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서독 광부의 아들"

2015.07.12 15:22

Yunkyuho 조회 수:666

단편: 서독광부(西獨鑛夫)의 아들

1.

어제저녁, 이메일(e-mail)을 통해 나는 아주 뜻밖의 편지를 받고 밤새 마음 설래,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생각지도 못한 곳, 호주. 시드니에 사는 리차드 김(金眞朴)이라는 금년 41세의 젊은 정형외과(整形外科) 의사로부터 온 편지 때문이었다.

-존경하는 강석호(姜石浩) 선생님.

제 이름은 김진박이라고 하며 저의 아버지, 김오석(金五石)님의 간곡한 명령에 따라 이 편지를 올립니다.

아버지는 선생님과 같이 어린시절 충청도 시골에서 같이 살았던 죽마고우로 이름자에도 돌석(石)자가 있듯이 죽고 못사는 사이라고 하시며, 선생님이 어디에 계시는지를 속히 알아내라고 명령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금년 초 갑자기 중풍으로 쓸어졌다가 치료를 받아 최근에는 워커를 짚고 가까스로 보행하십니다. 그러나 말을 잘 못해 더듬거리십니다.

지난 8월, KBS 가요무대가 ‘파독(波獨) 광부 50주년 기념 현지공연’으로 루루 광산촌, 보쿰(Bochum)에서 열렸습니다. 마침 여기 호주에서도 녹화 비디오를 통해 그 장면을 생생하게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중풍으로 몸을 잘 가누지 못하는 아버지가 그 녹화를 보시며 옛 추억이 생각나는지 눈물을 흘리며 노래를 따라 하셨습니다.

열악한 작업 환경에서 목숨을 걸고 막장에서 석탄을 캐던 옛 서독광부들의 모습이 애처럽군요.

갑작스레 일어난 광산 매몰 사고로 많은 광부들이 죽는 모습을 지켜 보시던 아버지가 갑자기 무슨 생각을 했는지 큰 소리를 치던군요.

“리차드! 나, 죽기 전에 내 친구, 강석호 의사를 찾아 달라!”라고 더듬거리는 말로 명령을 하셨지요.

-1970년 2월, A 의과대학을 졸업하신 것를 알고 A의과대학 동창회를 통해 선생님이 멀리 미국 켄터키주, 코빙톤에서 산부인과 의사로 크게 활동하고 계심을 어제 알게 됐습니다.-

아버지에게 의사 친구가 있는 줄도 처음 알았으며 아버지가 서독광부로 일한 것도 제대로 모르고 살았습니다. 한국에서 전기 기사로 착실하게 살아오다가 1984년 제 나이 14세 때, 사고치는 불량학생인 저의 장래를 위해 한국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멀리 시드니로 이민와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선생님으로부터의 소식을 고대한담니다. 보고 싶답니다.

아버지 덕분에 저는 정신을 차리고 열심히 공부를 해 마침내 백인들이 판치는 호주에서 당당히 정형외과 전문의사로 시드니 시립 병원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받으시면 즉시 알려 주십시오. 아버지는 선생님을 죽기 전에 꼭 보고 싶다고 울먹이십니다.

멀리. 시드니에서, 광부의 아들, 김진박(리차드)이 드림니다. 2013년 11월 21일. -

*

이 편지를 읽은 나는 깜짝 놀랐음은 물론 그동안 너무나 빨리 흘러간 세월이 야속했다.

순간 내 눈 앞에 스쳐가는 영상이 떠 올랐다. 1970년 한 해 동안에 각자의 길로 헤어졌던, 동갑내기 친구 김오석(金五石), 네 살 더 많은 동네 형님 박형구(朴亨具), 그리고 한 살 아래인 동네 여동생 김정선(金貞善)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름에서 보듯이 나와 오석은 돌(石)같은 시골 촌놈들이었다.

2.

청주에서 기차를 타고 북쪽으로 약 한 시간쯤 가면 증평군(曾平郡) 도안면(道安面)에 아버지가 운영했던 양조장(釀造場)이 있었다.

이 양조장 주변에 쉬파리처럼 찾아와 꼬들꼬들한 쌀밥과 발효하고 남은 술 찌거기를 얻어 게걸스럽게 먹었던 친구들은 하나같이 가난했었다. 그리고 양조장 집 아들인 나를 좋아 했다.

소나무와 잣나무가 빽빽한 두태산에서는 가끔 야생동물의 울음이 울려나왔으며 동네 앞을 지나가는 신작로와 그와 병행에서 남북으로 달리는 충북선 기차가 지나 갈 때마다 꼬들꼬들한 술밥을 먹던 아이들은 기차를 향해 소리를 치기도 했었다.

나보다 4살 더 많았던 박형구라는 동네 형님은 나이 값을 하느라고 나, 김오석 그리고 김정선을 가르치고 도와주는 덩치 큰 보스였다. 그의 말이면 우리는 무조건 따라야 했다.

김정선이란 계집애는 유달리 예뻣으며 우리 모두가 좋아했던 동네 공주였다.

형구(형)는 60리 밖에 있는 청주로 기차통학을 해 청주중고등학교를 다녔다. 4년 후 나와 오석이 청주 중학에 입학 하니 그는 어느새 고등학교 2학년이 돼 우리들을 도와 주었다. 다음해 정선이 마저 청주 여중에 입학하자 고 3이된 형구(형)는 우리 모두를 도와 주는 친절하고 듬직했던 형이요 오빠였다.

다음해, 형구(형)는 서울로 가 D 대학을 다녔다. 우리가 중학교 3학년으로 진급했을 때 그는 군에 입대해 멀리 강원도로 갔다.

