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김창현옥고

2012.08.18 13:33

김영교 조회 수:446 추천:8

아! 미국아, 너 왜 이모양이니...
9 김창현  
    
장면 하나--우리 집 이야기.

저녁 6시가 지나 거의 동시에 집에 들어선 아들 내외가 심각한

표정으로 수근 거렸다. 아들에게 무슨일이 생겼느냐고 물었더니

며느리가 미서부지역 4개회사 경리일을 몽땅 떠 맡았단다.

며느리가 나가는 회사는 모제약회사인데 이제까지 한회사의

경리만 담당했는데 이제부터 미서부지역에 있는 4개회사 통째

다 안긴거다.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손녀둘을 어떻하나!


샌프란시스코에 하나, 산타바바라에 하나, LA주변 두군데.

진급이나 년봉도 한푼 더 안올려주고 일만 4배로 늘어 났단다.

샌프란시코도 또 본사가 있는 뉴저지에는 비행기 타고 출장을

자주 가야하고 산타바바라는 운전을 하고 오르내려야 한단다.

세회사에 일하던 CFO들은 어디로 갔느냐니까 구조조정 한다고

다 내보냈단다. 다섯살, 두살짜리 애둘을 키우며 어떻게 4회사를

다 맡아 볼수 있을런지... 목이 짤리지 않은것 만으로 후유하고

럭키라고 살아야 하는지. 하나 좋아진것은 이제는 완전한 재택

근무란다. 집에 앉아 네 회사와 통화를 하거나 화상으로 일한

단다. 이제까지 한회사의 경리책임을 맡아 일하는 시간만 자유

로웠다. 그러나 집에서 일하면 가족들이 방해가되지 말아야 하니

오히려 불편한점도 참 많다. 다행히 맏손녀는 이제 킨더가든을

다니고 두 살짜리는 너서리 스쿨을 가니 일하는데 방해는 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 비용이 월 5천여불. 맏딸때는 너서리 학비를

아들이 근무하는 의과대학서 주더니 둘째는 안준다. 2살짜리

손녀 너서리에 내는 돈만 月 $1,020. 아침 8시에 가서 오후3시

까지 봐 주는 돈. 허기사 똥기저귀까지 다 갈아 줘야 하니...애

데려 오는 시간이 늦어지면 over charge가 어김없다.

  

다음 월요일, 본사를 일주일 다녀왔다. 4개회사를 떠맡는 협의차.

며칠뒤 큰 소포가 두 개 집으로 배달되었다. 며느리 왈 일을 더

시키면서 본사에서 몇가지 물건 카타로그를 보여주며 2개 택하라

기에 자기는 망원경과 이태리제 슬로쿠커를 택했단다.

리빙룸 끝에 조립해 하늘로 세워놓은 망원경으로 맑은 캘리포니아

밤하늘의 별이나 한번 볼까하고 들여다 보아도 내재주로는 조작을

못할 정도로 복잡한거다. 포기해 버렸다.


벌써 20년 한국에 산 내 머리로는 도저히 가늠이 안되었다.

아! 미국이 몸부림 치고 있구나. 기업이 인건비 절감을 위해 두사람

분의 일거리를 한사람에게 몰아주고 한사람을 자르는  Double

Hatting이란 소리는 들어 보았지만 이렇게 별개 네회사 일을 한사람에게

맡기는 Multiple Hatting은 나는 처음 들어본다.

더구나 내 며느리는 기존에 다니던 회사서 경리만 맡은게 아니고

제품개발도 책임지고 있었다. 약사이자 MBA서 Financing을 전공

했기에. 이러한 인사는 기업이 살아 남을려는 몸부림으로 해석을

할수밖에는 없다. 그만큼 미국이 절박 하다는 이야기지 경리 기법이

회기적으로 발전했다고는 보여지지 않는다. 내가 과문해서 그런가?  


둘째 손녀가 태어나고 법정 출산휴가가 끝날무렵,직장을 그만

두라고 권했더니 어느날 우리내외를 보고 차에 타란다.

왜? 물었더니 동네 구경 안하셨지 않느냐는 거다.

산쪽으로 몇집 올라가더니 이집이 유명한 배우 캐빈 코스너

집인데 이혼을 하고 이제는 전부인만 산단다. 그리고 이집은

동창생 누구 집이고 또 조금 가더니 그집도 동창생 누구 집이란다.

