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진아, 수진아 (제 6 회)

2013.07.14 04:43

김영문 조회 수:340 추천:26

                                   수진아, 수진아 (제 6 회)

(9)

  윤수진이 이야기하는 사이에 날은 완전히 어두워져 불을 켜지 않은 내 아파트 방은 바깥에서 흘러 들어오는 창백한 가로등 불빛만이 희끄무레하게 방안의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카펫 바닥에 앉아서 이야기하던 윤수진이 소주 병을 들고 몇 모금 마셨다. 그 눈이 공허하게 어둠을 응시했다.
  "제이콥은 어머니가 죽었을 때 자신의 절반이 따라서 죽었어. 그 남아 있던 절반도 아버지가 죽으면서 거의 상실해 버렸던 거야. 게다가 나까지 떠나겠다니까 절망해 버렸겠지. 충직스러운 칼로스와 마리아 부부가 남아있고 키 큰 개 버디가 제이콥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그래도 다행한 노릇이었어."
  나는 윤수진 옆의 카펫 바닥에 엎드려서 이야기를 듣다가 몸을 일으켜 소파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짐을 대충 꾸려서 서둘러 떠나야 했던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던 거야. 제이콥과 한 집에서 살 수가 없었으니까."
  나는 제이콥이 윤수진을 떠나보내지 않으려고 하던 그 날 발작을 일으켰을 때 윤수진과의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졌었는지 궁금했지만 물을 수는 없었다.  
  "오래 못 만나는 사이에 많은 일을 겪었구나."
  윤수진이 샬리스에서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한국에 있을 때는 보지 못했던 윤수진의 숨겨진 부분을 발견하는 것 같아서 경이로운 마음으로 윤수진을 다시 보고 있었다. 갑자기 윤수진이 나보다 훨씬 더 크고 지혜로운 존재로 보였다.                
  "네가 없어지고 나서 지금 그 제이콥은 어떤 마음으로 있을까?"
  "몰라. 나는 몰라. 나는 그 모든 것을 잊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어. 제이콥도 죠세프도 칼로스도 마리아도 모두 잊고 싶어. 샬리스 그 자체를 잊고 싶어."
  "냉정하구나."
  윤수진의 단호한 말에 나는 다소 위축감을 느꼈다.
  "죠세프가 말한 적이 있어. 내가 가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많은 것을 버려야 한다고. 모든 것을 다 한꺼번에 지니고 목표점에 갈 수 없다고 말이야. 죠세프는 필요 없고 무거운 짐은 빨리 버려야 한다고 말했어."
  "그렇다면 언젠가 필요 없다고 느껴지는 때가 오면 너는 나도 역시 그렇게 잊고 싶어 하겠지?"
  내 말에 윤수진이 희미하게 미소 띄운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럴지도 몰라. 그런데 지금 까지는 내가 너를 필요 없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 그렇게 오래 동안 안 보고 사는 동안에도 나는 네가 나한테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어쩐지 앞으로도 나는 너를 항상 필요로 할 것 같다는 생각이야. 확률상으로 볼 때 너는 안전 권에 들어 있다고 생각해도 돼."
  나는 어쩐지 이 녀석이 지금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은 자기가 한 말이 멋쩍은지 시선을 돌리고 꿀꺽거리며 소주를 몇 모금 마셨다.
  "너는 왜 내가 너한테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윤수진이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다소 수줍은 표정을 짓고 말했다.
  "그 건 내가 널 좋아하니까."
  이런 표정을 지을 때면 이 녀석은 영락없는 여자로 보였다. 그 것도 꽤 매력 있는 여자로 말이다. 이 윤수진은 몇 개의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게다가 네가 또 글을 쓰기로 결심한다면 나는 네가 나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이라고 틀림없이 생각하게 될 거야."
  "나 글 쓰는 것이 너와 무슨 관계가 있지?"
  "서로 생각을 나누고 온갖 것을 의논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나는 네 글을 좋아 해. 네가 쓴 글에서 꽤 많은 영감을 받았거든. 네가 화난 어조로 쏟아내는 그 이야기들을 나는 좋아 해. 분노해서 단말마의 소리를 지르는 것 같은 너의 소설을 나는 좋아 해. 나는 네가 어떻게 지금 까지 글을 쓰지 않고도 편안한 마음으로 살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어."
  윤수진의 말에 나는 자조적 기분이 되어 말했다.
  "사실은 나도 그 것이 이해가 안 가. 아마 내가 가졌다고 생각했던 분노는 네가 말한 것처럼 가짜 분노였던 모양이지."
  틈도 주지 않고 윤수진이 되받았다.
  "그렇다면 네가 진짜 분노를 가지고 쓰면 훨씬 더 멋있는 것이 나올 거라고 자신 있게 생각해 본 적 있어?"
  나는 입을 다물었다. 못 당할 놈.
  "사실은 너하고 떨어진 후 혼자 살다가 뉴욕에 왔을 때 몇 개 써 놓은 것이 있었는데 버리지 않았으니까 아마 어느 구석엔가에 있을 거야. 한 번 찾아 볼게."
