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꿈-트로이메라이"

2015.08.14 04:06

연규호 조회 수:440

단편소설(7): “꿈”(트로이메라이)

1.

아침부터 운수가 사나워 하루 종일 얼굴을 찌뿌리고 우울했는데 저녁 때, 뜻밖의 좋은 소식을 받았기에 그나마 얼굴을 조금 필 수가 있었다. 금년 초, 70세 생일을 막 지낸 할아버지(데비드)가 자신의 목숨처럼 아끼며, 친구들에게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해 온 손자(조셉)가 아침 10시경에 디즈니 음악 홀에서 열린 바이올린 경연대회(10살 부문)에서 생각지도 못한 실수를 범해 등수에 들지 못한 것은 물론 더 이상 음악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손자는 지난 몇 개월, 반드시 그리고 당연히 일등을 하겠다고 하루에 2시간 씩 완벽하게 연습했던 감미롭고 은근한 슈만의 트로이메라이(꿈)의 중간 부분에서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았는지 선율을 잃고 2-3초정도 머뭇거렸다. 겨우 생각이 떠 올라 허겁지겁 남은 후반부 곡을 그런대로 무난하게 마치는 듯 하다가 거의 끝날 쯤 해서 바이올린의 활을 바닥에 떨어뜨리는 더 큰 실수로 인해 곡을 다 마치지도 못한 채 무대에서 내려오고 말았다. 결과는 참담했다.

“조셉! 처음에 잘하다가 왜 그랬지? 나도 때로는 순간적으로 곡을 까마득하게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었어, 걱정 말고, 다음에는 잘해보자, 조셉! ” 할아버지는 애써 손자를 위로했으나 그는 서러운듯이 흑흑 소리를 내며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휴식시간을 이용해 중간에 밖으로 나와 죄지은 듯이 황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혹시라도 맘을 더 상하게 할까보아 손자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집에 도착해서도 그러했다. 으레 일등상을 받아 올 것으로 생각했던 며느리마저도 이 상황에서 입을 다물긴 마찬가지였다.

한국사람들 사이에서는 그래도 꽤 알려진 바이올린 연주자, 데비드 강(David 姜)에게 있어 오늘은 인생 최악의 불운한 날, 아니 운수가 사나운 날이었다.

데비드 강에게 남아 있는 오로지 마지막 희망은, 세 살 때부터 신동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바이올린을 잘 치는 손자를 맹훈련시켜 자신보다 더 훌륭한 바이올린 연주자로 키워 세상을 놀라게 하고 싶은 것 하나뿐이었다. 정확하게 7년 전, 그의 나이 63세, 손자 나이 3세 때부터 시작된 장기적인 이 계획은 할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온 가족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희망과 계획이 오늘 경연대회에서 무참히 깨져 버리다니. 정말 운수가 나쁜 날이었다.

*

집으로 돌아온 할아버지는 위층에 있는 그의 방으로 들어가자 무엇이 그토록 궁굼한지 옷도 벗지 않고 컴퓨터에 앉아 며칠 전부터 기다리던 한국으로부터 올 ‘이 메일(email)'을 열어 보았다.

‘연세대학교 교무처’라는 제목이 눈에 띄었다.

‘와!’ 그는 떨리는 마음으로 이메일을 열었다.

-“존경하는 강 철희(미국명, 데비드)선생님. 축하 합니다. 금년 가을학기부터.... 연세대학교 교무처장”-이라고 쓰여 있었다.

“아! 됐어. 가을학기부터 오라고....” 순간 데비드는 손자의 실수로 인해 우울했던 마음에서 순간적이나마 아주 기쁜 마음으로 전환되었다. 나쁜 운수도 있지만 좋은 운수도 가끔은 따른다고 생각했다.

*

금년 1월 중순, 데비드는 만 70살이 되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지난 50년, 마음속에 품고 살아온 ‘한(恨)’이 슬그머니 머리를 들고 그의 가슴속에서 기어 나오고 있었다.

