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금숙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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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그때 그 시절

2012.08.14 13:47

윤금숙 조회 수:335 추천:10

                         그때 그 시절
                                                                                              
                                                 정(윤)금숙 (국문과 63년)
  
  
  1959년, 대학에 입학해서 기숙사 본관에 들어갔다. 다른 친구들은 신관이 좋다고 하지만 나는 본관 건물이   운치도 있고 멋스러워 더 좋았다.
  가숙사 한 방에는 4명이 있었다. 우리 방에는 재색을 겸비한 영문과, 약학과 예쁜 두 언니가 있었고 신입생인 나와 사학과 친구가 있었다. 3명이 모두 부산에서 왔기 때문에 나는 가끔 셋이서 떠드는 경상도 사투리에  혼란스러웠지만 곧 익숙해져 금방 친하게 되었다.
  12시 30분에 기숙사 식당 문이 열린다.  채풀이 끝나거나 수업이 끝난 학생들은 우루루 식당으로 몰려든다. 천여 명이 들어가는 식당은 모두가 한창 피어나는 개나리들이다. 교내 식당이 아니고 기숙사생들만을 위한 식당이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서 왁자지껄 몰려들어 왔다가 썰물처럼 순식간에 먹고 각자의 방으로 또는 수업으로 흩어진다.
  아침 식사당번이 정해지는 날은 30분 일찍 식당으로 가서 아줌마들을 돕는다. 7시 식사 시간에는 대표기도가 “아멘!" 으로 끝남과 동시에 밥 그릇 소리, 숟가락 소리가 순식간에 왁자지껄해진다. 그 소리는 정말 생동감이 있고 아침을 활기차게 여는 아름다운 소리다.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반찬 중 하나는 계란 프라이었다. 흰 밥에 계란 프라이가 상큼하게 올려져 있는데 보자마자 군침이 확 돌았다. 계란 프라이를 어떻게 그렇게 기계에서 빼놓은 것처럼 깔끔하게 만들었는지, 또 노란자는 반숙으로 적당하게 익어 뜨거운 흰밥에 비비면 금세 색깔이 어우러져 병아리색으로 물들었다. 거기에다 간장을 약간 쳐서 간을 맞춰 멸치볶음에다 먹으면 정말 환상이었다. 행복한 아침 식사였다. 그런 날은 아줌마들이 새벽 1,2시에 일어나 계란 천 개를 만들어놓느라 다른 반찬을 할 수가 없었다. 반찬이 없어도 모두가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식사가 끝나고 당번들은 뒷처리를 도왔다. 일이 마무리가 될 무렵 아줌마들이 가마솥에서 만들어진 누룽지 한 광주리를 수고했다며 내놓는다. 우리는 방 수대로 똑 같이 나눈다. 여럿의 눈이 순식간에 핑핑 돌아간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제일 크고 먹음직스런 누룽지를 차지했다. 누구보다 잽싸고 야무진 사학과 친구 때문이었다. 어찌나 방 식구들을 잘 챙기는지 우리는 그냥 있어도 항상 그 친구 덕을 많이 봤다. 한편 그 친구는 “언니들요. 우째 그랬을까예, 마 창피해 주겠심더.” 하며 후회를 했다. 그 모습이 순수하고 정다웠다.
  기숙사에 들어가기 전까지 나는 제 때에 식사를 하지 않아 항상 체증을 끼고 살았었다. 그런데 기숙사 생활
한 후부터는 위장병을 깨끗히 고쳤다. 남자들이 군대 생활에서 많은 것을 고치듯이. 저녁에 출출하면 어머니가 만들어 준 고추장 볶음을 꺼내놓고 오징어 다리를 쭉쭉 찟어 고추장에 찍어 먹어도 탈이 나지 않았다.
  즐거웠던 기숙사 생활. 우리 방 식구들은 지금 다 어디에서 어떻게들 살고 있는지... <친구야! 반갑다>에라도 나가보면 만나 볼 수 있을런지...
  이렇게 그리울 줄 알았으면 모 월 모 시에 김활란 박사 동상 앞에서 만나자는 약속이라도 했었을 걸. 세월이 흘러갈 수록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그때 그시절이 마음에 머문다.

8월 2012년
북미주 이화여대 동창 회보에 실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