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진아, 수진아 (제 3 회)

2012.10.28 07:30

김영문 조회 수:223 추천:35

수진아, 수진아 (제 3 회)

(4)

여자의 처녀성에 대해서 까달스럽게 구는 것은 구시대적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남녀 평등의 시대를 살면서 여자의 처녀성에 대해서만 왈가왈부하고 남자의 동정에 대해서는 관대하다는 것은 형평성의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가 말이다. 그러나 여자의 처녀성에 대해서 구태여 언급해야 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정신적 결합 없이 이루어진 성교에서 여자는 처녀성을 상실하지 않는다. 흔히 말하는 처녀막의 파손 여부로 처녀성을 가려내던 구시대적 사고 방식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녀석은 멍텅구리라고 생각한다. 본인의 의사에 관계없이 강압적 힘에 의해서 이루어진 성교로는 여자의 처녀성을 파괴할 수 없다. 정신적으로 일체가 되고 감성과 사랑으로 합일하여 이루어지는 결합이라야만 진정한 의미의 처녀 결합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치 고문에 의한 자백이 진정한 자백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강압적으로 이루어진 성행위가 진정으로 처녀성을 파괴하는 행위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나는 그렇게 굳게 믿고 있다. 그리고 나는 윤수진도 그렇게 생각하고 그 때 있었던 그 치욕적인 사건에서 정신적으로 큰 타격이 없었기를 바란다. 나는 윤수진이 나의 아파트에서 나와 가슴을 열고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팔 안에서 떨고 울면서 결합했던 그 순간을 진정 자기의 처녀성을 남자와 함께 나눈 순간이라고 생각해 주기를 절실히 바란다. 육체적 교감이 있기 전에 정신적 교감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강렬하게 밀착된 정신적 교감만으로도 남녀 사이에는 성교 이상의 관계가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둘만이 알고 정신으로 은밀히 서로를 밀통하며 즐길 수 있는 친구를 가질 수 있다면 그 것은 대단한 행운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토요일 밤이 깊을 때 까지 우리는 마시고 떠들고 울고 웃고 성교했다. 우리는 마치 사막에서 사경을 헤매다가 만난 것처럼 육체적으로 또 지적으로 치사 상태에서 서로를 갈구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받아들여주지 않는 사회에서 아무리 애써서 만들어 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작품을 내놓던 우리 둘은 그래서 더 할 이야기가 많이 있었다. 한 마디 좋은 평을 받아보지 못했으면서도 아직 포기하지 않고 그림을 그려대고 있는 윤수진을 보면서 나는 일찌감치 백기를 날리고 항복해 버린 나 스스로가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윤수진은 지금 나보고 또 글을 쓰라고 하지 않는가? 남이 알아주고 인정해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은 더 중요하다는 거다. 이 짜식은 나보다 훨씬 강하고 질긴 놈이다.
윤수진과 나는 전날 밤 과음으로 숙취를 느끼면서 일요일 늦은 아침까지 잠을 자고 눈을 떴다. 빈틈없이 밀착된 윤수진의 몸이 비단결처럼 내 온 몸에 감미롭게 감겨 있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전연 이룰 수 없는 꿈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머리 속으로 상상하고 동경하기만 했던 녀석이 이렇게 실제로 내 옆에 있다는 사실을 나는 녀석과 같이 누워서 녀석의 벌거벗은 피부를 온몸으로 느끼면서도 아직도 믿을 수 없었다.
녀석의 보드라운 손이 내 가슴을 어루만졌다. 나는 내 허벅지 근처에서 까실 까실 느껴지는 녀석의 음모에 다시 욕정을 느끼고 몸을 일으켜 녀석의 위로 올라갔다.
"또?"
녀석이 속삭이듯 말하고 후후 웃었다. 녀석도 싫지 않은 모양이었다.
또 한 차례의 길고 부드러운 격정이 지나가고 나는 녀석의 긴 머리카락 속에 얼굴을 묻고 심호흡하며 머리 냄새를 맡았다.
"그, 샬리스던가 하는 데서 살던 이야기를 해줄 수 있어?"
녀석의 몸이 다소 경직되는 것 같았다.
"나중에 하면 안 돼?"
"지금 듣고 싶은데."
