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소설 / 가시꽃 향기 (상)

2014.01.31 03:05

김영강 조회 수:713 추천:79

가시꽃 향기

김 영 강


  오늘도 집을 나섰으나 갈 곳이 없다. 아침을 한술 뜨고 출근하는 것처럼 집을 나서는 것이 이제는 일과가 되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미국에 온 후부터 생긴 버릇이다. 며칠 전에는 세면대 앞에서 속옷 몇 개를 주무르고 있는데 며느리가 목욕탕 문을 어찌나 세게 닫아버리는지 쾅하는 소리에 너무 놀라 귀청이 떨어질 뻔했다.
  ‘시어미가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조차도 보기 싫다는 뜻 아닌가?’
  같이 산 지 1년도 채 안 돼 며느리와의 사이에 완연하게 벽이 생긴 것이다. 그 벽은 날이 갈수록 두꺼워지고 있었다. 아무한테도 털어놓을 수 없는 분노와 서러움이 차곡차곡 가슴에 쌓이고 또 쌓였다. 남편이 남기고 간 집을 처분해 그 돈을 큰아들한테 몽땅 준 것이 정말 후회스럽다. 미국에 온 것은 더더욱 후회 막심하다.
  
  “아니, 그 돈을 다 아들한테 줘버렸어? 왜 그렇게 돈 아까운 줄을 몰라. 돈, 딱 손에 쥐고 내 살 궁리를 했어야지. 그래, 수중에 한 푼도 안 남겨놓고 몽땅 다 줘버렸어? 똑똑한 줄 알았더니 자네 아주 바보로군 바보야. 늙으면 돈이 있어야 돼. 돈이. 자식 소용없다고. 돈이 효자야 효자.”
  일찍 미국에 와 노인 아파트에 살고 있는 동서가 한심하다는 듯이 내게 말을 늘어놓았을 때, 나는 동서가 한심해 보였다.
  “형님은 차암····.  왜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아들 힘들 때 도와주고 또 내가 도움을 받아야 될 때는 받고,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고 사는 게 좋잖아요?”
  “말이 좋지. 세상 일이 그렇게 자네가 생각하는 대로 되는 줄 알아? 좀 더 살아봐. 지금은 며느리가 잘해주는지 몰라도 얼마 못 갈 걸.”
  동서가 하는 말이 말 같지도 않아 속으로 코웃음을 쳤는데 지나고 보니 동서 말이 다 맞았다. 동서한테 가볼까 하고 버스를 타려고 막 발걸음을 떼다가 그만 주춤 서버렸다. 동서한테는 아들 며느리가 너무 잘해준다고 늘 입버릇처럼 말했는데 오늘은 자신을 믿을 수가 없다. 그냥 누구한테든 하소연을 하며 실컷 울고 싶은 심정이기 때문이다. 옆집 아낙네와 마주칠까  봐 그것도 싫다.
  ‘뭐 식당 부엌에서 허드렛일을 하라고? 사람을 어떻게 보고 그런 말을 해?’
  생각만 해도 기분 나쁘다.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동서의 말이 더 귀에 거슬린다.
  “아무리 서울에서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안방마님 노릇을 했으면 뭘하나? 여기는 미국이라네. 자네가 젊고 건강해 보이니까 저 여편네가 노느니 심심풀이로 자기랑 같이 다니자는 말이야. 아들한테 신세 안지고 용돈 벌어 쓰는 것도 좋은 일 아닌가?”
  
  젊었을 때부터 동서에게서는 묘한 바람이 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바람 때문에 가슴이 시려도 참았다. 시아주버니는 하는 일마다 실패를 거듭했고 아이들마저도 잘 풀리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들 학비도 남편이 뒷바라지를 했었다. 그럴수록 그녀는 내게 형님 노릇을 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더 기가 막힌 일도 있었다. 하루는 동서가 자꾸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자네한테 중매가 들어왔는데 시집갈 의사는 있어?”
  우스워죽겠다는 듯이 조소어린 입술을 씰룩거리는 동서의 말투에는 ‘너도 이제 별 볼일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구나.’ 하는 빈정거림이 잔뜩 묻어 있었다.
  “8층에 사는 웬 영감이 자네한테 반했나봐. 나이는 일흔아홉이고. 1년 전에 상처했다는군. 한데 나이가 좀 많지? 자네가 불법체류자라면 또 몰라도. 참, 영주권은 언제쯤 나온대? 요새는 꽤 걸린다고 하던데.”  
  영주권까지 들먹이며 동서는 내 속을 긁었다. 말 같잖은 소리는 하지도 말라고 화를 발끈 내면서 나는 동서를 노려보았다.  
  “싫으면 그만이지 왜 그렇게 화를 내고 그래? 알았어. 알았어. 내가 실수했어. 미안해. 미안해. 입김도 안 들어가리라는 자네 성격 잘 알지만, 그 영감이 하도 졸라서 내가 한 번 말해본 거야. 한데, 자네가 잘 몰라서 그렇지 요새는 나이 들어 재혼하는 거, 흉 아냐. 심지어는 80 난 노인들도 장가를 간다니까.”
  그 후부터 동서가 사는 아파트에는 발길이 뜸해졌다. 영감쟁이 하나가 나를 훔쳐보고 있는 듯해 끈적끈적한 불쾌감에 온몸이 스멀거렸기 때문이다    
  
  나는 몇 대의 버스를 그냥 떠나보내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길거리엔 차들이 분주하게 오가고 있었다. 정류장에 있던 사람들도 목적지를 향해 다 떠났다.  갈 곳이 있는 그들이 부러웠다. 가슴에 연기 같은 것이 가득 차오르며 숨을 뿜어내도 시원하게 걷히지가 않고 자꾸 답답했다. 토할 수 없는 시커먼 돌덩어리를 삼킨 듯한 무거움에 가슴이 짓눌렸다. 잿빛 하늘이 얕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디로 갈까?’
  유행가 가사 모양 정처 없이 발길 닿는 대로 흘러가는 수밖에 없다.
  
  1년 전, 남편은 고혈압으로 쓰러져 바로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미국 땅에 묻혔다. 두 아들이 미국에 살기 때문이다. 남편은 오래도록 대기업에서 중역으로 몸담고 있다가 정년퇴직을 한 후, 거의 매일 컴퓨터만 들여다보며 주식투자에 매달려 살았다. 한때는 잘 나가던 적도 있었으나 퇴직을 한 다음에는 증권도 바닥을 쳤다. 그런 남편이 보기 싫어 나는 잘도 돌아다녔다. 그러나 지금처럼 쓸쓸하지도 않았고 처량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정이 좋은 부부도 아니었는데 남편이 없는 자신을 돌아보니 꼭 날갯죽지 떨어진 새 같다.

  나는 맞선을 본 다음, 좋다든지 싫다든지 하는 그런 감정을 느끼지도 못하고 아버지의 의사에 따라 결혼을 했다. 그리 옛날도 아니었는데 나는 이조시대 여인처럼 인생을 살았다. 신랑은 서울에서 대학교를 나온 수재라고 했다. 그때 나는 집에서 가사를 돌보고 있었는데 남편 이모를 통해 중매가 들어온 것이었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부터 부를 쌓아 지방유지로 이름이 나 있었지만 나는 이름뿐인 부잣집 맏딸이었다. 어머니는 계속 병석에 누워계시다가 내가 일곱 살 때 세상을 떠나 아버지는 금세 재혼을 했고, 그 밑으로 일곱 명이나 되는 자녀를 줄줄이 낳아, 자랄 때 나는 아버지의 눈길 한번 제대로 못 받았다. 칭찬 한 번 들어본 적도 없다. 부모의 사랑이 뭔지도 모른 채, 나의 어린 시절은 슬픔과 눈물의 연속이었다. 동생들 치다꺼리에 내 존재는 완전히 잊고 산 세월이었다. 이런 나를 우리 집을 들락거리면서 일을 도와주던 남편의 이모가 측은하게 여겼는지도 모를 일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안에서 보낸 세월이 근 10년이나 되었다. 대학 진학을 못한 것이 두고두고 한이 되어 무관심한 아버지를 많이 원망했었다.

