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07 12:41
이순신장군, 백의종군(白衣從軍)의 발자취
양상훈
서울에서 중부,호남 고속도로(高速道路)를 번갈아 달리며 내륙지방(內陸地方)으로 구례읍에 진입한다. 선조의 얼이 서려있는 고유의 전통문화와 예술의 중심지에서 여장을 풀고 나니, 경건한 마음에 설레기 까지 한다.
안개구름 덮인 지리산 준봉, 노고단에서 내려가며 화엄사 기슭 아래 자리 잡은 유서 깊은 양반 마을 “오미 행복마을”이라고 일컫는 운조루가 있다. 여기서 하룻밤 민박을 한 후, 지리산 둘레 길에서 백의종군 길 의 답사를 시작한다.
오미 마을은 영조 52년 문화 류씨,류이주가 풍수지리설로 운조루를 지으면서 오미 행복 마을로 유명하게 되었다한다. 마루 뒤편으로 생태 숲 산책로가 조성되어 지리산 둘레 길과 백의종군 길의 탐방객들로 발길이 머무는 곳이다.
임진왜란 때 조선의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 위해 불철주야로 노심초사(勞心焦思) 하였던 이 순신 장군의 발자취를 찾아가니 저절로 마음이 숙연해 진다
남도 이순신 백의 종군로 구간은 구례 산수유 시목지에서 시작되어 현재 산수유 테마 파크로 조성된 고장 “계척마을”이다. 지리산 둘레 길의 밤재-탐도 구간에서 출발하는 첫 마을이다. 이곳은 당시 피난민으로 형성된 의미 있는 마을이기도 하다.
이순신이 당시 밤 재를 넘어 이곳 마을에서 주민들의 환대를 받으며 산수유 꽃마을
을 맞이하는 얼굴 모습이 떠오르게 한다.
충무공의 백의종군은 1597년 4월1일에 시발점 이었다.당시 당파 대립의 모함으로 선조 왕명을 거역했다는 이유로 파직되어 모진 고초를 겪고 의금부에 투옥 되었다.
전쟁 중 한산섬 대첩을 비롯하여 그의 혁혁한 전공(戰功)을 참작하여 겨우 구명되어 백의종군의 엄명을 받게 되었다.
아무런 직위도 없이 평범한 병졸로 전쟁에 참가하여 공을 세우라는 가혹한 형벌이었으나, 그에게는 오히려 치욕이었다.
“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적에,
어디서 일 성 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신의 죄 없음을 굽이 살 피 소서,
저 한 몸이야 만 번 죽어도 아까울 건 없건마는,
이 나라 일은 어찌 하리오.“
이 충무공이 나라를 걱정하는 고심, 우국충정( 憂國衷情)과 부모님에 대한 지극한 효심을 담은 난중일기에서 깊은 감회의 심연으로 빠져든다.
남도, 이순신장군의 백의종군 길은 다음의 코스로 요약 할 수 있다.
산수유 시목지-산동면 사무소-운홍정-지리산 호수공원-우리말 체험관-광의면 사무소-선월 마을-광의대교-지리산 둘레길-손인필 비각-구례읍사무소(헌청)-문척교-동해마을로 이어져 섬진강 황전 늘 품길, 송지채장군의 눈물길, 순천부의 구국다짐길, 석주관 가는 길로 총 75 km 거리로 1구간에서 7구간까지 이어진다.
그 당시 남해안일대의 정찰과 지휘부와 교신을 통해 전략을 재구상한 길이기도 하다. 백의종군 길은 전체적으로 4개월이나 걸었던 거리 500 여 km로, 한양에서 충청전북을 거쳐 전남으로 이어지는 대장정이다.
여기 제3구간, 지리산 둘레 길에서 구레읍사무소(구례헌청 ) 문척교를 거쳐 동해마을까지 7.5 km 거리는 백의종군로 구간 중 관련 유적 및 인물흔적이 가장 정확하게 남아 있는 공간으로 이순신이 백의종군시 지나간 주요 거점이기도 하다.
마지막 석주관 코스는 구레읍에 섬진강을 따라 하동쪽으로 약10 km가다보면 구례읍 토지면 송정리에 이르는데 좌측으로 높이 약10m 낭떨어지가 바로 석주관이다.
전라도 경상도를 연결해주는 지리산의 요충지로 진주에서 구례, 남원으로 향해 침입해오는 왜적을 방어하는 전략지로서 다수 순국선열들을 모셔 놓은 사적비 이다.
백의종군 길은 1597년 4/1-8/3일까지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기까지 4개월간 조선의 운명을 걱정하여 조선수군의 작전 계획을 세워 ,원균이 지휘한 철전량 해전의 참패를 극복하고, 명량대첩에서 기적의 승리를 이끈 구국의 구상 길 이었다.
오늘날 후손들의 귀감이 된 이순신의 삶과 백의종군 길이라는 역사의 현장에서 오뚜기 처럼 일어섰던 그의 활약이 지금도 구례, 순천 종군 길에 그 체취가 짙게 서려 있다.
이순신장군은 늦게 무과에 급제 한 후에도 변방근무를 마다하지 않고 자원했었다.
시련과 고통으로 굴곡진 시간을 최고가 되는 길로 바로잡았다. 또한 거북선, 화포를 비롯하여 새로운 무기를 계발(啓發)하고 전쟁 중에서도 전력연구와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난중일기에서 남긴 그의 비망록과 문언 등에서 문무를 두루 갖춘 지략가이며 진정한 애국자임을 알 수 있다.