형구(형)는 제대를 하고 복학해 대학을 다니는 가 했는데 1964년 3월, 서독광부가 돼 루루공업단지에 있는 보쿰(Bochum)이라는 광산으로 돈 벌러 간다고 했을 때 우리는 몹시 부러워 했었다. 그 해 나는 서울에 있는 A대학 의예과에, 그리고 오석은 H 대학 전기과에 입학을 했다. 보따리 싸들고 서울로가 하숙도 하고 자취도 했다. 양조장을 경영하는 나의 집은 그래도 하숙비와 등록금을 낼 수가 있었으나 오석은 그렇지 못하자 학교를 잠시 포기하고 군대에 입대했다. 다음해(1965년), 정선은 청주 도립병원 부속, 3년제 간호학교에 입학했다.

군에 갔던 오석은 복학해 전기과를 졸업해 청주에 있는 작은 공장에서 취직을 했다. 그런가 하면 정선은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내수 보건소에서 간호사로 일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서독 광부로 갔던 형구(형)가 3년 임기를 마치고 귀국 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돈을 벌어와 아예 청주로 이사를 갔으며 강력하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형구(형)는 정선과 약혼을 한 후 서독광부와 간호사로 같이 간다고 했다. 친구 오석이 그녀를 목숨 걸고 좋아하기에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했었다. 형구(형)가 아무리 우리의 보스였다고는 하지만 이미 서로 사랑하고 있는 오석을 따 돌리고 정선과 결혼한다는 것은 인륜도에 어긋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1970년은 우리들 4명을 산산히 흩어 놓았던 악몽같은 이별의 해였다.

그해 2월 의과대학을 졸업한지 2주후 육군 군의관으로 입대해 훈련을 받고 있는 사이 형구(형)는 3월 중 순, 더 큰 돈을 벌겠다고 다시 서독 광부로 훌쩍 떠났으며 그해 5월 정선도 서독 파견 간호사로 서둘러 비행기를 타고 가버렸다.

당시 나는 강원도 인제 육군부대 군의관으로 근무하고 있었기에 작별인사도 못했었다.

-그해 9월, 일년 동안 보지 못했던 오석이 예고도 없이 의무부대로 나를 찾아왔다.

서독광부로 아켄(Aachen)에 있는 광산에 가서 3년 일하여 돈 벌어가지고 오겠다고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러 왔다.

“네 어머니는 누가 보살피고?, 너 형구형하고 정선이 약혼했다는데, 알고 있니?”

“그럴 리가 없어. 정선은 오로지 나만 사랑하니까. 그래서 정선이 곁에 가 내 눈으로 확인하려고해.”

사실을 확인하고 정선이와 결혼하고야 말거라고 다짐하는 그의 눈가에는 눈물방울이 이슬처럼 고였으며 살기마저 보였다.

다소 쌀쌀한 저녁, 부대 앞에 있는 선술집에 저녁불이 들어오자 우리는 일어섰다. 청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와 헤어 진 후 지금까지, 그러니까 42년동안 나는 그를 보지 못했다. 아니 볼 수가 없었다.

*

인제, 연천 그리고 동두천에서 지루한 군의관 복무를 마치고 1973년, 6월 제대를 하자마자 서둘러 비행기를 타고 미국유학으로 찾아온 곳이 신시내티였다. 그리고 흑인들이 우굴대고 가난한 자들의 고함소리로 무섭기만 한 신시내티 시립병원에서 인턴으로 첫 의사생활을 시작했다.

미국에서의 의사 생활은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바빴으니 한가하게 고향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독일로 간 친구들의 소식을 들을 기회는 더더욱 없었다. 눈에서 멀어지니 오석, 형구 그리고 정선이란 이름은 아예 나의 머릿속에서 사라진지 오래였는데, 뜻밖의 편지를 받다니.

나는 43년 전, 1970년 어느날로 갑자기 되돌아간 마음이었다.

3.

나는 지체 없이 답장을 보냈다. 전화를 하고 싶었으나 하도 오랜 세월만에 듣는 소식이기에 지나친 감정 표현을 덜 하기 위해 편지를 선택했다.

-닥터. 김! 그리고 보고 싶은 친구 오석아!

너무나 반갑다 못해 눈물이 난다. 43년만이네. 강원도 인제 선술집에서 눈물을 흘리던 너의 초라했던 모습이 떠 오른다. 너를 보낸 후 나도 괜스레 울었었지. 도대체 네가 갑자기 목숨이 위험하다는 서독광부로 자원해 가다니.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그렇지 목숨이 중요한데. 게다가 네가 사랑하는 정선을 찾아 무조건 간다니. 가서 뭘 하려는데. 이미 정선의 마음은 형에게 가 있어 약혼까지 했다는데. 그 후 나는 너를 까맣게 잊고 살았어.

그런데 훌륭한 아들을 두고 호주에서 안정되게 살고 있는 네가 대견하다. 중풍으로 거동이 힘들며 말을 잘 못한다고 하니 마음이 짠하구나. 오석아! 내가 시드니로 너를 보러 가마. 네가 나를 보러 강원도 인제 산골로 찾아 왔었는데 이번에는 내가 시드니로 가마. 2개월 후 은퇴를 하면서 첫 방문으로 찾아갈게...

미국에서 보낸 39년의 세월은 외로움의 연속이었는데 살다보니 나도 모르게 켄터키 촌사람이 됐어. 켄터키는 마치 우리가 살았던 시골집 도안(道安)이나 마찬가지여. 양조장이 있고 담배 건초장이 있는 도안과 다를 바가 없는 조용한 시골이여. 아니 네가 가서 일했던 독일 광산촌 처럼 조용한 곳이지...

