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연희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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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참고자료-박인애 작품

2016.06.25 02:09

Chuck 조회 수:69

 
  제 이름은 홍정화입니다. 친구를 찾고 있습니다. 친구 찾기 검색창에 친구 이름과 생년월일을 넣었더니 이 홈페이지가 뜨기에 허락 없이 들어와 이 글을 남깁니다. 정화다. 정화가 나를 찾다니! 서경은 너무 놀라 끝까지 읽지도 못하고 컴퓨터 창을 닫아버렸다. 친구를 찾는다고? 내가 친구이기는 했던가? 서경은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 올라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미움이 삭은 줄 알았다. 흐른 세월이 얼만데. 우연히 거리에서 마주친다 해도 담담하게 대할 수 있을 거라 생각지 않았던가! 여물통의 찌꺼기는 삭아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가라앉을 뿐이라던 말이 일순간 떠올랐다. 정화로 인해 휘저어진 내면의 찌꺼기들이 수면 위로 떠올라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창밖이 보이는 소파에 드러누웠다. 구름들이 마치 사극의 예고편에서 보았던 한 장면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모두 어디로 가는 걸까? 바람이 제법 부는 모양이다. 구름 틈 사이로 오후의 강한 햇살이 존재감을 드러내며 거실 안으로 잠깐씩 쏟아져 들어왔다. 허락 없이 내 곁을 비껴 간 것이 어디 구름뿐이던가! 눈을 감았다. 온통 붉은빛이다. 울 일이 뭐라고. 눈알이 뜨거운 건 다 저놈의 햇살 때문이다.

서경이 컴퓨터에 재미를 붙인 건 그리 오래 전 일이 아니다. 워낙 기계와 담을 쌓고 사는 기계치인지라 컴퓨터와 친해진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어느 날 친구들 사이에 ‘싸이월드’ 바람이 불었다. ‘싸이’는 ‘cyber’를 뜻하기도 하지만 ‘사이’ 곧 관계를 말하는 거라고 했다. 일상에 쫓기는 아줌마들이다 보니 함께 뭉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SNS라는 매체는 친구와 친구 사이를 이어주는 좋은 징검다리가 되어 주었다. 미니홈피를 통해 서로의 소식을 주고받는 게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친구들의 등살에 못 이겨 서경은 아들에게 부탁을 했다. 현우야, 엄마 싸이월드 좀 오픈해 줄래? 엄마가 하시게요? 현우는 손등으로 입을 가리며 귀엽게 웃었다. 왜 웃어? 엄마 친구들은 다 하는데. 싸이질은 애들이 하는 거죠. 뭐? 싸이질, 호호호 너무 재밌다. 현우는 빠른 손놀림으로 마우스를 움직여 주소를 치고 클릭을 몇 번 하더니 의자를 내어 준다. 비밀번호는 엄마가 넣으세요. 그 번호는 집 열쇠와 같은 거니까 꼭 기억하셔야 되요. 그래 알았다. 아들은 도토리를 사야 방을 꾸며 줄 수 있다며 신용카드 번호를 달라고 했다. 동그란 안경을 쓰고 열심히 타이프를 치고 있는 미니미를 사서 미니 룸에 넣어 주었다. 메인화면엔 김이 오르는 커피 한 잔과 펜이 비스듬히 놓인 편안한 느낌의 스킨을 깔고, 배경음악으론 ELO의 Midnight Blue를 깔아 주었다.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로그인을 한 순간 미드나잇 블루가 흘러나왔다. 전주만 들어도 숨이 막힐 듯 심장을 조여 오는 노래. 강제로 정지 버튼을 누르지만 않는다면 그곳에 머무는 동안 노래는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나온다 했다. 지금까지 살면서 그 노래를 몇 번이나 들었을까? 수백 번? 수천 번? 어쩌면 만 번이 넘었을지도 모르겠다. 민석이 좋아했다는 이유만으로 한때 중독증 환자처럼 그 노래에 집착했었다. 사실 즐겨 부르는 노래는 따로 있었는데 주위 사람들은 그 노래가 민서경의 애창곡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매일 듣긴 했어도 사람들 앞에서 부른 적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서경은 흐르는 노래를 따라 흥얼거려 보았다. 그 선율은 서경의 지친 마음을 쓰다듬어 주었다.
엄마가 절대 못 외울 거라고 생각했는지 현우는 컴퓨터를 켜고 끄는 법과 싸이월드 사용법을 꼼꼼히 적어 마우스 패드 밑에 넣어주었다. 남편의 자상함을 그대로 물려받은 아이였다.
자식이 부모의 유전자를 물려받는다는 사실이 서경은 갑자기 두려웠다. 자기 내면에 잠재하고 있는 죄의 뿌리가 혹여 아이들에게 전해진 건 아닐까 겁이 났던 것이다.
처음엔 일촌을 맺은 친구의 미니홈피를 돌아다니며 구경만 했다. 파도타기를 통해 조심스럽게 옮겨 다니며 친구들이 올려놓은 게시물에 덧글을 달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반응을 기다렸다. 싸이질 이라는 게 별로 특별한 건 아니었다. 전화로 떨던 수다를 사이버공간으로 옮겨 놓은 것이라고나 할까. 서경도 어느새 재미가 붙어 싸이질에 합류를 하게 되었다. 컴퓨터상에서의 수다를 상상이나 해 보았던가! 한 친구가 올려놓은 사진과 글을 읽고 누군가 덧글을 달면 또 다른 친구가 그 아래 덧글을 달고 마치 학창시절 가을운동회 날, 바통을 주고받던 릴레이 달리기처럼 말로 이어지는 수다. 그런 변화가 서경의 일상에 활력을 주었다. 입에 발린 소리인 줄 알면서도 넌 어쩜 그렇게 늙지도 않니? 학창시절 그대로다 얘 ㅋㅋㅋ 하면 괜스레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고, 아줌마들의 거침없는 입담을 읽다가 웃음보가 터져서 한밤중에 미친년처럼 깔깔거려 식구들을 깨우기도 했다. 계집애란 말이나 지랄한다는 말이 툭툭 튀어 나와도 마음이 상하지 않고, 흉도 되지 않는 학창시절 친구들은 그렇게 사이버 공간속에서 일촌으로 다시 뭉쳐 신세대식 우정을 다져갔다.

서경은 여상을 다닐 때 한글타자와 영문타자 2급을 취득했다. 회사에서 마라톤 타자기로 서식을 찍고, 거래처에 텔렉스를 보내던 실력을 백분 발휘하니 얼마 지나지 않아 컴퓨터 자판은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리 칠 수 있었다. 그 시절엔 자판이 한. 영 겸용이 아니라 영문타자기는 스미스코로나, 한글타자기는 마라톤 타자기로 기기 자체가 따로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판을 기억하고 있는 손가락이 신기했다. 몸이 뭔가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 또한 서경은 두렵고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의 일상을 몰래 훔쳐본다는 게 은근히 중독성이 있었다. 누가 어느 식당에서 누구와 식사를 했는지, 누구는 가족 여행을 어디로 다녀왔는지, 누구는 어떤 집에 사는지, 누가 무엇을 새로 샀는지 등을 계속 지켜보게 되었다. 업데이트 되는 일촌들의 사진을 열심히 챙겨 보고 있던 서경은 마치 자기가 스토커가 된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나왔다. 허락받은 스토커 말이다. 도시의 숲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쩌면 모두 외로운 존재들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늘 누군가가 그립고, 누군가의 관심을 필요로 한다. 싸이월드나 페이스북 등을 통해 자기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 아닐까? 미끼를 던져놓고 물고기가 입질하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낚시꾼처럼, 자기가 올려놓은 게시물에 누군가 반응해 주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것이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친구들을 열심히 따라 가다보니 어느새 서경은 자신의 삶이 한층 업그레이드 된 것 같아 내심 뿌듯했다. 컴퓨터와 가까워지고부터는 혼자 있어도 무료하지 않았다. 검색창만 누르면 알고 싶은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영화나 드라마도 볼 수 있어서 전 세계가 마치 눈앞에 펼쳐진 것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미니홈피라는 것이 원래 자기만의 공간에 사진과 함께 글을 올리는 것이다 보니 자연스레 디지털 카메라와도 가까워졌다. 그래서 서경은 사진 찍기에도 열을 올리게 되었다. 반찬을 만들어 놓고 뿌듯해서 한 컷, 앞뜰에 번갈아 피고 지는 꽃이 기특해서 한 컷, 사진기만 들이대면 질색을 하며 얼굴을 가리는 아이들도 한 컷, 별 볼일 없는 자신의 셀카까지...... 서경은 놓치고 싶지 않은 순간들을 파인더 속에 가두느라 낡은 안테나를 바짝 세우고 피사체를 찾게 되었다. 세월이 흐르고 나면 추억과 사진만 남더라는 것을 진즉에 알았더라면 더 많은 순간들을 사진으로 남겨놓았을 것이다. 한 번 지나간 시간은 다시 돌아 올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여 놓친 순간들이 너무나 아쉬웠다. 서경은 직장생활을 할 때 사진에 관심이 생겨 배우러 다닌 적이 있었다. 별로 좋지 않은 수동카메라였지만 그걸 메고 다니면 세상의 모든 걸 훔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했었다. 그래서 주말이면 사진을 찍기 위해 새벽부터 강남터미널이나 청량리역으로 내 달리곤 했었다. 지금은 사진기 기능이 좋아져서 사진을 찍고 바로 확인하는 것이 가능하고, 잘못 찍은 것은 바로 삭제를 할 수도 있지만 수동카메라는 24방 혹은 36방, 정해진 필름 안에서 찍어야 하기 때문에 신중하게 피사체를 고르고 호흡을 모아 찍어야 했다. 사진을 인화하려면 필름을 현상소에 맡기고 어떤 사진이 나올까 설레는 마음으로 일주일 정도를 기다려야했다. 기다림의 시간들. 서경은 이따금씩 그때가 그리웠다. 토함산의 일출, 을숙도의 갈대밭, 겨울의 설악, 포항의 붉은 하늘...... 그때 찍은 사진이 지금까지 남아 있으니 세월이 흐르면 사진과 추억만 남는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옛날엔 인화 된 사진을 앨범에 꽂아 두었지만 요즘은 컴퓨터의 공간속에 사진을 저장하고 인화도 하지 않으니 사진도 수많은 변화를 겪으며 세월 속을 걸어왔다.

일촌공개로 설정해 놓지 않은 것이 실수였다.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전체 공개로 되어 있었으니 활짝 열린 문으로 모든 사람들이 드나들고 마침내 정화까지 찾아오게 된 것이다. 내 일상을 훔쳐보면서 정화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중년 살이 붙긴 했어도 내 모습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을 텐데 왜 생판 모르는 사람처럼 능청을 떨었을까? 나쁜 계집애. 서경은 혼자 중얼거렸다. 다시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서경은 자신의 무지함을 자책했다. 컴퓨터 앞에 다시 앉았다. 방명록에 남겨진 글을 제대로 읽고 싶었다. 끓어오르는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컴퓨터 화면에는 오색 비눗방울이 평화롭게 움직이고 있었다. 창이 열리는 시간이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다.
제 이름은 홍정화입니다. 친구를 찾고 있습니다. 친구 찾기 검색창에 친구 이름과 생년월일을 넣었더니 이 홈페이지가 뜨기에 허락 없이 들어와 이 글을 남깁니다. 제 친구 이름은 민서경이고 청암여상을 졸업했습니다. 저와 같이 서라벌 주식회사에서 근무한 적이 있고, 제 친구는 어머니, 언니와 함께 서대문에 살았습니다. 사진을 보니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아서요. 혹시 제가 찾는 사람이 맞는다면 제 홈피 방명록에 답장을 남겨주셨으면 합니다. 전화를 주셔도 좋고요. 제 전화번호는 010-3664-39XX입니다. 서경은 마우스를 쥔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마음을 주었던 친구와 애인을 한꺼번에 잃고 힘들었던 시간들.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한 대가로 치러야했던 마음고생이 올올이 살아서 올라오기 시작했다. 왜 갑자기 정화는 내가 궁금해 진 것일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옛날로 돌아가자는 건 아닐 테고 두 사람이 헤어지기라도 한 것일까? 서경은 궁금증과 함께 흔들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서경은 민석의 소식이 궁금했다. 왜 그렇게도 그를 비워내는 일은 어려운 건지 생각할수록 못난 자신에게 화가 났다.
며칠 후 서경은 정화의 방명록에 글을 남겼다. 정화야, 나야 서경이. 오랜만이지? 시집간다고 혼수용품 사러 다닐 때, 동대문에서 우연히 너를 만난 게 마지막이었으니 시간이 꽤 오래 흐른 것 같구나. 어떻게 나를 찾을 생각을 다 했니?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면 만날 날도 온다더니 정말 그런가보구나. 그날 내 손에 들린 한복집 가방과 폐백용품을 보고 어머, 너 시집가니? 하고 물었지. 난 아니라고, 다른 사람 일로 온 거라고 거짓말을 했고. 눈치 빠른 너는 이미 알아차렸겠지만 왠지 결혼 한다는 말을 네게 하고 싶지 않았어. 잊지 않고 기억해줘서 고맙다. 우리 한 번 만나자. 서경은 약속장소와 시간을 남겼다.
그땐 무엇이 두려워 정화에게 거짓말을 했을까? 당당하지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는데. 아마도 그 사람이 정화를 통해 내가 결혼 한다는 소리를 듣게 되면 마음이 아플지도 모른다는 병신 같은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치 신파 속 여주인공이라도 된 양 제 속 썩는 것은 상관없이 남 걱정을 하면서 말이다.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그는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제발 곁에 있어 달라고 그렇게 애원했는데 결국 그 사람을 밀어낸 것은 나였으니까. 서경은 그 기억만 떠올리면 머릿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정화의 홈페이지는 예상대로 방명록을 제외하곤 방마다 굳게 잠겨 있었다. 아무도 훔쳐보지 못하게. 정화는 늘 자신의 패는 철저히 감추면서 남의 패는 꿰고 있던 아이였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가장하여 가까운 사람인 척 연극을 하다가 갑자기 가면을 벗어 던지며 본색을 드러냈던 아이. 그날처럼, 또 다시 무방비 상태에서 뒤통수를 맞은 자신이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얼마를 더 잃고, 얼마나 당해야 정신을 차릴 것인지. 서경은 어디선가 자신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눈알들이 갑자기 머리위로 쏟아져 내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포켓몬스터’에 나오는 야구공만 한 눈알. 그건 정화의 눈알이고 서경을 비웃던 사람들의 눈알이었다. 서경은 덜컥 겁이 났다. 정화를 만나자고 한 것이 정말 잘하는 짓인지? 그 만남으로 인해 또 다른 먹구름을 불러오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시고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발랄했던 서경은 말수가 줄어들었다. 언니 서연과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누리던 호사는 막을 내렸다.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설상가상으로 아버지와 호형호제하며 집에 드나들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채권자로 돌변하여 아버지 도장이 찍힌 종이를 들이대며 돈을 갚으라고 하는 어이없는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자기가 피땀 흘려 벌은 돈을 형님이 급하다 하여 빌려주었는데 갚지 않고 돌아가셨으니 남은 가족이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냐며 변호사까지 앞세우고 나섰다. 무슨 놈의 법이 두 사람이 증인만 서면 구경도 못해 본 돈이 빌린 돈으로 둔갑을 하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작정하고 달려드는 사람들을 피할 길은 없었다. 그는 교묘하게 직계 가족이 아닌 사람들을 증인으로 내세웠다. 직계 가족은 증인으로 인정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꾸민 것 같았다. 자기들이 돈을 빌려 준 자리에 함께 있었노라고 증언을 한 것이다. 서경은 그들의 불안한 눈빛을 보았다. 아버지가 생전에 믿고 나누었던 이야기가 그런 일을 꾸미는 빌미를 주었을 것이라는 짐작만할 뿐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는 아버지 사무실 책상 서랍에 종이에 찍힌 것과 같은 인감도장을 넣어두는 치밀함도 잊지 않았다. 아버지 회사 직원까지 동원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욕심이라는 것은 착한사람을 도둑놈으로 변하게 하는 몹쓸 무기였다. 어쩌면 개도 물어가지 않을 양심 따위는 처음부터 그에겐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백기를 들고 말았다. 살던 집을 급하게 파느라 헐값에 넘기고 껍데기뿐인 사무실도 정리를 했다. 아버지 유품을 불태우면서 서경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버지는 절대로 돈을 빌릴 분이 아니다. 돈을 빌렸다고 하는 시점에 회사가 어려웠던 것도 아니고 그렇게 큰돈을 갑자기 빌려야 할 이유가 없었다. 서경은 죄의 끝이 어딘지 보고 싶었다. 그들의 계획은 성공리에 끝났다. 어머니는 은혜를 원수로 갚는 천하의 몹쓸 사람들이라며 몸을 떨었다. 아버지의 부재와 함께 세 모녀는 그렇게 세상 속에 버려졌다. 세상은 차가웠다. 주위 사람들은 물론 친척들까지도 혹여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까봐 겁이 났는지 부탁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지레 죽는 소리를 했다. 드라마에서나 보았던 일을 겪으면서 서경은 사람의 마음이 다 내 마음과 같지 않다는 것과 죽은 자는 말이 없더란 말을 뼛속깊이 체험하게 되었다. 딸들을 두고 목숨을 끊을 용기가 없었던 어머니는 언덕배기에 작은 전세를 얻어 이사를 했다. 인창고등학교와 경기대학교 담 사이로 난 길고 좁은 골목길 끝에 있는 집이었다. 주인집 딸이 동네 깡패들에게 가방을 뺏기고 험한 꼴을 당했어도 아무도 모를 만큼 음침한 골목길이었다. 하지만 망한 집안의 딸들에게 선택의 여지 따윈 없었다. 서경은 긴 골목을 올라갈 때마다 차라리 누가 자기 목숨을 가져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도 먼발치에서 남자의 무거운 구두소리가 들리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냅다 뛰었다. 사람이 귀신보다 무섭던 날들이었다.