그리고는 차 방향을 돌려 남쪽으로 가니 어마어마한 저택들이

나타나고 며느리가 졸업한 Mayfair로 들어가 구내를 다 구경시키더니

마지막으로 Chandler란 학교를 보여 주었다. 년에학비가 2만불 가까이

든단다. 손녀 둘을 이학교에 보낼려면 학비만 년 4만불, 그리고 고등

학교는 Westlake Harvard를 보내고 싶단다. 그래야 대학을

Ivy League를 바라 볼수 있다고. 애들 care는 자기 부모들이

할테니 우리내외는 걱정 안해도 된단다.결국은 직장을 그만 둘수는

없다는 우회적 설명 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들도 요즘은 수술환자가 별로 없다. 칼잽이가 매일

칼퇴근이다. 작년만 해도 일주일이면 이삼일 정도 꼬박 밤을 세웠다.

더러 급한 이식수술이 있으면 의사란 소방수와 똑 같은 직업이다.


수술이 있는 전날밤이면 사람인체가 그려진 큰책들을 온사방 펼처놓고.

또 강의가 있는 전날밤도 보통 모니터 두대를 켜놓고 전공서적들을

온사방 펼처놓고 밤새웠다. 올해 오니 그게 없어졌다. 수술환자가 없단다.

있어보아야 카운티에서 넘겨주는 극빈환자들뿐. 그 마져 LA 카운티

재정이 바닥이니 수술이 확 줄어 들었단다. 아마 중국서오는 환자들이

없으면 파리 날리는 모양. 불황이 오면 의사들이 가장 추위를 먼저

탄다. 사람들이 아파도 병원을 못간다.

작년까지만 해도 수술 때문에 토요일날도 병원에 가더니 올해는

벤처사업을 벌려놓은 샌디에고로 장거리 운전을 한다.

아들 말로는 의사, 그거 물새 울었단다. 의사가 좋다는 시절도

끝났다는 이야기다.


장면, 두 번째==LA 이야기.

지난 3월16일, 아침 일찍 아내와 함께 DMV(차량국)을 찿았다.

우리부부의 운전면허의 유효기간이 끝난지 꾀 오래 되어서다.

1973년 이민을 간 이후 캘리포니아주 면허를 갖고 있었는데

이제는 근 20년째 한국에 머무니 시간 맞추어 우리 부부의 운전

면허를 연장해 놓는것도 큰 일중의 하나였다. 운전면허갱신

하나만을 위해 미국을 갔던 기억도 난다.

아들이 U Penn의대에서 Fellow와 석사과정 하는동안에는 캘리

포니아까지 갈수도 없고해서 펜실바니아 운전면허로 바꾸어

놓기도 했다. 유효기간 만료가 가까워오니 어쩔수없는 선택.


면허연장에 법규필기시험이야 당연 한것이지만 70세만 지나면

실기시험을 치루어야 한다는 소리도 들은적이 있어 좀 긴장을

하고 갔다. 노인들이 사고를 많이내어 의도적으로 운전면허를

연장해 주지 않으려는 고육지책 이란다.


택시를 타고 도착한게 9시반쯤 되었나, 예약을 안하고 갔기에

안한 사람들 서는 줄에 섰다. 설마 오래 기다리기야 하겠느냐

하는 막연한 희망을 갖고. 그런데 예약을 하고 온 사람들의 줄도

꽤나 길어지기 시작했다. 창넘어 직원들이 일하는 쪽을 보니

그 수가 엄청 많았다. 일손이 많으니 예약한 사람들 다 해주면

우리부부의 차례가 오겠지 바라며 기다렸다.


그런데 창너머 분위기가 수상했다. 도무지 직원들이 자리에 앉지

않고 모두 서성이기만 했다. 직원 하나가 나오더니 전 캘리포니아

차량국의 컴퓨터가 지금 다운되었으니 조금 기다리란다.

한시간, 두시간...직원이 또 나오더니 오늘 회복이 안될수도 있으니

다시 예약을 하고 다음날 올 사람들의 예약을 받겠단다.

