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바다가 보이는 화장실" / 정호승

2008.07.25 00:20

이기윤 조회 수:969 추천:71

바다가 보이는 화장실 / 정 호 승


바다가 보이는 화장실에 앉아 똥을 누면
바다가 똥 누는 나를 엄마처럼 들여다본다
어떤 때는 파도를 데리고 달려와 들여다보고
어떤 때는 갈매기를 데리고 날아와 들여다보고
또 어떤 때는 고래 한 마리 데리고 달려와
똥 누는 나를 데리고 바다로 간다
나는 아기고래들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된다

내 어릴 때 첨성대 앞 초가집에 살 때는
문짝이 떨어져나가고 지붕도 없는
별이 보이는 화장실이 있었다
별이 보이는 화장실에 앉아 똥을 누면
아기별들이 와르르 내 가슴에 쏟아졌다
아기별들을 데리고 첨성대 창문 속으로 들어가
밤새도록 놀다가 창밖을 내다보면
별들도 똥을 누고 사라지곤 했다

나는 요즘 바다가 보이는 화장실에 가면
팬티까지 벗은 늙은 내 몸을
바다에게 보여주지 않으려고 얼른 창을 닫는다
죄많은 똥을 다 누고
은근히 창을 열고 바다를 바라보면
멀리서 섬들이 놀리는 줄도 모르고
수평선에 서서 오줌 누는 아이들이 보인다

회원:
0
새 글:
0
등록일:
2015.06.19

오늘:
0
어제:
0
전체:
74,0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