서경은 졸업 후 취업을 빨리 할 수 있는 상업학교로 진로를 결정했다. 담임선생님께서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하지 않는 것을 아까워 하셨지만 공부를 잘하는 것이 가난을 구제해 줄 순 없었다. 길이 달라져 그런지 인문계 고등학교를 갈 친구들과는 거리감이 느껴졌다. 친구들을 만나고 돌아올 때면 서경은 자신이 한없이 초라했다. 모든 것이 꿈이길 바랐지만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핑계거릴 만들어 친구들을 피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못난 자격지심이 내린 결론이었다. 그리고 전처럼 돈을 쓰고 다닐 형편도 아니었다.
서연은 휴학계를 냈다. 학교는 나중에 복학하면 된다고 말했지만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다. 네가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노래를 부르는 일 밖엔 없는데 무슨 일을 하겠다는 거냐고 어머니가 걱정을 하셨다. 서연은 아는 사람이 하는 경양식집에서 서빙도 하고, 저녁에는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하는 아르바이트를 제공해 준다하니 걱정 마시라고 어머니를 안심을 시켰다. 그래도......하며 말을 이으려는 어머니를 향해 주저 앉아있으면 누가 등록금을 대주냐고 쏘아 붙였다. 서연이가 그렇게 화를 낸 적은 없었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가족끼리 상처를 줄까봐 참고 누르며 삭히곤 있지만 잘못 건드려지면 폭발해버릴 것 같은 심정이었다. 서경의 마음도 그랬다.

이듬해 봄, 서경은 청암여자상업고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입학식엔 아무도 오지 않았다. 뭣보다도 촌스러운 교복을 입는다는 것이 고역이었다. 푸른 블라우스에 붉은 넥타이라니. 서경은 행여 누가 지나가다 볼까 무서워 고개를 땅에 떨어뜨리고 다녔다. 등하교 길에 만원버스를 타는 것도 싫었다. 짓궂은 인근학교 남학생들이 학교 이름 앞 자를 따서 일학년은 미스청, 이학년은 청순이, 삼학년은 청여사라 불러댈 때마다 자존심이 상해 미칠 것 같았다. 거지발싸개 같은 놈들. 몇 학년인지는 미아리 점쟁이도 아닌데 어쩌면 그렇게도 잘 알아맞히는 지, 돗자리를 하나씩 깔아 주고 싶었다. 후진 학교를 다니다 보니 모든 게 후졌다. 그래서 사람들이 똥통학교라고 부르는 것 같았다. 다른 학우들은 아무렇지 않게 학교생활을 하는데 서경은 괜스레 화가 나고 모든 것이 못 마땅했다. 어머니 말대로 사춘기가 시작되는가 싶었다. 피아노 대신 주판알을 튕기고, 타자 급수를 따려면 오타 없이 빠르게 타이프 치는 것에 집중을 해야 했다.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는 낯선 삶이었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친 덕분인지 손가락의 감각은 뛰어나서 타자만큼은 빨리 익히게 되었다. 타자기는 학생들에게 다 돌아갈 만큼 충분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손가락 연습용 자판기를 만들어 오라는 과제를 내주었다. 똑같은 사이즈의 둥근 단추 120개를 사서 딱딱한 도화지에 본드로 붙여서 자판기를 만드는 것이다. 맨 아랫줄에는 12개의 단추를 붙이고, 두 번째 줄부터는 단추를 하나씩 위로 높여 가며 붙이면 계단식 자판기가 만들어 졌다. 30여명의 학생이 실제 타자기로 실습을 하는 동안 나머지 학생들은 연습용 자판기로 운지법을 익혔다. 모든 게 다 그렇게 구질구질 했다. 상업영어, 부기, 세무, 회계..... 듣도 보도 못한 과목을 공부하는 것도 싫고 대차대조표니 손익계산서니 하는 숫자와의 싸움도 싫었다. 어차피 서경에게 주어진 인생의 손익계산서 차변엔 들어올 것도 없고, 대변으로 빠져 나갈 것도 없었다. 잔액 란은 늘 제로거나 마이너스였으니까. 그저 그곳을 빨리 벗어나 지긋지긋한 교복을 벗고 사회인이 되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좋아서가 아니라 피하고 싶어 매달리다 보니 2학년 말에 졸업 전에 따야할 자격증 급수를 모두 취득하게 되었다. 모든 학생이 가는 수학여행도 포기하고 얻은 결과였다. 3학년 전체에서 수학여행 불참자는 민서경 하나뿐이었다. 돈이 없으면 모든 게 그렇게 불편했다. 비참함을 모면하기 위해 아프다는 거짓말까지 해야 했다. 여유롭게 살 때 누리고 살아 그런지 다행히 하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곳도, 갖고 싶은 것도 없었다.
학교가 후지다고 선생님이나 학생들까지 후진 것은 아니었다. 오래 다니다 보니 학교가 쪽팔리다 는 생각도 차츰 흐려졌다. 학교에 다니면서 친구도 많이 생겼다. 따로 시간을 내지 못하다 보니 친해질 기회는 적었지만 교우관계도 원만해졌다. 서경은 학교가 파하는 대로 어머니가 하는 분식집으로 달려갔다. 동그란 의자 네 개를 놓을 수 있는 작은 테이블 다섯 개가 전부인 비좁은 가게였지만 손님들은 늘 북적거렸다. 가게 바로 옆이 동사무소이고 앞쪽으론 여자 고등학교가 있어서 목이 좋은 편이었다. 어머니는 앉을 새도 없이 계란을 삶고, 떡볶이를 만들고, 튀김을 튀기고, 라면과 국수를 삶아댔다. 하루 종일 종종걸음을 치고 일을 해도 돈은 모이지 않았다. 그달 그달 가게 세내고 먹고 살기엔 불편하지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서경은 어머니가 바쁜 게 차라리 잘 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많으면 캄캄한 현실 앞에서 삶의 끈을 놓아 버렸을지도 모르니까. 
새벽시장에 가서 김밥을 받아 오는 일은 서경의 몫이었다. 어머니는 이른 새벽부터 멸치와 북어 대가리로 국수장국을 만들고, 튀김 반죽을 하고, 야채를 썰어야 장사를 시작할 수 있으니 일을 분담을 해야 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무서운 골목길을 걸어 졸린 눈을 비비며 영천시장엘 갔다. 시장 안쪽 골목에는 오래된 한옥 집을 개조한 김밥 공장이 있었다. 그곳엔 머리에 세숫수건을 두른 아줌마들이 밤새도록 둘러 앉아 김밥을 쌌다. 보통 이른 새벽엔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와서 김밥을 받아 가는데, 산더미처럼 쌓인 김밥이 순식간에 동이 나곤 했다. 서경은 그곳에서 나는 훈훈한 사람냄새가 좋았다. 낯을 익힌 아주머니들은 이따금 터진 김밥을 먹으라고 내주기도 하셨다. 참기름 냄새가 솔솔 올라오는 갓 싼 김밥은 데쳐서 무친 부추와 당근과 단무지뿐인 가늘고 허접한 김밥이었지만 맛있었다. 그 김밥은 ‘광장동 마약김밥’ 혹은 ‘꼬마김밥’이라는 이름으로 둔갑을 하여 요즘 현대인들에게 추억의 음식으로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가난할 때 먹던 꽁보리밥이나 김치 수제비, 양푼 열무비빔밥, 허접한 김밥 등이 추억의 음식들이 되는 것을 보면 가난이란 현실도 언젠가는 추억이란 이름으로 남을지 모른다. 빨간 사각 쟁반에 차곡차곡 쌓은 김밥을 쏟지 않으려면 몸 쪽으로 쟁반을 붙이고 걸어야 했다. 가게에 내려주고 허겁지겁 학교에 가려고 버스에 오르면 어디엔가 베인 참기름 냄새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했다. 모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머니가 가게를 비우지 못하기 때문에 전매청에 담배를 받으러 가는 일도 해야 했다. 담배는 돈을 낸다고 다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제한이 있었다. 담배를 타러가는 날에는 언제나 줄이 길어서 오랫동안 건물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금색바탕의 청자, 첨성대가 그려있는 은하수, 새마을, 환희, 솔. 거북선이 그려있는 한산도, 그리고 또 다른 거북선이 그려있는 거북선 담배도 있었다. 거북선은 가운데 줄이 있는 것과 없는 것 두 종류였는데 값은 같지만 한 가지는 순한 것이어서 사람들이 좋아 했다. 그건 돈을 가지고 가도 마음대로 살 수 없어서 갈 때마다 한 보루씩 배당을 받아야 했다. 그 담배는 주로 동회에서 근무하는 단골손님 몫이 되곤 했다. 어머니 분식집에는 인근학교 학생들이 주 고객이었다. 방과 후면 서경은 교복을 갈아입지도 못하고 일을 도와야 했다. 아버지만 살아계셨어도 서경은 다른 아이들처럼 떡볶이를 사먹으러 분식집을 돌아다녔을 것이다. 면이 불기 전에 배달을 하려고 동사무소 이층 계단을 뛰어 올라가는 일이나, 고등학교 숙직실, 방범초소에 찌게를 들고 뛰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담배 심부름 한 번 안 시키고 곱게 키운 딸이 교복을 입고 담배를 받으러 전매청에 가는 것을 아버지가 보셨다면 억장이 무너지셨을 것이다. 거리에 어둑어둑 어둠이 내릴 무렵이면 서경은 서러움에 눈물이 쏟아지곤 했다. 실컷 울 장소조차 없는 현실이 너무나 슬펐다. 피아노를 다시 치게 될 날도, 서연언니가 복학해서 성악을 다시 공부할 날도 모두 멀게만 느껴졌다. 
어머니는 죽는 날까지 서경이가 누룽지 밥을 좋아한다고 믿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밥장사를 하다 보니 매일 누룽지가 쌓였다. 전 같으면 일하는 아주머니가 해결하고 식구들 밥상까지 올라오지도 않았을 누룽지가 형편이 어려워지니 귀한 식량으로 쓰였다. 딸에겐 밥을 주고 혼자서 누룽지 밥을 드시는 엄마가 안쓰러워 먹기 시작한 누룽지 밥. 서경은 엄마가 미안해 할까봐 너무 고소해. 너무 맛있어. 이렇게 맛있는 걸 혼자 먹으려고 했어 하며 어머니에게 눈을 흘기곤 했다. 라면 담는 큰 대접에 누룽지 밥을 한 가득 퍼 먹어도 왜 그렇게 배가 고프던지. 먹을 게 많은 분식집 딸은 아무리 먹어도 허기가 가시질 않았다.
3학년 여름방학이 지나자마자 서경의 가정 형편을 아는 담임선생님께서 조기 취업을 할 수 있도록 선처해주셨다. 첫 직장은 외국에서 원목을 수입해 와서 자르고 가공하여 가구 회사나 국내 유명한 피아노 회사, 볼링장 등에 나무를 납품을 하는 목재회사였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은행이나 큰 회사도 추천해 주셨지만 서경은 초봉을 많이 주는 회사를 선택해야했다. 경리과에서 일을 하게 된 서경은 공부해서 야간대학을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취직을 함과 동시에 어머니 분식집을 돕는 일에서는 벗어나게 되었으니 피곤하지만 퇴근 후에 입시 학원을 다니면 대학진학이 가능할 것 같았다. 상업학교는 아무래도 취업을 목적으로 교육하는 학교다 보니 대학을 가려면 수학이나 영어, 특히나 구경도 못해 본 고문 같은 과목은 따로 학원에 가서 배워야 했다. 희망은 서경을 살맛나게 만들어 주었다. 낮엔 일하고 밤엔 입시종합반을 다니자니 몸은 피곤했지만 견딜만했다. 회사 안에 공부를 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사장님께서는 열심히 사는 모습이 기특하다며 직원 장학금을 받도록 배려해 주셨다. 세상이 그리 춥지만은 않았다.
어머니 분식집엔 손이 빠르고 음식 솜씨가 좋은 아주머니가 들어오셨다. 분식집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데다 부지런까지 하셔서 어머니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분이 오신후로 쫄면, 비빔국수, 칼국수, 오뎅국 등의 메뉴가 더 늘었다. 김밥도 직접 싸니 손님들이 더 좋아했다. 동장님의 배려로 가게 앞에 테이블을 몇 개 더 깔아 놓으니 손님이 앉을 자리도 여유로워졌다. 무엇보다도 어머니에게 말벗이 생겼다는 게 서경은 너무 좋았다. 가게를 비우지 못해 화장실도 제대로 못 다니셨는데 정말 다행이었다. 캄캄했던 집안이 조금씩 밝아지는 것 같았다. 이제 서연 언니만 복학을 하면 한시름 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정화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회사에 입사를 했고 서경은 졸업 전에 입사를 했으니 나이는 같아도 서경이가 직장 선배였다. 정화는 같은 여자가 봐도 샘이 날 만큼 이국적이고 예쁜 외모를 지녔다. 이태원에서 외국인만 출입하는 클럽을 운영하는 세련된 엄마 때문인지, 이태원의 문화 때문인지는 몰라도 입고 다니는 옷도 범상치가 않았다. 무엇보다 돋보이는 건 볼륨 있고 섹시한 몸매였다. 갖춰 입고 화장을 하면 누구도 정화가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풋내기라고 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로션 하나도 안 바르고 다니는 서경은 샘이 나기도 하고 그런 정화가 은근히 부럽기도 했다. 시골여자가 도시여자를 보고 주눅이 들어버린 느낌이랄까? 정화는 입사한 날로부터 남자직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정화는 도도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친절하고 상냥했다. 이따금씩 쓰는 언어가 천박하긴 해도 큰 흉이 되진 않았다. 나이도 같고, 직장에서 매일 만나다 보니 진로가 달라 서먹해진 동창들보다 빠르게 친해졌다. 사회에서 만난 첫 친구가 마음까지 맞다보니 서경은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둘은 회사에서도 붙어 지내고, 주말이면 종로에서 만나 극장도 가고, 호프집도 가고, 아이쇼핑도 다녔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처음 누려보는 여유였다. 수시로 거친 말을 내 뱉는 정화가 때론 부러웠다. 그러고 나면 속이 시원 할 것 같았다. 서경도 가족을 궁지로 몰아넣은 사람들을 향해 쌍욕을 퍼주어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서경은 정화에게 집안 이야기도 스스럼없이 하고 집에 초대를 하기도 했다. 어머니가 하는 분식집에도 데려가서 떡볶이도 먹고 수다도 떨었다. 어머니는 서경에게 웃음을 찾게 해준 정화가 너무 고마워서 가게에 올 때마다 무엇이든 더 챙겨주곤 하셨다. 마음을 나눌 친구가 있다는 것이 그렇게 든든하고 좋을 수가 없었다. 아비 없는 아이들은 다 저렇다는 소리를 안 듣게 하려고 딸 단속을 심하게 하시던 어머니도 정화네 집에서 자고 오는 건 허락을 해주셨다.
정화네 집은 이태원이었다. 엄마가 외국인 전용 클럽을 운영하시는데 하나는 오빠가 관리를 하고 하나는 엄마가 관리를 했다. 살림집은 방이 여러 개 딸린 한옥으로 클럽에서 도보로 십 분쯤 걸리는 주택가에 있었다. 안채는 정화네 가족이 쓰고 나머지 방들은 클럽에서 일하는 여자들이 나누어 썼다. 정화오빠는 밤에는 바빠서 얼굴 보기가 힘들고, 낮에는 딱히 할 일이 없어서 집에서 뒹구는데, 주로 동네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들여 클럽 아가씨들과 고스톱을 치는 걸로 시간을 보냈다. 정화 남매의 이국적인 외모는 친 할머니가 국제결혼을 하셨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이태원에서 만난 미국인과 결혼을 하셨다. 정화네 집엔 바쁜 엄마대신 일하는 아주머니가 계셔서 아가씨들 밥도 해주고 살림도 맡아 하셨다. 어쩌다 시간이 맞으면 정화 오빠는 정화와 서경이를 데리고 나가 맛있는 걸 사주었다. 이태원엔 구경도 못해 본 음식이 너무 많았다. 정화네 집에선 한쪽 다리를 세우고 속옷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민망한 자세로 상소리를 해가며 화투장을 내리 치는 아가씨들의 모습이나, 팔에 문신을 새긴 남자들이 담배를 꼬나물고 욕을 하는 모습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벌건 대낮에 방에서 새어 나오는 여자의 신음소리와 외국어를 쓰는 남자의 가쁜 숨소리도 마찬가지다. 서경에겐 모두 낯선 모습들이었지만 그저 사는 모습이 다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엄밀히 따지자면 정화가 서경에게 잘못한 것은 없다. 한쪽이 마음을 열어보였다고 해서 다른 한 쪽도 반드시 마음을 열어 보여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를 친구가 좋아 했다고 해서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게 죄라면 어차피 가정 있는 남자를 사랑한 두 사람 다 유죄라야 맞는 것이다. 서경은 영원히 친구이고 싶었던 정화에게 아무런 설명도 없이 등을 돌렸다. 그땐 그러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었다.
서경은 정화를 만나러 가기 위해 화장대에 앉았다. 특별한 날을 빼곤 화장할 일이 없다보니 화장품은 구색이 갖춰 있지 않았다. 화장은 오 분이면 충분하다. 로션과 스킨을 바르고 그 위에 콤팩트형 파운데이션을 펴 바르면 된다. 입술을 바르고 펜슬로 눈에 라인만 그려주면 화장은 끝나는 것이다. 밑바닥에 깔린 립스틱을 붓으로 파 발랐다. 왜 살만해진 지금까지도 궁상인지 다른 건 몰라도 립스틱과 아이 샤도우는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옷장을 벌집 쑤시듯 뒤진 끝에 간신히 맞는 정장을 찾아 입었다. 다이아 반지도 끼고, 명품 핸드백도 꺼내 들었다. 정화를 만나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순간부터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정화는 민석씨와 결혼을 했을까? 설마 같이 나오는 건 아니겠지? 아니야, 그게 지금 와서 무슨 상관이라고, 그냥 한 번 만나 보는 거야. 딱 한 번만!
만나기로 한 장소가 가까워지자 서경은 길거리에 서서 콤팩트를 꺼내 얼굴을 비춰보았다. 햇빛 아래서 보니 화장이 먹지 않아 피부로부터 들뜬 것이 꼭 가부키 인형 같았다. 부석해 보이는 머리카락은 나 아줌마요하며 제각각 나풀대고 있었다. 분첩을 꺼내 턱 아래쪽에 덧발라 분리된 경계선을 없앴다. 발 아래쪽을 내려다보니 날씬했던 허리는 곡선이 없어졌고 아랫배는 불거져 보였다. 서경은 갑자기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미장원에 들러 머리라도 하고 올 걸, 옷이라도 하나 사 입고 나올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들면서 집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커다란 유리문 안쪽으로 긴 웨이브 머리를 한 여자가 거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화였다. 강산이 두 번 넘도록 세월이 흘렀건만 정화는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별로 없어 보였다. 오히려 처녀 때보다 훨씬 세련돼 보였다. 주춤거리는 서경을 알아 본 정화는 반갑게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못 알아보면 어쩌나 하는 생각은 기우였다. 잘 지냈어? 진짜 오랜만이다. 정화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잘 지냈지. 넌 변한 게 별로 없구나. 잘 살고 있는 거지? 서경은 정화의 손을 가볍게 잡아 주었다. 응, 잘 지내고 있어. 멋쩍은 인사가 오간 후 주문받으러 알바 생이 오기 전까지 짧은 정적이 흘렀다. 서경은 그 시간이 꽤나 길게 느껴졌다. 커피 잔 속에 이미 녹고도 남았을 설탕을 계속 젓고 있던 정화가 먼저 말을 꺼냈다. 보기 좋구나. 편해 보인다. 애들은 몇이야? 아들 둘. 어머, 나는 딸만 둘인데 하며 정화가 맞받아쳤다. 아이들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무거웠던 분위기가 다소 풀리는 듯 했다. 연락을 끊고 살았던 18년 동안의 이야기는 엉킨 실타래 풀리듯 하나씩 풀리기 시작했다. 서경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남편은 어떤 사람이야? 제일 먼저 묻고 싶었던 말이었다. 작은 사업을 하는 사람이야. 그때 그 사람은 아니고...... 정화는 말꼬리를 흐렸다. 정화는 서경이가 뭘 알고 싶어 하는지 정확하게 꿰고 있었다. 그랬구나, 난 네가 김 부장님과 결혼을 했을 거라고 생각했어. 정식으로 결혼식은 못 올린다 해도 사람들 눈을 피해 어디선가 행복하게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두 사람 사랑했던 거 아니었어? 서경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들키지 않으려고 창 쪽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감춰지지가 않았다. 서경은 늘 그렇게 정화에게 마음을 들켰다. 그렇게 못난 모습을 보며 정화는 승자의 기쁨을 누렸을 것이다. 사람들이 분주하게 지나갔다. 서경의 마음은 지옥 같은데 창밖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모두 편안해 보였다.

