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table or On the menu?'
2026.02.01 12:58
기원전 6세기, 이솝이 남긴 우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사자와 여우, 당나귀가 함께 사냥을 나갔다. 먹잇감을 잡은 후 분배할 시간이 됐다. 당나귀가 순진하게 말했다. ‘공평하게 셋으로 나눕시다.’
그러자 사자가 당나귀를 단숨에 잡아먹었다. 그리고는 여우에게 물었다. ‘네가 나눠보거라.’ 여우는 재빨리 거의 모든 것을 사자 앞으로 내밀었다. 당나귀는 분배라는 식탁에 앉았지만, 그곳에서 제 몫을 챙길 발언권을 가질 힘이 없었고 결국 메뉴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1500년이 흐른 16세기,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피렌체. 그곳에서 태어난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이렇게 경고했다. ‘강자들이 싸울 때 중립을 지키려는 자는 승자에게는 먹잇감이 되고 패자에게서는 경멸을 받는다.’
당시 이탈리아 반도는 프랑스, 스페인, 신성로마제국이라는 거대한 세력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작은 도시국가들은 이 세력 다툼에서 선택을 해야 했다. 그들의 협상 테이블에 앉을 것인가, 아니면 그들에게 영토를 분할 당할 것인가. 어느 것도 아닌채 방관하는 것은 안전이 아니라 고립이 되었고 고립은 곧 정복당하는 운명을 의미했다.
마키아벨리는 말했다. ‘운명은 우리 행동의 절반을 지배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우리 손에 달려 있다.’ 이는 식탁에 앉으려는 의지가 바로 자신들 손에 쥐어진 나머지 절반이란 애기다.
1993년, 중동 문제를 다루는 학술지에 짧지만 강렬한 제목이 등장했다. ‘Lebanon: At the Table or On the Menu?’ (레바논: 식탁에 앉을 것인가, 메뉴에 오를 것인가?)
레바논은 주변 강대국들의 각축장이었다. 시리아, 이스라엘,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그들이 레바논의 미래를 논하는 식탁은 있었지만, 정작 레바논 자신은 그 자리에 제대로 앉지도 못했다. 즉, 자신의 운명을 논하는 회의에서 레바논은 주인공이 아니라 안건일 뿐이었던 거다.
이 표현은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노동운동가, 여성운동가, 시민권 운동가들 사이에서 퍼져나갔다. ‘우리가 식탁에 앉지 못하면, 우리는 메뉴에 오른다.’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된 자들의 절규이자, 참여를 향한 선언이었다.
지난 20일 세계경제포럼이 열리는 다보스.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거인 사이에 끼어있는 중견국들의 운명을 논하는 자리에서 캐나다 총리 마크 카니가 마이크를 잡았다. ‘중견국들은 함께 행동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식탁에 앉지 못하면, 메뉴에 오르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 일갈은 2500년을 관통하는 하나의 진실이 21세기 국제정치의 언어로 다시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이 오래된 지혜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첫째, 중립은 안전이 아니라는 것. 당나귀는 공평함을 믿었고, 레바논은 중립을 지키려 했다. 그러나 힘의 균형이 작동하는 세계에서 방관은 선택이 아니라 포기였던 거다.
둘째, 참여는 권리가 아니라 투쟁이라는 것. 여우는 살아남았다. 사자의 힘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몫을 확보하는 지혜를 발휘했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가 말한 나머지 절반은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셋째, 연대는 생존 전략이다. 카니가 강조한 것은 중견국들의 협력이었다. 혼자서는 식탁에 앉을 힘이 부족해도 함께라면 자리를 만들 수 있다는 거다.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일 게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공동체에서 중요한 결정이 이루어지는 순간, 우리는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방 밖에서 결과를 기다리는가, 아니면 테이블에 앉아 목소리를 내는가?
물론 모든 식탁에 앉을 필요는 없을 거다. 때로는 물러서는 지혜도 필요하다. 하지만 내 운명이, 내 미래가 결정되는 그 자리만큼은 비워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2500년 전 이솝이, 500년 전 마키아벨리가, 그리고 오늘 카니가 말했듯이, ‘식탁에 앉지 못하면, 우리는 메뉴판에 오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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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솝의 비유를 인용한 카니의 다보스 선언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벤자민 후랭클린의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슬로건과 같은 것이겠지요. 생존경쟁의 생태계에 있어서 핵심적인 진리 말입니다.
중견국의 뭉침을 강조하는 카니의 호소가 얼핏 들으면 파력적이지만, 저는 여기서 카니 자신의 이 발언이 실제와 부합되지 않는다는 2가지 점이 얼핏 떠오릅니다.