“한을 풀어야 할텐데....” 그는 입술을 지긋이 깨물며 무엇인가 아주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며칠 후, 1월 20일 저녁, 괜찮은 중국집에서 데비드의 70세를 축하하는 가족 모임이 있었다.

물론 10살짜리 손자가 할아버지를 위해 축하해 준 바이올린 연주가 돋보였다. 6월에 있을 경연대회에서 일등을 하겠다고 열심히 준비 중인 슈만의 “꿈-트로이메라이”의 감미로운 선율이 할아버지를 기쁘게 해주었으며 눈물을 흘리게 했다.

생일케이크에 꽂힌 촛불을 ‘후’ 불어 끈 후, 데비드는 아들, 며느리 그리고 손자들 앞에서 뜻밖의 제안을 했다.

“아들아! 나도 어려서 꿈이 있었어. 그런데 못 이룬 꿈이었어, 그래서 살면서 그게 한이 됐어. 내나이 70세, 늦었지만 그 한을 풀려고 하니 나 좀 도와주겠니?”

“아버지? 무슨 꿈인데요? 도와 드려야지요.”

“어, 음악대학에 가려고 해...”

“음대에? 교수가 된다면 몰라도, 그런데 70세인대 누가 뽑아 주겠나요, 아버지!”

“그렇겠지. 어쨋거나 날 좀 도와줘.”

“물론이죠, 아버지.”

아들과 며느리는 아버지가 음악대학에 교수로 초청돼 그곳으로 가려는 줄 알고 몹시 궁굼 했다. 그러나 데비드는 6월까지 그 구체적인 꿈이 무엇인지를 발표하지 않겠다고 하니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가 발표하기로 한 6월이 바로 오늘이었다. 연세대학교 교무처장이 보낸 ‘이메일’을 통해 ‘좋다’라는 대답을 받았는 데 그놈이 바로 ‘아주 좋은 소식’이었다.

그런데, 이 좋은 소식을 오늘 저녁 감히 발표하지 못한 것은 경연에서 탈락돼 비통해 하는 손자의 마음부터 다스려 줘야 한다는 할아버지의 의무감이 앞서기 때문이었다.

연세대학교 교무처장이 이메일로 보낸 중간과 마지막 부분이 더 고무적이었다.

“강 데비드 선생님! 열심히 하십시오. 70 나이에 꼭 하셔야 한다니, 존경스럽습니다. 학교에서 적극적으로 뒤를 봐드리겠습니다. 가을 학기에 뵙기를 바랍니다. 교무처장.”

2.

할아버지는 화가 잔뜩 난 손자를 다독거리기 시작했다. 비록 10살에 불과하지만 경연대회에서 실패한 것은 큰 충격이었기에 바이올린을 만지지도 않았으며 더 이상 연습을 하지 않겠다고 하며 밥도 거르곤 했다.

-생각해보면 손자는 할아버지에게 가장 고귀한 꿈이요 희망이었다.

데비드가 60세 되던 해 손자를 보았을 때 그는 그의 분신을 본다고 생각했다. 아니 대를 이을 손자이기에 무조건 좋았다.

그리고 1년 후 데비드는 갑자기 가슴이 아파 병원에 입원했다. 관상동맥이 꽉 막혔다고 하며 응급으로 심장 수술을 받은 후 중환자 실에 누어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데비드는 손자의 사진을 24시간 옆에 두고 눈을 뜰 때마다 손자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나는 꼭 살아야 한다. 손자를 위해서도. 손자야! 조셉아!”그는 손자의 사진을 보면서 큰 힘 즉 면역을 얻었다. 죽음 앞에서 오로지 손자만이 그를 다독거려 준다고 느꼈다. 데비드를 치료해 준 것은 의사가 아니고 앙징맞도록 작은 손자의 손과 천진하게 웃는 모습이었다. 손자를 보는 것 자체가 면역이요 치료였다. 죽을 고비를 여러차례 넘겻다. 기적이라고 했다. 그리고 마침내 완전 회복돼 병원에서 나 올 수가 있었다.