김민석 부장은 사장님이 다른 회사에서 스카우트를 해 온 사람이었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완벽하게 해내는 능력자라는 소문이 오기 전부터 회사에 돌았다. 게다가 매너 좋고 출중한 외모까지 갖추어 입사한 첫날부터 여직원들의 관심과 눈총을 한 몸에 받았다. 최 과장님이 비꼬듯 한 말투로 우리 회사가 이젠 얼굴을 보고 사람을 뽑나? 하며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짓궂은 노처녀들은 김 부장님 같은 사람이랑 하루만 살아 봤으면 여한이 없겠다며 농담을 했다. 들이대는 거 좋아하는 여직원들이 김부장의 팔짱을 끼면서 점심을 사 달라고 조르면 모두 데리고 나가서 기분 좋게 점심을 사주기도 했다. 서경은 김 부장이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경리과에 와서 월급봉투를 수령해 갈 때나, 차량 유지비나 거래처를 접대한 영수증을 가지고 와서 현금을 수령해 갈 때면 괜스레 가슴이 콩콩 뛰면서 얼굴이 달아오르곤 했다. 경리과에서 직원들의 월급 계산을 하는 서경은 김부장이 유부남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의 갑근세 산출 서류 뒤에 첨부된 주민등록 등본에서 아내와 아들이 있는 것을 이미 보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뛰는 건 멋진 남학생이나 잘생긴 남자 선생님을 보면 괜스레 가슴이 방망이질 쳐 지던 그런 종류의 감정일 거라고 생각했다. 잠깐 내리다 마는 여우비처럼 .

원목장의 봄은 미송을 자르는 냄새와 함께 찾아왔다. 휴식시간을 이용해 서경은 밖으로 나왔다. 답답한 사무실에 갇혀 일을 하다보면 벌떡증이 나서 하루에 한 번은 바깥바람을 쏘여야 숨통이 트였다. 나무냄새를 따라 원목장으로 걸어갔다. 원목장 가장자리에 심겨진 나무들은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 연두 빛 어린잎을 하나 둘 틔워내고 있었다. 눈부시게 고운 빛이었다. 뿌리를 잘린 채 바닥에 드러누운 원목들에게도 그런 날이 있었을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과 죽은 것의 차이는 꿈틀거림이었다.
단풍나무를 자르는 모양이다. 커피는 냄새만으로 무슨 종류의 커피인지 가려내지 못하지만, 나무를 자를 때 풍겨 나오는 냄새는 멀리서도 어떤 나무인지 바로 구별 할 만큼 서경은 어느새 나무와 친해졌다. 서경은 나무 냄새가 좋았다. 소나무, 삼나무, 향나무, 은행나무, 단풍나무...... 나무는 저마다 자기만의 향을 지니고 있다. 사람의 체취가 저마다 다르듯 말이다. 서경이가 앉아 쉬는 자리는 자주 바뀐다. 앉기에 딱 좋은 덩치 큰 나무가 매일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면 회사는 문을 닫아야 할 것이다. 들어오자마자 제재실로 가거나 이미 판재가 되어 트럭을 타고 어딘가로 떠나야 회사가 돌아가니까. 서경은 바닥에 누워있는 나무의 허리에 걸터앉았다. 딱딱함이 느껴졌다. 외부로부터 나무를 지켜내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던 수피는 뿌리로부터 공급되던 물과 양분이 끊겨서 애 간장이 타버렸는지 거북이 등짝처럼 딱딱하게 말라있었다. 속살을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에 흘린 눈물도 말라붙었다. 송진은 소나무의 눈물일거라고 서경은 생각했다. 잘려나간 생살이 흘리는 눈물. 슬픔이 깊어 뚝뚝 흘리지도 못하고 참고 또 참다가 끈끈해 져 버린 눈물.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 있을까. 사람이든, 나무든 누군가를 끝까지 보호해 준 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서경은 말라서 갈라져 버린 수피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정화가 사장님 비서로 자리를 옮긴 후 부터는 사내에서 정화 얼굴을 보는 게 쉽지 않았다. 저녁엔 서경이가 입시 학원엘 다니다 보니 전처럼 서로의 집을 오가는 일은 거의 없고, 그저 시간이 맞는 날 점심을 함께 먹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수입 원목이 통관에 걸렸다는 전화가 오는 날이면 사무실 공기는 서늘했다. 식물 검역문제로 통관이 지연되면 납품에 차질을 빚으니 모두가 날카로워 지는 것이다. 그럴 땐 거래처에서 아무리 독촉전화를 해도 어쩔 도리가 없다. 해당 공무원이 승인 도장을 찍어 주지 않으면 나무는 절대 한국 땅을 밟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내내 들어오던 나무인데도 시비를 걸면 보름이상 묶여 있기도 했다. 단지를 거는 데는 현찰이 약이다. 사장님이 현금을 들고 어딘가에 다녀오면 나무는 곧바로 풀려 나왔다. 서경은 목재회사를 다니면서 나무를 통해 크고 작은 혹은 더러운 세상의 이치들을 하나씩 터득하게 되었다. 
서경은 제재소 앞에 서서 큰 원목이 거대한 전기톱을 지나면서 얇은 판자가 되어 나오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목수들은 주문장에 써진 나무 이름만 보아도 무엇에 쓰려는 것인지를 짐작한다. 원목장에서 알맞은 원목을 고르고, 재단을 하고, 자르는 방법을 결정한다. 나무는 아무렇게나 자르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잘랐느냐에 따라 나무의 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고기도 결의 방향을 알고 잘라야 고기 맛이 좋듯이 나무도 결을 알고 잘라야 무엇을 만들어도 아름답다. 특히 가구가 그렇다. 제재소에서 오랫동안 일을 해 온 목수들의 눈은 예리하다. 힘든 노동에 지쳐 저녁이면 술을 푸기도 하지만 나무를 볼 때만큼은 충혈 된 눈에서 광기가 흐른다. 한 번에 될 놈인지 안 될 놈인지 싹수를 알아보는 눈. 잘라보지도 않고도 나무속을 꿸 줄 아는 눈. 노하우는 하루아침에 쌓이는 것이 아니다. 평생 나무 밥을 먹은 자라야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나무를 사선으로 세우고 자르는 정목제재를 할 때는 초자 목수를 붙이지 않는다. 노련한 목수라야 제대로 된 판재를 탄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목수는 저임금을 받는 하찮은 노동자가 아니라 예술가이다. 대대로 나무 밥을 먹고 자란 사장님은 목수들에게 최고의 대우를 해 주었다. 사람의 재주를 귀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한 번 들어 온 목수들은 쉽게 떠나지 않았다. 반장 김씨만 해도 한 평생을 이 원목장에서 나무 밥을 먹으며 가족을 부양하고 후배들을 키워냈다.
원목이 거대한 기계톱을 통과하며 내는 굉음은 마치 나무가 통곡하는 소리 같았다. 자기 몸을 내어주면서 마지막으로 토해내는 절규. 톱밥 눈물을 한없이 흘리며 스러져 가는 나무의 슬픈 곡소리를 서경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듣고 있었다.
김부장의 모습이 목수들 속에 섞여 있었다. 넥타이를 풀고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채 나무를 만지고 뭔가를 지시하는 모습이 열정적으로 보였다. 일에 몰입한 남자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나무를 셀 때는 한그루, 두 그루, 이렇게 그루라는 단위를 쓰지만 목재를 셀 때는 일제 때 부터 써온 사이(才)라는 일본식 단위를 사용했다. 목재 재적을 따지는 사이는 미터법이 시행되기 전에 사용해 오던 척관법에 의한 계량 단위였다. 1사이(才)는 가로, 세로 1치에 12자 길이인 각재(목재)의 재적을 말한다. 서경이 거래명세서에 쓰여 진 숫자만 보고도 나무의 양을 어림잡아 측량하는 것이 가능해 질 무렵, 원목장엔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 그리고 겨울이 지나갔다. 눈을 하얗게 뒤집어 쓴 채 추운 겨울을 이겨낸 원목처럼 서경이도 그렇게 단단해 졌다

봄맞이 직원 야유회 장소가 남이섬으로 정해졌다. 직원들은 각자 청량리에서 경춘선 기차를 타고 목적지로 가고, 자가용이 있는 몇몇 간부들은 회사 앞에서 만나 주문한 음식과 게임 도구 등을 나누어 싣고 가기로 했다. 서경은 슈퍼에서 주문한 술과 안주를 챙겼다. 유원지는 모든 게 비싸니까 챙겨 가자는 게, 쓸 땐 써도 아낄 땐 지독하게 아끼는 짠돌이 사장님의 제안이었다. 방산시장에 주문한 회사이름이 찍힌 수건과 배구공, 줄다리기용 밧줄과 스피커등도 챙겼다. 한나절 놀고 오는데 필요한 물건이 얼마나 많은지 피난살림이 따로 없었다. 새벽부터 나와서 일을 도운 덕분에 서경은 기차가 아니라 김부장의 차에 동석하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서경은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다른 여직원들이 알면 얼마나 배가 아플까? 김 부장의 나이를 몰랐다면 총각으로 착각을 할 만큼 그는 미소년 같은 외모를 지녔다. 어딜 봐도 36살이라는 나이는 보이지 않았다. 차를 타고 가면서 두 사람은 회사 이야기를 나누었다. 미스민 음악 틀어줄까? 네. Midnight Blue가 흘러 나왔다. 이 노래 아나? 내가 제일 좋아 하는 노랜데. 알아요. 저도 좋아해요. 말은 놔도 되겠지? 내가 한참 위니까 말이야. 하하하 기분 나쁜가? 아...아니요, 괜찮습니다. 서경은 콧잔등에 땀이 맺혔다.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땀을 닦았다. 더운가? 아직 봄이라곤 하나 좀 쌀쌀한데. 김 부장의 옆모습은 잘 깎인 조각상 같았다. 가족은? 하고 한마디 던졌을 뿐인데 서경은 마치 묻기를 기다렸다는 듯 묻지도 않은 이야기까지 줄줄 꺼내 놓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 사기를 친 지인, 가난, 원치 않았던 학교, 돈 때문에 선택한 회사, 어머니, 언니, 야간 대학에 가기위해 밤에 학원에 다니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마치 오래전부터 알던 사람에게 하소연을 하 듯 주절거리고 있었다. 민석은 묵묵히 들으며 핸들을 움직였다. 한참을 말하다 갑자기 멋쩍어진 서경은 어디서 말을 끊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민석은 서경에게 야무진 아가씨라고 칭찬을 해 주었다. 자기가 아는 사람들의 성공한 이야기도 들려주면서 일도 열심히 하고, 대학도 꼭 가라고 격려를 해 주었다. 자기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라면서.

남이섬의 봄은 아름다웠다. 나무가 많아서인지 서울의 탁한 공기와는 느낌이 달랐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연초록 새싹들이 야생화와 어우러져 눈이 부셨다. 직원들이 한데 어우러져 배구도 하고, 단체 게임도 하다 보니 사무실에서의 무거웠던 분위기는 어느덧 사라지고 하나가 되어갔다. 직원 노래자랑에서 서경은 패티킴의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을 불러 이등을 했고, 김부장은 패티킴의 ‘못잊어’를 불러 일등을 했다. 하고 많은 노래 중에서 어떻게 같은 패여사의 노래를 선곡했는지 서경은 정말 묘한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맥주 한 잔으로 목을 축인 민석은 더 이상 술을 마시지 않았다. 분위기가 무르익어 사람들이 부어라 마셔라 흥청거릴 때도 그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청량리까지 기차를 함께 타고 가자던 정화는 술이 떡이 되어 사장님 차를 타고 먼저 자리를 떠났다. 서경은 술만 마시면 필름이 끊기는 정화가 걱정스러웠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기차역으로 가야하니 마무리를 하자는 김부장의 제언에 직원들은 자리를 걷고 일어나 치우기 시작했다. 서경은 남자직원들에게 회사로 가져 가야할 물건을 차에 실어 달라고 부탁했다. 직원들은 하나 둘 기차역으로 떠났다. 서경도 인사를 하고 기차역으로 가려는데 김부장이 불러 세웠다. 같이 올라가요. 사무실까지 태워다 줄게요. 어차피 올 때도 한 차로 왔잖아요. 가서 내려야 할 물건도 있고. 직원들 앞에서 말을 놓기가 불편했던지 존대 말을 하며 눈웃음을 치는 그의 얼굴에 장난기가 흘렀다. 서경은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던 사람처럼 김부장이 친근하게 느껴졌다. 차를 한 번 같이 타고 왔을 뿐인데......