  발길 닿는 대로 흘러오고 보니 남편의 산소였다. 입구에서 꽃 한 다발을 샀다. 이른 아침이어서인지 사람 그림자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남편의 무덤 앞에 앉았다. 마음에 아무런 동요도 없고 그냥 담담하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바깥일에 바빠 항상 무심하고 무덤덤했던 남편과의 결혼생활은 한마디로 불만의 세월이었다. 마작에 미쳐 주말에는 으레 외박이었다. 어릴 때부터 참는 데는 이력이 나 그냥 꾹꾹 참고 살았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도 그립다거나 보고 싶다거나 그런 감정은 도무지 없었다. 남편이 없으니까 아들 며느리가 무시하는 것 같아 그것이 제일 속상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갑자기 서러움이 복받치며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실컷 울기라도 해버리면 조금은 속이 시원해질 것도 같았다. 가끔씩은 밤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버스를 타고 먼 산을 바라보다가도 그만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남이 볼까 창피해서 이를 악물며 참은 적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엉엉 소리 내어 울어도 된다. 아무도 없는 적적한 공동묘지, 통곡과는 잘 어울리는 장소다. 어느새 나는 엉엉 소리를 내며 울고 있었다. 슬픈 울음소리는 적막한 공기를 가르며 허공 속에 흩어졌다. 터져버린 눈물샘은 쉴 새 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정말 대책이 없다. 하루가 막막해 눈을 뜨기조차 두려운 나날이다. 노인 아파트에 들어가려면, 자격이 돼도 몇 년씩은 기다려야 한다는데 나는 아직 영주권도 없는 몸이다.
  
  둘째 아들이 매달 용돈은 보내주지만 그 돈으로 아파트를 얻어 혼자 살지는 못한다. 경영학 박사인 둘째는 지금 뉴욕에 있는 국제은행에서 일하고 있다. 둘째한테 가서 밥이나 해주며 살까 하는 안이 떠올라 한번은 말을 끄집어냈다가 단번에 거절을 당했다.
  “어머니 저, 집에서 밥 통 안 먹어요. 그냥 잠만 자요. 또 거기는 한국 사람이 하나도 없고 젊은 미국 애들만 사는 아파트 단지라 어머니는 감옥살이해야 됩니다. 더구나 한 달에 반은 외국 출장 나가야 돼, 제가 집에 없는데 어떻게 어머니가 뉴욕에 삽니까? 안 돼요”
  둘째한테 맘속에 있는 말을 할 수는 없다. 잘못하다가는 형제끼리 의 상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업 확장을 해놓고 쩔쩔매는 큰아들, 여러 가지 상황으로 봐 지금은 참고 사는 수밖에 없다. 목구멍까지 꽉 차 있는 서러움을 밖으로 토해내고 싶다. 그래야 속이 뚫릴 텐데 정말 너무 답답해 숨도 제대로 못 쉴 지경이다. 머지않아 저절로 밖으로 쏟아져 나올 것 같아 나 자신도 두렵다.
  
  갑자기 인기척이 나서 눈을 돌리니 웬 여자가 나를 보고 서 있었다. 울고 있는 내 모습이 무척이나 처량해 보였던 모양이다. 눈이 마주치자 여자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표정이 얼어붙어 있었다. 30을 갓 넘은 듯한 동양 여자였다. 까만 바지와 블라우스가 바람에 하늘거렸다. 순간적으로 분명히 한국 여자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가 내게 간단히 목례를 하고는 남편 산소와는 한참 떨어진 산등성이로 올라갔다. 아래 도로를 내려다보니 그 여자의 것인 듯한 새까만 차 한 대 가 주차해 있었다. 겨우 울음을 그치고 무덤 앞에 넋 나간 사람처럼 우두커니 앉아 있으면서 그 여자가 언제쯤 내려올까 하고 기다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쓴웃음이 나왔다.

  한참 후에 여자가 내려왔다. 여자를 보고 몸을 일으키다가 나는 그만 휘청거리고 말았다. 여자가 재빨리 부축하지 않았더라면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을 것이다. 나도 모르게 한국말이 나왔다.
  “미안해요. 너무 오래 앉아 있어 그런지 다리에 힘이 빠졌나 봐요.”
  여자는 미소를 지었다. 그때서야 나는 혹시 한국 여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어색한 표정을 지었는데 정말 다행하게도 여자의 입에서 한국말이 나왔다.
  그녀의 부축을 받으며 등성이를 내려오다가 나는 또다시 중심을 잃고 말았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눈앞이 어지러워 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얼른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녀에게로 몽땅 몸이 실려졌다. 그녀도 비틀거리며 힘겹게 나를 받아 안았다.
  나는 소나무 밑에 있는 벤치를 가리키면서 마음과는 정반대의 말을 했다.
  “바쁘시면 먼저 가세요. 좀 있으면 괜찮아질 거예요.”  
  예상대로 그녀는 내 곁에 앉았고, 우리는 한참 동안을 벤치에 머물렀다. 참으로 고마웠다. 오랜만에 받아보는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배려였다. 집이 어느 쪽이냐는 말을 시작으로 우리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무슨 인연인지 집도 같은 윌셔 거리에 있었다. 나는 남편 산소에 왔다고 애길 한 다음, 혹시 그녀도 남편을 잃었는가 싶어 누구 산소에 왔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어머니 산소라고 간단하게 대답하고는 화제를 바꾸었다.
  “안색이 안 좋으세요. 많이 우셨나 봐요.”
  콧잔등이 시큰해지며 또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가슴속에 꽉 차 있는 서러움이 갑자기 치솟아 올랐다. 체면 때문에 아무한테도 못한 이야기가 터져나온 것이다. 우리 집안의 내막을 모르는 여자이니 말을 쏟아놓아도 된다는 계산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영감이 그리워서가 아니라 내 신세가 서글퍼서 자꾸 눈물이 나네요. 아들 며느리가 괄시하는 것 같아 더 그래요.”
  
  이렇게 시작된 하소연은 계속 이어졌다. 어느새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묘지에 들어설 때만 해도 잔뜩 흐린 잿빛 하늘에서 비라도 뿌릴 것 같았는데 언제 개였는지 청명한 하늘에는 조개구름들이 은은히 깔려 있었다. 햇살을 받은 초록의 잎사귀들이 생기를 띠고 반짝반짝 빛을 발하면서 나를 보고 방긋방긋 웃었다. 속이 뻥 뚫리며 후련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오랜만에 실컷 통곡을 하고 가슴속에 차 있는 서러움을 쏟아냈기 때문일까?’      
  몸도 한껏 가벼워져 얼른 일어났다. 여자는 나를 부축했다.
  “괜찮아요. 어지럼증이 씻은 듯이 싹 가셨어요. 아주 기분이 가뿐해요.”  
  여자는 내 팔을 놓지 않고 여전히 붙들고 있었다. 남의 슬픔을 끝까지 들어주며 같이 슬퍼해주는 그녀의 심성에 감동이 느껴져 가슴이 뭉클했다. 그녀의 가슴에서 훈훈한 정이 내 맘속으로 스며들었다.
  집에까지 모셔다 드릴 테니 자기 차를 타라고 하면서 여자는 차 문까지 열어주고 닫아주며 지극히 자상스럽게 나를 대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시간이 되면 어디 가서 점심이라도 먹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자는 두말 않고 승낙을 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말이 없고 지극히 비사교적인 내가 이 여자한테는 왜 이렇게 술술 말이 잘 나올까?’
  우리는 근처 한국 식당으로 들어갔다. 마주앉아 자세히 얼굴을 들여다보니 그녀는 상당히 미인이었다. 화장을 전혀 안 했는데도 윤곽이 뚜렷했다. 하얀 피부에 갸름한 얼굴이 아주 매력적이고, 눈매가 시원했다. 알맞게 오뚝한 코와 입술 모양도 선명하고 예뻤다. 보면 볼수록 자꾸 들여다보고 싶은 그런 얼굴이었다. 물결이 치듯 웨이브가 진, 어깨에 닿을락 말락한 머리 모양도 보기가 좋았다. 그녀는 미스 장이라고 자기를 소개했다.

