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하는 시 쓰기 절차와 방법/윤석산

2008.08.18 03:10

이기윤 조회 수:828 추천:78

창조하는 시 쓰기 절차와 방법

강사/윤석산

                          <1>

안녕하세요? 벌써 여름이 오고 있네요. 올 여름엘랑 제주도로 놀러 오세요. 해마다 그랬듯이 남태평양에서 파도들이 몰려와 환상적인 무도회를 열 거예요. 쭉쭉 뻗는 파도의 다리, 아으, 까르르 까르르 쏟아지는 별들의 웃음, 사랑하는 사람이랑 팔랑 팔랑 하양 팔랑 치자꽃 지는 언덕에 앉아 흐느끼는 트럼펫 소리를 들으며 캉캉 춤을 추는 바다를 내려다보면 그야말로 뿅 가요.

그럼 이번에는 <창조하는 시> 쓰기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창조하는 시"가 뭐냐구요? 제가 만들어낸 용어니까 개념부터 말씀 드려야겠군요. 지난 호에 말씀드렸듯이, 우리의 시작(詩作) 동기는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 생각이나 느낌을 말하려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대상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려는 경우이고, 나머지 하나는 무엇인가 창조하려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자기 느낌이나 대상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려는 시는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그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내부에 존재하는 관념이나 무의식을 대상으로 삼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음 작품만 해도 그렇습니다.

열 오른 눈초리, 한잔한 입 모습으로 소년은 가만히 총을 겨누었다.
소녀의 손바닥이 나비처럼 총 끝에 와서 사뿐히 앉는다.
이윽고 총 끝에선 파아란 연기가 물씬 올랐다
뚫린 손바닥의 구멍으로 소녀는 바다를 내다보았다.

---아이! 어쩜 바다가 이처럼 똥그랗니?
놀란 갈매기들은 황토 산태바기에다 연달아 머릴 처박곤 하이얗게 화석(化石)이 되어 갔다.
- 조향, [EPISODE] 전문

이 작품은 <후반기(後半期) 동인> 중 한 사람인 조향(趙鄕)의 작품입니다. 무의식 속에 드려진 풍경을 그린 것으로서, 일반 독자들에게는 아주 낯설게 보일 겁니다. 소녀가 손으로 총구를 가리고 있는데 그냥 쐈다던가, 총알로 뚫린 손바닥 구멍으로 바라보며 "아이! 어쩜 바다가 이처럼 똥그랗니?"라고 한다던가, 갈매기들이 산태바기에 머리를 처박고 화석이 되어간다는 것은 상식으로는 납득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에 등장하는 소년·소녀·총·바다·갈매기 등은 이미 존재하는 것들로서, 무의식에 의하여 모티프와 모티프의 연결이 비일상적인 것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아니, 이들이 전혀 새로운 것이라고 해도 우리의 내부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을 끄집어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낯선 풍경이 되었느냐구요? 무의식은 우리의 본능에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쾌락의 원리(principle of pleasure)"에 의하여 움직이며 도덕이나 질서와는 거리가 먼 것이라서 이성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위치를 바뀌거나 뒤집고, 생략·압축하거나 다른 것으로 대치된 상태라서 비논리적인 것처럼 보일 뿐이지요. 그러므로, 이와 같은 시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창조라기보다는 모방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그릴 수는 없을까요?


