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9.02 01:53

돌아오지 않는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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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아오지 않는 친구

                                                                 박경숙


                     1

친구가 떠났다. 먼 곳으로·······.
하얗게 내리 꽂히는 햇살들 사이로 소슬한 바람이 간간히 불어온다. 햇빛바람·······. 그 투명한 빛의 바람 속엔 이 세상 어떤 숨은 것이라도 선명히 드러날 것만 같다.
데니어 길든은, 땡볕아래 살며시 불고 있는 바람에 백발의 짧은 머리칼을 푸스스 흩날리며 흑흑 흐느낀다. 한쪽으로 중심이 쏠린 그의 둥근 몸 곁엔 나무 지팡이가 팽팽히 꽂혀 있다.
“오드리! 오드리!”
내 눈길은 탄식처럼 아내의 이름을 부르는 데니어 비껴, 슬그머니 하늘로 향한다. 그저 푸르기만 한 하늘, 거기엔 아무 것도 없다. 푸르름을 어지럽힐 구름 한 점 없이 펼쳐진 하늘이 먹먹하게 가슴 속으로 들어차 올 뿐.
오드리······· 나는 그녀의 한국이름을 모른다. 그저 오드리, 오드리 부르며 겨우 3개월을 이웃했던 그녀·······.

로스앤젤리스 북쪽, 이 자그만 도시에 예술인 노인아파트가 건축되기 시작하던 2년 전부터 남편은 입주신청을 서둘렀다. 종종 마비증상이 나타나는 왼쪽 손목을 주무르던 그가 드디어 붓을 놓기로 마음먹을 즈음이었다. 2500스퀘어피트 집안 곳곳엔 온통 그가 그림을 만들어내느라 어질러 놓은 흔적들뿐이었다. 거실은 그의 그림 전시실이 되어 있고 안방은 작업실, 다른 방 하나는 완성된 작품들과 아직 사용하지 않은 새 캔버스들을 모아두는 곳이었다. 그나마 내가 차지할 수 있는 공간은 부엌과 침실로 쓰는 작은 방뿐.
“당신 작업하지 않고 견딜 수 있겠어요? 평생을 해온 일인데…….”
조심스런 내 목소리에 창을 향해 섰던 그가 휙 돌아보았다. 핏발이 선 붉은 눈이 홀쭉한 얼굴 속에 박힌 채 차갑게 빛났다.
“그러면 어쩌라고? 오른손으로 그림을 그리랴? 네가 잘라먹은 그 오른 손으로 말이다!” 일그러지는 그의 표정을 보며 나는 들고 갔던 찻잔을 물감 테이블에 놓고는 얼른 부엌으로 돌아왔다. 참으로 오랜 세월이 지났건만 그의 적의는 결코 허물어지는 일이 없었다. 셔츠 소매 끝에 얌전히 매달린 그의 오른 손이 결코 움직이는 일이 없듯이.
싱크대에 두 손을 짚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내 눈에서 기어코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늘 그렇듯 내 안에 느슨히 퍼져있던 아픈 기운이 가슴 복판에 똬리를 틀었다. 그리고 또 몇 개인가의 문장이 고개를 들었다.

아주 먼 옛날의 일이었지요.
그러나 지금도 생생한

소년의 손목을 잘라먹은
그 소녀
처녀가 되었지요.
어른이 되었지요.
늙어갔지요.

그래도 피 흘리던 그날들
눈앞에 등불처럼 환해요.

가슴 속에 피어오르는 말들은 끌어안은 채 부엌 뒷문을 열고 뜰로 내려섰다. 낡은 판자 담장을 타고 피어난 진분홍 부겐비리아가 환하게 눈앞을 가로 막았다. 나는 꽃향기에 취한 듯 흡! 숨을 들이마셨다.
‘왼손의 화가’ 그는 언제부턴가 그렇게 불렸다. 의수를 낀 오른 손의 능력까지 왼손에 모아 남다른 작품을 만들어내는 화가········.

“6.25 전쟁 중에 한 손을 잃으셨다구요?”
“네 그렇습니다. 그때는 그런 일을 많이 당했지요.”
“듣기에 사모님과는 어릴 적부터 친구라던데요.”
“맞습니다. 이 사람은 잃어버린 내 오른 손과 같은 존재죠. 어쩌면 나는 내 손 한쪽을 잃은 대가로 이 사람을 얻었는지도 모릅니다. 하하”
그 날 만큼은 술을 입에 대지 않았는데도 그의 얼굴이 붉었다. 불그레한 볼을 찌그러뜨리며 껄껄 웃는 모습이 불안해 보일만큼 과장스러웠다.
본국의 유명 잡지인 [월간예술] 미국지사를 개설한 기념으로 특집기사 대상 1호가 된 그는, 인터뷰하러 온 기자가 집안에 들어서던 순간부터 내겐 낯선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선생님의 화풍은 전쟁의 추억과 미국으로 오신 후 이민생활의 혼돈이 묘하게 어우러져 있다고 하는데요. 전체적 톤이 좀 어둡다는 평도 있습니다만······.”
“예술이란 워낙 어두운 것입니다. 왜냐면 그것은 아직 정복되지 않은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우울한 까닭의 어두움이 아니라 아직도 미지에 덮인 인간 내면세계에 대한 여백이랄까. 그런 면에서 내 작품이 어두워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군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기자에게 그는 버튼이 눌러진 녹음기가 테입을 재생하듯 내가 듣고 들어왔던 말들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종교가 지향하는 것이 빛이라면 예술은 그 빛 아래에 놓인 어두움입니다. 빛의 그늘, 아니면 빛으로 가는 과정이라 해도 좋습니다. 때로 나는 내가 뭔지도 모를 것을 그릴 때도 있답니다. 완성되고 나서 제목을 붙이는 그런 작품들이죠. 하지만 그건 결코 완성품이 아닐 수도 있답니다. 그렇죠. 모든 예술에서 완성이란 것이 있나요. 모두가 미완성일 뿐입니다. 그 미완의 길을 걸어들어 갈수록 더 모호하여 미완은 미완을 낳고, 또 그 미완은 또 다른 미완을 낳고……. 우리에게 무엇이 완전한 것입니까?”
그의 목소리가 커지자 젊은 기자는 곁에 앉은 나를 슬쩍 곁눈질했다. 나는 가만히 눈길을 내리 깔았다. 그의 히스테리가 제발 이 시간만은 도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다행히 그는 그날 발작을 일으키지 않았다. 노을이 발갛게 창문으로 스며들 무렵 기자를 배웅한 뒤 그는 스카치위스키 한 잔을 따라 마시고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

판자 울타리에 잠시 그늘이 드리워지고 진분홍 꽃이 조금 짙어졌다. 햇살이 기울고 있었다.

소년의 손목을 잘라먹은 그 소녀
처녀가 되었지.
어른이 되었지.
늙어갔지.

웅얼웅얼 내 입술에서 익숙한 타령조 가락이 흘러나왔다. 아주, 아주 오래전 나를 재우던 어머니의 자장가처럼.


