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연재> 침묵의 메아리 20

2011.05.27 15:24

김영강 조회 수:531 추천:92


  -토요연재소설-

  침묵의 메아리


  제 20회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한창 어려움을 겪고 있을 즈음이었다. 이민우가 들른다고 해 나는 저녁 찬거리를 사기 위해 올림픽 마켓엘 갔었다. 거기서 우연히 애경을 만났다. 애경은 나와 같은 중학교를 다녔다.

   누가 나를 유심히 보고 있는 것을 느꼈으나 모른 체하고 생선부 앞에서 서성이고 있는데, 그녀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주 화려한 차림새였다. 진분홍 실크 블라우스에 같은 감의 스카프를 길게 늘어뜨리고는 하늘하늘한 하얀 바지를 입고 있었다. 키가 큰데다가 살도 꽤 찐 편이라 화려한 차림새가 더 눈에 띄었다. 내 이름까지 불렀는데도 나는 누군지 기억할 수가 없었다.

   “나 강애경이야. 중 2때 너랑 짝했잖아.”  

  그때서야 생각이 났다. 어릴 때는 키가 나랑 비슷했기에, 내가 몰라볼 만도 했다. 그리고 얼굴도 딴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애경은 낄낄 웃으며 말했다.

   “몰라보겠지? 나 말야. 눈 코 입, 다 뜯어고쳤어. 그래서 옛날 사람들, 나 아무도 못 알아봐.”

   나는 “키도 고쳤어?” 하고 물었다. 나보다 키가 훨씬 큰 것이 이해가 안 돼 무심결에 뱉은 말인데, 말을 하고 보니 말도 안 되는 말이었다. 애경은 배꼽을 쥐고 웃었다.

   “그래. 그냥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막 먹어댔더니 키도 크고 살도 찌고 그러더라. 그런데 넌 중학교 때나 지금이나 똑 같네. 배짝 말라서 그런지 더 작아진 것 같아. 근데 왜 이렇게 말랐니? 어디 아픈 사람 같아. 너 어릴 적엔 무지 이뻤는데. 지금은 야, 얼굴이 그게 뭐냐? 그냥 팍 늙어버렸다 야아.”

   애경은 상대방의 기분 같은 건 염두에도 없는 듯이 하고 싶은 말들을 탁탁 뱉어냈다. 그녀는 내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뭔가 안쓰러워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부모님이 이 세상을 떠났다는 엄청난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 모든 것이 다 휘청거리며 내 눈을 어지럽히던 때이니 내 몰골은 내가 봐도 유해주가 아니었다.
  
   그때 애경은 미국으로 이민 간다고 앞에 나와서 마지막 인사를 하다가 쓰러졌었다. 자기는 미국 가기 싫은데 부모한테 끌려간다면서 막 울다가 쓰러진 그 장면이 생생히 떠올랐다. 땀을 뻘뻘 흘리며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얼굴로 목청을 한껏 돋우고 말을 하다가 기절을 한 것이었다. 몇 가닥 앞으로 내린 머리가 온통 땀에 젖어 이마에 풀처럼 붙어 있던 모습이 떠올랐다.
  
   애경은 나를 보고 그렇게 반가워할 수가 없었다. 나는 왠지 좀 서먹서먹했다. 그녀의 차림새에 비해 내 꼴이 너무 초라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녀는 호들갑을 떨며 팔짝팔짝 뛰면서 내 손을 잡아끌고 마켓 옆 빵집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신상조사를 하듯이, 언제 미국에 왔느냐, 어느 학교에 다니며 어디에 사느냐 등등, 말을 속사포로 쏟아놓았다. 그녀의 태도와 말투에는 진실된 반가움이 담겨져 있었다. 그녀는 공부하고는 원래가 인연이 멀어 커뮤니티 칼리지에 적만 두고 그냥 왔다 갔다 한다면서 깔깔대고 웃었다. 부모님은 UC계열의 학교로 전입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으나 자기는 그런 건 개의치 않고 그냥 재미나게 살고 있단다. 부모님이 사는 집에 방이 남아돌아가는데도 그녀는 따로 나와 살고 있었다.

   애경은 사는 것이 신바람이 나 죽겠다는 듯이 희열이 차 재잘거리다가 갑자기 옛날 일들을 끄집어냈다.

   “까닥했으면 너랑 나랑 정학당할 뻔했던 거, 기억나지? 그리고 또 한 가지 ‘이 사건.’ 도 있었잖아?”