  미스라는 말에 귀가 번쩍 띄었다. 어느새 둘째 아들이 마음속에 가득 차 있었다. 결혼에 한 번 실패했으나 아이는 딸리지 않았으니 가능성은 있을 것이다. 나이를 물었더니 그녀는 서른이 넘었다고만 했지 정확하게 밝히지는 않았다. 아들은 서른네 살이다.
  점심을 먹으면서도 미스 장은 맛있는 것들을 내 앞으로 밀어주었다. 며느리가 좀 이래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식당 주인이 딸이냐고 물었다. 둘이 닮았다면서 꼭 모녀지간 같다고 해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차를 타고 집으로 오는 동안 또 하소연이 터졌다.
  “미안해요. 내가 초면에 너무 실례를 하는 것 같네요.”
  “아녜요. 누구한테든 털어놓고 이야기를 해야지 속에 담아 놓고 있으면 병이 돼요. 앞으로 갈 데 없으시면 언제든지 저희 집에 오세요. 그리고 저한테 얘길 하시고 속을 푸세요. 제가 다 들어 드릴게요.”
  처음엔 듣기만 하고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태도였는데 조금씩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도 내게 친근감을 같는 것 같았다. 참 고마웠다. 그동안 너무 버려져 있어 정에 굶주린 탓인지도 모른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어느 날이었다. 집에 있기도 불편하고 나가기도 불편해 엉거주춤하고 있는데 며느리의 뾰족한 목소리가 가슴을 찔렀다.
  “오늘은 안 나가세요?”
  빨리 나가라는 뜻이다. 우산을 받쳐 들고 정처 없이 집을 나섰다. 비바람이 너무 심하게 몰아쳐 몇 발자국을 걷다가 옆집 처마 밑에 잠깐 서서 어디로 갈까 하고 생각을 했다. 날개 떨어진 새 한 마리가 갈 곳을 잃어 처마 밑에서 비를 맞으며 오들오들 떨고 있는 바로 그 모습이었다. 가슴속에 흐르는 소나기 같은 눈물과 함께 온몸에 한기가 퍼져 가슴이 벌벌 떨려 턱이 다 흔들렸다. 추운 겨울도 아니었는데 뼛속까지 고드름이 맺히는 것 같았다. 하늘도 무슨 한이 그리 많은지 장대 같은 눈물을 길바닥에 쏟으며 통곡을 하고 있었다. 그때의 심정은 교통사고라도 나서 이대로 빗길에서 콱 죽어버렸으면 싶었다. 그래서 두고두고 며느리의 가슴 한복판에 대못을 박고 싶었다.
  그날, 동서네 아파트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걱정 좀 해보라고 전화도 안 걸었다. 갈 곳이라고는 동서네 집밖에 없는 것을 뻔히 알 텐데도 며느리로부터의 전화는 없었다. 동서한테는 적당히 거짓말로 둘러댔다. 자고 들어온다는 말을 했노라고.
  다음날 저녁에 집엘 들어서니 며느리는 어디서 주무셨냐고 묻지도 않았다. 전화라도 한 통화 해주었으면 걱정은 안 했을 것 아니냐고 화라도 내 주기를 바란 내가 바보였다. 며느리는 일체 말이 없었고, 그녀의 표정에서 걱정은커녕 아주 안 들어와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뭐하러 기어 들어왔냐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갑자기 며느리가 무섭기까지 했다. 퇴근 후 집에 들어온 아들도 별말이 없었다. 집에서 잤는지 말았는지 그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아들한테서도 완전히 버림받은 기분이 들어 그날 밤 나는 가슴을 앓으며 많이 울었다.
  
  미스 장이 계속 머리에서 사라지지가 않았다. 내막을 알아보고 둘째 며느리로 삼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화를 거니 그녀가 나를 반겼다. 목적지를 두고 버스를 타니 기분이 날아갈 듯이 상쾌했다. 미스 장은 버스 정류장까지 나와 나를 맞이했다. 얼른 하아타이 박스를 받아 들고, 이렇게 무거운 걸 어찌 들고 오셨냐고 놀라면서 안쓰러운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자그마한 타운 하우스였다. 가구도 별로 없고 까만 가죽 소파만이 거실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직장에 다니느냐고 물었더니 부동산 브로커인데 요즘은 한가해서 집에 있는 시간이 많다고 했다. 결혼도 안 하고 혼자 살아, 중매해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가타부타 대답을 않고 나이가 들고 보니 마땅한 자리가 없다면서 말을 얼버무렸다. 어딘가 비밀의 베일에 싸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일어나려고 하는데 이미 점심 준비를 다 해놓았다면서 그녀는 나를 붙잡았다. 따듯한 마음씨가 가슴에 와 닿았다. 파전을 부치고 불고기도 구워서 정말 오래간만에 잘 먹었다. 음식 솜씨도 며느릿감으론 만점이었다. 후식으로 내온 딸기가 달콤한 게 아주 맛이 좋았다. 딸기를 먹다 말고 나는 그만 목이 메었다.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아들 며느리랑 손자 녀석들까지 모두 응접실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며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나는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고 응접실에만 자꾸 귀가 쏠렸다. 방에서 나가보려고 하다가도 자기네 식구들만 있는데 방해가 될 것 같아 편치 않은 마음으로 앉아 있었다.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세 살짜리 막내 놈이 이쑤시개에다 딸기 한 알을 콕 찍어 가지고 들어왔다. 녀석이 “할머니 이거 먹어” 하고 딸기 한 알을 코앞에 들이미는데 온몸에 서러움이 홍수처럼 밀려오며 콧잔등이 시큰했다. 할머니 딸기 안 먹는다고 손자 놈 손을 탁 쳐버렸다.

  넋두리는 또 시작되었다. 미스 장도 맞장구를 쳤다. 첫날보다는 말을 많이 하며 스스럼없이 나를 대해 주어 내 마음도 편했다.
  “그건 너무 했네요. 어머니 나오셔서 딸기 드시라고 얘길 하든지 아니면 자기네가 먹기 전에 한 쟁반 담아서 어머니 방에 갖다 드렸어야죠. 그게 다 자식 교육인데····. 그렇게 혼자 속을 끓이지 마시고 아주머님께서 아들 며느리 불러놓고 얘길 하세요.”
  아들 며느리한테 이 마음을 말할 수는 없다. 며느리 성질에 더 역효과를 낼지도 모른다. 그저 참고만 사는 인생이니 영원히 참고 사는 수밖에 없다. 며느리는 남의 자식이니까 그렇다손 치더라도 배 아파 낳은 내 아들이 저러니 더 서럽다.
  남편 장례식이 끝난 후 큰아들은 내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맹세를 했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더라고 엄마의 여생은 자기가 편히 잘 모시겠다고 했다. 그 맹세는 1년도 못 가 헛것이 돼버리고 말았지만 그때의 아들 마음은 진심이었으리라고 믿고 싶다.
  
