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모음 (2)

2016.01.26 09:16

김영강 조회 수:524


6. 천국의 초원에서 달리다


     그날은 대입 체능고사를 치르는 날이었다. 그 당시, 문교부 입시정책이 어찌나 변덕이 심했는지 해마다 입시생들은 가슴을 졸여야 했다. 내가 입학하던 1962년도에는 대학 정원을 거의 반으로 줄여버렸고, 전국적으로 국가시험을 실시하여 그 정원만큼만 합격을 시켰다. 입시의 문이 아주 좁아진 것이다. 게다가 체능고사 비율이 총점의 약 15% 를 차지해 학생들은 지정된 다섯 종목인 달리기, 팔굽혀펴기, 높이뛰기, 넓이뛰기, 공던지기에 매달려 죽기살기로 연습을 했다.

     달리기 시험 때였다. 모두들 긴장된 마음으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유난히 한 학생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부드러운 털이 잔잔한 물결을 연상케 하는 연파랑 반코트를 걸치고 서 있었다. 키도 크고 얼굴도 예뻤다. 미스코리아에 나가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모두가 단발머리였던 시절인데도 그녀는 긴 머리를 포니테일 스타일로 높이 묶었었다. 곁에서 아버지인 듯한 남자가 큰 목청으로 그녀에게 뭔가를 한창 설명하고 있었다. 운동시합에 나가기 전 코치가 작전지시를 하고 있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그 남자 역시 키가 굉장히 크고 체격도 컸다. 번쩍번쩍 빛나는 금테두리 모자를 쓰고 군인 장교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꼭 맥아더 장군 같았다. 어쨌든 그들 둘은 내 눈에 참 멋있게 비쳤고, 보통 사람들과는 좀 다른 이국적인 인상을 풍겼다.


    그녀 차례였다. 출발 신호를 정확히 포착하고 그녀는 달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갑자기 남자가 고함을 치더니 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라인 밖에서 뛰긴 했으나 어떻게 제 3자가 시험관의 제지 없이 같이 뛸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이해가 안 되지만, 어쨌든 그는 달리면서 손뼉까지 쳐가며 소리를 질러댔다. 그들의 뛰는 모습은 마치 들판을 달리는 야생마처럼 힘차보였다. 그리고 종착점에 도달하고는 두 손을 마주잡고 팔짝팔짝 뛰었다. 정해진 타임에 꼴인을 하여 만점을 받은 게 분명했다. 아마도 겨우 해낸 것 같았다.


    한데, 그날 그 달리기에 내 인생여정이 걸려 있었음을 그 누가 알았으랴··· ···.


    나는 그 친구랑 4년 동안을 한반에서 공부했고, 그녀의 바로 위 오빠와 결혼을 했다. 그래서 그 친구와 시누올케 사이가 되었고 그 멋있는 남자는 내 시아주버니가 되었다. 그는 친구의 아버지가 아니라 스무 살이나 나이 차가 나는 큰오빠였다.

     어느 날, 시누이가 말했다.

     “그때 내가 왜 죽기살기로 뛰었는지 알아? 내 국가시험 점수가 시원치가 않아 체능고사에 만점을 못 받으면 떨어질 수도 있었거든. 한데 달리기가 제일 문제였어. 그래서 큰오빠랑 매일 아침, 효창공원에 가서 피나는 연습을 한 결과 만점을 받았지 뮈냐. 그래서 달랑달랑 겨우 붙었어."

     만일 달리기에서 만점을 받지 못했더라면 우리의 인연은 그날로 끝났을 것이다. 아니, 그녀의 시야에는 내가 비치지도 않았으니 인연이랄 것도 없다. 그러나 인연은 또 인연을 낳아 그녀의 달리기가 나의 운명을 결정짓는 일생일대의 대사건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만 4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재학 시절엔 팔방미인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다재다능해 교수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학생이었다. 활달한 성격에 교정을 누비고 다니며 동급생은 물론이고 선후배들 간에도 인기를 끌었던 그녀였다. 과 퀸으로 선출된 것은 물론이고, 메이데이 때에는 수석시녀의 영광을 안기도 했다.


