준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또 한가지 감동적인 대화가 있었다. 몽골족하면 야만인이라고 생각해 왔던 하이디에게 큰 충격을 준 내용에 대해 그녀는 정면으로 대답을 하고 있었다. "닥터 강? 엉덩이에 몽골 반점이 있느냐고 물었지요? 그렇습니다. 나의 어머니 말씀이 우리 항가리, 마잘족들도 반점이 있다고 했어요. 결국 나는 실망을 하였지요. 나는 야만인의 피를 받은 사람이라고요." 하이디는 언젠가 내가 일러준 것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요, 하이디씨! 그러나 내가 보기에 당신은 다른 몽골족과는 아주 다른 고상하고 아름다운 피가 흐르고 있는 것 같군요."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하이디가 물었지만 같이 있던 나의 친구도 흥미 있어 하는 눈치였다. "그렇습니다, 하이디씨! 당신은 아주 예쁜 여자입니다. 마치 야만인 '아틸라'하고는 아주 다른 피를 갖고 있어요. 무슨 말이냐고요? 당신의 피 속에는 옛날 한나라 때 몽골로 잡혀간 아름다운 궁녀, '왕소군'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 같아요. 왕소군의 피가!" "왕소군?" 하이디는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예, 왕소군! 아주 예쁜 한나라의 궁녀말입니다." "……" * 왕소군(왕짜오쥰)이라고 하는 아주 예쁜 궁녀가 있었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 한 후, 그는 시간과 돈을 드려 북방 산악지대에 오랑캐인 동호족, 선우족을 경계하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다. 동호족이니, 선우족은 결국 고구려, 백제와 같은 몽골족이었다. 여름에 내린 비를 맞아 자라난 넓은 초원에 소, 말, 양을 기르던 유목민족인 몽골족들은 수시로 만리장성을 침범하여 중국에서 양식을 약탈하여 가져 갔다. 한나라 고조는 진나라를 토벌하고 천하를 다시 통일하였는데, 내친김에 북방을 정벌하려고 하였다가 오히려 북방의 선우족의 '묵특 선우'장군에게 수치스러운 패배를 맛보았다. 한나라 고조는 화친의 조건으로 많은 곡식과 금, 그리고 자신의 예쁜 딸을 보내기로 하였다. 오랑캐에게 진 것도 분한데 사랑하는 딸을 보내어 더럽혀 질 수는 없었다. 그래서 결국 딸 대신 보낸 것이 바로 궁녀, 왕소군이었다. 그녀는 예쁜 여자로써 '봄은 다시 왔건만 오랑캐의 나라에 온 봄은 다르고나'라고 쓴 시와 절개도 남달랐다. '과연 왕소군이란 이 여자는 묵특 선우라고 하는 오랑캐 장군과 처음 만나 어떻게 되었을까? 한나라의 궁녀이기에 오랑캐와 살 마음이 없었을 것이고, 또 몸이 더럽혀 지는 것도 수치스럽게 생각하여 더럽혀지기 전에 혀를 깨물어 죽으리라고 결심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도 사람이기에 살고 싶어서 점점 오랑캐와 같이 변하였을 것이며, 끝내는 그녀도 살을 맞대고 오랑캐와 성관계를 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같이 살았다는 이야기인데, 살다 보면 정(情)이 생겨 애기도 하나, 둘 낳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그녀도 몽골 사람이 되었을 것이며, 후손도 역시 몽골 사람이 되었을 것으로 본다. 6세기 후, '야만인 아틸라가 유럽을 정복하였는데, 누가 알랴? 그가 바로 왕소군의 피를 이어 받은 후손이었는지!' "그토록 아름다운 왕소군의 피를 받은 아틸라가 잔악한 야만이이 되었다고?" 