  미스 장을 두 번째 방문한 날이었다. 집엘 가려고 현관문을 나서는데 그녀가 따라나왔다. "나오지 마세요. 저기 나가서 바로 버스 타면 돼요" 하고 미스 장을 돌아보고 말을 하다가 나는 그만 문턱에 왼발이 걸리고 말았다. “어머머” 하고 앞으로 꼬꾸라지려는 찰나 그녀가 나를 잽싸게 붙들었는데, 우린 둘 다 바닥으로 나둥그러지고 말았다. 미스 장의 가녀린 몸이 나를 안고 나자빠진 것이다.
  나는 겨우 일어났다. 그런데 미스 장이 일어서다가 도로 주저앉았다. 왼발을 쭉 뻗고 있었다. 놀래서 다가가니 발목이 삔 모양이었다.  
  “큰일 났어요. 이럴 땐 빨리 침을 맞아야 돼요.”
  “괜찮아요. 좀 있으면 가라앉겠죠. 일단 집으로 들어가야 되겠어요.”
  그녀는 내 손을 붙들고 오른발에 힘을 모으며 겨우 일어섰다. 심하게 절뚝거리는 것을 보니 많이 아픈 모양이었다. 그 와중에도 어디 다친 데 없느냐고 물으면서 미안해서 안절부절못하는 내게 그녀가 도리어 미안해했다.  
  “괜히 번거롭게 해 드리네요. 아주머니는 가셔도 괜찮아요. 좀 있으면 괜찮아질 거예요.”
  “무슨 소리예요. 나 때문에 그리 됐는데, 지금 나랑 같이 가요. 어디 아는 한의원 없어요? 다행히 왼발이니 운전은 할 수 있겠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순식간에 복사뼈가 탁구 공 만하게 부풀러 올랐다. 뼈에 금이 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사코 마다하는 그녀를 이끌고 가까운 한의원엘 갔다. 첫 침을 꽂자마자 미스 장이 자지러지는 비명을 질렀다. 갑자기 가슴이 조여들어 온몸이 움칠움칠했다.  
  ‘저렇게 비명을 지를 성격이 아닌데.’
  뾰족한 침 끝이 뼛속을 후비며 파고드는 모양이다. 한의사는 지극히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여러 대의 침을 복사뼈에다 계속 꽂았다. 이를 악물고 소리를 삼키는 그녀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나는 얼른 미스 장의 손을 붙들었다. 그녀는 전신의 힘을 손에다 쏟아부으며 내 손을 움켜쥐었다. 큰아들을 낳을 때 침대 한 끝을 부여잡고 “엄마, 엄마.” 하고 부르며 눈물을 흘리던 때가 생각났다. 갑자기 그녀의 어머니가 된 기분이었다. 드디어 한의사가 아주 느리게 한마디를 했다.
  “잘 참네요. 이제 다 됐어요. 침 맞을 때 제일 아픈 곳이 바로 복사뼙니다.”
   뼈에는 아무 이상이 없어 천만다행이었다. 다음 날부터 거의 매일 그녀의 집을 들랑거렸다. 미스 장이 한사코 마다했으나 나는 설거지도 해주고 청소도 해주었다. 청소래야 쓰레기 버리는 것과 거실의 먼지를 닦아주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나는 문득 며느리 생각이 났다.
  ‘손 하나 까딱 안 하는 시어미가 며느리의 눈에 어떻게 비쳐졌을까?’
  방도 치워주고 싶었으나 방문은 언제나 닫혀 있었다. 뜨거운 수건 찜질이 그녀에게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아 사는 보람까지 느껴졌다. 미스 장이 빨리 낫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매일 그녀의 집에 올 수 있는 명분이 있다는 것이 발걸음을 가볍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은 그냥 저쪽 방에서 자고 싶었다. 방이 두 개이니 방세라도 조금 내고 미스 장 집에서 사는 것이 아들네에 있는 것보다는 마음이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러나 마음뿐이었다.  
  “아주머니께서 너무 잘해주시니까 도리어 제가 미안해요. 또 자꾸 일을 하시니까 제가 불편해요. 그냥 놀러 오셔서 저하고 친구해 주시면 돼요. 아주머니가 이렇게 자주 오시니까 저도 참 좋아요. 침 맞으러 갈 때도 혼자 가는 것보다 같이 다니니까 더 좋고요.”
  빈말 같지는 않았다. 발목이 다 나은 다음에도 나는 그녀를 도와주고 싶었으나 그녀는 내게 손도 까딱 못하게 했다. 이상할 정도였다. 점심을 먹은 후, 식탁을 훔치려고 해도 기겁을 하고 말렸다. 그러나 나는 내 마음을 좀 편하게 해달라고 사정을 하며 일손을 놓지 않았다.    

  그 후, 우리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전화를 할 때마다 그녀는 항상  나를 반겨주었다. 그리고 늘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요. 오늘은 한가해요. 지금 놀러 오세요.”  
  부동산 중개인치고는 자유 시간이 많은 편이었다. 만나는 횟수가 늘어감에 따라 그녀는 자기 어머니 얘기를 가끔 했다. 젊을 때, 혼자되어 재혼도 안 하고 딸 하나만을 키우면서 고생을 많이 해, 어머니 생각만 하면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자기가 어머니 속을 많이 썩였다는 말도 비쳤다.
  “내가 보기엔 미스 장, 어머니한테 무척 효녀였을 것 같은데 이해가 안 되네.”
  “어머니 돌아가신 후에야 정신이 든 거죠. 정말 제가 너무 철이 없었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는 4년쯤 됐는데 얼마 전에 이장을 했다고 한다. 젊은 애가 보통 정성이 아니었다. 돌아가신 다음에야 뼈저리게 후회되는 일이 많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자세한 내막은 얘기를 하지 않았다.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을 해서 그런지 미스 장은 내게 정말 잘해 주었다. 어떤 땐 미안할 정도였다. 생전 처음 가보는 고급 식당엘 가서 비싼 스테이크를 사주기도 했다.    
  “늙은 사람 만나서 친구해 주는 것도 고마운데 이렇게 돈까지 쓰면 내가 미안해서 안 돼요.”
  “아녜요. 괜찮아요. 저도 한 번쯤은 갚아야죠. 더구나 지난번, 아플 때 아주머니께서 제게 너무 잘해주셨잖아요.”
  그녀 집에 갈 때마다 늘 점심을 얻어먹게 되어 간단한 선물을 사가지고 갔더니 그걸 또 고맙게 여기고 있는 것이었다. 나 때문에 다쳤는데도 거꾸로 고맙다고 그러니 그녀의 착한 심성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둘째 며느릿감으로 점점 내 맘속 깊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그동안에 지켜보아도 남자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한 번은 애인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없다고 잘라 말했다.
  ‘아휴, 다행이군.’
  “미스 장 같은 미인이 남자가 없다니까 이상하네요.”
  “아이, 아주머니도····. 제가 무슨 미인이에요? 저 미인 아니에요.”
  “미스 장은 너무 겸손해서 탈이야. 길을 막고 물어봐요. 다 미인이라고 그럴 테니.”
  앞에 대놓고는 멋쩍어서 남의 칭찬을 잘 못하는 성격인데도 미스 장한테는 마음에 있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아주머니가 예쁘게 봐주셔서 그렇죠. 나이가 너무 많아 마땅한 사람도 없지만 전 이렇게 혼자 사는 게 편하고 좋아요.”
  그리고 미스 장은 서른여섯이라고 나이를 밝혔다. 아들보다 두 살이 많았다. 사실, 나이 좀 많은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들에게 이혼 경험이 있기에 더 그렇다. 보면 볼수록 그녀가 맘에 들었다. 둘째 며느릿감으로 마음을 굳힌 나는 추석날 미스 장이랑 같이 성묘를 가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뜻밖에도 며느리가 물었다.
  “어머니, 추석날 성묘 갈 때 애들도 다 데리고 가야 되겠어요. 작년에 애들 안 데리고 간 게 마음에 걸려요.”
  며느리 입에서 성묘 가자는 말이 먼저 나온 것이 나는 놀라웠다. 으레 생각조차 못할 줄 알고 나는 미스 장만 맘에 두고 있었다. 반갑고 고마웠다.
  “애들도 같이 가면 좋지. 그럼 큰애가 학교 갔다 와야 하니까 오후에 가야 되겠네.”
  미스 장과의 시간 약속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한데 미스 장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감기가 들었다고 하면서 성묘를 못 간다고 했다. 어머니를 그토록 생각하면서 그까짓 감기 때문에 성묘를 못 간다고 해 좀 의아한 맘이 들었다. 며느릿감으로 점을 찍어 놓았으니 이제 슬슬 가족을 만나도 될 것 같은 계산 아래 나는 식구가 다 간다는 말도 했다.
  “애들한테 감기 옮기면 어떡해요?”
  그러면서 기침을 콜록콜록했다. 꼭 같이 가고 싶었으나 할 수 없었다.
  “그럼 다음에 산소 갈 때 나랑 같이 가요.”
  그 후, 산소 가자는 말이 없어 내가 먼저 물어보았더니 그녀는 혼자 다녀왔다고 했다. 서운한 생각이 들었으나 나는 별 내색 않고 흘려버렸다. 사람은 혼자서 실컷 울고 싶은 때가 있는 법이니 그녀도 그랬을 것 같아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를 부르며 통곡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콧잔등이 시큰했다.
  
