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널드 로드
2026.02.22 15:36
뉴욕 맨해튼 5번가 센트럴 파크 건너 편에 있는 고풍스런 작은 개인 미술관, 노이에 갈레리(Neue Galerie) 안에 황금빛의 초상화 한 점이 걸려 있다.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의 작품으로 나치에게 강탈당했다가 수십 년간의 법정 싸움 끝에 되찾은 상속인으로부터 2006년 1억 3,500만 달러에 사들인 작품이다. 그 주인공은 바로 로널드 로더 회장이다.
화장품 및 패션 회사로 유명한 에스티 로더 창업자의 아들이다. 레이건 행정부 시절 오스트리아 대사를 지내며 비엔나 예술에 매료된 그는 자신의 이름을 건 미술관을 뉴욕에 세워 클림트, 에곤 실레, 오스카 코코슈카의 작품을 미국 대중에게 소개하는 문화 사절을 자처했다.
그는 또한 세계유대인회의 의장으로서 나치 약탈 미술품 반환 운동을 주도하고, 유럽의 반유대주의 재부상에 목소리를 높이는 한편 공화당 정치권에 거액을 쏟아붓는 파워 브로커이기도 했다.
2019년, 느닷없이 트럼프가 ‘덴마크로부터 그린란드를 사겠다’고 했을 때 전 세계는 황당해 했다. 그러나 전 국가안보보좌관 존 볼턴이 회고록에서 이 아이디어의 진짜 출처를 지목한 바 있다. 트럼프가 ‘경험 많은 사업가 친구’가 그린란드를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는데 그 인물이 다름아닌 트럼프의 와튼스쿨 동문이자 60년 지기인 로널드 로더였다는 거다.
헌데 놀랍게도 그는 단순히 이런 조언만 한 것이 아니었다. 덴마크 언론 탐사보도는 로더가 그린란드 투자 컨소시엄에 참여해 현지 기업 지분을 조용히 매입하고 있었음을 폭로했다. 말하자면 그는 아이디어 제공자이자 수혜자, 그리고 조언자이면서 투자자였던 셈이었다.
트럼프 2기 출범 후 그린란드 논의가 재점화되자 로더는 뉴욕포스트 기고를 통해서 이를 공개하고 ‘그린란드는 미국의 다음 개척지’라며 옹호하는 한편, ‘MAGA Inc. 슈퍼팩’에 500만 달러를 기부하며 트럼프와의 유대를 더욱 다졌다.
그리고 지난 달, 트럼프는 연준 의장 후보로 케빈 워시를 지명했다. 35세에 연준 역사상 최연소 이사로 임명됐고 2008년 금융위기를 최전선에서 다루었던 인물. 그의 아내가 제인 로더, 로널드 로더의 딸이다.
우연인지는 모르나 워시는 2019년부터 한국 이커머스 기업 쿠팡의 이사회에 앉아 950만 달러 상당의 지분도 보유하고 있다. 이런 워시가 세계 경제 대통령이란 연준 의장에 지명되고 상원 인준 절차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쿠팡은 지금 3,370만 명의 개인정보 유출 사태로 한국 당국의 조사를 받는 중이다. 미국 측은 ‘미국 기업 차별’을 이유로 트럼프 행정부에 개입을 요청했고, 밴스 부통령은 한국 국무총리에게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
아무튼 공식 직함 하나 없이, 반세기 동안 우정어린 절친은 미국의 대통령으로, 사위는 경제대통령으로 세계를 좌우하는 막후 실세의 영향력을 가진 그가 대통령의 귀에 속삭이고, 그린란드를 조용히 사들이고, 사위를 연준 후보로 두고 한국 최대 이커머스의 이사회에 앉힌 사람이다. 보이지 않지만 어디에나 손뻗치는 수퍼 파워 브로커의 초상이다.
그러고 보면 나치에 빼앗기고, 법정에서 되찾아진 후, 억만장자의 손에 들어온 황금 초상화처럼, 로널드 로더라는 인물 속에는 역사와 권력, 재력, 문화가 모두 응축되어 있는 건 아닌지? 클림트의 그림, 황금 초상화가 어쩐지 로더 회장의 자화상 같아 보여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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