    50년을 훌쩍 넘어선 긴 세월이 흐른 지금도 내게는 그날의 달리기 광경이 어제 일처럼 눈앞에 선명하다. 그날, 손뼉을 쳐 가며 같이 달렸던 시아주버니 역시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천국에서 만난 두 사람, 그들은 지금, 두 손을 맞잡고 팔짝팔짝 뛰고 있을까?

     아니면 천국의 초원에서 달리고 있을까?



7. 아름다운 인생의 노을 (2015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해 유월에는 서쪽 하늘에 펼쳐진 노을이 유난히도 붉게 타올랐다. 퇴근 후 달리는 차안에서 본 프리웨이 하늘에 핀 노을이었다. 황홀하리 만치 아름다운 한 폭의 거대한 그림 같은 노을, 질주하는 차들이 온통 그 찬란한 아름다움에 취해 노을 속으로 빠져드는 듯했다. 그러다가 노을은 어느새 핏빛 슬픔으로 변해 내 가슴에 고인 눈물을 자아냈다.

     평상시에는 무심코 보아온 노을이 그해 유월에는 유난히도 내 가슴에 닿았다. 맞은 편 하늘이 온통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노을을 마주하고 운전을 하면서 나는 울었다. 엉엉 소리를 지르며 통곡했다. 나만의 유일한 시간, 또 나만의 유일한 공간이 달리는 차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소리 내어 울고 싶어도 집에서는 그럴 공간도 시간도 없었던 그 시절의 내 미국생활이었다. 집안일, 회사일 그리고 시댁일에 몸을 쪼개야 하는 판국에 저녁에는 학교까지 다녀야했으니 몸이 마음을 따라가느라고 무척이나 힘이 들었다. 그땐 아마 젊음이라는 것이 나를 그만큼이라도 지탱을 해준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 와중에 나는 아버지의 부음을 들었다. 퇴근시간이 다 돼갈 무렵이었다. 벨이 울려 수화기를 드니 뜻밖에도 서울에 있는 동생이었다. 첫마디가 “큰누나,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였다. 동생이 분명히 그렇게 말했는데도 나는 아무런 감정이 일지 않았다. 눈앞이 하얘지며 정신이 멍-- 했다.

     ‘그렇게도 건강하시던 아버지께 심장마비가····.’

     믿어지지가 않았다. 수화기를 막 놓는데 옆에 있던 동료가 안색이 안 좋다면서 무슨 일이 생겼느냐고 물었다. 그때서야 눈물이 났다. 복받치는 눈물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나는 책상에 엎드려 이를 악물고 소리를 죽이며 흐느꼈다.

     1985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올해 2015년이 추모 30주년이다.


    한 10여 년 전이었을까? 미국을 방문한 여학교 친구를 만났을 때였다. 친구는 대뜸 아버지 안부부터 물었다.

     “그렇게 일찍 돌아가시다니··· ···. 너의 아버지는 정말 멋진 분이셨어.”

     친구는 자신의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양, 회상에 젖어 눈물을 글썽였다.

     “너, 생각나니? 우리가 중학교 다닐 때이니 아주 까마득한 옛날 일이야. 그런데도 나는 너의 아버지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게 떠올라. 훤칠한 키에 바바리코트를 입고 계셨던 모습이 참 멋있었지만, 더 멋있었던 것은 너를 데리고 탁구장에 가신다는 것이었어. 그날, 방과 후에 학교 앞 빵집에 앉아 있는데 너의 아버지가 널 데리러 오셨어. 그리고 거기 있던 친구 모두에게 빵을 한 봉지씩 안겨주셨어.”

      단 한 번 본 아버지의 모습이 가슴에 각인되어 나를 떠올리면 항상 아버지의 모습도 같이 떠오르곤 했다면서, 그날 밤 친구는 어린 딸을 데리고 탁구장엘 가는 젊은 아버지가 부러워 잠을 설쳤다고 한다. 아버지랑 같이 탁구장에 가서 신나게 탁구를 치던 기억은 있으나, 나는 그 일들을 그냥 대수롭잖게 흘려버렸었다. 얘기를 듣는 순간, 친구한테서 호되게 한 대 얻어맞은 듯, 정신이 번쩍 났다.


    100년의 허리를 접은 반세기라는 세월이 흐른 후에도 친구의 가슴속에는 아버지의 모습이 그렇게 각인되어 있었건만, 정작 딸인 나는 그 아름다운 추억들을 잊어버리고 살았다니····.

     아! 아버지···.