  "부라보. 뭔가를 썼다는 말이지, 그 동안? 반가운 말이야. 물론. 물론 나는 네가 쓴 글을 읽고 싶어. 뭐에 대한 이야기를 썼어?"
  "잘 기억이 안 나. 뭔가 남에게 피해를 끼치고 사기 쳐서 자기만 잘 살겠다고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묶어서 출간한답시고 그 머리말을 썼었는데 그러고 말았지. 중간에서 도중 하차한 셈이야."
  "찾아 봐. 찾아서 나에게 보여줘. 내가 읽어 보고 의견을 줄 수 있어. 네가 쓴 것들을 나는 다 좋아했어. 왜냐 하면 생각이 같았으니까. 철학이 같았으니까."
  나는 언젠가 오래 전에 끄기적거렸던 원고가 어디에 있는지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 다행히도 버린 것 같지는 않았다.
  "너는 글을 쓰고, 나는 그림을 그리고. 내가 가진 꿈을 이야기해줄까?"
  윤수진이 카펫 바닥에서 무릎을 안고 생각에 잠겨서 말했다.
  "해봐."
  "나는 너와 한 집에서 살면서 나는 그림을 그리고 너는 글을 쓰면서 옛날에 우리가 희망했던 피스닉(PEACENIK)의 꿈을 실현하고 싶은 거야. 종교와 이념과 인종, 문화, 이런 모든 것을 떠나서 인간 가족으로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면서 지구 위에 항상 평화가 가득하기를 기원하는 그런 평화족이 되어서 살고 싶은 거야. 꿈이겠지?"
  그러고 보니 서글프게도 우리에게는 그런 이루어질 수 없는 생각을 하면서 의기투합해서 같이 몰려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까맣게 멀게만 느껴지는 그 옛날에 말이다.
  "윤수진. 나는 네가 샬리스에서 살면서 크게 인간적 성장을 했다고 느꼈는데 아직도 순진한 공상의 세계에 사는 지진아에 불과하구나. 이 인간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그 유토피아적 사회상을 지금도 버리지 못하고 있어."
  "그럴지도 몰라. 그러나 희망은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유토피아처럼 그 것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야."
  그 먼 시절에 가지고 있던 그런 생각을 버리지 않고 꿈꾸고 희망하고 또 아직도 실지로 만들어내고자 노력하는 윤수진을 나는 존경스러운 마음으로 보았다. 그렇게 고고한 이상과 불타는 정열을 가진 적이 있었지만 이제 그 흔적은 커녕 단 한 점의 편린도 남아 있지 않은 나 스스로는 비참하고 초라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대로 보통 평균치의 생활을 하며 아무 모순도 느끼지 않고 살던 내 앞에 십 년이나 없어졌다가 나타난 이 녀석이 내가 뉴욕에서 신봉하고 살았던 질서와 가치관을 갑작스럽게 뒤엎어 버리면서 내 정신을 고문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때 우리는 너무 배가 고팠어. 그리고 기성 사회와 도덕과 도식화된 사고 방식에 절어 들어 있는 절대 다수의 인간 군상이라는 엄청난 장애물이 있었어. 여기에는 그 장애물이 없어. 한국에서는 너무 똑똑해도 안 되고 너무 바보여서도 안 돼. 너무 키가 커도 또 작아도 안 돼. 항상 중간에 들어야 무난히 살 수 있게 되어 있어. 나는 그런 것을 저주해. 개성을 파괴시키는 사회를 저주해. 개성이 강하면 따돌리고 이방인 취급하는 그 바보들을 저주해. 단일 민족, 단일 문화권이라고 자랑하면서 그 걸 장점이라고 말하고 있는 거야. 그러나 여기는 그런 장애물이 없어. 미국은 잡동사니가 모여서 다 잘 사는 곳이야. 여기서는 우리가 가졌던 생각을 마음대로 펼쳐볼 수 있어. 두터운 인간 장벽과 넘는 것이 불가능한 인습이 없는 곳이야."
  윤수진의 말을 들으며 나의 가슴 속에 서서히 그 때 한국에서 가지고 있던 그 분노가 마치 바람 맞아 다시 피어나는 잿더미 속의 불씨처럼 되살아 났다. 윤수진의 고집스러운 집념이 나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었다. 윤수진 녀석 말처럼 아직 늦지 않았는지 모른다. 가능성은 그 가능성을 믿는 사람에게만 오게 되어 있는 것이다. 가능하다고 믿을 때에 그 것은 가능해지는 것 아니겠는가.
  "이철수. 뭐 생각해?"
  희끄무레한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윤수진의 목소리에 나는 내 생각에서 깨어났다. 윤수진은 아까의 자세로 무릎을 안고 카펫 바닥에 앉아서 나를 보고 있었다.
  "지금 하는 네 말을 들으면서 나는 네가 그렇게 아주 바보는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너는 지금 나를 깨워주고 있는 거야. 우습게도 나는 지금 네 말을 들으면서 꽤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참이야."
  윤수진이 나에게서 눈을 돌려 어둠 속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혼자 말하 듯 말했다.