이번에 만나면 서독에서 어떻게 지냈었는지, 호주로 이민 가서는 어떻게 보냈는지, 직접 얘기를 듣고 싶다네. 그리고 이토록 훌륭한 의사아들을 낳아 준 자네의 부인이 도대채 누군지 만나보고 싶다네. 조개 껍질 같다는 시드니 음악 홀에도 너와 손잡고 같이 걷고 싶다네. 그때까지 건강을 회복하기 바란다. 멀리 켄터키 주 코빙톤에서, 친구 석호가 총총 씀.-

*

그 후 한 차례 더 이메일을 주고 받았는데 웬일인지 오석은 서독 광부 시절의 얘기와 결혼에 관해서는 만나서 하겠다고 하며 평범한 얘기만을 했다. 무언가 감추는 것이 있는 듯해 씁쓸했다. 정선과 어떻게 됐는지가 제일 궁굼했다.

2014년 1월, 나는 산부인과 개업을 접고 마침내 은퇴를 했다.

그리고 약속대로 멀리 호주 시드니로 가는 비행기를 타게 됐다.

2014년, 1월 20일-,

켄터키는 몹시 추운 겨울날인데 호주는 반대로 무척 더운 여름이라고 했다.

돈과 시간이 있으니 그토록 멀게만 보였던 호주가 지척에 있는 이웃이었다.

신시내티 공항에서 떠난 비행기가 2시간 후, 로스앤젤레스 공항에 도착한 후 3시간 머물었다. 같은 미국이지만 날씨가 따듯하고 온화했다. 서울로 가는 한국 비행기를 탓다. 12시간동안 나는 김오석, 박형구, 김정선, 강석호, 양조장 주인, 오석 어머니, 서독광부, 켄터키, 오하이오를 생각하다보니 비행기 속에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인천 국제공항에서 다시 4시간을 머물었다. 우리 조국은 1960년대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다못해, 노예처럼 돈벌러갔던 서독과 쫒기 듯이 찾아온 미국보다 이제는 더 부유해 뵈고 여유가 있어 대견스러웠다.

-생각해 보면 1973년, 미국행 비행기를 탓을 때 내 마음은 시원섭섭했었다. 후처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이복 형제들로부터 노골적인 견제와 천대를 받았으며 어머니는 마치 식모나 다름없이 살았다. 그러기에 그들의 눈을 피해 눈에 안 뵈는 곳, 어디고 멀리 가고 싶었다. 아니 한국을 떠나고 싶어 무작정 이민을 신청해 온 곳이 미국에서도 촌구석인 켄터키였다.-

마침내 비행기는 적도를 넘어 남반구, 시드니 공항에 도착했다. 처음 오는 곳이지만 밖에서 친구가 나를 기다린다고 생각하니 낫설지 않았다. 영어권이다 보니 마치 미국의 어느 한 곳을 찾아 온 듯 했다.

우리 나이 68세, 손자 손녀 거느리고 사는 노인들의 만남이지만 긴장이 되었다. 입국수속을 다 마치고 가방하나 달랑 들고 공항 대합실로 총총 걸어 나오며 마중 나왔을 친구와 그 아들을 두리 번 찾고 있었다.

그 순간 나를 향해 달려오는 아들(리차드 김)의 뒤에서 지팡이를 집고 웃음짓고 있는 훌쭉한 키에 허리가 다소 굽은 오석을 발견했다.

우리는 얼싸 안았다. 완연히 늙어 버린 친구를 통해 나는 나의 모습을 바라본다고 생각했다. 발랄했던 청년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이젠 백발이 돼버리다니....

그 순간 그의 옆에 서서 나를 향해 역시 웃고 있는 한 여자의 모습이 새로웠다. 머리가 희고 목 주변에 있는 잔주름이 물결같아 마치 고달픈 인생을 살았다고 말해주는 듯했다. 서독간호사로 갔던 정선이가 틀림없었다.

“혹시, 김정선씨?” 나는 너무나 놀랍고 반가워 큰 소리로 물었다.

“나, 정선이야. 석호 오--빠.” 그녀는 스스로 김정선이라고 말했을 때 나는 정말 놀랐다.

“그런데 여긴 어떻게?”

“나, 결혼했어. 오석씨와.”

“오석이와?”

1970년 그녀는 형구와 약혼하고 서독에 가서 결혼을 한다고 했는데 오석이와 결혼을 했다니 뒤퉁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강 박사님? 아버지가 어머니에 대해서는 공항에 올 때까지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리차드도 의아해 하며 고개를 저었다.

“맞아, 석호, 우리 서독에서 결혼했어.” 친구 오석이 드디어 말을 했다.

“서독에서?”

형구와 결혼하러 서독으로 간 정선을 찾아 간다고 하며 눈물지으며 막걸리 잔을 비우던 그 강원도 인제, 군부대 앞에 있었던 선술집이 눈 앞에 선명하게 보였다. 그런데 정작 결혼 한 것은 형구가 아니고 오석이였다니 무슨 요술이라도 부렸었는지 궁굼해 졋다.

- ‘1970년 9월. 어느듯 44년 전이었는데. 어찌된 셈인가? 거꾸로 돈 풍차같은 세월이었다.’-

미로(迷路)속에 같인 생쥐처럼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운전대를 잡은 ‘서독광부의 아들’ 리차드를 바라보며 세계 3대 미항(美港)이라는 시드니 속에 나의 과거를 던져 버렸다.

4.