나는 나 혼자 묻고 대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20세기, 아니 21세기가 되었다. 그렇다. 여기 뉴욕 주 마운트 버논에서 만난 이민자들이 있었다. '한족과 몽골의 피를 받은 항가리족 - 마잘족의 예쁜 여인, 하이디와 또 다른 몽골의 피를 받은 닥터 기의 만남, 그리고 늘 닥터 기를 뒤 쫒아 다니는 나, 강석호도?' * 하이디는 흥미를 갖고 나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엉덩이에도 삼신할머니가 세상에 나가 잘 살라고 손바닥으로 때린 그 몽골 반점이 있었기에 그녀는 닥터 기와 나에게 더 친근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하이디와 닥터 기와는 너무나 가까운 사이가 되었구나!' 그러기에 오늘 저녁의 만남은 하이디에게는 정말로 큰 소득이었다. 닥터 기의 멋진 피아노 연주를 통해 그녀는 그를 존경하게 되었으며,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던 강석호에 대해서도 '그 친구 괜찮은 사나이로구나!'라고 생각을 바꾸게 하였으리라. * 그 날 저녁, 집으로 돌아 온 나는 잠을 자지 못하고 선우족에게 잡혀갔다고 하던 한나라의 아름다운 궁녀의 얼굴을 상상해 보았다. 한나라의 공주로 변장을 하여 몇 명의 시녀들을 대동하고 우락부락한 몽골족인 선우를 따라 간 그녀는 지루한 고비사막을 넘어 지금의 다르 항이나 카라코름으로 갔을 것이다. 욕을 당하고 사느니 차라리 자살을 하리라고 생각하고 왔는데, 선우 장군은 생각보다 아주 남성적이며 신사였다. 그래서 그녀는 오랑캐라고 불리우던 묵특 선우장군에게 그녀의 꽃다운 순결을 빼앗겼으리라. 그래서 그녀는 생각했던 대로 자결을 하지 못하고 묵특 선우장군의 남성적인 면과 인정이 많은데 연민을 느껴 결국 그녀는 마음을 바꿔 '몽골의 여인'이 되었다고 생각을 해 봤다. 이렇게 생각하면 아름다운 항가리의 여인, 하이디도 닥터 기와 결혼하면 그녀도 몽골계 한국인이 된다. 그래서 결코 한나라의 왕소군처럼 몸을 더럽힌다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안 된다고 할 이유가 없잖아?' 나는 가까스로 이렇게 말을 하고 있었으나, '아냐! 역시 닥터 기와 결혼하는 편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야!'라고 생각하며, 한 발 물러나고 말았다. -남녀의 사랑 문제는 단순히 사랑뿐만 아니라, 역시 운명과 숙명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비록 오랑캐에게 잡혀갔지만 왕소군에게 있어서는 하늘이 짝 지어 준 운명이요, 숙명이었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러기에 기성환과 하이디의 만남은 운명이라는 말이다. * 〔왕소군(왕짜오쥰)에 대해 설명을 하면 다음과 같다. "한나라의 왕소군은 당신이 쓴 얘기와는 조금 다릅니다. 왕소군은 흉노왕, 호한야 선우에게 시집을 갔습니까? 묵특 선우가 아니고, 묵특 선우장군이란 말입니다. 왕이 아니고 장군! 역사 이야기를 쓸려면 정확하게 써야지!" 혹자가 닥터 강에게 묻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왕소군은 한나라 고조의 공주인 화신 공주를 대신하여 흉노왕, 호한야 선우에게 정략 결혼으로 팔려간 궁녀입니다. 그런데, 나는 그녀를 너무나 좋아했기 때문에 가련한 과거를 일일히 말하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차라리 용맹하게 싸웠던 젊은 묵특 선우장군을 왕이라 부르고, 그의 아내가 되게 하고 싶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왕소군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싶어서 그렇게 썼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 진나라가 망하고 유방(劉邦)에 의해 한 제국을 건설하였지만 만리장성 북쪽에 있는 몽골족인 흉노는 빈번하게 중국을 침범하였다. 