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겨울

2002.11.27 05:32

김명선 조회 수:1860 추천:173

오늘은 육이오 기념예배였다. 그녀는 육이오하면 누구보다도 먼저 가슴에 와닿는 게 있었다.아버지의 사망, 오빠의 실종같은 비극이 그녀를 울리지 않고는 못배기는 말하자면 큰 상처를 다시 헤집는 꼴이었다. 그런 혈족의 사망은 당시로선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과 막막함으로 아득하다가도 세월이란 약이 있어 저절로 잊고 살아가게 마련이다.
그러나 첫사랑의 추억만큼은 새콤달콤한 것이어서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 때가 되면 식초뚜껑을 갑자기 연것처럼 콧속으로 핑하고 강하게 올라오는 자극이 가슴을 요동치게 만들기도 한다. 그녀는 설교가 끝난 후 헌금을 하려고 봉투를 꺼내다가 주보에 눈이갔다. 광고면에는 구역예배와 새 신자 소식란이 있었다.
이씨네, 오씨네, 김씨네, 또 이씨네, 네가정이구나, 하다가 그녀의 눈이 한곳을 주시했다.
이영호, 이수지, 이인화, 이기택, 이택성.
이택성? 이택성? 꿈에도 못잊던 이름이 거기있었다. 참 이상했다. 동명이인일까? 이영호가 호주니까 그의 아들? 그러나...... 이기탁과 이택성은 돌림이 아니고, 형제치고는 좀 그렇고...... 정여사의 가슴에 조용한 파문이 일었다.

1951년 1월
평양탈환이란 소식에 통일이 곧 될 줄 알았던 국민들은 이차 퇴각이란 말에 다시 또 보따리를 이고지고 남으로 남으로 피란길에 올랐다.차를 얻어탈 수도 없었던 그녀와 식구들은 화물차칸에 짐짝같이 내던져져 피난을갔다. 그나마 못 얻어탄 사람들은 화통 위 기차 지붕에 매달려서 아슬아슬하게 타고가야했다.
전쟁은 사정이없다. 사대독자 와아들이나 과부의 씨암탉같은 자식도 상관하지않고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공부 잘하고 장래가 촉망되던 반장집 큰아들, 여학생 꽁무니나 쫓아다니던 여드름투성이 고등학생,허무주의에 빠져서 ' 니체'를 끼고 다방구석이나 죽이던 백수, 두메산골에서 흙이나 파던 떠꺼머리 총각들까지 훈련 한번 못받고 잡혀와, 처참한 동족상잔의 싸움터에서 이슬로 사라져갔다. 그래도 봄은 찾아와 꽃잎처럼 진 청춘을 통곡해줬다.피멍이 맺혀 빨간 진달래가 되었고, 주인없는 무덤가에 개나리로 피어 조화가 되주었다.
여자들의 가슴 설레는 봄이라지만, 피난민들 은 누울곳과 먹을 것 걱정부터 해야했다. 학교는 아직 문을 열지도 않았고 입하나라도 덜자고 그녀가 한 일은 군병원 보조간호사였다.
전선에서 밀려드는 부상병들을 간호하기에 손이 모자라는 군 당국은 고등학생들까지도 모아 군인들을 간호했다. 몇 안되는 군병원은 넘쳤고 병실은 없어 국가에선 지방 곳곳의 중고등학교 건물까지 접수해 환자들을 수용했다. ㅇ시의 농업고등학교 건물도 육군병원이 접수해버렸다.
밤마다 정거장에는 괴물같은 기차가 기적소리도 못지르며 죽어가는 부상병들을 실어다가 쏟았다. 등하관제로 깜깜한 도시엔 피냄새와 신음소리만 하늘에 닿았다. 그나마도 병실은 찼고 복도에 놓여진 단가에선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환자들이 그대로 죽어가도 속수무책이었다. 어떤 어린병사는 총알이 머리에 밖혀 엄마를 밤새도록 부르다가 새벽에 숨을 거두기도 했다.
간호장교, 군의관들 그리고 학생 간호원들은 자다가도 기차가 도착했다는 사이렌이 울리면 뛰쳐나가 몰려드는 환자들을 받았다.