서울 방향으로 차를 몰던 민석은 강가가 보이는 갓길에 차를 세웠다. 서경에게 잠깐 기다리라며 밖으로 나가 담배를 피웠다. 뉘엿뉘엿 넘어 가는 해가 강물에 몸을 담그기 시작했다. 세상의 어떤 언어로도 표현 할 수 없는 곱디고운 빛이었다. 열려진 창틈으로 들어오는 담배 냄새가 싫지 않았다. 미스민, 난 이제야 술이 고픈데 어떡하지? 저기서 한잔 하고 가면 안 될까? 늦지 않게 데려다 줄게. 그러세요. 전 괜찮아요. 늦을지 모른다고 집에 말씀드리고 왔거든요.
민박집에서 운영하는 허름한 식당은 물가 가장자리에 평상이 놓여 있어서 거기에 앉으면 발을 물에 담글 수가 있었다. 물가에서 노는 사람들의 모습이 평화로워 보였다. 붉은 노을의 품에 안겨 검은 실루엣으로 보이는 사람들, 낮은 산과 강물만으로도 한 폭의 그림이 완성되었다. 옆쪽으론 방갈로가 쭉 늘어서 있었다. 그곳에 머무는 사람들이 저녁 준비를 하려는지 코펠을 들고 왔다 갔다 했다. 자고 갈 사람들인 것 같았다. 김부장은 닭볶음탕과 파전을 시켰다. 물소리가 정겹게 들렸다. 모처럼의 여유였다. 서경은 숨차게 달려온 날들이 떠올랐다. 학원에 다니면서부터는 너무 바빠져 좋아하는 영화 한 편을 볼 시간이 없었다. 주위가 어둑해지고 나무에 매달린 백열등이 켜질 때까지 민석은 별말 없이 소주를 혼자 따라 마셨다. 서경이가 술병을 들고 따라주려 하자 정색을 하며 사양을 했다. 여자는 술은 함부로 따르는 게 아니라면서. 술기운이 오르자 민석은 입을 열었다. 미스민도 한 잔 할래? 술 할 줄 아나? 아니요. 한 번 마셔보고 싶어요. 眞露, 참진에 이슬로, 정말 이 술이 참이슬 같은 맛인가요? 하하하. 글쎄, 참이슬을 맛본 적이 없어서 말이야. 저희 아버지가 즐겨 드시던 술이었어요. 그래? 네. 서경은 말을 끊었다. 아버지 이야기를 하면 아무래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런데 왜 하고 많은 동물 중에 두꺼비를 모델로 썼을까요? 김 부장은 크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재밌는 친구로군. 알고 싶은 게 많으니 공부도 잘 할 것 같네. 두꺼비는 번식력이 강하고 장수의 상징으로 쓰여서 그런다고 들었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회사도 그렇게 번성하고 장수하란 뜻 아니었을까? 서경은 소주 한잔을 한 번에 마셨다. 정수리 끝이 찡해 지면서 향긋한 버찌향이 느껴졌다. 버찌 맛이네요. 뭐? 버찌? 하하하 살다 살다 소주에서 버찌냄새가 난다는 소린 처음 들어 보네. 미스민 원래 주당 아니야? 아니에요, 정말 소주는 처음이에요. 소주가 처음이면 딴 건 마셔봤다는 얘긴가? 네, 맥주는 정화랑 자주 마셔봤어요. 요즘은 서로 바빠 못 만나지만요. 여자 둘이 술집엘 간다고? 네, 호프집에서 통닭이랑 500CC를 마시기도 하고, 경양식집에서 저녁 먹을 때 한 병 마시기도 하죠. 정화가 술을 좋아하거든요. 정화네 가면 술이 짝으로 쌓여 있어요. 술집을 하나? 그게...... 서경은 남은 잔을 비웠다. 네, 정화 어머니가 이태원에서 술집을 하셔요. 그렇군. 더 마실래? 한 잔 더 주세요. 소주가 달았다. 맥주처럼 오줌이 자주 마렵지도 않고 버찌향이 솔솔 나는 것이 입에 착착 감겼다. 여자끼리 술을 마시러 다니면 위험하니 담부턴 날 보디가드로 불러. 진짜요? 아니. 뭐예요? 뭐긴 뭐야. 농담이지. 난 술 마시는 여자들 딱 싫거든. 
민석은 평상 끝에 걸터앉아 발을 물에 담갔다. 미스민도 이쪽으로 앉아봐. 물이 아주 시원하네. 서경은 김부장과 나란히 앉아 발을 담갔다. 으으... 차가운데요. 엄살은.
난 데릴사위야. 데릴사위가 뭔 줄 아나? 우리 집이 찢어지게 가난해서 와이프 집에 돈을 받고 팔려갔다는 말이야. 우리 장인어른이 안양에서 알아주는 갑부거든. 결혼하는 조건으로 나한테 목재 회사를 차려주셨는데 내가 다 말아 먹었어. 처음엔 팔레트를 짜서 재미를 좀 봤지. 배에 선적하는 물건들 보면 나무로 된 큰 박스 안에 넣어서 싣잖아. 그 박스를 우든 박스라고 불러. 그 박스 밑에 깔려 있는 나무 판을 본 적이 있나? 지게차가 그 나무판 채로 들어 올리잖아, 그 나무판을 팔레트라고 하는 거야. 네 본 적 있어요. 나무는 미송을 쓰면 되니까 원가가 별로 안 들어서 수입이 아주 괜찮았거든. 그 크고 무거운 물건들이 얼기설기 짠 나무 조각 몇 개로 버티는 게 참 신기하지? 그건 물건의 하중을 이용하는 거야. 얼기설기 짠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무게 중심을 적절하게 잘 배분해 짜야 하거든. 머리가 좋아야 할 수 있는 일은 아니고 경험이 쌓이면 잘 할 수 있는 일이야. 나무 이야기를 하는 민석의 눈빛이 진지했다. 인건비 줄여 보려고 사람도 많이 안 쓰고 밤낮없이 내가 직접 일을 하며 열심히 회사를 키웠는데 부도가 났어. 재수가 없었던 거지. 팔레트 사업 말고, 건축 자재도 납품을 했는데 믿었던 회사가 망하면서 자재대로 받았던 어음들이 부도가 났어. 형제들이 하던 회산데 둘 다 줄줄이 문을 닫았거든. 대기업은 경리니까 알겠지만 보통 삼 개월 후에 집어넣는 어음을 끊어 주잖아. 나는 못 받았어도 내가 사온 자재대금은 지불해야 했지. 그 차액이 마진인데 마진은 고사하고 본전까지 몽땅 잃은 셈이야. 영세하다 보니 직원 봉급에 임대료에 버틸 재간이 없었어. 그래서 남은 자재 싸게 넘겨 직원 봉급 해결해 주고 직장생활을 다시 하게 된 거야. 우리 사장이 팔레트 사업에 관심이 많거든. 짭짤하다는 소문을 듣고 내가 다니던 회사에 찾아와 제안을 했어. 운송회사하고 외국으로 나가는 이삿짐이나 기계들을 넣을 우든 박스 건을 따냈는데 맡아서 일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미송이야 회사에 지천지로 깔렸으니 이용해서 돈을 벌어 보라고 하더군. 그래서 월급에다 건수를 올릴 때마다 커미션을 얹어 받기로 하고 내 거래처를 다 끌고 온 거야. 밑에서 일하던 성실한 사람 몇도 데리고 말이야. 아, 그렇군요. 많이 힘들었겠네요. 무엇보다도 사장의 나무 사랑에 껌뻑했던 것 같아. 그 사람은 나무 장사가 아니라 정말 나무를 알고 나무를 사랑하는 나무쟁이였거든. 난 팔레트 쪽 일만 맡아 하기로 했어. 
우리 와이프 얘기도 해줄까? 와이프는 E 대학 피아노과를 졸업한 사람이야. 집에서 피아노 교습소를 하지. 못난 남편 만나 친정 식구들에게 기를 못 펴고 살아. 안 그래도 눈치를 보던 차에 내가 망한 것까지 겹쳐 더 그랬을 거야. 사람이 살다보면 망하기도 하고 흥하기도 하고 그런 거 아닌가요? 이제 다시 일을 하게 되었으니 괜찮아 지실 거예요. 그럴까? 그 여자랑 같이 사는 놈이 하나 있는데 와이프를 여자 취급 하질 않아. 아주 나쁜 놈이지? 서경은 듣고만 있었다. 와이프도 있고, 아들도 있고, 잘 사는 처갓집 식구도 많은데 그놈은 늘 외로웠거든. 처가 식구가 바글 거리는 집에 들어가면 그놈은 이방인 같았어. 눈치가 보이기도 하고. 딸이 좋다고 붙어사니 봐주는 거지, 그놈이 좋아서 봐주고 있는 게 아니었거든. 그게 부장님인가요? 일찍도 감을 잡는군. 그 집 식구들은 뭉쳐서 여행도 다니고, 주변에 사는 친척들이 매주 집에 모여 친목을 다지며 식사를 하는데 난 그 자리가 영 편치 않았어. 그들이 하는 부자놀음도 익숙지 않고. 부자놀음이요? 정원에서 고기 먹고 술 마시고 그러는 거 있잖아. 와, 굉장히 부잔가 보네요. 전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부러운데요. 부러운가? 난 주로 일 핑계를 대고 빠지는 편이야. 불편해서 말이야. 나 때문에 와이프는 더 눈치를 보겠지. 정현이 아빠가 일이 바빠 그래요 하면서 거짓말을 둘러댔을 거야. 내가 욕먹는 걸 싫어하거든. 와이프는 내게 화를 내지 않아.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어. 우린 섹스리스 부부야. 와이프는 둘째를 원하는데 난 더 이상 자식 생각이 없어. 와이프를 안고 싶은 마음도 없고. 이렇게 투명 인간 취급하려면 왜 결혼을 했냐고 차라리 헤어지자고 악을 쓰면 덜 미안 할 텐데 순해 터져서 그러질 못하네. 그래서 모질게도 못하고 이렇게 질질 끌려 다니며 사는 게 내 인생이야. 민석은 술병을 들고 거칠게 들이마셨다. 서경은 자기도 모르게 민석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민석은 서경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민석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편안함이었다. 민석은 아무 말 없이 그렇게 기대있었다. 그가 뿜어내는 담배 연기가 서경의 긴 머리카락에 배어들었다. 주위가 어두워지자 여기저기서 기타소리도 들리고 취객들의 노랫소리도 들렸다. 평상마다 손님이 하나 둘 모여 들어 주위가 시끄러웠다. 이제 올라 가볼까? 운전 괜찮으시겠어요? 매일 술로 사는 놈인걸 뭐, 끄떡없어. 안 죽이고 태워다 줄 테니 걱정 하지 마. 서울로 올라가는 길은 반대편에 차가 지나가지 않으면 겁이 날 정도로 어두웠다. 갓길에 줄지어 서있는 나무들이 마치 머리를 풀어헤친 귀신처럼 보였다. 실루엣이 된 산과 들이 차창을 스쳐갔다. 민석은 서경의 손을 잡았다. 손이 따듯하네. 내 손은 늘 차가운데. 서경은 두 손으로 민석의 손을 따듯하게 감싸주었다. 온기는 민석의 지친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차의 움직임 때문인지, 술기운 때문인지 서경은 졸음이 몰려왔다. 민석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민석을 매일 볼 수 있다는 이유로 서경은 회사 생활이 즐거웠다. 아침마다 거울 앞에 서는 시간이 길어졌다. 옷집에 걸린 예쁜 옷에 자꾸만 눈길이 멈췄다. 그에게서 서경은 돌아가신 아버지를 느끼기도 했고, 남자를 느끼기도 했다. 민석은 회사가 끝나면 서경이가 다니는 입시학원까지 태워다 주었다. 공항 근처에서 팔레트 작업을 하고 오는 날이면 덕수제과에 들러 서경이가 좋아하는 소라 빵과 삼각 커피우유를 사다가 차에서 먹으라고 건네주곤 했다. 주말이면 영화를 함께 보았다. 캄캄한 극장 안은 최고의 데이트 장소였다. 손을 꼭 잡고 있으면 민석의 차가운 손은 서경의 온기로 따뜻해 졌다. 민석은 어린 애인이 이상하리만치 편했다. 늘 곁에 있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욕심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마음이 그렇게 흘러갔다. 운전을 좋아하는 민석은 날이 좋은 주말이면 서경을 태우고 산으로 바다로 돌아다녔다. 함께 먹는 건 무엇이든 맛있었다. 함께 있으면 이성은 마비되고 감성만 살아나는 것 같았다. 몰래하는 사랑은 함께 있어도 그립고, 떨어져 있으면 죽을 만큼 그리웠다. 어깨를 감싸 안고 허리를 감싸 안아도 좁혀지지 않는 거리. 그 현실의 거리가 지독스럽게 멀고 아팠다. 보고만 있어도 한없이 사랑스러운 애인에게 해줄 것이 없다는 게 민석은 미안하고 안쓰러웠다. 고통 속에 사는 아내에게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미안함이었다. 현실도피에 술만큼 좋은 것은 없었다. 취하면 윤리니 도덕이니 하는 잣대를 한 번에 허물어 버릴 수 있었으니까. 양심의 가책을 느낄 때마다 민석은 독한 술을 퍼 마셨다.

치악산의 가을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길섶엔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피어 오가는 사람들을 반겨주었다. 산에는 단풍이 들어 세상에 있는 모든 색을 다 품은 듯 보였다. 구룡사로 오르는 길 초입에 양쪽으로 늘어선 쭉쭉 뻗은 소나무 숲이 장관이었다. 이곳 소나무는 나무질이 황금색을 띠어 예로부터 황장목이라 불렀다. 호위병처럼 서있는 금강송을 보며 산길을 오르다 보니 서경은 밑동이 잘린 채 누워있는 원목장의 미송들이 떠올랐다. 부장님, 나무에게도 운명이라는 것이 있을까요? 글쎄. 처음부터 누군가가 정해 놓아서 아무리 애를 써도 피해갈수 없는 사람의 운명처럼 말이에요. 서경은 지난 몇 년간 겪었던 힘들었던 시간도, 민석과의 만남도 이미 누군가 정해놓은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내면에서 양심이 꿈틀거릴 때마다 그렇게 변명하고 싶었다. 내 죄가 아니라고, 운명이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온 거라고. 잘못된 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여기까지 와 버린 자신이 싫어서 모든 책임을 운명의 탓으로 돌리고 싶었다. 잠시 쉬었다 올라갈까? 좋아요. 편편한 바위에 앉아 계곡에 발을 담갔다. 발가락이 다 들여다보일 만큼 물이 맑았다. 제법 물살이 빨랐다. 힘들게 걸어온 그들을 위로하듯 발등을 쓰다듬어주었다. 놀러온 사람들은 그 물에 쌀을 씻었다. 이 물을 먹어도 되나 봐요. 이런데 오면 다 계곡물에 밥도 하고 라면도 끓이고 그러지. 수돗물은 따로 없으니까. 서경은 두 손을 모아 물을 떠 마셨다. 곱게 물든 나무들이 아치처럼 계곡을 감싸 안아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맑디맑은 계곡물, 신선한 공기, 물살에 깎여 넉넉해진 바위를 보는 것만으로도 불안했던 마음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자라는 나무들은 행복하겠죠? 어째서? 공기 좋고 경치 좋은 곳에 사니까요. 저 금강송들은 옛날에 왕실의 관을 짜는데 사용했대요. 그래서 함부로 나무를 잘라가지 말라고 절 입구 바위에 황장금표(黃腸禁標)라는 글을 새겨 놓을 정도로 이곳 소나무는 귀히 여기고 보호를 했대요. 소나무 박사 다 됐네. 누가 그래? 친구가 여기 원주에 살아요. 그 친구한테 들은 적이 있어요. 회사 다니기 전에는 나무에 대해 아는 게 없었는데 지금은 많이 아는 편이죠. 서경은 어깨를 위로 으쓱 올렸다. 서경의 환한 얼굴이 예뻤다. 하하하. 왜 웃어요? 예뻐서. 거짓말. 태어나서 이때가지 예쁘단 소린 한 번도 못 들어 봤어요. 귀엽단 소리라면 모를까. 아마 그것도 예의상 그렇게 말하는 거라는 거, 전 알아요. 맞아, 예쁜 얼굴은 아니지. 서경이는 그냥 귀여워. 뭐예요? 서경은 두 손에 물을 담아 민석의 얼굴에 뿌렸다. 민석은 천진하고 순수한 서경이가 마냥 좋았다. 혹시 부장님도 부모님이 외국 사람인가요? 뭐라고? 하하하, 그렇게 보이나? 그런 소릴 자주 듣긴 하지. 아니야. 아, 그렇군요. 정화는 할아버지가 외국분이시거든요. 정화가 좀 이국적으로 생겼잖아요. 듣고 보니 그런 것 같네. 기분 나쁘셨어요? 아니야. 아무튼지 우리 원목장에 실려 온 소나무들과 이곳 소나무들은 격이 다른 운명을 타고 태어난 게 틀림없어요. 좋은 자리에 있다고 다 행복한 건 아닐 거야. 사람이든 사물이든 100% 만족한 자리는 없는 거니까. 운명을 잘 타고 났다, 아니다 구분 짓는 것보다 주어진 운명을 어떻게 바꾸며 살까를 고민하는 게 더 중요하겠지. 그게 현명한 거 아닐까? 우리 원목장에 실려 온 나무들이 다 불행하다고 할 수는 없어. 자기 몸을 희생해서 가구로, 피아노로, 집을 짓는 목재로 그렇게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잖아. 나무의 본질이 달라진 게 아니고 모양만 바뀌는 거야. 새로운 삶을 얻는 거지. 어떻게 보면 여기서 자라는 이 녀석들보다 더 좋은 운명을 타고 난 건지도 몰라. 왕족의 관으로 쓰임 받지 못하고 값이 제일 싼 미송으로 짠 관일지라도 누군가 자기 안에 안겨 편히 잠들면 그 소나무는 행복하다 여길지도 모르잖아. 손이 얼어 터질 것 같은 겨울날, 목수들이 옹기종기 서서 몸을 녹이려고 피워 놓은 난로에 던져지는 자투리 나무들도 제 몸을 태워 그들의 언 몸을 녹일 수 있다면 행복할 수도 있고. 그렇군요. 듣고 보니 부장님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가난한 놈이 부자 마누라 만나 생전 처음 침대라는 곳에 누워 잠을 자고, 뜨거운 물이 펑펑 나오는 집에서 목욕을 했지. 좋은 음식을 조석으로 대접 받고, 고급 셔츠와 넥타이를 매고 살게 됐는데 난 늘 마음이 가난했거든. 한 번도 그 생활이 만족스럽거나 행복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어. 그저 편했을 뿐이야. 절대 아이는 낳지 말았어야 했어. 내가 후회되는 유일한 부분이야. 부모가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 감히 씨를 잘못 뿌린 거야. 와이프를 안은 게 몇 번이나 될까? 늘 그 사람에게 등만 보였으니 모진 놈이지. 모르겠어. 마음이 가질 않더라. 내 아이를 낳고 내게 여보라고 부르는데 난 왜 그 사람이 평생 낯설고, 정이 안 가는지 모르겠어. 다음 생이 있다면 나는 나무로 태어나고 싶어. 북 아메리카 어딘가에서 건축재가 되기 위해 태어나는 미송이어도 괜찮고, 세찬 바닷바람을 맞으며 단단해지는 해송이어도 상관없어. 내가 운명을 개척하는 삶 말고 차라리 정해진 운명이 있다면 이젠 그 운명에  맡기고 싶어. 거스르지 못해 환장한 놈처럼 사는 거 다음 생에서는 그만 하고 싶다. 미친놈의 발악에 너까지 끌어들인 거 미안하게 생각해. 가까이 가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육체가 정신을 이기지 못하네. 미안하다. 아니에요. 저는 부장님이 있어서 너무 행복한 걸요. 제가 미안하죠. 제가 없으면 가정에 충실하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그건 너와 상관없어. 너를 만나기 전부터 그래왔으니까. 네가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어. 죄책감 느끼는 건 나 하나로 족해. 어차피 우리 결혼에 처음부터 사랑은 없었어. 거래만 있었을 뿐이지. 우리 장인이 열등감으로 똘똘 뭉친 딸자식에게 돈을 주고 노리개 하나를 사서 쥐어 준거야. 나는 그런 존재였어. 서경아, 내 옆에 있어 줄 수 있지? 네. 너를 부요하게 해주진 못하겠지만 내가 너의 버팀목이 되어 줄게. 나한테 있는 것들은 모두 내게 아니야. 차도, 옷도, 집도, 사는 동안 빌려 쓰고 있는 거지. 우리 서로 아껴주고 의지하며 살자. 한 이불 덮고 한 집에 사는 것만이 사랑의 완성은 아닐 거야. 떨어져 있어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되는 거야. 그렇지? 약속 할게요. 저 같이 부족한 애를 좋아해 주셔서 고마워요. 부장님만 있으면 다른 건 필요 없어요. 누가 뭐라 하든지 넌 내 말만 듣고, 내 말만 믿어. 그럴 수 있지? 네 부장님. 아, 듣기 거북해. 부장님 말고 다른 호칭 없나? 남들이 보면 불륜인 줄 알겠다. 우리 불륜 아닌가요? 아니, 그런 불쾌한 말 쓰지 말자. 한 배를 탄 동지쯤으로 해 두지. 민석씨라고 불러. 넌 그냥 서경이.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주는 사람이 이 세상에 아무도 없네. 민석은 서경을 끌어안았다. 바람에 서경의 긴 머리가 얼굴에 와 닿았다. 민석은 서경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입술이 따듯했다. 서경은 민석의 품에 안겨 하늘을 바라보았다. 민석의 머리 위로 나무들이 출렁거렸다. 소나무 끝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햇살이 마치 가늘고 뾰족한 바늘처럼 느껴졌다. 소나무 바늘이 거센 빗줄기처럼 일제히 머리 위로 박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면서 오금이 저려왔다. 숨이 막히도록 안고 있어도 마음이 아팠다. 왜 우린 함께 있어도 이렇게 그리운 걸까요? 그러게. 몰래하는 사랑이라서 늘 허기가 지는 거겠죠? 우리, 괜찮을까요? 괜찮을 거야.