  하루는 벼르던 둘째 아들 얘기를 끄집어내고 우선 나이와 이혼한 경험이 있다는 것을 밝혔다. 그리고 그녀의 집을 방문할 때마다 과일 같은 것을 사 가지고 가서 가끔씩은 작은아들이 용돈을 보내왔다는 말을 비치곤 했다. 또 아들한테 미스 장 얘기를 했더니 엄마한테 잘해주어 고마워한다는 말도 했다.
  “제가 뭘 잘해주긴요. 아주머니가 제게 잘해주시죠.”
  고급 핸드백도 선물했다. 아들 문제를 떠나서도 미스 장한테는 뭐든지 해주고 싶은 생각이 저절로 우러났기 때문이다. 핸드백을 보고 깜짝 놀라며 미스 장은 이렇게 좋은 것은 받을 수 없다고 강력히 사양했다.
  “이건 내가 돈 주고 산 게 아니고 옛날에 남편이 외국 출장 가서 사 온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더 받을 수가 없죠. 이렇게 귀한 건 주머니께서 오래오래 간직하셔야죠.”
  “이거 말고도 더 있으니까 괜찮아요. 나야 이제 이런 백 들고 갈 데도 없어요.”
  50을 갓 넘겼을 당시, 남편은 출장이 잦았다. 마누라한테 선물이라고는 할 줄 모르던 사람이 웬일인지 출장 다녀올 때마다 선물을 사왔다. 바바리코트도 하나 사왔으며 주로 핸드백을 사왔다. 핸드백은 1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새 것 같다. 반짝반짝하게 윤기가 흐르는 것도 여전하고, 노란 장식도 조금도 변질이 되지 않아 아직도 진짜 금처럼 반짝인다. 디자인도 유행을 타지 않고 언제든지 들 수 있는 그런 모양이다. 사실 나보다는 며느리에게 더 잘 어울려 며느리가 시집오자마자 서너 개는 준 것 같다. 한 번은 조카며느리가 예쁘다고 탄성을 질러 들고 있던 것을 준 적도 있다.
  “왜 마음에 안 들어요? 쓰던 거라서?”
  “아녜요. 제 마음에 꼭 들어요. 너무 비싼 거라서 그러죠.”
  그녀는 핸드백을 만지작거리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지만 내 마음은 기뻤다. 그녀가 내게 베푸는 것에 비하면 핸드백 같은 것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내게 삶의 활력소를 불어넣어 주었다. 지극히 말을 아끼던 그녀가 말을 많이 하면서 나를 웃기기도 했다. 유머가 아주 풍부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깔깔대고 웃었다. 부모에게서도 남편에게서도 자식에게서도 받아보지 못한 훈훈한 정을 그녀로부터 느꼈다. 피도 살도 섞이지 않은, 그것도 우연히 만난 생면부지의 여자한테 나는 달음박질을 치며 달려갔다. 그녀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사랑의 빛 때문이다. 시들시들했던 세상이 파릇파릇하게 내 눈에 비쳐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나와 점차 친해지면서 조금씩 조언도 해주었다.
  “이런 거, 저한테 안 해줘도 괜찮아요. 아주머니가 먼저 며느리한테 베풀어 보세요. 백화점에 데리고 가서 옷도 사주시고 또 애들 장난감도 사 주고 그러세요. 이따가 집에 가실 때는 애들 먹을 거라도 사 가지고 들어가세요. 마음이 안 내키시더라도 그냥 눈 딱 감고 그래도 내 자식인데 생각하시고 노력을 하시면 그쪽에서도 마음이 돌아설지도 모르잖아요? 죄송해요. 주제넘게 이런 말씀을 드려서.”
  “아니에요. 미스 장 말이 맞아요.”
  정말 그랬다. 다 맞는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며느리나 손자 녀석들을 위해 잘한 것이 하나도 없다. 잘하기는커녕 도대체 한 것이 없다. 혼자 나가 이것저것 사 먹고 다니면서도 애들 먹으라고 과자 한 봉지 사 들고 온 적이 없다. 미스 장은 일일이 합당한 말만 했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얘길 할 때마다 무릎을 치며 그대로 따라야겠다고 생각했다. 시들시들하던 세상이 파릇파릇하게 변하고 이제는 녹음이 우거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한 번은 “우리 집에 오실 때 애들 데리고 와도 괜찮아요. 저, 애들 참 좋아해요.”  하고 생각지도 못한 말을 했다. 금세 좋은 일이라고 느껴졌다. 애들을 봐주면 그만큼 며느리가 힘을 덜게 될 것이다.
  ‘막내를 한 번 데리고 나와 볼까?’
  위 두 놈한테 치어서 그런지 막내가 좀 순한 편이다. 그리고 나를 제일 따른다.
  ‘그러나 며느리가 허락을 할까?’

  그 며칠 후, 나는 며느리에게 미스 장 이야기를 하고 막내를 데리고 가도 되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데, 며느리가 선뜻 허락을 하며 자기가 데려다주겠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어머니 애 안 좋아하시는데 힘드시면 어떡하느냐고 도리어 반문을 했다. 얼굴이 화끈했다. 지 새끼 미워하는 시어미가 어찌 좋을 리 있겠는가?
  막내 놈과 둘째가 거실에서 빙빙 돌다가 마룻바닥에 앉아 있던 나를 향해 엎어진 적이 있었다. 아이들을 받아 안아줘야 마땅한 할미가 그만 무의식적으로 몸을 피해버렸다. 둘째는 바닥에 꽈다당 넘어졌고 막내는 내 오른팔에 머리를 박고 발라당 드러누웠다. 부엌에 있던 며느리가 놀라서 뛰어와서는 “앙” 하고 울음을 터뜨린 둘째는 제쳐놓고 내 오른팔에 안겨 있다시피 한 막내를 얼른 떼놓았다. 그리고 내 눈치를 살피며 괜찮으시냐고 물었다.
  
  사랑이라고는 한줌도 지니지 못한 할미였고 시어미였다. 아이 셋 데리고 쩔쩔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나 몰라라 하고 맨날 나가 돌아다니기만 했으니 그게 무슨 시어미인가? 남들은 며느리 직장에 내보내고 애 키워주며 살림까지 해준다고들 하는데, 나는 그런 생각을 꿈에도 해본 적이 없다. 손자 놈들이 법석을 떨며 시끄럽게 굴 때는 젊은 애가 연년생으로 아들 셋 줄줄이 낳은 것조차도 마음에 안 들었다. 어려운 공부하고도 써먹지 못하고 집구석에 처박혀 애들 치다꺼리하느라 정신없는 며느리가 한심하기도 하고 눈에 거슬리기까지 했다. 며느리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대우만 받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렇게 시작이 되어 나는 항상 막내를 데리고 다녔다. 막내는 버스 타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나 역시 심심치 않아 좋았다. 녀석도 미스 장을 ‘장 아줌마’라고 부르며 잘 따랐고 그녀 역시 막내를 아주 예뻐했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미스 장도 금세 정을 주는데 나는 내 친손지들을 귀찮아했었다.