  "남이 가는 대로 따라가면서 거기 섞여서 매일 매일을 살아가는 방법도 있어. 대개의 사람들은 그렇게 살면서 행복감을 느끼고 있겠지. 그런데 너나 나는 그렇게 살면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재능을 타고 나지 못하지 않았겠어. 그래서 나는 너를 좋아하는 거야. 나는 네가 파도가 심한 바다에서 나와 함께 같은 조각배를 타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그래서 나는 내가 언제나 너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아무래도 두 사람이 같이 가면 좀 쉬울 것 같다는 것이 내 생각이야. 어때?"
  윤수진은 말을 마치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수줍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네가 필요해. 나는 네 곁에 있고 싶어."
  나는 윤수진의 그 말에 가슴으로 뜨겁게 치밀어 오르는 진한 정을 느꼈다.
  어둠 속에서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가냘픈 가로등 불빛을 의지하고 윤수진과 나는 한참 침묵했다.
  그 침묵의 끝에 윤수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꼭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하듯이 너도 글을 써야 해. 나는 네가 글을 쓰는 것을 보고 싶어. 너에게 맞는 직업은 글을 쓰는 것이야. 지금 까지 살아 온 것을, 지금 까지 네가 생각한 것을 그대로 쓰는 거야. 솔직하고 진지하게 말이야. 아무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어. 내 생각을 내 멋대로 그냥 표현해 버리면 되는 것 아니겠어? 읽는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하는 따위는 일단 써 놓고 나중에 걱정해도 되는 일이야. 나도 그런 생각으로 그림을 그리는 거야."
  단념할 줄 모르는 윤수진의 말을 들으며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다시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마치 동면에서 깨어난 야수처럼 꿈틀거리며 내 마음 속에서 태동하고 있었다. 윤수진이 말하 듯 솔직하고 진지하게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모두 쓰고 싶다는 충동이 마음 속에서 꿈틀거리며 올라왔다.  그 때 그 검정 홀대바지 시절의 화산처럼 타오르던 반항심과 정의감이 마치 잊고 살던 고향의 솔 내음 처럼 내 가슴 속으로 치밀어 들어왔다.
  방안은 깜깜했다.  카펫 바닥에 무릎을 안고 앉은 윤수진의 옆 얼굴이 어쩐지 그 녀석 답지 않게 애잔하고 진짜 여자처럼 보였다.    
  한참이나 침묵하던 윤수진이 물었다.
  "너무 깜깜하다. 불 켤까?"
  "아니. 그냥 둬."
  나는 밝은 불빛에서 윤수진과 마주하기가 다소 두렵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렸다.
  윤수진이 잠잠해진 나의 기분을 살피다가 일어났다. 이럴 때에는 혼자 놓아두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 전에도 그런 일이 여러 번 있었으니까.
  "나, 집에 갈께."
  나는 말리지 않았다. 윤수진은 가까이 와서 나의 어깨를 쓰다듬어주고 아파트 문을 열고 나갔다.
  윤수진이 나간 문이 닫히고도 한참 동안을 나는 움직이지 않고 한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탕자가 고향을 찾아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오래 전에 밀고 나갔던 고향의 대문 앞에 다시 와서 가슴 두근거리며 서 있는 셈이었다.
  그렇다. 쓰자. 나는 속으로 외쳤다. 나라고 어찌 할 말이 없겠는가. 그 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쓰자. 윤수진 만큼 많이 변화 있게 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할 말은 많다. 그런 것들을  다 쓰는 거다.
  나는 어둠 속에 움직이지 않고 앉아서 다짐했다. 이 번에는 절대 항복하지 않는다. 윤수진 녀석 말마따나 내 글을 읽어줄 사람이 있건 없건 그 것은 전연 글을 쓰는 내가 개의할 사항이 아닌 것이다.

  거의 십년을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하고 개미처럼 일한 후 거의 같은 시각에 퇴근하면서 살았다. 앞뒤도 재지 않고 아무 생각도 없이 기계처럼 일하고 금요일마다 발급되는 봉급 수표를 받아서 쪼개 쓰면서 말이다. 그러다 직장에서 해고 당하고 그 굴레에서 벗어난 나는 며칠 동안 길 잃은 어린아이처럼 어쩔 줄 몰라 당황했다. 갑자기 파괴된 생활의 규칙이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든 것이다. 장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 내 가슴 한 구석에 자리 잡기 시작한 반면에 모순되게도 어떻게 그렇게 긴 세월을 한 직장에서 똑 같은 일을 답습하면서 살 수 있었는지 신기하기도 하고 그렇게 흘러가 버린 시간이 허망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한 가지 의심의 여지 없이 분명한 것은 내가 이런 상황을 닥뜨릴 때 이 윤수진이 옆에 없었더라면 내 마음이 말할 수 없이 처참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벽에 부딪치면 마치 독기를 품은 전갈처럼 표독스러워져서 그 벽을 부숴버리고 자기가 가고 싶은 길을 뚫어서 만들어 가고야 마는 녀석의 그 고집스러운 의지를 나는 녀석에게서 배워야만 했다.