   시험 때 답을 못 쓰고 우두커니 앉아 초조하게 나를 자꾸 쳐다볼 적엔 살짝살짝 가르쳐주기도 했었는데, 한 번은 선생님한테 걸린 적이 있었다. 애경이 말대로 정학을 당할 뻔한 그 일은 지금도 어제 일처럼 기억에 생생하다.

   언제 어떻게 마련을 했는지 애경이가 손바닥 반만 한 쪽지 한 장을 내 시험지 밑으로 밀어넣었다. 순간, 쿵하는 소리와 함께 가슴이 마구 뛰었지만 그녀의 간절한 눈초리를 외면할 수 없었다. 얼른 살피니 선생님이 교실 앞쪽 옆 유리창에 딱 붙어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2,3 분도 되기 전에 어찌 우리 자리에 와 나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재빨리 답을 써 애경이한테 건네주다가 선생님한테 딱 들켜버린 것이다. 문제를 삼으면 정학을 맞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내가 정학을 당한다는 것은 하늘이 두 쪽이 나는 것과 맞먹는 사건이었다. 극과 극을 달리는 두 학생이 관련된 탓인지, 선생님은 조용히 쪽지를 회수하고, 내 눈을 뚫어지라 응시한 후에 돌아섰다. 그 다음날, 둘은 선생님께 불려가서 단단히 훈계를 들었다. 앞으로 그런 일이 또 있으면 절대 용서 못 한다는 것이었다. 그 생각을 하면 지금도 가슴이 방망이질을 한다.  

   또 한 가지 뚜렷하게 기억나는 것이 있다. 어느 날, 한 아이가 돈을 잃어버렸다고 해 담임이 학생들을 일일이 추궁해, 교실이 발칵 뒤집힌 적이 있었다. 결국은 애경이가 의심을 받게 되어 그 많은 학생들 앞에서 담임은 애경이에게만 신을 벗고 양말도 벗으라고 했다. 그러나 애경은 끝까지 양말을 벗지 않았고 방과 후에 훈육실로 불려갔었다.

   그때 어린 소견에도 나는 담임선생님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런 사람은 선생님이 돼서는 안 된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너, ‘이 사건’ 생각나지?”  물론 생각난다. 별로 되뇌고 싶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도 애경은 자기 입으로 그 사건을 끄집어냈다.

   “이 말이야. 이, 이····. 요즘 미국에 이는 없을 거야.”

   그녀는 자신의 윗옷 안을 뒤집어보이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때, 다른 애들은 다 나를 손가락질하면서 벌레 보듯 했는데 너만 내 말을 믿고 내 편을 들어주었어. 그게 내가 너를 잊지 못하는 또 한 가지 이유야. 너를 공부 잘하는 깍쟁이로만 생각을 했었는데 그날 보니까 영 아니더라. 그래서 내가 널 좋아하기 시작했단다. 중학교에 막 입학하고 나서, 우리 신체검사했잖아.”  

   그러고 보니 무슨 인연인지 애경이랑 중1 중2, 다 같은 반이었다. 애경이가 ‘이 사건’을 설명하면서 자신은 너무나 큰 상처를 받아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속에서 불이 난다고 했다.    

   신체검사가 있는 날이었다. 속옷까지 윗도리는 다 벗어서 교실 뒷벽에 있는 못에다 걸어놓고 다들 강당으로 갔었다. 중학교에 갓 입학한 여학생들이 윗도리를 다 벗었다는 것이 지금 생각하니 잘 이해가 안 되지만, 어쨌든 위에 뭘 걸쳤는지는 기억에 없다. 아마 병원측에서 제공한 가운을 착용했던 것 같다. 애경이도 거기에 대해서는 언급을 않고 얘기를 계속했다.

   “신체검사를 끝내고 교실에 들어오니 아이들은 벌써 옷을 다 입고 있었고 내 옷만 남아 있더라고. 근데 애들이 날 보더니 막 수군거리면서 러닝셔츠에 이가 있다고 야단들이었어. 내가 보니까 진짜로 이가 있었어. 쬐끄만 하얀 이가 구석구석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데 나도 깜짝 놀랐어. 그게 내께 아니었거든. 애들이 이 있다고 수군거리니까 누군가가 창피해서 지 껄 안 입고 내 껄 입는 게 분명했어. 내가 홀랑 뒤집어쓴 거지. 너무 화가 나서 내 속옷이 아니라고 막 우겨도 애들이 아무도 안 믿는 거야.”