주로 젊은 친구들은 예약하는 줄로 가서 새로 예약을 해놓고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예약자줄에 다섯명, 예약안하고 온

우리줄에는 백인 여자 애 하나만 바닥에 퍼질러 앉아 열심히 iPhone

자판을 두들기고 있고 그다음이 우리 부부차례가 되었다.

세시간을 넘어서니 양쪽귀가 다 들리지 않기 시작했다. 피로하면

이제는 가끔 나타나는 증상이다. 그렇다고 남들 처럼 돌아 설수도

없다. 3월중에는 사돈네가 여행중이니 두 살짜리 막내손녀를 우리

내외가 오후 3시에 가서 데려와야 한다. 오늘은 우리가 면허갱신

하러 간다니 며느리가 재택근무로 바꾸어 집에 있기로 했다.

그러니 또 운전면허갱신 한다고 3월중에는 시간내기가 무었하다.

천상 사돈네가 여행에서 돌아온 뒤에나 다시 와야한다. 또 오느니

오늘 꼭 받고 가야했다.

  
세시간반을 지나 오후 1시가 되니 삼삼오오 잡담만하던 직원들이

부산해지기 시작 한다. 컴퓨터가 된단다. 시험은 금방 보았다.

다 가버리고 우리가 두 번째 였으니. 내 앞에 선 아내는 한번에

패스를 하고 사진까지찍고 기다리는데 나는 한문제 더틀려 낙방.

아마 오래 기다렸다고 직원이 favor를 준것 같다.재시험으로 통과

했다.택시를 불러 타고 오다가 한인이 경영하는 일식집에 들리니

입은 바싹타고 있었다. 이 나이에 근4시간 꼬박 서서 기다렸으니.

미국이 왜 이모양이 되었나. DMV라면 한국으로 치면 주민등록 취급

하는 동회나, 구청 아니면 시청 격이다. 이게 전 캘리포니아 사무실의

컴퓨터가 4시간 가까이 먹통이 되다니..하기사 돈이없어 선생들을 너무

많이 내보내 공립학교는 이제 옛날 한국의 콩나물교실이 되간단다.

  
매일 아침 나는 할 일이없어 집으로 배달오는 WSJ을 몇시간 읽는데

캘리포니아에서 13번째로 큰 도시인 중가주의 Stockton市가 간당 간당

한단다. 인구 29만, 실업률 20%. 돈없어 순사 목부터 댕강댕강 잘라

놓으니 범죄률은 오클랜드 다음이고. 1960년 이래 시가 파산할곳은

이 스탁턴이 처음 이란다. 그런데 이 스탁턴만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줄줄이 사탕 이라니. 주정부는 파산을 못하게 되어 있지만 시나 카운티는

챕터 9인가를 부르는거는 이제 흔히볼 광경 이란다.

  
장면, 세 번째--프린스턴 가는 길.

  
5월26일 토요일. Ivy League 가운데 유일하게 안가본 대학,Princeton을

향해 맨허턴 딸집을 나섰다. 늦게 일어나 점심시간이 어정쩡 하고 아내

가 한식을 원하기에 32번가 인가 한인타운을 찿아가 설렁탕을 한그릇

먹고 Penn Station까지 걸어가 1시14분에 PRNCTN이라고 찍힌 왕복

표를 사들고 기차를 탔다.

차창밖 풍경은 이노선 연변 도시들도 Rust Belt의 하나였는지 허물어진

공장, 온 천지의 Graffiti등 목불인견 이었다. 기차는 Newark Liberty

Airport를 지나고 Metropark역에 들어서자 꼼짝을 안한다. 섰다.

고장 이란다. 옆자리 Tranton인가 산다는 佛領 아프리카에서 왔다는

識者하고 수인사를 마치고 미국사는 이야기를 재미나게 듣고 있는중

이었다. 도리없이 내렸다. 한 두어시간 기다렸나.미국사람들 참 착하다.

한국 같으면 환불해라 뭐라 별난리를 쳤을텐데 모두 모여서서 이야기

뿐, 땀을 뻘뻘 흘리며 왔다 갔다하는 늙은 역무원에 길만 잘 비켜준다.

가만 생각하니 언제 올지 모를 기차를 타고 간들 이미 해는져 프린스턴

대학구경은 틀린것 같다.