작지만 운치 있는 구룡사를 돌아보았다. 신라의 승려 의상은 어떻게 이런 깊은 산속에 절을 세울 생각을 했을까요? 대체 이 많은 자재를 어디서, 어떻게 끌어 왔으며 무엇으로 나무를 자르고 어떻게 벽을 쌓아 올렸을까요? 사람의 손이 참 위대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게 말이야. 대웅전 처마 끝에 달린 풍경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청명한 가을 하늘과 잘 어울렸다. 맑고 고운 풍경소리를 노래한 시인들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내려오는 길에 보니 계곡 여기저기에 기타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는 젊은이들도 많고, 가족 단위로 놀러 온 사람들도 많았다. 시내에서 데이트를 하는 줄 알고 나왔던 터라 옷도 신발도 산을 오르기엔 불편했다. 그와의 데이트는 늘 그랬다. 영화를 보자 했다가도 갑자기 마음이 바뀌면 강으로 바다로 내 달리곤 했으니까. 민석은 자기가 한군데 붙어 있지 못하고 쏴 돌아다니는 건 역마살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일요일에도 집에 하루 종일 있으면 좀이 쑤셔서 하다못해 안양천변이라도 돌다 와야 숨통이 트인다고 했다. 민석의 얼굴에 어둔 그늘이 보였다. 아마도 가족 단위로 온 사람들을 보고 난 후 부터였던 것 같다. 갑자기 주말을 아이와 보내고 있을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걸까? 말로는 정이 없다하지만 한 이불을 덮고 사는 사람이 아니던가. 이따금씩 어두워지는 그의 표정을 볼 때마다 서경은 마음이 불안했다. 서경은 민석이 자기를 앞질러 가기라도 하면 잰 걸음으로 따라가 팔짱을 끼었다. 그의 등을 보는 순간 밀려오는 두려움! 그것은 이별을 예고하는 것 같은 두려움이었다.

치악산의 밤은 밤벌레 울음소리와 계곡의 물소리로 가득했다. 어둠을 가르고 들려오는 물소리가 얼마나 큰지 공포가 느껴질 정도였다. 산속의 밤은 쌀쌀했다. 민박집 30촉 전등에서 내려오는 노란 불빛은 방안을 따뜻하게 비워주었다. 낯선 곳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이내 낯설지 않은 공간으로 변해 버리는 것일까? 그곳이 그랬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낡은 서랍장위에 이불 한 채, 찌그러진 쟁반에 놓인 물주전자와 두루마리 휴지 하나뿐인 그 방이 그로 인해 온통 가득 차는 느낌이었다. 벽에는 손길이 멈춘 달력이 이미 지나 온 날짜에 멈춰 서 있었다. 서경은 시간이 그대로 멈춰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왜 영화 속 연인들이 그런 말을 매 번 하는지 이해가 되었다. 얼음 속에 갇혀버린 북극의 생물처럼 이대로 모든 게 멈춰서 민석과 함께 박제가 되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헤어짐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없을 테니까.

어머니의 손길이 느껴지는 산나물과 된장찌개가 나온 민박집 저녁상을 무르고 두 사람은 물가로 내려갔다. 민박집은 작은 구멍가게를 겸하고 있어 칫솔이며 맥주를 살 수가 있었다. 관광객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평상에는 이미 먼저 온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물가 편편한 바위에 걸터앉았다. 얼음처럼 차가워진 물에 세수를 하고 이를 닦았다. 물속에 발을 담갔다. 서경의 발이 욱신거렸다. 발이 너무 아파요. 안 걷다 걸어서 그럴 거야. 내 차에 운동화 있으니까 내일은 그걸 신어. 꽉 끼는 신발보단 나을 거야. 어디보자. 민석은 서경의 발목을 끌어당겼다. 싫어요. 이리 줘봐. 민석은 흐르는 물에 서경의 발을 닦아 주었다. 그리고 자기 무릎위에 올려놓고 발바닥을 꾹꾹 눌러주었다. 서경은 울컥 눈물이 솟았다. 그 누구에게도 받아 보지 못한 호사였다. 이따 올라갈 때 차에 갔다 들어가자. 내 차엔 여벌옷도 있고, 안티프라민도 있고, 물파스도 있거든. 네? 팔레트 짜느라 망치질을 하루 종일 하다보면 어깨가 아파서 항상 갖고 다녀. 그걸 바르면 다리가 덜 아플 거야. 인부들을 시키지 않고 왜 직접 원목장에 나가 일을 하세요? 답답하니까. 같이하는 거니까 걱정하지 마. 그리고 종 부리 듯 아랫사람에게 명령하고 시키기만 하는 거 내가 싫어서 그래. 네, 부장님은 참 좋은 사람 같아요. 또 부장님이야? 하하하, 그러게요. 오늘이 우리 첫날밤이 되는 건가요? 까분다, 조그만 녀석이. 민석은 서경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냥 손만 잡고 자는 거야. 그냥 같이 있고 싶어서 데리고 왔어. 집에단 연락을 못해 어쩔 거야. 모르겠어요. 내일 일은 내일 걱정 할래요. 그래 어서 마시고 올라가자.

민석은 서경의 허리를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왜 여자들이 그런 순간에 까치발을 들고 남자의 목을 두 손으로 껴안는 건지 알 것 같았다. 맞닿은 가슴에서 민석의 빠른 심장의 박동이 느껴졌다. 민석의 입술이 서경에 입술에 닿았다. 서경은 눈을 감았다. 가끔 이마나 볼에 해주던 입맞춤이 아니라 키스였다. 첫 키스는 책에서 읽은 것처럼 부드럽고 감미로운 게 아니라 거칠고 투박했다. 혀가 뽑힐 것 같은 강렬한 키스였다. 숨이 막혔다. 민석의 손이 가슴을 더듬었다. 서경은 이런 순간을 수도 없이 상상했었다. 알몸으로 하나가 되는 상상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민석의 입술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수만 볼트의 전기가 흘러 온몸이 감전되는 것만 같았다. 입술에서 목으로 그리고 가슴으로. 온몸의 세포들이 일제히 곤두 서는 것만 같았다. 그것만으로도 서경의 몸은 민석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서경은 여기가 세상 끝이라도 좋다고 생각했다. 사랑해. 저도 사랑해요. 뜨거운 숨을 학학 뱉으며 서경은 걸쳐 있던 옷을 끌어 내렸다. 아니야. 그건. 여기까지만, 우리 여기까지만 하자. 민석은 거친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방바닥에 앉아 등을 돌린 채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앞가슴이 풀어 헤쳐진 채 서있던 서경은 민석의 갑작스런 행동이 당황스러웠다. 미안하다. 내가 원래 못난 놈이라 그래. 참았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네. 그냥 같이 있고 싶어서 데리고 온 건데, 정말 미안해. 내일은 바닷가에 가서 바람 쐬고 맛있는 거 먹자. 앉아봐. 민석은 서경의 손을 잡아 당겼다. 서경은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무슨 말이든 해야겠는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누워, 힘들 텐데. 짧은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갔다. 서경의 머리에선 왜? 라는 물음표만 빙빙 맴돌았다. 서경은 민석의 팔에 얼굴을 대고 허리를 감싸 안았다. 안으셔도 괜찮아요. 제가 민석씨를 원해요. 후회하지 않을게요. 미안해. 이러지마. 민석은 피우던 담배를 비벼 끄고 서경을 안아주었다. 민석은 진한 애무를 해 줄 뿐 끝내 옷을 벗지 않았다. 민석은 휴지를 손에 감아 서경의 젖은 곳을 닦아 주었다. 그리고 서경의 옷을 여며주었다. 서경은 몸을 일으켜 벽에 기대앉았다. 왜 그러는 건지 물어봐도 될까요? 너를 안으면 다시는 널 볼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래. 너를 아껴주고 싶어. 키스는 괜찮은데 섹스는 왜 안 되는 거죠? 그게 뭐가 다른가요? 이해가 되지 않아요. 제발 안아주세요. 이러지마, 서경아. 후회하게 될 거야. 왜 저를 초라하게 만드세요. 전 민석씨의 여자가 되고 싶어요. 넌 이미 나에게 가장 소중한 여자야. 차차 자연스러워지겠지. 조금만 기다려 줘. 시간이 지나면 편하게 널 안을 수 있는 날도 오겠지. 우리 자자, 난 너무 피곤한데 먼저 자도 될까? 민석은 서경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세상의 근심을 모두 내려놓은 얼굴로 이내 잠이 들었다.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잠을 잘 수 있는지 서경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서경은 냉기가 오르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잠이 든 민석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눈물이 흘러 내렸다. 아주 오래 전 지금과 똑 같은 상황이 있었던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서경은 민석의 손을 조심스럽게 끌어다 얼굴에 대 보았다. 상처투성이인 그의 손이 안쓰러웠다. 그의 손등에 입술을 댔다. 여전히 냉골이었다. 조심 좀 하지. 망치로 못을 쳐야지 왜 손은 때리고 그래요. 아팠겠다. 서경은 참았던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숨어서만 가능한 사랑이 서글픈 건지, 끝내 안아주지 않은 것이 서운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껍데기만 붙들고 사는 아내와는 잠자리를 하면서 왜 나는 안 된다는 걸까? 서경은 질투와 분노가 뒤범벅이 되어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물소리가 점점 크게 온 방을 채워갔다. 피곤이 몰려왔다. 졸음은 어떤 감정도 무장해제 시킬 만큼 강했다. 서경은 민석에게 베개를 베어주었다. 다리에 쥐가 올랐다. 민박집은 남자 팔을 베고 자라는 뜻인지 베개가 하나뿐이었다. 그의 옆에 누웠다. 민석은 몸을 돌려 팔을 내 주고 다른 팔로 서경의 어깨를 감싸주었다. 그의 품에서 남자냄새가 났다. 서경은 민석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따듯했다. 그래, 이렇게 함께 있으면 되는 거지. 사랑일 거야. 내가 싫은 게 아니라 아껴주고 싶다 하잖아. 어쩌면 신혼여행에서 한 번 자고 생긴 정현이 때문에 임신에 대한 공포가 있는 건지도 몰라. 가엾게 여기자. 차차 나아지겠지. 서경은 민석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렇게 매일 얼굴을 마주보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 큰 성인 남녀가 한 방에서 자면서 그냥 잘 수 있다니, 서경은 섹스 없이도 사랑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경의 사랑은 가을 산보다 짙어졌다.

은행에서 돌아와 책상에 앉자마자 사장실 인터폰이 울렸다. 정화였다. 어디 갔었어? 은행. 야, 너 그거 뭐야? 뭐가? 네 책상에 있는 쪽지. 서경은 그제 서야 민석이 남긴 쪽지를 발견했다. 서경아, 나 거래처에 갔다 올게. 학원가기 전엔 돌아 올 거야. 혼자 가지 말고 기다려. 데려다 줄게. -민- 그 옆엔 하트가 그려 있었다. 정화는 흥분한 목소리로 서경의 손을 잡아당겼다. 잠깐만 나와 봐. 윗분들 없으니까 빨리. 너 김부장이랑 연애해? 아까 네 자리에 갔다가 그 남자가 네 책상에 쪽지를 두고 나가는 걸 봤어. 어, 그게...... 빨리 불어라. 그래서 주말마다 연애 하느라고 나랑 데이트 안하는 거였어? 앙큼한 계집애, 난 또 공부하느라 바쁜 줄 알았지. 둘이 어디까지 갔는데? 말 안하면 회사에 소문낸다. 알았어. 대신 비밀 지켜주는 거지? 그 사람에게도 아는 척 하면 안 돼. 뭐, 그 사람? 하하하, 둘이 잤어? 아니 그런 거 아니야.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널 어쩌면 좋니. 그렇게 좋아? 응, 좋아. 언제부터 사귄 거야? 야유회 날부터. 같은 차를 타고 왔다더니 그날 사단이 난 거로구나. 그런 거 아니래도. 왜 늙다리들이 어린애들한테 질퍽대니? 우리 꼰대도 나한테 엄청 질퍽댄다. 누구, 사장님? 어머나, 어떻게? 서경아, 한번 같이 자 주면 모든 게 편해지는 거야. 사장이 갑자기 왜 나를 비서실로 데려갔겠니? 남자랑 자면 어떤데? 하하하 순진한 거. 김부장한테 하자고 해봐. 사장보단 젊었으니 잘 할 거다. 나 들어간다. 정화야, 비밀 지켜야 돼. 너 하는 거 보고. 하하하.