◆ 창조는 비유적 어법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인간이 하나님처럼 존재하지 않는 사물을 창조하기란 용이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상상력이 모자라서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사고-언어-관련사물>의 특수한 관계 때문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릴까요? 우리는 언어를 가지고 사고합니다. 그러니까, 누군가 사랑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사랑한다"는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누구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상대가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그 말에 해당하는 상황(관련 사물), 그러니까 "사랑하는 장면"을 떠올릴 수 있을 때 가능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인가 창조하려고 해도 기존의 언어를 가지고 사고하고, 그 과정에서 사용한 언어가 거느리고 있는 의미나 상황이 개입되어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어쩌다가 만들어내어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려 해도 그에 적합한 언어가 없어 존재하는 다시 기존의 언어에 의지할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독자들은 기존의 언어가 지시하는 사물과 연결시키면서 시인이 창조한 사물을 떠올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인가 창조하려는 시인은 이런 언어적 제약에서 벗어나는 방법부터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는 언어의 기능부터 검토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지시적(指示的) 어법>의 경우, 결론부터 말하면 이 어법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예컨대, 조용한 유월의 언덕에 하이얀 능금꽃이 피었다고 합시다. 그리고,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합시다. 그래서, <능금꽃이 핀 유월의 언덕은 아주 조용하면서도 살아있는 것 같았다>라고 하면, "능금꽃이 핀"이라는 관형어를 붙여 좀 더 구체화했을 뿐, <언덕→언덕>이라고 동어반복(同語反覆)을 하여 기존의 언덕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비유적(比喩的) 어법>은 어떨까요?

ⓐ언덕은 꿈을 꾸는 짐승

언덕을 깨우지 않으려고
유월이
능금꽃 속 숨어 있었다.
- 김요섭(金耀燮), [옛날]에서

이 작품에서 <언덕=짐승>으로 치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치환함에 따라 원관념(tenor)인 <언덕>에 보조관념(vehicle)인 <짐승>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마치 어깨를 달싹거리며 잠을 자는 짐승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서로 다른 원관념과 보조관념에 동일성(同一性)을 부여하면서 보조관념 쪽으로 의미를 이동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비유적 어법은 아주 다양합니다. 커다란 유형만 따져도, 지난 호에 말씀드렸듯이 말하려는 것을 그 무엇으로 바꾸는 <치환은유(epiphor)>, 어떤 사물을 내세우고 그 사물이 지닌 의미 가운데 말하려는 것과 일치하는 것만 골라 쓰는 확장은유(extensive metaphor), 원관념을 숨긴 여러 개의 치환은유를 전시(展示)하는 병치은유(diaphor) 등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다시 여러 개의 하위 유형으로 나눱니다.

이 가운데 우선 제외해야 할 유형은 상징(symbol)이라고 불리는 확장은유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문학 작품에서 새로운 사물은 시인에 의해 창조된다기보다 독서 과정에서 독자가 떠올리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독자들의 "습관적 반응"을 깨뜨려야 하는데, 상징은 이미 알려진 의미를 이용하는 방식으로서, 이런 방식을 택할 경우에는 곧 바로 원관념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검토해볼 유형은 <원관념(T)=보조관념(V)>으로 바꾸는 치환은유입니다. 이와 같은 치환은유는 원관념이 문맥의 표면에 드러나느냐 잠재(潛在)되느냐에 따라 <현시형>과 <잠재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앞에서 인용한 ⓐ는 현시형, 다음 작품은 잠재형에 속합니다.

ⓑ경춘선을 타고/한 시간쯤 가다가/문득 어느 산협촌(山峽村)에/내렸다. 늙은 역장과/ 코스모스, 그리고/나무로 만든 긴 벤치가/있었다. 거기 앉아,/담배나 피다 가기로 했다./ 모두들 잠든 탓일까./이 그림 속의 세계는/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결국 나는 혼자 내렸듯/혼자서 떠나야겠지.
-김시태(金時泰), [우리들의 간이역(簡易驛)] 전문

앞의 작품에서는 원관념(언덕)이 문맥의 표면에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짐승"이 "언덕"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간이역"이라는 보조관념이 지시하는 <이 세상 또는 삶>이란 의미는 숨겨져 있습니다. 그로 인해 원관념은 보조관념과 전체 문맥을 종합하여 추론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현시형보다 잠재형이 새로운 사물을 창조하는 데 더 유리하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숨겨진 원관념을 유추하는 과정에서 이것저것을 떠올리고, 그것들을 결합시켜 새로운 사물을 만들어낼 기회를 잡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 치환은유는 보조관념의 수효에 따라 <단순형>과 <복합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앞에서 인용한 작품들은 모두 으로서 <단순형>이고, 아래에 인용하는 한용운(韓龍雲)의 작품은 로서 <복합형>에 해당됩니다.

