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강아지 (동심의 세계)

2008.12.06 16:06

이용우 조회 수:2465 추천:226

어정어정하다 보니 시계가 벌써 7 시를 십여 분이나 넘어 서 있었다.  

“그린아, 어서 일어나, 7 시가 넘었어!”

이불을 걷어 젖히고 아이 어깨를 흔드는 순간 아차, 했지만 급한 마음에 거칠어진 손짓은 그린(초록)의 아침을 블렉(검정)으로 만들었다.

“으~응, 아파, 왜 때려~어!”

그린은 이불을 머리 위로 끌어 올리며 때렸다고, 아프다고 징징 거렸다. 마음이 찔끔 했다. 어제 밤 잠자리에 들며 내일 개교기념일이라 학교에서 피자파티 한다고 헤헤 웃던 생각도 났다. 얼른 이불을 들치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안, 아빠가 시간이 너무 늦어서 그랬어. 쏘리, 자 어서 일어나자.”

그린은 킹킹 우는 소리를 내며 눈을 뜨지 않았다. 나는 또 쏘리를 하고 뒤통수에 뽀뽀를 하고 등짝을 쓸었다. 그제서야 그린은 얼굴을 들며 찌그린 눈을 한쪽만 떴다.  

“아빠가 내 강아지 버렸어, 아빠 Bad야.”

“강아지를 버렸어? 오, 우리 그린이가 또 꿈을 꿨구나.”

그린은 거의 매일이다 싶게 꿈을 꾼다. 가끔 아이의 잠을 깨울 때면 얘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아이의 표정을 살피기도 한다. 그냥 잠속에 빠진 얼굴과 꿈꾸는 얼굴의 모습은 다르다. 꿈꾸는 얼굴은 눈썹이 움직이거나 미소가 서려 있거나 입술을 달삭거리거나 하는 등의 어떤 표정이 있다. 무심히 잠에 골아떨어진 것이 아니라 잠속에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린이 어느 때는 히히 웃기도 하고, 때로는 중얼중얼 대화까지 섞어 꿈을 꾼다. 생전에 아이 엄마가 ‘당신은 꿈속 말을 꿈밖에 있는 사람에게도 들리게 하는 재주가 있어’ 하며 웃었고, 선친께서도 낮잠을 주무시다가 생시처럼 또렷하게 소리를 내서 우리 형제들이 놀라며 웃었는데, 그 꿈말이 DNA를 타고 아이에게까지 전이가 된 것이다. 때로 먼저 잠에 든 그린이 꿈말을 중얼거리면 무슨 소리를 하나 하고 귀를 가까이 대어보기도 하지만, 꿈말로 깨어 있는 사람과 대화까지 하는 선친처럼 말소리가 선명하지는 않았다.                            

“그래, 아빠가 나 탁, 때릴 때 강아지가 확, 도망갔어. 유, ? 대디!”

“어유, 그랬구나. 미안, 우리 딸강아지에게도 쏘리, 꿈에서 도망간 강아지에게도 쏘리다. 자, 어서 일어나 밥 먹으며 얘기하자. 도망간 강아지가 치와와였니? 아니면 요크셔테리?”

“노~오, 멀티스야. 화이트 칼라, 얼마나 귀여웠는데.”

꿈속의 강아지 모습을 떠올리자 잠이 확 달아났는지 그린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멀티스? 아유, 얼마나 예뻤을까. 큰 강아지야? 이만해? 아니라고, 그럼 요만해?”

나는 두 주먹을 내밀었다가 그린이 얼굴을 찡그리길래 얼른 한 주먹을 떼었다.

“강아지 사줄거야?”

잘하면 기분 좋게 등교시킬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애써 비위를 맞추고 있는데 그린이 다 끝난 얘기를 대뜸 꺼내들었다.

“너 왜 그래, 강아지 사달라는 말 안하기로 했잖아?”

“나 셀률라폰 없어도 돼, 강아지 갖을래.”

“노~오, 그건 안 되지, 지금 셀률라폰 리턴 할 수 없다는 거 알잖아.”

“그래도 나 강아지 갖고 싶어.”

“나와, 시간 없어. 빨리 밥 먹고 학교가야 돼.”

나는 얼굴을 싹 바꾸며 냉랭하게 말했다. 혹 떼려다 혹 붙인다고, 하루아침의 기분 좋은 등교를 위해 끝없는 고난의 길을 택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급변한 아빠 표정에 겁을 먹었는지 그린이 뿌루퉁하게 입술을 내민 체 따라 나왔다.

그린의 강아지 사달라는 소리는 프리스쿨 다닐 때부터 나온 말이다. 쇼핑몰에서도 애완견 가게 앞을 떠날 줄 모르고, 차를 타고 가다가도 주인과 함께 산책하는 개가 보이면 칭얼거리기 일수 였다. 티브이 프로도 애완견 컨테스트에서부터 못생긴 강아지 뽑기 대회까지 애니멀 프로그램 시청을 즐길 정도로 개를 좋아 한다. ‘아빠 이리 와봐’ 하고 불러서 가보면 구글 이나 야후닷컴의 강아지 사이트를 열어놓고 '이거 봐, 얼마나 귀여워?' 하며 두 팔로 가슴을 싸안고 상체를 흔들어 댄다. 어리광 몸짓으로 강아지 사줄 것을 애원하는 것이다.

나도 그린이 못지않게 개(동물 모두)를 좋아 한다. 멀티스나 요크셔테리처럼 품종이 작은 것은 그린에게, 나는 골든리트리버 같이 순하고 늠름한 놈을 택해 뒤뜰에서 공굴리기도 하고, 고무호수로 물도 뿌려주고, 뒹굴며 레슬링도 하는 것이 소박한 나의 꿈이다. 그런데 그 꿈은 현실적으로 불가능 하다. 뒤뜰은커녕 앞뜰도 변변히 없는 아파트에서 어떻게 개를 키울 것인가. 더구나 대부분의 아파트들이 애완동물의 사육을 금지하고 있다.