                        2

휴전을 앞두었던 그해 봄 우리는 아홉 살이었다. 연식이와 홍이 그리고 나·······.
연식이는 우리 집과 담장이 붙은 옆집 배 선생네 아들이었고, 홍이는 피난길에 흘러 들어와 우리 집 아래채에 세 들어 살던 김 씨네 아들이었다. 도통 전력을 알 수 없던 홍이 아버지 김 씨는 걸음걸이가 좀 절룩였는데, 인민군인지 국군인지 어느 쪽에 붙잡혀 고문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피부가 희고 볼 살이 많은 홍이 어머니는 조금씩 우리 집 허드렛일을 도와주다가, 그 곱상한 얼굴에 웃음을 지으며 아예 부엌어멈으로 자리를 차지했다.
봄기운이 나른히 마을에 깔릴 무렵부터 우리 셋은 어울려 동네를 싸돌아다녔다. 전쟁 통에 변변히 남은 친구가 없기 때문이었다. 더러는 피난길에 죽고, 혹 살아 있다 해도 폭격에 주저앉아버린 집으로 돌아올 수가 없어 어딘가로 떠나버렸다. 전쟁 전엔 서로 말도 잘 하지 않던 옆집 연식이와 어울리게 된 건 순전히 홍이 때문이었다.
우리 집 아래채에 들어와 매일 부닥치게 된 홍이가 연식이와 친하게 되자, 나도 덩달아 두 사내애들을 따라 봄이 피어오르는 들길을 쏘다나기 시작했다. 도처엔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의 상흔들뿐이었다. 불에 탄 골짜기와 폭격을 맞고 동강난 채 쓰러져 누운 나무들······.· 더러는 아직 치우지 못한 시신들이 반은 썩은 채 들길 우묵한 곳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어른들은 삽을 들고 가, 송장냄새에 코를 싸쥐며 아무데나 그들을 매장해 버렸다. 동네 뒷산 낮은 구릉엔 이름 없는 무덤들이 늘어가고, 어느 쪽 폭격엔지 불발된 폭탄들이 곳곳에 산재했다. 불발폭탄은 우리 집 지붕 위에도 올라앉아 있었다. 아버지가 햇빛 밝은 날을 잡아 그것을 걷어내기로 한 날, 홍이는 제 이마에 손차양을 만들며 지붕 위에 올라선 동네 청년들의 힘줄선 팔뚝을 올려다보았다.
“대체 저 안에 뭐가 들었을꼬?”
홍이의 말투는 이북내기 같기도 했고, 조금은 경상도내기 같기도 했다. 그건 홍이 아버지나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가끔은 그들의 근본이 궁금하다고 동네 어른들은 수군거렸다. 얌전한 옆집 연식이와 달리 홍이는 나대기를 좋아했다. 비썩 마른 체격에 곁눈질이 심한 연식이 보다는 나는 활달한 홍이가 좋았다. 사실 나는 홍이를 따라다니다 연식이와 어울렸을 뿐이었다. 제 어미의 흰 피부를 닮지 않았는지 거무스름한 얼굴에, 시원하고도 기름한 눈을 가졌던 홍이는 키도 연식이보다 컸다.
한참을 쏘다니면 콧등에 땀이 맺힐 만큼 봄이 익어가던 무렵, 어머니는 장에 나가 빨간  꽃고무신을 한 켤레 사왔다.
“이제 물자를 조금씩 만들어 내는지 장에 살 것이 많더라. 귀희 너도 사내애들 그만 따라다니고 좀 계집애처럼 하고 다녀라. 밑창 다 떨어진 그 검정고무신 내던지고 내일부터는 이걸 신으려무나.”
서울내기 어머니는 말씨가 늘 깍듯했다. 아버지는 읍사무소 주사였지만, 동리 사람들은 우리 집을 ‘김 주사 댁’이라고 하지 않고 어머니 말씨 땜에 ‘서울댁네’라 불렀다.
어머니가 꽃고무신을 사온 다음날 볕이 따가워질 무렵, 나는 어머니의 무명치마를 줄여 만든 검정 통치마 밑에 꽃고무신을 신고 마당에 내려섰다. 가느다란 두 다리 밑에 개구리 발처럼 넙적한 내 발이 꽃고무신과 영 안 어울렸지만, 나는 자랑을 하고 싶어 아래채 홍이네 앞을 어정거렸다. 홍이 아버지는 동네 재건 일에 삽을 들고 나가고, 홍이 어머니는 우리 집 부엌에서 달그락거릴 뿐 집안엔 홍이의 기척이 없었다. 나는 얼른 길가로 나가 벌쭉 열린 옆집 연식이네 나무 대문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거기에도 아이들 기척은 없었다.
나는 혼자 터덜터덜 동네를 빠져나와 들길로 들어섰다. 거기쯤 가면 아마도 두 사내아이가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친구를 찾아 들길을 걷는 아홉 살 계집애는 그 시대 누구나 그랬듯, 단발머리 속엔 서캐가 하얗게 슬고 하얀 무명저고리는 얼룩 때로 꼬질꼬질했다. 한 달 전만 해도 종아리까지 내려와 있던 검정 통치마는 그새 키가 자랐는지 걸음을 걸을 때마다 무릎을 스쳤고, 나는 새로 산 꽃고무신을 내려다보며 자꾸만 들길을 걸어갔다. 전쟁이 지나갔어도 봄볕에 연두 빛 풀이 고개를 내밀고, 아물아물 눈앞을 흐리는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사내애들과 한두 번 와봤던, 낮은 산 구릉 밑 골짜기가 가까워질 무렵 거기 골진 곳에서 아이들 기척이 들려왔다.
“안된다니께. 그냥 집에 가자는데 왜 그려?”
거리가 있어 아련했으나 연식이가 쇳소리를 내고 있었다. 뒤이어 무슨 말인지 두런대는 홍이의 음성이 들리는 듯 했지만, 탁탁 뭔가를 두들기는 둔탁한 소리에 곧 묻혀버렸다. 나는 그들을 발견한 것이 반가워 새 신을 신었다는 것도 잊은 채 흙길을 뛰기 시작했다. 그때 연식이가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골짜기를 뛰쳐나왔다. 비탈길을 내려오는 나를 흘끗 바라본 그 애는 급히 소리쳤다.
“야~아! 빨리 도망가! 어서! 폭탄 터진단 말여!”
연식의 다급한 음성 뒤로 탁탁탁 두들기는 듯한 그 소리가 골짜기에서 계속 들려왔다.
“홍이 저 자식 내가 하지 말래도 말을 안 듣고 저 지랄이네. 야! 가시나야! 너는 내 말 안 들려? 어서 도망가라니께!”
연식은 오르막길을 힘겹게 달려 올라오며 다시 소리쳤다.
탁! 탁! 탁!
골짜기를 울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영문을 몰라 멍청히 선 내 손을 냅다 잡아챈 연식이 급히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연식에게 이끌려 엉겁결에 뒷걸음질 치던 내가 몸을 돌린 순간, 내 발에 신겨있던 꽃고무신 한 짝이 그만 벗겨져 나가고 말았다. 나는 맨발바닥에 따끔하게 박혀오는 흙 돌 부스러기에 울음을 터트리며 연식의 손을 뿌리쳤다.
“야! 내 꽃고무신! 내 신발! 저기 벗겨졌단 말여!” 놀라 뒤를 돌아보던 연식이, 네댓 걸음을 되걸어 막 꽃고무신에 손을 뻗던 찰나였다. 귀청이 떨어질 듯한 소리가 울렸다. 그때 나는 골짜기에서 공중으로 솟아오르던 홍이를 본 것 같았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에 온몸이 감긴 듯 허우적대던 홍이········. 그건 아주 짧은 순간의 일이었다. 나도 모르게 비탈길 아래로 몸이 납작 엎드려졌고, 뭔지 모를 따가운 조각이 내 볼을 훑고 지나갔다. 흙먼지가 장대비처럼 우수수 내 몸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귓속이 멍멍 했다.
얼마를 그러고 있었을까. 사방이 고요했다. 나는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따끔거리는 볼 언저리에서 끈적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무심코 쓸어내린 흙투성이 손에 붉은 피가 묻어났다. 나는 그 피를 치마에 썩 문질러 버리고는 두리번거렸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골짜기 아래서 후끈한 기운이 몰려왔다. 홍이를 찾으려고 고개를 뺀 내 눈에, 내리막길 한 귀퉁이에 팽개쳐진 꽃고무신이 보였다. 나는 신발을 집으려고 비탈길을 내려갔다.
길을 내려 갈수록 골짜기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가 점점 내 가까이로 밀려왔다. 콜록콜록 기침이 나올 때마다 입 속에 더글더글한 흙먼지가 느껴졌다. 나는 침을 칵 뱉어내며, 들길 가장자리에 떨어진 꽃고무신을 집으려고 몸을 구부렸다. 절반은 흙속에 묻힌 신발을 잡아당기자 뭔가 묵직한 것이 딸려 올라왔다. 그건 연식이의 손이었다. 흙투성이가 된 그 애의 손가락이 신발 뒤꿈치를 꼭 그러쥐고 있었다. 순간, 나는 비명을 지르며 신발을 내던지고 말았다. 꽃고무신을 쥔 채 잘려나간 연식의 손목이 피를 흘리고 있었다.
막 울음이 터져 나오는데 어디선가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흙을 뒤집어 쓴 볼 위로 줄줄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논두렁에 처박힌 연식이 끙끙대고 있었다. 나는 연식에게 다가갔다. 그 애의 가느다란 팔목에서 흘러내린 붉은 피가 막 파릇해지는 봄풀들 위에 흥건했다. 갑자기 들판은 괴괴해 졌고, 하늘복판에 박힌 해님만이 바라볼 수도 없게 빛을 내리쏘
고 있었다. 나는 너무나 무서워 악다구니를 쓰며 울기 시작했다.
얼마나 울었을까. 꿈틀꿈틀 괴로워하던 연식이 죽은 것처럼 고요해지고, 홍이가 있던 골짜기에서 피어오르던 연기도 거의 사그라졌다. 나는 골짜기를 바라보며 더 섧게 울었다. 새 신발을 꼭 홍이에게 보여주고 싶었는데, 신발은 흙투성이가 되었고 하늘로 떠올랐던 홍이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파편을 맞은 볼에서 흘러내리던 피가 끈끈하게 엉겨 붙고, 나는 까무룩 정신을 잃어갔다. 막 내려앉는 눈꺼풀 사이로, 멀리서 달려오는 사람들이 희미하게 보였다. 나는 그들이 동네 사람들이란 걸 알아챘지만 눈을 뜰 수도 뭐라 소리칠 수도 없었다.
“아이고! 이게 웬일인고? 우리 홍이·······. 홍이는 어딜 간 겐가?”
홍이 어머니 목소리였다. 그리고 누군가 나를 안아 일으키는 게 느껴졌다.
“귀희야! 정신 좀 차려봐라. 새 신발 사다줬더니 그걸 신고 여길 왔단 말이냐?”
어머니가 나를 품에 안고 울음을 터트렸다. 어머니 가슴에서 시큼한 땀 냄새가 났다. 그 냄새에 나는 왜 그런지 더 힘이 빠지고 팔다리가 나른해 졌다. 어수선한 발걸음이 이리저리 뒤섞이고 어디선가 날카로운 비명이 가물가물한 내 귓속으로 꽂혀왔다.
“우리 홍이가······· 홍이가········ 아이고! 아이고!”
홍이 어머니의 통곡소리가 아련히 들려왔다. 나는 금세 홍이가 죽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홍이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술이 떼어지지 않았다. 그리곤 그만 정신을 놓고 말았다.