-오석이 정선을 여자로 사랑한 것은 대학에 들어가서부터였다. 서울로 가면서 그는 정선에게 사랑한다는 고백을 했으며 군대에 입대했을 때, 그는 다른 생각하지 말고 기다려 달라고 부탁 했었다. 그뿐인가 군에 있는 동안 홀로계신 오석의 어머니를 친어머니처럼 아니 시어머니처럼 돌봐 달라고 부탁 했었다. 제대하고 복학하면 청혼도 하고 때를 봐서 결혼하기로 약속을 했었다.

그런데 웬일인가? 64년 광부로 서독에 갔던 동네 오빠, 형구가 3년 후 많은 돈을 들고 고향으로 내려오자 사정이 달라졌다. 이상에서 현실이 됐다.

쥐꼬리만한 월급을 받는 ‘오석’보다 그동안 저축한 돈으로 청주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형구가 신랑으로서는 더 좋았다.

결국 1970년 초 정선은 오석을 배반하고 비밀리에 형구와 미래를 약속했다. 정선 자신도 내수 보건소에서 적은 월급을 받고 쪼들려 사느니 보다 형구를 따라 서독에 같이 가 그곳에서 결혼도 하고 계약기간이 만료되면 자연스레 독일에 남든지 아니면 미국으로 이민 가 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70년 5월, 약속대로 그녀도 독일 행 비행기를 탓다. 그리고 프랑크프르트에서 형구를 만났다. 비록 힘든 파독간호사 생활이 시작 됐지만 행복한 마음뿐이었다.

그녀는 쾰른 시립병원에서, 그리고 먼저 온 형구는 딘스라켄 광산에서는 한국광부와 기계를 관리하는 사무직 일을 시작했다. 1964년부터 3년간 보쿰 광산에서 얻은 신용 때문에 석탄을 캐지 않아도 되는 관리인으로 근무를 하고 있었다.

이런 내용을 모르는 오석은 무조건 사랑하는 정선을 만나면 다 해결 되겠지,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광부 신청을 해, 루루 공업단지에 있는 아켄(Aachen) 광산으로 갔다.

홀로 사는 어머니를 잠시 옆집 아주머니에게 떠맡기듯 부탁하고 서독행 비행기를 탓을 때 억장이 무너지는 듯 했었다. 아켄 광산은 생각과는 너무나 달랐다. 단층 건물의 기숙사는 꽤 오래되고 낡았으며 작은 방에 서울 왕십리에서 살다 온 기계공 김씨와 한 방을 썻다.

하루 8시간, 그러나 돈을 더 벌기위해 오버타임으로 2시간 더해서 하루 10시간씩 1000미터 지하로 수직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그곳에서 다시 3000미터 수평으로 이동해 막장(幕場)에 가서 석탄을 캤다. 여기저기에 바쳐 놓은 쇠 기둥들과 그 사이로 지나다니는 석탄용 궤도차가 아주 위험했다. 숨이 콱콱 맥히고 얼굴은 흑인처럼 까맣게 변했다. 모든 것이 기계화되었기에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큰 사고로 이어지기에 조심 또 조심해야 했다. 일이 끝나고 1000미터 위 지상으로 나오면 “오늘 살아 왔습니다.”라고 말하며 죽지 않은 것을 감사해야 했다.

*

아무리 위험하고 힘들었지만 꾹 참고 일하다가 마침내 형구가 근무하는 딘스라켄 광산으로 찾아 간 것이 한 달이 지나서였다.

“아니? 오석이 아냐! 여긴 어떻게?” 형구는 깜짝 놀랐으며 당황해 하는 눈치였다.

“저도 파독광부로, 아켄에 왔어, 형.”

“아켄으로? 언제?”

“한 달 됐습니다.”

아주 어색한 마음으로 서로를 떠 보려고 그들은 구내 식당으로 들어가 귀퉁이 자리에 앉아 누런 보리색갈의 맥주를 마시면서 형구가 먼저 그리고 당연히 얘기를 시작했다.

- 1964년 초, 보쿰광산에 와서 격었던 얘기부터 시작했다. 광부 생활에 다소 도움이 될지 모른다고 강조했지만 자신의 변명을 늘어 놓은 진부한 얘기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가 생전에 품고 있었던 그의 가치관을 털어놓았다.

“오석아! 너도 알겠지만 우린 너무 가난하게 살았어. 보리고개를 넘기면 일 년을 더 산다고 했었지. 1964년, 한국의 GNP는 겨우 79딸라, 필립핀이나 태국보다도 아니 북한 보다도 훨씬 뒤진 세계 최고 빈민국이었지.

나, 처음에는 5.16 쿠테타의 주역이었던 박정희 대통령을 증오 했었지. 국방에 전념해야 할 군인이 정권에 눈이 멀어 역적질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역설적으로 그가 터 놓은 길을 따라, 서독 광부가 돼 보쿰에 왔단 말야.

서독에 온 우리? 인간도 아니었어. 20세기 산업 노예였지. 노동 현장에서 개 돼지 같은 신분이었지.

어떻게 해서라도 잘 살아보려고 박대통령은 미국에 가서 케네디에게 구걸했는데 미국은 거절했지. 결국 서독으로 찾아와 에르하르트와 뤼브케에게 사정을 해 1억 5천만 마르크를 얻어 냈는데 그 차관의 담보가 된 것이 바로 우리 서독광부와 간호사 였어. 아니 내 목숨이었어.

나, 나쁘게 생각 안했어. 내 목숨이 한국의 산업 발전에 담보가 된다면 나도 애국자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1964년 10월, 내가 여기 온지 6개월 됐을 때, 박대통령이 여기 보쿰 광산을 찾아 왔었지.