윤수진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한국에 있을 때야. 신사동 화랑에 서양화 전시회가 있다고 해서 구경 갔었어. 그 때 거기서 그 노인을 만났어. 이름은 죠세프 스타인버그였어."
"그게 언제쯤 이었어?"
"그러니까, 너희들하고 헤어진지 한 반 년쯤 지났을 때였어. 허기진 배를 끌어안고 미친 것처럼 그림만 그려대고 있던 시절이야."
사람의 관계는 묘한 것이어서 별 이유도 없이 끌려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특별한 이유 없이 배척하고 싶은 사람도 있다. 그 죠세프 스타인버그가 윤수진을 보고 한 눈에 끌려 버린 것도 말하자면 그렇게 특별히 꼬집어서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이유 때문이었지 않을까 짐작하는 수 밖에 없겠다.
"나하고는 나이가 너무 차이 나는 할아버지였기 때문에 나는 그 할아버지의 호의 어린 눈이 나를 이성으로 보고 있다고는 상상할 수가 없었어. 어떤 작가의 그림을 보고 있는데 다가와서 그림을 좋아하느냐고 물었어. 그렇다고 그랬지. 그랬더니 그 때 내가 보고 있던 그 그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거야.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답했어. 그 그림은 혼이 들어있지 않은 영화 간판 그림 같다고 말이야. 그랬더니 그 할아버지가 와그르르 웃더니 너무나도 맞는 말이라는 거야. 그렇게 해서 갑자기 친해졌어."
그렇게 해서 알게 된 죠세프는 예술품 수집가이고 미술 평론가였다는 것이다. 한국에는 동양화를 구경하러 왔었다는 것이다. 몇 번 만나는 사이에 그 죠세프는 윤수진도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한 번 그림을 보자고 해서 자기가 그린 그림 몇 점을 들고 카페에서 만나서 보여 줬다는 것이다.
"그 때, 처음 내 그림을 봤을 때 그 사람의 표정을 나는 잊지 못할 거야."
윤수진이 눈을 반짝 빛내며 말했다.
"어땠는데?"
"아무에게도 주목 받지 못했던 그림인데 그 사람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아무 말 없이 한참을 뚫어지게 보았어. 그러더니 빨간 색이 몹시 인상적이라고 말했어. 그건 빈쎈트 반 고흐의 노란색이 주는 전율과 흡사하다고 했어."
빨간 색. 나는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그 전에 본 녀석의 그림에도 유독스레 빨간 색이 많이 들어가 있었다는 기억이 났다.
"수진아, 혹시 네 그림에 들어 있는 그 빨간 색이 너 어릴 때 마을에 왔던 행상에게서 얻었던 빨간 사과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엄마에게 보여 주려고 급히 뛰어가다 퇴비를 만드는 구덩이 속에 빠트렸다는 그 사과 말이야."
윤수진의 몸이 긴장하며 숨을 멈추었다. 그렇게 잠시 있다가 말했다.
"그럴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너는 직관력이 있어서 그걸 얼른 짚어내는구나. 너는 역시 글을 써야 해."
"본인이 스스로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을 옆 사람이 더 잘 알 수도 있는 것일 뿐이야."
"내가 왜 그렇게 빨간 색에 끌리고 있었는지 이제 알게 된 것 같아."
"그런 후 그 사람과는 어떻게 됐어?"
"한, 한 달 동안을 같이 다니면서 미술관과 그림 전시회를 순례했어. 그러면서 내 그림을 여러 점 보고 비판을 해줬어. 마침내 가족 사항을 물어보더니 내가 독신이라는 것을 알고는 자기도 아내와 사별하고 혼자 사는데 자기와 결혼해서 미국으로 가자고 했어. 결혼하는 것이 가장 빨리 미국으로 들어가는 길이라면서 말이야. 더 열심히 그림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겠다는 거야. 그 결혼은 말하자면 사랑으로 된 결혼이 아니었어. 나도 그렇고 그 사람도 그렇고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이루어진, 어쩌면 타산적인 결혼이었던 거야. 그리고 그 사람은 처음부터 말했어. 자기는 성적으로 무능력하기 때문에 수녀가 되는 기분으로 결혼해야 한다고 말이야."
"그래서 너는 결혼을 승낙했단 말이지?"