도리없이 건너편으로 건너가 Penn Station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아들 한테 전화를 했더니 그 쓰레기 같은 학교는 뭘하려고 가셨느냐고

힐난이다. 죄는 ‘IQ84'를 쓴 무라까미 하루끼에게 있다. 그가 프린스턴

대학서 근대일본문학 강의를 몇년 하며 쓴 수필집을 읽은 탓이다.

그 프린스턴을 나는 꼭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아들이 펜실바니아주

Villanova에 3년 살 때 그때 짬을 내어 갔어야 했다.

  
미국이 왜 이 모양이 되었는가?.

2007년 4월 미국 2위 모게지업체였던 뉴센추리 파이낸셜의 파산부터

따지면 서브 프라임 사태도 이미 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야 제도적 패러다임을 바꾸고 새로운 희망이

넘치는 땅이 될까? 나도 여러 의견과 글들을 읽어 보았지만 아무도

모른다는게 정답 같다.

  
미국이 지금 처럼 태산 같은 경제적 파탄 앞에 몸부림 친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미 1873년에 장기적 공황을 겪고 20년이란 경제적,

사회적 환골 탈퇴를 위한 시간이 흐른뒤 근30년간 번영의 황금기가

찿아왔다. 1873년의 공황도 지금 같은 금융의 위기에서 시작되었다.

상환불능의 모게지와 복잡한 금융상품들 탓이란 것에서는 이번 서브

프라임 사태에서 듣던 소리와 판박이었다. 이말은 내 이야기가 아니고

역사학자 Scott R. Nelson의 주장이다.대량으로 실업자가 양산 되었을

뿐만 아니라 불황 상태도 오래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기간에 수많은

발명들과 혁신이 뒤따랐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볼수없었던 새로운

산업이 등장 한것이다. 먼저 찿아온게 교통산업의 혁신 이었다.

말에서 바퀴달린 교통수단으로 변신 한것도 이기간이고 증기터빈

분야의 혁신은 대규모 선박건조까지 가능하게 했다. 슘페터가 한말

‘자본주의의 창조적 파괴’가 실감난것도 이 19세기의 미국불황의

모습이다. 교통혁명이 제혼자 사회적 개혁을 선도 한게 아니다.

강철산업의 눈부신 발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Bessemer 제강법에서

탄소를 제거하고 고강도의 강철을 대량생산 할수있는 기틀을

마련한 앤드류 카네기의 공은 이루 말할수없는 인류문화에의 기여

라고 말하지 않을수 없다. 또 생산체제도 급격한 변화가 왔다.

소위 말하는 ‘미국식 제조방식’이란 시스템이 이때 창출 된것이다.

생산방식의 개혁이 있었기 때문에 농기구나 타자기, 재봉틀의 출현

이 가능했던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위기에서 경제를 혁신

시킨것은 기술혁신에서 비롯 된것이다. 노벨경제학 수상자 Phelps

도 ‘붐 뒤에 경제 침체가 오고 그 침체에서 회기적 탈출을 가져

오는 추동력은 기술혁신‘이라고 갈파 하지 않았나.

붐이란 말을 다른말로 표현하면 ‘인간 탐욕의 질주’다.


1876년에 그레이엄 벨의 전화가 발명되었고 1877년에 에디슨의

축음기가 나왔다.에디슨과 웨스팅하우스 사이에 벌어진 ‘전기전쟁’

은 누가 더 효율적인 전력공급 시스템을 개발하고 대중에게 혜택을

줄수 있는지를 놓고 벌인 건전한 싸움이었다.

1873년에 금융사태가 불러온 공황은 이렇게 기술혁신을 초래했고

미국인들 삶의 패러다임을 확 바꾸어 놓은 결과를 가져왔다.

특히 교육부문의 변모는 괄목한 것이다. 물론 1873년 공황 이전에

공과대학이 있었다.MIT설립 년도가 1865년 이니까.그래봐야 1870년

공대 졸업생수는 단 100여명 이었다. MIT에 전기학과가 생긴것은

1882년 이다. 매사추세츠와 뉴욕주에 공립학교가 생긴것도 1850년

대다. 그러나 뭐니 뭐니해도 교육시스템을 폭발적으로 발전시킨것은

1890년의 Morrill법안 이다. 이법에 의해 대학은 연방정부와 각주의

토지를 무상으로 쓸수있는 토대를 구축했고 John Dewey의

Pragmatism이 꽃피운것도 이때부터다.