‘가난한 우리나라, 한번 잘 살아보자. 열심히 노력하면 된다.’라고 외쳤지. 그리고 애국가를 불렀을 때 우리는 목이 매여 소리가 나오지 않았어. 인정사정 없이 매섭다는 박대통령도 같이 울었어. 육 여사도 울고. 우리 모두는 울었어. 하얀 찔레꽃 처럼, 너무나 슬퍼서 울었어. 슈베르트의 들장미 처럼 울었어.

우리는 대통령 내외분에게 ‘아버지, 어머니’라고 부르며 울었지. 고향에서 달려온 부모였었지. 옆에 있던 뤼브케 대통령도 눈물을 흘렸어.

그 후부터 나는 박대통령을 진심으로 좋아했어. 거지같은 나라라고 욕을 해도 한국은 결국 내 조국이란 말여. 서독광부 그리고 간호사 월급이 산업 부흥의 종자돈이었어. 그리고 우리나라 건설이 시작됐어.

3년, 목숨 걸고 일해 많은 돈을 집으로 송금했었지. 그 결과, 집도 사고. 그리고 귀국해 보니 집안이 활짝 핀 것을 눈으로 똑똑히 보았어. 그리고 3년 후, 다시 서독광부 지망을 해 여기 다시 온 거야. 나, 두 번 씩 온 것 후회 하지 않아. 3년 후 귀국하면 한국의 건설 분야에서 크게 일할 수 있으니까.“

오석은 그가 애타도록 궁굼한 정선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자 참지 못하고 중간에 말을 가로챘다.

“형? 정선은 어디있죠? 간호사로 왔는데!”

“어, 쾰른 시립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어. 쾰른.”

“형과 결혼한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그게 사실이요.” 오석은 형구의 얼굴을 정면으로 처다보며 죽이기라도 할 듯이 큰 소리로 물었다. 눈이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너, 몰랐구나. 우리 서독으로 오기 전에 가족끼리 만나 약혼을 했었지. 그리고 지난달, 쾰른에서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렸어.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어차피 우린 3년 동안 떨어져서 살며 일해야 하니까... 3년간.”

“결혼을 했다구요? 그게 사실이었군, 그럴 수가!” 오석은 맥이 풀리며 세상이 거꾸로 도는 듯했다.

오석은 더 묻지 않고 터벅터벅 딘스라켄 광산촌을 벗어나 아켄으로 되돌아 왔다. 멀리 화성에 가서 외계인을 만나고 온 허탈한 느낌이었다.

믿었던 동네 형님이요 의지했던 꼬마 대장이었던 형구의 모습이 야비하며 저주스러웠다. 배신이었다. 그토록 사랑하고 약속했던 정선의 모습에서 쓴 웃음을 웃는 초라한 여인의 얼굴이 떠 올랐다. 이 둘이 그를 이토록 비참하게 내 밀치다니....

모든 희망을 잃은 오석은 만사가 피곤했다. 정선을 더 찾아갈 이유도 없었다.

혼자 자살해 죽어 없어지면 모든 것이 순조로울 거라고 생각했다.

5.

대성당으로 유명한 쾰른시, 시립병원에서 힘들게 일한지 4개월-

마침내, 그들은 목사님을 모시고 쾰른에 있는 한국식당에서 아주 조촐하고 간결한 결혼식을 올렸다. 한 때 그녀를 사랑했던 오석은 물론 석호라는 인물도 기억에서 아주 멀어졌으며 미안한 마음도 사라져 버렸다. 사정상 영사관에 갈 수가 없어 훗날 결혼신고를 하기로 했다.

신혼여행으로 신랑과 같이 쾰른을 떠나 라인강 중류로 가는 유림선을 탓다. 그녀는 행복함 뿐이었다. 유람선이 중류에 있는 로렐라이 언덕을 지날 때 그녀는 남편, 형구와 더불어 하이네의 시를 읊어 보았다.

“옛날부터 전해 오는 쓸쓸한 이 말이 가슴속에 그립게도 끝없이 떠오른다..”

순간 로렐라이 언덕에 있는 요정이 갑자기 달려들더니 옆에 앉아 있는 신랑의 얼굴을 향해 비수를 꼿는 다고 생각됐다.

“안돼!” 신부 정선은 소리를 쳤다.

“왜 그래?” 신랑 형구가 놀라서 물었다. 환상을 본 것일 뿐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아냐!” 신부 정선은 진 땀을 흘리고 있었다. 불길했다.

그리고 돌아 온 쾰른 시립병원, 그녀는 받은 급료 중, 단지 30마르크만 자신을 위해 쓰고 나머지 850마르크는 한국으로 송금했다. 남편도 그러했다. 아끼고 절약하면 남편과 같이 보낸 돈이 엄청나게 쌓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뿌듯했다.

‘3년만 고생하자. 3 년만.’ 그들은 다짐했다.

며칠 전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오석이 서독 광부로 자청해 쾰른에서 멀지 않은 아켄(Aachen)에 있다는 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오석이 앙심을 품고 찾아오면 어쩌지. 뭐라고 변명을 할까.“ 그녀는 큰 죄를 짓고 경찰에게 쫒기는 마음이었다.

*

그러나 오석은 그녀를 찾지 않았다. 아니 찾을 수가 없었다. 그를 버리고 이미 형구와 결혼했으니 찾아 본들 아무런 소득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괜히 왔구나. 괜히.’ 이렇게 생각하니 광산일이 너무나 힘들었다. 마치 패배자가 된듯했으며 우울했다.

독일의 겨울은 유달리 눈이 많이 오며 안개도 짙어 앞이 안 뵈는 날도 많았다.

한해를 넘겨 1971년 새해가 찾아 왔지만 조금도 사정이 바뀐 것은 없었다.