백의종군 길에도 시련을 한탄하기보다 옛 부하들과 적정 정보를 수집하는 등 준비하는 성찰은 훗날 지휘권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위기 속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충무공 정신은 준비된 자만이 성공할 수 있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이순신 장군은 난중일기에 평소에도“기쁘다. 기쁘고 다행이다. 아직도 오히려 해낼 수 있다” 는 표현을 많이 했는데 어려운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부분을 먼저 보는 사고력이 특별하였다. 충무공은 오늘 “반드시 죽기로 하면 살 것이요,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다” 필사측생 (必死側生),필생측사(筆生側死) 로 긍정과 희망을 가진 자만이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신념을 깨우쳐, 장병에게 격려로 사기를 고취시켜 전쟁의 승리를 이끌어 냈다.
충무공은 진실한 소통과 돈독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의 난중일기에는1,000여명의 부하 이름이 등장하는데 일일이 관찰 기록으로 부하에 사랑과 관심을 늘 가졌다. 구례에서 순천에 이르는 백의종군 길에 과거 부하들이 삭탈관직(削奪官職) 되어 힘없는 이 순신을 극진히 예우하는 모습은 평소 그의 인품과 사랑에 바탕을 둔 진정한 인간관계에서 연유 되었으리라.
충무공은 모든 행동의 근본은 효에서 온다고 하였다. 난중일기에“어머니가 평안하시니 다행이다.” 란 구절이 82회나 기록되어 그의 효도를 짐작 할 수 있다.전쟁터에서 나라의 치욕은 크게 씻어야 한다고 가르치던 어머니에게 효심이 깊은 아들이었다.
어머니의 큰 뜻을 백의종군 길에 한시도 잊지 않고 결국 적군을 물리쳐 국가 치욕을 막았다. 백의종군의 출발점인 구례읍은 지금 지리산 탐방의 관문 역할을 한다.
섬진강의 협곡과 부근의 울창한 준봉인 지리산 노고단은 반야봉, 천왕봉과 더불어 지리산 3대 주봉중의 하나로 봉우리 중에서도 영봉으로 손꼽히고 있다.
특히 노고단아래 펼쳐지는 구름바다의 절경은 가히 지리산을 지리산답게 만드는 제1경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남쪽으로부터 구름과 안개가 파도처럼 밀려와 노고단을 감싸 안을 때 지리산은 홀연히 아름다운 구름바다의 장관을 이룬다.
임진왜란으로 전강토가 유린되는 상황에서 이순신이 일본군을 섬멸할 계획을 구상하고 입안하던 구국의 길이었다. 그 발자취를 따라 선열의 구국충정과 애민정신이 후세대들에게 전파되어 애국심을 고취시켜온 만큼, 오늘날 성웅 충무공의 정신을 높이 선양하는 역사의 현장을 재조명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당시에 잠시 삼도수군통제사를 맡았던 원균은 칠천량에서 왜군과 교전 중 대패하여 한산도의 삼도수군 통제영까지 일본군에 넘어가는 수모를 당하였다. 이러한 절박한 상황에서 같은 해 7/22일, 이순신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 9/16일 명랑해전에서 남은 12척의 배로 133척의 왜선을 패퇴시켰다. 1598년 11/18-19일 도요토미의 사망으로 패주하는 500여척의 적선과 끝까지 추적하여 용감하게 맞서 섬멸시켰다.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적을 소탕키 위해 끝까지 왜적을 추적하다가 적탄에 맞아 장엄하게 전사하였다.
그는 “ 이 위급한 상황에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 하는 엄숙한 유언은 가슴을 뭉클 하게하며 전쟁사에 영원히 새겨지리라.
오늘도 섬진강은 남도,백의종군 길을 감돌며 이 충무공의 애환을 안은 채 맑고 선명하게 흐르고 있다. 지안군 마이산에서 발원하여 전북,전남,경남의 3도 12개 시군의 유역을 거쳐서 500리 물길을 이루는 강으로 전국에서 가장 깨끗한 강이며, 순국선열들의 넋이 깃든 생명의 강임에 틀림없다
임진왜란 7년 동안 국난의 위기 속에 이순신 장군은 구국의 영웅이며 후손대대로 기려야할 순국선열이다.
역사가는 해전사의 명장으로 동양의 충무공 이순신장군과 영국의 넬슨제독 뿐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충무공에 대한 세계인들의 평가는;
영국 빌라드 제독은 “영국인으로서 넬슨과 견줄만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그렇게 인정할만한 인물이 있다면, 그는 바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위대한 동양의 해군사령관 이순신 제독뿐이다”
일본 도고제독은 조선의 숙적임에도 “영국의 넬슨은 군신(軍神)이라고 할 만한 인물은 못된다. 해군 역사상 군신(軍神)이라고 칭할 제독이 있다면 오직 이순신 제독뿐이다 이순신 제독과 비교한다면 나는 일개 부 사관도 못 된다”
당시 조선조정은 이순신의 승승장구소식이 정권위협으로 느끼면서 그를 모함하여 파직하고 투옥시켰다. 결국 수군이 패전하고서야 고작 12척이 남았을 때 다시 삼군통제자리로 임명하였다. 넬슨도 훌륭한 장군이고 역사의 한 인물이다
그러나 국가에서 큰 도움도 없이 우국충정의 마음으로 극한의 조건에서 승리한 이순신 장군이 더 위대하지 않을까.
섬진강의 용두골에서 뜻 깊은 여정을 마무리한다.
위대한 성웅의 발자취를 짧은 시간에 주마간산( 走馬看山) 격으로 밟아온 낭객이 아니 런지 송구스러운 상념마저 든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에 황혼 빛이 붉게 부서지는 시간, 시원한 강바람이 온몸을 적서 주고 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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