   어느 날, 둘째 놈 방이 하도 어질어져 있어 치워주다가 조립해 놓은 성냥갑만한 장난감 차를 망가뜨린 적이 있었다. 녀석이 그냥 발을 뻗대고 앙앙 울면서 할머니 나가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닌가?
  “할머니 나가. 여긴 우리 집이야. 나가. 나가. 할머니 나가.”
  나는 너무 기가 차서 멍하니 서 있었다. 눈물이 났다. 며느리는 두 눈을 착 내리깔고 차는 다시 조립하면 되니 울지 말라고 아주 차분하게 아이를 타일렀다. 그리고 내게 말했다.
  “괜히 애들 방에 들락거리지 마시고 어머닌 그냥 어머니 방에 가만히 계세요.”
  방구석에 콕 처박혀 나오지 말라는 뜻이다. 눈앞에 보이는 것조차도 싫다는 말이다. 아이를 때려주며 할머니한테 그게 무슨 소리냐고 호통을 쳐도 시원치 않을 판에, 정말 너무 슬퍼 가슴이 저렸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슬픔을 어금니로 꽉 물었다. 지어미가 할미를 괄시하니까 애들도 그대로 보고 배우는 것이다. 방으로 들어와 안 될 소리지만 악담을 했다.
  ‘두고 봐라. 너도 이 담에 당해 봐라. 자식을 그 따위로 키우면 너도 그대로 당한다. 너도 훗날 너 같은 며느리한테 당해 봐야 내 맘 알 거다.’

  그 후부터 더 바늘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다··· 더 미웠다. 그런데 미스 장을 알고부터는 굳게 닫혔던 마음의 문이 차츰차츰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철없는 아이니 그럴 수도 있겠지 하고 이해가 되었다. 내가 밉게 구니 며느리도 나를 미워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부끄러운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언젠가는 먹다 남은 순대를 갖고 들어와선 이불을 뒤집어쓰고 먹은 적이 있다. 다들 자는 시간인데도 문이 잘 닫혔나 확인을 하고 그것도 모자라 이불을 뒤집어쓰고 먹었다. 두어 개 먹고 나니 더 이상 목에 넘어가지가 않아 변기에다 쏟아 넣고 쏴 하는 물소리와 함께 씻겨 내려가는 시꺼먼 밥찌꺼기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나선 도둑이 제발 재려, 혹시 변기가 막히면 어쩌나 하고 며칠을 끙끙 속을 앓았다. 그 다음부터 순대만 보면 구역질이 나는 증세가 생겼다.  
  
  미스 장 말대로 막내 놈도 자주 안아주고 애들 손잡고 집 근처 맥도날드에 가서 햄버거랑 아이스크림도 사 먹었다. 또 며느리가 좋아하는 과일도 한아름 사 가지고 들어왔다. 예전에는 냉장고에 들어 있는 과일 한 알에도 손을 댈 수가 없었는데 이제는 마구 꺼내 먹어도 마음이 편했다.
  왜 그랬을까? 먹을 것이 흔한 미국에서 나는 먹는 것으로 인해 서러울 때가 많았다.
  아들은 오징어 튀김을 좋아했다. 가끔 보면 부엌 한쪽 구석에 마른 오징어를 물에 불려놓을 때가 있었다. 그리고 저녁을 먹은 다음, 밤에 오징어를 튀겨서 먹었다. 어떤 때는 거의 밤마다 냄새를 풍겼다. 그러나 아들며느리는 어머니가 한지붕 아래에 살고 있다는 것을 완전히 무시한 채 그들만의 삶을 살고 있었다. 밤에 먹는 튀김이 건강에 나쁠 것이라는 염려보다 앞서 나는 그들로부터 외면당하는 것이 더 서러웠다.
  ‘그래서 더 나가 다니며 군것질을 했던가?’
  잔디에 물도 주고 부엌일도 거들어주고 하니까 소일거리가 생겨서 좋았다. 며느리 생일에는 예쁜 카드에다 금일봉을 두둑이 넣어주었다. 둘째 아들이 보내주는 용돈을 참말로 요긴하게 쓰고 있는 것 같아 나 자신이 행복했다. 길을 가다가도 괜히 눈물이 나서 남이 볼까 봐 부끄러웠었는데 이제는 그 눈물도 없어졌다. 집 안에서도 며느리와 정면으로 마주쳤을 때는 가슴이 철렁철렁 내려앉곤 했는데 그 증세도 없어졌다.
  온종일 가도 말 한마디 안하던 며느리가 슬슬 말문을 열었다. 며느리가 한 반찬도 맛있다고 칭찬을 했다. 이것저것 따져보니 며느리에게는 장점이 많았다. 남편 떠받들어, 애들 잘 키워, 살림 잘해, 제일 중요한 것은 다 잘하는 것이다. 또 부부금실이 좋아 시어미가 샘이 날 정도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미스 장 말대로 지네들 잘 사는 것이 가장 큰 효도인 것이다.

  미스 장을 완전히 며느릿감으로 찍어놓았을 즈음 운 좋게도 나는 그녀와 함께 여행을 하게 되었다. 신문을 펼칠 때마다 도배를 해 놓은 여행사 광고가 늘 그림의 떡처럼 느껴져 아쉬운 마음이었는데, 미스 장이 내 맘을 풀어준 것이다. 물론 내가 먼저 제안을 했었다. 지나가는 말로 흘렸는데 눈치 빠른 그녀가 얼른 허락을 한 것이었다.
  끝까지 마다하는 것을 나는 그녀의 비용을 부담해 주었다. 그리고는 마침 둘째 아들이 용돈을 보내왔다는 얘기를 슬쩍 비쳤다. 분위기 봐서 정식으로 얘기를 하려고 둘째 사진 중에서 제일 잘된 것으로 한 장 골라 가방 속에 단단히 잘 넣었다.    

  “자연의 위대함을 보면 인간은 참으로 하루살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끼게 돼요. 남에게 상처를 줘가면서까지 자기 욕심만 부리고 사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허다하잖아요. 지나고 보면 다 헛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겠지요?”  
  이제 겨우 서른 중반에 불과한 미스 장이 그랜드 캐니언을 내려다보며 철학자라도 된 듯이 심각하게 말했다. 바람에 머리를 흩날리며 우수에 잠긴 표정으로 서 있는 모습이 금세 눈물이라도 주르르 쏟아낼 것 같았다. 자신도 그 중의 하나였다고 인정하는 눈빛이었다.
  ‘무슨 슬픈 사연이 있는 것일까?’
  “어머니 생각이 나서 그래요?”
  “네?”
  미스 장은 반문했다. 그러더니 금세 “아아, 네에····.” 하고는 말을 이었다.
  “평생을 나 하나만 바라보고 나 잘 되기만을 바라고 사셨는데 저는 정말로 못된 딸이었어요. 어머니가 지겹고 싫을 때가 많았거든요. 나중에 어머니가 많이 편찮으셨을 당시는 그냥 돌아가시기만을 바랐어요.”
  잠시 말을 끊더니 미스 장은 다시 밝은 얼굴로 탄성을 질렀다.
  “정말 자연의 힘은 정말 위대해요. 저기 저것 좀 보세요. 아휴, 손으로 빚어도 저렇게 멋있게 만들지는 못할 거예요.”
  그날 밤, 밤이 깊었는데도 잠이 안와 나는 두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었다. 살며시 일어나 화장실을 향했다. 여행 중이라 그런지 대변을 잘 못 봐, 그냥 한참 동안 앉아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미스 장이 화장실 문 앞에서 나를 불렀다.
  “너무 오래 안 나오시기에. 괜찮으세요?”
  나에게 신경을 써 주는 그녀의 심성이 고마웠다. 침대에 누웠지만 잠은 쉬이 들지 않았다. 그녀도 잠이 안 오는지 뒤척거렸다. 머리맡에 놓인 등불을 켰다. 은은한 불빛이 눈물처럼 방안에 차올랐다.
  “미스 장도 잠이 안 오는 모양이네.”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네. 저도 잠이 안 와요.”
  “무슨 생각했어요? 어머니 생각?”
  “네. 아주머니는요?”
  “죽은 남편 생각이 나네요. 남편이랑 여행을 가본 적이 한 번도 없거든요.”
  갑자기 내가 왜 남편 얘기를 끄집어냈는지 모를 일이다. 여행을 하면서 즐겁기만 했지 남편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도 남편 얘기였다.  
  “나는 부부의 정이 뭔지도 모르고 살았다오. 부모 덕 없는 년이 남편 복도 없다 그러더니 옛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더라고요. 아들 둘을 낳기는 했으나 우리 영감은 나한테는 통 관심이 없는 남자였어요. 마작을 좋아해서 주말이면 으레 외박을 일삼고 날이면 날마다 회사일이 바쁘다며 한밤중에 들어오고, 남편 구경하기도 어려웠어요.”
  