특히 묵특 선우장군이 이끄는 군대는 너무나 용맹스러웠다. 결국 한나라 고조는 흉노왕 호한야 선우에게 화친을 하는 댓가로 많은 금, 양식, 화신 공주를 그에게 시집 보내기로 약속을 하였지만 오랑캐에게 딸을 줄 수가 없었다. 결국 궁녀를 화신 공주로 변장하여 보내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 궁녀도 가려고 하지를 않아 궁녀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한나라 황제에게 보내기로 했다. 그러자 많은 궁녀들이 자기의 얼굴을 못생기게 그리도록 화가에게 뇌물을 주었지만 왕소군만은 그렇게 하지를 않고 있는 그대로 그리게 하여 황제에게 보내졌다. 황제는 왕소군을 선택하여 보내기로 결정하고 실물을 만나고 보니, 18살의 활짝 피어나는 한 떨기 꽃처럼 너무나 예뻤지만 그녀는 비운 속에 살다간 꽃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황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흉노왕 호한야 선우에게 시집을 와 고향을 그리며 살았다. 그 뿐인가, 흉노왕 호한야 선우가 죽자 대를 이은 왕의 본처 아들에게 몸을 바쳐야 했다. 흉노의 전통이 그러했다(부왕(父王)이 죽고 세자가 왕이 되면 친 어머니를 제외한 모든 아버지의 소유물과 첩들을 가질 수가 있다고 함). 마치 수나라의 양제가 그의 아버지, 문제가 죽자 아버지의 후처인 선화 부인을 자기의 아내로 삼았듯이 말이다. 아버지와 아들을 지아비로 섬겨야 하는 기구한 운명에 가련한 왕소군은 스스로의 목숨을 끊었다는 말도 있었다. 내몽고의 수도 호하호트 시에서 9킬로 남쪽으로 가면 둘레 90미터, 높이 33미터의 천연석으로 된 봉분 모양의 언덕이 있는데, 그곳이 왕소군의 묘분이라고 한다.〕 * "그렇다. 이것이 왕소군에 대한 정확한 역사학적인 기술입니다. 그러나 나는 왕소군을 이렇게 비참한 여인으로 표현하고 싶지가 않고, 아름답게 기술하고 싶단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묵특 선우에게 받쳐 졌다고 하였지요. 차라리 용맹스러웠던 묵특 선우장군에게 말이예요."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이 있듯이 잘 나가고 있던 나의 친구, 기성환에게도 불행한 사건이 생겼다. 1974년 7월, 나는 어려웠던 인턴 과정을 끝내고 마운트 버논 병원에서 마취과 레지던트(수련 의사) 자리를 구하여 1년 차의 일을 시작하였으며, 나의 친구는 외과 레지던트 4년 차(마지막 남은 1년)로 당당하게 승진하여 곧 외과 전문 의사의 자격을 획득하게 되었다. 4년 차 외과 레지던트는 수석(Chief Resident) 의사라고 불리우며, 곧 전문 의사 자격을 받을 뿐만 아니라, 의과 대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의 위치였다. 그러기에 마취과 1년 차가 본 외과 4년 차의 위치는 마치 하늘같은 존재였다. * 반대로 마취과란 의사라기 보다는 외과 의사들을 옆에서 도와주는 기술직일 뿐이었다. 마취과는 아침 일찍 병원으로 출근하자마자 수술실로 들어 가 에어컨과 수은등 아래서 환자들을 의식의 세계에서 무의식의 세계로 바꾸어 놓고, 외과 의사로 하여금 수술을 하게 하는 전문 과목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그러기에 마취과 의사들은 외과 의사들의 성질을 될 수 있는데로 건드리지 않으려고 자기의 스트레스와 싸움을 해야 한다. 