  직장이 없어졌으므로 나는 회사 대신에 아침이면 녀석의 새로 임대한 집으로 출근하다시피 찾아갔다. 마당이 넓고 방이 네 개나 되는 집에는 할 일이 많았다. 우선 유홀 트럭을 일당으로 빌려서 창고에 들어 있던 윤수진의 그림과 짐들을 실어서 나르고 집 안에 적당한 장소를 찾아서 정리하는데 만도 일주일이 걸렸다. 윤수진이 산 몇 점의 가구가 배달되어 왔을 때는 그 위치를 잡아 주기도 하며 나는 말하자면 윤수진의 집 관리인 비슷한 사람이 된 것이다.
  네 개의 방중에서 가장 큰 마스터 베드 룸을 윤수진은 그림 그리는 아틀리에로 만들었다. 두 번 째 큰 방도 그림을 넣어두는 방이 되었고 가장 작은 뒤쪽의 방이 윤수진의 침실이 된 것이다. 중간에 남아 있는 꽤 큰 방을 보고 나는 윤수진에게 물었다.
  "이 방은?"
  윤수진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 방은 놔둬. 나중에 쓸 데가 생기게 돼."
  나중에 생각해 보니 이 고양이 같은 자식은 그 때 이미 내가 그 방으로 이사 올 것을 예견하고 비워둔 것이었다. 더구나 가장 작은 방을 자기 침실로 만들고 그 보다 큰 방을 비워둔 것은 말하자면 내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기 위한 짜식 나름의 배려였던 것이다. 여우 같은 놈.
  그리고 그 두 달쯤 후에 나는 녀석이 계획했던 대로 그 방으로 이사해 버리고 말았다. 망할 자식. 여우 같은 놈. 고양이 같은 놈.
  그렇게 공동 생활이 시작된지도 두 달쯤이 흐르고 매섭게 추웠던 뉴욕의 겨울이 물러나기 시작할 때 윤수진이 물었다.
  "너 모리스타운이 어디 있는지 아니?"
  "모리스타운? 모르겠는데. 왜?"
  "뉴져지 주의 모리스타운에 죽은 죠세프의 집이 있어. 내 그림이 걸려 있을 텐데 한 번 가보고 싶다."
  지도를 보며 한 오십 마일을 운전하여 찾아간 그 집은 밖에서 보기에도 우람스러운 성 같은 저택이었다. 입구에서 경비원이 신원 확인을 하고 약속이 되어 있느냐고 묻는 것으로 미루어 출입이 까다롭게 통제되어 있는 것 같았다.
  경비원이 구내 전화로 확인한 후 들어가도 좋다고 허가해 주었다.
  내가 건물의 입구에 차를 세우고 윤수진과 저택 입구로 들어서자 말쑥한 양복 차림의 남자가 뛰어나와서 윤수진을 환대했다.
  "저택 관리인이야."
  윤수진이 나에게 낮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이 관리인은 죠세프가 죽었을 때 샬리스에 와서 윤수진이 한 번 만난 적이 있다는 것이다.
  "하이, 수진. 에브리바디 워스 룩킹 훠 유. 회어 해브 유 빈? 모두 찾고 있었는데 어디에 있었습니까?"
  샬리스에 있는 제이콥이 꼭 찾으라고 간곡히 부탁해서 최근에 이삿짐 회사를 통하여 윤수진의 사물이 배달되었던 곳을 알아내어 연락해 보았는데 이미 보관했던 사물은 다 찾아갔고 어디로 이사했는지 알 길이 없었다는 것이다. 관리인은 친절하게도 제이콥과 칼로스 그리고 마리아가 모두 다 샬리스에 잘 있다고 전해 주었다. 이 뉴져지의 저택은 경매에 붙여져서 매각되면 거기서 나온 금액 중 일부가 죠세프 생전에 치료를 담당했던 병원에 기증되고 남은 부분은 적금 되어 매 달 일정 금액이 제이콥에게 지불되도록 유언 되었다고도 알려 주었다.
  "수진이 그린 그림 보고 싶습니까?"
  관리인은 친절하게 안내하여 수없이 전시되어 있는 그림들 사이에서 수진의 그림을 여러 점 찾아서 가리켰다.
  "아직도 후레임에 넣지 않은 그림이 이십 여 장 있습니다. 그림들이 아주 좋아서 취향이 높은 고객들이 고가에 매입해가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그림을 그릴 것이지요? 저희에게 갖다 놓으시면 콘사인먼트(위탁)로 판매해 드리겠습니다."
  저택 안에 훌륭하게 장식되고 전시된 미술품을 모두 둘러본 후 관리인에게 뉴욕의 집 주소를 알려 준 후 윤수진과 나는 밖으로 나왔다.  
  "놀라운 노릇이야. 소련에서 유태인 박해를 피해 무일푼으로 미국으로 도망 나왔다면서 어떻게 이런 엄청난 재산을 모을 수가 있었을까? 유태인은 모두 돈 벌이에는 귀재라더니 그 말이 맞는 모양이야."
  나는 그 저택의 웅장함과 풍부하게 전시되어 있는 미술품을 상기하며 혀를 내둘렀다.