2

다음 주일에도 그녀는 이택성씨네 가족을 못 찾앗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아닌 비밀을 간직하게 된 그녀였다. 지금와서 그를 만난다고 무슨 뾰죽한 일이 있을 리 없다. 육십이 다 된 처지에 만난들 무엇하겠는가......
흔히 사람들이 상상하는 그런 욕심으로 그를 보고싶은 게 아니다. 머-언 세월 속에 묻어버린 추억, 추억때문이다. 건망증으로 어제 일도 깜빡 거리는데, 왜 머-언 옛날 일은 생감스럽게 어제 일 처럼 생각이 나느냐 말이다. 체면때문에 꽁꽁 쌈지 속에 싸 넣었던 첫사랑의 추억이 주보에 적힌 이름자 하나에 요동을 친 것이다. 그녀는 교인들을 유심히 살폈지만 이택성씨네 가족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교회 사무실에 알아볼 수도 있지만, 혼자 사는 과수댁이 터놓고 남의 남자를 찾는 다는 게 낯뜨거운 일이었다.혹 말 하기 좋아하는 여집사들의 입방아에 오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우연히 주차장에서 차를 내리다가, 또는 예배당 입구에서 들어가고 나가다가 마주쳤으면 했다.
그 날도 주보를 살피던 그녀 눈에 띈 것은 구역예배 소식이었다. 이영호씨네도 자기 동네인 ㅇ 구역이었다. 그리고 그 집에서 구역 예배가 있다는 광고였다. 응당 참석해야될 것인데 그녀는 공연히 가슴이 콩닥거렸다. 동명 이인이겠지...... 아니 그일까? 그럴 수가 있을까?
그녀는 만가지 생각에 잠을 설쳤다. 그리고 지나온 삶의 터넬 속으로 어느새 돌아 가 있었다.

3

밤새도록 소리치며 살려달라고 아우성 치는 부상병들 사이에 유독 말없이 고통을 지긋히 참는 이택성이란 장교가 끼어있었다. 출혈로 인해 혈색을 잃고 창백하게 눈을 꼭 감고 누운 다리엔 박격포 파편이 깊게 박혀있었다. 피가 말라 서로 엉겨붙은 붕대를 퉁퉁 부은 다리에서 풀지 못하고 의료진들은 찢어내고 치료를 했야했다. 그녀의 따뜻한 손이 그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드레싱을 할때 그가 눈을 떴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게 됐다. 혼자 죽을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한치라도 알던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기쁨 이상의 것이었다. 둘은 한 고향의 선후배 사이었다.
나 제천 아무개 초등학교에서 본 것 같지 않소? 어머- 저도 거기 나왔어요. 그렇구나 어쩐지 낯이 익더라니......나 35횐데. 난 38회. 그녀는 학급 대표로 어린이회의 때마다 참석을 했고, 전교 어린이 회장이었던 택성을 기억하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공부 잘하고 통솔력이 뛰어났던 오빠인 그를 그녀는 은근히 좋아하기도 했었다. 3학년 짜리 계집애였던 자기를 남달리 귀여워해주던 오빠였다.
전시엔 사람들이 사랑도 쉼게 했고 해어짐도 많았다. 오늘 죽을 지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하루살이 인생이었다. 잠깐 스치는 낯익은 얼굴에도 반갑다 못해 붙잡고 만리장성을 쌓는 일도 많았다.
그는 총상 입은 다리를 절룩거리면서 의무실에 늘 치료차 다녔다. 그보다 그녀와 대화하는 것을 더 즐겼을 것이다. 사랑은 보이지 않는 사이에 가만히 둘의 가슴에 나비처럼 날아 와 앉았다. 유행가 가사처럼......
당시 젊은이답게 그도 전쟁을 혐오했다.피기도 전 강제로 지는 꽃인 자기들의 처지를 자조적 어조로 비관하곤 했다. 그는 문학을 좋아했고 철학 쪽에도 식견이 높아 칸트를 말하고 루쏘를 논했다. 그 절망의 계절에 문학을 논한다는 것은 철없는 치기였겠지만, 그녀는 그의 고상한 지식과 이상에 존경과 이해가 더 한층 깊어졌다. 그의 사료있는 언행이나 따뜻한 마음 씀씀이는 그녀를 완전히 매료시켰다. 그녀의 눈에는 그가 꼭 모윤숙작 '렌의 애가'에 나오는 시몬처럼 느껴졌다. 나중에 정말 그는 시몬이 되버렸지만......
그의 상처는 젊기때문에 쉽게 아물어갔다. 한달이란 세월은 그들에게 총알처럼 빨리 지나갔다. 그는 다시 군무에 복귀해야했고 그들은 이별해야했다. 기약없는 이별이었다. 전시에 가족도 뿔뿔이 흩어지면 못 찾던 시기였으니까......
보충대로 가서 어느 전선에 다시 배치되어 운좋으면 살아서 만날 수 있을 거고, 아니면 영 다신 못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사랑의 표시로 주고 받을 것이 없었다. 단지 그가 내민것은 자기 어머니가 준 은가락지였다. 한짝은 자기 손에 한짝은 그녀 손에 끼워주었다. 서울이 수복되는 해에 첫번 크리스마스 이브에 서울 역 앞 시계탑 아래서 만나자는 약속을 굳게 했을 뿐이었다.
이승만 박사가 아무리 반대해도 전쟁은 열국의 결정대로 휴전으로 들어갔다. 그녀도 서울로 와서 복교를 했다. 그러나 이택성 소위의 생사는 알길이 없었다. 대구 보충대에 있을 때 한번 소식이 왔고, 다음은 어느 전선에서 긴 편지가 왔을 뿐이었다.