마취를 한 환자가 수술 후에 다시 깨어 날 때까지 그들은 긴장 속에 있어야 한다. 이런 마음은 외과 의사도 마찬 가지다. 마취과 레지덴트를 시작한지 3개월이 지나고 보니 이젠 웬만한 마취는 혼자도 할 수 있게 되었다. 10월 말이었다. 이른 아침 나는 수술방으로 갔다. 오늘의 첫 번째 수술 환자는 간과 담도에 생긴 혹 덩어리를 수술하는 것으로 주치 의사는 닥터 스미스였으며, 레지던트로는 나의 친구, 닥터 기와 1년 차 수련의사, 닥터 로젠버거였다. 스미스란 의사는 40살이 넘은 영국계 외과 의사로 이곳 마운트 버논 병원에서는 꽤 유명하였다. 그리고 로젠버거란 수련의는 이름 그대로 유태계로 키가 크고 잘난척 하며, 덤벙거리는 요 주의 인물이었다. 마취 후, 닥터 스미스는 메스로 복부를 그어 열었다. 과연 주먹만한 크기의 종양이 담도와 취장 사이에 불룩 튀어 나와 있었다. 마침내 X-Ray에서 애매하게 보였던 담도와 총담낭관을 분리하고 있을 때, 주치의는 가슴이 아프다고 하며, 얼굴을 찌푸리고는 '환자가 협심증이 생겼는지도 모른다'고 하면서 닥터 기에게 몇 가지를 지시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닥터 기는 침착하게 환자를 수술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뜻밖의 사고가 엉뚱한데서 생겼다. 옆에서 조수로써 시중을 해야 할 닥터 로젠버거가 자기도 주치의사가 된양 메스를 들고 분리하다가 잘못하여 애꿋게도 담도와 총담낭관을 찢고야 말았다. 뿐만 아니라, 담도를 따라 가는 동맥이 끊겨서 피가 솟구쳤다. 닥터 기는 뜻밖의 사건으로 인해 수술은 엉뚱하게도 지연이 되었으며, 많은 시간이 걸려서야 겨우 담도와 동맥을 연결하여 혹과 주위의 임파선 등을 겨우 제거하여 수술을 마치게 되었다. 나는 이 모든 과정을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바라다 보고 있었다. 분명히 닥터 로젠버거의 실수였다. 닥터 기는 이 잘못을 탓하지 않고 열심히 수술을 하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며칠 후, 이것이 문제가 되어 애석하게도 환자는 죽고 말았다. 그 환자는 뜻밖에도 돈 많은 유태인으로 엄청난 청구소송을 병원 측에 해 왔다. '병원 측의 부주의와 의사의 실수, 주치 의사의 무책임한 행동'이라고 하는 이유로 거액의 보상을 요구하였다. -결국 닥터 스미스는 병원을 더 이상 사용할 권리를 잃었으며, 닥터 기는 레지던트(수련 의사)의 자리를 박탈 당하게 되었다. 말도 안 되는 결정이었다. 1년 차 수련의사가 범한 실수를 어이없게 닥터 기도 수석 외과 의사이기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유태인 의사의 힘은 컸다. 닥터 로젠버거는 자기가 절대로 실수를 하지 않았다고 우겼다. 그래서 그가 유태인이기에 뉴욕 시에 있는 마운트 시나이 병원으로 잠시 파견 나가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청천벽력과 같은 결정이었다. 외과 수련의 4년 차가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데, 더구나 이제 남은 8개월만 마치면 전문 의사가 된다. 지금에 와서 그만 두라고 하면 닥터 기는 어디에 가서 4년 차의 과정을 밟는단 말인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닥터 기는 병원측에 항의하였다. 