  며느리 얘기가 나오면 주거니 받거니 얘기가 잘 이어졌는데 남편 얘기를 하니 미스 장으로부터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50대 초반부터 남편과는 각방을 썼다. 내가 먼저 베개를 들고 건넛방으로 와버렸다.  곤히 잠든 그의 숨소리가 내 온몸을 파고들며 살 속을 콕콕 찔러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옛날부터 여자들을 소 닭 보듯이 했다.
  “이 상무님은 돌부처예요 돌부처. 술자리에서 기생들이 아양을 떨어도 눈 하나 깜짝 안 합니다. 이 사진 좀 보세요. 지난번 연회에서 스냅으로 막 찍은 겁니다.”
  집에서 마작판을 벌이다가 사진을 여러 장 내놓으며 비서실장이 한 말이다. 정말 그랬다. 다른 남자들은 기생들을 끼고 앉아 볼을 비비는 장면이 다 잡혔는데 남편만 진짜 돌부처모양 부동자세였다.    
  각방을 쓰고 보니 그렇게 편하고 홀가분할 수가 없었다. 말 못하던 자존심의 상처도 말짱히 가셨다. 남편 역시 원했던 일이었을 것이다. 그의 자존심도 치유가 됐을 테니까.      
  결혼도 안 한 처녀한테 괜한 주책을 부린 것 같아 무안한 생각이 들어 나는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미스 장은 어머니랑 같이 여행한 적 있어요?”
  “없어요. 어렸을 때부터 저는 못된 애였어요. 고등학교 다닐 적엔 왜 그렇게 공부가 하기 싫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알 수가 없어요. 어머니는 아무 대학이라도 대학 졸업장은 따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강조를 하셨지만 저는 그까짓 대학은 가서 뭐하느냐고 반항만 했어요.”
  잠깐 얘기를 끊어, 나는 얘길 그만하려나 하는 생각이 들어 아쉬웠는데 다행히 얘기는 곧 이어졌다.
  “내 주위의 친구들도 다 그런 애들이었어요.”
  그러더니 또 금세 말을 잇지 않았다. 나는 얘기가 더 듣고 싶었다.
  “그래서 미스 장이 나쁜 데로 빠졌나요?”
  그녀가 놀란 듯이 아니라고 변명을 했다. 그리고는 차분하게 얘기를 계속했다.
  “친구 중에 부잣집 딸이 하나 있었어요. 저는 편모슬하에서 너무 가난하게 살아 빗나갔다고 핑계를 댈 수도 있지만 그 애는 아버지가 회사 사장이고 오빠도 수재만 모이는 일류대학에 다니는 집안의 딸이었어요. 오빠는 굉장히 미남이었는데 걔는 얼굴도 안 예쁘고 공부도 못 했어요. 걔가 항상 그랬어요. 오빠랑 비교당하는 것이 죽을 만큼 싫다고요. 공부로만 사람을 평가하는 집안 분위기 때문에 자기는 사람 취급도 못 받는다고 했어요. 친척들도 항상 오빠만 칭찬을 해, 걔한테는 그게 다 상처로 남았었나 봐요. 그 애 엄마는 나 때문에 친구가 나쁜 데로 빠졌다고 니를 만나지도 못하게 했어요. 그런데 그 중에서도 가장 슬픈 일은 제가 그 애 오빠를 좋아하게 된 거였요.”
  그녀 역시 독백처럼 천장을 향해 자신의 과거를 풀어내고 있었다. 며느릿감으로서의 점수가 점점 깎여가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도 나는 그녀가 측은했다.
  어머니의 눈물어린 정성도 작용을 했었겠지만, 그보다 더 친구 오빠에게 잘 보이고 싶어 미스 장은 겨우 대학 문턱을 넘긴 했었다. 미스 장은 “오빠. 오빠.” 하면서 그를 무척 따랐고 그 역시 그녀를 좋아했다. 그러나 친구 어머니는 멸시의 눈으로 미스 장을 버러지 보듯 했다. 내세울 것 없고 가난하다는 것이 죄는 아니다. 그런데도 친구 어머니는 그녀를 죄인으로 취급하며 친구가 빗나간 것까지 책임을 물으며 자신의 아들까지 망치려 하느냐고 미스 장을 몰아세웠다.
  결국, 오빠는 다른 여자와 함께 미국 유학을 떠나버렸다. 대학 2학년 때였다. 어머니마저 지병인 심장병이 도져 드러누워 계셨다. 미스 장은 다시금 빗나가기 시작했다. 너무나 철이 없었다. 물론 학교도 자퇴를 해버렸다.
  “너무 억울하고 분했어요. 세상이 원망스러웠어요. 그래서 저도 보란 듯이 돈을 벌어 막 쓰고 살고 싶었어요.”
  목청이 높아지며 흥분에 들떠 있다가 잠깐 얘기를 중단하고 그녀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냉장고 문을 열어 생수를 꺼내더니 한참 동안이나 벌컥벌컥 들이켠 후 내게 물을 권하고는 한쪽 구석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나도 그녀와 마주앉았다.
  “그래서 돈을 벌어서 막 쓰고 살았어요?”
  나는 컵을 받아들고 물 두어 모금으로 목을 축이면서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그런데 그녀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한참 회상에 젖어 줄거리를 술술 풀어내던 그녀가 나의 질문에 후닥닥 놀랐기 때문이다.
  “네에--?”
  나는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아뇨, 그냥 취직했었어요.”
  조금 전과는 달리 목소리가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표정도 거의 울상이었다. 순간적으로 혹시 술집이나 요정 같은 곳에 들어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언듯 들었다. 직업 마담들이 여대생들을 상대로 집요하게 미끼를 던진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인물로 보나 나긋나긋한 몸매로 보나 그들의 눈에 금세 띄었을 수 있는 미스 장이다.
  “그럼 그 친구 오빠는 지금 미국에 살아요?”
한동안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저렸다. 그리움이 아픔이 되어 뼛속까지 후비며 파고들었다. 그러나 세월이란 참으로 좋은 약이었다. 미스 장은 물속같이 차분한 얼굴로 말했다.
  “모르겠어요. 아주 옛날에 다 잊었거든요.”
  “그럼 둘이서 깊이 사랑한 게 아니었어요?”
  “그때는 뭐가 뭔지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 제가 그 사람을 참 많이 사랑했던 것 같아요.”
  암만해도 이번 여행 중에는 둘째와의 결혼 얘기는 안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친구한테 연락해서 만나면 될 텐데····.”
  “친구하고도 연락 두절된 지 오래됐어요. 그 친구도 저를 피하더라고요. 나중에는 저하고 너무 차이가 나버렸거든요. 결국 친구는 마음을 잡아 대학도 졸업하고 결혼도 잘 했어요.”
  “그런데 미스 장은 왜 아직 결혼을 안 했어요?”
  한참 질문을 하다 보니 왠지 쑥스러워졌다. 며느릿감으로의 점수를 다시 매개기 위해 저울질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점수가 아무리 깍인다 하더라도 미리 따놓은 점수가 워낙 높아 흔들릴 염려는 없다.