     아버지를 미국에 한 번도 모시지 못한 것이 가장 후회스럽다. 좀 지나면 큰 효도나 할 것처럼 하루하루 미루어 온 내 그릇된 처사가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낳았다. 가버린 세월을 거슬러올라갈 수 없는 지금, 눈앞의 세월을 붙잡고 늘어져 본 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때는 이미 늦어버려 이제는 초청할 아버지가 안 계신 것을.

     아버지는 우리 오남매를 대학 졸업할 때까지 뒷바라지를 해주시고, 또 결혼까지 다 시키신 후에 세상을 떠나셨다. 자신의 임무는 아주 완벽하게 끝내신 것이다. 그러나 자식들한테서는 효도 한 번 제대로 못 받으셨다.


    지금도 노을은 변함없이 서편 하늘에 피어 있다. 그 속에 선명하게 그려진 아버지의 발자국이 보인다. 그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는 내 인생이 보인다. 살아온 날들보다 살아갈 날들이 그 반에 반반도 못 미치는 지금, 나는 그 남은 여백에 정성을 다하여 그림을 그릴 것이다.


    아버지처럼, 아름다운 인생의 노을을 남기기 위해.



8. 복권 선생님 (2001년)


     어느 날, 동료 선생님 한 분이 아이들이 쓴 글을 내밀면서 한번 읽어보라고 했다. 선생님에 관한 학생들의 평가서였다.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은 선생님이 잘 가르쳐주셔서 많은 것을 배웠고, 또 감사하다는 것에 조금씩 그 내용을 달리했지만 유독 한 학생만은 개개인에 관심을 가져준 사실이 감사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선생님은 늘 웃는 낯으로 우리를 대하고 또 항상 재미있게 가르쳐서 정말로 좋다. 내가 결석을 하면 꼭 숙제와 그날에 배운 것들을 챙겨주고, SAT 시험도 잘 봤는지 못 봤는지 꼬박꼬박 챙겨준다. 참 훌륭한 선생님이다. 우리 학교에 선생님 같은 분들이 많으면 좋겠다. 학생들을 사랑하고 챙겨주는 선생님은 주님이 우리에게 준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내 편지가 약간 느끼하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나는 정말로 선생님을 존경한다. 이런 선생님을 만나게 된 나는 ‘보권’에 당첨된 것 같다. 참 감사하다.”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인데도 ‘복권’을 ‘보권’이라고 쓴 것을 제외하고는 맞춤법과 문장 구사가 정확했다. 그리고 띄어쓰기도 거의 정확했고, 무엇보다도 복권이라는 어휘를 비유로 쓴 것이 놀라웠다. 동료 선생님 역시 복권이라는 단어를 쓴 것이 신기해서 내게 평가서를 보여준 것이라고 했다. 그 후부터 나는 그분을 복권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한국학교와 인연을 맺은 지도 어연 3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1978년에 시작하여 들랑날랑하다가 오랜 만에 다시 돌아와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이곳 밸리지역 한국학교에 ‘SAT II 한국어 Class'가 신설되어 내가 그 반을 맡게 된 것이었다.

    

    요즘은 대학 입학시험에 'SAT II 한국어'를 택하는 학생들이 날로 늘고 있는 실정이다. 통계에 의하면 매년 3000여명의 학생들이 ‘SAT II 한국어’를 선택한다고 한다. 물론 학생 개개인의 능력에 따라 차이는 있겠으나 보편적인 입장에서 볼 때, 스페니쉬 등 다른 과목을 택하는 것보다 한국어를 택하면 더 좋은 점수를 받을 수가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시험문제가 쉽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부모님을 비롯한 주위의 사람들에게서 늘 접할 수 있는 모국어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이러한 실정으로 보아 ‘SAT II Class'가 따로 편성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은, 내가 한국학교에 첫발을 디뎠던 당시는 중고등 학생이라 해도 한국어를 읽기는커녕 말도 전혀 못하는 정도의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다.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인데도 한국말은 기본이고 읽고 쓰는 것도 완전히 익힌 상태라 그 실력이 옛날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향상되어 있다. 물론 맞춤법이나 문장구사에는 완전하지 못하나 다른 항목에서는 별문제가 없는 것이다. 3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만큼 한국학교가 큰 기여를 한 결과일 게다.