[ 별을 보며 이글을 쓴다. 너의 하얀 얼굴이 저 별에 비치어 내게로 보내진다면 얼마나 좋겠니. 한 번뿐인 삶이고 한 번뿐인 사랑이다. 내 요행이 살아서 널 다시 볼 수 있다면 이 흙 위에 누워서도 기쁨의 꿈을 꾸리라.
명희!
정말 한 번이라도 보고싶구나.
잘 참고 기다리자.
꼭 살아 돌아가겠다. ]

그의 부대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볼 수도 없었고, 군에서는 기밀을 쉽사리 알려주지도 않았다.이동을 했는지 전멸을 했는지 그에게선 소식이 없었다. 부부라도 헤어지면 연락이 안되는 민족의 혼란기였으니......

4

수복 후의 서울 거리는 황량했다. 엎어지고 뒤집어져 깨어진 보도엔 프라타나스 잎들이 떨어져 바람에 굴렀고, 부서지고 망가진 건물과 타다남은 집터엔 찢어진 조각달이 겨울 준비도 없는 시민들을 더 구슬프게 했다.사람들은 우선 먹을 것 걱정부터 해야했다. 그녀도 친척을 찾아 시골로 식량을 구하러 다녀야했다. 다방마다 직업을 찾는 무리, 친지의 안부를 묻는 사람들로 초만원을 이루고, 길엔 부모잃은 전쟁 고아 거지떼가 넘쳐흘렀다.그녀도 감상에만 젖어있기엔 현실이 너무 각박했다. 생활을 책임질 아버지가 없는 그녀에겐 돌보아야될 동생이 둘이 있엇다.
그들을 모두 복학을 시켜야했고, 자신도 복교를 했다. 어머니의 고생은 말이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그녀는 이택성을 만나기 위해 크리스마스 이브에 서울 역 시계탑 아래서 밤이 지새도록 기다렸다. 그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기다렸다. 무려 9일 간이나 초하룻날 밤까지 기다렸다. 다음 해에도 그 다음 해에도 그녀는 남들처럼 크리스마스 기분에 들떠 명동거리를 배회하지도 못하고 그를 기다렸다.
창문을 스치는 바람에도 깜짝 놀라 귀를 기울이고 그가 다니던 대학에도 학기마다 등록 여부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1955년 가을이 다 가고 그녀가 학교를 졸업해도 그에게서는 소식이 없었다. 캠퍼스에서 군복을 입은 학생을 보면 깜짝 깜짝 놀라 앞으로 뛰어갔다. 당시엔 현직 군인학생이 많았다. 그들은 군복을 그냥 입고 등교하는 게 허락됐다. 동창이나 선배가 호의를 갖고 다가오면 고개를 돌렸다. 괜찮은 남학생의 구애도 거들떠 보지 않았다. 기다림으로 청춘을 다 보낸다해도 좋았다. 어머니는 그런 딸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좋은 신랑감이 있는데 이 기회를 놓치면 난 이제 다신 널 안보겠다. 전쟁에 끌려가 똑똑한 청년들은 다 죽었다. 한 남자에게 여자가 한 트럭씩 배당이 된다더라, 어쩌려고 말을 안듣냐? 에미 복장 터져 죽는 꼴을 봐야 하겠니? 어머니는 그녀를 매일 닥달거렸다.
그녀는 어머니의 독촉을 못 이겨 결국 결혼을 했다. 첫애를 밴 그녀가 출산 준비로 어머니와 함께 백화점엘 들렀다. 배는 달이 차서 남산처럼 불렀고 다리까지 퉁퉁 부어 몰골이 흉했다.
