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결혼 수정 연재 3

2012.07.08 06:44

김영강 조회 수:560 추천:156


아 버 지 의 결 혼


제 3 회


  그런데 호칭이 문제였다. 어머니라는 호칭은 정미 입에서 절대로 나올 수가 없는 소리다. 아이들이 할머니라고 부르니 정미도 그렇게 불렀다. 숙자 씨보다 나이가 많은 두 아들도 그렇게 불렀다. 그리고 그녀는 아들들에게 최고의 존칭을 썼다. 아들, 딸, 며느리, 사위, 손자, 손녀, 남편에게까지 그녀는 만인의 할머니였다. 그녀 역시 남편을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호칭과 촌수와 대화체가 몽땅 엉망진창이 돼버렸다. 메주콩 집안에 다 늦게 강낭콩 하나가 끼어든 결과이다.

  결혼 후, 햇수가 거듭될수록 그들의 관계는 예상했던 바가 아닌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정말 뜻밖이었다. 아버지가 할머니에게 폭 빠져버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불만을 슬슬 털어놓기 시작한 것이다. 뭐가 다른지 조강지처하고는 다르다는 말을 강조했다. 옛날에는 어머니가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해도 이해가 되어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그녀가 눈에 나는 행동을 하면 밉다고 했다. 어머니날이나 한식날 등, 산소에 가야 하는 날도 아버지가 꼬박꼬박 먼저 챙겼다. 그 나이에 기억력도 좋았다. 기일도 한 번도 잊은 적 없이 일주일 전부터 아들들한테 연락해서 알리곤 했다.
  한 번은 그녀가 “할아버지는 맨날 죽은 마나님 생각만 하고 살아요.” 하고 농담 비슷하게 불평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이나 말투에 질투 같은 감정은 하나도 섞여 있지 않았다.

  아버지는 숙자 씨가 외출하는 것을 제일 싫어했다. 밉다고, 보기 싫다고 하면서도 나가는 것은 싫어하는 것이다. 가끔 ‘젊은 놈’ 운운하며 엉뚱한 소릴 하기도 했다.

  “아버지, 할머니도 좀 나가 다녀야 살맛이 나지 어떻게 허구한 날 아버지 얼굴만 바라보고 있겠어요? 그리고 딴 데 가는 것도 아니고 노인 학교에 영어 배우러 다니는데 뭐 어때요? 그러면 아버지도 같이 노인 학교에 다니시면 되잖아요. 그렇게 하세요.”
  아버지는 영어를 곧잘 하는 편이다. 옛날에 한 번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기초 영어를 배우기 때문에 당신하고는 수준이 맞지도 않고, 머리가 허연 노인들만 앉아 있어 싫다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70이 넘었을 적 이야기다.

  정미가 아버지한테는 그녀를 감싸고돌았으나 외출이 잦은 것은 사실이다. 영어를 배우러 간다고 하지만 노인 학교 끝난 다음에 집으로 바로 들어오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끼니는 꼬박꼬박 잘 챙겨드렸다. 나갔다가 점심때 들어오지 못할 때는 꼭 점심상을 차려놓곤 했다. 숙자 씨가 없을 땐 정미가 내려와서 아버지 시중을 드는 것은 정한 이치다. 그러한 정미한테 고마움을 느꼈는지 그녀는 정미한테 참 잘했다. 맛있는 반찬을 만들면 꼭 들고 올라왔다. 어쨌든 아버지 곁에 누군가가 있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정미는 족했다. 숙자 씨의 존재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백배 나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날이 갈수록 숙자 씨에게 싫증을 냈다. 큰 소리로 야단을 치고 어떤 때는 나가라는 말까지 서슴없이 했다. 정말 도망이라도 가면 어쩌려고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아버지 말씀이 걸작이었다.

  “아직 영주권도 안 나왔는데 어딜 도망을 가?”

  아버지가 그런 이유로 그렇게 자신만만하셨구나. 그러면서 차라리 도망이라도 갔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아버지 도대체 왜 그래요? 아버지가 좋아서 선택한 여자잖아요? 제발 좀 의좋게 사세요.”

  “의좋게 살아? 그게 성질이 얼마나 고약한지 네가 몰라서 하는 소리다.”

  갑자기 높아진 언성에 정미가 흠칫하는데 아버지는 그녀가 괘씸해 죽겠다는 듯이 잔뜩 인상을 쓰며 말을 이었다.