ⓒ바람도 없이 공중에서 수직으로 파문을 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중략>-
타고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 한용운, [알 수 없어요]

이 작품은 생략한 부분까지 합치면 <오동잎의 떨어짐(v1)>, <푸른 하늘(v2)>을 비롯하여 6개의 보조관념을 채택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자연물 가운데에서 선택되고, "누구"의 것에 해당합니다. 그로 인해, 전체의 의미가 하나로 수렴되면서 <님> 또는 <자연>이나 <도(道)>라는 원관념을 환기시킵니다.

이와 같은 두 유형 가운데 새로운 사물을 창조하는 데 유리한 것은 복합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1 : 1>인 단순형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이내 연결할 수 있지만, <1 : N>인 복합형은 보조관념 수(N)만큼 원관념과 연결해야 하고, 또 그들끼리 조절해야 하며, 보조관념으로 동원한 수만큼의 이질적 감각을 합쳐 새로운 사물로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현시형 단순치환은유>, <현시형 복합치환은유>, <잠재형 단순치환은유>, <잠재형 복합치환은유> 중 가장 유리한 것은 마지막 유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작품을 살펴보면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앞에서 인용한 작품들만 해도 그렇습니다. <잠재형(ⓑ)>보다는 오히려 <현시형(ⓐ)>이 더 새롭고, <잠재형 복합치환은유(ⓒ)>가 가장 일상적인 풍경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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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 비인과적 병치가 관건이다

하지만, 좀더 생각해 보면 잠재형 복합치환은유에는 이런 결과를 가져올 두 가지 요인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하나는 원관념을 잠재시키는 문제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잠재시킬 경우가 훨씬 더 독자의 사고활동을 조장하여 새로운 사물을 창조하는 데 도움이 될 것같이 생각됩니다. 하지만, 무엇인가 창조한다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라고 할 때, 원관념을 잠재시키면 그를 추론해내기 위해 보조관념 중심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하나로 통합하는 작업에 신경을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원관념을 잠재쳔객?것은 좀 더 검토해봐야 할 방법입니다.

다른 하나는 나열한 보조관념끼리 유사성 문제입니다. 유사성이 있는 것을 골라 조직하는 것은 그들끼리 결합하여 화자가 의도하는 풍경을 떠올리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지만, 추론 과정에서 언어가 일상적인 것으로 끌고 가려는 힘 때문에 오히려 일상적인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만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비인과적이고 이질적인 보조관념들을 나열하는 방법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휠라이트(P. Wheelright)는 이와 같이 원관념을 숨긴 보조관념들을 비인과적으로 전시하는 어법을 <병치은유>라고 합니다. 좀 더 확실하게 병치은유의 구조가 드러나도록 이제까지 논의한 어법들과 대조하여 그려볼까요?

현시형 단순치환은유 잠재형 복합치환은유 병치은유


(원문자 : 의미가 잠재되어 있는 경우, □ 문자 : 의미를 형성할 수 없는 경우)

위 그림에서 원문자는 의미가 잠재된 경우를, 네모 문자는 뭔가 의미하는 게 있지만 짐작할 수 없는 경우입니다. 그리고 원관념(T) 자리를 점선으로 그린 것은 잠재된 경우를, 보조관념(V)의 자리를 점선으로 그린 것은 유사성을 지니고 있어 하나로 수렴되는 경우를, 실선으로 그린 것은 이질적이라서 수렴되지 않는 경우입니다.