오석에게 어느 누구도 딘스라켄 광산에 있는 형구에 관한 소식을 알려 주는 사람은 없었으며 쾰른 시립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정선에 대해 소식을 주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그리고 3월이 됐다. 봄이 오는 듯했으나 추운 것은 여전했다.

뜻밖이었다. 딘스라켄의 형구가 4월말, 아켄광산을 찾아왔다. 손에는 오징어포와 소주병, 그리고 어디서 구했는지 빈대떡이 들려 있었다.

지난번과는 아주 다른 태도였다. 옛날 시골에서 꼬마 대장 할 때, 그리고 기차 통학으로 학교에 갈 때 힘없는 동생들을 돌보아 주던 그런 따슷한 태도였기 때문이었다.

“오석아! 생각해 보니 내가 너한테 큰 죄를 졌어. 네가 정선을 그토록 사랑해 여기까지 올 줄 알았더라면 네가 결혼을 했어야 하는데.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내가 양보하마.”

그리고 그는 ‘아내가 임신한 것 같다’라고 말했다.

“형! 그런 말은 하지 말자. 결혼 했으면 끝까지 행복하게 해 줘야지. 임신도 했다는데.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아니, 내가 용서를 빈다는 말야.”

“이미 늦었어, 나는 정선이만 행복하게 산다면 그것으로 만족해.”

그리고 그들은 서로 앞으로는 안보기로 하고 혜어졌으나 “임신 한 것 같아...”란 말이 오석을 괴롭혔다.

*

다음달, 오석은 마음을 크게 먹고 쾰른 시립병원을 찾아 갔으나 그녀는 비번이라서 병원에 나오지 않았다.

결혼한 간호사는 병원 근처 아파트에서 살 수 있으나 임신하면 계약위반이기에 병원을 그만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어느 한국 간호사를 통해 알게 됐다.

그는 정선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잘 살아 주기를 기도했다. 그리고 그는 눈물을 흘리며 평생 결혼 하지 않고 홀로 살겠다고 다짐했다. 바보처럼, 패배자처럼 아니 전쟁 포로처럼 비참하고 참담한 느낌 뿐이었으며 죽고 싶었다.

그 후 그는 아켄 광산에서 밖으로 나오지 않고 오로지 맡겨진 광부의 일에 전념했다. 하루하루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했다.

광산촌에 있는 아담한 루터란 교회가 오늘 따라 눈에 띄었다. 그리고 목사님의 말씀이 가슴에 밖혔다.

‘간음하지 말라, 남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

6.

형구가 서독에 다시 온지 1년 반, 그의 직책은 한국인 광부와 장비를 관리하는 사무직으로 막장에서 석탄을 캐지 않아도 됐기에 비교적 사고로부터 안전한 편이었다.

오늘도 그러했다. 갱도를 여기저기 조사하고 있었다. 저녁 늦은 시간, 광부들은 일단 저녁 식사를 위해 퇴광하고 보니, 갱도에는 몇 명 남지 않았다. 갑자기 천장을 바치고 있던 쇠기둥이 옆으로 쓸어지면서 갱도가 와르르 매몰되고 말았다.

“갱도가 무너진다! 빨리 피하라!”라는 소리를 들었으나 그 후에는 정신을 잃고 쓸어졌다.

그로부터 24시간 후 가까스레 구조팀이 갱도를 찾아 들어 왔으나 매몰된 형구와 다른 이태리 사람 광부는 안타깝게도 이미 깔려 죽어 있었다.

지역 신문과 방송이 광도 매몰과 구조 작업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고 있었다.

*

- ‘뭐라고? 형구가 죽다니.. 형구가 죽다니. 며칠 전에도 내게 죄를 졌다고 말했는데..,’

죽은지 3일 되던 날, 보쿰 광산 강당에서 파독 광부 박형구와 이태리 광부의 장례식이 광산 고용주의 주관하에 열렸다. 자주 발생하는 사고이기에 광산 측에서는 아주 사무적으로 절도 있게 예식을 치루었다. 장례식 후 화장(火葬)해 가족에게 돌려주되 독일 땅에 매장하려면 광산에서 장지를 마련해 주며 5개월치의 월급을 일시불로 지급한다고 했다.

독일 목사님의 기도로 시작된 장례식장 맨 앞줄에 미망인이 된 정선이 검은 옷을 입고 울면서 앉아 있는 모습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잃은 듯 해 보였다.

“정선씨.” 오석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았으나 더 할 말이 없었다.

돈 벌려고 온 독일 땅, 그리고 아내와 더불어 행복한 보금자리를 마련하려고 했던 형구의 죽은 모습, 그리고 임신한 정선의 눈물이 그들의 꿈을 산산이 흩어 주고 있는 듯했다.

7.

형구의 시신을 화장해 작은 함에 넣어 딘스라켄 공동묘지, 한귀퉁이에 묻었다고 했다.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임신한 것이 발각돼 병원에서 퇴거당하고 계약도 파괴됐기에 그녀는 보따리를 싸 한 달 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비록 형구와 결혼을 했지만 혼인신고가 안 돼 있어 결혼으로 인정되지 않아 5개월 치 보상도 직접 받지 못해 식료품도 살 돈이 없었다. 실망과 먹지 못해 심한 탈수로 집에 누어있다고 했다.-

오석은 짧은 휴가를 내 그녀를 돕고자 쾰른으로 달려갔다. 먹지 못해 영양실조로 누어있었다. 배신해서 정말로 미안하다는 말만 할뿐 정선은 오석을 쳐다보지 못했다.

아무런 도움도 필요 없으니 제발 돌아가라고만 했다. 두 손으로 오석의 가슴을 밀어 내었다. 결국 오석은 빈손이 돼 아켄으로 되 돌아와야 했다.