택시를 잡으려고 기다리던 그녀가 길가에서 그와 비슷한 사람을 만났다.
길 건너 보도에서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키가 큰 청년이 있었다. 그와 너무 닮았다. 분명 그였다. 옆구리에 목발을 짚고 서있는 남자의 우수어린 모습, 그녀가 뛰어가려는 찰라 그가 획 옆에 와 선 택시를 잡아타고 사라졌다.
비로소 그녀도 자기의 불거진 배를 내려다 보았다. 부끄러움과 후회가 왈칵 몰려왔다.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운명의 길은 같은 평행선이었다. 서로 소식도 모르고 어느 하늘 아래 살아야 했다. 무사히 살아만 달라고 멀리서 기원이나 해야했다.
때때로 그녀는 그의 꿈을 꿨다. 남편의 팔에 안겨 자면서 그의 꿈을 꿨다. 꿈속에서는 가슴이 아프고 쓰려 붙잡고 엉엉 울다가 깨고나면, 남편이 당신 잠꼬대가 심하군, 고단한가 부지, 했다. 그렇게 삶은 하루하루 지나갔고, 줄줄이 아이가 태어나면서 첫사랑의 상처도 슬그머니 빛을 바래갔다.
아니 어느 몸속의 부분 깊숙이 침잠해 간 것이었다.더더구나 이민을 오고선 그를 다시 만날수 있다는 확률은 훨씬 더 절망적이었다.
그녀는 구역예배에 참석키로 했다. 요행이 그를 만날 수 있다면 남들 앞에 태연히 인사나 해야지, 그저 아는 사람을 만나듯.
이영호씨네 집은 알고보니 바로 자기 아파트 뒷골목이었다. 문 앞엔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었고 드라이브 웨이는 맨발로 다녀도 좋을 만큼 말끔했다. 초인종을 누를 필요도 없이 현관은 열려있고, 벗어놓은 신발들이 많은 것이 교인들이 벌써 많이 온 모양이었다. 이십여명이 모인 거실에서 예배는 시작되고 있었다. 이영호씨인 듯한 남자가 문 앞에 앉았다가 손님들에게 인사를 했다. 그녀도 조용히 말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예배가 끝나고 가족 소개가 있었다. 그녀의 가슴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목사의 소개로 이영호씨네 가족이 나와 섰다. 사람들의 시선따라 그녀도 눈을 한곳에 집중했다. 아이 둘과 이영호씨 내외가 섰을 뿐이다.
" 장로님께서는?"
" 아버진 몸이 불편하셔서......"
며느리의 말이 떨어지는데 안에서 큼큼 거리는 기침소리가 났다.
" 죄송합니다. 제가 약을 먹었기 때문에 좀 누워있었습니다."
한 키가 큰 노인이 걸어나왔다.
아-!
그녀의 영탄이 터질뻔 했다.
낯익은 얼굴의 키큰 노인이 꿈결처럼 걸어왔다.
양볼은 기름끼가 빠져 조금 쳐져있고 눈거풀이 내려앉아 가느러진 두눈, 그러나 반짝거리는 생기는 옛날을 능히 기억나게 했고, 전보다 조금 길어진 목에 거미줄처럼 나이테가 걸려있는 노인. 그가 유령처럼 그녀 앞에 나타났다.
햇수론 사십여년이 지났건만, 그녀의 뇌리엔 그의 모습이 또렷했다. 아무도 모르게 정명희 권사는 눈물을 닦았다. 그의 눈빛이 번쩍 했다. 여전히 사람을 앞도하는 힘이 있었다. 모두들 반쯤 일어나는 자세로 인사들을 했다.