  "아니, 그렇게 판에 박은 듯 말할 수는 없어. 죠세프의 아버지는 가난하게 살다가 가난하게 죽었거든. 샬리스에 좀 알고 있던 친구가 한 사람 있었는데 소련에서 도망 나왔을 때 그 나마 인연이라고 믿고 그 사람을 찾아가서 하인 노릇을 했대. 몹시 고생만 하다가 죽었다나 봐. 그걸 본 죠세프는 자기는 절대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결심했대. 그래서 어릴 때 부터 돈 버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했다는 거야. 돈이 죠세프의 신앙처럼 되어 버린 셈이야. 자기 아버지의 그런 이야기를 해주면서 죠세프는 내 앞에서 울었어. 성격이 몹시 강한 사람인데도 말이야. 언제 시간 날 때 죠세프와 그 아버지의 이야기를 해줄게."
  나는 차를 돌려 저택의 정문을 빠져 나왔다. 윤수진이 그 저택을 다시 뒤 돌아 보며 말했다.
  "시련은 인간을 단련시킨다고 했어. 유태인은 그런 편견과 시련 속에서 더 강해지고 더 질긴 생존 능력을 터득하는 모양이야. 죠세프는 가난하게 살다가 죽은 그 아버지의 어려움에서 자기가 살 길을 배운 셈이야."
   나는 궁금해서 물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가난했다면서 죠세프는 어떻게 그렇게 많은 돈을 벌게 됐어?"
  "처음에는 증권도 조금씩 사고 돈이 좀 모이면서 수입 업을 했다나 봐. 샬리스에 있던 아버지의 친구가 한국에서 가발을 수입해서 상당한 이익을 남기고 있는 것을 보고 그 것도 흉내를 좀 내봤대. 그러다 한국의 이름 없는 화가들에게서 유화를 수입해오기 시작하면서 미술품에 눈 뜨기 시작하고 그 분야에 타고난 재능이 있어서 전 세계의 경매장을 돌아 다니면서 진품 모조품 가리지 않고 사고 팔면서 거부가 된 거야. 그 사람이 미술품을 보는 눈은 천재야."
  "그런 눈으로 그 사람은 윤수진이라는 가능성에 가득찬 화가도 골랐군. 하마터면 빛 보지 못하고 그늘에서 없어져 버릴 화가를 말이야."
  내 말이 끝나자마자 마치 준비되어 있었다는 듯 윤수진이 말했다.
  "그리고 그렇게 하마터면 그늘에서 없어져 버릴 번 하다가 건져진 화가가 또 그렇게 하마터면 그늘에서 없어져 버릴 수 있었던 소설 쓰는 작가 하나를 건져내려고 하고 있고 말이야. 죠세프가 여러 사람에게 좋은 일 해준 거야."
  옆 좌석에서 윤수진이 말하고 해죽거리며 미소 짓는 얼굴이 내 눈 모서리에 들어왔다. 이 녀석의 재치와 장난기에 나는 할 말을 잃고 있었다.

  그렇게 모리스타운의 저택을 방문하고 돌아온지 한 달 반쯤이 지난 어느 날, 느닷 없이 윤수진의 집에 뜻밖의 방문객이 찾아왔다. 샬리스의 집을 관리하고 있는 칼로스 알바라도였다.
  "아니, 칼로스. 어떻게 여기를?"
  윤수진이 놀라서 물었다.
  "모리스타운에서 알려줘서 알았어요. 잘 지내고 있지요?"
  칼로스는 윤수진에게 이야기하면서 나를 힐끔 힐끔 경계했다.
  "참, 내 친구예요. 이 철수. 여기서는 챨스라고 불러요."
  나는 웃으며 손을 내밀어 칼로스에게 악수를 청했다. 어색하게 내 손을 잡으며 칼로스가 윤수진에게 물었다.
  "결혼을 하셨군요?"
  윤수진이 일부러 크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 결혼한 게 아니예요. 우리는 그저 친구예요. 서로 작품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는 친구예요."
  "아, 그렇군요. 결혼한 게 아니군요."
  어쩐지 칼로스의 태도에는 다소 어색스러운 데가 있었다.
  "우리는 오늘 아침에 도착했어요. 모리스타운에 가서 관리인을 만나보고 호텔에서 좀 쉬었다가 여기에 온 거예요."
  칼로스가 말했다.
  "우리라고?"
  주저하다가 칼로스가 말했다.
  "네, 사실은 제이콥이 차에 있어요. 같이 들어오자니까 우선 자기가 왔다는 것을 수진에게 알려주라고 했어요. 괜찮다고 하면 들어오겠대요."
  "아, 제이콥이."
  윤수진은 놀라서 숨을 들이쉬었다.
  "지금, 밖에 있어요?"
  "네.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데리고 들어와도 괜찮을까요?"
  "물론. 물론 괜찮지요. 내가 나가서 데리고 오겠어요."
  윤수진이 다소 흥분해서 밖으로 나가자 칼로스가 허둥지둥 그 뒤를 따랐다.