그해 여름이 오기까지 나는 앓아누웠다. 홍이의 몸이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있더라했다. 이리저리 모아보았지만 몸 조각을 다 찾지 못했다고 했다. 연식의 잘려나간 손목을 들고 얼른 읍내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시간이 늦어 봉합수술을 할 수 없었다고도 했다. 홍이는 죽고, 연식이는 병신이 되고, 나는 한쪽 뺨이 좀 긁혔지만 멀쩡했다. 연식이 아버지 배 선생은 아침마다 우리 집 마당으로 들어서, 끽소리 못하고 울음을 삼키는 홍이 부모에게 한바탕 삿대질을 하고 갔다.
“우리 연식이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렸다는디 어디서 굴러들어온 망아지 같은 놈이 저 혼자나 죽지 내 자식을 이렇게 병신을 만들어 놓았단 말여. 어쩔 것이여? 어쩔 것이여? 이 집 딸래미 신발 줏으러 갔다가 손목을 잘렸으니 어쩔 것이여?”
끽소리 못하는 건 우리부모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해 7월 휴전협정이 맺어졌다. 읍내 경찰서에서는 우리들 사건을 본보기 삼아 산골 구석구석까지 불발폭탄 찾기에 온힘을 쏟았다. 우리 집 라디오에서는 날마다 재건합시다! 재건합시다! 하는 남녀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홍이가 없는 우리 집 아래채는 먹먹하기만 했다. 홍이의 부모는 한동안 넋을 놓고 방안에서 잘 나오지도 않더니, 여름이 끝날 무렵 배 선생 네와 우리 집에 눈물로 머리를 조아리고는 어디론가 떠나갔다. 김 홍, 그 아이에 대한 기억은 그것이 내게 전부였다. 가무스름한 얼굴에 기름하고 시원했던 눈, 연식이와 나를 어디든 끌고 다니며 무엇에든 겁이 없던 용감한 아이·······. 홍이가 보고 싶었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그 애가 그리워 나는 이따금 그들 부모가 떠난 텅 빈 아래채에 들어가 쪼그리고 앉아 있기도 했다.
9월이 되면서 연식이와 나는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학교건물을 초소로 사용하던 국군이 휴전을 맞아 본부대로 물러간 뒤였다. 왼손으로 글씨연습을 하던 연식이는 어느 날부턴가 공책 위에 꾸물꾸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낙서를 한다고 야단을 치던 선생님은, 날마다 늘어가는 연식의 그림솜씨를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도화지에 그려진 연식의 그림은 교내 사생대회에서 일등을 했고, 학년이 올라갈수록 연식은 읍내대회, 도내대회에서 일등을 휩쓸었다.