민석의 아내를 처음 본 건 경비실에서 온 인터폰을 받고 나서였다. 김 부장님 댁에서 사람이 왔으니 아무나 잠간 나와 보라는 것이었다. 직원들은 점심을 먹으러 나갔고 월말 결산 때문에 혼자 사무실에 남아 있던 서경이 나가게 되었다. 서경은 부인을 보는 순간, 도둑질 하다 들킨 사람처럼 심장이 두근거렸다. 부인은 알이 아주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었다. 전형적인 아줌마 파마머리에 툭 튀어나온 광대뼈, 두꺼운 입술, 게다가 키까지 작았다. 어디를 보아도 조각상처럼 생긴 민석씨와 어울리는 구석이 없어 보였다. 그의 아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돈 때문에 데릴사위로 들어갔다는 말이 사실인가보다 싶었다. 사랑 없는 결혼생활을 하면서도 가정을 깨지 못한다던 가여운 그의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김부장님 아내 되는 사람입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당당했다. 네, 사모님. 안녕하세요? 죄송하지만 이 쇼핑백 좀 부장님께 전해 주시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그의 아내는 민석을 꼭 빼어 닮은 사내아이를 업고 있었다. 아이만큼 부부라는 걸 증명해 주는 확실한 증거가 또 있을까? 아기가 참 예쁘네요. 네, 데리고 나가면 사람들이 애기가 아빠를 닮았나 봐요. 참 예쁘네요. 하고 말해요. 저한테 못났다는 말은 차마 못하고 말이에요. 그녀가 웃었다. 광대뼈에 안경테가 닿아 안경이 움직였다. 웃는 모습조차도 예쁘지가 않았다. 일순간 서경은 저런 여자와 섹스를 하고, 임신을 시켰단 말인가 생각하니 기가 막히고 질투가 솟아올랐다. 외모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됨됨이라고 생각하던 자신이 아니었던가. 그것을 가르쳐 준 아버지가 하늘에서 탄식할 일이었다. 민석의 사랑을 차지했다는 오만함 때문이었을까? 그의 아내가 한없이 초라해보였다. 어이없는 우월감이었다. 서경은 자기 안에 분명히 악마가 존재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이 뭐예요? 민서경입니다. 예쁜 이름이네요. 미스민, 그럼 부탁드려요.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서경은 목례를 했다. 뒤돌아서서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등 뒤에 혹을 단 낙타처럼 늦가을 햇살을 가르며 터벅터벅 걸어갔다. 포대기 밖으로 잠든 아이의 늘어진 팔이 시계추처럼 흔들렸다.
서경은 수돗가로 달려가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할 수만 있다면 그 물로 더러워진 마음속을 씻어내고 싶었다. 아이를 업고 안양에서부터 올라 온 사람이 아니던가! 들어오시게 해서 차라도 대접했어야 했다. 외근을 나간 그가 돌아 올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들어오라고 하지 않은 저의가 뭘까? 그 사람이 아내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던 걸까? 아기까지 업고 온 그녀를 혼자 돌려보낼 사람이 못 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경은 이기적으로 변해가는 자신이 무서웠다. 돌아가신 아빠가 보시면 얼마나 실망하실까? 어머니가 아시면 네가 제 정신이냐고 하시겠지? 하나를 감추기 위해서 열 가지 백가지를 속이며 산다는 게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볼링장 공사에 들어갈 로즈목과 단풍나무(Maple)를 자른 후라 그런지 원목장은 나무 향으로 가득했다. 볼링장 바닥재론 단풍나무가 사용된다. 강하면서도 미끄럽지 않기 때문이다. 좋은 로즈 목으로는 기타를 만들기도 한다. 하물며 나무도 제가 설자리를 알건만 나는 왜 설자리와 서지 말아야 할 자리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일까? 서경은 갑자기 자신이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서경은 쇼핑백을 열어보았다. 빳빳하게 다림질을 하여 각을 세운 흰 와이셔츠에서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성역 같은 것이 느껴졌다. 봉투도 없이 반으로 접은 편지가 눈에 띄었다. 여보, 며칠째 들어오지 않으셔서 옷을 챙겨 왔으니 갈아입으세요. 아기가 열감기로 많이 아팠어요. 오늘은 들어오셨으면 좋겠어요. 서경은 숨이 멎어 버리는 것 같았다. 그 편지는 민석에게 보낸 것이 아니라 제발 우리 남편을 집으로 보내주세요, 다시는 만나지 말아주세요. 하는 부인의 애원처럼 느껴졌다. 서경은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 버렸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은 매일 밤 집에 안가고 어디엘 간 것일까? 며칠 동안 안 들어 왔다니? 서경은 갑자기 마음이 불안해 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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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석의 37살 생일에 그의 장모님은 직원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사위 체면도 세워주고 집에 마음을 붙이게 하려고 마련한 자리였다. 서경은 퇴근 후 정화와 백화점에 들렀다. 정화는 자기가 와이셔츠를 살 테니 너는 넥타이를 사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다. 생각해 보니 늘 민석씨에게 받기만 했다. 정화야, 좀 더 괜찮은 건 없을까? 넥타이는 너무 약소 한 것 같아서 말이야. 넥타이가 어때서? 매번 받기만 하고 준 건 없어서 좀 큰 걸 해주고 싶어. 정화는 들은 척도 안하고 와이셔츠를 보여주었다. 이거 어때, 괜찮지? 사이즈가 맞을까? 나는 딱 보면 알아. 한두 번 장사해 보냐? 맞을 테니 걱정 마. 그래? 난 남자 걸 사본 적이 없어서. 이런 숙맥. 선물도 좀 사주고 그래야 남자가 좋아하지. 너는 이 넥타이를 사. 잘 어울리네. 네가 무리한 선물을 하면 그 집에서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여직원이 왜 큰 선물을 했을까 이상해하지 않겠어? 그렇구나. 그런 생각은 못했네. 다음에라도 절대 반지 같은 건 사주지 마라. 그래, 알았어. 근데 정화야, 나는 안가면 안 될까? 난 그 집에 갈 자신이 없어. 넌 김부장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지 않아? 그렇게 겁이 많은 게 연애는 어떻게 했니? 뻔뻔해져야 유부남이랑 연애를 하지. 너희 둘 어차피 헤어지지도 못하잖아. 당당하게 부딪혀.
지하철을 타고 안양으로 내려가는 동안 정화는 사장님와의 연애 담을 늘어놓았다. 요즘은 꼰대뿐 아니라 자기에게 푹 빠져 정신을 못 차리는 유부남이 하나 더 생겼다고 자랑을 했다. 정화야, 너는 왜 유부남들을 만나니? 편하잖아. 돈도 많고, 안정되고, 같이 살자고 질퍽거리지도 않으니 말이야. 너희 집은 부자잖아. 야, 우리엄마가 나 연애질하라고 아파트를 사주겠냐? 차를 사주겠냐? 아파트? 사장님이 아파트까지 사 주신 거야? 당연히 그 정도는 해야지. 쪽팔리게 꼰대랑 여관을 드나들 수는 없잖아. 그렇구나. 새로 만난다는 남자는 뭐하는 사람이야? 같은 계통에서 일하는 사람이야. 우리랑? 응, 나중에 보여줄게. 정화의 표정이 밝았다. 그 사람을 좋아하나 보구나. 그래, 아주 맘에 들어. 뺏어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 유부남이라며?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난 그런 거 신경 안 써. 서경은 정화의 당당함이 부러웠다. 서경아, 다음 주에 우리 가게 갈래? 너 게이 바는 못 가봤지? 내가 보여줄게. 언니들 새로 왔는데 아주 괜찮더라. 언니? 바보, 게이 바에 여자가 어디 있어. 다 남자지. 남자 중에 여자 역할을 하는 사람을 다 언니라고 부르거든. 아. 그래? 게네들은 호르몬 주사를 자주 맞아서 어깨선이며 목선이 정말 여자 같아. 털도 없고 궁금하지 않니? 그런 남자들이랑 맥주 한 번 마셔봐, 기분이 어떤지. 물론 그 언니들이 여자 손님을 제일 재수 없어 한다마는, 넌 그 언니들보다 인물이 좀 빠지니까 시기하진 않을 거야. 하하하. 못된 계집애 말하는 거 하고는. 같이 가는 거지? 그래 알았어, 시간 내 볼게. 우리 오빠도 네 소식 궁금해 하드라. 요즘 왜 안 오냐고. 알았어.

주소를 들고 동네를 헤매다 간신히 찾은 집 앞에는 김민석이라는 문패가 걸려있었다. 그리고 아들의 이름을 땄는지 ‘정현 피아노 교습소’란 간판이 그 아래 걸려있었다. 문패를 보는 순간 서경은 온몸에서 힘이 빠져 나갔다. 여기가 그 사람 집이구나. 뭔지 모를 슬픔이 밀려오면서 목젖 뒤로 뜨거운 것이 삼켜졌다. 그의 아내가 문을 열어주었다. 한 번 본 얼굴이라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어서 와요, 미스민, 그땐 고마웠어요. 음식 준비는 거의 다 되어가니 정원에 가서 음료수 마시면서 집 구경이나 잠깐 하세요. 하며 들어갔다. 집안에는 먼저 온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다. 직원들만 초대를 한 것이 아니라 친정 식구들과 친구들도 초대한 모양이었다. 다른 곳이었다면 부엌으로 들어가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하며 살갑게 굴었을 텐데, 서경은 그럴 수가 없었다. 민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서경은 정화와 함께 집 구경을 했다. 오래돼 보이긴 해도 정원이 크고 잘 가꾸어진 집이었다. 마당에 놓인 철제 테이블 위엔 와인과 음료수가 준비되어 있었다. 저기가 주말마다 미국사람 흉내를 내며 식사를 한다는 곳인가 보다. 그래서 그 사람이 불편하다던. 서경이 넌, 김 부장 부인을 어떻게 알아? 아, 전번에 회사에 오신 적이 있어. 부장님이 집에 안 들어오셨다고 옷을 가져 왔더라고? 회사로? 미쳤구나. 옷이 없으면 사 입겠지. 그런데 참 이상해. 그 사람이 나 학원에 데려다주고 다른 곳엘 가는 것 같아. 대체 어딜 가서 자고 집에 안 들어가는 걸까? 물어보지 그랬어. 못 물어보겠더라. 겁이 나서. 뭐가? 딴 여자라도 꿰 찼을까봐? 서경은 고개를 땅에 떨어뜨리고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잘 해주긴 해? 응. 원래 남자란 동물은 믿을 게 못되는 거야. 너무 믿진 마. 앞에선 넥타이 메고 신사인척 하면서 뒤로는 호박씨를 까거든. 서경은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정화가 민석씨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빠 한 마디하고 싶었지만 침을 삼켰다. 그만두자.
아이를 기르는 집답지 않게 깨끗했다. 안주인의 살림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경의 시선은 벽에 걸린 결혼식 사진 앞에서 멈췄다. 민석씨가 그 속에 있었다. 그의 아내는 그날도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었다. 야, 부장님 와이프 진짜 박색이다. 세상에 웨딩드레스를 입고도 저렇게 못생긴 신부가 있다니. 정화는 신이 나서 큭큭 거렸다. 듣겠다, 좀 조용히 말해. 사진 속의 민석은 슬퍼보였다. 남의 잔치에 억지로 선 것 같은 어색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찍은 아이의 돌 사진 역시 그의 표정은 어두웠다. 한 여자의 남편이 되는 것도, 한 아이의 아빠가 되는 것도 모두 행복하지 않았나보다 생각하니 서경은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싫든 좋든 그들은 가족이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매일 사랑한다고 말을 하고 숨이 막힐 만큼 뜨겁게 포응을 해도 더는 좁혀지지 않던 거리가 바로 그것이었다. 가족이란 굴레. 서경은 가족이란 굴레 밖의 사람이었다. 부부의 방은 현대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가운데 놓인 고급스런 침대가 산처럼 크게 보였다. 서경은 현기증이 일었다. 벽에 걸린 민석의 추리닝과 아내의 스웨터, 어디를 둘러봐도 김민석은 민서경의 남자가 아니라는 증거뿐이었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그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민석은 양손 가득 슈퍼마켓에서 사 온 봉지를 들고 와 아내에게 건네주었다. 상상해 보지 못한 남편의 모습이었다. 두 사람은 사이가 나빠 보이지도 않았고 평범한 부부 같아 보였다. 민석은 서경과 정화를 보더니 밝은 표정으로 다가왔다. 미스민, 왔어. 집 찾기 힘들었지? 아니에요, 금방 찾았어요. 정화가 말을 가로채 톤을 높여 대답을 했다. 서경은 민석을 똑 바로 쳐다 볼 수가 없었다.
파티가 시작되었다. 서경은 남자 직원들이 따라 주는 술을 마다하지 않고 받아 마셨다. 취하기라도 해야 살 것 같았다. 생일 케이크에 촛불이 켜지고 그의 아내가 피아노 앞에 앉았다. 생일 축하 노래가 나오자 사람들은 입을 모아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민석씨의 생일 축하 합니다. 그 사람은 미운 오리 새끼가 아니라 모두에게 사랑받는 한 가정의 가장이었다. 밝게 웃는 민석의 얼굴이 촛불 위로 일렁거렸다. 어쩌죠? 민석씨, 난 아무것도 되돌릴 수가 없는데. 내 마음이 왜 이렇게 불안할까요? 나하고 한 약속 잊은 거 아니죠? 제발 나 좀 잡아 주세요. 눈길이 마주 칠 때마다 민석은 그녀만 알아들을 수 있는 눈빛으로 타전을 보내주었다. 서경이만 해독해 낼 수 있는 유일한 문자였다. 괜찮아, 서경아. 다 괜찮을 거야. 부인은 남편을 위해 노래를 준비했다며 반주를 시작했다. 귀에 익은 음이었다. 나 혼자만이 그대를 알고 싶소. 나 혼자 나 혼자만이 그대를 갖고 싶소. 나 혼자만이 그대를 사랑하여 영원히 영원히 행복하게 살고 싶소. ‘나 하나만의 사랑’이란 노래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아름답고 애절했다. 노래를 듣던 친정어머니와 부인의 친구 몇이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부부의 사정을 잘 아는 것 같았다. 부인이 겪었을 마음고생이 서경의 심장을 사정없이 찔러댔다. 앉아있기 불편한 자리였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부인과, 그 남자의 사랑을 받는 여자가 한 공간에 앉아 있다는 것은 참으로 못할 짓이었다. 민석의 단 하나 뿐인 사랑이 되고 싶었던 부인은 끝내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민석은 어색해진 분위기를 풀려는 듯, 좋은날 왜 그래? 이 사람이 원래 이렇게 마음이 약해요. 민석은 부인에게로 다가가 어깨를 감싸 안았다. 노래 선물, 고마워. 하며 앉아 있는 부인의 머리에 입을 맞췄다. 사람들은 모두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쳐 주었다. 취한 직원들은 돌아가며 노래를 불렀다. 서경은 술이 있다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술이 없었다면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손을 어디 놓아야 할지, 그러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들켜 버릴 것만 같았다. 남자 직원들은 여자가 술 마시는 게 재미있는지 정화와 서경의 잔이 빌 때마다 계속해서 술을 채워주었다. 속이 화끈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정신이 몽롱해 지면서 사람들의 얼굴이 흐려지고 목소리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불안했던 마음이 천천히 녹아 내렸다. 민석은 벌겋게 달아오른 서경의 얼굴을 쳐다보며 그만 마시라는 눈짓을 보냈다. 서경은 눈을 피했다. 민석은 걱정이 되어 미칠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가서 안아주고 싶었다. 왜 오라고 해서 이렇게 상처를 주고 있는지, 미처 생각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차라리 그렇게 취해서 서경이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이 모든 건 내 의사가 아니라 장모님이 만든 각본이니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사람들은 끼리끼리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경은 어지러워 등을 벽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때 옆에서 술을 마시던 정화가 갑자기 흑흑거리기 시작했다. 그건 필름이 끊길 때 나타나는 반응이었다.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취해버린 정화의 술주정이 시작된 것이다. 서경은 하루 종일 제 설움에 겨워 정화를 미처 챙기지 못했다. 서경은 정화의 팔을 잡았다. 정화야, 일어나. 우리 그만 가자. 허! 이게 누구신가, 민서경. 너, 민서경이구나. 정화는 완전히 혀가 꼬부라진 소리로 주절거렸다. 어머나, 이걸 어떻게. 정화야, 괜찮니? 괜찮지 않고 그럼. 그래! 이집에 와 본 소감이 어떠셔? 다 보고나니 기분이 어떠냐구? 서경은 정화의 입에서 쏟아져 나올 다음 말들이 두려웠다. 너 많이 취했다. 어서 가자. 내가 오늘 할 말을 좀 하고 가야겠어. 내일 하면 되잖아. 손님들 계신데 분위기 흐리지 말고 어서 가자. 서경은 정화의 팔을 아프게 끌어당겼다. 이거 놔! 서경의 손을 뿌리친 정화는 비틀거리며 민석 앞으로 걸어갔다. 서경도 술이 취해 다리가 풀렸다. 숨이 가쁘고 서 있기조차도 힘이 들었다. 여보세요, 김민석씨. 나, 더 이상은 못 참겠어. 당신이 교통정리 좀 해 보세요. 왜 이러나? 미스 홍, 많이 취했나보네. 부장님은 대체 몇 여자를 끼고 살아야 성이 차시겠어요?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왜요? 쪽 팔려요? 사랑하는 게 죄인가요? 부장님도 이런 생활 싫다면서요. 마지못해 사는 거라면서요. 사색이 된 민석은 말을 더듬었다. 왜 이러나 정말. 택시 잡아 줄 테니 일어나지. 미스터 한, 미스 홍 좀 부축해 주겠어? 팔을 잡는 미스터 한을 밀쳐낸 정화는 민석의 목을 끌어안았다. 피할 틈도 없이 정화는 민석의 입술에 기습 키스를 퍼부었다. 민석은 동상처럼 서 있었다. 그의 얼굴에 차가운 분노가 흘렀다. 한 번도 보지 못한 표정이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는 부인도, 주위 사람들조차도, 서경도 그 어처구니없는 상황 앞에서 모두 얼음이 되어 버렸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민석은 갑자기 정화를 밀쳐내며 정화의 뺨을 세차게 때렸다. 미친년! 정화는 방바닥으로 쓰러졌다. 민석은 정화를 향해 미친년이란 말을 내 뱉었다. 정화는 소리를 높여 울었다. 생일 파티는 엉망이 되어버렸다. 서경은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갑자기 미친년처럼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런 거야? 정화에게 새로 생겼다는 유부남이 민석씨 당신이었어? 당신이 집에 안가고 매일 밤 사장님이 얻어준 아파트에서 정화랑 자고 다녔단 말이지? 왜? 어떻게? 다리는 휘청거리는데 머리는 무섭도록 빠르게 차가워졌다. 뒤에서 민석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이를 악물고 대문을 향해 걸었다. 다리가 꼬이는 것 같았다. 몸이 휘청거렸다. 미스민! 그의 아내가 서경을 불러 세웠다. 서경은 정신을 차리려 애를 썼다. 네, 사모님. 술이 많이 취한 것 같은데 남자 직원들하고 함께 올라가세요. 밤길이라 위험하고 골목도 어두워요. 방금 전 끔찍한 일을 목격한 사람이 응급실에 실려 가도 시원치가 않을 텐데,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손님을 배웅하다니! 서경은 갑자기 술이 깨는 것 같았다. 무서운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나와의 관계도 다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체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두렵기까지 했다. 사모님, 죄송합니다. 정말 면목이 없게 되었습니다. 괜찮아요. 술들이 과해서 그런 건데 어쩌겠어요. 서경은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고 싶었다. 나도 당신 남편을 훔친 나쁜 년입니다. 죽을죄를 졌으니 절대로 용서하지 마세요. 하며 매달려 울고 싶었다. 민석의 아내는 많이 배운 여자다웠다. 어쩌면 이런 일을 이미 여러 번 겪어서 이력이 났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사람들 앞에서 남편의 체면을 지켜주기 위해 끓어오르는 감정을 자제할 줄 아는 여자였다. 