이와 같은 병치은유와 잠재형 복합치환은유의 차이는 보조관념들끼리 유사성을 지니는가 이질적인가 하는 차이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차이는 엄청난 차이로 이어집니다. 유사 관계를 지닐 때는 전체가 하나로 묶이어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관계가 <1 : 1>로 바뀌고, 전체 의미를 확정지을 수 있지만, 이질적일 때는 하나로 수렴이 되지 않아 보조관념들이 암시하는 풍경이 무엇인가를 짐작할 수 없고, 독자들이 의미 있는 그 무엇으로 바꾸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보조관념으로 제시한 사물들의 의미와 감각이 뒤섞이어 새로운 사물로 발전할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병치은유는 병치한 자질들의 성격에 따라 <에피소드 병치>, <이미지 병치>, <리듬 병치>, <어휘 병치(語彙竝置)>, <음운 병치(音韻竝置)> 등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휘 병치>와 <음운 병치>는 이론상으로만 가능할 뿐, 이들만으로는 의미를 형성할 수 없어 실제 창작에는 이용하기 어려운 유형입니다.

그럼 이 가운데 어떤 유형이 유리한 지 6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초까지 이 어법으로 [처용단장(處容斷章)]이라는 연작시를 써온 김춘수(金春洙) 시인의 작품을 통해 알아보기로 할까요?

ⓐ남자와 여자의/아랫도리가 젖어 있다./밤에 보는 오갈피나무,/오갈피나무의 아랫도리가/젖어 있다./맨발로 바다를 밟고 간 사람은 /새가 되었다고 한다./발바닥만 젖어 있었다고 한다.
- [눈물]에서

ⓑ태초/무정부주의가 있었다. 무정부주의는/발이 없다./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바쿠닌은 입이 크고/크로포트킨은 수염이 아름답다. 가을에는/모과빛이 난다./시베리아 오지에는 일년 내내/눈이 오고/예예족(芮芮族)의 마을은 너무 멀다./죽은 늑대의 목뼈가/부러져 있다./모든 것 다 잊으라고 눈이/쉬지 않고 온다.
- [처용단장] 제3부 31

ⓒ불러다오./멕시코는 어디 있는가,/사바다는 사바다, 멕시코는 어디 있는가,/사바다 누이는 어디 있는가,/말더듬이 일자무식 사바다는 사바다/멕시코는 어디 있는가,/사바다 누이는 어디 있는가,/불러다오./멕시코 옥수수는 어디 있는가,
- [처용단장] 제2부 5

ⓐ는 <남자와 여자의 젖은 아랫도리>, <오갈피나무의 젖은 아랫도리>, <맨발로 바다를 밟고 간 사람>이라는 비인과적인 이미지를 병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는 <바쿠닌과 크로포트킨>, <시베리아 오지와 예예족 마을>, <목뼈가 부러져 죽은 늑대>, <모든 것을 다 잊으라고 내리는 눈>이라는 에피소드를 병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는 좀 다릅니다. "불러 다오"와 "어디 있는가"라는 말을 규칙적으로 제시하고 있을 뿐, 어떤 의미나 이미지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대신 리듬이 두드러집니다. 따라서, ⓐ는 <이미지 병치>, ⓑ는 <에피소드 병치>로, <리듬병치>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 ⓑ와 ⓒ는 그리 적합하지 않은 유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는 너무 의미중심이고, ⓒ는 무의미한 리듬만 제시할 뿐, 창조적인 풍경도 관념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가 가장 바람직한 유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그리 만족스런 유형은 못 됩니다. 완벽한 창조라면 그 나름대로 의미를 지니면서도 새로운 풍경이 되어야 할텐데 아무런 의미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만들어낸 풍경이 너무 정적(靜的)이며, 이미지를 연결한 부위가 로봇의 움직임이나 쪼가리 그림의 연결처럼 부자연스럽습니다.