  거실에 혼자 남은 나는 밖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귀추를 주목했다. 잠시 후에 윤수진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현관 문이 열리고 모두 들어왔다.
  제이콥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는 키가 크고 뼈가 드러나 보일 만큼 마른 사람이었다. 하얀 피부에 손가락이 긴 손에는 금발의 털이 수북하게 나 있었다. 살이 없고 병적으로 예민해 보이는 창백한 얼굴에는 눈만이 살아서 이상스럽도록 광채를 내고 있었다. 제이콥은 나를 보자 내가 예상했던 대로 경계심을 보이며 어색하게 주춤거렸다.
  나는 윤수진이 소개해줄 때를 기다리지 않고 미소 지으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나는 챨스예요. 제이콥에 대해서는 여러 번 말 들었어요. 먼 길 오셨군요."
  가급적이면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려 했지만 제이콥의 굳은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윤수진이 말했다.
  "앉아요. 모두 앉아요. 레츠 싯 다운."
  모두 의자에 앉고 뭔가 할 말을 찾는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제이콥은 눈을 아래로 깔고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버디가 죽었어요."
  제이콥의 가장 가까운 친구 그 키 큰 개 버디가 죽었다는 것이다.
  "아니, 어떻게?"
  "나이가 많이 들었어요. 열 다섯 살에 죽은 거예요."
  나는 윤수진이 그 말을 듣고 제이콥과 함께 가슴 아파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안됐어요. 아이 엠 쏘리 투 히어."
  "할아버지하고 아버지 곁에 묻어줬어요. 어머니하고 거기 다 같이 있어요."
  "제이콥. 잘 했어요. 정말 잘 했어요."
  윤수진은 제이콥에게 말하고 나서 칼로스에게 물었다.
  "샬리스의 집은 그대로 잘 있지요?"
  칼로스가 난감한 표정으로 주저하다가 말했다.
  "네, 수진. 그런데 너무 커서 우리는 아주 작은 부분만 사용하고 있어요. 그래서 사용하지 않는 대부분의 집이 점점 유령이 사는 집처럼 변해가고 있어요. 그 사용 안하는 쪽으로는 가기가 무서워요."
  언제나 처럼 다소 미신적인 칼로스의 목소리에 두려움이 들어 있었다.
  "스타인버그씨 유언장에는 그 집을 샬리스 시에 기증하도록 지시했다는데 시에서는 그 큰 집의 용도도 없을 뿐더러 관리할 예산도 없다고 받기를 거절했다지 않아요. 변호사들이 뭔가 처분하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는 모양인데 아직도 별 수가 없는 모양이에요."
  "뒷마당에 있는 묘지는?"
  "그건 잘 모르겠어요. 내 생각에는 대지가 넓으니까 시에서 관리하는 공원으로 만들면 좋을 것 같은데 그 것도 시에서는 유지 관리비 때문에 꺼리는 모양이예요. 공원으로 만들면 묘지를 그 자리에 그냥 두어도 될 텐데 말이예요."
  적당하게 잘 맞아 들어가는 자리에 적당하게 잘 맞아 들어가는 것이 있어야 어울리고 돋보이는 것이다. 엉뚱한 작은 마을에 엉뚱하게 자리 잡고 있는 그 대저택은 가난하게 죽은 아버지에 대한 보상 작용과 그런 아버지를 하인배 다루듯 했던 친구라는 사람에 대한 죠세프의 복수는 될 수 있었을지언정 그 이외에는 아무 의미도 없고 아무 용도도 없는 무용 지물인 것이다.
  오가는 말을 들으며 침묵하던 제이콥이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수진, 다시 샬리스로 갈 수 없어요?"
  윤수진이 난처한 표정이 되어 망서리다가 말했다.
  "제이콥, 나는 여기서 살기로 작정했어요. 더구나 여기 챨스도 같이 있고, 우리는 여기서 더 공부하면서 창작을 하고 싶어해요."
  제이콥이 또 한참 입을 다물고 할 말을 생각하는 듯 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수진은 저 분과 결혼할 건가요?"
  윤수진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그럴 생각이예요. 그렇게 될 것 같아요."
  윤수진은 여운을 남기며 결말 없는 말로 안타까운 기대감을 남기는 것보다는 어렵지만 차라리 단 한 번으로 종결 짓는 것이 현명한 길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제이콥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는 탁자를 내려다 보며 한참을 아무 말 안하고 앉아 있다가 마침내 천천히 일어나서 윤수진에게 말했다.
  "나는 그럼 샬리스로 돌아가요. 수진, 잘 있어요."
  제이콥은 미처 윤수진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처진 어깨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칼로스가 나에게 작별 악수를 청한 후 윤수진의 손을 잡고 나직이 말했다.
  "잘 했어요. 아주 잘 했어요. 이제 더 이상 수진 이야기를 하지 않을 거예요. 아주 단념시킨 것은 잘한 일이예요."
  칼로스가 나가고 잠시 후 자동차 소리가 멀어졌다.  