서경은 이 년 넘게 다닌 회사에 사직서를 냈다. 갈 곳이 정해지진 않았지만 더는 한 직장에서 민석과 정화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그날 이후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 앞에선 대놓고 민석에게 들이대는 정화를 감당해낼 자신이 없었다. 그럴 때마다 민석은 정색을 하며 화를 냈지만 그럴수록 정화는 보란 듯이 더 질퍽거렸다. 정화와 친구 관계를 유지 한다는 것은 힘이 들었다. 말을 섞는 것도 불쾌하고 사내에서 공적인 일로 부딪히는 것조차도 껄끄러웠다. 모르고 그랬다면 용서가 되었을 것이다. 그럴 수도 있는 거니까. 하지만 욕심 때문에 친구의 애인을 뺏고, 우정을 저버린 친구는 더 이상 친구가 아니라고 서경은 결론을 내렸다. 서경은 정화를 친구라고 생각했던 날들이 후회스러웠다. 정화를 볼 때마다 속에서 천불이 올라왔다. 그럴 때마다 서경은 주문을 외 듯 중얼거렸다. 내가 당한 배신이 본 부인이 당한 배신만 할까? 부인도 가만있는데 숨겨진 애인이 무슨 자격으로 정화를 탓할 수 있겠는가. 다 내 잘못이다. 남의 남편을 탐낸 것도, 질이 좋지 않은 친구라는 것을 알면서도 함께 몰려다닌 것도 모두 다 내 잘못이다. 서경은 나만 떠나면 끝날 일이라고 생각했다. 사장님은 절대로 사표 수리를 해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래, 왜 내가 나가야 하는 거지 싶어 두 사람을 무시하고 다녀 보려고 애를 썼지만 도무지 일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일원 한 장도 틀리면 안 되는 장부를 자꾸 틀려서 일일 마감을 못하는 실수가 자주 이어졌다. 맨 정신으로 산다는 게 너무나 힘들었다. 사장님이 정화와 어떤 관계이든 상관없이 서경에겐 용기를 주고, 장학금과 보너스를 따로 챙겨 주시던 고마운 분이셨다. 새사람을 뽑아서 업무에 차질이 없도록 하겠다는 약속 하에 사표 수리를 받아주셨다. 거래처에 일할 사람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을 했더니 마침 참하고 경력 있는 아가씨가 있다며 연결을 해 주었다. 경력자니 일반 회사와 다른 몇 가지만 가르치면 될 것 같았다. 서경이가 그만둔다는 소문은 사내에 빨리 돌았다. 원목장에 가니 목재를 나르던 아저씨들이 몰려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으며 못내 섭섭해 하셨다. 가족처럼 잘 해 주시던 분들이었다. 좋은 사람 중매 서 줄 테니 일찌감치 시집이나 가라는 김씨 아저씨 말에 서경은 웃음이 터졌나왔다. 네, 소개해 주세요. 당장 결혼을 하고 싶어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너희들이 아니어도 민서경은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속이 시원할 것만 같았다. 서경은 넓은 원목장을 천천히 걸었다. 경리과에서 일하는 것보다 나무가 있어서 좋았던 직장이었다. 바쁜 시간이 지나갔는지 제재실은 조용했다. 나무에 대한 지식을 가르쳐 주고 나무와 친해지도록 도와준 그곳 아저씨들. 다른 여직원들은 우리한테 관심도 없고, 이곳에 내려오는 것도 꺼려하는데 우리 서경아가씨는 어째서 이렇게 우리를 잘 챙겨 주냐며 예뻐해 주셨다. 오후 새참시간이면 인터폰을 걸어 라면 끓여 놨으니 빨리 와서 먹고 학원가라고 몰래 챙겨 주시던 고마운 분들이었다. 팔레트 작업이 있는 날이면 민석도 함께 그곳에 있었다. 거기서 얻어먹던 라면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라면이었다. 민석은 답답한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는 것보다 원목장에서 인부들과 섞여 일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곳에서 우든 박스를 만들 때 가장 행복해 보였다. 나무에 못을 박을 땐 손에 신이 들린 것 같아 보였다. 원하는 곳에 정확하게 단 한 번에 못을 박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 사람이 보고 싶었다. 서경은 울컥 눈물이 솟았다. 왜 나만 떠나야 하는 거지? 그 사람은 왜 이런 상황을 만들어 놓고 내게 와서 빌지 않는 걸까? 정말 우린 이대로 끝인가? 정화를 좋아하는 것 같진 않은데 대체 무슨 약점을 잡혔기에 그렇게 끌려 다니는 것일까? 정화는 그 사람의 어떤 점이 좋았을까? 자기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고, 상처투성이에 마음까지 가난한 사람인데 어쩌자고 정화랑 엮였는지 알 길이 없었다. 정화를 믿고 했던 말들을 주워 담고 싶었다. 알몸을 들켜버린 것 같은 수치심과 배신감에 온몸이 떨려왔다. 정화와 나는 악연임에 틀림없다. 서경은 조금 더 천천히 걸었다. 행복을 선물해 주던 원목장도 며칠 후면 올 수 없다고 생각하니 억울하기만 했다.

새로 온 경리아가씨에게 업무를 인계하고 있는데 인터폰이 울렸다. 민석이었다. 얼굴만 돌리면 유리창 너머로 민석의 얼굴을 볼 수 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는 거래처에 전화를 한 것처럼 수화기에 대고 크게 말을 했다. 안녕하세요? 서라벌에 김민석입니다. 전번에 말씀 드린 건으로 잠시 뵙고 싶은데 일곱 시에 뵐 수 있을까요? 네, 그럼 그 카페에서 뵙겠습니다. 서경은 아무 말 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가 자주 써 먹던 수법이었다. 그 사람이 만나자는데 왜 아무 떨림이 없는 걸까? 민석의 생일 이후 서경은 회사 일에만 신경을 쏟았다. 밤에는 버스를 타고 학원에 가서 공부를 했다. 절대로 불쌍해 보이거나 만만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 사람에게도 정화에게도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느냐고 따지지도 않았다. 그래, 마지막 인사는 해야지. 서로 깔끔하게 정리하는 게 좋을 테니까. 서경이 나가려다 민석과 마주쳤다. 미스 민, 퇴근해? 나도 약속이 있어 나가봐야 하는데 사장님이 부르시네. 하며 눈웃음을 보냈다.

얼마 전까지도 직원들의 눈을 피해 들리던 카페. 이 카페 앞에서 만나 그의 차를 타고 학원엘 가곤 했다. 함께 커피를 마시고, 데이트 일정을 잡고, 그의 어깨에 기대어 미드나잇 블루를 듣던 곳이기도 했다. 그를 만날 수 있다는 기쁨으로 한걸음에 뛰어 오르던 이층계단이 서경은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졌다. 이 카페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설렘도, 기다림도, 사랑도, 그에게 연결되었던 모든 통로를 오늘은 기꺼이 잘라 낼 것이라고 마음을 먹었다. 오셨어요? 차는 그분 오시면 같이 시키실 거죠? 네. 눈치 빠르고 친절한 여 종업원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엽차가 다 식도록 민석은 오지 않았다. 사장님과 이야기가 길어지는 모양이었다. 서경은 성냥 각에서 성냥개비를 꺼내 사각으로 탑을 쌓았다. 탑이 한 층 한층 높아졌다. 처음부터 만나지 말았어야 했어. 남의 남자를 탐낸 벌을 받은 거야. 그러니 억울해 할 것 없어. 이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면 돼. 아니라고 생각했을 때 멈춰야 했어. 내가 너무 욕심을 부렸던 거야. 서경은 미친년처럼 주절거렸다. 우르르 성냥 탑이 무너졌다. 테이블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미안. 얘기가 좀 길어졌어. 들어오면서 커피는 주문했어. 차 안마셨지? 네. 민석이 자리에 앉자 Midnight Blue가 흘러나왔다. DJ에게 부탁을 하고 들어 온 모양이었다. 그 사람이 제일 좋아 하는 노래다. 그 사람 때문에 덩달아 좋아하고, 매일 듣던 서경의 노래이기도 했다. 민석은 서경의 커피 잔에 설탕 둘, 프림 둘을 넣어 정성껏 저어서 손잡이를 서경 쪽으로 돌려주었다. 그는 늘 그렇게 자상했다. 나무젓가락은 반으로 잘라 가시를 없애주고, 단무지엔 물을 탄 식초를 많이 뿌려주고, 차에는 서경이가 좋아하는 카세트테이프를 준비했다가 틀어주었다. 무슨 색을 좋아하는지, 무슨 영화를 좋아하는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모두 알고 챙기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게 나한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생각하니 서경은 불쾌해 견딜 수가 없었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어. 작정하고 속인 게 아니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어버렸어. 민석은 서경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이러지 마세요. 다른 사람에게도 이렇게 하셨나요? 누구? 그걸 제게 물으시면 어떡해요. 서경은 몸을 일으켜 앞자리로 옮겨 앉았다. 민석의 얼굴이 수척해 보였다. 어디 아파요? 아니, 괜찮아. 면도도 하고 이발도 하고 다녀요. 뭘 먹고는 다니는 거예요?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 제가 챙기지 않아도 챙길 여자가 줄을 섰는데 말이에요. 지금은 내가 무슨 말을 한다 해도 너는 날 이해할 수 없을 거야. 믿기지 않겠지만, 나는 널 처음 만난 순간부터 사랑했고, 지금도 너를 사랑해. 이런 유치한 대사는 삼류 영화에나 나오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말이 가장 정확한 내 마음인 것 같네. 회사 그만두지 말고 그냥 있어주면 안될까? 나는 네가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게. 제발 가지마. 너의 버팀목이 되어주고 싶어. 진심이야. 내가 미우면 미워해. 제발 끝이라는 말만 하지 마. 정화일은 내가 설명할게. 어디서부터 설명하는 게 좋을까? 아니오, 하지 마세요. 듣고 싶지 않아요. 부장님이랑 지낸 시간, 고맙고 행복했어요. 그냥 여기까지만 할래요. 몰래한 사랑이 두렵고 늘 불안했지만 민석씨와 함께여서 견딜 만 했어요. 서경아, 나한테도 변명할 기회는 줘야지. 그건 내가 원한 일이 아니었어. 난 술에 취했었고 옷을 벗고 달려드는 정화를 거절하지 못했던 거야. 그래, 내가 미친놈이지. 솔직하게 말할게. 집엔 죽어도 들어가기 싫었고 지낼 곳이 필요했어. 그 아파트에서 정화랑 살림을 차린 건 아니야. 거기서 나 혼자 있었어. 그만 하세요. 듣고 싶지 않아요. 우리 사이에 계산할 것이 없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그날 밤 절 안지 않으신 건가요? 제가 얼마나 간절히 당신을 원했는지 알면서. 우리가 치악산에 가기 이전에 이미 정화랑 잠을 잤던 건가요? 옷을 벗은 내게 차가운 등을 보이면서 내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아 놓고 당신은 나를 사랑해서 아껴주고 싶다고 변명을 했잖아요. 거짓말쟁이. 세상에, 누구랑 잤다고요? 그러고도 지금 나보고 사랑 한다는 말을 믿으라는 건가요? 서경은 뜨거운 커피를 벌컥벌컥 마셔버렸다. 목구멍이 따가웠다. 정말 널 지켜주고 싶었어. 네, 저도 부장님의 여자가 되고 싶었어요. 당신 곁에 서 있기만 해도 좋았거든요. 그런데 왜 거부를 하셨어요. 내가 임신할까봐 무서웠어요? 아이를 무기로 평생 당신 발목을 붙잡는 당신 부인처럼 내가 당신 목을 조일 거라고 생각 했냐구요. 아니야. 이러지마. 그 사람에 대해 그렇게 말하지도 말고. 그건 서경이 답지 않아. 처음에 아내가 정현이 가졌다는 소리 듣고 충격을 받았어. 아이를 원한 적이 없었는데, 아이는 내 인생에서 전혀 계획해 본 적이 없던 존재였어. 아이는 나중에 가지면 안 되겠냐고 사정을 했지만 장인어른, 장모님, 와이프가 얼마나 좋아하던지. 자기네가 다 길러 줄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열심히 일만 하라는데 더 이상 와이프에게 아이를 떼라고 강요할 명분이 없었어. 난 아이를 가졌을 때 한 번도 아내에게 먹고 싶다는 것을 사준 적이 없었고, 아이가 태어나던 날도 병원에 가지 않았어. 이때까지 따뜻하게 남편노릇, 아비 노릇을 해준 적이 없는 사람이야 난. 처음엔 부담스러워 그랬고 지금은 미안해서 일거야. 나를 닮은 아이가 세상에 있다는 게 너무 싫었어. 내 인생을 닮을까봐. 나 같은 정신병자가 또 하나 복제 된 것 같은 생각이 들 때마다 미쳐버릴 것 같았어. 정현이를 임신했다는 소리를 들은 바로 다음날 비뇨기과에 찾아가 정관수술을 해 버렸어. 두 번 다시 세상에 내 씨를 남기는 일은 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거든. 난 자식을 낳으면 안 되는 사람이야. 자격이 없으니까. 민석의 입술이 떨렸다. 미안해요. 그런 줄 몰랐어요. 나를 지켜주고 싶었다는 말, 나를 사랑한다는 말 잊지 않고 기억 할게요. 제발 너까지 이러지마. 너 없으면 내가 어떻게 될 거라는 거 뻔히 알면서 제발 이러지 말라구. 너 때문에 살아 있다는 게 처음으로 행복했어. 더 솔직히 말할게. 사람들이 나보고 바람둥이라고 손가락질을 하지. 다 내 탓이야. 나는 혼자라는 게 느껴질 때마다 여자들을 만났거든. 그게 어떤 여자든 상관이 없었어. 누군가 나를 코너로 모는 것 같은 두려움이 느껴질 때마다 여자의 자궁 속으로 숨어 버렸지. 그 안으로 나를 밀어 넣으면 마음이 편해졌거든. 사랑은 단 한 번도 없었어. 그저 모성을 가진 여자가 필요했을 뿐이다. 도피처였을 거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난 그런 환자가 되어가고 있었어. 내가 먼저 여자들을 유혹한 적은 없어. 이상하게도 늘 여자들이 먼저 유혹을 했고, 그 여자들은 아무 조건도 없이 쉽게 내 앞에서 무너졌어. 자기 돈을 써가며 애정을 구걸하다가 반응이 없는 나에게 미친놈이라는 소릴 남기고 떠나곤 했지. 마음을 열 수가 없었거든. 그 여자들은 섹스가 필요했고 난 그 여자들의 자궁이 필요했을 뿐이야. 알아 지금 네가 나를 미친놈이라고 생각한다는 거. 정신병자지. 그런데 나도 나를 어쩔 수가 없었어. 내 마음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질 않았거든. 서경은 온몸이 떨렸다. 눈물이 쏟아졌다. 그 사람이 왜? 라는 의문을 가질 때가 오히려 더 편했다. 그때 끝냈어야 했다. 듣고 난 후 밀려오는 허탈감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날 부르지 그랬어요. 사랑한다면서요. 사랑하는 사람과 섹스를 했으면 정신병자는 면했을 거 아니에요. 아무여자든 상관없다면 차라리 저하고 하셨어야죠. 그것도 아니면 아내하고 하든가. 그것도 아니면 나한테 들키지를 말던가. 어떻게 내 친구랑 그런 짓을 해요. 용서가 안돼요. 그래, 미안해. 잘못된 길이라는 걸 알면서 그 아파트에 있는 게 편했어. 차라리 호텔에 가셨어야죠. 그 아파트 우리 사장님이 얻어 준거라는 거 알고 있었어요? 거기서 사장님하고 부딪히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 했어요. 당신 그렇게 아무 생각도 없는 사람이었어요? 정화가 어떤 애라는 거 정말 몰랐어요? 민석의 얼굴이 굳어졌다. 전혀 몰랐어. 우스운 꼴이 될 뻔 했군. 다시는 안 갈 거야. 어쨌거나 정화에게 진 빚은 갚아야 할 것 같아서 당해 주었던 거야. 어쨌든 내가 처녀를 건드렸으니까 어떤 식으로든 대가를 치러야겠지. 이런 상황에 이런 소리를 하는 내가 한심하겠지만 내게 사랑은 너뿐이었어. 너랑 함께 있으면 섹스 없이도 잠이 오고, 마음이 불안하거나 두렵지 않았어. 누군가에게 쫓기지도 않고 마냥 행복했거든. 네가 날 이해 할 수 있을까? 내 진심을 알아 줬으면 좋겠다. 만일 네가 돌아온다고 해도 나는 널 평생 안을 수 없을지 몰라. 내가 너무 더러운 놈이라서 너를 더럽힐 수가 없어. 그래서 너를 안아주지 못했던 거야. 이렇게 힘든 사랑 그만하고 싶어요. 꺼내기 어려운 말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이젠 전화하지 마세요. 서경은 일어나 카페 문을 나섰다. 눈물이 앞을 가려 계단이 보이지 않았다. 다리가 떨려 내려 갈 수가 없었다. 눈을 감고 계단 아래로 떨어져 버리고 싶었다. 서경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 울지 않으면 심장이 폭발해 버릴 것 같았다. 사람들이 곁으로 지나갔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민석의 손길이 어깨에 느껴졌다. 가자, 데려다 줄게. 어차피 학원은 늦었으니 집으로 가는 게 좋겠다. 아니오, 혼자 갈래요. 혼자 있고 싶어요. 그래 그럼. 마음 편해지면 연락 줘. 네가 돌아 올 때까지 기다릴게. 민석이 등을 보이며 돌아섰다. 잠깐만요. 제가 먼저 갈게요. 한...번...만... 안아주세요. 민석은 서경을 힘차게 끌어안았다. 미안하다. 서경아, 힘들면 용서하지 마. 민석은 심장이 졸아 붙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죽을 만큼 가슴이 아팠다. 자신이 저주스러워 죽고 싶었다. 참회의 눈물은 몸서리쳐지도록 짰다. 그것으로 소금을 만들면 어떤 상처도 아물 것 같았다. 마지막 키스는 길고도 아팠다.