“강 선생님이 사신 것은 순전히 손자를 생각하면서 나오는 초인간적인 그 힘, 아니 하나님의 은총이었습니다. 강 선생님은 손자와 한 몸이군요.”라고 심장내과 의사는 말해 주었다.

“그래, 나는 손자다. 손자는 나다.” 문득 워드워즈의 시가 생각났다.

‘어린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 일진데..... 손자는 할아버지의 아버지 일진데.’-

손자가 3살이 되던 해 할아버지는 온 힘을 다해 바이올린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데비드의 눈에는 분명 손자는 신동이었다.

“비록 나는 평범한 바이올린 연주자에 불과하지만 손자는 아녀! 그는 모찰트여. 파가니니여!” 그는 아들과 며느리에게 손자를 유명한 바이올린 연주자로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7년간의 피나는 노력과 할아버지의 사랑은 손자를 훌륭한 바이올린 연주자로 성장 시켰다.

그런데 그만 지난주에 생각지 못한 탈락의 고배를 마시다니, 할아버지의 마음은 정작 손자보다 더 슬펐기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

정확히 1주후, 저녁식사를 마치고 할아버지는 손자를 달래어 바이올린 연습을 시작하려고 했으나 아직도 화가 안 풀렸는지 할아버지의 권유를 강요로 생각하고 거부했다.

“조셉? 힘을 내거라. 그래 할아버지가 너를 위해 슈만의 꿈을 연주해 보마, 들어 보렴!”

“할아버지? 하필이면 그 곡을? 싫어요!” 손자는 뼈아픈 그 기억을 생각도 하기 싫어했다..

“조셉? 할아버지도 어려서 너같은 일을 여러차레 겪었어. 잘 견뎌야 해. 그리고 너는 할 수 있어.”

“언제 그랬어, 할아버지? 10살 때?”

“엉, 10살은 아니고 18 살 때, 대학에 들어 가면서.”

“18살?” 손자는 할아버지를 처다 보았다.

할아버지의 눈시울이 약간 붉어지고 있음을 보았다. 할아버지에게 소년시절의 크나큰 슬픔이 불현듯 떠 올랐기 때문이었다.

-멀리 한국 남해안의 항구도시, 삼천포가 눈에 떠 올랐다. 어린시절 그곳에서 아주 행복하게 지냈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 갈 때 쯤해서 그에게 불어 닥친 폭풍우는 아주 거셌다. 그는 폭풍우에 부딧쳐 비틀거리다가 결국 쓸어지고 말았었다.-

“자, 눈을 감고 조용히 듣기만 해 봐, 조셉!”

할아버지는 바이올린을 들어 천천히 감정을 내어 활을 당기기 시작했다.

은은하게 그리고 흐느끼듯이 할아버지는 바이올린을 치고 있었다. 마치 고향을 찾아 가는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한번을 끝까지 연주한 할아버지는 눈을 들어 손자에게 말했다.

“다시 한 번 잘 들어봐, 조셉!”

할아버지는 눈을 가볍게 감고 익숙한 손으로 활을 당겼다. 더 정답게 그리고 감정을 넣어서 활을 당기다보니 순간 그에게 닥아 오는 어린아이의 꿈이 있었다. 슈만의 꿈, 어린아이들의 정견(情見)이었다.

- 멀리 한국의 남해안(南海岸)에 작은 파도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팬티만 입은 아이들이 죽방 멸치 그물이 여기저기에 설치된 바닷가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었다. 400여년 전에 이순신장군이 거느렸던 거북선들이 지나갔다는 삼천포 앞바다였다.

어린 아이들의 정견(情見)속에 강 철희(할아버지의 한국 이름)라는 아이도 도 그곳에서 보였다.