그리고 사정도 하였다. '수련 의사이니 기회를 주자고 하는 의사들도 많았지만 웬일인지 유태인 의사들은 한결같이 안 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난감하였다. 어느 누구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다. 마취과 레지던트인 나의 힘은 더구나 없었다. 한국이 아닌 미국이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이런 사건이 일어났다고 하면 닥터 기는 어느 방법으로든지 호소를 할 수가 있었으나, 미국에서는 마치 단순 노동자처럼 일만 하여야 했다. 강원도 금화에서 고아로 내려왔던 나도 한국에서 당했던 것과 같은 서러움을 그도 맛보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어려울 때마다 그래도 한국에서는 기박사와 기성환으로부터 도움을 받았지만 미국에서는 그렇지가 않았다. 약소국에서 온 의사들의 서러움이 이런 것이었다. 친한 친구인 나는 비겁하게도 '닥터 기가 실수를 한 것이 아니고 닥터 로젠버거가 분명히 실수를 했습니다'라는 말을 못하고 있었다. 잘못 했다가는 나도 이 병원에서 쫒겨 날지 모르기 때문에 섣불리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결정적인 증언을 해 줄 수가 있었는데, 나는 비겁하게도 외면을 하고 말았다. 나는 비겁한 놈이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생겼다. 미국 여자, 아니 백인 여자인 하이디가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수술의 내용을 자세히 물었다. "그렇다면 닥터 기의 잘못이 아니지 않습니까? 닥터 스미스는 물론 닥터 로젠버거의 실수가 틀림없는데, 닥터 기가 억울하게 죄를 덮어 쓰고 있잖아요!" 하이디는 내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의 가슴은 뛰었다. 분명히 그녀는 닥터 기를 사랑하고 있음을 그녀의 눈망울을 보아 알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나에게도 마치 전쟁에 나가는 전우와 같은 마음으로 전에 없는 호의를 표시하고 있었다. * 다음 날, 외과 과장실에서 큰 언쟁이 있었다. -간호사, 하이디가 정식으로 닥터 기에 대한 부당한 결정에 대해 항의를 하고 있었다. 수술의 실수는 닥터 스미스와 닥터 로젠버거에게 있지 어째서 닥터 기에게 있는가? 이 수술을 직접 목격한 마취과 의사의 증언을 듣기 바란다고 항변하였다.- '간호사인 주제에 무슨 말이냐?'라는 의사들의 질책도 있었지만 하이디는 강력하게 항의를 하였다. 비록 뒤 늦게라도 나는 닥터 기를 위해 증언을 하였지만 허사였다. 내 말을 믿으려고 하지를 않았다. 하이디가 이번에는 병원장을 만났지만 그도 유태인이었기 때문에 허사였다. 유태인 의사들을 이길 방법이 없었다. '뉴욕을 비롯한 미국에 있는 유태인들의 힘이 이처럼 크단 말인가?' 닥터 기는 난감했다. 지금까지 쌓아 온 그의 생애가 한 순간에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문 의사도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병원에서 쫒겨나면 향후 어디에 가서 직장을 구한단 말인가? "세상에 나쁜 놈들! 유태인 놈들!" 아무리 욕을 해 보았으나 허사였다. "무엇을 한담? 무엇을!" 닥터 기는 난감했다. 그 동안 아무런 난관 없이 살아 온 닥터 기에게는 모든 것이 캄캄한 암흑이었다. 차라리 내가 이런 일을 당했더라면 별 큰 문제가 되지를 않았을 게다. 