"나는 그림을 더 공부하고 싶었어. 그 사람이 약속하는 모든 것이 내가 꿈처럼 그리고 있던 것이었어. 미친 것처럼 하루 종일 그림만 그릴 수 있다는 것에 나는 더 아무 것도 물어볼 필요가 없었어. 더구나 그렇게 천덕꾸러기처럼 한 번도 좋은 평을 받아보지 못했던 내 그림들을 그 사람은 무슨 대가의 명화나 되는 것처럼 소중하게 다루면서 도무지 이런 그림들이 빛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어. 나는 내 그림들이 미국이라는 다른 풍토에서는 이해되고 인정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졌던 것도 사실이야. 그림이 좋아서 그리면 그만이기는 하겠지만 다른 사람에게서 인정 받을 수 있다면 더 좋은 일 아니겠어?"
그렇게 해서 윤수진은 그 돈 많은 유태인 노인과 결혼한 후 아이다호 주에 있는 샬리스라는 도시로 이사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너는 그림 공부를 해서 좋았겠지만 사랑도 없는 사이에 결혼해서 너를 미국으로 데리고 온 그 노인은 그렇게 해서 무슨 이득이 있었지?"
나는 좀 심술궂은 마음이 되어 물었다.
"나도 그런 생각을 했지. 아무 이득도 바라지 않고 순수한 마음으로 호의를 베풀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잖아."
윤수진은 그렇게 말하면서 침대에서 일어나 내가 주었던 헐렁한 잠옷을 입고 의자에 앉았다.
"그런데 그렇게 득실만 따지자면 사실은 그 할아버지가 더 많은 이득을 본 셈이 되어 버렸어."
"어떻게?"
"나에게 이런 그림을 그려라, 저런 그림을 그려라, 주문을 많이 했었거든. 그런데 그 것이 꼭 내 그림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만 그랬던 것은 아니었어. 그렇게 그린 그림들이 많이 팔려 나가고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지 뭐야. 나는 더 좋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그 할아버지는 사실은 내 그림이 더 잘 그려져서 더 많은 돈이 되어 들어오는 것이 목적이었던 거야. 잘은 모르지만 내 그림들은 그 할아버지에게 금전적으로 꽤 많은 이득을 가져다 준 것 같아. 무슨 그림을 어디에 얼마씩에 팔았다는 말은 전연 나에게 해주지 않았지만 말이야. 나는 나도 모르게 상업 화가가 된 셈이야."
의자에 앉아 맨 팔을 드러내며 머리를 쓸어 넘기는 윤수진의 얼굴에 희미하게 자취를 남기는 자조적 미소를 나는 놓치지 않고 감지했다.
“그리고 나를 샬리스에 데려다 놓은 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던 것 같아. 미리 계획되었던 것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윤수진이 다소 주저하다가 말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해줄께.”
나는 어쩐지 윤수진의 개인 영역을 너무 침범해 들어가는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죠세프는 샬리스 말고도 뉴욕 시 근교의 뉴저지 주에 성처럼 큰 저택도 가지고 있었어. 거기에 엄청나게 많은 그림과 조각품, 골동품 등을 수집해서 전시해 놓고 도매상들을 상대로 판매하고 있었어. 나도 한 번 가봤는데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작품들이 벽마다 빈 자리 없이 걸려 있고 방마다 넘칠 것처럼 가득 차 있었어. 거기서 나는 내가 그린 그림들도 여러 점 걸려 있는 것을 보았어."
"화가의 그림이 수집가나 수요자에게 팔려 나간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야. 잘못된 일도 아니고. 사실은 그렇게 사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화가의 성공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는 것이기도 해."
나는 마음 뒤쪽 구석으로 다소의 질투심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황망히 그 나쁜 생각을 뿌리쳤다.
윤수진은 의자 위에서 두 무릎을 안고 물끄러미 꼼지락거리는 자기 발가락을 내려다 보며 말했다.
"그 중에는 내가 너를 생각하면서 그린 그림도 있었어. 그 그림은 절대 내 손을 떠나면 안 된다고 선언했었는데도 미처 다 완성시키기도 전에 없어져 버리고 말았던 거야."
"나를 생각하면서 그린 그림이라고?"
