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숙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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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자식도 마음 아파요.

2023.01.08 14:01

최영숙 조회 수:33

나는 한국에서 시부모를 하늘로 보내드리고 미국으로 떠나왔다.
늦은 가을 날, 시아버지 장례를 마친지 여러 날이 지나고, 혼자 남으신 어머니를 뵈려고 시댁에 들렀을 때였다.

마당에 서있는 대추나무조차 그날따라 더욱 구부정하게 보이고, 집안의 공기는 적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나는 아버님이 생전에 아끼시던 대추나무를 바라보고 서 있다가, 일부러 큰소리로 어머니를 부르며 마루에 올라섰다. 그러도록 방안에서 인기척이 없었다.
혼자 어딜 나가셨나, 해서 후다닥 방문을 열었는데 생각지도 않게 어머니가 방 한가운데에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어머님!”
다시 불렀어도 어머니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내가 들어 온 줄도 모르고, 어머니는 골똘한 얼굴로 앉아서 한 손으로 치맛단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섬칫했지만 나는 조용히 방에 들어가 윗목에 앉아서 어머니의 정신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칠십이 가까우셨으니 그만하면 남편을 보낼 준비쯤은 되셔서 이런 일은 충분히 감당하시려니 하고 자식들은 생각했다. 오래 같이 살았으니 지금쯤은 떨어져도 뭐, 그리 애달프겠나.
살아오면서 궂은 날이 많았다 하셨으니, 얼마간 그러다가 곧 잊고 평상심을 찾으시겠지.
그렇게 무심히 생각했다.

한동안 넋이 나갔던 어머니는, 자식들이 기대했던 대로 평소와 다름없이 일상으로 돌아왔다.
한 번도 슬프다고 말한 적도 없다.
느이 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말한 적도 없다.
어머니가 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앉아 있을 때 치맛단을 끝없이 만지작거리는 습관이었다.
그러다가 어머니는 방안을 조용히 비질하고 걸레질을 했다.
자식들이 아버지 물건을 정리해서 내어갈 때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곧 돌아앉아서 방바닥을 닦고 또 닦았다.

나는 지금에서야 어머니의 마음을 읽는다.
아버님을 어려워했던 어머니는 아버님과 대화를 나눌 때 자신도 모르게 옷자락을 만지는 버릇이 있었다.
어머니는 당신의 남편과 평생을 함께 지내고, 그 남편을 보낸 자리에 앉아서 남편의 모습을 더듬고,
남편의 음성을 기억해내면서 속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남편이 앉았던 자리를 그리움에 사무쳐서 한없이 닦았을 것이다.
그때마다 새벽이면 구부리고 앉아서 신문을 읽는 모습. 커피에 설탕을 듬뿍 쳐서 후루룩 마시는 소리.
그만 좀 하라고 해도 그치지 않던 잔소리.
연탄불도 갈아야 되는데, 시장에 나가 장볼 것도 있는데... 어머니의 눈길이 닿는 곳마다 남편의 그림자가 어른거렸을 것이다.

그 연세에도 밤이 되면 화장품을 바르신다고 며느리 셋은 모여서 흉을 보았다.
노인이니까 노인답게, 노인다운 수준으로, 노인이니까 거기에 맞춰서. 노인이 뭘...

어머니가 오래, 깊이 참으셨다는 것을 이제야 알 것 같다.
몰라서도 아니고, 무디어서도 아니고, 생각이 없어서도 아니었다.
알아도 모른 척, 송곳 같은 말끝에 가슴이 저려 와도 무딘 척, 간이 안 맞아도 말없이 삼키고,
혼자 남겨져도 외로운 내색을 안 하다가 생신날에 쓰러져서 돌아가셨다.

그 어머니의 아들인 내 남편은 고아가 되었다.
어머니의 말투를 그대로 닮은 남편은 가끔씩 눈물짓는다.
당근을 린징이라고 엄마가 그랬지. 쟁반은 오봉,
근데 국그릇을 왜 뱅뱅두리라고 하셨을까....그것도 일본말인가?

그런 남편을 보고 있는 내 마음속에서도 회한이 일어난다.
향이 좋은 로션이라도 사드릴 걸, 색이 고운 립스틱이라도 사드릴 걸....
힘드시지요? 아버님 생각나시지요?
한 번 진심으로 여쭤보기라도 할 걸.
느이 아버지, 잔소리 안 들어서 좋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던 내가 얼마나 미련한가.

내 아들은 가끔 퉁명스럽게 말한다.

“부모님만 자식 사랑하는 거 아녜요. 자식들도 부모님 사랑하거든요.
그러니까 아프면 말을 하세요. 말 안하면 몰라요.”

아들 말이 옳은 것 같다.

“요새 애들은 지네 자식만 사랑하고, 저 키워 준 부모는 모른다니까.”

그것이 통념이다. 부모들은 대부분 자식을 짝사랑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누구든 자신을 낳고 키워 준 부모를 사랑하는 건 본능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사랑을 나타내는 방법이 부모와 코드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부모는 자신의 생각을 정확히 표현하지 않는 것을 덕목이라 여기고,
자식은 그 마음을 헤아릴 혜안이 아직 없다.
사랑하는 마음을 같이 갖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서로 볼 수 없는 것이다.

1982년도에 스티븐 스필버그가 만든 “이티”라는 유명한 영화가 있다.
우주선이 떠나면서 뒤에 홀로 남겨진 외계인을 만난 엘리오트라는 소년이
그 외계인에게 “이티”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몰래 숨겨주게 되는데,
언어가 통하지 않는 둘 사이는 손가락을 서로 맞대고 텔레파시로 교감을 한다.
영화 속 이야기이지만 손가락을 맞대고 교감하는 이 명장면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누구라도 자신에 대해서 남에게 완벽하게 설명해 줄 수는 없다.
부부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이고 부모와 자식 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설명하지 않아도 교감이 이루어질 정도의 관계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은 날마다 손가락을 맞대어서도 될 일이 아니고, 머리를 맞대어서 될 일도 아니다.

우리는 이 교감을 위한 중개자를 갖고 있다.
이 분은 안테나가 아주 높아서 지구 어디에서도 접속이 가능하다.
무릎을 꿇고 엎드려 내 마음을 저 쪽에 전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저쪽의 마음을 제대로 알 수 있게 해 달라고 또 부탁한다.
굳은 마음을 제하여 달라고, 그래서 부드러워진 내 마음을 전해달라고,
사랑한다고, 그리고 많이 외롭다고, 쓸쓸하다고 숨김없이 말해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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