그만큼 '강석호'란 이름의 사나이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자생력이 강한 칡뿌리 같은 사나이였으나, '기성환'이란 이름의 사나이는 영리하고 똑똑은 했으나, '따뜻한 온실 속에서 살아온 고급 화초였다'는 것이다. '인생이란 때로는 폭풍우 속에서 쓸어져 보기도 하고, 맹수를 만나 죽을 고비를 겪기도 해야 인생의 참 맛을 알게 된다'고 나는 생각을 했다. 미국 동부 지방에 있는 병원들은 암암리에 유태인 의사들의 강력한 조직력에 의해 종종 소수인종의 의사들에게 이유 없는 박해도 했다. 아무리 한국에서 부유하게 자란 닥터 기라고 해도 그들의 눈에는 하잘 것 없는 동양인으로 보일 뿐이다. 닥터 기에게도 큰 고민이 있었다. 8개월 후면 외과 과정을 모두 마치기에 몇 개월 전부터 한국에 있는 부모님을 미국으로 이민 초청을 하였으며, 부모님들도 나이가 들어 늙어가니 재산을 정리하여 미국으로 이민오고자 하였다. 그림같이 아름다운 롱 아일랜드에 궁궐같은 집을 사서 결혼도 하고 부모님들을 모시고 한 평생을 살겠다고 하던 그의 미래가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되었으니 잠도 못자고 우울해 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를 징계하고 병원에서 쫒아내려고 하는 외과 과장이 더 미웠다. "유태인 과장! 이놈이 나를 고의적으로 학대를 하는구나! 닥터 스미스란 영국계 미국놈이 미우니까 나까지 도매금으로 병원에서 쫒아내기 위한 수작이구나! 나쁜 놈?" 그는 저녁에 예고도 없이 외과 과장의 집으로 찾아갔으나 문전 박대를 당하고 말았다. 언성이 높아 졌다. 닥터 기처럼 침착하던 사나이가 언성을 높이니 과장은 은근히 겁이 났던지 경찰을 불렀다. 잠시 후, 경찰이 와서 사유를 조사 중 닥터 기의 바지주머니에서 작은 칼이 발견되어 '흉기로 위협한 행위'로 오히려 경찰에 입건이 되었다. 형사적인 문제가 생긴 셈이었다. 일을 해결하려다가 오히려 크게 벌어진 셈이었다. '미국을 잘 모른 결과였다. 미국을?' 거대한 미국이라는 사회 속에는 지금도 합리적인 방법으로 수많은 무고한 소수 민족이 그들의 권리를 잃고 닥터 기처럼 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접받는 의사들의 세계도 이러할진대, 하루살이처럼 페인트 통을 어깨에 메고 이른 새벽에 나가는 노동자들, 세탁소에 가서 다림질을 하여야 하는 아주머니들, 새벽 2시에 일어나 퀸즈에 있는 청과물 도매점으로 가서 채소를 사와야 하는 사람들, 부르클린 남쪽 수산 시장에 가서 생선을 사와야 하는 사람들, 이들 한국인들에게는 합리적인 인권이란 찾아보기도 힘들었다. 그러나 한 가지 역설적인 것은 이런 열악한 환경을 이기고 살아가는 것이 역시 몽골의 피를 가진 한민족이었으며, 그 와중에서 '칡 뿌리같이 강한 신앙심'이 자라고 있었다. * 더 놀라운 것은 닥터 기가 병원에서 쫒겨나던 날, 백인의 간호사, 하이디도 같은 시간에 사직서를 제출하면서, '사랑하는 닥터 기를 도와주기 위하여 나는 그가 어디를 가던지 따라 가겠노라'고 했다. 이때 수 많은 백인들도 놀라는 듯 하였다. "아니? 백인 여성이 가난뱅이 나라, 한국에서 온 사람을 좋아 하다니? 와- 놀랍다. 그러나 백인의 위신을 싹 구겨 놓았구먼!" 정작 죽마고우라고 자부했던 나는 비굴하게도 마취과 빽을 잡고 외과 의사들을 위해 오늘도 마취를 하고 있어야 했다. 직장에서 떨어지면 안되기 때문에, 레지던트를 무사히 마쳐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친한 친구가 불공평하게 쫒겨나고 있는데, 한 마디의 도움도 못 주고 있는 비굴한 마음과 수치심을 느끼고 있었다. -닥터 기와 같은 경우는 마치 동물의 세계의 한 장면 일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떼를 지어 풀을 뜯고 있는 사슴들을 노리는 사자를 보자. 