  “어찌나 쌀쌀맞고 찬바람이 쌩쌩 도는지…. 나를 늙었다고 아주 무시한다고. 어쨌거나 부부지간이고 내가 남편 아니냐? 그런데 이불을 똘똘 말아 쥐고는 밤에 날 옆에도 못 오게 하니…….”

  정미는 깜짝 놀랐다. 남편은 벌써 오래 전에 침대에다 삼팔선을 그었는데 아버지 연세에? 젊은 여자를 고른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을까?

  옆집 여자가 하던 말이 생각났다. 어찌된 일인지 옆집 여자는 정미를 보는 눈이 곱지가 않았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땅딸막한 몸집에 널따란 얼굴을 한 그녀는 정미를 볼 때마다 “아니, 어디 아파? 얼굴이 왜 그렇게 못 쓰게 됐어? 며칠 사이에 폭삭 늙었네.” 하고 빈정댔기에 그녀가 하는 말을 늘 건성으로 들었었다.

  아버지가 결혼을 한 바로 직후였던 것 같다. 워낙에 말이 많고 말도 안 되는 말을 함부로 내뱉는 그녀인지라 그땐 그냥 ‘미쳤어?’ 하고 속으로 콧방귀를 뀌며 흘려버린 말이다. 살짝살짝 거짓말도 하고, 안 한 말도 했다고 그러는 여자라 더 그랬다.

  하루는 복도에서 딱 마주쳤는데 그냥 지나치려는 정미를 붙들고 여자가 느닷없이 말했다.

  “왜 그 약 있잖아. 당신도 알지? 기적의 명약 바.이.아.그.라.”

  여자는 약 세일즈맨이나 되는 것처럼 바이아그라에다 악센트를 강하게 주면서 한자 한자 똑똑 떨어지게 말했다. 암말 않고 아무 표정도 없이 멀뚱멀뚱 서 있었다가 돌아서는 정미를 다시 붙들고 여자는 뭐가 그리 못마땅한지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도대체 당신은 순진한 거야? 바보야?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위선자야?

  그리고 혀를 끌끌 차며 뒷말을 바로 이었다.

  “멀쩡하게 생겨가지고 맹하기는··· ···. 남편도 있으면서.”

  정미는 다시 돌아섰다.

  “아니,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들어야지. 왜 자꾸 도망을 가? 내가 할 말이 있다니까.”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정미에게 바짝 바짝 다가온 그녀는 무슨 일급비밀이라도 전달하는 복병처럼 소곤거렸다.

  “실은 말야. 내가 며칠 전에 약방에 갔다가 할아버지가 바이아그라 사는 거를 봤지 뭐야.”

  얼마 후, 옆집 여자는 아들네로 들어간다면서 이사를 갔다. 다행이었다. 그런데 소문을 들으니 남자를 만나 동거를 한다는 것이었다.

  이불을 똘똘 말아 쥐고 아버지를 거부하는 숙자 씨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앵 토라져 돌아누운 얼굴, 눈썹 사이에 내 천자가 패였다. 이불을 잡아끌며 치근거리는 아버지, 숙자 씨가 베개를 안고 거실로 나온다. 80이 넘은 노인에게 시집을 왔으니 그녀는 그런 현실이 도사리고 있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정미야 홀가분한 몸으로 살아 편하지만, 남편이 귀찮아 죽겠다고 노골적으로 불평하는 친구도 있다.

  문득, 역시 여든이 넘어 재혼했다는 친구의 시아버지가 생각났다. 나이 차가 무려 25년도 더 되는 젊은 여자였다. 친구의 남편이 그랬다. 아버지가 첫날밤에 일을 치렀을까 어쨌을까 하고 말이다. 친구는  “무슨 그 연세에!” 하고 반기를 들었으나 남편은 딴청을 부렸다.

  “아냐. 분명히 치렀을 거야. 나도 그 나이에 할 수 있을 것 같거든”

  친구의 시아버지는 아주 의좋게 잘살고 있다. 혼자 살 땐 자식들을 들들 볶아 스트레스가 쌓여 죽을 지경이었는데 이제는 자주 찾아가지 않아도 전혀 서운해하지 않고 마누라한테 폭 빠져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여자는 이불을 똘똘 말아 쥐지 않는 것일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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