아니, 병치은유 유형 자체가 문제가 있습니다. 시인이 시를 쓰는 것은 자기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이고, 독자가 작품을 읽는 것은 무엇인가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 유형은 독자가 마음대로 재구(再構)하도록 요구하는 방식이이라서, 시인은 자기 의사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것이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독자는 자기가 찾아낸 의미를 확신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비인과적인 비유를 자주 채택하는 현대시로 접어들면서 시의 독자가 산문 쪽으로 옮겨가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하지만 김춘수가 이 기법을 실험한 것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역사에 대한 회의에서 출발하여 우리가 의미 있다고 생각해온 것들을 회의하고, 자기 작품에서 의미를 추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은 그가 자기 시를 "무의미시(無意味詩)"라고 명명한 것으로 미뤄봐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서구 시론에 따라 실험한 게 아닙니다. 휠라이트가 {은유와 실재(Metaphor and Realty)}를 통해 병치은유 이론을 발표한 것이 1962년이고, 김춘수가 이 어법으로 쓴 [눈물]이라는 작품을 발표한 것이 1959년이므로, 그 스스로 발견해낸 어법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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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우리 시단에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꾸준히 실험해온 이승훈(李昇薰)은 김춘수와 달리 애초부터 무엇인가 창조하려는 목적에서 출발합니다. 그것은 자기 시를 <비대상시(非對象詩)>라고 명명한 것으로 미루어서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비대상"이란 모방의 대상을 갖지 않는다는 뜻으로서, 무엇인가 창조하겠다는 의도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그의 작품 가운데 하나입니다.

시계는 열 두 점, 열 세 점, 열 네 점을 치더라. 시린 벽에 못을 박고 엎드려 나는 이름을 부른다. 이름은 가혹하다. 바람에 휘날리는 집이여. 손가락들이 고통을 견디는 집에서, 한밤의 경련 속에서, 금이 가는 애정 속에서 이름 부른다. 이름을 부르는 것은 계속된다. 계속되는 밤, 더욱 시린 밤은 참을 수는 없는 강가에서 배를 부르며 나는 일어나야 한다. 누우런 아침 해 몰려오는 집에서 나는 포복한다. 진득진득한 목소리로 이름 부른다. 펄럭이는 잿빛, 어긋나기만 하는 사랑, 경련하는 존재여, 너의 이름을 이제 내가 펄럭이게 한다.
- 이승훈(李昇薰), [이름 부른다] 전문

일반적으로 벽시계는 열두 번 이상 울리지 않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열세 점, 열네 점"까지 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집"과 "이름"이 종잇장처럼 휘날리는가 하면, "밤"이 경련하면서 균열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그린 게 아니라 창조한 세계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김춘수의 에피소드 병치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할 것입니다.
□하나의 사물을 여러 사물로 바꿔 쓰는 방법이 있다.
그 다음, 원관념을 드러내는 방식은 어떨까 검토해보기로 합시다. 원관념을 잠재시킬 경우, 독자들은 그를 찾기 위하여 텍스트를 주목하는 시간이 길어지는 것은 분명하지만, 길어진 만큼 기존 사물들을 지칭하는 언어로 사고를 진행하여 존재의 구각(舊殼)을 강조하고, 전체를 하나로 통일시키는 요소가 없어 때문에 조각난 그림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필자는 다음과 같은 작품을 써봤습니다.

달아 달아/밝은 달아/이태백이 놀던 달아

--달빛은 굵은 동아줄/나는 달빛을 타고

-<중략>-

금도끼로 찍어 내어/옥도끼는 과분하니 대충 무쇠도끼로 다듬어서

굵은 둥치는 기둥 삼고, 잔가지는 처어척 걸쳐 석가래로 삼고/쓰다 남은 달빛은 주렴으로 둘러쳐

<말의 오두막>을 세웠다.

논리만 앞세우던 내 관념이 달빛으로 어떻게 집을 짓느냐고 투덜댔지만 불쑥 내민 주둥이를 다독다독 밀어넣고 뜨락이 너무 허전하여 한림(翰林) 앞 바다 비양도(飛揚島)를 끌어다 놓았다.
-[말의 오두막집에서·15]

이 작품은 전체가 27편으로 이뤄진 연작시(連作詩)입니다. 어때요? 어떤 사람은 장난스럽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재미있다고도 하던데. 앞에서 인용한 김춘수의 병치은유 시와는 확실히 다르잖아요?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나, 전체가 하나로 통일되면서도 달빛이 동아줄도 되고 석가래도 되고…