*

홀로 있는 밤은 외롭고 무서웠다. 남편이 무참하게 가버린 이후, 정선은 공포에 사로 잡혀 밤이 되면 죽고 싶었다. 창 밖에서 부는 바람소리가 마치 귀신이라도 나오는 듯했다.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심한 강풍이 불어 유리창이 흔들렸다. 갑자기 정전이 돼 사방이 캄캄해지더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 무서워. 무서워. 나 좀 살려줘요. ’ 그녀는 남편이 있었던 딘스라켄으로 아무 생각 없이 전화를 걸었다.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아-박형구씨를 찾으세요. 얼마 전에 사고로 죽었습니다.”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죽은 남편이 어디에서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무서움은 더 더욱 그녀의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다시 그녀는 전화를 걸었다. 제발 돌아가 달라고 쫒아 버렸던 오석이 남기고 간 아켄 광산의 전화 번호였다.

“누구죠? 정선? 정선?” 상대방의 목소리는 분명 아무런 도움도 필요 없으니 돌아가라고 야박하게 내 보냈던 오석이었다. 필요 없다고 말해 놓고, 왜 오석에게 전화를 걸었는지 그녀 자신도 이해하지 못했음은 외로움과 공포로부터 보호를 받고 싶은 때문이었다.

“오석씨. 나 무서워. 나 무서워....” 그녀는 전화에서 분명 떨고 있었다.

“정선! 기다려 내가 달려 갈테니....”

진 눈깨비기가 오고 바람이 부는 이 밤, 오석은 차를 몰고 쾰른으로 달려갔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정선이 필요한 것은 오로지 살아 있는 오석이 뿐이었다.

오석이 달려와 보니 그녀는 작고 추운 방에서 벌벌 떨고만 있었다. 옛날 시골에 살 때도 정선은 급하면 도와 달라고 오석과 석호를 불렀었다.

“정선아. 이젠 걱정마. 내가 네 곁에 있으니까. 우린 하나야! ”

*

오석은 과부가 된 정선을 위해 모든 것을 해 주기로 마음 먹었다. 그리고 벌벌 떨고 있는 그녀를 꼭 포옹했다. 두 몸둥이에서 나오는 열기가 점점 그녀를 따스하게 해 주었다. 마침내 정선은 안심했는지 깊은 잠에 빠졌다.

- 우선 급한 것은 그녀의 독일 체류 연장을 위해 혼인신고서를 독일 영사관에 제출했다. 그 길만이 추방당하지 않는 최선의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네가 결혼했어야 했는데, 미안해. 내가 물러날게.”라고 형구가 한 말이 사실이 되고 말았다.-

어느 누구도 모르게 둘만의 결혼식을 교회에 가 올리고 라인강 유람선을 탓다. 얼마 전 형구와 같이 신혼여행으로 같던 똑같은 길이었다.

라인강 중류에 있는 로렐라이에서 그 둘은 똑같은 시를 기억했다.

“옛날부터 전해 오는 쓸쓸한 이 말이 가슴속에 그립게도 끝없이 떠 오른다.”

순간 로렐라이 언덕의 요정이 이번에는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축복 하는 듯 했다.

*

그해 72년, 12월, 정선은 진통을 심하게 하더니 병원으로 가 아들을 낳았다.

건강한 아기였다. 꿈틀 거리며 용틀음을 하는 것이 마치 죽은 형구를 닮았으나 법적으로는 오석의 아들이 되었다.

“아들 이름을 김진박(金眞朴)이라고 하겠어. 정선...” “김진박?”

“그래, 나의 성과 형구(형)의 성을 따서 김진박. 김씨가 아니고 진짜로 박씨라는 뜻여. 형구의 아들이라는 뜻이지. 우리 둘만 아는 것으로 하자. 아들에게도 절대로 말하지 말자.”

“진박, 진짜박씨.” 정선은 모든 것을 포용해 주는 남편 오석의 넓은 마음에 감동을 할 뿐이었다.

8.

다음해 1973년 10월, 광부 계약을 무사히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하면 동네 사람들의 입방아가 그들을 괴롭힐 것이 뻔했다. 오석과 결혼을 하려고 남편을 죽였다느니, 전 남편에게 저주를 퍼부었기에 사고로 죽었을 거라느니. 오석은 한국행을 포기하고 다른 광부들과 같이 미국(쉬카고)으로 가려고 취업 서류를 준비해 제출했다. 그러나 정선은 고향으로 돌아가 혼자 계신 어머니를 돌보자고 했다. 설령 그 녀는 두 번째 결혼한 정체가 들어나 심한 욕을 먹는다 해도 약속대로 시어머니를 모시겠다고 했다.

그 대신 죽는 날까지 시어머니에게 ‘진박은 오석의 피가 흐르는 아들’이며 10개월 된 아이의 독일 기록과 갓난쟁이 때 찍은 몇 장의 사진도 불태워 없앴다. 뿐만 아니라 서독에서 광부와 간호사로 지낸 사실 조차도 일체 꺼내지 않고, 청주에서 조용히 전기공으로 살았다. 다음해 딸을 낳았으며 연이어 아들을 낳았다.

*

아들, 진박은 건강하게 자라 학교에 잘 다녔다. 성적도 좋은 편이었다. 그런데 10살이 되면서 공부를 게을리 하더니 학교에서 자주 싸우고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동네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않고 집에만 꼭 틀어 박혀 사는 부모가 싫다고 했다. 남들처럼 손잡고 공원에도 가고 여행도 가고 싶었는데 부모는 한결같이 집에서 나가지 않는 두더지 같다고 불평을 하였다.