소년 철희는 삼천포에서 어업을 하던 아버지 덕분에 잘 살았으며 천재라는 별명도 있었듯이 그는 서울로 유학와 D-고등학교를 다녔다.

고등학교 시절, 철희(할아버지)는 바이올린의 신동으로 불려 여기저기에서 콩클 입상을 했다. ‘슈만의 꿈’처럼 최고의 바이올린 연주가로 그리고 교수가 되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2학기 때, 연세대학교 음악대학에 조기 입학의 허락을 받았다.

그런데 그해 겨울, 호사다마라고 했듯이 비바람이 치던 날, 아버지가 갖고 있던 어선 들이 풍랑에 씰려 파선되는 사고가 있었다. 죽방 멸치 사업도 덩달아 박살이 나고 말았다. 갑자기 사업이 망하고 보니 생각지도 못한 빗쟁이들이 집에 와 빗 독촉을 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빗 독촉을 피해 어디론가 자취를 감췄으며 큰 집은 빼앗기고 작은 집에 세를 들어 7명의 대 가족이 거주하게 됐다. 대학에 입학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으나 워낙 신동이라는 소문 때문에 여기저기에서 돕겠다는 사람이 있어 입학을 하게 됐다.

1963년 3월, 개나리가 피기 시작하는 봄, 연세대학교 교정을 향해 걷고 있는 18세 소년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나뭇잎이 떨어져 앙상한 백양로(白楊路)길은 고행을 자초하는 길이었다.

입학식에서 강철희는 총장의 제의에 따라 바이올린 연주를 하는 영광도 있었다.

우울하나 묵직한 마슨의 타이스 명상곡을 선사했을 때 우뢰같은 박수가 따랐다.-

*

할아버지는 눈을 감고 슈만의 꿈을 반복해서 연주하고 있었다. 손자가 본 할아버지는 아주 이상해 보였다. 같은 곡조를 반복하기도 하며 생각이 안 나는지 곡을 치지 않고 멍하니 서 있기도 했다.

“할아버지! 뭐 하시는거요?”

“엉, 아니다.”

할아버지는 다시 바이올린을 치기 시작했다.

-백양로(白楊路)에는 모란꽃 봉우리가 피어오르기 시작했으며 어제 내린 봄비로 개나리가 만발했다. 그해, 1963년 4월 말이었다. 청송대(靑松臺)에는 소나무가 짙푸른 색깔로 변해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새들이 울고 있었다.

기타를 든 대학생들이 신나는 곡으로 숲속을 일깨워준다.

붉은 강의 골짜기에서 소를 모는 목동이 목욕하는 아가씨를 훔쳐본다는 노래(Red River Valley)였다.

붉은 벽돌로 지은 오래된 3층 음악관에는 담쟁이 넝쿨이 새순을 띄고 뱀처럼 기어 올라가고 있었으며 건물 앞뒤에는 아카시아 나무가 향기를 내뿜어 대학에 갖 입학한 철희의 마음을 훈훈하게 그리고 설레이게 만들었다.

빠끔이 열린 성악 연습실에서 꾀꼬리같은 목소리가 조금은 앙칼지게 흘러 나왔다.

입학식 직후 만나 통성명을 했던 같은 신입생 김정순의 목소리였다.

“나, 김정순이라고 해요, 마산, 마산여고에서 왔어, 철희씨 바이올린 연주 너무 좋았어요. 삼천포가 집이라면서요?” 경상도 사투리가 구수했다.

“예...” 철희는 부끄러웠다. 갑자기 가난해 져 등록금 걱정을 해야할 판에 한가하게 여학생 타령을 한다는 것이 마치 사치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철희에게 고구마도 갖다주고 호떡도 종이에 싸다 주었다. 첫사랑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신동이라는 소리를 듣던 철희도 집이 가난하다보니 학비는 물론 삼천포에 사는 어머니, 동생을 먹여 살리기 위해 나이트 클럽에 가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어린 학생들 개인 교습도 하다보니 공부할 시간도 연습할 시간도 없었다. 자연, 성적이 형편없었다.

