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희진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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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주제별로 살펴본 시집우울과 달빛과 나란히 눕다

전희진

 

1. 사물이 내게 말 걸어 올 때

 

백년 동안 몸을 풀지 않는 드가의 한 소녀를 위하여

 

잠깐 동작을 멈춘 소녀가

잠깐 동작을 멈출듯 소녀가

동작에서 멈칫멈칫 빠져나와

유연하게 팔과 허리를 구부리는,

사람들의 눈동자 속으로 빨려들어간 그녀가

어느새 군중들 틈에서

저를

미끄러지듯 흘러내려온

핑크빛 노을 한쪽을 잡아매는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자그마한 드가의 소녀상.  매일매일 그 소녀상을 마주하며 아무런 생각 없이 지냈습니다.  그로부터 몇 달이 흐른후 어느 순간  나는 그녀가 안쓰러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를 풀어주고 싶다는 충동을 받았습니다.  다만 그뿐, 한 두달이 더 지나갔습니다. 백년 동안  어느 예술가의 열정으로  굳었던 몸을.  그래서 시간을 거꾸로  rewind하여 시계의 태갑을 풀듯 내가 존재하고 있는 같은 시공간으로 옮겨 놓습니다.  뮤지움에서 생기 발랄한 그녀가 이제 호흡을 가다듬고, 어깨까지 흘러내려 온 리본을 가지런히 묶습니다.  이 시를 쓰고 나서 시의 매력에 더욱더  빠졌습니다.

 

2. 문학에 더 가까이

 

세상 밖에서 움직이던 사물들

 

 

    고물상에서 사 온 벽시계가 얼마 가지 않아서 서 버렸다

시계가 멈춰버리자

거실 고무나무 그림자가  해시계가 되어 지구를 돌렸다

잎들이 비로소 몸을 연 것이다

    벽이 소리를 멈추자

지붕이 빗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누워만 있던 아이가 방바닥을 기어 다니기 시작했다

아내의 잔소리가 길게 늘어졌는가 하면

세상 밖에서 움직이던 사물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소파가 치워지고 그 자리에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어섰으며

창밖 아몬드 나무에 하얀 얼음꽃이라도 매달린 날이면 그밤

짐승들의 발자국이 그 집을 에워싸기도 했는데

바람이 몹시 부는 날이면

엄마의 마른기침 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정지한 시간은 높고 흰 뼈대를 세상 밖으로 그대로 드러내었는데

       나무와 집 언덕길 개 짖는 소리 학교건물을 떼어내서야  비로소

거기 우두커니 서 있는

    그리움의 큰 키를 볼 수 있었다

 

 

**바람이 몹시 부는 밤에는 집안에서 아주 시끄러운 소리가 납니다.  사나운 짐승이 안으로 들어오려고 바둥거리는 소리 같기도 하고 또 어떨때는 기차가 지나가는 소리 등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벽시계가 멈춰버렸습니다.  그래도 겨울은 오고 크리스마스가 오고 눈이 오고

갓 난 어린아이가 이제 두 발로 걸어 다니고, 사물들이 시들기도 하고 죽기도 하고  없던 것이 생명을 받아 있어지기도 합니다.  시계가 없이도 이 집에 존재하는 사물들이  시계의 분침이나 초침의 역할을  대신 한다는 것을말하고 싶었습니다.

 

 

3. 현대인의 표상

 

어스름의 기분



 

 

세탁소 앞
마가목 이파리들이 일제히 손을 흔드는 동안

그녀는 시내버스를 세고 있다 가고 또 가고
가기 때문에 오는 버스들



이월이 마지막 바람을 부풀리고 있다
잔디밭 가로지르는 아이의 등에 노을이 불탄다
아이보다 덩치 큰 그림자가 아이를 어디론가 끌고 가고
먹구름과 먹구름 사이에 끼어서
수평으로 쏟아지는 노을
 
클리너스, 거꾸로 씌여진 알파벳을 읽으면서 손님이 가게 안으로 들어온다
찰강찰강 크리스마스 장식 방울이 금속성의 소리를 뱉어낸다

잠깐 걸려온 전화벨 소리가 2분의 기분을 먹어치우고

 

한 사내가 노란 깃발처럼 우뚝 서 있다
버스가 떠나도 길가에 그대로 서 있다
이미 거리는 헤드라이트 불빛과 테일게이트 빨간 불빛들로 출렁이고
그는 어둠의 마지막 증인이 되었다
 
빽빽이 들어선 나무숲처럼
컨베이어 벨트에 매달려 돌아가는 와이셔츠와 양복들이
유리창 밖을 일제히 바라다본다
어디로 내달을지 모르는 내일을 향해 그러나
옷걸이에 전시된 기분으로
어둠을 꿰뚫어 보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형광물질에 반사된 자신들의 민얼굴을 읽어낼 뿐이다

 

**모든 사물에는 표정이 있습니다.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표정이 달라지는 것은 저녁 어스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날 내가 본 어스름의 표정은  2, 바람이 불고 먹구름과 동시에 검붉은 노을이 드리마틱하게  온 하늘을 물들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바쁜 일상이  그 위에 펼쳐져 있었습니다.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종종대는 , 나는 거기에서 오늘을 사는 현대인의 모습을 그려 보았습니다. 