     집에서는 반드시 한국말을 사용하며, 한국 텔레비전과 비디오를 즐겨 보는 것이 크나큰 도움을 주었을 것이고, 아주 어릴 적부터 한국학교에 계속 다닌 것도 단단히 한몫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부모의 노력이 가장 큰 밑거름이 되지 않았을까?


    우리 반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그들이 엄마 손에 이끌려 한국학교에 첫발을 디뎠을 때를 생각해 본다. 그때는 그들의 키가 엄마의 허리에도 못 미쳤던 것이 이제는 엄마의 키를 훌쩍 넘어섰다. 아이의 키가 자란 만큼 거기에는 엄마의 정성이 담겨져 있다.

     그때 가르친 아이들이 지금은 어엿한 사회인이 되어 전문직에 종사하고 있다. 그리고 어릴 땐 엄마 때문에 할 수 없이 한국학교에 다녔었는데, 그것이 이리도 큰 도움이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한 적이 없다고 하면서 지금은 엄마한테 감사해 한다. 티끌 모아 태산을 이룬다는 속담이 있듯이 일주일에 세 시간이라는 연륜이 쌓이고 쌓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단단히 기반이 다져진 것일 게다.

     지금 미국정부에서는 한국어 프로그램에 막대한 자금을 배정하고 교포계 학생들과 한인 2세들을 특별 지원하고 있다. 모든 여건들이 앞으로도 한국학생들에게 계속 유리하게 작용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부모님은 이러한 사실들을 알아야 하고, 또 아이들에게 그들이 어릴 적부터 일찌감치 방향제시를 해주어야 한다.

실리 면을 떠나서 생각해 보더라도, 부모가 우리의 언어를 자녀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가장 값진 유산이 아니겠는가?

     나 역시 학기 마지막 날에는 학생들로 하여금 나의 평가서를 쓰게 한다. 선생님이 학생들의 성적을 평가했으니 학생들도 선생님의 성적을 평가해 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학생들의 의견을 반영하기 위해 선생님의 좋은 점만 쓰지 말고 나쁜 점, 또 예를 들어주며 고쳐야 할 점들을 위주로 쓰라고 한다. 물론 이름은 밝히지 않는다.

     복권이라는 어휘를 떠올리며 나는 생각한다. 내가 아이들을 만난 것이 바로 복권에 당첨된 것이라고.



9. 빨간 코트 (2002년)


     미국에 온 후, 엄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서울에 사는 시누이가 이곳을 방문해, 남편과 함께 셋이서 백화점엘 갔었다. 그녀는 나외 띠동갑니다. 미국을 자주 드나드는 그녀인지라 유명 백화점은 여기 사는 나보다도 더 훤하다. 삼층으로 막 들어서는데 유난히 눈에 띄는 코트가 있었다. 늘씬한 마네킹이 아주 예쁜 빨간 코트를 입고 있었다. 그녀도 시선이 끌렸는지 얼른 다가가서는 손으로 코트 자락을 만져보았다. 짙은 남색이나 깜장색을 즐겨 입는 그녀에게 빨강은 당치도 않는 색깔인 것을 나는 잘 안다. 그냥 지나치는 나를 시누이가 붙들었다. 한번 입어보라는 것이다.

     사실 이곳 로스앤젤레스의 겨울은 코트가 없어도 별 문제가 없다. 더구나 빨강은 내게도 당치 않는 색깔이다. 아주 짙고도 밝은 빨간색이기에 더 그랬다. 사양하는 내게 시누이는 부득부득 입어보라고 했다. 살 마음이 손톱만치도 없는 상태에서 마지못해 입으면서 가격표를 보니 값이 이만저만 비싼 게 아니었다. 그녀는 예쁘다고 탄성을 질렀다. 내가 봐도 아주 괜찮았다. 허지만 입지도 않을 걸 살 필요는 없는 것이다. 또 남의 주머니에서 거액의 돈이 나오는 것이기에 더 그랬다. 빨간색을 싫어한다는 이유를 붙여 나는 완강히 거절했다.

아니, 그랬더니 벽에 걸려 있는 초록색 코트를 사주겠다는 것이 아닌가?