“강철희? 너 무슨 문제가 있냐?”

기악과 과장이 얼굴을 붉히면서 충고를 했으나 가난해서 돈을 번다는 말은 차마 못했다. 자신도 없었고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삼천포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우울했다. 아버지가 몸져 누었다는 전갈이 왔을 때 그는 올 것이 왔다고 체념을 했다. 용케도 2학년을 마친 것이 기적이었다. 눈물이 찡 흘렀다.

방학을 이용해 잠시 삼천포에 내려오니 집안이 온통 찬 공기속에 서 허우적 거리고 있었다.

“등록금을 못해 줘서 미안하구나...” 아버지는 더듬거렸다.

고추장에 찍어 먹었던 그 죽방멸치도 이젠 그림의 떡이였다.

다시 서울로 올라와 아르바이트로 나간 곳이 역시 나이트 클럽이었는데 이 사실이 기악과 과장에게 보고 됐다.

장학금을 더 줄테니 순수 음악에 전념하기를 바란다는 경고를 받았다.

‘학교에 손을 내밀 수는 없어.’

그는 학교를 휴학하고 세상을 피해 군대에 입대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허탈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정순씨, 군에 입대하겠어.”

“군대에? 가서 뭐하게? 3년은 썪다 온다는데...바이올린은 언제하고?”

“.................” 그는 말을 못했다. 사실이었으니까...

군대 3년하고 나면 분명 손가락이 굳어 버린다고 선배가 한 말이 생각낫다.

덕수궁 앞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먹고 덕수궁 돌담길을 같이 걸었다. 그리고 살며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가 그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음은 그의 손이 따슷해서였다.

“군에 가면 면회와! ”

“면회? 엉, 어.....” 그녀는 얼떨결에 대답을 했다.

훈련받고 배치 받은 곳은 멀리 강원도 홍천에 있는 사단이었다. 다행이 바이올린 연주자임을 안 사단장은 특별히 종군 병으로 배치해 교회 일과 그의 아들과 딸을 가르치는 가정교사의 일을 맡겼기에 천만 다행이었다.-

*

바이올린을 치고 있던 할아버지가 순간 비틀하더니 활을 땅에 떨어 뜨렸다.

“어! 할아버지? 활을 떨어뜨렸어! 할아버지!”

“아이구, 미안해!” 할아버지는 곁에 있는 의자에 주저 앉았다.

손자는 할아버지가 손자의 사기를 올려주기 위해 고의로 활을 떨어 뜨린 것은 모르고 “와아! 할아버지도 실수를 하네! 나처럼....” 그리고 그는 활짝 웃었다.

“그렇지? 할아버지도 이런 때가 있었다고 했지.”

그런데 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생각하기도 싫은 집안의 몰락과 세상을 피해 찾아간 군입대라는 인생의 그늘이 이렇게 바이올린을 치는 중에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는 정말로 눈을 감고 의자에 기대었다.

“할아버지? 어디 아파?”

“...........”

“할아버지? 할아버지?”

손자는 할아버지가 아프다고 생각했는지 아래층으로 달려 내려가 아버지에게 ‘할아버지가 아퍼 의자에 누웠다고’ 소리를 쳤다.

아들과 며느리가 허겁지겁 이층으로 달려 올라와 눈을 감고 있는 할아버지를 흔들었다.

“아버지! 시아버지!”

마침내 할아버지가 눈을 뜨고 보니 아들과 며느리가 곁에 서서 걱정이 된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잠시 슈만의 꿈을 연주하면서 멀리 내 고향에 다녀왔구먼....”

“고향에요? 언제?”

“방금 전에. 멀리 삼천포로 해서 연세대학교로 그리고 군에 입대해 강원도 홍천에 갔다왔어...”

아들과 며느리는 시아버지가 말하는 것을 이해 하지 못하고 그에게 무슨 정신병이라도 생긴 듯이 긴장을 하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연주하다가 활을 떨어 뜨렸어....할아버지도 나처럼 말야!”