"진심이야. 진짜 너를 생각하면서 그린 그림이야. 우리 같이 다니던 시절을 생각하면서 그렸어. 추상화야. 우리가 그 때 우리 스스로를 이름 붙였던 대로 제목은 피스닉 (PEACENIK)이라고 붙였어. 궤도를 벗어나서 살긴 했지만 우리는 평화를 사랑했거든. 그렇지? 나는 언젠가는 너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 때 네게 줄 선물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렸어. 12호 정도 되는 소품이야. 그런데 그 그림이 없어진 거야."
"그래서? 그 그림이 어떻게 됐어?"
"죠세프가 가지고 가서 뉴저지의 그림 전시장에 팔겠다고 걸어 놓았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됐어. 죠세프는 그 그림이 내가 그 동안 그린 그림 중에서 가장 잘 된 걸작이라고 했어. 완성 품이 아니니까 도로 가지고 오라고 했지만 죠세프는 더 손 댈 곳이 없다고 했어. 더 손을 대면 그림이 망가진다고 했어."
"어떻게 됐어? 그 그림이, 그 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팔려 나갔어. 마이애미에 사는 은퇴한 어떤 돈 많은 미망인이 사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누군지도 모르고 확인할 길도 없었지만 말이야."
"그 샬리스라는 곳에서 살던 이야기를 더 해봐. 더 듣고 싶어."
나는 윤수진이 그림 공부하면서 이 죠세프라는 할아버지와 같이 살았던 샬리스에서의 생활에 대해서 더 알고 싶었다.
"노인과 단 둘이 살면서 굉장히 외로웠을 텐데."
"아니, 미친 것처럼 그림만 그려대고 있었기 때문에 외로움을 느낄 겨를 조차 없었다고 말할 수 있어. 그리고 그 집에는 노인의 아들이 같이 살고 있었어. 교통 사고로 머리를 다쳐서 집에서만 살고 있는 아들인데 나보다 나이가 네 살 많았어. 이름이 제이콥이었어. 평소에는 아주 착하고 내게도 친절하게 잘 해줬는데 이따금 좀, 사나워질 때가 있었어."
"사나워지다니?"
"교통 사고로 머리를 다치고 수술을 여러 번 받았다던데 그 후유증이었던 것 같아. 착하고 기타도 잘 치는 섬세한 성격이었는데 불쌍하게 되어 버렸어."
윤수진이 눈을 내리깔고 조용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그리고 집을 돌보는 노부부가 있었어. 멕시코에서 이민 온 사람들이야. 칼로스 알바라도하고 그 부인은 마리아였어. 그림을 그릴 때 이외에는 나는 이 두 사람과 거의 생활을 같이 하다시피 했어. 죠세프는 뉴저지에 있는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훨씬 더 많았어. 샬리스에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와서 며칠씩 묵다가 가곤 했으니까."
윤수진의 눈이 샬리스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겨울에는 밖에 나갈 수 없을 만큼 무척 추운 곳이야. 한국을 떠나서 거기 도착한 것은 무섭도록 추운 11월 밤이었어.........."

(5)

"디스 이스 어 콜드 랜드.”
샬리스의 집안 살림을 도맡아서 하고 있는 칼로스 알바라도가 운전하는 대형 캐딜락 부롬 승용차 뒷좌석에 널찍하게 자리잡고 앉은 죠세프 스타인버그가 차창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밖에는 사나운 바람이 불어대면서 눈보라가 미친 것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이따금 그 큰 캐딜락 차가 바람을 타고 휘청거렸다. 운전대를 잡은 칼로스는 가로등 없는 길에서 두 줄기 헤드 라이트에만 의존하면서 눈보라에 가려서 짧아진 시야를 긴장해서 응시하며 조심스럽게 차를 몰았다.
“크레이지 웨더. 미친 날씨야. 그러나 항상 이런 것은 아니야. 좋은 날도 많아.”
뒷좌석 죠세프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두려운 눈으로 창 밖만 내다보고 있는 윤수진을 안심시키기 위해서인지 죠세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한참 만에 당도한 죠세프의 집은 겉에서 보기에도 엄청나게 컸다. 드넓은 대지 위에 육중한 돌로 벽을 만들고 우뚝 선 저택은 아무리 거센 광풍이 불어도 끄떡 없을 것처럼 위엄 있게 보였다.