먼저 중견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카니의 발언은 '국제적 기존 질서' (Old rules-based order)에 입각해서 라고 서두를 두었습니다. 지금까지의 국제적 기존 질서는 미국을 주도한 자유주의 서구의 번영을 반영하는 시스템입니다. 카니는 중견국들의 참여를 강조했지만 본의든 아니든 암묵적으로 미국의 개입이 필수인 것을 물타기 식으로 시사한 것 같습니다. 즉, 먹히든 먹이가 되든 동물의 왕 사자의 주도없이는 분배할 식탁조차 마련될 수 없다는 이론이 응용된 것이지요. 아울러 이런 이상을 가진 중견국들이 모인다 해도 그 그룹을 리드하려면 주도국이 있어야 하는데 그 중견국 가운데서 또 주도국이 되기 위한 자리다툼을 할 수 밖에 없고 결국은 새로운 강국이 태어날 것입니다. 또 다시 메뉴 선택 결정이 반복되는 시점에 다다르게 된다는 말이지요.
두번째로는, 캐나다가 사실 중견국이 아니어야 했습니다. 국토의 반 정도가 되는 불모의 툰트라와 동토를 뺀다해도 호주정도의 크기인 캐나다는 독립 후 거의 2세기 동안 마치 형제국 처럼 미국의 성장세를 따라 동반해 왔기 때문에 지금 쯤 미국과 동등한 강대국으로 오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이 작은 동생에게 베풀어주는 듯한 풍족한 혜택을 줄곧 누려오면서도 영국의 전통과 문화를 기반한 자유주의 정치철학과 과도한 사회주의 정책을 고수해 오며 미국을 무시해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고집해 온 자유주의 정치철학과 사회주의 정책이 스스로의 올무가 되었고 그것으로 인해 중견국으로 도태된 상태에서 지금 메뉴판에 오르느냐 아니냐는 발언은 도저히 합리적 호소로 볼 수 가 없습니다.
아주 대조적인 예지만 뉴저지 만한 크기의 이스라엘은 거의 미국의 2배 정도로 큰 주변의 아랍권의 틈바구니에 끼어 거의 1세기 동안 자신들을 제거하려는 그들과 전쟁을 해왔습니다. 결과적으로는 불가사의 하다시피 그들과의 싸움에서 승리에 또 승리를 거듭하며 지금은 어엿하게 세계의 강대국 반열에 서있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이스라엘이 미국의 방패아래 커왔다고 하지만 사실상 미국의 개입은 1967년도6일 전쟁 이후부터였습니다. 당시 미국은 소련과의 냉전이 중동으로까지 번지는 것을 지켜보며 우려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의외적으로 독립 그날부터 시작된 아-이 전쟁에서 연이서 승전하는 막강한 저력을 입증시키자 미-소간의 완충지대로 삼을 겸 부랴부랴 서둘러 이스라엘의 지원을 시작한 것입니다. 말하나마나 만일 이스라엘이 캐나다처럼 스스로를 중견국으로 도태시켜 놓고 타 중견국들을 향해 뭉쳐야 산다 라고 떠들었다면 세상에 누구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을 것이고 단숨에 아랍권의 먹이감이 되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부수적인 얘기로, 한국인들은 흔히 한국이 주변의 러시아 중국 일본등의 강대국 사이에 끼어 새우등처럼 터진다는 피해자적 호소를 많이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다 아는 역사를 통해 보더라도 우리의 선조국인 고조선, 발해 그리고 근현대사의 만주국 등은 동아시아의 대국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랜 기간동안 스스로를 도태시켜 결국은 한반도에 갇히게 되었고 그것도 모자라 지금은 남북이 반으로 쪼개져 버렸습니다. 이것을 볼 때 고대로부터 한국은 일본과 비교가 안되는 강대국이었습니다. 하지만 한반도 보다 조금 더 큰 섬나라 일본은 한정된 지형적 자원적 열세를 극복해왔고 20세기 이후로는 한국인이 비유하는 고래등의 강대국으로 변천했습니다. 그래서 주변의 강대국 사이에서 우리의 계속적인 희생양 타령은 값싼 변명입니다.
결론적으로, 카니가 전하려는 중견국들의 연대적 운명 메세지는 자신들의 헛점을 가리고자 스스로 자위하는 전형적 어불성설로 밖에 들리지 않습니다. 거이 쳔년동안 유대-기독교 문명을 세워 찬란한 문화와 경제적 부흥을 누려온 서유럽 역시도 캐나다와 동병상련의 위치에 서서 급락하고 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