절대적이라고 믿었던 할아버지가 활을 떨구는 실수를 한 것을 손자는 아버지에게 일러 바치면서 무슨 복수를 한듯이 쾌감을 느끼는 듯했다.

3.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고 했듯이 할아버지의 실수를 본 손자가 깔깔 웃으며 안도의 마음을 갖게 된 것이 할아버지에게는 너무나 기뻣다. 일부러라도 또 떨어뜨려 손자가 기뻐한다면 백번이라고 하고 싶엇다.

마침 아들과 며느리가 그의 곁에 왔으니, 이번 기회에 ‘운수 좋았던 그 사건’, 아니 ‘연세대학교 교무처장이 보낸 그 행운의 편지’를 알려주고 싶었다.

“아들아! 내가 일주 전에 연세대학교 교무처장으로부터 좋은 답신, 허락서를 받았어...”

“아, 그럼 아버지가 교수가 된다는 말입니까?” 아들은 앞질러서 말했다.

“사실은 교수가 아니고 기악과 3학년으로 복학 하려는 허락서 였어, 나는 대학을 끝내지 못하고 미국에 와서 일하다보니 공부할 기회를 놓쳤어.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 못 다한 과정을 마저 끝내고 싶어...”

“뭐라고요? 아버지!” 아들과 며느리는 놀랬다. 존경하는 아버지(시아버지)가 한국에서 대학과정을 끝내지 못했기에 갖고 있는 한(恨)이 있었다니. 분명 아버지는 한국에서 음악대학을 마치고 미국에 와 다시 음악을 전공한 후 바이올린 연주도 하며, 부동산 자격증을 받아 그 일에 전념해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을 이루어 유명 부동산 회사의 브로커로 여러명의 직원을 가느리고 있는 데, 그 뿐인가 틈틈이 교회와 지역사회에서 바이올린 연주자로 큰 봉사하는 유명인사가 됐는데... 큰 충격이었다.

“아버지? 70이 넘었는데 젊은 애들과 섞여 2년간 대학 생활을 하시겠단 말이죠? 건강도 안 좋은데. 차라리 그 돈, 대학에 장학금으로 헌납하시고 명예 학위를 받으시죠.” 아들은 불멘 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대학 중퇴(中退)와 졸업(卒業)’은 큰 차이가 있었다.

-미국에 와 2년제 전문대학을 다니며 틈틈이 음악 학점도 받았으나 그가 전공한 것은 음악과 아주 먼 경영이었다. 말이 경영이었지 학위도 없었다.

처음에 갖은 직장은 초등학교와 중등학교 음악 선생이었다. 그런데 1년 후 학교 교장이 그를 불러 진지하게 물었었다.

“강선생? 음악 학사 자격이 없는 것 같은 데 혹시 경력을 속여서 선생이 된 것 아뇨?

사립학교는 괜찮지만 공립학교에서는 학사자격증이 있어야 합니다. 자격증을 2주내에 갖추어 제출해 주기 바랍니다. 아니면 사임하던가....“

결국 데비드 강은 음악 선생 자리를 사임하고 실업자가 됐다.

“음악 학사 자격증이 있어야 하는데.....”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로스앤젤레스 K. 교향악단에 단원이 됐다. 어느 교회에서 연주하는 그를 우연히 본 단장은 혀를 차며 놀랬기에 이유를 막론하고 그를 그의 교향악단의 단원으로 채용했다.

그의 연주가 돋보였기에 제2 바이올린에서 제1 바이올린으로 그리고 마침내는 상위 좌석으로 올라가게 됐을 때, 까장 거리는 백인 단원이 그의 학력을 조회하고 시비를 걸어왔다.

“데비드는 음악 공부를 제대로 이수하지 못한 것으로 압니다. 겨우 음대 2학년 수료자인데 어떻게 우리 교향악단에서 받아 줬는지?” 그는 단장에게 항의를 하기 시작했으며 몇몇 단원들도 동조하였다.

