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희진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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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하늘로 날아간 두 마리의 학

-영화 맨발의 청춘’ (1964, 김기덕 감독)-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서로 사랑하는 두 남녀가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죽음이라는  삶이었다. 그들이 택한 죽음은 삶의 또 다른 형식이었기 때문이다. 죽음은 사랑하는 그들을 갈라놓지 못하였다.

이 되어 훨훨 날아갔다. 천 년이나 산다는 . 천 년을 살아도 흰색을 잃지 않고 때 묻지 않을 수 있는 이 되어 그들은 우리 곁을 떠났다.

시골의 물레방앗간의 허름한 곳에서 발견된 그들의 마지막은 잠자는 듯 평화로와 보였다. 그들의 마지막 모습은 평소와 같이 정갈해 보이는 복장에 정사가 없는 깨끗하고 순결한 모습이었다.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없는 두수‘, 뒷골목의 건달 폭력배에 지나지 않았던 두수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부터 변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주는 장례의 행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그들의 사랑은 죽음을 초월하여 이루었다고 하여도, 그들의 엄청난 신분의 차이는 죽음도 뛰어넘을 수 없었다. 밤거리를 휘어잡던 건달 폭력배인 두수의 시신은 거적에 덮여 손수레에 끌려가고, 대사의 딸인 요안나는 고급 자가용들의 행렬의 가이드를 받으며 가고 있었다.

눈 쌓인 허허벌판, 헐벗은 나무 몇 그루와 시신을 싣고 가는 수레. 수레를 끌고 가는 젊은이, 그리고 거적때기 사이로 드러나는 시신의 맨발. 맨발의 청춘이다.

 

[시놉시스]

거리의 건달과 폭력으로 일상을 살던 두수에게 삶의 전환점이 찾아온다. 그것은 자기가 올려보지도 못할 대상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높은 신분의 아름답고 지적인 여성, 요안나라는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서부터이다. 처음에 이 둘은 서로의 다름을 개의치 않고 만났다. 서로의 다름을 자신의 삶에 적용시켜 보며 요안나는 생전 처음 엄마에게 거짓말도 하고 위스키도 마셔 보고 아령 연습을 하고, 권투 시합을 관람한다. 두수는 자신의 삶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던 클래식 음악회를 가기도 하고 위스키 대신 주스를 시켜 먹기도 한다. 그녀와의 데이트 자금을 위해 거리에서 공갈 협박을 하다가 경찰에게 붙들려 유치장 신세를 진다. 약속한 장소에 두수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그런데 놀랍게도 집에 돌아와 보니 여자가 두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요안나는 아버지의 명을 쫓아 태국으로 가야 하는 상황이고, 두수는 깡패 두목의 죄를 뒤집어쓰고 자신이 대신 거짓 자수를 하기 위해 경찰에 가야 하는 급박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들은 서울을 벗어난다. 외진 시골의 허름한 곳으로 가서 현실을 도피한 그들은 거기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더없이 인생의 최고 행복한 순간에 동반 자살이라는 대담하고 최선의 결정을 내리기에 이른다.

 

[시네 에세이]

 

-운명 교향곡

 

폐쇄된 공간이다. 많은 젊은 남녀들이 왁자지껄 흥겨운 트위스트 춤과 노래로 홀은 다분히 시끄러운 분위기로 들썩인다. 열광하는 환호성과 박소 소리가 들려온다. 자유자재로 청춘을 발산하는 뜨거운 열기들. 매우 선정적이다. 뒤에서 흰색 자켓의 남자 두수가 나타난다. 거기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느라 아무도 눈길을 주는 사람은 없다. 한참 최고조의 흥겨운 분위기를 누군가 스위치를 꺼버리듯 돌연 음악을 꺼버린다. 조용한 찰나 갑자기 홀 안이 뒤숭숭하더니, 울려 퍼지는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 앞에서 옆에서 그리고 주위에서 온통 고개를 돌려 버리는 김빠진 얼굴들. 그에게 빗발치듯 쏟아지는 비난과 어의없음.

천연덕스럽게 소파에 몸을 깊숙이 묻다시피 앉아 위스키 대신 주스를 주문해 마시는 두수. 여기서 잠깐 운명 교향곡이 힌트 하는 그들 사랑의 운명을 점쳐 본다. 그들의 사랑은 과연 운명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신분의 차이

그로부터 도망치듯 멀어져가는 그녀에게 두수는 악쓰듯 소리친다. “우리 아버지는 형무소살이하다가 죽었고 내 엄마는 갈보였단 말이야!”라고 말하는 그를 카메라는 아래에서 위로 비춘다. 이내 그의 눈에 가득한 눈물이 반짝인다. ‘올려다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 말아야 해. 송충이는 솔잎이나 먹기 마련, 그 여자는 우리 세계와는 너무나도 먼 사람이라고 중얼거린다.

 

-고향의 봄

창밖에는 함박눈이 소리 없이 내리고 있다. 밖에도 안에도 모든 시간이 정지된 듯하다. 시골 농가의 허름한 방앗간. 지푸라기가 잔뜩 깔린 곳에서 그들은 더없이 행복해한다. 오늘밤 이곳은 제게는 우주보다 넓은 아늑한 낙원이에요. 마냥 행복해하는 그녀가 종이학 두 개를 접는다. 진짜 학이 되어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녔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이어서 그녀가 고향의 봄노래를 흥얼거린다. 볏단에 비스듬히 누워 따라 부르던 두수의 코가 들썩거린다. 오랜만에 아스라이 떠올려보는 고향이다. 그가 목이 메는지 잠시 노래가 끊긴다. 살면서 제일 슬펐던 기억이 뭐냐고 묻는 그녀에게 두수는 좋은 일을 하고 싶어도 배운 게 없고 재주가 없어 못하던 때라고 말한다. 그래서 사람의 등이나 쳐서 먹고사는 거리의 건달 패거리로 살았던 지난날을 돌이켜 보며 회한에 젖는다. 한 사람을 진실로 사랑하면서 깨닫는 두수가 느끼는 절망감. 내가 잘못이었어. 아무래도 요안나는 집으로 가야겠어. 그 말을 들은 그녀가 대답 대신 살며시 가방 속에서 약병 하나를 꺼낸다. 요안나는 철저하게 결심을 하고 사랑만을 쫓아 따라나선 것이다.

 

아주 편안한 모습으로 잠들어 누운 채 그들은 어느 농부에 의해 발견이 되고. 그들의 머리맡에는 예쁜 종이학 두 마리가 허공에 걸려 있을 뿐

이들의 평화로운 마지막 모습은 세상에게 묻고 있는 듯이 보인다. 누가 죄 없는 우리들을, 죄가 있다면 신분의 차이에도 서로 사랑한 죄밖에 없는 우리들을 이렇게 죽게 만들었는가,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