회사를 그만둔 후 민석과 정화로부터 여러 차례의 전화가 걸려 왔었다. 정화는 어머니 분식집까지 찾아왔지만, 서경은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 죽을 만큼 그리워 가방을 싸들고 민석에게 돌아가고 싶었다. 어느 도시든지 둘이 떠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서연언니까지 집을 나간 마당에 어머니 곁을 떠날 자신이 없었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서경에게 크게 적용 되지 않았다. 견뎌낼 수밖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그러던 중 담임선생님의 배려로 큰 회사에 취직을 했다. 야간대학에 진학도 하게 되었다, 잊기 위해 미친 듯 바쁘게 살았다. 그렇게 살다보니 차츰 미움도 아픔도 흐려져 갔다. 김민석이란 남자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아가씨가 감당하기엔 너무 크고 아픈 상대였다. 첫사랑의 상처를 안고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건 쉽지 않았다. 모든 남자의 기준이 김민석으로 고정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 세상 그 누구도 김민석이 될 순 없었다. 민서경에게만 따듯했고 민서경에게만 사랑을 쏟았던 남자. 조각상 같았던 얼굴, 슬픈 미소, 한숨처럼 깊었던 담배 연기, 눈빛으로 보내주던 편지, 팔베개, 체취, 첫 키스, 얼음처럼 차가운 손...... 생생하게 그 사람이 살아날 때마다 서경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정화와 민석이 옷을 벗고 함께 뒹구는 장면을 상상하며 잊으려 노력했다. 죽도록 미워하면 잊힐지도 모르니까. 낮엔 일을 하고 밤에는 대학에 다니다 보니 세월은 빠르게 흘러갔다. 그리움도 상처도 차츰 견딜만해졌다.

한 남자가 서경에게 다가왔다. 같은 회사에서 일을 하다보면 남녀 간의 만남이라는 게 늘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것 같았다. 내 세울 것 없는 집안에서 자랐지만 심성이 착하고 매사가 모범생 같은 사람이었다. 모난 곳이 없어서 결혼하면 마음하나는 편할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가난한 친정에 아들 같은 사위가 되어주겠다는 말이 고마워 결혼을 허락하고 말았다. 주위에선 나이도 어린데 좀 더 연애도 하고, 다른 사람도 만나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다고 말렸지만 서경은 결혼을 해야 이 전쟁이 종지부를 찍을 거라고 믿었다. 결혼을 서둘렀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고, 돈 많은 장인을 만나 자기 꿈을 이루기 위해 데릴사위가 되었다는 민석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랑이란 한순간에 무너지는 모래성 같다는 것을 이미 어린 나이에 알아버렸고 사람의 약속이라는 것도 돌아서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경험했기에 기대 따윈 없었다. 김민석만큼 사랑할 자신은 없지만 사랑하려고 노력해보겠다는 마음으로 결혼을 결심했다. 그게 도피라 해도 할 수 없었다. 그땐 그것이 최선이었다. 두 딸 중 하나라도 제대로 사는 것을 보아야 어머니가 하늘로 머리를 둔 채, 숨을 쉬고 살 것 같았으니까.

분위기가 좀 풀렸다고 생각했는지 정화의 말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그 새끼 순 바람둥이였어. 소문에 의하면 우리 회사 오기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도 여러 여자 울렸고, 거래처 아가씨들도 울렸다더라. 사실 난 그 새끼 애까지 임신했었거든. 임신을? 그래, 나중에 우리오빠한테 들켜서 유산 시켰지만 말이야. 우리 오빠 생각나? 운동 선수였잖아. 힘쓸 일 없는데 잘됐다 싶었는지 똘마니들 몰고 회사에 찾아가서 김부장을 반 쯤 죽여 놨다고 하더라. 직원들 보는 앞에서? 응. 그 뿐이 아니야. 안양 집에도 찾아가서 장인한테 나 버려놓은 대가도 톡톡히 받아 냈어. 나 애 떼고 누워 있을 때 우리 오빠가 사표 내고 와서 회사는 그날로 땡 쳤지 뭐. 김 부장도 얼마 안 있다 사표를 냈다고 하더라. 회사에서 그 개망신을 당했는데 쪽팔려서 어떻게 다니겠니? 내 아파트 열쇠 받느라고 한 번 만났는데 수염도 안 깎고 옷도 후줄근한 게 거지가 따로 없더라구. 정나미가 뚝 떨어지더라. 차도 뺏겼는지 없더라고. 나중에 들었는데 장인이 강제로 이혼을 시켰대. 그건 어디서 들었어. 사장한테. 회사 사표내고 폐인처럼 산 모양이야. 방황하는 게 안타까워서 일자리를 소개해줬다더라. 꼰대가 의리는 좀 있잖아. 인천에 우리 큰 거래처 하나 있었잖아. 무슨 성이더라. 암튼 거기서 일한대. 사장님은 그 험한 꼴을 다 보시고도 아직도 너를 만나? 그 꼰대 나 없으면 못살 걸. 서로 좋은 거지 뭐. 서로 필요한 걸 채우는 사이니까. 가끔 아파트에서 만나. 거길 아지트로 쓰지. 나 결혼 할 때 그래도 한몫 챙겨주고 주례까지 서줬다. 정말 웃기는 사람이지? 세상에 어떻게...... 김부장 장인이 너희 오빠한테 왜 돈을 선뜻 내주었을까? 딸을 이혼까지 시키는 마당에 말이야. 협박이 먹힌 거지. 그 동네에서 조용히 살고 싶으면 천만 원 내놓으라고 했대. 그 동네 유지라니 쪽팔린 게 싫었겠지. 제 손자새끼랑 딸년도 생각도 해야 되고. 넌 어떻게 나이를 먹어도 말투가 그러니? 딸들도 있다면서 좀 점잖아져야지. 서경은 귀를 씻고 싶었다. 민석과 헤어지던 날, 카페에서 민석이 해준 말이 떠올랐다. 정화랑 잔 것은 실수였다고. 그래 사랑이었다면 그렇게 막장으로는 몰고 가진 않았겠지. 다 큰 성인 남녀가 강간을 한 것도 아니고 좋아서 함께 잤는데 누가 누구를 버렸고 대체 누가 누구를 책임져야 한다는 말인가. 그나마 버팀목이 되어주던 장인에게 내침을 당한 그가 가여웠다. 서경아, 만일 그 애를 안 떼었다면 김부장이랑 내가 같이 살았을까? 글쎄, 정말 그 사람 아이였어? 맞을걸. 그래? 그 사람은 뭐라던? 낳으래? 그런 소리나 할 줄 알면 다행이게. 입 딱 붙이고 아무 말도 안 하더라. 나한테는 아무 애정도 없는 것 같았어. 처음부터 끝까지. 헤어질 때 미안하다고는 하더라. 뭐가 미안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우리 회사에 처음 왔을 때는 제법 괜찮았는데 폐인 다 된 것 같더라. 그렇게 된 대는 나한테도 책임이 있지. 나를 안 만났으면 그렇게 되진 않았을 거야. 차라리 너랑 연애하게 둘 걸 그랬다는 생각을 했었어. 미친놈이 잠자리에서도 네 이름을 부르더라고. 참, 그 새끼 말이 너는 안 건드렸다던데 정말이야? 너랑 어디까지 간 사이냐 다그쳐 물으니 그렇게 말하더라. 다 지난 일인데 숨길 거 없잖아. 글쎄. 널 사랑했다나, 동생처럼 생각 했다나, 지켜주고 싶은 사람이었대. 그 도둑놈 말을 믿지는 않지만 말이야. 그 대답, 내가 꼭 해야 되는 건 아니지? 어쨌거나 정화 네가 좋은 남편 만나 행복하게 산다니 좋구나. 소식주어서 고맙고, 만나서 반가웠어. 다음에 만나게 되면 그 사람 얘기는 하지말자. 그래 그러지 뭐. 나도 재수 없다. 야. 다음엔 네 신랑 얘기도 좀 들어보자. 그래. 그럼 잘 가. 정화와 헤어져 서경은 땅만 보고 걸었다. 하늘을 쳐다보고 싶지 않았다. 김민석은 죄인이다.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은 거다. 폐인이 되던, 거지가 되던 그건 나랑 아무 상관도 없는 거다. 아무리 욕을 하고 아무리 모질게 마음을 먹고 끊어 내려고 해도 자꾸만 가슴 한쪽이 시리고 아팠다. 서경은 정화를 만난 걸 후회했다. 아무 소식도 모르고 추억할 때가 좋았다. 생인손처럼 불편하고 아프지만 끌어안고 살았던 첫사랑이 아니던가. 멈출 수 없었던 사랑, 가지 말라고 잡았을 때 못 이기는 척 져 주었다면 그 사람이 그렇게까지 망가졌을까? 서경은 정화를 만나고 온 이후 밀려오는 자책과 후회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니었어. 용서해 줄 걸. 서경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슬픔을 견딜 수가 없었다. 어쩌면 우린 그런 운명을 타고났는지도 몰라. 어디선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된 거야. 죽지 않고 살아있다 하잖아

홍정화님이 일촌 맺기를 원하십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서경은 아니오를 눌렀다. 더 이상은 만날 이유도 없고, 정화가 자기 인생에 또 다시 개입 되는 것도 싫었다. 서경은 사진첩을 꺼냈다. 남이섬으로 야유회 갔을 때 찍은 단체 사진이 그를 볼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맨 뒷줄에 얼굴 반이 앞 사람에 가린 채 서있는 민석이 보였다. 안녕, 민석씨. 사이로 잘 좀 서지. 얼굴이 가렸잖아요. 이젠 그렇게 숨지 말고 당당하게 살아요. 세상이 모두 당신을 나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해도 난 당신편이에요. 난 당신이 착한 사람이라는 거 알아요. 미안해요. 그때 손을 잡아 주지 못해서. 그런데 왜 그랬어요? 정관수술을 한 사람이 어떻게 임신을 시키겠냐고 말하지. 그렇게 많은 걸 잃으면서 왜 정화에게 속아준 거예요. 정말 안양 집이 그렇게 싫었어요? 아님 아내에게 또 미안했던 거예요? 그렇게라도 놓아주고 싶어서? 정현이 봐서 그냥 살지. 살다보니 사랑해서 사는 게 아니라 자식 때문에 살더라구요. 사랑이 뭐라고.
민석씨, 이젠 당신 스스로를 위해서 살아요. 결혼 같은 거 하지 말고 당신이 하고 싶었던 일하면서 살아요. 난 아직도 Midnight Blue 듣곤 해요. 그 노래를 듣고 있으면 당신과 함께 다니던 곳, 당신과 만든 추억들이 올올이 살아나요. 얼마나 겁이 많았으면 우린 사진 한 장도 남기질 못했을까요? 그렇게 많은 곳을 돌아다녔으면서 말이에요. 내 첫사랑은 당신이었어요. 당신이 사랑한 사람은 나뿐이라고 했으니 당신 첫사랑은 민서경이구요. 우리 어디에 있든 건강하게 행복하게 살아요. 당신이 미치도록 그리워지면 몰래 가서 훔쳐 볼 지도 몰라요. 당신이 어디 있는지 알았거든요. 하지만 당신 앞에 나서는 일은 없을 거예요. 추억할 것을 남겨줘서 고마워요. 잘 지내요. 그리고 다음 생에 나무로 태어나고 싶다는 말 다시 생각해 봐요. 그럼 날 만나러 올 수가 없잖아요. 나도 기다릴게요.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서경은 사진첩을 접어 두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싸이월드 친구 찾기에 김민석이라고 타이프를 쳤다. 성별에 남자를 눌렀다. 4554명의 김민석이 창에 떴다.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사람도 내 이름을 넣고 나를 찾아 본 적이 있을까? 배경음악만 들어도 나라는 걸 알았을 텐데.
민석씨, 이젠 문을 닫아야 할 것 같아요. 우리, 이승에선 찾지 말아요. 서경은 하루 종일 열어두었던 창문을 모두 닫았다. 블라인드 사이로 저녁놀이 새어 들어 왔다. 내 미니 홈피-회원정보-회원 탈퇴, 서경은 망설임 없이 클릭을 했다. 여기까지다. 세상과의 통로를 막아야 가족에게 충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서경은 부엌 한 구석에 놓인 CD Player의 버튼을 눌렀다. ELO의 Midnight Blue가 거실을 비집고 들어  오는 노을빛을 타고 온 집안에 흘렀다. 이 노래만 있어도 견딜 수 있을 것이다. 이것보다 더 힘들 때도 이 노래가 나를 지켜주었으니까. 

I see the lonely road that leads so far away
I see the distant lights that left behind the day
But what I see is so much more than I can say
And I see you in midnight blue
I see you crying now you've found a lot of pain
And what you're searching for can never be the same
But what's the difference cause they say what's in a name
And I see you in midnight blue

저 멀리 끝없이 펼쳐진 쓸쓸한 길이 보입니다.
하루를 뒤로하는 저 멀리 가물거리는 빛이 보입니다.
하지만 난 말로 할 수 있는 것보다 더욱 많은 것을 보고 있어요.
서글픈 이 밤에 난 그대를 바라봅니다.
지금 그대의 눈물 어린 모습이 보입니다.
이제야 당신은 아픔을 느낀 거죠.
그대가 애써 찾아오고 있었던 건 이런 게 아니었을 거예요
하지만 다를 게 뭐가 있나요 사람들도 그러잖아요.
그게 뭔데 그러냐고
서글픈 이 밤에 난 그대를 바라봅니다.

서경은 손을 내밀어 민석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의 손은 여전히 차가웠다. 잘 가요 민석씨, 그때처럼 응원해 줄 거죠. 민서경이답게 당당하게 살라고 응원해 주세요.

노을이 진다.
강이 노을을 삼킨 그날처럼......
...
2015.04.27 20:16:32 (76.95.19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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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박인애

Dear Sir,

나는 책 속으로 바람이 되어 떠나가고 활자들은 낙엽처럼 떨어졌다.
바람은 방향을 몰랐고, 떨어진 잎들은 지면 속에 퍼즐처럼 헝클어져 버렸다.
새벽 3시,
어둠은 여전히 창에 똬리를 틀고 있다.
퍼즐 속에서, 글의 미로 속에서 나의 불면은 시작되었다.
그렇게 깨어있기 까지 나는 오랜 세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조차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다.

내가 다시 자아(Self)를 인식하게 되던 날,
나는 헝클어진 실타래를 풀 듯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세상이란 벽이 주는 소리에.
나는 내 속에 갇힌 바다를 풀어 내놓고서 오랫동안 그 바닷가에 서성거렸다.
그리고 나는 용기를 내었다.

‘떠남’은 나의 출발이었다.
일상의 안락함에서, 긴 악연의 고리에서, 세상의 벽에서,
그리고 갈색 바다에서......
힘겨웠던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깊은 우물 속에서 어렵게 퍼 올린 글은 나에게 와서 푸른 문신이 되었다.
하나씩 문신이 활자가 되어 육신에 아프게 새겨질 때마다 내 정신은 또렷해졌다.

Sincerely,
In A. Park  

...

 
박인애 님의 중편소설「미드나잇 블루」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여성의 시각으로 섬세하게 쓴 이 작품은 신인의 소설로 보기에는 방대한 분량의 중편소설이다. 우선 단편소설을 쓸 때와는 또 다른 호흡과 플롯이 필요한 지난한 작업이어서 작가의 노고에 격려를 보낸다.

현대사회의 소통은 직접적인 만남 보다는 SNS를 통한 사회화가 우선되는 정보통신사회이다. 그 사회에는 현재의 사적인 삶이나 지나온 과거사의 일부가 갈무리되어 있어 은밀한 관음증을 유발하기도 한다.

한 여자가 SNS를 통해 지난 시대 -아주 오랜 옛날처럼 생각되지만- 마라톤 타자기로 상징되는 아날로그 시절의 인간관계와 맞닥뜨린다. 그곳에는 사랑이 있고 증오가 있었다.

정보통신사회의 특징은 즉 물화이다. 다만 공간, 시간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이고 그 사회를 운용하는 것은 물론 인간이다.

이제 갓 SNS에 등록한 화자는 인간적인 감정을 가진 아날로그적 인간이다.
‘인화하려면 필름을 현상소에 맡기고 어떤 사진이 나올까 설레는 마음으로 일주일 정도’기다리는 것이 그리운 사람이다.

반면 친구는 아날로그 시절부터 게이 바를 드나들고 일종의 원조교제나 불륜을 놀이 정도로 치부하는 전위적인 여성이다.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을 둔 관계와 사랑의 대상에 관한 인식의 차이를 써내려갔다.

3인칭 시점이지만 다분히 사소설 성격을 보인다는 것이 단점으로 지적되지만 등단작을 중편으로 써낸 긴 호흡을 중시했다. 좀 더 다양한 언어선택과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냉정함으로 ‘낯설게 하기’를 시도한다면 좋은 작품을 기대해도 좋
겠다. 박인애 님의 신인상 수상을 축하드리며, 정진을 거듭해 대가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김승옥·이광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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