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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 놀라게 해서 미안해

2016.11.28 14:11

채영선 조회 수:72

놀라게 해서 미안해

 

                                                                                          소담   채영선

 

아무래도 이상기온 같아 걱정이 됩니다.

벌써 학교는 여름 방학을 했고 오늘은 즐거운 연휴 노동절입니다. 그런데도 밤엔 싸늘하네요, 작년 오늘 시카고 교외에 사시는 지인  댁으로 나들이 갔던 날은 얼마나 더웠는지 가든파티가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건강을 위하여 도시 근교로 이사 나오신 그분 집의 농장 이상으로 넓은 뜰에는 없는 나물이 없었지요. 굴곡이 있어 아름다운 초원에 일부러 심고 가꾸신 가지가지 이름 모를 식물들이 참으로 보기에 좋았습니다. 덕분에 나누어 주신 쑥과 미나리를 뿌리 채 가지고 와서 심었더니 올해에는 제법 퍼져서 연두 빛 이파리로 쑥밭이며 미나리 밭이 뒷마당 한 귀퉁이에서 귀염둥이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한 움큼 뜯어 먹어볼까 하다가 하도 예뻐서 웃으며 돌아섭니다.

 

밤새 불어댄 비바람에 떨어진 호두나무 꽃술이 애꿎은 잔디만 기를 죽이고 있습니다. 밤꽃보다 작고 가늘지만 비슷한 모양의 호두나무 꽃이 파란 잔디를 덮어 버렸습니다. 올해가 많이 열리는 해인가 봅니다. 제대로 신방은 차렸는지 저렇게 한 번에 다 떨어져도 되는 건지 요.

 

작년 이때쯤 일어나 커튼을 열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메이플 트리 작은 둥지 안에 앉아 있던 새하고 정면으로 얼굴을 마주친 것입니다. 늦잠을 자고 있었는지 아니면 몸살이라도 났는지 작은 둥지 안에서 쉬던 빨간 새는 포르르 날아가 버렸습니다. 어찌나 미안 하던 지요. 노크 안 하고 남의 방문을 열어 제친 것 같았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깜짝 놀랐습니다. 커튼을 살짝 밀어내는데 창문 바로 밑에서 사슴이 기척을 느꼈는지 마주 보고 있었습니다. 샤워를 막 끝내고 나온 것 같은 자태였습니다. 붉은 기가 도는 브라운 색깔의 윤기가 흐르는 몸매 아마 언니나 오빠 사슴 같았습니다. 움직이려다 말고 고개를 들어 놀란 커다란 눈망울로 올려다보더니 잠시 후에 보랏빛 야생화 밭을 지나 뒷집 정원으로 천천히 가버렸지요.

 

사슴과 눈이 마주치다니,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십년 가까이 이곳에 살면서 옆에서 뒤에서 사진은 찍었지만. 착하고 순하게만 보이던 얼굴, 그 사슴과 저는 어떤 인연일까요. 사슴도 저를 기억할 것입니다. 아마 자주 놀러 와서 겨울엔 눈밭에 발자국을 어지러이 만들어 놓았거나 봄엔 향긋한 백합꽃 몽우리를 뜯어 먹었거나 어쩌면 달포 전에 심은 사철 붉은 단풍나무 새순을 몽당몽당 잘라먹은 사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얼굴을 보고 나니 아쉬운 마음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저렇게 예쁜 사슴이 배가 고팠었구나. 얼마나 배가 고프면 종이처럼 질긴 옥잠화 이파리도 뜯어 먹었을까.’ 겨울마다 사철나무 뾰족한 잎은 물론 가지까지 뜯어 먹어서 십년 이상 된 나무가 뼈대만 앙상하고 자라지 못합니다. 올 겨울에는 철망이라도 해줄까 했는데 생각이 달라집니다.

 

얼굴과 얼굴을 대하고 이야기를 하면 답답하던 마음도 달라지지 않을까요.

인간의 상상력과 이해력에는 한계가 있으며 사람마다 그 능력도 다를 것입니다. 성경에는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한적한 길에서 사람 만나는 것이 두려워진 세상입니다. 목소리 듣는 것조차 불편해서 문자를 보내는 것이 마음 편한 시대이지요. 원하는 시간에 보고, 말하고 싶을 때 답을 보내면 되니까요. 서로 미안할 것도 겸연쩍을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누구를 미안하게 만든 적이 없었는지. 잘한다고 하지만 상대방은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 사과도 안하고 모르는 채로 지나친 적이 없는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 무시해버린 적은 없는지. 마음속에서 울리는 음성에 응답을 피해버린 적은 없었는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늘 지켜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적이 얼마나 많이 있었는지.....

 

그 사슴을 만나면 이야기해 주고 싶습니다. 커튼을 갑자기 열어서 미안하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