" 아버님께선 육 이 오때 서부전선에서 부상을 당하시어 그 후유증으로 아직도 몸이 완전하시지 못하십니다. 지금은 이정도로 혼자 기거하실 수 있지만, 당시엔 삼년간이나 거의 식물 인간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만큼 회복하시어 미국가지 오셨지만 지금도 병원에 다니고 계십니다."
아- 그래서 ....... 그는 날 찾지 않았구나. 그녀 가슴이 몹시 아파서 조여왔다. 아들도 말을 하다가 목이 매이는지 말끝을 흐렸다.
" 감사합니다. 이렇게 많이 와주셔서, 우리집이 아주 복을 많이 받게 되겠습니다."
그의 인사말에 모두들 힘껏 박수를 쳤다. 식사 기도가 끝나고 저녁을 먹는 시간이었다. 교인들은 삼삼오오 가까운 사람들끼리 모여앉아 음식을 들었다. 그녀도 접시를 들고 슬그머니 이택성씨 곁으로 갔다. 그가 눈이 부신 듯 끔뻑 거렸다. 갑자기 시력을 잃은 사람처럼 망연히 바라만 보았다. 그러더니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정명희지?......"
느리게 묻는 어조에 깊고 끈끈한 정이 묻어나왔다. 오랫동안 감추어뒀던 보석을 꺼내보는 조심스러운 환희가 느껴졌다.
" 알아보셨군요, 잊은 줄 알았는데......"
그녀가 흔들리는 마음을 감추려고 눈을 음식에서 떼지않고 고요히 말했다.
" 잊을 리가 있겠소, 하룬들......"
잠시 둘 사이엔 침묵이 흘렀다.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여자의 눈에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 언제 이곳에 오셨어요?"
여자가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열었다.
" 이년 됐소."
" 그러셨군요."
' 반갑군 만나서......'
떨리는 남자의 목소리에서 허무가 짙게 배어나왔다. 거기엔 이제야 만났구나, 하는 뜻과 이제 만나서 뭘 어쩌겠소, 하는 의미가 포함되어있는 것 같았다. 그녀도 거의 다 잊혀진 자난날들, 제대로 기억도 날리 없는 그 날들, 눈보라에 동동 발을 구르며 시계탑 아래서 서성이던 그 날들이 억울해 새삼 눈물이 쏟아졌다.
남자가 상에서 냅킨을 얼른 집어 그녀 손에 쥐어줬다. 남자의 눈도 벌겋게 충혈이 돼 먼곳을 응시했다. 여자는 남자에게 벌컥 안기고 싶었다. 마음은 그렇지만 남들 앞에 말없는 석고상처럼 묵묵할 수 박에 없었다. 아들이 눈치를 채고 가까이 다가왔다.
" 두분 서로 아시는 사입니까?"
" 그래, 고향 후배지, 오랜만에 만났구나, 인사드려라."
" 두분 퍽 반갑겠어요. 축하합니다. 이야기 많이 나누십쇼."
아들이 멀어져갔다.
"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 여전해."
" 오빤, 무슨 소리, 나이가 얼만데..."
"......"
" 한 가지 꼭 묻고 싶은 게 있어요."
" 알아, 뭘 말하려는 건지, 내 다음에 다 말하리다."
그가 아주 슬픈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먼 곳을 바라보는 사슴같이 그렇게 슬픈 눈이었다. 그녀의 머리속에 영원히 지워지지않을 것 같은 비애가 물기를 머금고 고여있었다.
" 자 식사 많이 해요. 늙으면 먹는 것으로 버티는 거니까"
퍼뜩 생각이 난듯 그가 눈길을 돌리며 그녀에게 음식을 권했다. 그러더니 그가 목사 앞으로 갔다.
" 목사님 이렇게 좋은 기회를 마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고향 후배를 수십년만에 만났습니다. 제가 아주 귀여워하던 동생입니다."
" 아- 그렇습니까?, 축하합니다. 정말 잘됐군요."
목사도 그들에게 기뿐 눈으로 축하를 했다. 그러나 그녀 눈엔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비쳤다.눈앞에 지금 일어난 일들이 실감이 안났다. 남자가 어딘가 숨었다가 갑자기 툭 튀어나온 유령처럼 느껴졌다. 그렇게도 찾던 사람이 이제 누렇게 빛바랜 그림 속에서 히쭉 웃는 상상으로 몸이 떨렸다. 아무도 없다면 그의 멱살이라도 잡고 한 없이 울고 싶었다. 아니 정말 그가 진짠지 만져보고 확인하고 싶었다.