   애경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인 양 흥분하고 있었다. 나는 잊어버린 척 듣고만 있었다.          

   “그때 반장답게 해주 네가 나서서 한마디 했어. ‘애경이가 자기 꺼 아니라고 하면 아닌 거야. 러닝셔츠가 다 비슷비슷하니까 누가 모르고 바꿔 입었을 수도 있잖아?’ 하고. 그래서 내가 옷 다 벗으라고 막 소리 지르고 울었더니 네가 그러더라. 러닝셔츠가 다 똑같이 생겼는데 찾는 것도 힘드니 그냥 잃어버린 셈 치라고.”

   정도 이상으로 소리를 지르며 울고불고하는 것이 참 딱해 보였지만, 그때 난 애경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이들이 빙 둘러서서 다들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이 불편해서 얼떨결에 내가 나섰는데 다행히 수습은 잘 되었다.

   한데 애경은 지금도 “억울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실은 그게 내 속옷이었다고.’ 하면서 솔직히 고백을 해도 되는 상황이었지만 10년이나 세월이 흘렀어도 마찬가지였다.  

   “그 후부터 애들이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기 시작했어. 따돌림을 당한 거지. 집에서도 마찬가지야. 어려서부터 집에서도 따돌림을 당했다면 너 믿을 수 있겠니?”    

   처음 만난 그날, 애경은 언니인 강미경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우리 집은 언니가 부모의 꿈을 다 이루어주고 있으니 난 이대로가 좋아. 우리 집에선 언니는 하늘이고 나는 땅이야.”

   그 후부터 그녀는 내 아파트에 자주 들렀다. 들르는 횟수가 잦아짐에 따라 부모님과 언니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고 어떤 날은 원한에 맺혀 눈물까지 흘리면서 하소연을 했다.

   나는 들어주는 것만으로 위로를 대신했다. 한데 한참 듣다보면 그녀의 말엔 앞뒤가 맞지 않아 참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었는데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애경에게 뭔가 부족한 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거짓말도 스스럼없이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억울하다고 하는 것을 보면 정말 그녀의 속옷이 아니었을까 하고, 내가 잘못 판단했나 하는 생각도 해보았으나 역시 ‘이 사건’ 의 애경이 말은 거짓말이었다. 상상이 현실로 둔갑을 해버리는 것이었다.  

   좋은 환경, 좋은 집에서 부모의 배려를 받으며 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혼자 독립하여 그렇게 너저분하게 살고 있다는 자체에도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기계로 치면 나사가 하나 빠졌다고나 할까? 영화를 봐도 그 줄거리를 이해하지 못했다. 한국영화를 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화술에는 그렇게 능란한 애경이가 이해력에 문제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또 다른 쪽의 머리는 비상했다. 남의 발목을 잡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어놓고 상대방을 괴롭히는 데는 선수였다. 어디서 그런 아이디어를 짜내는지 놀랄 지경이었다.

   나로서는 여러 가지로 이해가 안 되는 면이 많은 애경이었다. 상대방의 허물을 이해하고 감싸주는 아량과 관용이 있어야 친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친구를 아낄 줄 알아야 하고, 고독할 때 위로할 줄 알아야 하고,  어려울 때 도울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내게는 그런 마음이 없었다. 애경이가 좀 이상하다고만 생각이 들고, 그녀가 날 필요로 하니 얘기를 들어줄 뿐이었다.  

   그즈음에 강미경은 이미 대학원을 졸업하고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 이곳 로스앤젤레스에 직장을 구했고, 애경을 따라 교회에 나가게 되어, 나도 이민우도 그녀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알고 보니 애경이가 늘 말하던 그런 강미경이 아니었다. 내 눈에는 그녀가 천사처럼 비춰진 것이다. 애경은 언니의 모든 것이 다 가식이라고 지껄였으나 그렇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우리 애경이, 우리 애경이.’ 하면서 진실로 동생을 위했었다.  

   “애경이한테 친구가 없어 늘 마음이 쓰였는데, 너 같은 좋은 친구가 생겨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 널 만나고부터 우리 애경이가 공부도 열심히 하는 것 같아. 부모 말도 안 듣고 내 말도 통 안 듣지만, 네 말은 듣는 것 같아. UC는 못 가더라도 어쨌든 4년제 대학은 졸업해야 하니까 네가 좀 잘 이끌어줘.”