결정적인 순간에 사자는 사슴을 향해 돌진을 하지만 사슴들은 있는 힘을 다해 한 방향으로 도망을 친다. 그 중에 다리를 다친 한 마리 사슴이 뒤로 쳐지게 되던지, 아니면 아직 어린 새끼는 빠르지 못한 놈일 수도 있다. 결국 그 날은 그들의 사슴으로 인해 전체 사슴들은 사자로부터 목숨을 지키게 된 셈이 된다. 또, 그 날 살아 남은 다른 사슴들도 언젠가는 사자의 습격에 의해 희생을 당할 운명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 나는 하이디를 쳐다 볼 용기가 없었다. '그렇다. 그녀는 나의 친구, 성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구나!' 나는 그녀에게 동정심 대신 질투심을 느끼고 있었다. 나의 친구는 말도 않고 두문 불출하고 있었으나, 나는 어떻게 그를 도울지 생각을 해 보았지만 다른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결초보은'(結草報恩)이라고 했는데, '한국에서는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았던 내가 지금같은 위기에서 무엇인가 도와 주었으면 좋겠지만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니!' 나는 나라고 하는 인간의 무기력함과 이중적인 인간성이 더욱 나를 서글프게 해서 울고 말았다. '기성환이가 누군데? 그는 거지같은 나를 학비도 대납해 주고, 여러 가지로 도와 준 은인인데…' * 뜻밖의 결론이 내려졌다. 닥터 기는 미국 해군 군의관에 괜찮은 조건으로 자원 입대하였다. - 2년간 일반 군의관으로 복무를 하고, 1년 간을 더 복무하기를 본인이 원한다면 외과 4년 차로 다시 뽑아 주겠으며, 그 후에도 계속해서 해군에서 복무를 해도 좋다는 조건으로…- 그래서 그가 찾아 간 곳은 버지니아 주 노훠크(Virginia Norfok)에 있는 해군 기지였다. 해군으로 입대하기 위해 가는 성환의 손을 잡고 나는 '그래도 미국 해군은 한국의 육군보다 좋다구!'라고 한 말 한 마디었다. '강원도 원통 골보다 버지니아 노훠크가 더 경치도 좋고 대우도 좋지 않겠느냐!'하는 아이들 같은 말이었다. 너무나 허망한 작별이었다. 그리고 나의 친구, 성환과는 그 후 소식이 두절되었다. 자존심 강한 그가 섣불리 나에게 전화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콧대 센 하이디도 나에게 소식을 전하여 주리라고 나는 기대도 안 했으니까. 버지니아를 지도에서 찾았다. 와싱톤 D.C.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다 체사픽 만을 끼고 동쪽으로 한참 내려가니 윌리암스버그가 나오며, 곧 이어 바닷가에 노훠크가 있었으며, 그 옆에는 유명한 '버지니아 주 마운트 버논'이 있었다. 버지니아 주 마운트 버논이란 바로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와싱톤의 생가가 있으며, 역사적으로 유명한 미국의 관광지이기도 하다. 유명한 조지 와싱톤이 그곳에서 칼을 차고, 수 많은 노예들을 데리고 농장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호령을 하고 있는 듯 하였다. 그리고 노훠크에서 체사픽 만으로 연결된 30여 마일이나 되는 '체사픽 다리'를 바라다 보며, 나는 안개낀 바다 위에 펼쳐진 꿈같은 다리 위를 달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착각이었다. 나는 오늘도 수술 환자를 잠재운 후, 입을 크게 벌리고 플라스틱의 튜브를 성대 깊숙이 밀어 넣고 산소와 질소가 적당히 섞인 고무 빽을 조금씩 때로는 강하게 압축하기도 하고, 이완시키기도 하여 환자들을 완전히 의식에서 무의식의 세계로 보내어야 했다. 