다시말해 1873년의 공황은 미국사회를 확 뒤집어 Reformat 한것

이다. 미국의 세기는 여기서 예비된것이다. 흔히들 우리는 미국의

세기가 1907년 연방준비기금의 창립 부터라고 보지 않는가.

  

1929년의 대공황은 증권시장의 붕괴로 미국인들을 강타했다.

대공황 이전의 미국의 풍경을 아주 잘 그려낸게 Fitzgerald가

쓴 ‘위대한 개츠비’다. 턱시도를 근사하게 차려입은 개츠비

일행들은 최신제품들이 가득한 바닷가 저택에서 연일 흥청

망청 파티를 즐긴다.

대공황이전 또 ‘탐욕’의 물결이 도도히 흐른것이다. 위험성이

큰 금융투자상품과 부동산 투기가 횡행했다.

상류층과 중산층의 소득격차는 엄청 벌어졌고 富는 극소수의

손아귀로 빨려들어갔다. 그러나 그 부는 거품위에 둥둥

뜬것이고 그게 빵 터지자 결과는 뻔했다. 빵을 얻어먹기 위해

길게 늘어선 줄, 더러운 빈민가, 일자리를 잃은 실업자들의

판자촌, 일자리를 찿아 떠도는 노동자들의 물결등 스타인벡이

내가 태어나든해에 발표한‘분노의 포도’에 너무나 생생하게

묘사해 놓았다.


유명한 컨트리 송 가수 Merle Haggard가 부른 'Okies from

Muskogee'란 노래가 있다.

I'm proud to be an Okies from Muskogee

A place where even squares can have a ball

대공황의 가난을 견디다 못해 흙먼지 풀풀 나는 밥그릇 Dust

Bowl을 들고 젖과 꿀이 흐르는 캘리포니아를 찿아가는 오클라

호마 천민들을 Okies라고 노래 한거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경제자문 하버드대학 Alvin Hansen교수는

심지어 미국경제가 장기침체로 다시는 회복불능이란 말까지

극언을 서슴치 않았다. 이때 기술 혁신으로 미국은 다시 일어

설수 있다고 긍정론을 편게 자본주의의 속성은 ‘창조적 파괴’

라는 유명한 명언을 남긴 같은 하버드대교수 Schumpeter다.

  

나는 일찍이 Schumpeter 같은 유랑의 천재를 만난적이 없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시골 귀퉁이 땅, 모라비아에서

태어나 비엔나로, 영국으로, 프랑스로,스위스, 이집트, 독일,

미국, 카나다, 멕시코를 거처 일본에 까지 전전 하면서도

은행총재에 오스트리아공화국 재무장관까지 지냈으며 미국

경제학회장도 역임했고 국제경제학회 초대회장도 지냈다.

배꼽 밑 사정은 너무 너무 복잡해 매춘부와의 유명한 사랑까지

남긴 인물인데 이 실의의 미국에 희망이란 메시지를 강력하게

주장한 공은 참 위대하다.

  

미국은 또 다시 기술혁신의 숨찬 10년을 이끌어 낸다.

이때 미국의 총요소생산성(Total factor Productivity)은 미국의

어느시기보다 앞선다. 심지어 가장 뛰어났던 하이테크 호황기로

일컫는 1990년대보다 월등히 앞선다. R & D를 위한 연구소설립

이 1929년 이후 4년간 73군데나 늘어 났다니 얼마나 기술혁신에

온 국력을 쏟아부었나 가늠 할 수가 있다. 포드식 대량생산 체제

가 도입된거도 이때고 대학진학률도 15%로 증가했다.

Social security제도나 연방주택청이 설립되어 30년 주택활부제가

생겨난거도 이때다.

특히 주목해야 할것은 공간적 확장이다. 교외로 교외로 보다

낳은 삶의 질을 위해 사람들은 뻗어나갔다.주택산업의 호황은

자동차, 가전등 모든 산업을 견인 했다.또다시 삶의 문법이

확 바뀌고 Great, Great Reformat을 한것이다.

히틀러 덕도 많이 보았다. 유대인들의 그 좋은머리들을 미국에 몽땅

쓸어 보태주었다. 그리고 2차대전을 맞은거다.(계속)



July 6  2012

씨야



회원:
1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0
어제:
10
전체:
647,6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