목사와 교인들이 다 떠나고 그녀만 남았다. 그대로는 도저히 갈 수가 없기에 아들 영호가 잡는대로 주저 앉아있었다.삼십 중간쯤 돼 보이는 아들은 사람이 착해보였다. 몸집이 약간 비대한듯 한데 좋은 호인타입이었다.
" 오랜만에 만나셨으니 권사 님은 좀더 남으셔서 이야기들을 하십시오."
그녀는 못이기는 척 앉아있었다.아들며느리는 손님 뒤처리로 부엌으로 갔고, 아이들은 자기들 방에서 닌텐도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다.
" 몸이 아직 안좋으시다고요?"
" 총알이 꺼낼 수 없는 부위에 박혀 때때로 통증이 심히 오는군."
" 다리는 어떻세요?"
" 아프진 않지만 오래 걷거나 한참 서있으면 힘이들지."
그녀는 그의 희끗거리는 머리를 바라보며 세월을 헤어보았다.
" 기다렸어요, 칠년을 해마다 시계탑 아래서..."
" 알고 있어 !"
" 알면서 왜 안 왔어요?"
" 처음 삼 년은 몸을 움직일 수 없었고, 나중엔 불구인 나를 보이고 싶지 않아서."
" 흑..."
그녀 입에서 드디어 신음같은 울음이 가늘게 터져나왔다.
" 54년 겨울이었지. 먼 발치에서 눈을 맞으며 동동거리는 명희를 지켜보다가 하마터면 뛰어갈 뻔 했었지."
" 어머, 어쩌면 그 때 달려왔어야 했어요."
그녀가 눈물 젖은 눈을 똥그랗게 뜨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 아니지, 안 그러길 잘 했지. 명흰 앞길이 구만리고 좋은 남자 만나 결혼해야 했지."
" 제 마음 아시면서... 난 오빠가 다리 한쪽이 없어도 좋았고, 두 다리가 불구였어도 좋았을 거예요."
" 그래?......"
그가 또 다시 그녀를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아까보다 더 슬픈 눈이었다. 그렇게 맑고 슬픈 눈은 어디서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 난 여자를 안을 수 없는 몸이야, 총알은 나의 남성을 빼앗아갔어. 저 애는 형님에게서 양자로 받은 자식이지."
그가 남의 이야기라도 하듯 담담히 말했다.
" 그럴 수가, 그럴 수가..."
그녀는 잘못 들었나 하다가 그의 얼굴을 보고 기가 막혀 한 동안 할말을 찾지 못했다. 그가 굳어지는 얼굴 근육을 펴서 억지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응시했다.그녀 가슴이 찢어지듯 통증으로 답답해졌다. 그런 줄도 모르고 원망만 하던 사랑, 너무 그리워 미워하던 사람이었다.
" 내 얘기만 했군, 명흰 어때? 행복해 보이는데."
" 혼자 됐어요, 삼년 전에. 아이들은 다 분가해 살고 홀가분해요. 이젠 오빠와 매일 만나도 말릴 사람 없어요."
" 그랬었군, 다 지나간 일들이야, 과거는 잊고 살자."
" 그래야겠죠, 과거는 돌릴 수 없으니까."
" 앞날이 지나간 날들보다 짧아요. 남은 날들이라도 몇배 더 기쁘게 살면 돼."
" 그래요 우리 다시 시작해요."
그가 고개를 끄떡거렸다.