“연주자는 학력이 아니고 실력이다”라고 단장은 엄호하고 나섰으나 반대가 거세지면서 단장마저 자리를 유지하기 힘들게 되자, “내가 차라리 사임하겠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가슴이 미어지는 느낌으로 어지러웠다.

부동산 부로커란 위치는 잘만하면 수입이 좋았기에 데비드는 마침내 좋은 집도 사고 자녀들도 훌륭한 대학을 졸업시켜 안정된 직장을 갖게 했다. 그리고 손자와 손녀를 보게 되면서 그는 ‘내가 자식을 위해 할 일은 다했다.’라는 자신을 갖게 됐다.

가끔 주어진 솔로 바이올린과 교향악단과의 협연에 쓰인 그의 음악경력은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해 연주가 위축되기도 했다.

대부분의 연주자들은 미국유수의 음악대학과 독일 또는 오스트리아에서 받은 석.박사가 그들의 과거를 드높여 주었으나 데비드의 경력은 연세음대 수료로 끝나곤 했다. 너무나 초라했다. 수료보단 졸업이라도 했으면 하고 갈망했다.

“아! 나도 언젠가는 대학을 졸업하고야 말리라....” 그는 때를 기다렸다. 그게 바로 오늘이 될 줄이야.....

*

“아버지, 죄송합니다. 아버지가 그런 마음 고생을 하셨다니, 전혀 몰랐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바라보며 안스러운 마음과 대견한 마음으로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

“아버지!” 아들은 아버지에게 와락 달려 들어 허깅을 하였다.

“고맙구나...” 아버지 데비드는 곁에 있는 손자의 손을 잡았다.

영문을 모르는 손자는 하는 대로 끌려갔다.

“아버지, 하시고 싶은 학업을 꼭 해내세요. 도와 드리겠습니다. 아버지가 저를 위해 하신 것처럼....”

4.

마침내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손자, 3대는 하나가 됐다. 피로 엮은 한 가계였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8월에 한국에 가 등록을 하게 되며 9월부터 심장이 기차의 기관처럼 힘차게 움직이는 대학생이 된다니, 할아버지의 마음은 옛날 무거운 발걸음으로 올라갔던 연세의 길 백양로를 이번에는 힘차고 가볍게 달려가리라고 마음먹었다.

어린 손자는 할아버지가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절대적이며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그 할아버지도 손자처럼 실수를 한다는 것이 그의 마음속에서 이처럼 활기를 불어 넣어 준다니.....마치 백양로를 향해 다시 걸어갈 할아버지의 가슴속으로 들어 간다고 생각했다.

“자! 조셉, 다시 바이올린을 잡아봐! 그리고 슈만의 꿈을 다시 연주하거라. 다시! 이번에는 악기를 떨어뜨리지 말고.....”

“예.” 손자는 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조셉. 너의 대답은 마치 맹호의 울음같구나...맹호(Tiger)!"

"호랑이? 할아버지?“

“그래. 호랑이. 이 할아버지는 옛날에 호랑이였어. 타이거....”

“와!”

-1966년, 여름 강철희 상병은 홍천을 떠나 멀리 월남, 맹호부대로 차출되었다.

LSD테 실려 도착한 곳은 월남 중부, 퀴논이었다. 야자수와 십자성이 밤낮을 알리는 그곳에서 1년여 근무를 하였다. 죽을 고비도 여러번 있었으나 그는 죽지 않았다. 명이 길었다고나 할까...

월남에 있는 동안, 삼천포에서 실음실음 앓고 있던 아버지가 운명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그는 밤하늘의 십자성을 바라보며 울기만 했다. 한 가닥 남은 희망도 사라지고 보니 온 세상이 그를 야유하는 듯햇다.