     뭔가 내게 사주고 싶어 하는 시누이의 마음을 헤아리니 고마워 가슴이 뭉클했다. 할 수 없이 또 입어보았다. 그것도 잘 어울렸다. 화끈한 그녀는 두 개 다 사라면서 돈 낼 차비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 여기는 겨울에도 날씨가 춥지 않아 코트가 필요 없다는 것을 강조했다.

     옆에 있던 남편이 내 허리를 꾹꾹 찔렀다. 두 개 다 사라는 신호다. 나는 남편 속에 들어갔다 나온 듯이 그의 내심을 환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누이는 부자니까 받아도 괜찮아’ 하는 남편의 말이 귓가에서 들려왔다. 부자든, 부자가 아니든 간에 돈의 가치는 똑같다. 코트 값이 나한테 큰돈이면 그녀에게도 큰돈인 것이다. 그리고 설사, 내가 부자라 하더라도 나는 코트 하나에 그만한 돈을 쓸 용기는 없다. 남편을 생각하는 시누이의 마음이 모성애만큼이나 각별하다는 것을 잘 알지만 한두 번도 아니고, 정말 미안해서라도 빨간 코트를 받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얌체 같애. 누나한테 맨날 넙죽넙죽 받기만 하고.

     누나니깐 그렇지.

     그는 실실 웃고 나는 찡그리고, 둘은 무언의 표정과 행동으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눈치 빠른 시누이가 남편과 한마음이 되어 말했다.

     “사주면 그냥 고맙게 받으면 되는 거야. 사양하는 것도 지나치면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만든다구. 자꾸 그러면 정말 안 사줘. 집에 가서 후회하지 말고. 이런 코트는 늘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 놓치면 다음엔 살라 그래도 없어서 못 사. 그리고 이 디자인은 유행에 상관없이 평생을 입을 수 있어.”

그리고 진짜로 기분 나쁜 말투로 뒷말을 이었다.

     “왜 자꾸 빨간색을 싫어한다 그러니? 빨간색이 너무 잘 어울리는데····.”

     값이 어지간했으면 나도 그렇게 극구 사양은 안 했을 것이다.

     그렇게 실랑이를 하다가 하나만 사기로 낙착을 했는데, 남편도 시누이도 백화점 직원도 초록색보다는 빨간색이 더 예쁘고 내게 더 잘 어울린다고 했다. 그래서 빨간 코트를 샀다. 색깔로 따지자면 나는 빨강보다는 초록을 훨씬 더 좋아한다.


    한데 나는 지금, 겨울이면 그 코트를 즐겨 입으면서 그때 둘 중에서 빨간 코트를 선택한 것은 정말 잘 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유행이 바뀌어도 몇 번을 바뀌었을 세월이 흘러버렸지만 나는 빨간 코트를 애용한다. 시누님 말대로 진짜 유행에 상관없이 평생을 입고 있는 것이다. 이 나이에는 걸맞지 않은 색깔인데도 아직도 “괜찮다”는 말을 듣는다. 색깔도 디자인도 지금에 와서야 더 내 마음에 든다.

     길이도 무릎 아래로 한참 내려왔으나 치렁치렁한 긴 느낌도 들지 않는다. 겨울 코트를 자칫 잘못 입었다간 마치 도라무통이 굴러가듯 짜리몽땅하게 보이기 십상인 내 작은 몸매다. 한데 이 코트는 예나 지금이나 나를 아주 늘씬하게 만들어 준다. 화장을 정성들여하고 머리를 잘 손질한 후, 까만 구두와 핸드백으로 조화를 이루어 거울 앞에 서면 나는 그만 자화자찬에 빠진다. 어떤 땐 내 몰골이 너무 흉측해 거울이 보기조차 싫어 일부러 외면을 하면서도 또 이런 때도 있어 위로가 된다.


    사실, 내가 미국에 처음 왔을 때, 놀란 것 중의 하나가 할머니들이 립스틱을 빨갛게 칠하고 빨간 옷을 입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이상하지가 않고 아주 보기 좋았다. 이제 나도 미국 할머니가 돼버렸나 보다.

나이 탓인지 세월이 갈수록 로스앤젤레스의 겨울이 점점 더 추워진다. 그래서 나는 이 코트를 즐겨 입는다. 서랍 한쪽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내의를 꺼내 입기 시작한 지도 꽤 오래되었다. 어릴 때부터 나는 추위를 타지 않았다. 이십대 시절에는 그 추운 겨울에도 스타킹을 신지 않은 맨발에 높은 뾰족 구두를 신고 서울의 거리를 활보했다. 그때는 빨간 코트가 아닌 까만 코트였다. 어머니는 늘 내게 밝고 화려한 색깔의 옷을 권했지만 나는 마다했고, 빨간색은 더더욱 질색을 했다.