대부분의 경우 1시간 내지 1시간 반 정도가 걸렸으나 심장 수술같은 경우는 8시간이나 소비되었다. '인간이 죽는 다는 것이 무엇인가? 죽음은 단지 깊은 마취의 연속일 것이다. 괴로운 인생 길에서 허덕이는 이보다 차라리 마취를 당해 아무것도 모른 채 몇 시간 자다 깨어나는 사람들의 심정도 이해가 갔다. 과연 그들은 마취로 인해 잠들어 있는 사이에 정말로 아무런 생각도 못하고 있었단 말인가? 아니면 마취를 당하고 있는 사이에 먼 영혼의 세계에 가서 잠시라도 휴식을 하고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오늘도 뚱딴지 같은 생각을 하며, 검은 고무의 마취 빽을 쥐었다, 놓았다 하며, 맥박과 혈압을 재기도 하고 숨을 조절하고 있다. '인간이 의학적으로 정상이 되려면 온도, 맥박, 혈압, 그리고 호흡을 정상적으로 유지하여야 하는데, 내가 전공하는 마취과는 정상적인 사람을 비 정상으로 만들어 아픔을 모르고 수술을 하게 해 주는 학문'이란 말이다. 어찌 보면 나는 내가 살아온 비 정상의 인생을 마취과에서 찾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비 정상을 정상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 나의 직업인 마취과 의사란 말이었다. * 그리고 악몽과 같은 이별이 있은 지 거의 1년 반이 지난 어느 날, 나는 나의 친구로부터 뜻밖의 전화 연락을 받았다. 나는 그때, 마취과 레지던트 3년 차로 승급이 되었다. "석호! 나, 성환일세! 캘리포니아 산 디에고에서 전화를 하고 있다네." "산 디에고?" "그래, 산 디에고?" 버지니아 주 노훠크로 갔었는데, 대륙을 횡단하고 캘리포니아 주 산 디에고에 있다니 역시 그는 나보다 한 수 위였다. "그리고 몇 개월 전에 하이디와 결혼을 하였네!" "와- 그래? 축하한다. 축하해!" 결국 그는 하이디와 결혼을 하였다고 했다. 우리가 헤어지고 난 후, 그의 얘기를 듣고 보니, 기성환도 많은 인생 경험을 쌓은 것 같았다. 온실 속과 같이 따뜻한 곳에서만 살았던 그가 택한 길은 역시 현명함이었다. 동부에서 보내기보다는 새로운 세계, 서부로 자원하여 산 디에고와 캠프 펜델톤에 있는 해병대 기지에서 혹독한 훈련도 받았다고 했다. 그가 터득한 것은 '원한을 잊어 버리는 길'이라고 했다. '원한을 마음에 담고 있으면 그만큼 건강을 해친다'고 하면서 뉴욕을 잊고 새로운 길을 찾는 방법이었다. 반년 더 근무를 하면 산 디에고 해군 병원에서 외과 4년 차를 하게 되어 드디어 외과 과정을 마무리한다고 했다. 그리고 어려운 중에서도 동양 사람인 나를 마다않고 도와준 하이디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노라고. '어렵고 눈물나는 외로움, 암흑같은 절망에서 헤쳐 나오도록 격력해 준 하이디를 평생 사랑해 주는 것이 그의 운명이요, 의무'라고 했다. 그는 아무런 미련도 없이 하이디와 결혼을 하였다고 한다. 피부가 다르고 생각도 다른 외국 여성과의 사랑에도 이토록 간절함과 애틋함이 있었다. 비록 많은 한국 사람들은 백인 여자와의 결혼을 반대하였지만 정작 아버지는 아무런 반대도 없이 '너무나 고맙구나, 진실한 사랑이로구나!'라고 말씀하시며, 고개만 끄덕였다. 고비사막 위를 비행하던 아시아나항공 여객기가 어느 듯 몽골의 수도 우란 바톨 공항에 가까이 왔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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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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