그리고 다음해 1968년, 4월 제대를 한 후, 미국에 올 기회가 있었다. 뿔뿔이 흩어졌던 식구들 중 미국에 온 누나를 보기 위해서였다.

공항에 내리니 주머니에는 딱 10불이 있었다. 담배를 한 갑 삿다. 그리고 불을 부쳐 ‘후’ 하고 내뿜으니 지금까지 지내왔던 서글픔이 봄눈처럼 녹아 내리며 부채같은 야자나무가 그를 여기에 남으라고 부르는듯 했다.

이제 모든 것을 정리하고 새로운 인생을 여기 미국에서 개척해야 했다.

‘아메리칸 드림(미국의 꿈)’이 슈만의 꿈처럼 그의 작은 마음속에서 기지개를 피는듯했다.

“절차탁마(切磋琢磨. 톱으로 자르고 줄로 쓸고 끌로 쪼며 숫돌에 갈고).” 의 인생이 시작됐다.-

“와! 할아버지? 월남에 가서 맹호가 됐어? 와 할아버지, 타이거.”

“그래. 할아버지는 타이거였어. 너도 다시 일어나는 맹호가 돼야지.”

“할아버지!”

손자는 바이올린을 다시 잡았다. 그리고 일주일전에 떨꾸었던 그 곡, 슈만의 꿈(트로이메라이)을 감정을 넣어 침착하게 연주하기 시작했다. 멋진 연주가 진행됐다.

경연대회에서 잠시 잃어버렸던 그 부분에서 더 힘을 내 활을 당겼다. 순간 할아버지도 바이올린을 잡았다 그리고 손자와 같이 감미롭게 활을 당겼다.

“할아버지? 잘했지?” 손자는 자랑스럽게 물었다.

“그래, 조셉, 잘했어. 훌륭했어. 그런데 손자야 네게 부탁이 있어. 부탁이...”

“할아버지? 무슨 부탁?”

“이제부턴 너 혼자 하는 거다. 2년간 할아버지는 한국에 가 못 다한 공부를 마치고 온다.

2년 후, 너는 할아버지보다 더 훌륭한 연주가가 되어야 한다. 알겠니?“

“2년간? 예. 하겠습니다. 할아버지!”

“그래야지, 조셉!”

순간 그의 귀에는 “슈만의 꿈”이 멀리서 강하게 그리고 약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삼천포 바닷가, 백양로가 있는 연세교정, 산림이 꽉 들어찬 홍천, 대포소리가 요란한 퀴논의 밤 그리고 까마득하게 잊혀졌던 정순의 쭈굴쭈굴해진 얼굴이 데비드의 힌머릿칼속으로 잦아 들어오고 있었다.

“아! 9월이 오면 나는 21살 대학생이 된다.”

소설 끝.

후기: 아메리칸 드림(미국의 꿈)을 갖고 태평양을 건너온 수많은 한국이민자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미국의 꿈이란? 죽어라하고 밤낮 없이 종처럼 일만 하는 것.”이라고. 그렇다. 나도 동의한다. 미국에 온 후 나는 하루도 마음놓고 쉬어 본 적이 없었다. 끊임없이 걸려오는 응급전화와 병원, 간호원들의 쓸데 없는 전화로 인해 멀리 가보지도 못한채 어느새 70 노인이 돼 은퇴를 선언하고 보니 머리가 시원하다.

미국의 꿈-아메리칸 드림은 내게 있어 “내과 전문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만만치 않았다. 영어가 신통치 않았으며 정신 무장이 안 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한국의 꿈이 미국의 꿈을 더디게 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내게도 못 다한 꿈이 아직도 있다. 이 나이에 한번 도전해 보고 싶다. 나의 친구처럼, 나도 도전하고 싶다.

“친구야! 힘내라! 힘내. 꿈은 아직도 네 앞에서 너를 기다린다.”

그러기에 이 소설집의 제목을 “꿈‘이라고 했다. 못 다한 나의 꿈 그리고 너의 꿈...꿈...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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