5

아파트로 돌아 온 그녀는 밤새 잠을 못 이뤘다. 베란다의 유리문을 통해 보이는 주차장엔 가로등이 깜빡깜빡 졸고 있었다. 노인아파트인 그곳은 밤늦게 들락거리는 차가 없었다. 고요한 정적이 흐르는 방안엔 불빛만 그녀의 희끗거리는 머리를 은빛으로 반짝 빛냈다. 밤은 깊어가지만 그녀의 의식은 점점 맑아지기만 했다.
' 그래, 그에게서 받은 가락지...'
혼잣말을 하면서 그녀는 황급히 서랍에서 작은 상자를 끄집어냈다. 잊어버리고 살아온 삶의 때가 까무스름하게 반지에 끼어 있었다. 그녀가 왼쪽 중지에 반지를 끼어보았다. 반지는 안 들어갔다. 주름지고 매듭이 굵어져 손가락에 맞지 않았다. 무명지에 겨우 들어갔다. 벌떡 일어선 그녀가 치약을 묻혀 닦았다. 감추어졌던 광택이 반짝 빛났다. 빙그레 웃으며 그녀는 반지를 그냥 끼고 내일 그에게 보여주겠다 생각했다.
그의 손을 잡고 야외라도 드라이브해야지 생각하니 저절로 웃음이 났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그의 전화를 기다렸다.외출도 않고 온종일 기다렸다. 기다리고 기다려도 전화는 오지 않았다. 문앞을 지나가는 발자욱 소리에도 신경이 씌었다.주소를 알아가지고 갑자기 불쑥 나타날 것만 같아 안절부절했다.
내가 왜 이래, 이제 만나 뭘 어쩌겠다고 이렇게 기다려... 팽팽하던 다리에 기름이 빠져 좋은 옷을 입어도 바지가 걸어가는 것 같은 영감들의 뒷모습이 생각났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전화기를 노려봤다. 아니 무슨 자존심이야, 자기가 먼저 거는 게 순서 아냐, 흥 내가 얼마나 많은 세월을 기다렸는데, 이젠 자기가 먼저 찾아와야지...전화는 다음날도 그 다음 날도 울리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그녀가 송수화기를 들었다. 전화가 여러번 찌르르댄 다음에야 아이가 받았다.
" 아니 왜 전화를 안 받니? 할아버지 바꿔라."
그녀가 짜쯩 섞인 목소리로 아이에게 화를 냈다.
" 할아버지 안계셔요, 병원에 가셨어요."
" 그래? 언제 오신댔니?"
" 몰라요, 할아버지가 많이 아프시대요."
" 왜? 언제부터?"
그녀는 가슴이 덜컥했다. 걱정이 됐다. 아- 그래서 소식이 없었나?
" 엄마는 어디갔니?"
" 엄마 아빠 다 병원에 갔어요."
아이에게 더이상 묻질 못하고 그녀는 수화기를 놓았다. 저녁때 다시 전화를 했다. 아들이 받았다.
" 아버님이 편찮으시다니 어찌 된 일이요? 많이 아프신가요?"
" 네, 혼수상태십니다."
" 뭐라고요? 혼수상태라니? 사람도 못 알아보신다는 거요?"
그녀는 기가 막혀 말이 안나오고 눈물이 앞을 가렸다.
" 뇌졸중이십니다. 눈도 못뜨시는데요."
" 언제부터 그렇게 되셨어요?"
" 주일 저녁에 좀 늦게 주무셨습니다. 그래도 아침엔 그 시간에 꼭 일어나시는데 안 일어나셔서 들어가 뵈었더니 혼수 상태셨습니다."
그녀는 자기를 만나고 흥분하여 그렇게 된 것같아 마음이 괴로웠다. 날 만나고 얼마나 쇽크를 받았기에 그렇게 됐을까? 하는 마음에 미칠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병원에 갔다.간호사들이 있는 사무실에 가 환자 상태를 알아보았다. 아, 이택성씨말예요? 오늘 아침에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옮겼어요. 눈을 뜨셨어요. 며칠 더 상태를 봐야 되겠지만 참 다행이세요, 했다.
그녀가 조용히 병실문을 열고 들어섰다. 환자는 산소 호홉기를 얼굴에 대고 누워있었다. 그녀가 가까이 갔다. 환자의 눈이 그녀에게도 쏠리더니 크게 확대됐다. 차차 눈에 생기가 돌면서 그녀를 알아보고 껌뻑 했다.말은 못해도 눈빛이 밝아졌다. 그녀가 그의 손을 더듬었다. 그의 손엔 한쪽 은가락지가 끼어져있었다.
" 오빠, 이것 끼고 있었구려, 나도 여기 끼고 있어. 이제야 제짝을 찾았는데 왜 아파?"
그녀가 손을 치켜올려 보이며 하는 말을 듣고 그가 눈을 또 크게 끔뻑거렸다. 반갑다는 표시인 것 같았다.그녀가 오랜 기도를 하고 그의 곁에 앉아 손을 잡아주며 여러가지 말을 했다.
하나님께 그를 조금만 더 살려달라고 간절히 간구했다. 며느리가 들어왔다. 방문해 주셔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 소리를 듣고 그녀는 일어서야겠다고 생각했다.
" 내 갔다가 내일 또 올테니 얼른 나아서 일어나셔요. 그리고 나하고 바닷가에 가서 게도 먹고 바람도 씌고 합시다."
소리를 알아들었는지 그가 눈을 끔뻑했다.