 


4. 실험정신이 보여주는 한 예:

9

 

햇살이 그늘을 자주자주 옮겼다

집 안팍을 들락날락

푹신한 베개를 가져오고

읽지 않을 책들을 평상으로 가져 왔는데

새파란 하늘이 못견디게 애처로워 보였다

블루베리 풍선껌을 씹는 아이로 착각할 뻔 했다

비행기가 하얀 실금을 긋고 지나간 뒤

파란 색 때문에

베개가 너무 푹신해서

다시 집안에 들어가서 자켙을 꺼내 입었다

사막에 핀 풀들의 이름을 아직도 몰라 늘 미안했다

흔들바위꽃, 하고 가만히 부르기도 하였는데

그네가 나를 밀 때마다 꽃들도 흔들렸다

왼쪽이 오른쪽으로

오른쪽꽃이 왼쪽으로 흔들렸다

생이 죽음 쪽으로 흔들릴 수 있을것  같았다  그럴수록

15분 마다 햇볕으로 더 나아가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렇게 지구는 돌고

태양은 줏대없는 사람처럼

자신이 넘어갈 산의 위치를 허겁지겁

이 산에서 저 산으로 옮겼다

우주의 모든 생과 사는 흔들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시를 단념하리라는 나의 굳은 생각도 흔들렸다  나는 또

햇볕 쪽으로 한 뼘 앞으로 나아갔다

맨발이  햇볕에 하얀 비둘기처럼 노출 되었는데

 

글이 무척이나 힘들 때 어느날, 나는 나를 내시경으로 찍듯 (생각을 포함한)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생생한 말로 표현하기로 했습니다.  문맥상 다소 매끄럽지 못한 부분은 거칠게 그대로 내버려 두었습니다.  때는 9월이었기에  그래도 다행입니다.

 

 

5. 시가 휴식을 주는 경우

귀휴

 

눈을 감고 있어도 저녁은 온다

단단하게 뭉쳐졌던 에어컨 바람들이 피식,

곪아 터진 소리를 낸다

눈을 감고 있는데 저녁이 온다

저녁이 매일 온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

저녁을 맞는다는 것은,

앞치마를  걸치고 부엌에 들어가

또 하나의 삶을 걷어 들이는 일 걷어 먹이는 일

눈을 감고 있으면

돌아온 새들의 날개 벗는 소리 들린다

떨어진 날개 주워 드는 땅거미들

차 엔진 꺼지는 소리

초인종 누르는 소리

매일 매일  머리 모양을 바꾸고 시작법을 바꾸고

아침을 바꾸고 점심을 바꿔도

저녁은 한결같이

젖은 나뭇가지에서 툭, 떨어지는 둥근 열매의 기척같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늦여름날의

 

**정신적으로 아주 힘들 때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힘들지만 감사의 마음에서 이 글을 쓰게 되어서인지 나는 가끔 이 시의 독자가 되어 제 시를 자주 읽었습니다. ‘젖은 나뭇가지에서 툭, 떨어지는 둥근 열매의 기척같이특히 이 대목에서 나는 충만한 즐거움, 충만한 행복, 충만한, 그 어떤 세계에 속하는 타자화된 나 자신을 보며 충만한 정신적 휴식을 얻곤 했습니다. 

 

 

 

6. 표제작

우울과 달빛과 나란히 눕다

-Jenga 게임

 

너라는 방을 치우니 순간 봄이 흔들, 한다 

가깝기 때문이다

봄을 겨울의 맨 윗목에 올려놓으니 그제야

한결 안정감이 있다 

네가 빠져나간 창으로 꽃샘바람이 항시 불었지

 

땅 밑에서 저녁 어스름과 만자니타 분홍빛

꽃봉오리를 받치고 있던 내가

달빛의 손에 나를 눕히자 흔들,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탄성이 새어 나온다

달빛과 내가 나란히 누웠기 때문이다

 

시도 때도 없이 새어나가는 기억이란 방을 꺼내어

겨울의 왼편에 앉힌다  세상이 흔들,

기억이 빠져나간 자리에

불분명한 하늘이 잠깐잠깐 쉬었다 가고


우울을 찾아내 나의 옆자리에 앉힌다  이제 세상은

무너질 듯 엉거주춤 불안정한 몸을 뒤틀고

와르르 무너지지 않기 위해

숨죽이며 몸에 힘을 빼며, 좀 더 신중하기로 한다

어디로 자신을 가둘지 그래서 얼마만큼 자유로워질지


**’의 부재로 해서 세상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게임은 진 자와 이긴 자로 판명이 납니다.‘무너질 듯 엉거주춤 불안정한 몸을 뒤틀지언정 나는 세상에서 무너지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삶과의 고투를 합니다매일  벌어지는 일상생활은 게임이라는 시적인식입니다여기서 중심 시어 몇을 주목합니다.

우울, , 봄 겨울, 꽃샘바람, 달빛, 저녁 어스름

사는 것은 다름 아닌 어디로 자신을 가둘지 그래서 얼마만큼 자유로워질지인데도 말입니다내가 오늘 가진 것은 우울 달빛 불분명한 하늘이 전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