연식이가 그림 그리는 일밖에 모르는 시니컬한 청년으로 성장하는 동안, 폭탄파편에 긁혔던 내 뺨의 흉터도 희미해졌다. 그 뺨 위에 엷은 분칠을 하고 고향의 여자중학교에서 가사선생이 되어 있을 무렵, 장학금을 받아 미국유학을 떠났던 연식이 돌아왔다. 그동안 이층양옥으로 개축된 배 선생 네, 아니 벌써 오래전에 교장이 된 배 교장 네 창문에서 우리 집 마당으로 밤늦도록 불빛이 새어 나왔다.
홍이 네가 머물던 허름한 아래채를 수리하여 내 방으로 사용한 것은,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였다. 나는 내 방 앞 툇마루에 앉아, 연식이네 이층에서 떨어져 내린 불빛이 어른대는 마당을 내려다보며 다시금 홍이를 생각했다. 아니 홍이는 늘 내  생각 안에 살고 있었다. 더 알고 싶고 더 가까이 가고 싶던 아이········. 새로 산 꽃고무신을 자랑하고 싶던 아이········. 조금 더 친했더라면 잊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혀끝을 살짝 스쳐간 달콤한 사탕을 덥석 물고 싶었던 마음처럼 늘 기억 속에 갈증을 일으키는 홍이·······.
며칠 후 배 교장이 연식을 대동하고 우리 집을 찾아왔다. 말쑥한 양복차림에 조금은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자그만 청년이 마당에 눈길을 떨어뜨린 채 서 있었다. 그는 청혼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파혼을 하러 온 사람처럼 보였다.
“아이들의 지난 인연도 있고, 또 우리 연식이가 이 댁 따님을 원하니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사실 미국에서 대학원과정을 마치고 온 우리 아이한테 혼처야 많지만, 손 하나 없는 험을 감싸줄 사람은 이 댁 따님밖에 없는 것 같군요.”
배 교장은 아들의 손목이 잘리던 그때부터, 아침마다 우리 집 마당에서 한바탕 퍼붓고 갈 때부터 연식이와 나의 인연을 다잡아 놓았던 것 같았다.
“미국유학까지 한 사위를 보다니 영광입니다. 우리 딸이야 겨우 지방대를 졸업시킨 데다 나이도 꽉 찼는데 좀 기울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아버지는 애써 침착한 표정으로 청혼을 받아들이겠노라며 그들을 돌려보냈다. 배 씨 부자를 배웅하고 돌아서던 마당가에서, 아버지는 아래채 방에 처박힌 날보고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내 딸에게 병신 사위라니·······. 기막힐 노릇이지만 어쩔거나. 죽은 홍이란 놈을 원망할밖에. 좌익에 붙었다가 국군에게 고문을 당했다는 소문이 있었어도, 오갈 데 없는 처지가 측은하여 아래채에 들였던 내가 잘못이지. 그 김가 놈 지금 어디에 살고나 있는지. 에이! 빌어먹을 놈의 세상!”
아버지가 안채 미닫이문을 쾅 닫고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3