  그렇지만 둘째 얘기는 다음으로 미루기로 작정을 했다.
  “제게는 남자 운도 없고 결혼 운도 없나 봐요. 그 후로 어머니 병이 악화되어 많이 편찮으셨거든요. 어머니 약값 대고 그렁저렁 살다보니 몇 년이 후딱 지나버리더라고요. 제가 늦게까지 결혼을 못한 것도 다 어머니 탓 같고, 어머니가 제 앞길을 다 막아버린 것 같아 어머니가 원망스러웠어요. 어머니 말 거역하고 제 멋대로 살아놓고 결국은 그 책임을 어머니한테 돌렸으니 정말 저는 죄인이에요.”
  목소리가 울먹거렸다.
  “어머니는 눈도 못 감으시고 숨을 거두셨어요. 서른이 넘도록 결혼도 못 하고 있는 딸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생각되고, 또 이 넓은 세상에 저 하나만 달랑 남겨놓고 떠나려니 차마 발걸음이 안 떨어졌었나 봐요.”
  그녀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미스 장이 아닌, 완전히 딴 사람으로 탈바꿈을 하고 있었다.
  “아니, 이렇게 착한 미스 장이 나쁜 딸이었다니 도저히 이해가 안 되네.”
  “착하긴요. 저 착한 사람 아녜요. 죄 많이 지었어요.”
  젖은 목소리와 더불어 그녀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너무 죄책감 갖지 말아요. 부모님한테 암만 잘했어도 돌아가시고 나면 후회만 남는 법이에요. 자꾸 잘못한 일만 생각나는 법이거든····.”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미국에 이장까지 한 정성을 보더라도 미스 장은 효녀예요. 효녀.”
“저 효녀 아니에요. 돌아가신 다음에야 어디에 묻히든 그게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땅속에서 흙으로 돌아가는 건 똑 같은데 뭐 다를 게 있겠어요?”
  훌쩍거리던 그녀가 고개를 묻고 흐느껴 울었다.

  날이 갈수록 미스 장에게 빠져들어 어떻게 해서라도 꼭 둘째 며느리로 삼고 싶었다. 여행 중에 잠깐이라도 실망을 한 내가 이상했다. 서른여섯이나 되는 여자한테 그만한 과거도 없다면 그게 도리어 비정상이다. 둘째는 결혼을 한 경력이 있으니 그까짓 과거쯤이야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둘째한테는 이미 뜸을 들여놓은 상태라 휴가 맡아서 다음 달에 오게 돼 있다.
  날씬하고 얼굴이 예뻐야 한다는 것을 결혼 조건의 우선순위에 올려놓는 둘째이다. 거기다가 똑똑하고 마음씨도 고우니 아들이 홀딱 반할 것이 분명하다. 신이 났다. 둘째는 늘 그랬다. 첫 번 결혼은 실패했으나 재혼을 하면 어머니는 자기가 모실 테니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미스 장이라면 정말 딸같이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밖에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바람도 제법 불었다. 단단히 채비를 하고 우산을 들고 나서는데 며느리가 따라나오며 물었다.
  “날씨도 안 좋은데 어딜 가시려고 하세요?”  
  언젠가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이 생각나면서 며느리의 한마디가 고마움으로 가슴에 닿았다. 금세 다녀올 데가 있다고 말을 하고는 바삐 나가는데 며느리가 내 뒤통수에다 대고 큰 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제가 모셔다 드릴까요?”
  괜찮다고 손을 저으며 뒤를 돌아다보니 며느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서 있었다. 이제는 버스 타는 선수가 되었기에 날씨가 어떻든 간에 내게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마침 버스도 금세 와 한걸음에 달려갔더니 그녀가 막 문을 나서려는 참이었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허탕을 칠 뻔했다. 마음이 급해 전화를 않고 온 것이 불찰이었다.
  “요 앞에서 잠깐 누굴 만나기로 했어요. 이것만 전해주면 돼요.”
  미스 장은 바쁘지 않으시면 집에서 기다리라고 하면서 도로 들어가 손에 집히는 대로 비디오테이프를 하나 꺼내서 넣어주고 황급히 나갔다.  
시간이 남아돌아가 주체할 수 없는 처지이니 나야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는 몸이다. 아니 오늘은 꼭 기다려야 한다. 10분쯤 지났을까? 일이 30분 정도 지연되니 좀 더 기다려달라는 전화가 왔다. 비디오는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사제지간이 연애하는 판에 박은 줄거리이라 별 흥미가 없었다.
  
  갑자기 안방에 들어가 보고 싶은 출동을 느꼈다. 곧 며느리가 될 테니 자는 방도 들여다보고 싶었다. 손잡이를 살며시 돌리니 문이 열렸다.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아주 심플한 연한 밤색의 헤드보드를 머리에 이고 벽 한쪽에 작은 침대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같은 디자인의 화장대가 침대 발치에 놓여 있었다.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썰렁한 분위기였다. 잠깐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옷장 문을 열었다. 방 분위기에 비해 옷장은 화사했다. 밝은 빛깔의 옷은 별로 입지 않는 미스 장인데 화려한 옷들이 많았다. 다들 고급스러워 보였다.
  
  위 선반에는 핸드백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첫눈에 무지하게 많다고 느껴져 세어 보았더니 무려 열네 개나 되었다. 그런데 내가 준 핸드백 바로 옆에, 신기하게도 장식이랑 손잡이도 똑같은 핸드백 하나가 놓여 있었다. 까만색으로 색깔만 달랐다. 하도 신기해서 꺼내서 비교를 해보고는 얼른 올려놓았다. 다른 핸드백들도 내 것과 비슷했다.
  
  구두도 무지하게 많았다. 신발장 안에 있어야 할 구두들이 옷장 안에 있어 이상했다. 핸드백이 놓여 있는 선반 바로 아래에 선반이 또 하나 있었고, 그 위에 구두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모양이나 색깔이 핸드백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옷과 마찬가지로 다 고급품들이었다. 가난하게 살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녀의 과거가 베일에 감춰져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또다시 들었다.
  오른쪽으로는 서랍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서랍을 위에서부터 차례차례로 열어보았다. 스타킹이니 양말, 그리고 팬티들이 차곡차곡 개켜져 있었고 서랍 세 개는 텅 비어 있었다. 얼른 옷장 문을 닫고 화장대 서랍에 손을 댔다. 텅 빈 서랍 속에 뜻밖에도 사친첩이 한 권 들어 있었다. 바짝 호기심이 동했다.
  사진첩을 펼쳤다. 어머니인 듯한 아주 미인인 여자의 얼굴이 맨 첫 장에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친구들이랑 찍은 미스 장의 교복 입은 사진을 대충 보고는 빠르게 사진첩을 넘기니, 중간쯤에는 대학생 차림의 미스 장이 지금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여기저기에서 우수에 젖은 표정으로 매력을 풍겼다.
  혹시 친구 오빠라는 사람의 사진이 있나 하고 눈여겨보았으나 남자 사진은 어디에도 없었다. 몇 장을 넘기도록 남자 사진이라고는 한 장도 없었다. 이상할 정도였다. 아버지 사진도 눈에 뜨이지 않았다. 아버지 사진은 꼭 있으리라 생각하고 계속 장수를 넘겼다. 중간 정도쯤이었다.
  
  드디어 남자 사진이 등장했는데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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