칩스(Chips)
2025.12.04 14:09
요즘 IT기술에 대한 뉴스를 접하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지금 감자칩을 먹고 있는 걸까, 아니면 메모리칩을 씹고 있는 걸까? 이상하게 들릴 지 모르지만, 둘 사이에는 생각보다 깊고 재미있는 연결이 숨어 있어서다.
아이다호 주에서 감자로 부를 이룬 J.R. 심플롯은 맥도날드 감자튀김의 원조 공급자로 유명한 인물로 그가 만든 급속 냉동 감자 기술은 패스트푸드 산업의 판도를 바꾸면서 일약 ‘감자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헌데 이 감자왕의 다음 행보가 아주 기묘하다. 농업과 식품 산업의 거물이던 그는 전혀 다른 분야, 그것도 완전 문외한이던 반도체 회사 ‘마이크론(Micron)’에 거액을 투자했다.
감자칩(chip)으로 억만장자가 된 그가 메모리칩으로 다시 거부가 되는 그야말로 기상천외한 성공 스토리를 써낸 거다. 감자를 튀기던 사람이 실리콘 웨이퍼 위에서 이룬 또 다른 거부가 된 일이 무척이나 경이롭다.
그로부터 50여년 뒤, 한국에서는 이와는 정반대지만 묘하게 닮은 사건이 벌어졌다. 한때 ‘오픈A’I에 밀려 고전하던 구글이 ‘Gemini 3.0’을 내놓으며 AI 시장에서 반등을 노리고 있는 지금, 그 AI의 두뇌 역할을 하는 핵심부품 중 하나가 바로 ‘초고속 메모리 HBM(High Bandwidth Memory)’이다. 이 HBM은 인공지능이 필요로 하는 엄청난 양의 데이터와 연산을 동시에 처리할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수퍼 연산 에너지 덩어리’다. 그런 HBM을 최초로 개발해 지금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만든 곳이 바로 한국의 SK하이닉스다.
헌데 최근 SK하이닉스가 이 고난도 기술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내놓은 방식이 심플롯의 감자칩만큼이나 유머러스하다. 정말로 HBM과자를 출시한 것이다. 이름도 절묘하다. HBM의 앞글자를 그대로 따오되 한국어식으로 대입해 ‘허니 바나나 맛’이라는 뜻을 얹었다.
말장난 같지만, 그 장난에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웃으며 관심을 보였다. 칩(chip)은 칩인데, 이번엔 정말로 입에 넣고 씹어 먹을 수 있는 칩이 됐으니 이보다 확실한 홍보 전략도 드물거다. 감자왕 심플롯은 감자칩으로 반도체 기업에 투자했고, SK하이닉스는 반도체 칩으로 과자칩을 만든 셈이다. 앞뒤가 뒤바뀌었을 뿐, 둘 다 ‘칩’을 가지고 절묘한 교차점을 만들어냈다는 점이 무척이나 흥미롭다.
어찌보면 이 두 이야기가 정반대의 길을 걷는 듯하지만, 그 중심에 있는 하나의 단어, 바로 칩(Chip)이다. 먹는 칩과 연산하는 칩, 언뜻 완전히 다른 사물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사람에게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하는 작은 조각’이라는 역할이라는 점에서 같다.
심플롯은 사람들의 허기를 채우는 물리적 칼로리를, 그리고 SK하이닉스는 AI가 필요로 하는 연산 칼로리를 제공하는 셈이니 감자칩이 20세기 산업을 가속한 연료였다면, HBM 메모리칩은 21세기 AI 산업을 가속하는 연료라고 할 때, 둘 다 시대가 필요로 하는 에너지원에 대한 통찰로 세상을 움직이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작고 얇은 조각 칩 하나가 시대를 통째로 바꾸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감자에서 반도체로 이어진 심플롯의 투자 스토리처럼, 기술 칩과 과자 칩을 이은 SK하이닉스의 홍보 아이디어처럼, 변화는 종종 아주 작은 조각에서 시작된다.
먹는 칩이든 만드는 칩이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칩스(Chips). 모두가 한 시대의 톱니를 굴리는 이 작은 동력들이 우리에게 주는 결론은 의외로 단순하다. ‘작고 사소해 보이는 조각 하나가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는 철학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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