     어머니가 원하는 대로 빨간색을 좀 입지 왜 나는 그 고집을 피웠을까?

     지금은 이렇게 빨간색을 즐겨 입으면서 말이다. 어머니가 보셨으면 ‘그것 봐라 내 말이 맞지?’ 하고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그러면 나는 ‘그래요. 어머니 말씀이 다 옳았어요.’ 하면서 빨간 코트를 입고 어머니 앞에 섰을 것이다. 그러나 빨간 코트를 입은 내 모습을 아무리 보여드리고 싶어도 이제는 어머니가 안 계신다.

사실 코트를 살 당시, 시누이를 보며 나는 어머니 생각을 했었다. 빨간색을 고집하는 것이 둘이 닮아서였다.    무조건 사주고 싶어 하는 그 마음도.

    

    나는 오늘도 빨간 코트를 입고 집을 나선다. 폭신한 코트에 두 분의 사랑이 함께 흐르고 있어 내 몸은 더욱더 따뜻해진다.



10. 삼켜버린 진짜 진주 (2004년)


    아버님께서 오래 전에 전립선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정확히 1981년도에 일어난 일이다.

수술이 끝난 다음날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나는 부리나케 병원으로 달려갔다. 며칠 전 하루아침에 요도가 막혀버린 불상사가 생겨 아버님께서 응급실로 실려 가셨었다. 하필이면 남편은 서울 출장 중이었다. 다행히 큰병은 아니어서 비대해진 전립선 안쪽을 잘라내고 방광에 숨어있던 결석을 제거하는 정도에서 수술은 일단락이 지어졌다.

     병실에 들어서니 시어머님께서 나를 눈빠지게 기다렸다고 하시면서 반가워 어쩔 줄을 몰라했다. 조금 전에 간호사가 다녀갔는데 의사소통이 안 되어 애를 먹었다는 것이다. 간호사가 갖다놓은 진통제 한 알을 새벽에 먹었는데, 웬일인지 간호사가 “노, 노.”를 연발하면서 놀래 자빠질 듯 비틀거리며 병실을 뛰쳐나갔다고 한다. 아버님 머리맡, 쟁반에 둔 진통제 한 알을 어쨌느냐고 간호사가 물어, 그것을 먹었다는 데까지는 어찌어찌 손짓발짓 눈짓으로 서로가 소통이 되었는데, 그 외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약을 드실 때는 어머님이 오시기 전이었으나 간호사가 들어왔을 때는 어머님도 그 자리에 계셔 상황의 심각한 낌새를 알아차렸는데 아버님께서는 문제는 무슨 문제냐면서 부득부득 당신이 옳다고 어머님을 욱박질렀다고 한다. 남편한테 당한 그녀는 치솟는 화를 꾹꾹 누르며 나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 진통제를 드시고 통증은 씻은 듯이 가라앉아 아버님 얼굴은 아주 편안해 보였다.

     “그 약이 생긴 것도 희한하더니 참 희한하게도 약을 먹자마자 금세 안 아프더라고. 약이 꼭 진주처럼 생겼어. 우유처럼 뽀얀 빛깔에 노리끼리하면서도 푸르스름한 기가 약간 돌면서 반질반질 윤기가 돌고 말야. 반지를 해서 끼면 진짜 진주라고 다들 그랬을 거야.”

     그는 반지를 못 만들고 먹어버린 것이 못내 억울한 듯 했다. 나도 신기해서 두어 마디 물어보았다. 아버님 말씀은 대충 이러했다.