화가의 아내가 되어 살아온 긴 삶 속에 더 친숙했던 건, 남편의 얼굴보다 그의 그림들이었다. 남편의 그림 속엔 아이들의 실루엣이 자주 등장했다. 새 다리에 머리통만 큰 단발머리 여자아이, 얼굴도 몸도 온통 철사처럼 가느다란 사내아이, 그 중에 유난히 주먹이 크거나 몸통이 크게 그려진 사내아이를 만날 때면, 나는 그것이 홍이라는 걸 금방 알아차렸다.
홍이는 내 가슴 속에만 살고 있는 게 아니었다. 남편의 가슴 안에서도 그 엉뚱하고 용감한 아이는 늘 함께 있었다. 제 목숨보다도 호기심이 더 중요했던 아이, 낯선 고장에 와서도 기죽지 않고 천지가 제 세상인 듯 우리를 끌고 산과 들을 누비고 다니던 그 애……. 아이도 없이 살아온 결혼생활에서 우리는 언제나 둘이 아니라 셋이었다.
여러 번 자연유산을 겪으면서 나는 남편과 나, 홍이의 삼각구도 안엔 더 이상 아무도 들어올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 세 사람 사이에 다른 생명이 끼어드는 걸 운명의 신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내가 하혈을 하며 앓아누울 때마다 그는 신이 들린 듯 작품에 몰두했고, 그의 그로테스크한 작품들은 조금씩 화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전문대학 강사로 시작했으나 곧 4년제 대학 겸임교수로 옮겨갔다. 나는 아침마다 그의 왼쪽 셔츠소매 단추를 채워주었다. 그의 왼손은 의수를 낀 오른쪽소매 단추를 끼웠지만 가짜 손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기에. 양손은 제 붙은 쪽보다 서로 반대쪽을 돕는다는 걸 새삼 인식하며 나는 차츰 늙어갔다.  
그가 그림을 그리는 시간 나는 할 것이 없었다. 캔버스를 세우고 팔레트에 물감을 짜고, 붓을 씻고, 그 모든 것은 그가 한손으로 다 해냈다. 때론 미친 듯, 때론 섬세하게, 붓을 휘두르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자꾸만 그 먼 옛날의 홍이를 생각했다. 혼자 책을 펼쳐 읽다가 차츰 펜을 드는 버릇이 내게 생겨났다. 나는 황순원의 ‘소나기’를 흉내 내어 이야기를 지어갔다. 다만 내 이야기 속엔 소년과 소녀의 역할이 바뀌어 있었다. 멀리서 이사 온 소년을 남모르게 좋아하는 동네 소녀, 그리고 소년은 다시는 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갔다. ‘소나기’ 속의 소녀처럼········. 거기에 그들을 멀리서 바라보는 섬약한 한 소년이 더 있었는데 물론 그 소년은 남편이었다.  
처음 글은 소나기와 비슷하게 시골 개울가를 배경으로 지어낸 것이었지만, 두 번째는 도시에서의 이야기를 썼다. 그 다음은 학교 안을 설정해 보고, 그 다음은 복잡한 버스길을, 백화점 안을······. 이야기는 시대의 변화를 따라갔으나 거기에 등장하는 두 소년과 한 소녀는 늘 같은 나이였다. 이야기를 쓰는 동안은 외롭지 않았다. 남편과 서먹하게 살아온 세월들과, 또 그의 명성의 그림자 속에 죽은 듯 묻혀 있는 나의 존재가 아프지 않았다.
폐경이 다가오던 무렵 내 이야기 노트는 열권을 넘겼다. 그 노트들은 남편이 열어볼 리 없는 내 옷장 깊숙이에 쌓여 있었는데, 나는 가끔 그것들을 어루만지며 내가 살아 있다는 기쁨에 고요히 미소 짓곤 했다. 이제 더 이상 아이가 생겨나는 걸 기대하지 않아도 된다는 후련함이 앞섰지만, 그것은 기대할 수 없다는 섭섭함과 겹쳐진 묘한 허무감으로 그 즈음 내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는 그 노트들을 꺼내어 다시 읽기 시작했다. 20년 동안 비슷한 스토리를 쓰며 읽고 또 읽었던 것들······. 그것은 남편이 그 세월동안 비슷한 주제의 그림들을 그리고 또 그려왔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둘 다 홍이를 앓고 있었다. 다만 나는 그의 그림 속 홍이를 늘 느끼고 있었지만, 남편은 내 안의 홍이를 모를 뿐이었다.
어느 저녁, 운전을 하지 못하는 그를 모임장소에 데려다 주고 집에 돌아와, 텔레비전을 보던 나는 또 그 노트들을 꺼내 펼쳤다. 그가 전화를 걸어오면 다시 나가기 위해 외출복도 벗지 않은 채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앉아 노트를 읽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갔다. 모임에서 술이 한 순배 돌기 시작하면 종종 그렇게 늦는 적도 있어 나는 하품을 하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 전화기는 바로 침대 옆에 있었고, 벨이 울리면 금방 눈이 떠질 터였다. 살풋 잠이 들었다고 생각했다. 뭔가 생소한 기척에 눈을 떴을 때 붉게 상기된 그의 얼굴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성한 왼손이 노트를 움켜진 채 그의 몸이 부르르 진저리 쳤다. 물론 그는 취해 있었지만, 그 노트내용을 해독하지 못할 만큼 몽롱한 상태는 아닌 것 같았다.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당신 택시 타고 왔어요?”
잠결이었어도 당황된 마음을 감추려 천연덕스럽게 말했지만, 당장에 노트들이 내 얼굴로 날아왔다.
“당신은 나랑 산 것이 아니라 이제껏 그 홍이란 놈하고 살았구나! 왜? 왜? 날 평생 병신으로 내몬 그 놈을 내가 떨치지 못하는 것도 억울한데 너는 한평생 추억 속에서 노닐다니······.”
“여보! 그건 그냥 심심해서 지어낸 이야기들이에요. 무슨 그런 소리를······.”
볼을 스치고 떨어지는 노트를 잡으며 변명했지만 그는 미친 듯 소리쳤다.
“그래! 평생을 살아도 왜 그런지 내 여자 같지가 않았어. 그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구나. 너는 어린 시절 그때도 홍이만 찾았지. 태어나서부터 같이 자라온 옆집 나보다 어디서 굴러 들어왔는지도 모르는 낯선 이북내기 그 놈을 너는 더 따랐단 말이다!”
“여보! 그건 새로운 존재에 대한 어린 시절의 호기심이었을 뿐이라고요. 어릴 때 죽은 아이를 갖고 뭘 질투하고 그래요?”
어물어물 대꾸를 했지만 그는 기어이 한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고 울기 시작했다.
“잊을 수가 없어. 그 시절을 말야. 너희 아버지, 우리 아버지 다 피난 못간 죄로 인민군 들어왔을 때 목숨 부지하기 위해 부역을 했다지. 그때 그래도 식자깨나 읽는 양반들이었으니까. 너희 아버지가 홍이 네를 집에 들인 건, 그 부역의 오욕을 씻기 위해서였어. 원산에 살던 홍이 네가 1.4후퇴 무렵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홍이 아버지가 국군에 검거되어 호되게 당했다더라. 좌익으로 오해를 받았던 거지. 정강이뼈가 부러져 결국 다리를 절게 된 홍이 아버지를 우리 고향까지 데리고 온 건 바로 고문했던 그 국군병사였어. 선량한 피난민을 다리병신 만든 게 미안했던 거지. 이편저편 가늠도 못하면서 마구 사람을 죽이던 시대에 그래도 양심이 있는 병사였어. 우리 마을로 배속돼 오며 홍이 네 보고 거기 정착해 보라고 했다더라. 어차피 떠돌이 피난민이었으니까. 그 병사는 학교에서 만난 우리 아버지에게 홍이 네가 살만한 곳을 마련해 주면 부역을 눈감아 주겠다고 했다더라. 우리 아버진 이웃사촌인 너희 아버지의 부역까지 감쌀 방도로 너 네 아래채를 내주라 했던 거고. 그때 그 이야기를 다 듣게 된 나는 홍이와 잘 어울려 노는 게 아버지를 돕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무 것도 모르던 당신은 그냥 신이 나서 따라다녔지만……. 그 홍이가 이렇게도 끈질기게 당신과 내 인생에 따라붙을 줄이야.”
나는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
“그래서 홍이 네가 우리 집에······. 당신이 늘 그리는 그림의 주제도 그래서 그랬군요.”
“그래! 잊을 수가 없었어. 아니, 아니 그게 아닌 것 같아. 당신의 노트 몇 장을 읽고 나니 내가 잊을 수 없던 게 아니라 홍이가 내 안에서 자꾸만 그림을 그렸던 거야. 그 애가 내 왼손에 살아나 제가 말하고 싶은 걸 그렸던 것 같아. 당신이 자꾸만 그런 이야기를 썼듯이······. 이거, 이거 뭐지? 우린 지금까지 그 아이와 셋이 산 것 아냐? 소름이 끼친다. 소름이 끼쳐!” 그가 갑자기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방바닥으로 나뒹굴었다. 그의 왼손은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있었지만, 오른손은 귀 옆에 가만히 멈춰 있었다. 그는 마구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마치 가슴 안의 불기운을 참지 못하는 사람처럼.
처음에 그것은 단지 한순간의 충격 때문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 뒤로 그의 발작은 간간히 계속되었다. 정신과치료를 받아보았지만, 숨은 상처를 더 건드리는 결과만 가져왔다. 다만 의지할 수 있는 건 발작 방지를 위한 신경안정제뿐이었다.
그리고 10년이 지났다. 그 땅을 떠나야겠다며 그는 미국행을 서둘렀고, 바다건너까진 절대 홍이가 따라오지 못 할 거라고 했다.
한국화단에서의 지명도를 갖고 건너온 미국에서, 그는 당연히 교포화단 사람들과 어울릴 수밖에 없었다. 유학시절의 은사는 벌써 세상을 떠난 뒤였고, 같이 공부했던 미국동료 몇 사람은 수십 년 전 조용했던 동양유학생을 기억 못하거나, 아니면 파리나 밀라노로 무대를 옮겨 활동하고 있었다. 교포화단은 그를 반겼지만 또 소외시키기도 했다. 그들로부터 동질감과 이질감을 동시에 느끼며, 남편은 그동안 두 번의 전시회를 열었지만 결과는 초라했다. 사는 일에 바쁜 교포들은 문화에 대한 관심이 미미했다. 단지 이곳 소수의 예술인 혹은 예술애호가들을 위한 폭 좁은 세계일뿐이었다. 그의 어깨가 더 위축되었다. 그리고 그의 발작은 더 잦아졌다. 신경안정제는 계속 복용되었고, 이제는 약물과다복용 현상으로 손과 발에 마비증상까지 왔다.
붓을 놓아야 해! 붓을 놓아야 한다고! 그러면 홍이 그 녀석도 이제 그만 떨어져 나가겠지.
그의 그런 중얼거림은 날마다 반복되었다.
미국에 온 후 톤이 조금 밝아진 듯 했으나 물씬 외로움이 풍기는 작품들을 그려오던 그는, 생활을 정리하자며 동네에 건축 중인 예술인 노인 아파트에 관심을 보였다.
“여보! 우린 영주권자이긴 하지만 노인복지 혜택을 받으려면 아직 몇 년 남아 있어요. 만 65세가 되어야 하잖아요. 거기다 아마도 당신이 미국화단에서 활동한 경력 같은 것이 증명돼야 할 텐데, 사실 미국화단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했다고 보긴 어렵잖아요.”
조심조심 말했지만 그는 으레 화를 벌컥 냈다.
“뭐야? 당신은 좁은 아파트로 들어가는 게 싫은 모양이지? 미국화단 경력? 왜 없어? 교포화단은 미국화단 아닌가? 여긴 미국 땅이잖아. 그게 왜 경력이 안 되겠어. 지금 신청해 놓아야 우리가 만 65세 되는 날 제꺽 들어갈 수 있을 거라구. 난 말년은 미국친구들과 살 테야. 홍이 그 놈이 들어올 틈이 없도록 말야.”
“당신은 또 그 홍이 타령이에요? 무슨 귀신이 있다구······. 당신이나 나나 그때의 기억에 많이 지배당하고 있을 뿐이라고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보다 더 큰일을 겪은 적은 없었잖아요. 사람이란 원래 어른이 되어서도 유년의 기억에 지배당하는 존재지요. 더구나 우리의 유년은 비참한 전쟁의 기억들이잖아요.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당신이 평생 전쟁을 주제로 작품 활동을 해온 것은.”
“그럼 당신이 주절거리며 써온 그 노트들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그건 다르잖아. 나는 그 시절의 기억 전체에 얽매여 있다면 당신은 오직 홍이에게만 매어 있다는 것 몰라? 당신 요즘도 그런 노트 끼적거리는 건 아니겠지?"
그가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아니에요. 한국을 떠날 때 다 없애고 왔어요. 미국에 와서는 한 자도 쓰지 않았어요. 당신 말대로 홍이 귀신이 바다건너까진 날 따라오지 못한 모양이에요.” 나는 부러 웃음을 머금으며 슬금슬금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다행이 마음이 좀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미국으로 떠나오기 며칠 전 나는 그 노트들을 끌어안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시댁이 되었던 옆집 구식 2층집은 시부모님이 돌아가시자 남편이 팔아버린 지 오래였고, 내 친정집을 물려받은 조카는 낡은 집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3층짜리 건물을 지었다. 우리가 헤매던 들길과 골짜기가 어디쯤인지 구별이 안될 만큼 동네가 확장되고 아파트들이 들어서 있었다. 그 근처 어디에도 내 유년의 흔적은 없었다.
나는 할 수 있다면 홍이가 죽은 골짜기 가까운 곳에서 그 노트들을 태우고 싶었다. 그러나 그 옛날 잠깐 내 곁에 살고 갔던 그 애의 죽은 자리는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내 부모님 산소 근처 움푹 파인 흙구덩이에 불을 놓고 노트들은 하나씩 던져 넣었다.
잠깐 쪼그리고 앉아 노트 한 권을 펼쳐보던 조카가, 이 아까운 것을 왜 태우냐며 우두커니 선 나를 올려다보았다. 연작동화로 묶으면 훌륭할 내용을 왜 없애느냐고. 젊은 조카는 짐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어린 시절에 산화한 친구 홍이를 그렇게 또 태워죽이고 있다는 걸.
              