   부모 말을 통 안 듣는다는 대목에서 나는 애경의 아파트 풍경을 떠올렸다. 강미경은 내게도 친동생처럼 잘해주었고, 나 역시 그녀를 친언니처럼 따랐다. 그런데 얼마 못 가 기묘한 바람이 불어 우리들의 사이가 깨지고 말았다.
  
   신을 부정하던 그가 웬일로 교회에는 꼬박꼬박 나오나 했더니, 그 이유가 강미경한테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나중에야 알았다. 이런 미래를 미리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그는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동거를 원치 않았는지도 모른다.

   곰곰 생각하다가 어느 날, 나는 우리 형편에 두 집 살림을 하느니 차라리 합치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한 적이 있었다. 아기를 유산시킨 바로 직후였다. 그러나 그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그의 입에서 그 말이 먼저 나오기를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모처럼 용기를 내어 어렵게 꺼낸 말이었다.

   그때, 난 너무나 부끄러워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몸을 숨기고 싶었다. 의식을 벽 너머에 두고 온 여자처럼 맥이 탁 풀렸다. 표정까지 흐릿해지며 눈앞이 몽롱했다. 시간이 모든 박자를 잃어 세상이 정지돼버리는 것 같았다.

   나는 강물에 떨어진 빗방울이 되어 흘러가고 있었으나 그는 기름이 되어 둥둥 떠내려가고 있었다.  

   큰딸이 이민우와 사귀는 것조차도 무지하게 반대를 하던 애경의 부모님은 그들이 결혼을 한 그 해에 교통사고로 이 세상을 떠났고, 그 4년이 지난 좀 후에 애경이도 죽었다.

   나와의 얽힌 실마리를 풀지도 못하고.  

   의료원에서 일을 하며 순조롭게 공부를 하고 있었으나 가끔씩은 애경이 생각이 나서 마음이 불안했다. 하루는 느닷없이 애경이가 나타났다. 내 아파트가 아닌 의료원으로 찾아와서는, 오랜만에 보는데도 여느 때와는 달리 내게 눈인사도 안 했다. 내가 의료원에서 일하는 정보는 쉽게 알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맘만 먹으면 세상 끝에 서 있는 사람이라도 찾아낼 수 있는 그녀니까.

   허리가 아파 치료를 받으러 왔다고 했다.

   애경은 진단을 마치고 침을 꽂은 채, 침대에 누워 나를 불렀다. 마침 손님도 뜸한 시간이라 얘기도 할 겸 방엘 들어갔더니 그녀가 발딱 일어나 앉으며 “네가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며 따지기 시작했다. 나는 얼른 문을 닫고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고 물었다.

   “몰라서 물어? 네가 나를 무시하고 있는 거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내게 피해를 줄 줄은 몰랐어. 네가 나보다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니? 공부 일등한 거? 일류대학 다니는 거? 그게 너한테는 굉장한 건지 모르지만 그런 거, 나한테는 아무것도 아냐.”

   차근차근 얘기를 해도 될 말들을 그녀는 얼굴을 있는 대로 다 찡그리고는 언성을 높였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가 뭐 어쨌다고 그러니?”

  “시침 떼지 마. 네가 폴한테 중상모략한 거 다 알아. 중학교 때 내가 애들 물건 훔치고, 돈까지 훔쳤다고 얘기했지? 그리고 옷에 이가 바글바글해서 애들한테 따돌림당했다고 그랬지? 또 뭐, 남자관계가 복잡하다고?”

   갑자기 문이 열리며 닥터 윌헴이 들어왔다. 순간 애경은 언성을 팍 낮추며 아주 조리 있게 뒷말을 이었다. 바로 전까지 한 대 치기라고 할 듯이 두 눈을 치켜뜨고 내게 달려들던 그녀다. 폭풍우에 휘몰아치던 바다가 어느 한 순간에 햇빛에 반짝이는 은빛 물결이 되어 아주 잔잔해진 것이었다. 찰나에 그녀의 두 얼굴을 보니, 역겨움에 구역질이 올라왔다. 그녀는 슬프디슬픈 얼굴은 누가 봐도 진실로 보이기 십상이었다. 연극배우가 따로 없었다.