칼로스가 차 안의 원격 스위치를 눌러 차고 문을 열자 자동적으로 차고 안의 불이 환하게 켜지고 캐딜락은 미끄러지듯 안으로 들어가서 멈추었다. 차고는 대형 차가 네 대 들어갈 수 있도록 광활하게 넓었고 이미 고급 차 세 대가 주차해 있었다.
칼로스가 다시 스위치를 눌러 차고 문을 닫자 밖에서 아우성치고 있는 눈보라와 회오리 바람 소리가 차단되어 뚝 멎었다. 눈으로 보기에도 두터워 보이는 차고 문은 방한 방음 장치가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운전석에서 얼른 내려온 칼로스가 윤수진 쪽의 차문을 열어 주었다. 차에서 내리는 윤수진의 손을 잡아주며 칼로스가 말했다.
“베리 코울드. 매우 춥지요?”
윤수진은 어색하게 미소하고 넓고 천정이 높은 차고 안을 둘러 보았다. 그 것은 차고라기보다는 그 대로 독립된 하나의 집처럼 보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벽에는 돌아가며 빈틈없이 크고 작은 유화와 수채화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놀란 눈으로 그 그림들을 둘러보는 윤수진에게 칼로스가 미소하며 말했다.
“미스터 스타인버그는 그림과 예술품을 좋아합니다. 그 것들은 스타인버그씨의 생명이고 또 비지네스이기도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더 알게 되겠지요.”
집에서 차고로 통해 있는 문간에 여자가 서서 휘둥그레 뜬 눈으로 윤수진을 보고 있었다. 칼로스의 아내 마리아였다.
“유 아 투 영.”
할아버지 죠세프 스타인버그와 결혼했다는 윤수진을 보고 마리아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해 속삭였다. 칼로스가 황망히 마리아를 막으며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쏘리. 미안해요.”
마리아가 얼굴을 붉히며 당황해서 말했다.
차에서 내려 뒤따라온 죠세프가 윤수진과 마리아를 소개했다.
“앞으로 좋은 식구가 되고 또 친구가 되어서 지내게 될 사람들이야. 마리아와 칼로스는 나와 이 집에서 같이 산지가 삼십 년도 넘었어. 둘이 이십 대에 결혼한 후 줄곧 나와 함께 살았으니까.”
앞장서는 죠세프를 따라서 집안의 리빙룸으로 들어간 윤수진은 또 한 번 놀랐다. 집안의 고급 장식장과 선반등에는 빈 자리가 없을 만큼 조각품과 골동품이 가득 전시되어 있었고 벽에는 웅장한 장식 액자 속에 든 그림이 수도 없이 걸려 있었다. 그 것은 높은 천정과 어울려 마치 예술품 박물관에라도 온 듯 압도하는 힘을 가지고 윤수진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경이의 눈으로 모든 것을 숨죽이고 둘러보는 윤수진에게 죠세프가 말했다.
“그림을 구상하고 작품을 만들 수 있는 분위기는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해. 이제 수진이 할 일은 재능을 발휘해서 좋은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 뿐이야. 이렇게 문명과 속물의 세계와 차단된 곳에서는 틀림없이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을 거야.”
영어가 서툰 윤수진을 위해서 죠세프는 노인 특유의 참을성을 가지고 천천히 말했다.
“오늘은 피곤할 테니까 올라가서 쉬고 내일 수진이 쓸 아틀리에를 둘러보기로 하지.”
죠세프의 말을 들으며 주위를 둘러보던 윤수진은 저쪽 멀리 떨어진 곳에 숨듯이 한쪽 무릎을 꿇고 웅크리고 앉아서 자기를 보고 있는 창백한 얼굴의 청년을 발견했다. 그 청년은 상당히 큰 개의 목을 안고 쓰다듬고 있었다.
윤수진의 눈을 따라 시선을 돌린 죠세프가 그를 발견하고 불렀다.
“아, 제이콥(JACOB), 이리 와. 여기 새로 온 식구 수진과 만나서 인사해.”
제이콥이라고 불리운 청년은 수줍은 듯 주춤주춤하며 다가왔다. 그 개도 훈련이 잘되어 있는지 제이콥의 옆에 붙어서 윤수진에게 점잖은 걸음으로 다가왔다.
“내 아들이야. 이름은 제이콥. 한 8년쯤 전에 교통 사고로 머리를 다쳤지. 좋은 아인데 그만 잘못되고 말았어.”