    진통제의 크기가 엄지손톱만 해, 그냥 삼키기엔 좀 큰 것 같아 입안에 넣고 깨물어 보았다. 어찌나 딱딱한지 쉽게 깨물어지지가 않았다. 씁쓸하지도 않고 시큼하지도 않고, 약이라고 느껴지는 아무런 맛이 없었다. 혀끝에 닿는 감촉이 진짜 진주같이 매끈매끈했다. 약을 도로 꺼내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보통 약처럼 모양이 정해진 규격에 맞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동글납작하면서도 겉면이 파도가 이는 듯 약간 웨이브가 져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광채까지 띤 그 빛깔이 영락없는 천연진주였다. 혀로 슬슬 굴려가며 이빨로 계속 깨물었더니 드디어 동강이가 났다. 약을 먹고 나니 통증이 금세 가라앉아 기분이 날아갈 듯이 가벼워졌다. 생긴 모양도 희한하더니 정말 희한하게 잘 듣는 약이었다.

     자신을 위해 특별히 조제된 약 같다면서 아버님은 유쾌하게 웃으셨다.


    그러나 어머님 말씀은 정반대였다. 간호사의 행동거지로 봐 그게 진통제가 아닌 게 분명하고 또 먹어서도 안 될 것임이 분명하다고 강조를 하셨다. 그리고 그것이 만일 진통제였다면 쟁반에다가 왜 한 알만 갖다놓았겠냐고 반문했다. 아버님이 버럭 소리를 지르셨다.

     “어허 참, 그걸 먹고 금세 아픈 게 다 나았다는데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시어머님은 빨리 간호사를 만나 물어봐야 한다고 내 손을 끌며 병실을 나섰다.

    

    아니, 이럴 수가?

     그 약은 아버님의 몸속에서 진주처럼 자라다가 이번 수술로 인해 바깥세상 구경을 한 바로 그 방광결석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파도에 씻기고 씻겨 반들반들 잘 다듬어진····.

     간호사는 자기가 보아도 그것이 보통 결석과는 달리 특이하게 생겼고 또 진주처럼 아름다워 원한다면 집에 가져가라고 병실에 놓고 나간 것이라 했다. 병원의 규칙에도 본인에게 주어도 좋다고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약으로 오해하고 먹어버리리라고는 정말 상상조차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방광결석이라고 말을 했을 때, 아버님이 웃으시면서 고개를 끄떡였고, 고맙다는 인사까지 했다고 한다. 그가 제일 잘하는 영어가 바로 “댕큐”이다.

     “당신 말대로 그게 진주는 진주였다고요. 당신이 몸속에 품고 몇 십 년을 길렀으니 어디 조개가 기른 진주에 비하겠어요? 그냥 뒀더라면 기념으로 반지나 해서 낄 걸, 먹긴 왜 먹어치워요?”

     머리가 잘 돌아가는 어머님에 비해 아버님은 그렇지가 못한 편이고, 또 그것이 진통제였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탓이었는지, 얼른 감이 안 잡히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냥 두 분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며 계속 웃었다.

     “아이구, 답답해. 그래도 모르겠우? 그게 바로 이번 수술에서 끄집어낸 돌멩이였다고요. 여기서 꺼낸 돌멩이요.”

     어머님은 자신의 아랫배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동시에 아버님의 입에서 튕겨나온 한마디.

     “뭐야? 그 약이 밑에서 꺼낸 그거라고?”

     “그래요. 밑에서 꺼낸 그거였다고요. 그런데 밑에서 꺼낸 그거를 당신이 위로 도로 먹었었다고요. 한데 좀 찝찔하지 않았어요? 그야 아주 맹탕보다는 맛이 좀 나았겠지만요.”

     그녀의 재치 있는 말솜씨에 나 역시 폭소를 터뜨렸다.

     “한데, 어쩌자고 아래에서 꺼낸 걸 위로 도로 먹어요? 몇십 년을 품고 기른 것이라 아까워서 먹었우? 한데 그놈을 도로 먹었으니 일이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요? 다시 아래로 내려가다가 오줌길을 또 막아버리면 어떡해요? 이빨로 동강이를 내서 삼켰으니 그것이 계속 자라 이제는 한 개의 진주가 아닌 여러 개의 진주가 될 테니 큰일 났다. 큰일 났어.”

     조금 전에 남편으로부터 된통 면박 맞은 것을 몽땅 되돌려주고 있는 아내, 나이가 많아도 그녀는 귀여운 여인이었다. 무안해진 아버님은 심각한 표정으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거참, 이상하네. 그걸 먹고 나니 그렇게 아프던 배가 금세 싹 나았으니 말야.”

 

    그렇다. 세상살이가 다 그런 것이다. 약이라 생각하면 약이 되고, 독이라 생각하면 독이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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