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웠던 시절

2020.05.09 19:46

노기제 조회 수:53

20200120                                                   뜨거웠던 시절

                                                                                          노기제

 

    요즘 들어 눈에 띄게 나를 뒤흔드는 모습들이 있다. 애들 길러 내 보내고 아직 일손 놓지 않은 채, 주말이나 연휴를 이용해서 캠퍼로 떠나는 정 좋은 부부들이다. 아등바등 지출 줄이며 한 푼이라도 아껴서 저축하던 숨 막히는 시절이 제풀에 스르르 물러 난 중년들이다.

   결혼 몇 년차면 가능한 상황일까. 이민 초기 때 줄곧 꿈 꿔오던 생활이다. 그 당시 주위에 보여지 던 연세 드신 노부부의 정다운 모습에 우리도 이담에 저렇게 나이 들자. 서로 의지하고 두 손 꼬옥 잡고 미국 일주를 하자. 무언으로 희망을 걸었던 노후가 어느 덧 현실이 되었지만 불가능한 꿈으로 판정이 났다.

   생각 없이 하루하루를 살면서 내가 뱉어 버린 말 조각들, 내 식구니까 믿거라 해서 함부로 대했던 행동 하나하나가 해를 더하며 쌓여서 부셔버리지 못 할 벽을 키웠다. 얼굴 마주하기 진저리난다. 함께 식탁에 앉아 밥 먹기 소름 끼친다.

   어떤 말로 대화를 이어가겠나. 자신의 이론만이 옳으니 그 이론에 따르지 않는 상대방은 욕지거리 들어 마땅하고 손에 잡히는 것 던져 서라도 고쳐주겠단다. 한 사람의 비정상적인 행동을 정당화 시키는 세월 속에, 숨죽이고 살아 온 다른 한 사람의 삶에는 무슨 꿈이 남아 있으려나. 어떤 희망이 고개를 들겠는가.

   나이 든다는 건 참 좋다. 시간의 여유가 생긴다. 하고 싶었던 취미 생활도 현실화 시켜 자신을 개발한다. 예전엔 레슨비 부담스러워 발도 못 들여 놨던 이것저것에 용기 내어 도전 해 본다. 도저히 이뤄낼 수 없었던 아티스트로 모습을 바꿔간다. 기적 같이 능력이 따라 온다. 노래도 제법 잘하게 된다. 기타도 웬만큼 소리가 난다. 피아노도 곧 반주가 가능하게 된다. 문학소녀를 꿈꾸던 일도 현실로 바뀌며 시인이 되고, 수필가가 되고, 소설가도 된다.

   둘이 함께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늙어갈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지만, 이루어 질 수 없는 꿈이었다 해도 용기 내어 혼자라도 행복해져야 한다. 다른 아무개 모양 착하고 부드럽고 배려심 많은 남편 만나지 못한 내 팔자 숨기려 애 쓰지 말자. 나이 든다는 게 좋다는 걸 말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나의 추한 모습까지도 보일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부끄러움을 보이면서 누군가가 작은 위로를 받게 된다면 값진 일이다. 창피할 것도 없다. 잠간 눈감으면 지나간다.

   좋은 사람들과 어울려 같은 취미 생활 하면서 자연과 벗해 즐겁게 살고 싶다. 큰소리치며 야단치는 폭력성 짙은 배우자와 인생 끝날 까지 참고 살아야 한다는 엄마도 안 계신다. 참을성의 미학은 부부사이에선 무용지물이다. 쌍방 노력이 수반된다면 달라진다. 누구에게든 나의 나 됨을 무시당하고 경하게 여김을 받는다면 그 사람과의 관계는 끊어야 한다.

   내가 나를 먼저 사랑해야한다. 내가 나를 귀하게 대접함이 우선이다. 내가 신이 아닐 진데 누구를 참아 주고, 누구를 용서하고, 누구를 이해 한다는 건가. 함께 인격적으로 대하고, 서로를 불쌍히 여기고, 같이 귀하게 여겨 주는 배우자라야 사랑하며 사는 것이 가능하다. 예수 믿는답시고 이래도 참고, 저래도 참고, 이제나 저제나 나아지려니 기다렸던 시간들이 허송세월이었음을 요즘은 날마다 느끼고 있다.

   아무렴 내가 그랬을라구? 내가 언제 그랬어? 왜 지나간 얘길 하구 또 하구 반복만 하느냐? 네가 이래저래 했으니까 내가 그랬지. 사람 성격이 변하냐? 안 변하니 그러려니 한 쪽 귀로 듣고 한 쪽 귀로 흘리며 살면 되잖아. 욕설과 폭력을 행함이 당연하다는 합리화성 변명이다. 죽어야만 피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죽고 싶었다.

   참고 살 수 있었던 세월들이 내겐 뜨거운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지금은 아니다. 나 혼자만의 생활에도 에너지가 딸린다. 하물며 누구의 어떠함을 포용할 힘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세상을 향해 고개를 들자. 숙이고 감추고 아닌 척 해봤자 모두 들어날 것임에 확실하다. 세상에 비밀이 없다라는 말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실이다.

   어차피 다 들어날 사연들이라면 차라리 내 입으로 토해내야 사실이 된다. 소문에 소문으로 퍼져나가다 보면 끝에 툭 떨어지는 상황은 실제와는 거리가 멀게 마련이니까. 그래서 세상에 스피커를 켰다. 내가 감당해야 할 내 인생이니 내 방식대로 살고 싶다. 부끄러운 모습 아니다. 나를 도우시는 하늘의 손길을 늘 함께하며 평안을 누린다.

 

20200509 맺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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