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잎 클로버

2007.12.30 14:09

이윤홍 조회 수:872 추천:54

네 잎 클로버


        여기, 한 번도 들쳐보지않은 그리 두껍지 않은 문고판 수필집이 한 권 놓여있다.  
      그것을 집어든다.
      오늘은 사랑하는 여인도 곁에 없고 밖에는 온 종일 눈이 내리고 집안은 열길 물속보다
      더 고요하다.  글을 읽기 시작한다. 읽다가는 잠시 멈추고 책의 가장자리가 엷게
      빛 바래가는 것을 바라보기도하고 책장을 펼칠 때마다 스며나오는 무어라 말할 수없는,
      어쩌면 게피향같은 아슴아슴한 냄새을 맏는다.  그 냄새가 글 만큼이나 좋다.
      책을 읽기전에 올려놓은 주전자의 뚜껑이 이따금 달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를 들으며 그대로 책을 읽어 내려간다.
      책의 중간을 지나 다음 장을 여는데 클로버 하나가 툭- 무릎위로 떨어진다.
      네 잎 클로버다.
      들여다보니 책 갈피속에는 네 잎 클로버가 세개나 더 끼어있다. 나는 무릎위로
      떨어진 것을 조심스럽게 집어들고 책과 함께 식탁으로 갖어온다. 그리고는
      책 갈피에 끼어있는 것들도 꺼내어 식탁 유리위에 가지런히 놓고는 들여다 본다.
      어느 한 잎 한 줄기도 접혀지거나 바스러지지않은 온전한 모습이다.
      나는 너무 놀랍고 반가워 책 읽는것도 잊어버리고 네 잎 클로버만 들여다 본다.
      까마득하게 잊고있는, 아니, 이제는 가물한 기억속에서 조차 잊혀져 기억도 기억하지
      못하는 내 유년의 네 잎 클로버.
        동네 아이들을 따라 들판으로 네 잎 클로버를 따러 나갔다. 너무 어려 안됀다는 것을
      이웃집 누나가 한 손 꼬옥 잡고 데려갔다. 여기저기 흩어져 하루종일 놀다가 배가고파
      뒤돌아 보았을 때 아이들도 안 보이고  누나도 안 보이고 혼자 엉엉 울면서 집 찾아
      오면서도 놓지 않고 들고 온 네 잎 클로버. 동네 어귀에 들어 섰을 때 잎들은 어디
      론가 다 날라가 버리고  손 안에는 뭉그러진 줄기만 남아있던 네 잎 클로버.
      그날 누나는 누나대로 혼나고 나는 나대로 무섭게 혼나고 그리고는 두 번 다시 네 잎
      클로버는 찾으러 가지 않았지.
      " 네 잎 클로버 찾았어? 땄어? "
      " 응, 그런데 날라갔어. 누나 주려고 했는데 다 날라갔어."
      뭉그러진 줄기를 받아들고 미안해하며 얼굴 쓰다듬어주던 이웃집 누나.
      누나에게 주려던 그 네 잎 클로버. 기억 밖으로 멀리 날라간 그 네 잎 클로버를
      누가 이 책속에 끼워 놓았을까.
      그리고보니 이 책을 산 기억이 없다. 내가 산 책은 아무리 오래되고 한번도 펼쳐보지
      않았어도 잊지않고 기억한다. 언제 어디에서 산 것까지도 기억한다. 누구에게 선물
      받거나 얻어온 것이거나 빌려와 돌려주지 않은 것도 낱낱이 기억한다. 그런데 이 책은
      전혀 기억이 안난다.  다른건 몰라도 책에 관한 기억력은 남 다른데 이 책은 안 그렇다.
      참 이상하다.  
      차를 마시며 밖을 내다본다. 눈이 점점 쌓이고 있다. 흩날리는 눈속으로 네개의 네 잎
클로버가 다가선다.
      나는 얼른 외투를 걸치고나와  차에 시동을 건다. 달리는 차창으로 주먹만한 눈송이가
      떨어진다.
      액자를 고르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바깥 큰 테두리는 검고, 가는 안 테두리는 회색이다. 액자의 뒤를 열고 유리를 깨끗이
      닦은 다음 네 잎 클로버를 놓는다. 어떻게 놓아야 할지 잠시 망서린다. 이럴 때 사랑하는
      그녀가 곁에 있으면  좋을것을.  잎을 들어 이리저리 놓는데 그만 잎 하나가 떨어진다.
      저런, 저런, 나는 어쩔줄 몰라 당황해하며 손을 놓고는 떨어진 잎을 바라본다.
      아, 잎은 또 날라가 버릴려나 보다.  내가 당황해 하는사이 잎들은 하나 둘 모두 어린
      시절 그 들판으로 날라가고  줄기도 날라가고  빈 액자만 덩그런히 앞에 보인다.
      나는 얼른 액자의 뒷 커버를 덮고는 작은 잠금쇄를 꼭꼭 채운다.
         책속에 오랫동안 숨어있던 네 잎 클로버가 오늘 내 서재에서 다시 피어난다. 다시
      피어나 나를 들판으로 내 달리게 한다. 물론 그녀에게는 비밀이다.
      사랑하는 여인은 사랑하는 남자의 코흘리개 추억속의 여인에게도 질투하는 법이니까.
        책에대한 기억은 덮어두기로 한다. "아하, 어쩌면 그 시인의? "하며 떠오르는 생각도
      무시하고 아예 잊기로 한다. 나의 책은 분명 아니고 누구의 책은 더더구나 아닌, 아주
      오래전부터 제 혼자 내 곁에 있어온, 그 책속에서 설편(雪片)과 함께 활짝 열어논 창문으로 날라들어 온 네 잎 클로버만을 생각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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