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검화순(勤儉和順) 친구야

2017.01.11 15:27

성민희 조회 수:871

근검화순(勤儉和順) 친구야

 

 

    여고 3학년 어느 날, 아버지가 손때 묻은 가죽 가방에서 공책과 서류를 모두 꺼내어 책상 서랍에 넣으셨다. “이제 이것 필요 없다.” 혼잣말을 하는 모습이 참 쓸쓸했다. 그 날 이후 저녁 늦은 시간에나 주말에만 뵐 수 있었던 분이 낮에도 집에서 신문을 읽었다. 바람이 심히 부는 날은 앞마당을 쓸기도 하고 날씨가 맑은 날은 개를 데리고 집 뒤 작은 동산을 오르기도 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아버지는 집에 계셨다.

 

   은퇴란 우리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만 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경란아, 너가 은퇴를 하네. 머리가 은색으로 변하면 하는 것인 줄, 얼굴에 앉은 주름이 제 자리를 잡고 편안해질 때쯤이면 하는 건 줄 알았는데 우리가 벌써 그렇게 되었구나. 너의 은퇴 소식에 새삼 우리의 지난 세월을 돌아본다. 그러고 보니 참 긴 시간이다.

 

   너를 처음 본 날이 생각난다. 중학교 2학년 때였나 보다. 나는 아침마다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수정동 시장통 앞을 지나 학교로 향하고 타교 학생들은 버스를 타러 부산진역을 향해 걸어갔다. 와글와글 내려가는 아이들 틈에 유난히 눈에 뜨이는 얼굴이 있었다. 커다란 눈에 완강하게 꼭 다문 입. 정갈한 교복에 단정한 걸음걸이. 내가 좋은 인연을 알아본 것일까. 처음 보는 모습인데도 머리에 강하게 박혔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스쳐 지나가며 너를 보는 것이 상쾌했다. 어쩌다 보이지 않는 날은 고개를 빼어 두리번거리기도 했다.

 

 

   그 해 여름 방학, 우연히 알게 된 어느 여전도사님의 소개로 범일동침례교회 학생회로 가게 되었지. 그런데 거기에 너가 있었다. 놀라운 한편 향긋한 정원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매주 토요일은 학생회 모임으로 일요일엔 예배 참석으로, 그렇게 해서 우린 친구가 되었다. 우리는 한 번도 같은 학교를 다닌 적도 없었고 한 동네에 살지도 않았지만 너는 내게 가장 소중한 친구가 되었다. 고국에 갈 때마다 아무도 못 만날 만큼 바쁜 일정에도 너 얼굴은 꼭 봐야 되는, 이제는 그리운 친구다.

 

   너는 언제나 어디서나 리더였다. 누구도 감히 견줄 수 없는 카리스마와 지혜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신비한 매력이 있었다. 무슨 일이든 함께 하고 싶고 어디든 같이 가면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교회 학생회에서도 너는 부회장으로서 우유부단하고 책임감 없는 남학생 회장을 강하게 질책하여 우리들 마음을 시원하게도 해 주었다. 그런 너가 정말 멋있었다.

고등학교에서는 학생회장으로, 대학교에서는 여학생 회장으로 맹활약을 하더니 사회에 나가서도 훌륭한 세월을 살았구나. 교육자로서 보람 있는 일을 했다며 성취감에 행복해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한데 어느새 교장 선생님의 직책을 잘 마친 자랑스럽고 흐뭇한 모습으로 은퇴를 하니 말이다.

 

   얼음이 꽁꽁 어는 추운 겨울 날. 너의 집에서 밤샘 시험공부를 하던 때가 떠오른다. 근엄하시던 아버지는 모습과는 달리 다정하게 인사를 받아주셨지. 착한 동생들은 언니의 친구를 반가이 맞아 주고 온유하고 정숙한 너의 어머니는 늦은 밤에 커피와 카스테라를 가져다 주셨다. 한 겨울인데도 너의 집은 참으로 따뜻했다. 어머니에게서 배어나오는 온기가 지금도 느껴지는구나. 너는 어머니에게서는 남을 배려하는 따스한 마음과 자신을 누르고 남을 올려주는 희생정신을 물려받았고 아버지에게서는 성실성과 카리스마를 물려받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어서 부드러움과 강인함을 함께 갖추기가 쉽지 않은데 너는 두 가지를 조화롭게 잘 아우르는 특별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

 

   근검화순(勤儉和順)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각난다. 근면하고 검소하고 온화하고 유순함. 어쩌면 너를 이렇게 잘 설명한 고사성어가 있을까 싶다. 한 가정의 엄마로서 사회생활을 훌륭하게 하면서 자녀를 양육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데 그것을 너무나 잘 해 내었다. 자랑스러운 아들, 보석같은 딸로 자녀들을 잘 키워내었고 사회적으로는 단체의 장으로서 맡은 직책에 충실하고 부지런했다. 온화함과 유순함은 햇볕같이 따사롭고 봄바람처럼 부드러워 너와 함께 한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틀림없이 행복했을 거야.

 

   경란아. 은퇴를 하는구나. 한 사회인으로서 살아왔던 직책의 문을 닫고 이제 또 다른 문을 여는 시간이네. 여태까지 잘 살아온 자신에게 칭찬을 해주고 새로 살아갈 자신을 격려해 주는 시간이다. 사람들은 Retire를 Re-Tire라고들 하더라. 여태껏 굴려왔던 타이어를 새로 갈아 끼운다는 뜻이래. 새 타이어로 바꾸었으니 더 힘차고 멀리 달려라. 지금부터 새로이 여는 시간은 오직 너만을 위해서 온전한 너만의 시간으로 살도록 하렴. 마음이 가는 곳에, 시선이 머무는 곳에 몸과 마음이 편안히 앉아서 영혼이 기뻐 뛰는 행복한 세월을 살기 바란다.

 

   내 사랑하는 친구 경란아, 인생 전반기를 빛내주는 훈장, 명예로운 은퇴를 진심으로 축하한다. 새로 열어 갈 후반기의 인생에도 하나님의 축복과 인도가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2016년 상당중학교 김경란 교장 은퇴 기념 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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