가냘퍼 보이는 몸에 얼굴이 창백한 제이콥은 쭈볏거리며 윤수진에게 다가와서 한참 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윤수진은 그의 눈이 한없이 선량하고 어쩐지 슬퍼 보인다고 생각하며 그 손을 잡았다. 뜻밖에도 그 손은 따뜻하고 여자의 손처럼 보드라웠다.
죠세프가 악수하는 그 둘을 보며 의미심장한 어조로 말했다.
“서로 좋은 친구가 되어서 도우면서 살았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야. 사람을 만날 기회가 그리 많지 않은 이 곳에서는 아무래도 가족들끼리 오손도손 의좋게 모여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니까. 그렇지 않아, 칼로스?”
“물론 입니다, 스타인버그씨.”
칼로스가 부드럽게 미소하며 대답했다. 윤수진은 미소하는 그의 얼굴과는 다르게 그 눈빛에 무엇인가가 감추어져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그 것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다.
제이콥이 주저하다가 자기가 데리고 있는 개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 친구 버디(BUDDY)에요. 아주 순하고 아무하고나 잘 친구가 돼요. 짓는 일이 거의 없어요.”
개에 대해서 잘 모르는 윤수진은 버디의 큰 몸집에 다소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눈치 챈 제이콥이 버디의 옆에 무릎으로 앉아 그 목을 끌어안고 윤수진에게 말했다.
“만져 보세요. 여기를 이렇게 쓰다듬어주면 버디가 아주 좋아해요.”
제이콥의 손이 버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어린아이 같은 말투에 윤수진은 속으로 미소했다.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버디의 머리를 만져주자 버디는 킁, 킁 거리며 나즉히 만족스러운 소리를 냈다.
제이콥이 윤수진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어린아이 같은 천진스러운 웃음이었다.
“피곤할 텐데 수진을 이층 방으로 안내해 주지. 짐도 다 올려가고.”
죠세프가 말하자 정신을 차린 듯 마리아가 얼른 나서서 윤수진을 앞장 섰다.
“수진이라고 했던가요? 저를 따라 오세요. 이층 방으로 안내할께요.”
마리아가 안내해서 들어선 윤수진의 침실은 그 것 하나만으로도 큰 아파트 한 채 만큼의 크기였다. 화려한 가구와 현란한 꽃 조각이 되어있는 캐노피 베드가 방을 장식하고 있었고 사치스러운 욕실과 화장실은 상류 사회의 품위와 금전의 위력을 유감없이 과시하고 있었다.
“수진, 곧 칼로스가 짐을 가지고 올 거예요. 피곤할 텐데 오늘은 일찌감치 쉬고 내일 내가 집을 돌아가면서 보여 드리겠어요. 앞으로 그림 그릴 아틀리에도 보여 드리고.”
말하면서 방의 입구로 간 마리아는 방문 손잡이를 붙잡고 몇 번 열었다 닫았다 해 보였다. 마리아의 손에서 열렸다 닫혔다 하는 그 문은 겉보기와 다르게 무척 육중하게 움직였다.
“이 문을 틀림없이 닫고 이 스위치로 잠그는 거예요. 그리고 그 위에 있는 보조 장치도 닫아 두세요. 그러면 아무도 이 문을 열지 못해요.”
“왜?”
윤수진이 궁금해서 물었다.
“왜 그렇게 꼭 잠가야 하지요?”
마리아의 눈이 잠시 흐려졌다가 다시 되돌아 왔다.
“대단한 건 아니지만, 아니, 곧 알게 될 거예요.”
마리아가 말꼬리를 흐리는 사이에 칼로스가 큰 트렁크 두 개를 힘들이며 들고 올라왔다. 무슨 말이 있었는지 눈치를 보던 칼로스는 트렁크를 바닥에 내려놓고 돌아서면서 마리아에게 아주 작게 머리를 저었다. 그러나 윤수진은 그 것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뭐죠? 내가 알면 안 되는 것이 있나요?”
칼로스가 어색하게 웃고 마리아를 재촉해서 방을 나가며 말했다.
“곧 알게 될 겁니다. 문을 잠그세요.”

(다음 호에 계속)
이 소설은 계간지 "미주 문학"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많은 구독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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