이 시의 발상 과정을 말씀드리면 어느 달 밝은 밤, 하늘에서 쏟아지는 달빛을 보니까 꼭 동아줄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달빛→동아줄>로 치환했지요. 그리고 아주 굵고 튼튼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내친 김에 다시 나무로 치환하고, 주렴으로 치환하고, 그런 마술적 분위기를 빌어 관념이 내민 "주둥이"를 밀어넣는가 하면, 멀리 떨어져 있는 "비양도"라는 섬을 마치 정원의 작은 돌처럼 끌어다 놨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달빛>이라는 원관념을 그대로 드러내되 보조관념군을 이질적인 것으로 잡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사물을 다른 사물로 바꿔 쓰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다음 작품도 이런 방식으로 쓴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지만, 앞의 작품과는 또 다른 특징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말 속에는 말이 있고/말 밖에는 말이 있다.

말과 말 사이에는 빌딩이 있고 /빌딩과 빌딩 사이에는 구멍 가게가 있고/구멍 가게 한 가운데에는 꿈을 담은 사탕 항아리가 있고/그 뒤 쪽 지하실 계단 아래에는 빨간 장화를 신은 고양이가 있고/그 고양이는 밤마다 층계 위에 올라와 밤새도록 운다.

말과 말 사이에는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는 숲이 있고/발랑발랑 뒤집히는 물푸레나무 이파리들 뒤엔 명털 뽀얀 소녀들이 있고/깔깔대는 그 소녀들의 웃음은 화살이 되어/산등성이를 달리는 사슴 정갱이를 꺼꾸러뜨린다.

그러나 /지상의 말과 말 사이에는 또 다른 말이 있고/또 다른 말 내부에는 눈부신 이데오르기가 있고/이데오르기는 도시 상공에서 펄럭이는 깃발이 되고/펄럭이는 깃발은 저를 위해 다른 말들을 공격하고/사랑하는 사람들은 간혹 전쟁터에서 혼자 죽는다.

말과 말 사이에는/쓸쓸히 비가 내리는 바다가 있고/비내리는 바다에는 죽은 고래 한 마리가 있고/그 고래는 밤마다 제 짝을 찾아 울며 지구 저쪽으로 떠나고 /그래서 지상의 우리 사랑은 언제나 슬프다.
-[지상의 말과 말 사이에는]

이 작품은 어느 날 무심코 <말 속에 뼈가 있다>라는 말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뼈" 대신 "말" 바꿔 보았습니다. 그러자 말은 단순한 음성 기호가 아니라 입체적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말 밖에는 말이 있다."라고 하고, 말과 말 사이에 빌딩을 세우고, 구멍 가게도 만들고, 그 가게 밑바닥에 지하실도 만들고, 가게 밖으로 도시와 산과 바다 등을 만들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발랑발랑 뒤집히는 물푸레나무 이파리" 뒤에 "명털 뽀얀 소녀들"도 만들고, 깔깔대는 소녀들의 웃음이 "화살이 되어/산등성이를 달리는 사슴 정갱이를 꺼꾸러뜨"리는 세상도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다른 작품에서는 사랑하는 여인의 손등에서 팔락거리는 핏줄을 타고 그녀 속으로 드나들기도 하고, 주물럭주물럭 관념을 주물러 미인으로 만들고, 껴안고 뒹굴기도 하였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던 저는 한 동안 이런 방식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며 아주 흐뭇해하였습니다. 하느님처럼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게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언어를 의사 전달의 도구로 사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존재나 에너지 차원으로 이끌어 올리며, 단순한 상상력의 놀이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이제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논리와 철학을 생각하는 수단으로 삼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이런 작품을 쓰는 것도 시들해 하고 있습니다. 매일 똑 같은 작품을 쓰는 것도 그렇구…. 그래서 음향과 문자와 영상을 결합시킨 <멀티-포엠>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길랑 나중에 하기로 하고 이만 줄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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