                        4

꽃그늘로 차츰 붉은 기운이 몰려왔다. 초여름 긴 해가 저물고 있었다. 진분홍 부겐비리아가 석양빛에 자주색으로 물들어 가고, 서늘한 바람 한줄기가 내 목을 스쳐갔다. 사철 꽃이 만발하고 기후가 쾌적한 땅,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아쉽지 않은 생활이었다. 이국이라는 외로움이 있었지만 10년을 넘기면서 그도 이젠 익숙해졌다. 그러나 남편과 나의 내부에 깊숙이 자리한 어두움은 세월이 가고 땅을 바꾸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으 어어어!”
망연히 뜰에 선 내 귓가로 남편의 외마디 소리가 들려왔다. 기어이 그의 히스테리가 또 시작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얼른 집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거실 한가운데 누워 버둥대고 있었다. 나는 그 옆에 내려앉아 그의 왼쪽어깨부터 주무르기 시작했다. 요즘 들어 어린 소년처럼 얄팍해진 그의 팔을 타고 내려온 내 두 손이 그의 왼손에 닿았다. 그 손은 오른쪽에 끼워진 의수와 다름없이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다만 미지근한 체온이 감지되었을 뿐.
“감각이 없어! 감각이······.”
수많은 그림을 그려낸 그의 왼손이 그렇게 조금씩 죽어갔다. 홍이가 거기에 살아나 자꾸 제 모습을 그려낸다던 그  손······. 남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 눈에서도······.
“이거 봐요! 배연식 화백님! 정신 차려요! 정신 차려요!”
그가 눈꺼풀이 무거운 듯 감았던 눈을 다시 뜨려 애를 썼다. 나는 옆에 누워 그를 부둥켜안았다. 불거진 그의 등뼈가 내 팔 안에서 힘겹게 들먹거렸다. 살아오는 동안 수백 번 안거나 안겨온 그와 나, 익숙한 서로의 몸에 비해 우리 사이엔 늘 서늘한 괴리감이 떠돌고 있었다. 울컥 견딜 수 없는 서러움이 목젖에서 치밀어 올랐다. 나는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그는 나를 따라, 나는 그를 따라 우린 어둠이 깊어질 때까지 울었다. 오랜 전의 친구 홍이를 핑계 댔지만, 기실 우리는 홍이를 앓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앓고 있었다. 나이 먹음과 그 허무와 무력함, 그리고 무엇 때문인지 평생 너무 예민하게 움직이던 영혼의 더듬이, 그 외로움을·······.
  
남편은 예술인 노인아파트 입주를 기다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올리브빛 벽에 하얀 타일의 바둑무늬가 창가마다 둘러진 아름다운 건물엔 방마다 하나 둘 주인이 생겨났다. 나는 그 옆을 지날 때면 걸음을 멈추고 그 아담한 발코니들을 올려다보았다. 금속제 난간 틈으로 꽃 화분과 야외용 의자가 보이고, 텅 비었던 그곳은 점점 사람 사는 집처럼 채워져 갔다.
그 건물에 들어가 살며 홍이가 들어올 틈 없이 미국친구들을 많이 사귀겠다던 남편은, 결국 심장마비로 평생 미워하던 홍이 곁으로 가버렸다. 나는 이제 홍이가 내 곁에도 없다는 걸 알았다. 우리는 삼각구도 안에서만 친구로 만났을 뿐, 이제 홍이의 존재가 홀로 남은 내게 내려 긋는 인연의 선은 무의미했다. 남편과 내가 두 개의 꼭지점으로 이룬 현실의 선 위에, 우리 둘에게 똑같은 값으로 내려앉던 홍이……. 사는 동안 그 애는 우리에게 미완이고, 미지였다. 결국 남편의 예술은 평생 홍이에 대한 탐구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그렇게 홍이에게 가버림으로써 아마도 자신의 세계를 후련하게 완성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혼자 남겨졌다. 내 안의 미완, 미지가 그대로 헝클어진 채······.