"아빠, 강아지 키울 수 있는 아파트도 있어, 우리 그런 아파트로 이사 가자."

그린이 그런 말도 했지만 손바닥만한 뜰도 없는 아파트에서 밤낮없이 개와 함께 내부 생활을 한다는 것도 맘에 내키질 않아 들은척하지 않았다. 아무리 깨끗하게 관리를 한다 해도 역시 털이 날리고 개벼룩도 생기고 할 것이다. 더구나 그린이 천식기가 있으니 방 안에서는 애완동물을 키우지 말라는 소아과 의사의 당부도 있는 터였다. 그런 저런 이유를 들어 '나중에, 다음에' 하며 아이를 달래보지만 그린의 강아지 타령은 집요하고 끈질겼다.

그런 어느 날 저녁식사 후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그린이 또 '아빠, 이리와 봐' 하고 불렀다. 어이구, 또 눈 덜 뜬 새끼강아지 오골오골 모여 있는 화면이나 띄워놓고 부르는 걸 테지, 하며 가보았더니 강아지가 아니라 LG 마크가 선명한 셀률라폰 사진이 화면을 가득 체우고 있었다.

"뭐야, 강아지가 아니네."

"아빠, 나 크리스마스 선물로 이 셀폰 사줄 수 있어?"    

"뭔데, 이거 새로 나온 거야?"

"응, 터치스크린 폰인데 뉴스타일이야. 텍스트메세지도 터치스크린으로 할 수 있고 카메라도 쓰리 메가픽셀이고 펑숀도 더 많아. 세라하고 조이도 이 폰 있어."

"으흠, 그런데 지금 쓰는 셀폰 계약기간이 내년 사월까지 라서 크리스마스 선물로 뉴폰을 사줄 수가 없겠는데."

"크리스마스 선물인데 못사줘?"

"아무리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도 벌금을 물면서까지 어떻게 사주겠니."

"그럼 내 뱅크 돈으로 벌금 물면 되잖아."

"뭐야, 너 또 그 소리야? 그건 너 대학 갈 때 쓸 돈이잖아, 쬐그만게 툭하면 내 뱅크 돈, 내 뱅크 돈, 하구 있어, 아빠 화나게!"          

내가 버럭 화를 내니까 그린이 찔끔하며 고개를 폭 숙인다. 그린이 내 뱅크 돈이라고 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그동안 여러 사람들로부터 이렇게 저렇게 받은 것을 세이빙어카운트에 저축한 돈이다. 아이의 저축심도 부추기고 또 그렇게 모은 돈을 대학진학 시 요긴하게 쓰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그린의 이름으로 구좌를 만들어 준 것인데 현재 이천 오백여불 쯤 모여 있다. 그동안 받은 것을 꼬박꼬박 모았더라면 지금 액수의 세 배도 넘었을 터인데 자기 돈이라며 장난감도 사고 햄버거도 사먹은 후 남은 돈을 저축하다 보니 지금 그 정도의 액수가 된 것이다.      

"그린아, 너 저 터치스크린폰 정말 갖고 싶어?"

고개를 떨군 그린의 까만 머리통을 보고 있자니 한 가지 묘안이 떠올라서 그렇게 물었더니 그린이 머리를 끄덕였다.

"오케이, 이거 딜이야, 네가 앞으로 강아지 사달라는 말 하지 않으면 아빠가 오늘 터치스크린폰 사줄 수 있어, 어때? 예스야 노야?"

내 제안에 그린이 좀은 놀란 듯 얼굴을 들고 긴가민가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잠시 그렇게 바라보더니 슬슬 어깨를 흔들고, 몸통을 흔들고, 털털털 다리까지 흔들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몸짓이었다. 강아지를 포기하는 것은 몹시 억울하지만 친구들이 가지고 있는 터치스크린폰을 지금 당장 갖을 수 있다는 매력에 갈등하는 것이 분명했다. 허지만 그린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터치스크린폰 갖을래."

"잘 생각했어, 아빠가 나중에 하우스 사면 예쁜 강아지 사줄게, 알았지?"  

나는 그린의 머리를 감싸 안으며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린은 뭐가 슬펐는지 아니면 감동을 했는지 킹킹거리며 조금 울었다.

  

그렇게 어렵사리 결정한 일을 두 달이 겨우 지난 오늘 아침에 그린이 뒤엎었다. 위약금을 삼백여불이나 지불하고 구입한 터치스크린폰이 꿈속의 강아지에게 밀려났다. 잠시 문명의 이기에 재미를 붙였었지만 강아지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끊어버릴 수는 없었나 보았다. 가슴이 짠하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다. 아이의 심정을 백번 이해하지만 현실은 현실인 것이다. 강아지에게로 향한 그린의 마음을 돌려 다시 터치스크린폰을 손에 쥐게 해야 한다.

"자, 어서 밥 먹어. 그리고 이따가 수업 마치고 학교 생일파티 끝나면 로렌하고 같이 피오피코 도서관에 가 있어, 오늘은 아빠가 조금 일찍 데리러 갈게. 도서관 앞에서 전화하면 바로 나와, 전화기 백펙에 넣어두면 소리가 안들릴지 모르니까 도서관에서는 테이블에 올려놓고 있어 알았지? 저녁에 맛있는 거 사줄게."

그렇게 말하며 건너다보니 그린이 장조림이나 멸치볶음은 버려둔 체 숟가락으로 고추장을 뜨고 있다. 밥맛이 없다는 얘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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