  윤수진이 창백한 얼굴로 돌처럼 앉아 있었다. 나는 그 윤수진의 옆으로 가서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그 하얗게 핏기 없는 얼굴의 윤수진을 보며 나는 문득 똑같은 모습으로 내 앞에 앉아 있던 그 먼 옛날의 윤수진이 생각났다. 그 때도 그런 얼굴로 앉아 있었다.
  감당하기 힘든 어려운 일에 부딪치면 전갈처럼 독기를 품고 냉정해져서 차곡차곡 헤쳐나갈 길을 찾는 여자. 한 마디의 말도 없이 꼭 다문 두 입술에 타고 넘을 수 없는 결의가 서려 있는 여자. 곤경에 맞닥드리면 이상하도록 강해지는 여자.
  나는 그 때 그 치욕적인 일이 있은 후에 보았던 똑같은 그 윤수진의 얼굴을 지금 또 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 때, 그러니까 십년도 전에, 설악산에서의 그 강간 사건이 있은 후 내 눈 앞에서 잠적한 윤수진을 나는 몇 개월이나 찾으며 돌아 다녔었다. 윤수진이 잘 가던 화랑가를 이 잡듯 뒤지기도 했고 명동의 꽃 다방, 심지 다방, 학사 주점, 디쉐네 음악실, 시보네 음악실, 종로의 모든 책방 등 나는 넋 나간 사람처럼 오만 군데를 들락거렸다. 하루에도 똑 같은 곳을 다섯 번, 여섯 번씩 들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디쉐네 음악 감상실에 앉아 있던 김현석이를 만나서 우리는 대낮 부터 명동 꽃 다방 맞은 쪽 지하실에 있는 학사 주점으로 가서 막걸리 한 되를 놓고 앉았다. 김현석이는 나의 눈을 받지 못하고 계속 탁자만 내려다 보고 있었다.
  "미안해, 철수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김현석이 말했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그의 따귀를 갈겼다.
  "욱"
  소리를 냈지만 심성이 착한 김현석은 반항하지 않았다. 그저 머리를 숙이고 잠자코 있었다.
  옆에 있던 다른 손님들이 힐끔 힐끔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이 새끼야, 너는 타고 누를 여자가 없어서 우리가 동지라고 부르는 수진이를 강간한 거야?"
  내가 막걸리를 큰 사발로 두 번씩이나 따라서 비우는 동안 김현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앉아 있었다. 고통을 담은 커다란 눈이 굵은 안경 속에서 꿈벅거렸다.
  사이를 두지 않고 거푸 들이킨 막걸리가 내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말 해. 잠자코 있지 말고 말해. 왜 그런 저질 행동을 했는지 말하란 말이야."
  소리 지르고 있는 내 목소리가 내 귀에도 공허하게 들렸다. 무엇을 말하라는 말인가? 도대체 말 할 것이 무엇이 있다는 말인가? 그 때 허기진 배에 절제하지 않고 마셔댄 소주도 문제였고 물에 젖은 옷 속에서 도발적인 윤곽을 드러냈던 윤수진의 몸도 문제였다. 지금 김현석을 질타하지만 사실은 나도 강간하고 싶었다. 나도 타고 누르고 윤수진의 옷을 갈기갈기 찢어내고 그 벗은 몸 속으로 미친 듯이 함몰되어 들어가고 싶었다. 그렇게 하지 않았던 나와 그렇게 했던 김현석의 차이는 무엇인가? 사랑? 웃기지 마라. 그런 것은 없다. 욕망을 외면하고 기피했던 나의 위선과 그 욕망이 시키는 대로 부딪쳐서 행동했던 김현석의 현실적인 진실. 과연 나는 김현석을 단죄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취기 오르는 머리 속이 혼돈스러워서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고개 숙인 김현석을 한참이나 보고 있다가 참지 못하고 낄낄거리며 웃었다.
  갑작스러운 웃음에 김현석이 놀라서 눈을 들었다.
  "현석아, 네가 잘 한 것인지도 몰라. 나도 사실은 하고 싶었거든. 나는 너만큼 정직한 용기가 없었다는 것이 다른 점일 뿐이야. 네가 네 욕망이 시키는 대로 했던 것이 차라리 정직한 행동이었는지 모르겠어."
  나는 취기에 휘청거리면서 학사 주점을 나와 버렸다. 그 것이 김현석을 본 마지막 날이었다.
  그리고 가을이 끝나고 뺨에 와 닿는 바람결이 매서워 지기 시작하는 계절이 오면서 나는 윤수진을 찾는 일을 포기했다.  
  학교에서 퇴학 당하고 무직자 생활을 한지도 몇 개월이 지난 어느 날 나는 영어로 발간되는 신문에 난 구인 광고를 보고 토마스 앤드 하딩이라는 미국 합작 회사에 가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한 인터뷰를 한 후 나와서 특별히 갈 곳이 없었으므로 도심을 배회하다가 별 생각 없이 명동의 심지 다방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그런데 아, 거기에서 나는 뜻밖에도 문쪽으로 뒷모습을 보이며 혼자 앉아 있는 윤수진을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여 나는 숨듯 계단쪽으로 되돌아 나와서 뛰는 가슴을 누르며 내 감정을 다스렸다. 윤수진에게 무엇이라고 먼저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 불결한 날의 강간 사건을 내 입으로 먼저 끄집어내서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내 더러운 마음 한 구석에는 그 날 내 눈 속으로 아프게 파고 들었던 윤수진의 벌거벗기워진 하반신의 육감적인 곡선이 생생하게 남아서 나를 괴롭혔다.