해가 질 무렵이면 나는 산책 겸 동네를 걸었다. 그 녹색의 건물 앞에 다다를 때면,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물끄러미 창문께를 올려다보았다. 거기 어디 창 하나를 차지하고 살 수 있었다면 남편은 좀 덜 힘들어 했을까. 정말 홍이를 떠나보낼 수 있었을까. 우두커니 고개를 쳐들고 있을 때, 2층 발코니 난간 위에서 한 여인이 고개를 내밀었다.
“아 유 코리언?”
그녀는 느릿느릿 그러나 정확한 발음으로 물었다. 혹 내가 영어를 못 알아들을까 염려하는 것 같았다. 잠시는 영문을 몰라 가만히 있다가, 곧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대뜸 그녀의 톤이 높은 목소리가 쏟아져 내려왔다.
“맞죠? 그렇죠? 한국사람 맞지요? 날마다 이맘때면 여길 지나가며 꼭 올려다보는 당신을 나도 눈여겨보았어요. 반가워요! 반가워!”
잠시 후 그녀는 파마기 없이 풀어헤쳐진 잿빛 머리카락을 흔들며 녹색건물의 유리문을 열고 나왔다. 함빡 웃음을 띤 얼굴은 갈빛 톤으로 둥그스름했고, 앞섶이 깊이 파인 붉은 민소매 셔츠를 입은 가슴께엔 검버섯이 군데군데 피어 있었다. 흰자위가 많은 커다란 눈엔 피로한 듯 붉은 핏발이 선 채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내 이름은 오드리에요. 오드리 길든!”
그녀는 미국에서 오래 살아온 듯 그 짧은 발음에도 혀 굴림과 악센트가 묻어났다.
“저는 배귀희라고 합니다.”
내 손을 꼭 잡는 미지근한 그 손바닥은 왜 그런지 그녀의 쉽지 않았던 인생역정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건조하고 거친 감각이 전해져 왔다.
우리는 금세 친구가 되었다. 서로를 끌어당긴 건 외로움이었다. 말년에 이국에 홀로 남은 나와, 너무 오래전에 고국을 떠난 탓에 한국친구라곤 없이 살아온 오드리에겐 우리만이 나눌 수 있는 먼 옛날의 이야기들이 있었다.
“전쟁직후부터 동두천에서 자랐어. 어머니는 미군색시였지. 아버지가 전쟁 때 죽어 버렸으니까. 미국에 가겠다고 몇 번이나 꿈을 꾸던 우리 어머니는 흰둥이 검둥이 병사들한테 속고 또 속고·······. 나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군부대 앞에서 장사를 했어. 열일곱 어린 나이 때부터. 이것저것 파는 잡화점이었지. 병든 어머니는 가게 뒷방에서 끙끙 앓아 쌌고······. 얌전히 장사만 했느냐고? 그랬다면 거짓말이야. 가끔은 미군장교와 잠을 자기도 했어. 돈을 두둑이 주었으니까. 그때 데니어를 만났어. 본토에서 막 건너온 스물 세 살의 신병이었지. 순진무구한 데니어는 그만 나한테 빠져버렸어. 나는 어머니로부터 미군 후리는 법을 전수받았거든. 어머니가 그를 따라 미국으로 가라고 했어. 꼭 따라가야 한다고. 마치 어머니가 못다 이룬 꿈을 이루게 하려는 것처럼 간절히 말했지.”
오드리의 한국말 발음은 어눌했다. 모국어가 그리워 일요일이면 이민교회에도 나가보았지만 잘 어울릴 수가 없더라고 했다. 미국인 남편을 둔 그녀의 전력을 캐려는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은 뒤, 그녀는 더는 한국인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오드리의 남편 데니어 길든은 시인이었다. 그는 미국인치고는 키가 작고 몸이 뚱뚱했지만, 숱이 적은 은발에 딱히 못생겼다 할 것도 없는 평범한 미국노인이었다.
남편 연식이 들어가 살고 싶다던 그 녹색의 건물을 나는 자주 드나들기 시작했다. 건물빛깔을 따라 연 녹색 톤으로 꾸며놓은 그들의 거실은 아담하고 간소했다. 조금은 화려해 보이는 오드리의 외모와는 달리, 벽에 걸린 그림도 없었고 테이블에 꽃이 꽂혀있는 적도 없었다. 가끔은 그 곳에 셋이 앉아 점심을 먹고 차를 마셨다. 내가 다 다 이해하지 못하는 데니어의 말들은 오드리가 해석해 주었고, 또 다 표현하지 못하는 내 말들도 그녀는 데니어에게 전해 주었다. 나는 데니어가 그 볼품없는 외모에 비해 만날수록 친절하고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가 왜 시인이 되었는지 조금은 이해가 갈만큼.


                        5

녹색의 거실 안으로 햇살이 환히 비쳐오고 있었다. 오드리를 처음 만났던 6월에서 어느새 9월이 되었다. 여름이 길게 이어지고 있는 것 같아도 조금은 소슬해진 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왔다. 오드리가 조금 전까지 앉았다 막 일어선 올리브색 헝겊소파에서 살그머니 피어오르는 미세한 먼지를 햇빛바람이 흔들었다. 그녀는 반바지차림의 풍만한 하체를 실룩대며 담배를 물고 발코니로 나갔다. 왜 그런지 표정이 뾰루퉁 했다.
“오! 허니! 당신 담배 피우면 안 된다는 것 몰라? 그만 두고 어서 이리와!”
데니어가 걱정스레 말했지만 오드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내가 가끔은 가슴 속에 시를 쓴다는 말에 데니어가 흥미를 보이며 막 얘기가 무르익어가고 있던 무렵이었다. 필요한 말은 어느 정도 구사하게 된 내 어설픈 영어를 그저 가만히 듣고 있던 오드리가 벌떡 일어서 버린 것이다. 휘둥그레 눈을 뜨는 데니어와 둘이만 앉아 있기도 어색하여 나는 슬그머니 오드리 곁으로 나갔다. 그녀가 하얀 연기를 길게 뿜어내고 있었다. 담배를 문 채 나를 바라보는 오드리의 늘 붉은 눈에 서글픈 기운이 어렸다.
“데니어는 동양여자를 좋아하지. 나와 인연을 맺은 것도 그렇지만 내 주변의 여자들에게도 지나친 관심을 보였어. 이민교회를 가지 않은 것엔 사실 그 이유도 있었어. 아이들을 키울 동안은 데니어와 헤어져 살았지. 그런저런 것들이 겹쳐졌던 때문이야. 나는 나대로 저 사람은 저 사람대로 왠지 힘들고 외로워 견딜 수가 없었어. 끝까지 다 통할 수 없던 감정들 때문이었을까? 결국 우린 종족이 다른 사람들이었으니까. 따로 살아왔던 젊은 날, 데니어에게도 여자가 있었겠지만 나도 내내 혼자였던 건 아니야. 하지만 미국남자들은 다 거기서 거기……. 내가 정착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어. 애들이 독립해 나가자 혼자 남은 내게 저 사람이 지팡이를 짚은 채 찾아왔더군. 류머티즘을 앓고 있다나. 외롭던 세월동안 자기는 시인이 되었대. 평생 직업군인이었지만 책을 좋아하긴 했었거든. 늙어버린 그를 보니 좀 측은하기도 했어. 그래서 다시 합친 것이 이제 겨우 2년째야.”
그녀가 또다시 연기를 훅 내뿜었다. 그리곤 핏발 선 눈으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 귀희 씨 만난 것 후회하면 어떻하지? 그 동안 저 인간의 여자 취향을 잊고 있었어.”
그녀가 절반은 타버린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발코니 난간 아래로 눈길을 떨어뜨렸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른 건 또 하나의 삼각구도였다. 데니어와 오드리 그리고 내가 어느 결에 존재의 꼭지점에서 서로에게 인연의 밧줄을 던지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새 그들의 단선적 삶에 끼어들어 삼각구도를 만들었다. 마치 그 옛날의 홍이처럼.
기어이 오드리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3개월……. 3개월이면 친구가 되기에도, 애인이 되기에도 적절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헤어져버리기엔 친구도 애인도 많은 미련이 남는 시기…….
결코 미인이라 할 수는 없지만 젊은 날엔 꽤 매력적으로 보였을 법한 오드리는 미국사회에서 오래 살아온 여인답게 얼굴 표정이 늘 컸다. 마음껏 웃고, 마음껏 찡그리고, 그날도 마음껏 울었던 그녀…….