   “네가 이민우하고 동거까지 해놓고 왜 나한테 뒤집어씌우니? 선생님, 얘가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한테 별의별 소리를 다해 갖고 나랑 사이를 갈라놓았어요. 애인하고 헤어진 후, 남자 소개시켜 달라고 저를 졸라 불쌍해서 좋은 사람 소개해 줬더니, 어떻게 은혜를 원수로 갚아요?”

   닥터 윌헴은 나보고 나가 있으라고 했다. 허지만 나는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너무도 어이가 없어 “어마마 기가 막혀. 너 왜 다 거꾸로 말하니?” 하고 얘길 하는데도 애경은 내게 단 일 초의 순간도 못 주겠다는 듯이 내 말을 덮치며 계속 애길 이었다. 억울해 죽겠다는 듯이 눈물까지 줄줄 흘리며 닥터 윌헴의 동정을 사기에 급급했다.  

   “뭐가 거꾸로니? 맞잖아. 너 이민우하고 살았잖아? 그리고 배신을 당했고.”

   어질어질했다.

   “선생님, 그 배신한 남자가 바로 우리 언니랑 결혼을 했어요. 제 형부가 됐다고요.”

   계속 눈물을 줄줄 흘리며 아주 차분하게, 그녀는 내 과거를 실타래 뽑듯 술술 풀어내고 있었다.  

   “남자한테 배신당하고 혼자 살면서 고생하는 것이 안됐고, 그리고 그 남자가 우리 언니랑 결혼을 했기에 미안한 마음도 들고 또 너무 불쌍했어요.”

   애경은 정말 불쌍해 죽겠다는 듯이 측은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울었다.

   “그래서 만날 시장 봐주고 돈도 주고 그랬는데, 어떻게 네가 나를 이런 식으로 배신할 수가 있니? 여행 갈 때도 내가 비용 다 대주면서 데리고 가고, 너한테 쏟아 부운 돈이 얼만데... 돈은 그렇다고 쳐. 돈보다 더 큰 게 정신적인 배신이야.”

   여느 때는 저속한 단어들을 마구 쓰면서 두서없이 말을 뱉어내는 그녀가 닥터 윌헴 앞에서는 어떻게 이렇게 계속 고상한 척 할 수 있는지 그 인내가 대단했다. 눈앞이 뿌예지면서 사방의 벽이 흔들렸다. “네가 여행 가자고 하는 걸 내가 한 번도 안 갔는데, 뭐라고?” 하며 입을 달싹거리고 있는데 애경의 음성이 귓가에서 뱅뱅 돌았다.

   “저 거짓말 하는 것 좀 봐. 여행 가서 이것저것 선물도 내가 다 사주고 그랬는데 시침 떼는 거 좀 봐. 선생님, 얘 믿지 마세요. 무슨 목적을 갖고 이 병원에 들어왔는지 모르지만 얘 믿었다간 큰일 나요.”

   “나가 있어라는데 왜 그러고 서 있지.”

   나는 할 수 없이 닥터 윌헴에게 떠밀려 문밖으로 나왔다. 무슨 말을 하는지 울먹거리는 애경의 음성이 복도까지 새 나왔다. 다시 진료실 들어가 따지고 싶었으나 온몸이 떨려 문을 열 기력도 없었다. 다리가 후들거려 겨우 발걸음을 떼며 사무실로 들어왔다. 다행히 대기실은 한산했다.

   애경의 엉엉 우는 소리가 사무실까지 들려왔다. 그날, 애경이가 명함을 놓고 갔으나 그 사람으로부터는 전화가 걸려오지 않았다. 폴이라는 남자와 헤어진 것도 몰랐다. 시야가 몽롱해져 눈을 감고 있는데 병원이 떠나갈 듯한 애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그녀의 본성이 발동을 한 것 같았다.

   “너 영주권 없이 여기서 일하는 거, 불법인 거 잘 알지? 내가 한 마디만 하면 이 병원도 문 닫아. 날 무시하고 내 앞길을 가로막은 대가가 얼마나 큰지 똑똑히 보여줄게.”

   번쩍 눈을 뜨니 닥터 윌헴과 주차요원이 애경이를 부축하고 문을 나가고 있었다.  
  
   이민우와의 일은 닥터 윌헴도 알고 있다.  이렇게 애경으로부터 밝혀질 줄은 꿈에도 상상을 못 한 체, 나는 내 입으로 슬픔과 고통에서 헤매던 내 이야기를 다 털어놓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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