학교 선생님은 진박이 ‘반 사회적이며 행동 발달 장애자’일지도 모른다고 하며 다음과 같이

조언했다.

-‘비사교적인 부모를 싫어하니 한번 멀리 외국으로 가서 살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선생님의 충고에 따라 호주로 이민 가서 살기로 결정을 하였다. 2년 후, 아들이 14세가 되던 해에 시드니로 오게 됐다.

어려움을 피하고자 온 호주도 만만치 않았다. 피동적인 생각은 오히려 더 큰 문제를 만들었다. 백인 우호국인 호주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싸움을 일삼고 마침내 담배와 대마초를 피우며 마약에도 손을 대는 불량소년이 됐다.

몇 차례 소년원에도 가고 정학도 당하는 바닥 인생이 됐다.-

“왜 그럴까?” 아버지 오석은 고심해 보았으나 그 해결책을 알 수가 없었다.

다른 한국인 애들은 좋은 대학에 가는데 진박은 2년 늦게 초라한 초급대학에 입학했으나 공부보다는 노는 대 더 바뻣다.

*

우연한 일로 아들의 비밀이 백일하에 밝혀지게 됐다.

-어느날, 아들은 아버지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해 인근에 있는 공원으로 가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아버지? 어찌해서 진박이라고 명명했습니까?”

“진박은 좋은 이름인데 싫으냐? 다른 이름으로 할까? 호주식으로, 아, 리차드(Richard)가 어떨까?”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왜 대답을 피하는지를.”

“무엇을 피한다는 거냐?” 아버지 오석은 말을 더듬었다.

“아버지? 어머니가 울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오석은 비밀이 탄로 난 것을 눈치 채고 말았다. 올 것이 왔다고 쳬념을 했다.

며칠전의 일이었다.

- 어머니가 혼자 안방에서 사진 몇 장을 보며 울고 있는 모습을 지나가던 아들이 우연히 보았다.

“어머니? 왜, 우시지요?” 갑작스런 질문에 어머니는 깜짝 놀라며 사진을 숨기려고 했으나 오히려 방바닥에 떨어뜨렸다.

꽤, 오래되어 누렇게 바랜 사진, 세 장이 있었다. 멀리 독일 딘스라켄 광산에서 찍은 어머니와 어느 남자의 사진이 다정스러웠다. 그리고 또 한 장은 쾰른 시립병원 앞에서 같은 남자와 찍은 다정한 사진이었으며 다른 한 장은 보쿰 광산에서 찍은 장례식 사진이었다. 검은 상복을 입고 울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초최했다.

“어머니, 무슨 사진이지요?”

“어-오늘이 네 아버지의 제삿날이라. 사진을 보고 있어.”

“아버지라니요?”

“네 아버지는 서독 광부였어. 딘스라켄 광산에서 매몰 사고로 네가 태어나기 6개월 전에 돌아가셨어. 벌써 42년이 됐어.”

“매몰사고로? 서독광부로?”아들은 갑자기 큰 충격으로 혼돈에 빠져들었다.

결국, 어머니는 박형구 김오석 그리고 김정선의 세 사람의 관계를 알려 주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친아버지가 아니군요. 그런데도 나를 아들로 호적에 올렸군요. 아버지가...”

“.........” 어머니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울기 시작했는 데 애처러웠다.

“어머니.....” 아들은 말 없이 어머니를 포옹했다.

“네 아버지는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여. 그리고 너의 친아버지도 나를 사랑했어. 죽은 것은 운명이었어. 그러니 오늘 본 사진을 아버지에게는 말하지 말거라. 약속하지?”

“예....”

마침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람들을 만나지 않으며 서독광부라는 말을 입밖에 내지 않고 꽁꽁 숨어서 살아 온 이유를 알게 됐다. 뿐만 아니라 아들을 위해 과감하게 호주로 이민 온 것은 아들 진박을 위한 아버지의 희생이었음을 알게 됐다. -

“아버지 그동안 제가 잘 못했습니다. 저, 서독광부의 아들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고맙다, 아들아...” 아버지는 아들을 덥석 포옹했다.

*

아버지와 포옹하고 난 그날부터 아들은 진박이란 이름을 버리고 리차드가 됐다. 놀랍게도 그는 180도 완전히 달라진 새사람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독일 땅에 무참히 내버려진 미망인과 고아를 살려준 은혜가 너무나 고마웠다.

‘아버지는 훌륭한 광부였어!“

그는 밤낮으로 공부하고 노력했다. 마침내 비록 늦었지만 의과대학에 진학해 의사가 됐다. 그리고 강한 뚝심으로 정형외과 전문의사가 됐을 때 아버지, 오석은 대견스럽게 아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청주 깡패에게 둘러 쌓여 몰매를 맞고 소지품마저 빼앗기고 있었다. 그 때 쏜 살같이 달려와 깡패들을 주먹으로 물리치고 당당하게 구해 줬던 형구(형)의 위력 있는 장사의 모습이 었다. -

*

시드니에서 보낸 일주일은 내게 있어 최상의 날들이었다.

고향을 수없이 날아 다녔으며 멀리 화성에 가서 옛 친구를 만나고 온 느낌이었다.

다시 돌아 온 켄터키에서 나는 광부의 아들 리차드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 광부의 아들, 리차드! 나도 광부가 되고 싶어. 너의 두 아버지들 처럼.”

소설 끝.(2014년 크리스마스 날 아침)

 

저자: 연규호(延圭昊)

연세의대 졸업

펜 클럽, 한국문인협회, 소설가 협회 회원

소설집, 덕수궁 돌담길외 14 편

연세의대 동창회 공로상

미주. 장한 연세인상

미주 펜 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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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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