  9월의 말미 노을이 질 무렵, 우리는 산책을 하다가 동네길 한적한 버스정거장 벤치에 앉았다.
“귀희 씨! 우린 참 운이 나쁜 시대에 유년을 보냈어. 이만큼 살았어도 끈질기게 날 따라다니는 동두천의 기억……. 혹 거기 가본 적 있어?”
오드리가 젖은 눈으로 가만히 날 응시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거긴 귀희 씨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못한 장소일 수도 있어. 데니어는 한국전체가 동두천 같을 거라 생각했지. 그가 나를 처음 만났을 그 즈음엔 말이야. 그리고 한국처녀는 다 나 같을 거라고 믿었어. 나처럼 못 배우고 거침없는 것이 한국여자라고. 그 사람은 당신을 놀라워해. 그 침착함과 조용함 그러나 뭔가 분명히 자기를 표현하는 것 말이야. 나처럼 많은 말을 하면서도 정작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과는 좀 다른……. 데니어는 당신에게 매력을 느껴.”
나를 외면한 채 간간히 자동차가 오가는 거리에 시선을 꽂은 오드리의 옆얼굴에 심각함이 어렸다. 나는 살며시 오드리의 손을 잡았다. 거칠고 주름진 그녀의 손끝 긴 손톱엔 에나멜 칠이 검붉었다. 평생 손톱을 칠해 본 적이 없는 나와 늘 손톱을 칠하는 오드리, 우리는 사실 서로  비슷한 시기에 같은 나라에서 태어난 여자들이란 것 외엔 공통점이 없는지도 몰랐다. 나는 그녀의 손을 쥔 채 한숨을 쉬었다.
“오드리! 그런 말 하지 말아. 데니어와 난 말도 잘 안통하고 나는 절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 그토록 어려운 인생행로를 거쳐 말년에 다시 만난 두 사람이 행복했음 싶어. 나 이젠 오드리의 집에 가지 않겠어.”
다부지게 말했지만 내 가슴 속엔 왜 그런지 서늘함이 몰려왔다. 뭔지 모를 먹먹한 외로움이 가슴을 채워오고 있었다. 지난 3개월 동안 그들 사이에 앉아 나는 조금은 행복했다. 오드리의 수다스런 말투, 나를 볼 때면 설레는 듯하던 데니어의 눈빛, 남편과 홍이가 떠난 대신 나는 그들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
버스 정거장에 어둠이 깊어질 무렵, 정거장 뒤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지 않겠냐는 내 제의를 뿌리치고 오드리는 한 블록 떨어진 제 집을 향해 걸어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선 내 눈에 오드리의 긴 꽃무늬 스커트가 밤바람에 흔들렸다. 맨발이 끼워진 그녀의 굽 높은 샌들이 길 위에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멀어져 갔다. 오드리의 뒷모습에 물씬 서려오던 쓸쓸한 기운 속에, 나는 그녀가 데니어와 새로운 사랑에 빠져 있음을 눈치 챘다. 사랑의 뒷모습은 그렇게 쓸쓸한 것이기도 하기에……. 나는 돌아서오며 웅얼웅얼 타령을 읊었다.
  
아주 먼 옛날의 일이었지요.
그러나 지금도 생생한

소년의 손목을 잘라먹은
그 소녀
처녀가 되었지요.
어른이 되었지요.
늙어갔지요.

그래도 피 흘리던 그날들
눈앞에 등불처럼 환해요.

울컥 울음이 치밀어 올라왔다. 왜 그런지 남편의 히스테리 앞에 남몰래 웅얼거릴 때보다 더 진한 외로움이 느껴졌다. 돌아서 오는 내 뒷모습도 오드리를 닮았을까. 나도 그녀처럼 새로운 사랑에 빠졌을까…….

일주일 후 데니어가 전화를 걸어왔다.
“귀희! 나의 오드리가 떠났어요.”
그의 목소리는 무연하게 내 귓속으로 흘러들었다. 무슨 말인지 몰라 가만히 있는 내게 그가 다시 말했다.
“그 사람 고혈압 환자였죠. 젊어서 술도 많이 마시고 담배도 골초였어요. 나와 다시 만난 이후 술도 담배도 끊고 건강을 잘 돌보고 있었는데, 얼마 전부터 담배를 또 피기 시작하더군요. 지금 보니 오드리는 그동안 혈압강하제도 먹지 않았네요. 약병에 한 달분 약이 그대로 남아 있어요.”
“그래서요? 그래서 오드리가 어떻게 되었다는 거죠?”
나는 그제야 다급한 마음으로 물었다.
“어제 저녁 집에서 갑자기 쓰러졌어요. 병원으로 옮겼지만…….”
데니어는 흑흑 흐느꼈다. 나는 정신이 멍해왔다. 그날 어두운 버스 정거장에서 돌아서 갈 때, 자동차 불빛에 비춰지던 그녀의 긴 스커트 자락이 떠올랐다. 그녀의 삶이 그렇게 신산했듯, 원색의 커다란 꽃무늬가 불빛과 밤바람에 어른어른 흔들리던 광경…….

데니어 길든이 눈물을 훔치며 돌아섰다. 잔디밭에 꽂혀있던 지팡이가 그의 몸을 따라 방향을 바꾸었다. 먹먹한 하늘에서 눈길을 내린 내 얼굴을 그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등 뒤로 햇빛 아래, 제 묻힐 자리에 놓인 오드리의 참나무 관이 보였다. 핏줄이 터져버렸다는 늘 붉었던 눈을 감고, 아주 우리 곁을 떠나간 그녀가 그 안에 누워 있었다. 얼마나 못 견딜 것들이 그녀의 핏속에 그렇게 팽창되어 있었던 걸까.
망연히 관을 바라보고 선 내게로 데니어가 지팡이를 끌고 걸어왔다. 그리고 그는 그만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의 둥근 어깨가 내 얇은 가슴에서 들썩거렸다. 나는 얼결에 두 손을 들어 데니어의 어깨를 살그머니 감싸 안았다. 따가운 햇빛 아래 오래 서 있던 그에게서 시큼한 땀 냄새가 났다. 나는 왜 그런지 아주, 아주 오래전 홍이가 떠나던 날이 떠올랐다. 기진한 나를 껴안던 어머니 품에서 풍겨오던 땀 냄새……. 나는 눈을 감고, 잠시 슬프고 아늑한 환상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친구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났지만, 내 가슴 속에선 뭔가 설렘이 일고 있었다.
나는 데니어의 등을 토닥이며, 남편의 화실이 철수된 내 집이 혼자 살기엔 너무 크고 적적하다는 생각을 했다. 남편이 그토록 살고 싶어 하던 그 녹색의 건물로 들어가 그 대신 살아야 할 것 같은, 거기서 내내 오드리를 그리워해야 할 것 같은 예감에 휩싸였다. 그녀는 내게 다 알지 못했던 미지이며 미완의 대상이었으므로…….
데니어의 시심에 영향을 받는다면, 어쩌면 나도 이제 내 가슴 속의 말들을 종이 위에 선명히 풀어 놓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데니어를 부축하며 천천히 묘지를 빠져나왔다. 몇 명 되지 않는 조객들이 우리의 발걸음을 따라 나왔다. 그 먼 옛날의 봄 들판을 걸어가듯 조금은 외롭고 조금은 설레는 내 가슴 속에서 말들이 고개를 쳐들었다. 나는 데니어의 구부정한 등을 가만가만 토닥이며 타령조로 웅얼대기 시작했다.
  
한 소녀가 있었지요.
꿈은 없고 사랑만 있던 소녀,
뜨거운 가슴 갈라지고
상처엔 피가 끓어요.

그 소녀 어른이 되었지요.
더운 피 식을 줄 모른 채
그 소녀 늙어 갔지요.
늙어 갔지요.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난 그 소녀
늙은 친구의 가슴 속에 뿌리를 내려요.
보일 듯 말듯 그 상처의 실뿌리
거기 살기 시작하네요.
거기 살기 시작하네요.  (*)


[문학나무] 2006년 가을호 - 2011년 발간 소설집 [빛나는 눈물]에 수록


2011년 연변소설학회 초청 제 3회 두만강문학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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