  한참을 밖에서 서성거리며 마음을 진정시키다가 나는 마침내 다방 안으로 들어가 아무 소리하지 않고 윤수진의 맞은 편 의자에 앉았다.
  나를 본 윤수진은 호수면에 던져진 돌에 잔잔한 물결이 일듯이 다소 흔들리는 눈빛을 보이다가 잠잠해졌다. 그리고 아무 말도 없었다.
  나도 두려운 마음으로 입을 열 수 없어서 침묵했다.
  우리 둘은 그렇게 말 없이 오래 동안을 같이 앉아 있었다.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을 뿐이면서도 우리는 따로 아주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창백한 얼굴의 윤수진은 그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앞을 보고 있는 그 눈도 아무 것도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두려워서 말을 꺼낼 수가 없었고 윤수진은 아마 아무 것도 말할 것이 없었기 때문에 입을 다물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윤수진의 텅 빈 눈을 두려운 마음으로 훔쳐 보면서 나는 무엇이건 적당한 변명이나 사죄의 말을 찾아서 해내려고 애썼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마음은 서로 다른 먼 곳에 놓아두고 같이 앉아서 침묵하다가 윤수진은 일어나서 다방을 나가버렸다.
  나는 붙잡지 않았다. 붙잡을 용기가 없었다.
  그날 보았던 백지장처럼 창백한 얼굴을 나는 오늘 또 본 것이었다.

  "버디! 제이콥!"
  제이콥이 다녀가고 일주일쯤이 지난 어느 날 밤 윤수진이 소리쳐 부르는 소리에 나는 내 방에서 자다가 화닥 놀라서 눈을 떴다. 잘못 들었나 생각할 겨를도 없이 윤수진이 또 소리쳤다.
  "버디! 어디 가? 제이콥!"
  나는 윤수진의 방으로 뛰어갔다. 내가 방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과 거의 동시에 침대에 누워 있던 윤수진이 숨가쁘게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리고 뛰어 들어오는 나를 멍한 눈으로 보았다.
   "무슨 일이야?"
  잠시 멍해서 있던 윤수진이 정신을 차리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말했다. 얕은 잠결 속에서 마치 현실인 것처럼 느껴지는 선명한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끝 모르게 뻗은 샬리스 국립 공원의 무성한 나무숲 속으로 키 큰 버디가 힘차게 뛰어가고 그 뒤를 제이콥이 따라서 뛰었다. 윤수진이 부르자 둘이 동시에 돌아보고는 그대로 뛰어서 무성한 나무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윤수진이 그런 꿈을 꾼 후 두 주일쯤이 지났을 때 샬리스에서 한 통의 편지가 왔다. 윤수진은 그 편지를 뜯어보더니 눈물을 펑펑 쏟으며 울었다. 좀처럼 우는 것을 본 적이 없었으므로 나는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윤수진이 내밀어 주는 편지를 읽었다.  그 것은 칼로스 알바라도가 서투른 영어로 쓴 편지였다.

  수진,
  수진의 집을 다녀온 후 제이콥은 말을 잃고 매일 하루 종일을 자기 방에 갇혀서 지내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혹시라도 또 발작이 일어날까 봐 긴장해서 항상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제이콥이 행방불명이 되어서 마리아와 함께 찾으러 다녔는데 마침내 수진의 그림 아틀리에에 목매어 죽어서 매달려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하느님. 전능하신 하느님, 제이콥의 앞 길에 축복을 내리소서. 우리는 경찰에 신고하고 모리스타운의 관리인에게도 전화로 알렸습니다.
  이 집에서는 우리가 더 이상 무서워서 살 수가 없습니다. 인자하신 스타인버그 씨가 많은 금액을 저희들에게 남겨주셨습니다. 이 재산을 가지고 우리는 다시 멕시코의 우리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항상 성모 마리아의 따뜻한 손길이 모든 일을 잘 돌보기를 기원합니다.
  칼로스와 마리아 알바라도

  나는 다 읽은 편지를 소중하게 접어서 윤수진에게 되돌려 주었다. 윤수진은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고 마치 넋 나간 사람처럼 허공을 응시하며 앉아 있었다. 나는 그 곁에 가서 앉아 어깨를 끌어안고 위로했다.
  "나 좀 일으켜 줘. 내 침대에 눕혀줘."
  나는 윤수진을 부축해서 침대로 가서 눕혔다.
  "문을 닫아줘. 나 혼자 있게 문을 닫아줘."
  나는 방을 나와서 문을 소리 안 나게 닫고 거실로 가서 앉았다. 서쪽을 향한 창문을 통해서 쏟아져 들어오는 석양이 빨갛게 불타는 것처럼 거실 전부를 물들이고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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