다음 날, 그녀가 병원 문을 들어서는데 아들과 마주쳤다. 그는 얼굴이 초췌해져있었다. 쯧쯧 잠도 못자고 간호를 한 모양이군, 그녀가 생각하며 다가섰다.
" 오셨군요, 이렇게 모두들 회복을 기다리는데 아버님은 먼저 가셨어요."
" 뭐라고요? 집으로 가셨나요?"
" 하늘 나라로 오늘 아침 가셨습니다. 흑..."
아들은 고개를 푹 수구리고 눈시울을 닦았다.
그녀는 섰던 자리에서 쓰러질 듯 의자에 주저 앉아버렸다.
" 가다니, 안돼요, 안돼. 이제야 만나걸, 어젠 생기가 나고 일어날 것 같았는데 무슨 소리야..."
체면도 염치도 없이 그녀는 소릴 내 울고 말았다. 날 보려고 눈을 떴었단 말인가, 일어날 줄 로만 알고 마음을 놓았었는데,가버리다니......

" 그럴 순 없어요, 정말 아버님은 가셨단 말이요?"
그녀는 그의 죽음을 봐야 믿을 것 같았다.
" 어디 모셨어요? 내가 확인을 해야돼요."
그녀의 태도에 놀라버린 아들이 그녀를 붙잡고 위로를 해야했다. 마지막 보게 해달라고 떼를 쓰는 그녀에게 아들은 벌써 시신이 장의사로 옮겨진 후라고 그녀를 달랬다. 잠깐의 만남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 줄 알았다면 몇시간이라도 더 곁에 있어줄 걸... 마지막 말 한 마디도 없이 갔구나. 그녀는 실신하다시피 돼 아들의 팔에 의지해 병원 문을 나섰다.
" 아버님은 이번이 세 번째 졸도셨습니다. 세 번째는 어렵겠다고 의사가 말했지만, 그래도 눈을 뜨시기에 회복되실 줄 알았지요."
아들이 그녀에게 한 말이었다.

6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 가 만나리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 가 만나리

참다가 터져나온 정명희 권사의 흐느낌 소리가 간간히 찬송 소리와 섞여져 들렸다. 아무리 자제하려해도 뱃속부터 올라오는 슬픔을 막을 수 없는 정 권사였다. 시공을 초월해 옛날로 돌아 가 그녀는 그의 넓은 어깨에 매달렸던 소위 계급장 ( 당시엔 그걸 밥풀딱지라도 놀렸다.)도 생각났고, 군복을 단정히 입고 작별 인사라고 거수 경례를 해서 웃기던 모습도 생생했다.
농업고등학교 건물 뒤에 있던 작은 동산에 올라 망향의 노래를 부르던 그의 베이스 목소리, 할미꽃을 꺾어 반지를 만들어 끼워주던 모습까지 눈에 환히 보이는 듯 했다. 몸이 거의 다 나을 무렵, 각기 따로 외출 해 남몰래 데이트를 하던 일, 돌아오던 길이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라며 걷던 신작로, 그 길 끝에 펼쳐진 저녁 노을의 장엄하고 아름답던 추억......
돌연 붉고 너울거리는 빛이 그녀의 작은 몸을 감쌌다. 순간 그가 공중에서 웃고 있었다.
" 나쁜 사람 그렇게 찾다가 만났는데 무엇이 바빠서 만나자마자 가버린단말요?"
그녀가 중얼거리다가,'아멘' 하고 끝나는 기도 소리에 정신이 확 들었다.
이생에선 어긋나기만 한 삶, 숨바꼭질만 한 사람, 내 이제 다시 만나면 헤어지지 않으리, 하나님도 우릴 불쌍히 여겨 천국에선 한자리에 살게 하겠지.
" 잘 가소, 내 곧 따라가리다."
그녀가 마지막 드린 기도였다.
하관식이 끝나고 교우들이 관 위에 꽃들을 뿌리는 순서였다. 그녀의 손에서도 하얀 장미 한 송이가 관 뚜겅 위에 눈물처럼 '툭'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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